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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last modified: 2015-04-03 23:44:09 Contributors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임시 대총통
1대 2대
건국 쑨원 (1912.1~1912.4) 위안스카이

Sun_Wen.JPG
[JPG image (Unknown)]


孙文·孫文(손문) / Sūn Wén[1] (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

Contents

1. 소개
2. 생애
2.1. 청조 멸망과 민국 성립
2.2. 군벌의 난립
2.3. 제1차 국공합작
3. 개인적인 면
4. 그 외
4.1. 평가
4.2. 도로이름
5. 창작물에서의 쑨원

1. 소개

현대 중국의 아버지
광둥 성 향산(지금의 중산시, 中山市) 출생으로 중국인들에게는 쑨중산(孫中山, Sūn Zhōngshān)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관화 병음으로는 Sūn Wén이지만, 영어권에는 그의 호인 이셴(逸仙)의 광둥어식 발음 Yat-sen(얏센)으로 알려져 있다. Sun Yat-sen.[2]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 두곳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정치가. 게다가 쑨원의 묘를 중국에서는 중산묘가 아니라 중산(中山陵)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가 현대 중국, 타이완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3]


중국 난징 교외에 위치한 중산릉. 1929년 6월 1일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쑨원을 기념하는 건물이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 두 곳에 모두 존재한다. 중화인민공화국광저우산기념당, 중화민국(타이완)은 타이베이국부기념관. 영어로는 둘다 Sun Yat-sen Memorial Hall로 불리고 위치해 있는 도시만 구분한다.

2. 생애

2.1. 청조 멸망과 민국 성립

일반적으론 신해혁명의 주동자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는 신해혁명이 일어날 당시 미국에 있었다.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노력도 했지만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미국에서 활동자금을 모으던 사이에 알아서 혁명이 터져버린 것.[4] 이후 쑨원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외교활동을 하여, 청조에 대한 차관 중단, '청조를 돕는 일본이 지원을 중단하도록 요구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낸다. 이후 쑨원은 홍콩을 통해 귀국하여 난징임시정부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고 을 전복시키고자 했지만 기반이 미약한 그가 지방 각지에서 일어난 혁명군만으로 청을 쓰러트리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뭔가 이승만 필이 나기도

결국 그가 선택한 방법은 북양군 총사령관 위안스카이와의 협상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혁명군 토벌을 명받고 복귀한 위안스카이는 쑨원이 제안한 중화민국 총통직을 받아들이게 된다. 위안스카이는 그대로 토벌군을 거꾸로 몰아 베이징으로 쳐들어가 청 황실을 무너뜨렸고, 혁명은 성공했다.

하지만 이 협상은 청을 무너뜨리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중화민국을 공화국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완전히 실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는 사사건건 의회와 부딪혔고, 결국 쑨원과 국민당은 위안스카이의 군사력에 쫓겨 남쪽으로 도망쳐야 했다. 한편, 위안스카이는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21개조 조약 체결 협박에 시달렸고, 대내적으로는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황제를 칭하다가 지방 실력자들의 외면에 꼬리를 내리고 물러나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2.2. 군벌의 난립

위안스카이의 죽음 뒤 중화민국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중앙에서는 북양군벌 내의 파벌들[5]이 돌아가며 베이징을 장악, 정치적인 실권을 행사했고, 지방에서는 북양군벌과 충돌하던 광둥, 광시, 윈난 등 지방군벌들이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다. 쑨원은 그 와중에 이 지방군벌들[6]과 협력해 1917년 광둥 지역에 호법군 정부를 창설, 북양군벌을 토벌하고 중화민국을 되찾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애초에 지방군벌들은 쑨원이 가진 중화민국의 정통성이 필요했을 뿐, 자신들의 세력을 보존하는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쑨원의 북벌론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그를 1918년에 쫓아내기까지 했다.

이후 쑨원은 상하이로 망명가 저술활동하면서 강연하고 지냈다. 1919년 5.4 운동 발발 당시 쑨원은 상하이에서 저술활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쑨원은 5.4 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받아 이를 계기로 혁명 세력의 주체를 '민중들의 힘'으로 인식해 1919년 10월에 국민당을 개창했다. 이는 1914년 7월 도쿄에 있을때 쑨원이 만든 '중화 혁명당'을 개칭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위로부터의 혁명'을 구상했던 그가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평가된다.

2.3. 제1차 국공합작

두 번이나 군벌들에게 쫓겨나 도피생활을 하면서 쑨원은 군사력이 없는 자신들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한 가지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소련에서 온 특사 마링(Maring)이었다. 소련은 중국 안에 공산당 세력을 키우기 위한 파트너를 찾고 있었는데, 그 대상으로 국민당과 쑨원을 선택한 것. 마링과 쑨원은 몇차례 만나며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내 제1차 국공합작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입당이 허가되었고, 쑨원은 국민당의 자체적인 군사력 강화에도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몇 차례 군벌들과 전쟁을 치루기도 했지만, 국민당군 건설작업은 제궤도에 올라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창설로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쑨원 본인은 직후 간암으로 사망하여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그의 뜻은 후계자를 자처한 장제스가 북벌을 완수하면서 이루게 된다.

3. 개인적인 면

정치 사상 면에서는 삼민주의를 주장하며 오권분립을 주장했다.

우리가 흔히 인민복이라 부르는 옷을 발명한 사람이 쑨원이다. 흔히들 인민복은 중국 본토에서만 입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쑨원이 일본 거주당시 일본의 가쿠란에 영향을 받아서 우리도 저런 실용적인 옷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만들어 낸 것이 '중산복(中山裝)'이다. 이 옷이 훗날 재봉방식의 변화에 따라 '마오복'이라고도 하는 인민복과 타이완의 국민복으로 나뉘게 된다.


2차 국공내전 직전에 중재협상 과정에서 찍은 마오쩌둥장제스. 두 사람이 입은 옷을 보면 둘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상의 앞 주머니를 드러나지 않게 안쪽으로 재봉하면 인민복, 드러나게 재봉하면 국민복이 된다.

이 양반이 대륙에서 연설을 할 때 자신들이 잃어버린 영토이며 또한 되찾아야 할 영토를 거론하면서 한반도를 거명하기도 했다.(!) 이는 기존의 중화사상에서 정체하기보다는 그것을 계승 발전시켜서 주변국과의 관계를 중국 본위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는 당시의 건 개화파들의 이론이었다.

물론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넘어간 권리를 되찾자는 주장일 수도 있다. 1924년 고베 강연에서 중국과 일본은 인의도덕을 공유한다고 하여 중일 협력을 외친 혁명파를 이끌고 있던 그의 위치상 딱히 당장 조선을 먹을 생각은 없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원조한 바 있고, 이 공으로 1962년과 1968년 한민국 건국 훈장을 받은 바 있다.

신해혁명 이전에는 '청나라부터 타도하고 보면 답이 나올것이다.'라는 순진한(...) 마인드기도 해서 조선왕조나 청왕조를 비판했던 일본 극우 정객들과 굉장히 어울려 지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일진회 고문을 지낸 (우리한테는 천하의 개쌍놈이지만...) 치다 료헤이를 비롯해 야자키 도텐야마 미츠루타 잇키등 극우파 인사들하고 같이 친분을 쌓았고, 이 일본 극우파 인사들은 쑨원이 조직한 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해 우창봉기, 신해혁명에 적극 가담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마지막 수상인 이누카이 츠요시와도 친구였다.

그도 후에 다민족국가를 인정하게 되지만 평화,입헌노선의 유웨이와는 대치되던 혁명파로서 몇 차례 봉기에서 뜻을 함께하던 동지들을 처형한 만주족 정권에 상당한 증오심을 갖고있었기 때문에 청을 무너뜨리는 것을 도와주는 대가로 만주를 일본에게 할양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물론 이 때의 혁명가들은 만주족을 '중원을 점거한 외세' 로 생각하고 있었다. 쑨원이 조직한 흥중회(興中會)도 중국의 광복이라는 의미. 하지만 만주의 위치적인 중요성은? 그만큼 일본이 뒤통수 때릴지 몰랐다는 얘기(...) 이렇게 하지 않아도 나중에 실현 되지만... 이러한 점은 쑨원도 '아시아주의자'로 한국의 김옥균, 안중근, 여운형이나 베트남의 호치민, 미얀마의 아웅산등 주창한 '대아시아주의'와 일맥상통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이들은 처음에 일본을 지지하다가 나중에 일본의 속셈을 알아채 반일로 돌아서기도 한다.

여운형은 쑨원과 접견한 자리에서 그의 정치사상에 대하여 '젊은 시절에는 멸만흥한(滅蠻興漢)을 내세워 청나라에 반대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다민족을 포용한 범중국주의자가 되었으며 늙어서는 민족 개념을 넘어 민권과 계급을 중심으로 한 혁명을 주창하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쑨원 역시 이 평가가 썩 마음에 들었는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혁명은 익을수록 붉어진다'고 답했다고 한다.

첫 아내는 19세에 결혼한 루무전(盧慕貞)으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쑨커와 딸 쑨얀과 쑨완을 두었다. 둘은 1915년 9월에 이혼했다. 아들은 중화민국의 고위직에 오르게 된다. 두 번째 아내인 쑹칭링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야오주 ('찰리 송'이라는 미국식 이름이 유명하다. 중국어판 성경을 팔아서 떼돈을 번 후, 정치활동=혁명사업에 투신했다.)의 딸이었으며 쑨원의 비서였다.(쑨원과 쑹칭링의 아버지는 친구사이. 고로 그와 그녀의 사이는 무려 26살 차이...ㄷㄷㄷㄷㄷ 이 때문에 현재 타이완에서는 쑨원이 진성 '로리콘'이 아니었는가 하는 평가도 있고, 그의 패러디 동인지도 있다. 흠좀무.

딸 하나를 두었으나 어릴 때 사망했고, 이후군벌들로부터 도피 생활을 하면서 건강을 해쳐 내가 고자라니 더 이상 자식을 얻진 못했다. 평생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며 중국의 국부인 쑨원의 아내다운 모습을 보여서 현재도 중국과 타이완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여인이다.

공식적으로는 광둥 성 태생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태생이라는 설이 있다.#

사실 삼합회의 일원이었고 혁명에도 삼합회의 힘이 들어갔다는 음모론이 있다(...).

4. 그 외

4.1. 평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사람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의 처녀다운 순진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했다. 혁명 다 만들어놓고 군벌이나 외세에 냅다 갖다바쳐서 물거품 만들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면 누구 눈에도 그렇게 보일듯

2012 런던 올림픽 당시 과 혼동한 이들에 의해 한국 트위터에서 난데없이 부관참시된 일이 있었다(...). #

4.2. 도로이름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대만)의 도로에도 보면 중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도로가 있는데, 시내도로 이름이 중산로(中山路)라든가 중산대도(中山大道)라는 식으로 되어있다. 대만의 경우에는 고속도로 이름까지 중산이라고 되어있는데, 중산고속공로가 그렇다.

5. 창작물에서의 쑨원

쿠보 노리타다의 《도교사》에서는 청조의 관헌에게 쫓기는 도중에 관세음보살을 만났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 하고 다녔다고.

서유요원전에서는 운동의 석벽에 새겨진 천강36성의 명단 가운데 한 명으로 써있다. 서유요원전의 천강36성은 천하를 뒤엎는데 성공하는 천명을 받은 혁명가들의 목록이다. 쑨원 밑에는 마오쩌둥이 써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에서는 주인공과 가끔씩 조우하거나 협조하는 조역으로 등장하는데 아직 채 제대로 된 혁명가가 되기 이전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 이 때는 위에서 설명한 국민복도 입지 않고 청나라 복식을 하고 있고. 여기서 쑨원은 근대 중국의 국부가 아니라 의욕은 넘치되 상당히 새파란 얼치기였던 것으로 젊은 모습이 그려져 다른 매체 대비 상당히 너프되어 등장한다. 야스히코가 김옥균에 무지막지하게 버프를 거는 것과 대비하면 꽤 신기하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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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본명은 孙德明·孫德明(손덕명) / Sūn Démíng(쑨더밍)
  • [2] 가오슝의 중산 대학도 영어명칭은 National Sun Yat-sen University로 쓴다.
  • [3] 중국에서 묘지명으로 능(陵)을 쓴다는 것은 그 의미가 큰데, 이유인즉 천자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산릉 부근에 몽골을 몰아내고 을 건국해 한족 왕조를 부흥시킨 홍무제의 효릉(孝陵)이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 [4] 다만 그렇다고 쑨원이 혁명의 발발에 아무 보탬도 안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혁명의 주역인 중국 동맹회부터가 쑨원이 만든 단체였고, 쑨원이 미국에서 열심히 모은 활동자금도 중국 동맹회를 지원하는 목적이었다.
  • [5] 주로 치루이의 안휘파와 궈장, 패부등의 직예파 간의 파벌싸움이었다. 나중에는 장쭤린의 봉천파도 가담하면서 헬게이트.
  • [6] 주로 광둥, 광시 등 서남군벌 세력들이다.
  • [7] 사실 그렇게 많이 나오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