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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의 난

last modified: 2015-02-22 17:34:47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1.1. 안록산의 난
1.2. 사사명의 난
2. 배경
2.1. 사회적 배경
2.2. 군제의 변화(군사적 배경)
2.3. 정치적 배경
3. 영향과 결과
3.1. 종결 이후
3.1.1. 전후 처리
3.1.2. 회흘의 전횡과 새로운 불씨
3.2. 이어지는 전란(763~765)
3.2.1. 토번의 장안 침략
3.2.2. 복고회은의 난(764~765)
3.2.2.1. 최고의 공로자 복고회은
3.2.2.2. 복고회은과 조정의 갈등
3.2.2.3. 복고회은의 난
3.2.2.4. 회흘과의 동맹, 토번의 참패
3.2.3. 의의
3.3. 대내적인 영향
3.4. 대외적인 영향
3.5. 그외

1. 개요

제국 중엽인 755년부터 763년까지 당현종부터 당숙종, 당대종까지 약 10년동안 벌어진 대규모 군사반란. don't wanna buy boycott 불매운동이 아니다!

'안사의 난'이라는 이름은 주동자인 록산(安祿山)과 후기 지도자 사명(史思明)의 성을 따온 것이며, 사사명을 배제하고 그냥 안록산의 난으로, 혹은 당시 연호를 따서 '천보(天寶)의 난'으로 부르기도 한다.

당시까지 중국 역대 통일왕조에서 있었던 반란 중 가장 대규모였고 그 파급력도 가장 컸던 전란으로, 사실상 당을 붕괴로 몰고가기 시작한 전란이었다. 이후 당은 잠깐 중흥기를 갖기도 하여 100여년의 시간동안 제국을 유지한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모습은 끝내 되찾지 못한 채 멸망해버린다.

1.1. 안록산의 난

755년 11월 10일 범양에서 거병한 안록산은 본거지에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15만 병력에 투항한 거란, 해의 기마병력 8천여를 선봉에 내세워 거병한다. 당은 초기 대응에 실패해 그 해 12월 낙양을 내주고, 다음해 동관과 장안까지 내주면서 당현종으로 파천하나, 이후 757년 칭제한 안록산이 수세에 몰리고 그해 자신의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하면서 세력이 약해지면서 일단락 된다. 자세한 것은 안록산의 난 참조.

1.2. 사사명의 난

당이 전후처리를 허술하게 하는 틈을 타 758년 사사명이 재봉기하여 759년 낙양을 점령하나, 761년 아들 사조의에게 살해당한후 세력이 약해져 결국에는 진압된다. 안록산의 난에 가려지는 감이 있지만 당조정은 이번에도 대처에 실패해 피해의 수준은 더 심했고, 역시 전후수습 과정에서 복고회은의 난으로 이어진다. 자세한 것은 사사명의 난 참조.

2. 배경

2.1. 사회적 배경

당 제국의 기본 사회체제인 '율령제'가 붕괴한 것이 가장 중요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율령제는 토지분배를 기본으로 한 균전제와, 균전제를 기반으로 한 조세제도인 조용조 체제, 그리고 마찬가지로 균전제를 기반으로 한 부병제로 이루어진 삼위일체제도로, 북위 시절부터 내려오던 여러 제도를 당 제국이 보완하고 연계시켜 완성시킨 것이다. 이를 토대로 당은 농민생활을 크게 안정시키고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켰으며 군비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가히 고대 ~ 중세 사회제도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율령제는 당 제국의 최전성기인 8세기 초중반을 기점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근본적인 원인은 호적에 오른 백성만 조세와 군역을 부여할 수 있다는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균전제 하에서 호구를 등록한 농민들은 명목상으로는 상당한 토지를 부여받았으나 실제로는 이미 인구가 지나치게 증가해 규정의 절반 이하에 달하는 토지만을 받았으며, 그 대가로 져야할 부담은 너무 컸다. 굵직한 것만 들어보자.

  • 한번 등록되는 순간 몇년간 변방오지에 무보수 자비부담으로 끌려간다.
  • 죽을 때까지 머리수대로 무거운 세금이 떨어진다.
  • 현지주민도 구하기 힘든 지방토산품을 대량으로 바치라고 압력이 들어온다.
  • 심심하면 부과되는 각종 잡세와 임시세금의 압박이 가중된다.
  • 역시 무보수 자비부담으로 험악한 공사현장에 강제로 끌려간다.

대체 누가 호구 등록을 하고 싶어하겠는가? 레알 호구 등록 덕분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율령제는 막대한 미파악 인구를 양산했고, 이것이 당 현종대에 들어서는 1 / 4 정도 되는 인구가 정부의 호구수 파악 대상에서 벗어난 상태[1]가 된다. 상당수는 조용조 제도에서 벗어나는 귀족의 사유지 및 사원전 아래로 들어갔고, 관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친 도호(逃戶)도 다수 있었다. 이에 대한 처벌조항도 존재했지만 막는데는 역부족이였다.

사실 율령제의 이러한 문제는 1000년 가까이 지난 대까지 이어지며, 강희제 ~ 옹정제 시기의 정은제라는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을 토지세로 통합해 이월한 제도가 시행된 후에야 해결되었다. 여담이지만 지정은제의 시행 이후 청의 호적에 등록된 인구 수는 자연 증가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폭증하는데, 이는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나 있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고,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게다가 유교 질서 하에서는 호구 수를 꼼꼼히 기록해 세금을 걷는 것을 오히려 학정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호적의 부실로 인한 전반적인 세제 구조의 붕괴는 후대에 오히려 더 강하게 나타나기까지 한다. 호적의 최대 40%까지 등록되지 않은 인구를 가산해 인구를 세기도 할 정도다. 심지어 등록되지 않은 호구와 은전의 색출을 기조로 총체적 개혁에 나선 장거정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죽은 뒤에 모든 영예를 박탈당했다.

조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니, 조선은 호적 조사에 등록되지 않은 인구의 비율이 중국보다 더 높았다. 특히 개마고원 일대로 숨어든 인구는 몇번을 호적조사를 해도 찾지를 못해서 골머리를 쌓았고, 현대의 추정으로는 조선시대에 호적에 올라와 있는 인구는 전체의 50% 이하로 여겨진다. 거기다 17세기 후반 이전까지 조선의 노비 비중은 30%가 넘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외거노비가 됨으로써 오히려 양인 호적에서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한 농민들이 있으리라 생각되며, 이 때문에 실제로 '비참한 생활을 하는 노비'의 수는 실제 등록된 수효보다 적었을 것으로 보이고 곳곳에서 그러한 예시가 확인된다. 동양의 노비가 서양의 노예와 등치되기 어렵다는 중요한 근거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대토지 소유자, 호족의 세력이 강성해진건 당연한 일이다. 이를 감시 감독해야 할 조정은 문제에 무관심해졌고, 또 문제를 해결할 힘을 잃었다. 천보 연간에 접어들자 이는 표면화되었다.

2.2. 군제의 변화(군사적 배경)

이 시기에 접어들어서 당의 부병제가 붕괴되면서 군제가 크게 변화한다. 자세한 것은 당/군제절도사항목을 참조.

2.3. 정치적 배경

직접적으로 안록산과 국충으로 대표되는 궁내 궁중권력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양국충은 양귀비의 사촌오빠로서 사촌동생을 등에 업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안록산은 변방의 절도사임에도 여러 공적이 있는 덕분에 장안에 자주 드나들며 현종의 신임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양귀비와 안록산이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소리가 나돌기도 했다. 그 와중에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던 재상 이임보가 병사했고, 궁중권력은 양국충이 장악했다.

… 그런데 양국충 이 인간은 재물을 모으는 재주(+재무 능력) 하나 빼고는 제대로 된 멍청이었다. 중앙군 7만여를 이끌고 남조[2] 원정을 갔다가 제대로 역관광당해 털리자 병력을 억지로 끌어모아 다시 공격했지만 이것도 완전히 개털려서 병력 손실이 20만에 달하는 엄청난 망신을 당한 것이다. 이뭐병…. 정치라도 잘하냐면 그건 더더욱 아니어서 대부분의 관직을 모조리 독점하고 뇌물 챙기기에 전념했으며, 황제도 아닌 주제에 매관매직에 열심히였다.

명색이 명군으로 불렸던 황제인 현종은 이임보를 필두로 하여 정국을 장악하고 있던 관롱 귀족세력에 대한 반격으로서 일부러 양국충의 이런 전횡을 눈감아주고, 또는 지원하기도 했다. 여기다 과거로 관직에 오른 비관롱계열 관료들은 그들이 정국에 등용될 수 있었던 것이 앙국충의 도움에 의한 것이였기 때문에 양국충의 전횡을 눈감아주었다.

절도사들의 힘이 점점 커가면서, 양국충은 주요 절도사 세력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고 느꼈으며 특히 안록산을 가장 경계했다. 안록산 역시 이임보 사후 이미 자체적으로 차근차근 군비를 증강시키며 반란의 기회까지 엿보고 있었다.

문제는 칼을 쥐고 있는 쪽은 안록산이었다. 천보 14재(년)[3] 최대최강의 절도사로써, 다수의 절수직을 겸직하고 이를 장기간에 걸처 역임하면서 동북변의 강대한 군사력을 자신의 사병으로 만든 것이다.

이시기, 내외의 절도사 및 금군 장수들의 명단을 보면 안록산의 힘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금군 장수들은 계급은 높았으나, 황제의 명령 없이는 실제 통솔할 수 있는 병력이 매우 적고, 절도사처럼 개인 병력을 많이 보유할 수도 없었다.

  • 범양(范陽)+평로(平虜)+하동(河東)절도사 - 안록산
  • 삭방절도사 - 안사순 [4]
  • 하서+농우절도사 - 가서한
  • 안서절도사+북정도호 - 봉상청[5]
  • 우금오대장군 - 고선지
  • 금오장군 - 정천리

보다시피, 안록산은 3개 절도사직을 겸직하면서 당 제국의 동북변의 모든 군사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가 통솔할 수 있었던 병력은 18만 3900명에 달해 10개 절도사의 총병력인 44만 6900명 중 약 38%에 달했고, 여기에 추가로 자신과 양부자 관계를 맺어놓은 이민족 중심의 수만명에 달하는 사병집단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안록산은 최소 5년 이상 절도사직을 유지하면서 저들을 모두 안록산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병집단으로 만들었고, 상당수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었다.

더구나 상황도 좋았다. 당의 중앙군은 부병제의 붕괴, 그리고 착기 제도의 실패로 인해 유명무실화되었으며, 개원 25년 장정건아제의 실시로 인해 모병제 체제로 돌아서면서 과거의 부병제 시절처럼 급할때 대규모로 동원할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위협이 될만한 다른 절도사들은 국경 방위 문제로 마음대로 움직이기 힘들고, 예비병력이라 할만한 단련병들은 그 질이 천차만별인데다 바로 직전에 남조 원정에서의 손실로 인한 손실이 극심하였고, 안록산은 이런 환경에서 거리낌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사실 안록산도 751년 평로절도사, 범양절도사 휘하 병력 10만여를 끌고 거란을 공격했다가 다 날려먹은 적이 있으므로 양국충보다 썩 나은 군재를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군대 지휘 경험이 풍부하다는 강점이 있었다.

사실 이런 분위기는 조정도 모르고만 있진 않았다. 천보 13재(년) 즈음이 되면 당현종 근저에서 현종을 보좌하던 내시 고력사가 "변방의 장군들이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 대단히 왕성한데 폐하께서는 장차 어찌 이들을 통제하시려 하십니까!" 고 고할 정도였다.

결국 755년 안록산을 조정으로 부르고 범양절도사직은 가순에게, 평로절도사는 여지회에게, 하동절도사는 양광홰에게 주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아직 당현종은 안록산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다.

3. 영향과 결과

당은 안사의 난을 정말 간신히 진압했으며 뒤이은 토번의 침공, 복고회은의 난 또한 곽자의의 맹활약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안사의 난은 간접적으로는 당이 멸망할때까지 그 영향을 끼첬으며, 직접적으로는 당헌종의 '원화중흥' 이전인 약 40여년동안 당이 수차례에 걸처 멸망의 위기를 겪게끔 하는데 큰 영향을 끼첬다.

3.1. 종결 이후

거진 10여년에 걸친 기나긴 전란이였던 안사의 난은 사조의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혼란은 멈추지 않았다. 반란의 뒷처리 문제는 상당한 시간을 소요했으며, 두번에 걸친 대규모 전쟁이 다시한번 당을 덮처 장안이 함락되기도 했다. 간신히 평화가 찾아왔을때 이미 동쪽의 번진들은 사실상 독립왕국으로 뿌리를 내린 상태였고, 이후 장기간에 걸친 번진과 당 중앙정부의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반란의 종결은 끝이 아닌 시작이였던 것.

3.1.1. 전후 처리

763년 윤정월[6], 당은 전란의 종결을 확인하고 전후처리에 들어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조의측에 붙었던 절도사들에 대한 처우. 당측은 이에 대해 원래 관장하던 지역을 대부분 인정해 주면서 용서하는 유화책을 사용한다. 이는 당의 국력이 지나치게 소모되었던 데다가 사사명의 아픈 기억 때문인 걸로 보인다.

19일, 당은 설숭을 상·위·형·명·자육주 절도사로 삼고, 전승사를 위·박·덕·창·영오주도방어사로 삼았으며, 이회선은 유주·노룡 절도사로 임명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조의가 임명했던 연의 번진의 이름을 바꾼 셈이므로 이는 이들이 항복하기 전에 절도사로써 지배하던 지역을 거의 그대로 인정한 것이였다. 거기다 이들의 항복을 받은 복고회은도 이들이 재반란을 일으킬 경우 반란을 평정한 자신의 공로가 퇴색할 것을 우려해 이들의 통치권을 인정해줄 것을 당에 요청함과 동시에 스스로 이들의 후원세력으로써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번진 병사들이 절도사를 제멋대로 세우는 관행도 꾸준히 이어졌는데, 산남동도절도사 내진이 비명에 간 후 그 휘하의 제장이였던 행군사마 방충이 군을 움직여 양주를 습격하는 등 도적화할 모습을 보이자 좌병마사 이소와 부사 설남양이 군을 이끌고 이를 막았다. 그런데 휘하 병사들이 우병마사 양숭의를 지휘관으로 추대한 후 이소와 설남양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당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손을 쓸 수 없었으며, 결국 양숭의를 양주자사·산남동도절도유후로 사후임명하고 만다.

4월 27일, 이광필이 '원조를 사로잡고 절동을 모두 평정하였다'는 주문을 올린다.

5월 25일, 하북의 여러 주들을 나누어준다. 유주·막주·규주·단주·평주·계주는 유주에서 관장하여 노룡절도사로 삼고, 항주·정주·조주·심주·역주는 성덕군에서 관장하여 성덕절도사로 삼으며, 상주·패주·형주·명주는 상주에서 관장하여 상위절도사로 삼고 위주·박주·덕주는 위주에서 관장에 천웅군절도사로 삼고, 창주·체주·기주·영주는 평로번진에 더하여주고[7] 회주·위주·하양은 택로번진에 더하여 주었다. 이를 통해 하북의 모든 지역은 절도사들이 관장하게 되었으며, 이는 여타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외에, 763년 7월에는 연호를 광덕으로 고첬으며, 보응원성문무효라는 존호를 받았다.

3.1.2. 회흘의 전횡과 새로운 불씨

이당시 회흘의 기세는 매우 강성했고, 당을 상당히 우습게 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정월 5일 밤에는 회흘인 15명이 황궁으로 돌진해 들어오자 문지기들이 감히 막지 못한일까지 벌어질 정도였고, 회흘군이 주둔했던 지역은 너무 심하게 약탈당해 조세 징수를 면제해 줘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였다.

이에 당은 빨리 회흘을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노력했고, 가한과 가둔을 높이고 휘하 장수들 또한 왕과 국공으로 봉함과 동시에 2만 호에 달하는 실봉을 덧붙여 주는 등 크게 후사하여 만족한 회흘로 하여금 돌아가게끔 했다.

그러나 회흘은 귀환하면서도 약탈을 자행했고, 지나가는 지역의 절도사들은 이런 애꿎은 피해를 막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때마침 진정·택로 절도사인 이포옥이 어떻게 해서든 회흘을 억제하려 시도하자 조성의 현위였던 마수가 자원하여 나아가 회흘군 지휘관과 대화하여 회흘군에 대한 군령권을 일시적으로 획득해 이를 통해 약탈을 억제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당덕종시대 당나라를 지켜낸 세 대장이라 일컬어지는 이성, 마수, 혼감 중 한명인 마수가 본격적으로 주목받는 사건이 된다.

회흘이 당을 무시한 것, 그리고 지독한 약탈을 자행한 것은 또다른 불씨를 낳았다. 회흘과 가까운 사이이자 전쟁 종결의 최대 공로자 중 한명인 복고회은이 다른 마음이 있다고 의심을 받기 시작한 것. 마수 또한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면서 이포옥에게 "복고회은은 공로를 세운 것을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며 그 아들인 복고창은 용감한 짓을 좋아하고 가벼운데, 지금 안으로 네 명의 장수(설숭(상위절도사), 전승사(천숭군절도사), 이회선(노룡절도사), 이보신(성덕절도사))를 세워놓고 밖으로는 회흘과 왕래하니, 반드시 하동과 택로를 넘볼 뜻을 가지고 있다."며 경고했으며, 하동절도사 신운경 또한 복고회은이 회흘을 전송하기 위해 태원으로 왔을때 문을 열어주지 않기도 했다. 이에 복고회은은 불만을 가지고, 또한 토사구팽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복고회은의 난이 일어나는 하나의 큰 원인이 된다.

3.2. 이어지는 전란(763~765)

사사명의 난까지 종결되면서 전란은 종식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이은 두번의 대규모 전란, 토번의 장안 침략과 복고회은의 난이 몰아닥첬고, 이 모든 전란이 끝나는 건 사조의가 죽은 뒤 2년 후인 765년이였다.

이 두 큰 사건은 결국 안사의 난과 연관되어 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안사의 난 기간동안 강성해진 토번과 약해진 당의 현실을 보여주고, 또한 절도사들이 당의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사건이 토번의 장안 침략이며, 안사의 난의 최고 공로자가 반란의 주동자가 되었고, 당-토번-회흘이 서로 물고 물리는 삼각관계를 형성함을 보여주는 것이 복고회은의 난이기 때문. 거기다 안록산의 봉기로 시작된 전란이 거의 쉼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이곳에 기술한다.

덤으로, 이 두 사건을 통해 곽자의는 그 위상이 하늘을 뒤덮었다 할정도로 절정에 다다랐고, 반대로 복고회은은 결국 반역자로 몰락해 사망했으며, 이광필은 그 중간 정도의 위치에서 일찍 죽는다. 이 세 인물이 안사의 난을 통해 군왕까지 오른 최고 공로자로 꼽힌다는 걸 생각하면 참 명암이 갈린 운명이 아닐 수 없다.

3.2.1. 토번의 장안 침략

당이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한참 정신없던 동안 토번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토번이 장안을 점령하고, 노략질한 사건이다.

가르친링 사후의 토번사를 살짝 보면, 안사의 난 이전까지는 당에게 조금씩 밀리고 있었던 상황이라 볼 수 있다. 개원연간에 이루어진 절도사체제로의 군제개혁과 그로인한 군사력의 강화는 오랫동안 토번을 압박했으며, 청해성 전역, 운남성일대, 사천성 북서부의 요충지가 당에게로 넘어가고 고선지의 활약으로 인해 서역지방도 대거 상실하는 등 토번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당히 어려운 상태였던 것.

그러나 안사의 난이 일어나면서 이러한 구도는 역전된다. 하서와 농우의 정예 부대가 동쪽으로 이동하자 토번은 여러 요충지를 수복했을 뿐만 아니라 꾸준히 당을 공격해 기여코 광덕 원년(763년) 대진관으로 들어와 하서와 농우의 모든 당의 영토를 점령하고 만다. 비록 난주를 통해 가느다란 선이 이어져 있기도 하나, 이는 회흘의 호의에 통행 여부가 갈리는 길이였기 때문에 사실상 절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서, 농우는 오랫동안 북방 유목민족과 토번을 맞상대하는 최전선이자 매우 중시되는 지역으로, 천보 연간의 10 절도사 중 2개가 이지역 방위를 위해 존재하며 거진 15만에 육박하는 병력이 배치될 정도로 중요한 곳이였다. 당은 이 지역에 수십개 주에 달하는 행정체계를 구축하기까기 하면서 중시했었으나, 그 모든 지역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하서와 농우의 상실은 곧 중앙아시아에 설치되었던 당의 군현과 절도, 즉 안서와 북정의 고립으로 이어졌다. 이 지역은 하서와 농우를 통해 당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서와 농우의 상실로 인해 회흘, 토번 양대 세력 사이에 섬처럼 고립된 것이다.

당숙종은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막대한 양의 선물(매년 비단 5만필. 토번의 기록에는 조공으로 기록된다.)을 토번에게 주어 침략을 막으려 했으나 토번은 후에 전승비에 기록하기를 '재물과 땅을 매년 바치기로 했다'고 하면서 지속적으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거기다 당 대종이 즉위하면서 선물을 주는 것을 중지하자 토번은 이것을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이러한 토번의 대대적인 침략은 하서와 농우를 모두 장악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하서, 농우의 침탈과 동시에 검남(지금의 쓰촨성(사천))지역에도 계속 공세를 가해 성도 근방까지 침탈해 들어온 것. 거기다 상시적으로 주던 선물(토번 입장에선 조공)을 당대종이 거부하자 토번은 20만병력을 동원해 관중으로 침공해 들어온다.

763년 10월 1일, 전란이 끝난지 얼마 안된 시기, 토번은 장안 서쪽의 경주(涇州, 감숙성 경천현)를 점령한 후 그대로 서진해서(경주자사 고휘가 향도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10월 2일엔 봉천과 무공까지 진격한다. 장안과 무공의 거리는 100km 미만. 거기다 그러나 당대에 정국을 좌지우지하던 정원진은 변방에서 날라온 급보를 계속 가로막았고, 결국 당 조정이 이를 파악한 것은 무공이 점거당한 이후였다.

이는 절묘한 빈집털이라고 할 수밖엔 없는데, 사조의의 난 진압과 사후 처리를 위해 금군의 주력은 신책관군용사(神策觀軍容使) 어조은의 지휘 하에서 하북에 있었다. 당의 다른 군대도 마찬가지여서 사실상 장안 주변에는 관군이 없었기 때문. 때문에 각지의 절도사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대의 권신으로 정국을 농락하던 정원진이 하도 절도사들의 원망을 많이 사서 심지어는 복고회은과 이광필마저 움직이지 않았다. 곽자의가 분투하지 않았다면 당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토번의 장안 침략시에 분투한 곽자의의 활약은 곽자의항목에 수록. 여기서는 토번이 10월 9일 장안에 입성했으며, 허수아비 황제까지 세웠다가 10월 21일 곽자의의 활약에 의해 장안을 떠났다는 사실만을 기록한다.

이후 당 조정 내에서는 이런 사태를 불러온 정원진을 문책하기 시작한다. 조정 내에서도 충용스러운 절도사들마저 움직이지 않은 것은 모든 이가 정원진을 원망했기 때문이라는 걸 파악하고 있었으며, 태상박사 유향은 '정원진을 처형하고 모든 환관들을 조정에서 내보내며, 신책병들의 지휘권은 대신들에게 붙이고 스스로 존호를 깎아 책망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만약 그래도 군대가 이르지 않다면 내가 능지형을 받아 폐하께 사죄하겠다는 요지의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다. 결국 11월 2일, 당대종은 정원진의 관직을 삭탈하고(그래도 이전에 이보국을 도와 당대종을 세우는 데 공이 있었다 하여 죽이지는 않았다.) 고향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로인해 환관에 대한 배척 분위기가 짙어지자 환관이였던 광주시박사 여태일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하기도 했다. 이후 정원진은 어떻게 해서든 복귀해보려고 몰래 여장'''하고 장안에서 돌아다니며 로비하다가 걸려서 강릉으로 유배되면서 사라지다.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당 조정 내에서 절도사들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자의적인 판단 내지는 감정에 따라 수도인 장안이 공격받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 특히 복고회은은 이전에 의심받은 일에 더해 이때 움직이지 않음으로 인해 사실상 반란의 길로 내몰리게 된다.

3.2.2. 복고회은의 난(764~765)

거진 7년여를 끌어온 안사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장 큰 공로자를 꼽으라면 곽자의, 이광필, 복고회은이라는 데 대부분 동감할 것이다. 실제로 당대에도 이 셋이 최고의 공로자라는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그중 한명인 복고회은은 사사명의 수급이 장안에 내걸린지 1년만에 스스로 반란 주동자가 되어 대규모 전란을 일으키고 마니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3.2.2.1. 최고의 공로자 복고회은

복고회은은 복고부(철륵 9성 중 하나) 출신으로,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위로 올라선 인물이다. 가장 많은 전란에 몸소 참여했고,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망산에서의 패전처럼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나, 공이 과보다 훨씬 더 큰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그는 여태까지의 전역에서 충용스러운 모습 또한 보여주었다. 안사의 난 기간동안 그의 일족 중 당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가 46명이며, 그 중에는 군율을 세우기 위해 자기 손으로 처형한 그의 친아들도 있다. 회흘을 회유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정략결혼시키기도 하는 등 그는 자신의 친자식들 또한 당을 위해 희생했던, 충심을 따지면 남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인물이였다.

당 조정에서는 물론 그를 후대하였다.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곽자의, 이광필과 함께 군왕직에 오른 세 인물 중 하나(대녕군왕)이자, 당당한 최고의 관직인 중서령직까지 거머쥔다.[8] 그의 여러 아들 중 가장 활약이 컸던 복고창 또한 어사대부에 절도사까지 올라갔다. 그만큼 그의 공로와 대접은 컸다.

3.2.2.2. 복고회은과 조정의 갈등

그러나, 이런 최고의 공로자였던 복고회은은, 전란이 끝나면서 토사구팽의 위기의식을 갖기 시작한다. 이때문에 그는 항복해온 절도사들의 후원자가 되면서 그들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복고회은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거기다 회흘이 심한 횡포를 부리면서 복고회은에 대한 잠재적인 불만이 쌓여갔고, 이를 느낀 복고회은은 더더욱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런 상호 불신이 극대화된 것은 역시 토번의 장안 침략 사건. 이때에 움직이지 않으면서 복고회은에 대한 의심은 거의 사실의 영역에 도달했다. 당대종 자신은 복고회은과 같이 싸운 전우이기도 하고 워낙에 당대종이 호구스러운 인물인지라 많이 봐주고 설득하고 나중에도 용서해주려 했지만 주변 상황 자체가 복고회은을 반란으로 몰고 갔고, 복고회은 자신도 조정을 끝까지 신뢰하지 않게 되면서 결국 멈출수 없게 된다.

시작은 하동절도사 신운경과의 갈등이였다. 회흘이 돌아갈때 마중나온 복고회은에게 태원의 성문으 열어주지 않은데 분노한 복고회은은 조정에 표문을 올려 신운경의 처벌을 요구함과 동시에 군을 전진배치시켜 신운경을 압박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낙봉선을 보내 화해시키려 했으나 신운경이 낙봉선을 후하게 대접하는 등의 로비를 행한데다 복고회은이 자신을 억류하려 한다고 오해한 낙봉선이 복고회은의 반란 의혹은 사실이라며 표문을 올려 갈등은 심화된다. 물론 복고회은도 이에 반박해 신운경과 낙봉선이 자신을 무고한다며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조서를 보낸다. 갈피를 못잡은 조정에서는 양측이 화해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보내나, 이는 복고회은으로 하여금 더더욱 분노하게 했다. 이에 복고회은은 다시한번 표문을 올려 자신을 변호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배준경으 사신으로 파견해 복고회은으로 하여금 조정에 올라와 스스로를 변호하라고 하였으나 복고회은은 스스로 내진처럼 될까 두렵다고 하면서 이를 거부했고, 이후 토번의 장안 침략때 움직이지 않는다.

3.2.2.3. 복고회은의 난

764년 1월 말, 복고회은은 결국 반란을 일으킨다. 자신과 그 아들, 복고창이 이끄는 삭방군을 움직여 태원을 공격한 것. 그러나 신운경은 진작부터 복고회은에 대비하고 있었고 시작부터 패배를 맛본다. 거기에 당 조정에서 1월 20일 곽자의에게 관내·하동 부원수·하중절도사직을 충임해 진압을 명하면서 말 그대로 순식간에 그 세가 약화된다. 곽자의의 복귀 소식을 들은 삭방군의 병사들은 "무슨 면목으로 분양왕(곽자의)를 볼 것인가."고 말하며 사기가 추락하고 대규모 이탈자가 생겨났다고 한다.

복고회은은 사기가 떨어진 삭방군을 이끌고 재차 태원을 공략하나 결국 실패하고, 물러나서 유차를 공격하나 이 또한 실패한다. 거기다 그의 아들이였던 삭방행영절도사 복고창까지 부하들에게 살해당하자 결국 300기의 기병만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탈, 영무에 위치한 삭방진의 처소를 지키고 있던 혼석지를 살해하고 영무를 장악한다. 남겨진 병사들이 곽자의에게 모두 귀부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영무를 점거한 복고회은은 재기를 시도한다.

3.2.2.4. 회흘과의 동맹, 토번의 참패

복고회은의 반란 시도는 결국 곽자의에 의해 실패했다. 그러나, 복고회은은 포기하지 않고 회흘과 토번이라는 강대한 세력을 끌어들여 역전을 노렸으며, 복고회은의 요청에 따라 두 세력은 764년 8월, 765년 9월의 두차례에 걸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개입한다. 그러나 복고회은 자신이 765년 병사해 버린다.

복고회은이 병사하면서 전쟁은 복고회은에 의한 내전에서 당, 토벌, 회흘의 삼국이 각축전을 벌이는 국제전으로 변모한다. 당은 토번 단독의 공세는 막아낼 수 있었으나 회흘이 토번과 손을 잡자 밀려서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곽자의가 단독으로 들어가 회흘과 역으로 동맹을 맺어버리는 위업을 달성하면서 상황은 역전, 결국 토번은 회흘과 당의 협공에 의해 대패해 버리면서 전쟁은 마무리된다. 자세한 것은 곽자의항목 참조.

3.2.3. 의의

이 두 사건은 당의 대내외적 현실을 보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안사의 난 이전의 당은 토번, 돌궐의 협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감당해냈으며, 특히 당현종 집권기의 당은 성공적인 방어와 군제개혁 이후 오히려 공세를 가해 결국 천보 연간에 돌궐 제2제국을 사실상 멸망시키고 토번 또한 수세로 몰아넣었으며 서역 일대를 경략하면서 실크로드 일대의 각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발해와의 관계에서 약간의 흠집이 났지만 애초에 발해는 토번, 돌궐에 비해 그리 당에 적대적인 세력은 아니었으며, 무왕 대무예가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을 바탕으로 문왕 대흠무가 당에게서 발해국왕의 칭호를 받으며 그 세력을 인정받은 후로는 오히려 친당적인 색채를 띄었다.

그러나, 십여년에 걸친 기나긴 전란이 종결된 후의 당은 완전히 쇠락한 모습을 보인다. 전란과 이후의 절도사들의 반독립국화로 당의 국력손실은 엄청났으며, 절도사들의 지원이 없다면 토번이나 회흘 하나를 감당하기도 버거운 모습을 보였다. 특히 토번의 위세는 강대했으며 당은 토번을 억제하기 위해 결국엔 회흘, 남조, 아바스 왕조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중앙아시아 전역을 감싸는 대포위망을 만들어야만 했다. 이는 당이 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을 상실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로인해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엽의 당의 정책은 후방의 절도사들을 최대한 통제하면서 토번, 회흘과의 외교를 통해 남은 당의 세력을 유지하고 당에게 가해지는 공세를 억제하려는 것이 되며, 당덕종 중기의 대규모 전쟁 외에도 중소규모의 전쟁은 계속되게 된다.


3.3. 대내적인 영향

안사의 난이 당나라 내에 미친 가장 핵심적인 영향은 율령제의 파괴와 지방통제력의 약화이다. 균전제, 부병제, 조용조라는 제도적 뒷받침을 받는 율령제는 그 세가지가 모두 무너져 내리면서 형식적인 것으로 전략했고, 급격한 인구감소와 토지대장 및 호적부의 손실, 난립한 절도사들이 호적부를 중앙에 올려보내지 않고 그들 자신이 그걸 가진채 조세와 행정을 자의적으로 행한 것, 전란으로 인해 황폐해진 점이 결합하여 당의 재정은 매우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당은 조용조 대신 양세법을 도입하고, 소금 전매를 유지하면서 재정을 지속적으로 확충한다. 그러나 이는 혹독한 징세를 통한 재정확충이였기에 결국 최종적으로 당이 망하게 되는 원인 중 한가지가 된다.

그러나 율령제보다 더 큰 문제는 내지번진의 난립이였다.

안사의 난 이전, 천보 시대의 10명의 절도사(천보십절도사)들은 그 군사력은 강대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 통치 영역이 매우 협소했다. 4개 절수를 동시에 역임하고 27만에 달하는 거대한 군대의 통솔권을 가져 당 역사상 장수로써는 곽자의와 함께 최대의 군권을 휘둘렀던 왕충사가 직접적으로 통치하던 주는 고작해야 15개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러나 내지번진은 그와 달랐다. 중원 내부에 만들어진 내지번진들은 큰 번진의 경우 7, 8개 주에 달하는 강역을 지배했으며, 평로치청번진이나 노룡번진, 산남동도번진처럼 10개 이상의 주(이정도면 어지간한 나라 이상의 강역이다.)를 지배하는 거대 번진도 존재했다. 이러한 내지번진은 중국 전역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사실상 기존의 통치체제인 주와 현 위의 상급 광역지배기관으로 군림했다.

거기다 이들은 영역 내의 조세와 호수를 자의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고, 마음만 먹는다면 자기 영역의 독립세력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실제로 원화중흥 이전까지 당나라의 중앙정부에 조세와 호적을 바치지 않고 단지 명목상으로만 충성하면서 독립세력화한 절도사들의 지배영역은 당시 당의 강역 전체의 절반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다 이런 절도사들은 외부세력의 힘까지 빌리려 들었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 중앙정부에서도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영토 할양을 포함해 막대한 재화와 이권을 넘겨주는 모습도 보였다. 토번과 회흘은 이를 통해 계속 이득을 받아 챙겼으며, 발해와 신라 또한 당의 요청에 따라 대규모로 군을 파견한 기록이 존재한다.

'원화중흥'을 이룩한 여러 재정개혁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세율을 통해 백성들을 쥐어짜고, 이를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강대한 금군을 편성한 것인데, 이런 식의 수탈이 일어난 이유 또한 번진의 난립으로, 절반밖에 남지 않은 영토에서 나머지 절반을 장악한 절도사들을 제압하고 외적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 더해, 환관들의 군권 장악 또한 이때부터 이루어졌다. 이보국, 정원진, 어조은 등 이시기에 권세를 누린 환관들은 모두 군권과 군 인사권을 움켜쥐고 있었으며, 이때문에 황제도 이들을 함부로 제거하지 못했고, 상황이 된 당현종은 심지어는 유폐된 상태로 죽었다. 당대종이 어조은을 숙청하는 데 성공한 후 금군의 지휘권을 회수했지만 이는 이미 전례가 되었으며, 당헌종이 다시 환관에게 군권을 부여하면서 환관들의 천하가 시작된다. 이들은 중앙에서 각종 부정부패를 자행했으며, 안그래도 고세율이였던 당 중후기의 조세정책은 부정부패와 가렴주구에 의해 심하게 망가져 그 부담은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결국 절도사들의 난립, 이들을 제압하기 위한 고세율과 소금 전매, 환관들의 전횡과 그로인한 부정부패가 세트로 겹치면서 당을 멸망시키는 반란, 황소의 난이 일어난다.

다만 실제로 이시기에 존재하는 당나라 견문록이라든가 여행기 같은 걸 보면 번진들이 난립하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거나, 그걸 제압하기 위해 고세율의 수취제도를 구축한다고 해서 무슨 생지옥이 펼쳐지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이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는 시기를 전후로 해서는 몰락한 민생과 그로인한 농민봉기가 나타나지만, 번진 난립시기나 이를 평정한 원화중흥 초반에는 이런 일이 드물었으며, 그 이전의 번진 난립기에도 어느정도 질서가 성립한 후에는 그럭저럭 살아갔던 듯 싶다.

한편, 문화적으로는 당이 왕조의 특징이였던 국제성과 개방성을 상실해 가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전까지 당은 매우 개방적인 사회여서, 당현종 사망시에 당에서 관리로 일하던 이민족들이 수백명에 달할 정도였고, 당현종이 장안에서 파천할때 태자를 분조로 보내면서 '서북 사람들에게 잘 해 줬으니 그들을 힘으로 쓸 수 있을 것'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인종 차별이 적고 개방적인 사회였다. 그러나 반란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개방성은 차츰 사라져 갔고, 문화적으로도 개방적이고 국제적이던 것이 차츰 폐쇠적으로 변해갔다. 처음에는 , 이고 등의 고문파들이 등장해 불교를 비판했고 845년 당무종의 회창폐불으로 상징되는 대대적인 불교 탄압 사건이 바로 그것. 이로인해 교종 불교는 쇠퇴하고 대신 선종 불교가 이 공백을 메우며 성리학의 완성 이전까지 중국 사상계를 이끌게 된다. 경교(네스토리우스교)도 마찬가지로, 원화중흥 이전에는 대진경교중국유행비가 세워지는 등 그 세가 강성해지기도 했으나, 845년에는 폐불 정책때 덤으로 같이 탄압당해 사실상 중국에서 소멸한다.

그나마 상업은 쇠퇴하지 않고 으로 이어졌다. 황소의 난 당시 광주에서 황소군에 의해 살해된 회회인(아랍인)의 수가 거의 10만여에 달할 정도였다고. 그러나 이런 장거리 무역 또한 점차 약해지고 신라 등과의 근해 교역이 이를 대체하게 된다. 한국사에서 신라방청해진이 한참 전성기를 맞던 시기가 당과 신라의 전성기였던 8세기 초가 아닌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초까지였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발해도 내지는 엔닌의 중국 여행과 법화원의 건립과 같은 일이 이때에 일어난 것.

3.4. 대외적인 영향

국제적으로 당은 사실상 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당현종 시기에 당은 돌궐 제2제국을 붕괴시키고 토번에 대해 우세를 점하며 실크로드 각국의 통제권을 거머쥐는 등 중앙아시아 국제정세 측면에서 주도국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시기 회흘은 아직 통일 유목제국으로 성장하지도 못했다. 탈라스 전투의 패전 이후 아바스 왕조에게 살짝 밀리긴 했으나 이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여전히 상당수 서역 국가들은 당의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안사의 난은 당의 주도권을 박탈했다. 회흘은 통일 유목제국으로 성장했고, 토번은 서역 각국을 아우르며 중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다. 영토의 절반을 통제 못하는 당은 이들 중 하나를 막기에도 버거웠으며, 토번의 침략으로 인해 섬처럼 고립된 안서, 북정지역을 어떻게 해서든 지켜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에 당은 회흘, 남조, 아바스 왕조를 끌어들여 토번에 대한 대포위망을 구축해 토번을 억제했으며, 곽자의와 그 뒤를 이은 이성, 마수, 혼감의 활약으로 인해 토번이 동쪽으로 침탈해 오는 것을 저지하였다. 이후 회흘은 심각한 역병으로 약화되고, 토번은 내부 정쟁으로 인한 반란세력이 연달아 등장하여 그 세가 약해지지만, 대신 남조가 거듭 세를 확대하여 당의 서남부 일대에 상당한 위협이 되기도 했다.

이런 국제환경 속에서 이득을 챙긴 것은 발해라 할 수 있다. 발해 문왕은 이 과정에서 '발해국왕'의 칭호를 받고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발해를 전성기로 이끌었고, 당은 하북지역의 번진들에 대한 견제책으로 발해를 우대하였다.

신라 또한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당과의 무역이 활성화되는 등 이득을 챙길만한 여지가 많았으나, 혜공왕이 들어서면서 자체적으로 말기적 증세를 나타냈기에 그닥 이득을 챙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은 신라에 대한 대우를 토번과 동급인 최상위 수준으로 했고, 많은 유학생들을 배출했다.

3.5. 그외

이 시기에는 바로 전 '개원의 치' 시대까지 이름을 날리던 문필가들 또한 살아있을 때라, 당의 문학 작품을 공부하면 이 시기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다.

두보는 장안이 점령되고 고향에 갈 수 없자 그리운 심정을 노래한 '춘망'을 지었다. 또 그의 시 '강남봉이구년'에서 당의 중흥기와 기왕 이범이 이구년을 매일같이 불러 놀던 시절, 그리고 안사의 난으로 망가진 나라와 늙어버린 두보 / 이구년이 만난 시절이 일치함을 생각하면 세월무상을 느낄 수 있다. 이태백의 경우 안사의 난 사이에 일어났던 영왕 이린의 난에 가담했다가 귀양가서 죽을뻔했다가 곽자의의 요청으로 간신히 용서받았다. 한편 이 시대 사람은 아니지만 백거이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피란을 '장한가'로 노래했다.

지방 세력을 끌어들인 국가 중앙 세력의 반란, 그리고 그로 인한 혼란으로 비롯된 1세기 뒤 쯤의 군벌 난립 등은 같은 시대를 보내던 신라와 무섭도록 일치한다. 반면 발해의 경우 이 시기 }문왕 대흠무]의 통치 아래 전성기를 맞고 있었으나, 상경과 동경으로의 천도가 안사의 난으로 인한 혼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 또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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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는 당 중기의 학자인 두우가 통전에서 주장한 수치. 실제 호구수를 1300~1400만 호라고 기술하였다. 출처는 '중국의 역사 - 수당오대'(구리하라 마쓰오 외 지음.)
  • [2] 南詔, 지금의 윈난 성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국가. 대리국의 전신
  • [3] 당현종은 천보 3년부터 년年 대신 재載(실을 재)를 쓰게 했다.
  • [4] 안록산의 혈족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 [5] 고선지가 가장 신임하던 부하로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 패전 책임을 지고 안서절도사 직에서 물러나면서 봉상청에게 직을 넘긴 것이다.
  • [6] 1월은 1월인데, 중국 사서에서는 음력을 쓰다보니 윤달이다.
  • [7] 이로써 평로치청번진은 총 10개의 주를 관장하게 되었다.
  • [8] 당은 상서령을 전통적으로 임명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