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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last modified: 2015-04-13 09:24:22 Contributors

KBO 리그 / 해체된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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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Ssangbangwool Rai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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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Hyundai Unicor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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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원더스
(2군 번외, Goyang Won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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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야구단
(2군, Police)
◀ 현재 참가하고 있는 구단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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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엠블럼 팀 마스코트
방울이[1]
쌍방울 레이더스
Ssangbangwool Raiders
창단 1990년 3월 31일
해체 2000년 1월 7일
연고지 전라북도 전주시
구단 연고지 변천 전라북도 전주시 (1990~1999)
구단명 변천 쌍방울 레이더스 (1990~1999)
해체 당시의 구단프론트
(1999년)
구단주 이의철
사장 박효수
단장 유은수
감독 김준환[2]
홈 구장 전주 야구장
(10,000명)
월명야구장
(12,000명)[3]

Contents

1. 개요
1.1. 역사
1.2. 해체
1.3. 쌍방울의 유산
1.3.1. 주요 기록
1.3.2. 연고지
1.3.3. 선수 목록
1.3.3.1. 주요 선수
1.3.3.2. 쌍방울 레이더스 마지막 멤버 일람
1.3.3.3. 외국인 선수
1.3.3.4. 그 외의 선수
1.4. 역대 성적
1.4.1. 유니폼
1.5. 읽을거리

1. 개요

"내가 소시적에 쌍방울이란 팀이 있었는데 말야"
"정말 그런 팀이 있었어요?! 설마 팀 이름을 그렇게...?"
-최훈, '추억은 쌍방울 방울'
본격적으로 프로야구 8구단 체제를 연, 그러나 아쉽게 사라지고 만 비운의 팀.

KBO 리그에 있었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전라북도 전주시[4]. 홈 구장은 주야구장, 제2홈구장은 군산시 사정동 월명야구장이었다. 팀의 상징색은 노란색.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손 쓸 새 없이 해체된 아픈 역사의 팀으로, 아직도 전주 사람들은 쌍방울을 못 잊어 눈물 속에 밤을 지새운다는 말도 있다.[5]

1.1. 역사

1985년 한국프로야구 제7구단이 창단하면서 이후 KBO는 제8구단 창단 작업을 진행한다. 마산을 중심으로 한 일합섬,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한 미원(現 대상그룹)과 쌍방울이 컨소시엄 형태의 구단이 제8구단 창단에 경쟁하게 된다. 결국 미원, 쌍방울 컨소시엄이 제 8구단 창단을 하게 되지만, 쌍방울이 미원과 일방적인 결별을 선언하며 쌍방울 단독으로 제 8구단을 창단하게 된다.[6]

1990년에 창단했으며, 창단 감독은 김인식. 창단과정에서 전라북도 연고는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로 부터 구입하였다. 1년간 2군 리그에 참여한 뒤 1991년부터 정규 리그에 참가했다.

그 때까지 사라진 팀들(삼미, 청보, 태평양)의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점인 '모기업이 약하다'는 부분이 불안을 자극하였고 이 부분은 뒤에 "빤쓰팔아 팀 운영한다"는 농담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연고지 측면에서도 전라북도 관내에 야구부가 있는 고등학교가 전주고등학교, 군산상고 2개 뿐으로 군산상고가 아무리 야구 명문이라 해도 연고지 선수만으로는 야구 팀 운영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다 보니 KBO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전력 약화를 기대하며 창단하게 했다는 루머도 있었다.[7] 게다가 1990년 2군 선수단 버스가 교통사고를 일으켜 운전기사가 사망하고 선수 전원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까지 발생. 어찌보면 앞으로 팀의 안습한 운명을 예감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결국 선수진이 약한 편인 상태에서, 1991년 이후 신인 선수지명도 거듭되는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8] [9] 결국 다른 팀에서 방출된 한물간 선수들로 팀을 운영하는 상황이 되었다.[10] 예를 들어 왕년의 해태 타이거즈 우승 포수였던 장채근, 해결사야왕한대화, 박노준, 김광림 등이 여기에서 은퇴하거나 다시 부활하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발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1991년 1군 첫 시즌에서 예상을 깨고 승률 4할 이상을 기록하는 호성적을 기록하며 OB 베어스를 제치고 LG 트윈스와 공동 6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보인 것. 그러나 빈약한 구단의 재정 상황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듬해 되려 꼴찌로 떨어진 뒤로는 꼴찌이거나 간신히 꼴찌를 면하는 성적이었으며 1995년에는 시즌 개막 4연승을 달리며 기대를 모으지만 갑작스러운 12연패 끝에 꼴찌로 추락해 버리는 아픔을 겪는다.DTD 창단 이후 68788이라는 비밀번호를 신나게 찍는 만년 꼴찌팀.[11]

그러나 1996년 김성근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부임하고부터 모두가 놀란 성적을 찍기 시작한다. 오오 성큰매직.. 이 해 사상 처음으로 0.563으로 정규 리그 2위를 차지하며 포스트 시즌에 당당히 진출하였지만, 아쉽게도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플레이오프 게임 스코어 2:0에서 2:3로 사상 첫 역스윕 탈락을 경험한다. 그리고 1997년에도 정규리그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였으나 준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게임 스코어 1:2로 탈락한다. 재미있는 점은 포스트시즌에서 쓴맛을 보여준 상대가 현대 유니콘스, 삼성 라이온즈. 바로 이듬해 핵심 전력을 빼가서 쌍방울을 몰락하게 했던 팀이라는 점.

김성근 감독은 상당히 변칙적인 운영을 통해 성적을 거두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1996년 정규 리그 2위인 팀 성적에도 불구하고 10승을 넘긴 선발 투수가 단 1명에 불과했던 것,[12] 1997년 김현욱의 구원승 20승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선수단의 깊이가 얇았던 팀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실력보다는 근성으로 이겨나가는 '돌격대 야구'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팀이다. 포스트시즌에 약했던 것도 S급 선수의 부재라는 점이 컸다. 김성근 감독의 '감독으로서의 실력'은 1121을 이룩한 SK에서보다 쌍방울에서 더 빛을 발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

좀 더 나은 성적을, 다음해는 기필코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서 우승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던 1997년 말, 갑자기 IMF가 터지고, 무리하게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 자금을 쓰게 되면서[13] 모기업이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자 팀을 유지해 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수를 팔아먹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게 된다. 김기태, 김현욱 은 삼성으로, 박경완, 조규제 , 김광림 등은 현대로 이적하는 면서 팀의 중심 선수들이 대부분 팀을 떠나 전력은 바닥을 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선수들을 판매하면서 감독에게는 사후 통보를 했다. [14]

1998 시즌부터 외국인 선수가 도입되자, 쌍방울의 운명은 더욱 가혹해졌다. 비싼 돈 주고 선수를 쓸 수 없었고, 중도 퇴출되어도 마땅히 대체 선수 데려올 수 없었기 때문에 1998년에는 아예 외국인 선수를 선발하지 않았고 1999년에 앤더슨, 비아노 등의 6점대 방어율의 외국인 투수 정도를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앤더슨의 경우에는 전년도에 LG 트윈스에서 주로 마무리로 뛰며 20세이브를 돌파했지만 쌍방울로 오면서 팀 사정상 선발로 뛰었는데 결국은 탈탈 털리며 조기에 짐을 쌌다. 그나마 당시는 외국인 선수 선발 제도가 트라이아웃 제도였기 때문에 영입은 일단 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시즌 중 5연승을 달리기도 했다.

1999년이 되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모기업이 사실상 팀 운영을 할 수 없게 되면서 KBO에 의한 위탁 관리가 이루어 졌고 팀 운영은 도저히 프로라고 볼 수 없는 사태에 이르렀다. 겨울 전지 훈련은 홈구장 옆 비닐 하우스 안에서 난로를 때며 대신했고, 원정 경기는 당일 아침에 이동하거나 선수단의 식사는 기사식당에서 외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팀 선수들이 원정경기 전날 이동[15]하여 호텔에 묵고 호텔에서 고급음식을 먹는 것과 비교해 비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현실은 만화가 아니었고 헝그리 정신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상황에서 구단 고위층은 선수팔이도 모자라 경기 내에서의 선수기용과 작전까지 간섭하려 들었고 급기야 1999년 눈엣가시였던 김성근 감독을 올스타전 직후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임시킨다.이 당시 해임소식을 들은 김성근 감독이 한 말이 씁쓸함을 남긴다. "모든것이 끝났다." 결국 쌍방울은 그 해 한 시즌 최다패 기록인 97패(28승 7무)를 기록하면서 마지막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1.2. 해체

1999년말 KBO는 SK그룹을 끌어들여 쌍방울 인수건을 논의하였는데, 이때 프로야구단에 관심을 보인 SK그룹은 쌍방울과의 협상은 철저히 배제하고, KBO하고만 접촉하면서 레이더스 구단의 인수가 아닌 새로운 구단의 창단으로 프로야구에 뛰어들 계획을 갖는다.

당시 법정관리중인 쌍방울 입장에서는 야구단을 넘기는 인수조건으로 최대한 많은 금액을 받아내길 원했지만, SK그룹은 조만간 자동적으로 퇴출되는 쌍방울과 굳이 접촉할 이유가 없었다. SK는 쌍방울이 자동으로 법정퇴출되는 2000년 2월 12일까지 버티다가 신생팀을 창단하는 과정만 밟으면 된다는 의도였다. 양측 당사자 모두 팽팽하게 줄다리기 식으로 버티기만 한 끝에 쌍방울은 얼마 못 가서 GG를 치고, SK그룹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SK가 프로야구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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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쌍방울 살리기 위한 전주 사람들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웠다. 쌍방울 살리기 바자회가 열렸고 전주 출신 연예인들이 앞장서서 살리기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구단의 자금 사정은 이미 바자회 한두 번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처지에 놓여 있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결국 레이더스 소속 선수들은 전원 웨이버 공시되었고, 창단 10주년을 불과 3개월 앞둔 2000년 1월 7일에 쌍방울은 해체되었다. 응? 어디가 해체됐다고? 레이더스의 빈자리는 SK는 인천을 연고지로 한 SK 와이번스가 새롭게 창단하여 채웠으며, 기존의 레이더스 출신 선수들은 자유계약 선수 영입 형태로 SK에 영입됐다. [16] KBO의 지원 속에 SK 와이번스는 리그의 일원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으며 이렇게 쌍방울 레이더스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한국 프로야구의 제 8구단의 역사는 이렇게 어느 구단에도 계승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쌍방울의 몰락 과정은 야구의 삼미, 청보, 태평양과 축구의 전북 버팔로, 농구의 골드뱅크-코리아텐더 등과 함께 한국의 프로스포츠는 자생력이 없음을 확인시켜준 사례로서 교훈을 주었으며, '구단 해체 이후 창단'의 수순은 쌍방울의 기둥을 뽑아갔던 응? 어디를 뽑아갔다고? 모 구단에서 정확히 8년 뒤 재현된다. 과연 역사는 반복된다.[17]

1.3. 쌍방울의 유산

1.3.1. 주요 기록

  • 5년 연속 구단 피홈런 1위 : 1991 ~ 1995년[18]
  • 한 시즌 최다패 기록 : 97패 (28승 7무) [19]
  • 역대 최소관중 기록 : 54명 (1999년 10월 7일 vs현대, 전주구장)
  • 홈경기 최다 연승기록 [20] : 17연승 (1996년 8월 14일 ~ 1997년 4월 13일)
  • 한 시즌 최다 완봉승(영봉승 포함) : 1996년 19회
  • 한 시즌 최다 구원승 : 1997년 44회

1.3.2. 연고지

쌍방울 레이더스의 연고 지역이었던 전라북도 지역은 연고 구단의 해체 이후 무연고지를 유지하다가 2003년에 KIA 타이거즈에 반환되었다.[21] 쌍방울 레이더스 말년 때는 주야구장의 시설 노후화 문제로 군산시 월명야구장에서 경기가 자주 열렸다. 그러던 것이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월명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한 경기도 열리지 않았다가 2004년부터 KIA의 군산 경기가 다시 열리게 됐다.

쌍방울의 해체는 지역 아마야구에도 타격을 주었다. 군산상고와 전주고 모두 타 지역으로 전학하는 선수들이 속출하며 야구부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군산상고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낫지만 전주고는 아예 중학교 선수들이 전주고 야구부로 입학을 기피한 나머지 한동안 선수부족으로 선수권대회나 고교리그에 참가조차 못할 정도로 심각한 흑역사를 보내야만 했다.

1.3.3. 선수 목록

전주 시민들에게 남겨진 추억이나 여러 가지 의미로 범접하기 어려운 기록들도 눈여겨 볼 만하지만, 쌍방울이 야구계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역시 선수들일 것이다. 팀은 해체되었지만 돌격대에서 발굴(혹은 부활)한 선수들은 이적한 팀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며, 일부는 지도자로 변신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프로야구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2011년 기준으로 김원형,박경완,오상민,이진영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2011년을 끝으로 김원형은 은퇴했으며, 2012 시즌 초에 오상민은 도박사건으로 퇴출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진영, 박경완 두 선수가 남은 상태였다.

2013년 10월 22일 박경완이 은퇴를 선언하고 2014년 4월 5일 한화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하면
서, 2015년 현재 현역 프로 선수 가운데 쌍방울 출신의 선수는 이진영 단 1명만이 남은 상태이다. 군산상고를 졸업하고 1999년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이진영은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한 마지막 신인 선수다.[22]

1.3.3.1. 주요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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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갑이 그린 리즈시절 쌍방울의 스타 선수들


  • 김광림 - OB 베어스의 프랜차이즈 출신이었으나 1994년에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고 1995년에 타격왕을 먹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1996년 미스터 올스타가 되기도 했으나, 1997시즌중 현대로 트레이드되어 우승반지를 끼고 1998시즌후 방출되어 다시 돌아왔다. 1999시즌후 은퇴

  • 김기태 - 돌격대의 형님. 왕방울. 쌍방울의 주장이자 팀을 대표했던 강타자. 이승엽 등장 전까지 좌타자 최다홈런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신인 최다홈런 기록도 그의 것이다. 또한 1997년에 .344의 타율로 타격왕까지 먹은 적이 있었다. 쌍방울 부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도 유일하게 버틴 선수였으나, 1999년에 김현욱과 함께 삼성에 팔려갔다. 은퇴 이후에는 지도자로 변신, LG 트윈스 감독을 맡아 팀을 10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다만 그 다음해에 도망치듯이 사퇴해서 문제가 됬지만.

  • 김원형 - 영원한 어린왕자, 돌격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에이스. 최연소 노히트 노런 기록 보유.
그 후 SK에서 활동하다가 2011년 은퇴, 통산 134승 144패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 김현욱 - 원조노예 삼성출신 선수로 1997년 구원으로만 20승...을 따냈으나 투수부문 골든글러브는 이대진(17승), MVP는 이승엽(홈런 - 최다안타 - 타점)에게 빼앗겼다[23] . 1999년 친정팀인 삼성에 팔려서 돌아갔다.

  • 김호 - 타격보다는 수비로 유명했던 선수로 1991년은 .233 11홈런 22도루를 했다. 구단 해체이후엔 해태,두산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 박경완 - 포도대장. 돌격대의 안방마님. 크보 역사상 최고의 포수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레전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박노준 - 말이 필요 없는 선린상고의 독일병정. 1994년 .303에 43도루를 했다. 그리고 훗날...

  • 심성보 - '맘보'라는 별명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외야수. 당뇨병으로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던 비운의 스타. 1998년 외야수 최다보살(20개)...한국판 원조 가르시아이자 '강견의 3심' 중 한 명[24]

  • 조규제 - 전주특급. 쌍방울의 핵심마무리. 킬인식의 감독초기시절 은근히 혹사당했다. 그 후 무난하게 잘 하다가 팀이 부도로 어렵던 시절 박경완과 함께 현대에 팔려갔다.

  • 용호 - 천안북일고 출신으로 빙그레에 있었다가 별 활약을 못하고 1991년 쌍방울로 트레이드 된 첫해에 .318의 좋은 타율로 활약을 했다.

  • 조원우 - 돌격대장. 400경기 이상 무실책은 한국 최고 기록일 뿐더러 메이저리그 기록마저도 뛰어넘는다.

  • 최태원 - 철인. 1014경기 연속출장으로 KBO에서는 이 부문 1위.

  • 최한림 - 국내 최초의 좌완 사이드암[25]. 결국 김현욱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삼성에서 은퇴한다.

1.3.3.2. 쌍방울 레이더스 마지막 멤버 일람

괄호 안은 등번호이다.쌍방울 레이더스의 영구결번들

얼핏 보기엔 괜찮은 멤버 같지만 송구홍, 김성래, 박정현 등 과거의 스타플레이어들은 이미 선수생활의 황혼기, 심성보는 당뇨병 투병, 이진영은 고졸 신인이었으며 김원형은 이때까지 장종훈의 타구를 얼굴에 맞고 재기 못했다...

1.3.3.3. 외국인 선수

  • 이크 비아노(Jacob Viano, 미국)
  • 이크 앤더슨(Michael James Anderson, 미국)

1998년에는 외국인 선수를 들여오지 않았으며, 1999년에는 투수용병으로 이들을 영입했다. 다만 성적이 신통치 않아서 문제….

1.3.3.4. 그 외의 선수

  • 정학원
    내야수(유격수, 2루수). 정명원의 동생. 산상고-원광대를 졸업하고 1990년 쌍방울 2차 1순위로 지명될 정도의 유망주였지만, 현역 복무 크리티컬로 인해 1995년을 끝으로 옷을 벗는다.

  • 강창남
    재일교포 출신의 투수로 일본명은 코야마 마사오(小山昌男)다. 그 당시 강호였던 나라현의 덴리고교를 졸업하고 1981년에 긴테쓰 버펄로즈의 드래프트 2번으로 입단했다. 통산성적은 86경기 23승 21패 4.81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1992년에 같은 재일교포인 긴테츠의 황태호와 같이 쌍방울에 입단했다.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한 구단 살림으로 인해 생겨난 식사와 숙소 문제를 도저히 인간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겠다며 시즌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계약 자체를 무시하고 돌연 일본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쌍방울의 흑역사 선수 중에 하나.

  • 유동효
    태평양 돌핀스에서 이적, 쌍방울의 창단 맴버가 된 선수로 3루수가 주 포지션이었다. 선수생활 동안 특별한 성적은 남기지 못했으며 이후 롯데로 이적해 은퇴했다. 여담으로 이말년딸아이 이름짓기 편에서 상품으로 내건 싸인볼이 이분의 싸인볼이다. 이후 삼성 라이온즈 프런트에 합류했으며 2014년 현재 운영팀 차장으로 있다.

  • 황태호
    위의 강창남과 같은 재일교포에 같은 긴테쓰 버펄로즈 출신의 투수이다. 일본명은 히야마 야스히로(檜山泰浩)다. 후쿠오카현 도스쿠고교 출신으로 1985년에 긴테쓰 버펄로즈 드래프트 1번으로 입단했는데, 그 당시 PL학원의 듀오였던 키요하라 카즈히로, 와타 마스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특급 유망주였다. 그 이후 미국으로 연수를 가서 루키리그에서 29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1군에서 뛴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긴테츠에서는 흑역사 취급당하고 있다.
    어쨌든 1992년에 강창남과 같이 재일교포로서 입단하게 되지만 강창남은 시즌을 한 번도 못 뛰고 먹튀를 한 반면 황태호는 1경기 무승 무패 81.00의 기록만 달랑 남기고 6월에 퇴단하고 말았다. 일본으로 귀국한 후 운동선수 출신으로는 아주 드물게 법무사 시험에 패스, 현재는 와세다세미나 전임강사로 야구선수 때보다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1.4. 역대 성적

드 = 드림리그, 매 = 매직리그
* = 공동순위
연도순위/팀숫자팀이름경기수승률
1991*6/8쌍방울126527130.425
19928/8126418410.329
19937/8126437850.361
19948/8126477450.393
19958/8126457830.369
19963/8126705420.563
19973/8126715320.571
19986/8126586620.468
1999매4/4132289770.224

1.5. 읽을거리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3집 앨범 자켓에는 쌍방울 레이더스 마스코트 방울이 인형이 전주구장에 버려져있는 사진이 담겨있다. 해당 사진은 한 야구 애호가가 2006년 3월 26일(!) 전주야구장을 지나가다 발견하여 촬영한 사진. 언뜻 보면 진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 같아 흠칫하게 된다(…). 해당 포스팅에는 이미 고인이 된 달빛요정의 사진사용 문의댓글이 가장 먼저 달려있어 더욱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 레이더스를 대신하여 창단한 SK 와이번스는 당초 연고지로 서울을 원했으나, 현대 유니콘스 측이 중간에 끼어드는 바람에 연고권을 54억 원에 구매하고 인천으로 입성했다. 이후 쌍방울 선수로 구성된 팀이란 이미지를 지우는 것을 최대 과제로 삼으며 '인천 SK' 문구의 강조, 김경기 등 인천출신 스타 선수 영입, 2002년 삼미 슈퍼스타즈 올드 유니폼 행사 등 메모리얼 이벤트를 하며 새 연고지인 인천에 정착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보여줬다. 창단 당시에는 쌍방울 팬덤에서 넘어온 사람들과 인천에서 새로이 팬이 된 사람들이 섞여 있었는데, 이러한 구단 분위기 속에서 쌍방울계 팬들은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집단적으로 배척을 당하면서 팀에 이어 팬들까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 요즘 야구팬들 사이에서 쌍방울은 SK 와이번스의 정통성을 까는 꼬투리이거나 옛 추억을 되살리기 위한 소재로 가끔 언급되는 것이 전부이지만, 아직도 이들을 그리워하는 이들은 많은 것 같다. 실제로 2천 명 가까운 회원이 모인 레이더스 팬클럽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2011년 7월 14일에 방송된 KBS 1TV 세상사는 이야기에서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 팬클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2012년 제10구단 관련 유치전이 벌어졌을 때도 옛 쌍방울을 기억하는 많은 시민들이 호응하여, 아직 전주에 남겨진 돌격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KBO에서 10구단 창단 주체로 수원-KT의 손을 들어주면서 돌격대의 부활은 다시금 요원한 일이 되었다.


  •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스코트였던 방울이는 1980년부터 1991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공식 마스코트였던 "배트에 탄 소년(バットに乗った少年)"의 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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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참고로 이 마스코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마스코트를 표절한 것이다. 항목 읽을거리 항목 참조.
  • [2] 99년 올스타전 이후 김성근 감독 해임으로 감독 대행 . 00시즌 감독으로 내정되었으나, 구단해체로 인해 SK 수석코치가 되어,1시즌을 보내고 해임된다.
  • [3] 제 2구장
  • [4] 연고는 전라북도이지만 정작 전주시 이외 지역에서는 공기 취급받았다. 그나마 전라북도 북부는 군산 시리즈 때문에 나름 팬들이 몰리기라도 했지만, 전라남도하고 가까운 지역일수록... 안습.
  • [5] 본문 '읽을거리' 항목 참조.
  • [6] 훗날 밝혀진 얘기이지만, 전주중-전주고 출신으로 야빠였던 이의철 쌍방울 사장이 야구단을 창단하고 싶지만 자본금 50억 원이 되지 않는 회사의 사정 때문에 미원의 이름을 팔아서 창단했다고 한다.
  • [7] 쌍방울 구단 이사였던 공천섭이 민정당의 재정위원 겸 지구당위원장이기도 해서 민주당은 쌍방울의 창단을 호남 민심 회유용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 [8] 이미 1991년말 드래프트부터 그 조짐이 있었다. 이당시 쌍방울 1차지명선수가 방극천이었고 타팀 지명자 네임벨류에비해 아주 딸렸다. 당시 분위기도 의외의 지명이라는 평가와 동시에 안습한 팜의 부작용이 나타났다고 봤고... 결국 방극천은 4년 동안 2경기 등판, 3과 2/3이닝 소화, 삼진 1개. 이것도 현역 마지막시즌인 1995년에야 기록한 안습함만 남기고 은퇴한다.
  • [9] 그나마 최태원,성영재,조원우,심성보,오상민,윤재국,이진영,정대현 정도가 성공했다. 나머지는 죄다 실패..... 다만 쌍방울의 이름으로 지명한 마지막 신인인 이승호,신승현,엄정욱,마일영은 성공했다. 문제는 쌍방울 유니폼을 안입어서 그렇지
  • [10] 심지어 삼성의 레전드라 칭송받는 양준혁이 신인 지명에서 쌍방울에 2차 1순위로 창식과 함께 낙점되자 군대(상무)를 간 뒤 삼성에게 월급을 받으면서 군 생활을 하다 기어이 1차 지명을 받아 삼성으로 도망간다. 자세한 내용은 양준혁/사건사고 참조
  • [11] 분위기도 한몫했는데 퇴출당한 선수들이 모인 구단인 만큼 처음 쌍방울에 자의건 타의건 입단하게 된 선수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던 팀.
  • [12] 10승 5패를 기록했던 성영재. 김원형은 이 때 구원투수인 김현욱, 조규제 등에게 갈취당한 승수가 많았다. 안습.
  • [13] 이 때 만든 시설을 가지고 무주군에 동계 올림픽을 유치하자는 포부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유치는 강원도 평창군으로 넘어간다.
  • [14] 넥센 히어로즈의 초창기 때 야구관계자들은 물론 팬들이 심히 걱정했던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다만 넥센은 구단주가 KBO 희대의 딜러이기도 하거니와, 모기업이 따로 없는 구조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능력껏 스폰서를 물어와서 부족한 재정을 채울 수 있기 때문. 물가 변동을 감안한다 해도 현재 히어로즈가 넥센으로부터 받는 네이밍 스폰 금액이 당시 쌍방울의 자본금에 필적하는 판이다.
  • [15] 1999년 당시 전주시의 교통인프라는 꽤 열악한 편이었다. 광주나 대전과의 접근성은 괜찮았지만 대구나 부산 방면의 고속도로가 매우 미비했던 것이다. 선수단은 원정 때마다 몇 시간씩이나 소모하며 먼 길을 돌아가야 했으며 이는 쌍방울의 숨겨진 전력약화 요인이기도 했다.
  • [16] 이러한 선수양도 방식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넥센 히어로즈가 창단되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 [17] 공교롭게도 두 구단의 해체일은 1월 7일로 똑같다.
  • [18] 한술 더 떠서 1992년에는 140피홈런, 1999년에는 187피홈런으로 한 시즌 최다 피홈런 기록도 갈아치운 전력이 있다. 홈런공장 이 기록은 다음해에 이 팀을 대신하여 창단된 SK가 195개란 다시 나오기 힘들 기록으로 경신했다.
  • [19] 2002년에 롯데가 타이기록을 세웠다. 그나마 시즌 100패 기록은 안 세워서 다행.
  • [20] 재밌는 점은 이 기록이 원정팀들이 묵었던 전주 코아호텔의 귀신목격담과도 관련 있다는 것이다. 쌍방울 홈 17연승의 비밀 항목 참조. 당시 쌍방울을 맡았던 김성근 감독은 2009년에도 SK의 감독을 맡아 22연승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레알 야신
  • [21] 프로야구 원년부터 쌍방울이 참가하기 전인 1989년까지 전라도 전역의 연고는 해태 타이거즈에 할당되어 있었다.
  • [22] 1999년 드래프트에서 이진영만 계약했다.
  • [23] 만들어진 기록에는 상을 줄 수 없다는 기자들 사이의 불문율에 의한 것이었다.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에 대해서 기자들은 기록은 영원해도 상은 영원히 없다라고 맞불을 놓았다.
  • [24] 나머지는 심재학, 심정수.
  • [25] 사이드암 투수 자체가 우완일 경우 우타자에 강하기 때문에 기용되는데, 좌완 사이드 암은 우타자에게 약하다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