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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해전

last modified: 2015-10-28 18:27:48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출격! 발트 함대!
3.1. 준비
3.2. 이동
4. 일본의 준비
5.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머나먼 길
6. 전투 개시
7. 결과
8. 영향
9. 기타
10. 관련항목

1. 개요

러일전쟁을 사실상 끝낸, 당시로선 세계 최대규모의 해전. 세계 최대규모의 해전 타이틀은 약 10년 후에 유틀란트 해전에게 뺏긴다.

한국에서는 대한해협 해전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한반도와 큐슈 사이를 포괄하는 광역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 대한해협 중에서 쓰시마 섬과 일본 본토 사이의 해역인 동부 해협에서 벌어졌으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쓰시마 해전이 맞다. 일본에서는 도주한 러시아 군함들을 추적하여 동해상 곳곳에서 소탕한 것까지 포함하여 일본해 해전이란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한국내 일부에서 사용된 동해 해전은 사실 일본해 해전을 그냥 말만 바꾼 것.

2. 배경

러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 주특기인 일본군답게(…) 러시아의 주요 군항 뤼순이 기습받아 태평양 함대는 큰 타격을 받아 사실상 항구에 봉쇄된 상태였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고받은 러시아 정부는 태평양 함대의 봉쇄를 타파하고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하기 위한 획기적인 대책을 강구했다.

그것은 바로 본국으로부터의 증원함대였다. 러시아는 당시 태평양 함대 외에 흑해발트 해에 함대를 두고 있었는데, 흑해 함대는 오스만 제국에 대처해야 하는데다,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의 군함 통과를 다른 열강이 용납하지 않아서 투입이 불가능했다.

결국 러시아는 자국이 보유한 최강의 함대인 발트 함대를 전격적으로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어, 지난 수백년간 러시아의 가장 막강한 해상전력으로 군림해온 히든 카드의 투입이었다.

3. 출격! 발트 함대!

3.1. 준비

러시아는 해군 중장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발트 함대를 제2태평양 함대로 개칭했다. 당연히 기존의 태평양 함대는 제1태평양 함대로 개칭되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1877~78년에 있었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크고 작은 공훈을 세웠으며, 세계 최강의 해군을 가진 영국에 해군무관으로 파견되어 신식 해군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 편이었다. 이후 차르의 눈에 들어 주요 해군 관련 행사에는 늘 참여하여 성공적으로 함포사격 시범이나 해상기동을 선보인 인물이었다. 거기에 개인적으로도 부패와 거리가 멀었고, 부하들을 아껴 곤궁한 부하들에게 자기 봉급을 일부 떼어줄 정도이니 수병들의 존경심도 높았다. 즉, 인선 자체는 상당히 괜찮은 인물이였다.

기본 전략은 간단했다. 투입 가능한 배는 머나먼 극동으로 모조리 보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잔존한 제1태평양 함대 전력과 합세한다. 이후 압도적인 해상전력을 바탕으로 일본군 함대를 격파 내지는 못해도 공세적 작전은 못하게끔 하여 제해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러면 본토에서 주 전장인 만주까지 해상을 통한 보급로에 의존해야 하는 일본군은 보급로가 마비될 것이고, 일본의 해운도 붕괴되어 알아서 GG칠 것이 분명했다.

3.2. 이동


1904년 10월 14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의 리바우 항에서 출발한 제2태평양 함대가 마침내 10월 15일, 크론슈타트 해군기지를 떠나 일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차르는 로제스트벤스키에게 노후함들을 수리하여 제3태평양 함대를 편성해 증원시킬 것을 약속했고, 이후 이 함대가 합류했을 때 제2태평양 함대의 총 전력은 전함 7척, 순양함 7척, 보조순양함 5척, 구축함 9척등 총 38척의 전투함과 26척의 수송함 그리고 승무원 14,000명으로, 당대의 대함대였다.

하지만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대형 사고를 치는데, 11월에 도거 뱅크 해역에서 발트 함대가 엄한 어선단에 포격질(…)을 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당시 러시아 첩보기구에는 일본군 어뢰정이 유럽에 도착해서 함대의 주요 행선지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온 상태였다. 일본 해군에게는 유럽까지 갈 능력이 없었으니 당연히 헛소리였으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러시아 함대는 극히 조심스러워했고, 결국 북해에서 물고기 잡고 있던 영국 어선들에게 쾅! 거기다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는 야간이어서 함정식별이 어두웠고, 하필이면 어선의 기동이 영락없이 어뢰정에 의한 전함 측면 뇌격 시도와 흡사했기 때문에 오해할만 했다. 이 때문에 외교문제가 발생하였으나, 그 외에는 별 일 없이 항해했다. 이후 스페인의 비고에서 함대가 나뉘어진다.

이후 이동은 나름 순조로워 함대는 11월 6일 탕헤르를 통과, 11월 12일 프랑스령 다카르(1960년 독립한 세네갈의 수도)에 도착하여 보급을 마친 후 계속 항해하여 12월 1일 리브르빌, 12월 초중순에 그레이트피시만과 뤼데리츠를 거쳐 12월 29일 마다가스카르 인근의 생트마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1905년 3월 16일, 함대는 생트마리 인근의 노지베 섬에서 출발한다. 즉,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고작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무려 두달 반이나 걸렸단 소린데, 배후에는 뒷사정이 있었다. 사실 노지베에 도착한 것은 1월 초순이였으며, 함대는 이곳에서 뤼순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들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발트 함대는 이곳에서 2개월 동안 발목을 잡히게 되는데, 그 원인은 연료 보급 문제였다. 제2태평양 함대는 독일의 함부르크-아메리카 석탄선(하팍로이드)과 전속 계약을 맺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계약이 노지베 섬에서 만료되었다. 그러나 독일이 계약 연장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옴으로써, 함대는 계약이 체결될 2개월 동안 꼼짝없이 발이 묶이고 만 것이다. 열대의 더위와 익숙하지 않은 음식, 그리고 풍토병과 맞서 싸우던 함대의 장병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였다.

우여곡적 끝에 노지베를 출발한 함대는 뒤이어 분견대와 합류하여 4월 8일에 말라카 해협에 도달했고, 4월 14일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의 캄란항에 도착해 다시 석탄 등을 보급받았다. 5월 9일에는 제3태평양 함대와 합류하여 총 38척으로 늘어났으며, 캄란항에서 98km 북쪽에 있는 반 퐁항에 다시 기항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지구를 반바퀴 돌아올 때까지 탈락한 함선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유로 로제스트벤스키에 대한 인정은 세계적으로 매우 높았다고 한다.

4. 일본의 준비

일본 연합함대의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발트 함대가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면 전쟁에서 절대 못 이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본 제국이 전쟁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초반 기습에 의한 절대적인 제해권 확보에 있었다. 만약 발트 함대가 온전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면 그 절대적 제해권은 단번에 무너지며, 일본 함대로는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다.

다행히 발트 함대가 마다가스카르에 머무르고 있던 1905년 1월 뤼순 요새가 함락되고(203고지 참조) 태평양 함대의 잔존 세력이 모두 무너지면서 도고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우선 태평양 함대와 발트 함대의 합류를 막아내어 상대해야 하는 전력을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발트 함대가 오는 동안 일본 함대는 대대적인 정비와 수리를 통해 최후의 일전을 시도할 수 있었다.

도고는 발트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가기 전에 격파해야 승산이 있다고 봤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함대가 정상적일 리는 없다. 보급에도 문제가 있고, 선박들도 어느 정도 정비가 필요하지만 그런 문제는 블라디보스토크 입항 이전에는 해결될 수 없다. 즉, 입항 이전에 러시아 함대와 조우하면 러시아 함대는 악조건 속에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 함대는 최상의 조건에서 교전이 가능했다.

5.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머나먼 길

제2·3태평양 함대의 총괄 지휘권을 쥔 로제스트벤스키는 반퐁항을 출발하기 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한 항로를 두고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기함 '수바로프'호에 주요 사령관과 함장을 불러모아 작전 토의를 하였다.

결국 모든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하느냐 이를 막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 점에서는 도고가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 로제스트벤스키에게는 3개의 선택지가 있었고, 도고는 방어하는 입장으로서 그 3개 중 하나를 고르고 천운에 맡겨야 했다.

그 3개는 각각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대한 해협 및 쓰시마 해협, 혼슈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있는 소오야 해협이었다. 이 3개를 모두 틀어막기에는 일본 함대의 전력이 부족했다. 함대를 분산했다가는 각개격파만 당하고 러시아 함대는 그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할 것이 분명했다.

소오야 해협으로 들어서자는 의견과 큐슈, 시코쿠, 혼슈 연안을 공격하면서 쓰가루 해협을 통과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대부분의 참모진의 의견은 일거에 대한 해협 -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는 것이였으며, 이미 함대가 지구 반바퀴 수준인 약 28,800km을 항해한 결과 모두가 지쳐있어 전투력이 크게 떨어져있던 걸 알고 있던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의 선택 또한 대한 해협 - 쓰시마 해협이었다. 나머지 2개의 대안에 비하면 거리가 가장 짧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캄란 출항 이후 더 이상 보급받을 수 없는 석탄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는 증기선 시대였고, 러시아의 해외 식민지가 전무한 상태에서 석탄 보급은 함대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다. 지구 반 바퀴 도는 동안에는 동맹국인 프랑스 항구에서 석탄을 보급받았지만, 이마저도 프랑스의 다른 동맹국인 영국의 압력으로 여의치 않았다. 영국이 방해를 한 이유는 영일동맹을 맺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서의 어선 포격 사건의 보복 겸 해서 방해를 한 것이다. 물론 러시아도 자체적인 석탄 보급선을 운용하기는 했지만 이 역시 석탄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했다. 대신 로제스트벤스키는 일부 함선을 다른 곳으로 보내어 상선단속 활동을 벌여 일본측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기만전술을 썼다.

이로 인해 소오야 해협과 대한 해협을 놓고 고심 중이던 일본 진영 참모진들은 대부분 발트 함대의 항선지를 오야 해협을 예상하고 거기를 지키기로 결정하였으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생각은 달랐고, 또한 확고했다. 그는 참모진의 결정을 뒤엎고 대한 해협(정확히는 대한제국진해)에 주력함대인 전함 4척, 순양함 8척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함대가 출현하지 않자,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대본영에 쓰가루 해협으로 이동하고자 한다며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아직 정신이 박혀있던 대본영은 좀 더 기다려보자며 도고를 달랬고, 그 직후 러시아 함대의 석탄보급선이 상하이에 입항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석탄보급선이 함대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것은, 러시아 함대가 최단루트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고 제독은 전 함대를 진해만에 집결시키고 일전을 기다렸다. 한편 5월 17일에 반퐁항을 출발하여 대한해협으로 향하던 제2태평양 함대는 전투를 피하기로 결정하고 5월 25일경엔 속력도 늦추고 무전도 끊었으며, 마침 대한 - 쓰가루 해협에 짙게 낀 안개와 야음을 틈타 모든 함정의 탐조등도 끈 채 대한 해협 통과를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결정이 당시 해전 역사상 가장 큰 패배를 불러오게 되었다.

6. 전투 개시


  • 극동에 제 2 태평양 함대가 적시에 도착했을 때 함대 세력 구성[1]

함형 러시아 일본
제 1 태평양 함대[2] 제 2 태평양 함대[3] 연합함대
전함 7 8 15 8
장갑순양함 4 1 5 8
연안 방어 장갑함 - 3 3 -
장갑함 계 11 12 23 16
순양함 7 8 15 15
구축함 및 어뢰정 37 9 46 63


5월 27일 새벽 2시 45분경, 발트 함대의 병원선인 '오렐호'[4]가 짙은 안개 속에서 밝게 켠 등불을 경순양함 시나노마루(信濃丸)가 발견했다. 군함의 조명을 모두 끈 상태에서 병원선이 등화를 밝힌 이유는 국제법상 병원선은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는 대신 등화를 밝히고 정해진 도장 상태를 유지하는 등 병원선의 의무를 수행해야 병원선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측의 실수는 병원선을 함대에서 분리해서 다른 경로로 보내지 않고 약간 거리는 벌여놓았지만 함대와 비슷한 항로를 유지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병원선을 발견하고 이를 은밀히 관측하던 시나노마루는 4시경, 대규모 러시아 함대를 확인하고 급히 본대에 타전했다.

러시아 함대 발견 소식을 들은 도고는 즉시 전 함대 출격명령을 내렸다. 조심스레 러시아 함대를 추적하던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러시아 함대가 해협의 병목지역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오후 1시 55분, 도고는 기함 미사카 미카사에 전투개시를 알리며, Z기를 게양했다. [5]

"황국의 흥폐, 이 전투에 달려 있다. 각 대원은 한층 분발 노력하라."

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군가 본해해전(日本海海戦). 소개된 음원의 1분 47초에서 1분 56초 사이에 당시 기함 미카사의 전투개시 신호의 내용이 가사로 활용되어 있다.

원래 도고는 어뢰정을 중심으로 하는 전법을 쓰려 했으나 해협의 거센 풍랑으로 소형함인 어뢰정의 작전이 어려웠다. 대신 도고는 그 유명한 T자 전술을 들고 나왔다. 일본 함대가 T자 진형을 취하는 동안 러시아 함대는 선제공격을 개시했으나, 러시아 함대는 주로 거리 문제로 명중탄을 얼마 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새벽 이후 일본 함대와의 꼬리잡기와 기동전 와중에 함대 진형이 3열로 바뀌면서 일본 함대가 진형 정비를 마치는 시간동안 충분한 화력집중을 하지 못했다.

여기에 대해 러시아측 사료에 기초한 러일전쟁사에서는 구체적인 통계를 들어 러시아 함대의 명중율이 높은 편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측 사료를 토대로 작성된 언덕위의 구름에서는 실제 참전자의 증언을 토대로 자이로스코프가 탑재되지 않은 당시의 함선으로는 알파 선회라고 알려져 있는 180도 회전중의 함선에 명중탄을 집중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함대의 최대 기회라 할 교전 초기에 명중탄을 내지 못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T 진형이라고는 하지만 양측이 이동중이므로 앞을 가로막는 형태는 무리고, 러시아 함대가 취하는 2열 종진의 앞부분만을 일방적으로 포격거리에 두는 기동을 최초의 알파 선회 덕에 꾸준히 유지하면서 뒷부분의 러시아 함대는 사거리 밖에 놓은 상태가 되었기에 러시아측 말대로 러시아 함대의 명중률이 좋다고 해도 함대의 일부만 사격이 가능한 상태라 함대 전체로 보면 전체적으로 적 함대 명중탄을 별로 내지 못한 것이 훈련부족보다 더 큰 문제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

게다가 일본 함대는 14노트로 기동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함대는 11노트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속도의 차이가 러시아 함대가 일본 함대의 화력집중을 허용하게 된 결정타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러시아 함대에 지옥이 되어 돌아왔다.

5분만에 진형정비를 마친 일본 함대의 집중포화가 러시아 함대를 강타했다. 사실상 그 이후로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기함 수브로프가 제일 심한 집중포화를 받았으며, 가장 먼저 침몰한 것은 2전대의 전함 오슬라비야였다. 도고는 함대 지휘부부터 무력화시킨다는 계획으로 모든 화력을 기함 수바로프와 고위급 제독들이 탄 함선에 퍼부었다.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가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으며, 부하들이 사령관을 어뢰정으로 옮긴 이후에 기함 수브로프는 침몰했다.

설상가상으로 함대 지휘부가 마비됨에 따라 러시아 함대의 대응력은 더 떨어져서 전체 해전 중 일본 제3전대를 1전대가 따라잡은 후반에만 잠깐동안이지만 반포위 진형이 형성되어 십자포화까지 난무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래서 동일 오후 7시 40분, 러시아 함대의 잔존함들이 도망치고 어둠이 깔린 이후에야 전투가 종결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전함들이 의외로 쉽사리 격침당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은 일반적인 함선의 형태인 영국식 선체를 사용한 전함을 쓴 반면, 러시아는 프랑스식 텀블홈 형식의 선체를 사용한 전함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엄격히 이야기한다면 이 시기까지의 영국제 군함들도 당시 선박 건조 기술의 한계로 인해 상갑판이 흘수선보다 좁았다. 다만, 그 격차가 미미했을 뿐이고 주의해서 쳐다보아야만 선체측면이 경사져 있음을 알 정도이다. 프랑스식 텀블홈은 대놓고 흘수선이 상갑판보다 훨씬 넓은 데다가 상갑판에서 흘수선으로 이르는 측면은 곡면으로 되어 있었다.[6]

텀블홈 방식은 흘수선이 가장 넓고, 그 위로 갈수록 피라미드 형상으로 선체가 좁아지는 형태이며, 자연스럽게 경사장갑을 가지는 장점이 있다. 당시는 철갑선의 기술이 발달한데 반해 함포의 철갑탄은 발달이 뒤쳐져서 하베이 강을 중요부위에 두른 전함은 실질적으로 침몰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바로 전년도의 황해 해전에서도 뤼순 주둔 함대는 격렬한 포격전을 치르고도 침몰한 전함은 없었다. 상부구조가 무력화되기는 했지만 기관부 자체는 무사해서 웨이하이까지 도주하는 것도 가능했으므로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전함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도망칠 수만 있다면 된다고 생각했고 이 부분이 당연히 어려우리라 생각한 해전에서 믿는 구석이었을 정도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갑판이 좁아져서 상부구조물을 높은 곳에 올려야 하므로 무게중심이 올라가며, 조금만 침수되거나 배가 흔들리면 부력을 빠르게 상실해서 침몰을 가속화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또한 어뢰정을 사용하기 힘들게 만들 수준의 높은 파도가 하베이 강이 둘러지지 않은 수선하부까지 일시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낳아 침몰로 이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덤으로 러시아의 전함들은 장갑을 강화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비배수량에서도 설계흘수선을 1m 이상 초과하는과적상태였던데다가, 심지어 해전 직전에는 원래 용적량보다 훨씬 많은 대량의 석탄을 적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흘수선이 추가로 2m 가까이 더욱 깊어지면서 현측 주장갑대는 해수면 아래로 완전히 잠기다시피 하였다. 그로 인하여 해전 당시의 러시아 전함들은 피탄시 침수가 발생하면 더 빠르게 가라앉는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이는 비슷한 수준으로 포탄을 집중적으로 얻어맞은 일본 해군의 기함 미카사가 전투능력을 상실하지 않고 전투 종료 후에도 자력항해가 가능했던 것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만 프랑스에서 건조하여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함대에 편입된 체자레비치도 전형적인 텀블홈 선체이지만 전해에 벌어진 황해 해전에서 발트 함대의 전함들이 입은 것과 비슷한 피격을 받았음에도 칭다오로 도피하는데 성공한 사례가 있으므로 텀블홈 설계가 약점만을 가진 설계는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발트 함대의 사례는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최신기술에 사용자의 과다한 요구와 미숙한 건조역량이 결합할 경우 벌어지는 부작용에 가깝다.

다음 날인 5월 28일부터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로제스트벤스키가 중상을 입은 다음 지휘권을 이양받은 네보가토프 제독은 무조건적으로 항복했고, 도고는 포로들을 정당히 잘 대우해줄 것임을 약속하며 패장을 다독였다. 이때는 진짜 포로대우를 잘했다. 치료부터 식사 제공, 우편서신, 개인소지품 소유 등등. 진짜다! 그런데 왜 40년 뒤에는… 같은 날 오후, 로제스트벤스키가 타고 있던 고속정 부이니호가 일본 함대에 발각, 정장이 항복하면서 최고사령관마저 포로가 되었다.

그 와중에 개별적으로 추격을 뿌리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간신히 도착하는데 성공한 함정은 겨우 순양함 1척과 어뢰정 2척뿐이었다. 여기에 순양함 한 척이 더 무사히 탈출해 블라디보스토크 앞까지 도착했으나, 좌초하여 입항하지 못 했다. 그래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이 순양함도 귀환 함정에 포함시키고 승조원들을 치하했다. 순양함 3척은 항로를 아예 반대편으로 돌려 중립국이던 미국필리핀마닐라항에 입항하였다. 이렇게 살아남은 함정 가운데 순양함 오로라 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올린다. 그 공로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기념함으로 보존되고 있다. 또한 기타 보조선박들이 중국의 상하이 등지로 도주했는데, 도망치는데 성공한 배 중 특히 유명한 것은 석탄 수송선이였던 아나디르인데, 이 배는 쓰시마 해협에서 함대 보급용으로 실어 둔 석탄을 써가며 무려 남아프리카에 위치한 프랑스마다가스카르까지 도망친 이후에 본국에 보고했다(...) 다시 말해 지구 반 바퀴를 항해해서 왔다가 또다시 지구 반 바퀴 가량을 돌아가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단 소리(...)

7. 결과

러시아 최강 함대로 일컬어지던 발트 함대는 총 37척(전투 직전에 빠진 석탄 보급선 제외) 가운데 전함 6척, 순양함 3척을 합해 19척(절반)이 격침되었고, 주력 전함 2척을 포함한 7척이 항복, 나포되었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후방에 있던 순양함 3척과 기타 선박들이 도주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운좋게 도착한 함정은 앞서 언급한 3척뿐으로 사실상 함대 전멸의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 기존의 태평양 함대가 입은 피해까지 생각하면 러시아 해군은 사실상 소멸한 것이다. 이제 러시아에 해군이라고 할만한 것은 흑해 함대가 유일했다. 인명피해도 커서 장교,사병을 합쳐 전사자도 4,380명에 달하고 중상자도 많았으며, 포로도 약 6천여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은 달랑 어뢰정 3척을 잃고 117명이 전사하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그야말로 압승이었다. 이 전투로 인해 러일전쟁의 승기가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갔고, 일본 전역은 전승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씁, 어쩔 수 없지. 그냥 휴전할까?하며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평화협상 테이블에 나왔다. 사실 러시아는 완전승리를 목표로 발트 함대를 보낸 것이지만, 그 함대가 전멸당했음에도 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었다. 애초에 러시아는 육군국이며 러일전쟁의 전장인 요동반도는 러시아와 지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봉천 전투 후에도 추가적인 파병이 가능하며, 또 그럴만한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일본은 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수송로는 지킬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 병력이 죄다 소모된 상태였고, 이 해전에서 승리하여 간신히 파국을 막을 수 있었다.

이후 나포당한 러시아 군함들은 일본 해군에 편입되었으며, 영국식으로 함체를 고치는 등의 개조를 한 후 잘 쓰이다가 1920년대에 대부분 퇴역했다.

러시아에게는 전쟁 패배보다도 더 큰 충격은 바로 발트 함대의 소멸이었다. 쓰시마 해전의 패배로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자국의 앞마당인 발트해를 독일 해군에게 철저하게 봉쇄당해야 했다. 이는 러시아를 승계한 소련도 마찬가지여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 허약한 독일 해군에게 소련 함대는 제대로 된 교전을 시도해보지 못하고 잠수함에 의지해야 했다. 그리고 수상함대 전력은 1950년대쯤이나 가서야 회복되었다.

8. 영향

그리고 이 해전으로 해전의 패러다임이 몇 종류 등장하거나 강화되었다.

당시는 라사 해전, 미서전쟁, 청일전쟁을 포함해서 주요 해전을 통해 함대가 이 정도로 침몰당한 예가 없을 정도로 함선의 방어력이 공격력을 웃돌던 시대였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도 이 정도로 일방적인 몰살이 되지는 않았으므로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이것이 함대결전사상의 강화와 드레드노트급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해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해당 해전에서 최초로 일제사격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참신한 아이디어에 비해 별로 효과는 없어서 오히려 해전 도중의 혼란으로 인해 중앙의 사격제원을 못 받고 각 포탑별로 개별사격한 명중률이 더 높을 지경이어서 당사자인 일본은 일제사격 방식을 버리고 1회 사격시 각 함선의 주포 문수의 절반만 사격한 후 탄착을 관측한 후 사격제원을 수정해서 나머지 주포를 발포하는 교호사격으로 함포사격방식을 변경한다.

오히려 이 해전을 지원하고 참관한 영국이 아이디어를 얻어서 일제사격과 협차의 개념을 발달시키고, 여기에 맞는 장거리 사격통제장치와 사격방식을 만들어서 드레드노트급 전함에 적용하게 된다.

9. 기타

당연히 승자인 일본에서는 지겹도록 미디어로 만들어졌다. 군국주의 시절부터 시작해서, 2차대전 패배 이후에도 정말 지겹도록 만들어진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69년작 본해 대해전이다. 그러나 일본이 이기는 영화가 국내에서 흥행할 리가 없으니 국내에 소개된 건 없다.(…) 아니, 흥행 이전에 심의 문제일까…. 가장 최근에 미디어된 것은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NHK 대하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이다.

그 유명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이 해전에 참전하였다가 손가락을 잃었다.

일본 후쿠오카현 무나가타(宗像)시에 있는 무나카타 타이샤(宗像大社)에서는 쓰시마 해협에 있는 오키노시마(沖ノ島)라는, 올림팍 공원보다 작은 섬[7]에 10일 간격으로 신관 한 명을 파견한다. 오키노시마가 일본서기에도 등장하는, 다고리히메(田心姬) 여신[8][9]의 신체(御神体)라고 하기 때문에 늘 이렇게 신관을 보내는데, 쓰시마 해전 당시에 오키노시마에 파견와있던 신관이 해전을 실시간으로 목격하였다. 이후 무나카타 타이샤에서는 일본이 이 해전에서 승리함이 다고리히메 여신이 가호한 덕이라고 생각했는지, 쓰시마 해전이 일어난 5월 27일에 일반인 200명이 이 섬에 찾아가 작은 축제를 거행한다. 평상시에는 이 섬 자체가 신체이며 또한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에, 신관과 항만 관리자를 제외하고는 보통은 섬에 발을 디딜 수 없다.

세계 4대 해전 떡밥에 늘 들어가는 단골 후보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보드게임 레비아탄즈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전멸한다. 왜냐고? 러시아 함대는 폴란드의 한 천재 과학자가 만든 공중전함 레비아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전멸. 이 해전으로 조선은 러시아에게 먹히고 유럽의 열강들은 공중전함 만드는 데 광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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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출처: '국가의 해양력' 제 2장 '해군의 역사 -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전쟁과 함대' 179p, 책세상,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저, 임인수 옮김
  • [2] 뤼순, 블라디보스토크
  • [3] 발트 함대
  • [4] 같은 이름을 가진 전함과 구별하기 위해 '흰독수리'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또한 전대의 여성 간호사들이 모두 이 배에 타고 있었으며 이들의 총책임자인 간호 장교 나탈리아 시베르스는 로제스트벤스키의 3번째 여인이었다.
  • [5] 참고로 국제 해사 신호기링크에서 Z기는 "예인 바람" 또는 "투망중이다"를 알리는 깃발이다!!!
  • [6] 예전에는 측면이 곡선을 그리는 프랑스식 텀블홈 선체만을 텀블홈으로 인정했으나, 상갑판이 흘수선보다 대폭 좁아지는 스텔스 설계가 도입된 현대 군함들이 등장하면서 텀블홈의 개념도 변하고 있다.
  • [7] 무타카타시 해안으로부터 약 60km쯤 떨어져 있다. 면적은 약 0.97 제곱 km로 올림픽 공원의 2/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북위 34도 14분 39초, 동경 130도 06분 10초 정도에 위치해있다. 수많은 제사 관련 유물이 쏟아져나왔으며, 이미 1926년에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바 있다.
  • [8] 일본서기 본문에 따르면, 스사노오가 죽은 자기 어머니를 보려고 저승에 가려다가, 그 전에 자기 누나인 아마테라스를 만나고자 천상계 다카마가하라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가 천상계의 군주 자리를 빼앗으려 하지 않나 의심하여 남장을 하고 무장을 갖춘 채로 강가에서 스사노오를 맞았다. 스사노오는 누나가 자기를 믿지 못함을 알고는 내기를 통해 자기 진심을 보여주겠다면서 서로가 상대방의 물건을 씹어서 뱉어보되, 자기(스사노오)가 결백하다면 남신이 나오고 흑심이 있다면 여신이 나오리라고 하였다. 아마테라스가 스사노오의 칼을 받아 씹어서 뱉었더니 여신 셋이 나왔고, 스사노오가 아마테라스의 곡옥을 받아 씹어서 뱉었더니 남신 다섯이 나왔다. 이에 아마테라스는 스사노오의 말을 인정하고 다카마가하라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일서에서는 본문과는 세부적인 사항이 미묘하게 다른 기록들이 여럿 실렸다.
  • [9] 다고리히메 여신은 이때 스사노오의 검에서 나온 여신 셋 중 하나라고 전하며, 무나카타 타이샤는 이때 나온 여신 셋을 받든다. 일본서기 일서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이때 나온 세 여신에게 명하여 무나카타로 내려가 해로(海路)를 지키라 명했다고 한다. 부산-대마도-오키노시마-무나카타시가 거의 일직선상에 있기 때문에 오키노시마와 무나카타시가 해상교통의 중요한 지점이었던 역사가 반영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