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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last modified: 2015-04-15 13:09:30 Contributors

신성 로마 제국
Heiliges Römisches Reich(독일어)
Imperium Romanum Sacrum(라틴어)
Sacro Imperio Romano Germánico(스페인어)
Sacro Romano Impero(이탈리아어)
Svatá říše římská(체코어)
Német-római Birodalom(헝가리어)
국기 문장
(서기 814년경의 강역) (서기 1600년경의 강역)
존속기간 800년(또는 962년) ~ 1806년
국가 황제찬가
위치 중부유럽
수도 프랑크푸르트(962~1448)
(1448~1806)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언어 라틴어,독일어,프랑스어,
이탈리아어,체코어,슬로베니아어
종교 로마 가톨릭
주요사건 800년 교황으로부터의 제관수여(건국)
1273년 스부르크 왕가 황제 첫 선출
1618년~1648년 30년 전쟁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1806년 레겐스부르크 제국회의->제국 해체
성립 이전 프랑크 왕국
멸망 이후 옛 스위스 맹방
덜란드 공화국
인 동맹
스부르크 군주국
랑스 제국
프랑스 제국령 이탈리아 왕국
벨기에 합중국
리히틴슈타인 대공국

Contents

1. 역사
2. 국명
3. 정치
4.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편견과 반박
4.1. 신성 로마 제국의 출발은 오토 1세가 황제 대관을 받은 962년부터이다?
4.2. 중세의 신성 로마 제국은 외국과 달리 중앙집권화되지 못했다?
4.3.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의 나라이다?
5. 신성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6. 매체


1. 역사

신성 로마 제국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은 서기 800년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서로마 황제 대관식을 기원으로 하여 성립된 중부 유럽의 제국이다. 카롤루스 대제 이후 잠시 분열의 역사를 거듭한 적이 있기에, 962년에 로마 교황 한 12세대관식으로 서로마 황제의 지위를 다시금 얻은 독일 왕국의 왕 오토 1세를 본격적 출발로 보는 입장도 있다. 후에 정착된 정식 명칭은 도이치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

이에 대해 중세 로마 제국은 "로마의 제위를 계승하는 정통 황제는 자신뿐"이라며 강하게 항의했고, 정작 카롤루스 자신도 교황의 대관으로 황제가 되는 것을 내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카롤루스는 카롤루스 대제가 되고, 프랑크 왕국도 제국이 되었다. 이 서로마 '제국'은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뒤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점차 유명무실해졌지만 그 정통성이 962년 동프랑크오토 1세가 세운 제국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센 왕조부터를 신성로마제국으로 치는 경우가 많지만, 서양에서는 아예 '서로마제국'이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으로 보고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을 카롤루스의 대관식으로 보는 시각도 상당하다. 애초에 신성로마제국이란 이름도 오토 1세 때부터 확립된 명칭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그 이름을 확립시킨 것이며, 오토 1세의 대관도 카롤루스 대제 이후 흐지부지 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정통성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800년의 서로마 제국과 926년의 신성 로마 제국을 굳이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프랑크 왕국롤링거 왕조가 3분할되어 쪼개진 후에 생긴 동프랑크 왕국에서 대가 끊기자,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911~918)와 뒤를 이은 작센의 영주 하인리히 공이 독일 국왕(하인리히 1세, 919~936)에 선출되었다. 이들은 자신을 '독일의 왕'(rex Teutonicorum)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을 독일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 '독일 왕'이란 표현이 사용된 것은 자그마치 600년 뒤인 막시밀리안 1세(1508년 즉위)의 일이다. 이는 그가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황제로서의 대관을 받지 못하고 단지 교황 사절이 교황을 대리해 수여한 로마 황제 칭호로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립 후 얼마 안 가 분열 수순을 밟은 서로마 제국이 재수립된 계기는 하인리히의 아들인 오토 1세(936~973)에 의해 작센 왕조 하의 서로마 황제 제위가 수립되면서부터이다. 오토 1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슬라브족과 마자르족의 침입을 격퇴했으며 북이탈리아(롬바르디아)를 정벌해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게 되었다(962년). 교황 입장에서는 명목상으로나마 유럽 세계 전체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에 대항하는 권위로써 누군가를 내세워야 하는 판이었는데, 이때 큰 활약을 보이는 오토 대제를 (서)로마의 황제(정확히는, '로마인의 왕')로 내세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토 1세 때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 혹은 로마 제국이라는 칭호보다는 그냥 "제국(Imperium)"으로 불렸다. 이후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2세(973~983. 사실 967부터 아버지와 공동황제)때부터 로마 제국이라 칭했고, 로마 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왕위를 받아낸 오토 3세(왕위 983~1002, 제위 996~1002)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이라 불리게 된다.

탄생 배경에서 보다시피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 및 비잔티움 황제에게 인정받은 서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였으며, 그에 따라 서로마의 모든 땅을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이라고 주장했지만 물론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설정놀음에 불과했다. 구 서로마 영토에 발 걸치고 있는 국가들 모두가 이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이슬람권에서는 스스로를 로마의 계승자라 칭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이 이슬람권과 접해 있고 비잔티움 제국은 로마로 스스로를 부르고 있으며 다른 국가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가 비잔티움 접수 후 로마의 후계라 자칭한 것에서 이슬람이 로마의 존재를 인식,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슬람권에서는 진짜 직계인 비잔티움 제국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영국프랑스, 에스파냐에서는 종교법 학자들을 동원해서 "왕은 그의 왕국에서는 황제다", 즉 동양 버전으로는 외왕내제 식의 이론을 펼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되, 자신들의 나라에 그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막아버렸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이런 무리한 드립을 더 이상 날리지 않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역은 아주 자연스럽게 독일플랑드르, 북부 이탈리아로 좁혀졌다.

어쨌든, 오토 1세가 황제의 대관을 받은 후 제위는 (중간에 끊긴 적도 많았지만) 대대로 계승되어갔다. 하인리히 공에 의해서 시작된 작센 왕조는 오토 1세부터 이어지다 잘리어(Salian) 왕조로 계승되었고, 잘리어 왕조는 다시 호엔슈타우펜 왕조로 계승되었다.

오토 1세는 늘 분열의 위험성을 안고 있던 제국을 안정시키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성직자를 영주로 임명하는 소위 "제국교회정책"을 시행하였다. 황제가 임명하는 고위 성직자가 각 지역의 영주를 겸하는 구조로서 이는 황제가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서임권을 전제로 한 구조였다. 오토 1세의 이러한 정책으로 황권이 강화되고 동시에 교황권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황권 강화에 반발한 영주들의 불만에, 황제의 성직자 임명을 성직매매의 일종으로 간주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정책으로 하인리히 4세(독일 왕위 : 1056~1084, 제위 1084~1105)와 그레고리오 7세 사이에 저 유명한 서임권 논쟁과 카노사의 굴욕(1077) 사건이 일어난다. 황제 즉위에 성공한 것에서 보듯이 불과 7년만에 교황은 역관광을 당한다. 서임권 논쟁으로 촉발된 내전은 보름스 협약(1122)으로 수습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의 각 지역 영주들과 도시들이 각자의 영지의 지배권을 강화하여 분열의 길로 나아갔다. 이를 영방국가체제라 부른다.

수십년간 단절되었던 제위를 계승한 호엔슈타우펜 왕조(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1152년 즉위, 제위 1155~1190)는 이에 맞서서 "신성 제국"을 칭하며, 황제이면서 동시에 남독일을 중심으로 영지를 확장하는 황제영방국가 정책을 취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프리드리히 1세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아 도리어 황권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254년 프리드리히 2세(왕위 1112~1220, 제위 1220~1225)의 죽음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되고, 1256년 대립왕 란트 백작 빌헬름(재위 1247~1256)이 죽자 제국의 정세가 불안해지게 된다. 이에 라인 지방의 영주들은 영국왕 헨리 3세의 영향으로 핸리 3세의 동생인 월 공작 리처드(재위 1257~1272)를 황제로 추대하고, 다른 세력은 프랑스왕의 지지 아래 스티야폰소(재위 1257~1275)를 옹립하여, 제위가 비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를 대공위시대(1254 ~ 1273)라고 부른다. 대공위시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의 요청으로 열린 프랑크푸르트 선제회의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제위 1273~1291)를 황제로 뽑음으로써 종식된다.

대공위시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영주들의 투표에 의해 뽑히게 되었고 황제는 자기 영지 외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돼버린다. 특히 1356년 카를 4세(1346년 즉위, 제위 1355~1378)에 의해 공포된 "금인칙서(Goldene Bulle, 금인장으로 내린 칙서)"는 황제를 투표에 의해 선출하고, 선제후(選帝侯. 쾰른 대주교,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궁중백,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왕(카를 4세의 것이었다)들에게 사실상 자신의 영지를 독립국가처럼 다스릴 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했는데, 선제후들에게 부여된 특권은 나중에 가서는 모든 영주들과 도시들에게 적용되어 결정적으로 독일의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중세 후기에 가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위를 계속 이어받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성립된다. 막시밀리안 1세의 혼인동맹정책과 그 손자 카를 5세의 경이적인 군사활동의 결과, 최전성기인 16세기의 신성 로마 제국의 판도는 스페인이탈리아까지 포괄하며 역대 최대를 자랑하고 교황조차 그 권위 밑에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였다. 동시에 이때부터 독일 정체성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제국은 대내적 분열과 대외적 충돌로 홍역을 치르게 됐으며 그 결정판인 30년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각 지역의 영방들이 독립국가에 가까운 자립이 허용됨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조는 남독일과 오스트리아 외에는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17세기 이후 이렇듯 부침을 겪는 모습에 볼테르는 형식밖에 없는 이 제국을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다.(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라고 비꼬았다.[2] 볼테르가 살았던 18세기의 독일 지역내 영방국가들은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세계국가적인 분위기가 자신들의 존속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제국을 지탱한 것은 제국대법원(라이히스카머게리히트). 제국대법원은 권한의 행사에 일부 제한이 있긴 했지만, 제국의 유지 및 로마법의 확산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그렇게 명맥을 이어오던 중, 오스트리아의 약화를 노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1806년 남독일의 16개 영방들이 "인 동맹"을 결성하고 신성 로마 제국에서 탈퇴를 선언하여 프란츠 2세는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서 840여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신성 로마 제국은 공식으로 소멸하게 된다. 애초에 프란츠 2세는 "정통 오스트리아"주의자였고, 제국 해체 전 이미 자신을 오스트리아 황제로 선포하며 유명무실한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고 오스트리아의 우월함을 강조하려고 했다. 신성 로마 제국 따위 없어도 오스트리아는 강대하다!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먼저 수작을 부렸다. 참고로 이 시기 제국의 해체를 두고 괴테는 "나의 마부가 언쟁을 벌이는 일보다 더 관심 없는 일이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전직 판사이자 프로이센의 총리였던 카를 폼 슈타인은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제안할 정도로, 무늬만 제국이었던 체제에 대한 독일인들의 애착은 대단했던 듯하다. 훗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재통합을 완수한 후 이를 계승한 독일 제국을 선포하였을 정도였다.

2. 국명

신성 로마 제국은 제국이기는 하지만 독특하게도 전신이었던 동프랑크 왕국의 국명 'königreich Deutschland', 즉 독일 왕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작센 왕조 당시 국명은 독일 왕국 이외에는 그저 알레만 왕국이였다. 800년대 프랑크의 카롤링거의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에서 교황에 의해 서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았다가 비잔티움 제국의 항의로 인해 타협의 결실로 페라토르바실레우스의 칭호를 받고 서로마 제국이 아닌 서유럽의 최고자로 인정해준 예가 있기에 그저 '독일인과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오토 3세때 잠시나마 로마 제국과 로마 황제를 자처했으나 오토 3세의 사망으로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잘리어 왕가 이후 비잔티움 제국과의 공수관계가 역전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서유럽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이탈리아로 배타고 넘어가서 교황을 협박하는 정도 밖에는 없게 되었다.(...) 독일 영토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도 결국 불가리아 왕국도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안습이 된 상황에서야(...) 로마 제국"(Römisches Reich[3])"의 국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1157년 이후 호엔슈타우펜 왕가 이후로는 프리드리히 1세 바바롯사가 공식적으로 국명에서 로마를 빼고 신성을 대신 넣어 "신성 제국(Heiliges Reich)"이라 명명했다. 그러다가 1254년이였던 대공위시대 때 대립 왕 중 한명이었던 홀란트 백작 빌헬름(빌렘) 3세가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을 사용해 비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가 1442년 합스부르크 왕가 때 "독일 국민의 로마 제국"을 사용하다가 1512년 쾰른의 제국 의회에서 최종적으로 "독일(도이치)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3. 정치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는 대대로 황제와 제후들간의 대립, 대외적으로 타국의 국왕이나 아니면 교황과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다. 신성 로마 제국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로는 국 의회와 국가교회정책, 작센 왕조 시기의 동유럽 및 이탈리아 반도로의 진출, 황제 선출과 선제후,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많은 작위와 영방국가들이 특징이다.

4.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편견과 반박

4.1. 신성 로마 제국의 출발은 오토 1세가 황제 대관을 받은 962년부터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수립'이라는 사건은 어느날,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나라가 지도 위에 불쑥 생긴 것이 아니다. 오토 1세의 대관은 독일 국왕이었던 오토 1세에게 '로마인들의 황제'라는 타이틀을 추가적으로 부여한 것일 뿐이며, 이 대관식이 없던 나라를 탄생시킨 것이 아니다. 이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고대서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를 교황의 권위를 통해 복구하는 의미이므로, 이 정치체제의 군주는 정식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프랑크 국왕, 후에는 로마 국왕이며, 이 직함을 얻은 사람이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로마 황제로 취임했던 것이다.

따라서 오토 1세를 제국의 초대 황제로 간주하는 시각은 800년 12월 25일 프랑크의 왕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에서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고 축성된 뒤 서유럽 지역의 '황제'로 선포된 사건을 흑역사 취급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카롤루스 이후에도 '황제'의 지위는 계승되었으며, 924년 베렝가리오 1세의 암살 이후 제관 수여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가 962년 독일 왕국의 국왕 오토 1세가 로마 교황 아가페투스 2세로부터 제관을 수여받으며 황제의 지위가 복원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이란 제국을 최초로 건립한 초대 황제가 아니라 단지 서유럽에 재건된 제국의 황제 지위를 작센 왕조로 복원시킨 군주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 이후 실질적으로 독일 왕국의 또다른 이름처럼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며, 이탈리아 북부에 진출한 적은 여러 번 있어도, 프랑크 왕국의 분열 이후 프랑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서 신성 로마 제국을 '독일과의 연관성이 강화된 서유럽의 제국'이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토 1세는 프랑크 왕국 분열 이후 사실상 실질적 역량을 상실한 제국을 독일 왕국 중심으로 재편시킨 군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며, 이 기준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독일적 성격과 연관지어 정의한다면 오토 1세를 창업 군주로 평가하는데 무리가 없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4.2. 중세의 신성 로마 제국은 외국과 달리 중앙집권화되지 못했다?

이원복이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복잡하고 오랜 설명이 필요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 부분을 서양 봉건제에 대한 이해 없이 동양사 기준으로 단정지어 퍼진 오류. 참고로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서 봉건제를 설명할 때 그림으로 조선 왕과 신하들을 그려버렸다. 이게 잘못인 이유는 과거라는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출하는 관료제 국가와 봉건제 국가를 같은 연장선상에 넣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원복이 서양사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부족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4] 그런데 네덜란드편에서는 동양 중앙집권제와 서양 봉건제를 대조하며 전자에 조선 왕+신하를, 후자에 유럽 중세풍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먼저 이원복의 생각과 달리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은 그렇게 낮지 않았다. 대영주-황제-교황은 서로를 견제하며 세력의 균형을 이루었고 그 세력 균형이 깨질 때는 프리드리히 1세때처럼 황제가 황권을 확대하기 위해 선수를 칠 때나 제위 계승이 불안정할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유럽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본다면 중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이 오히려 높은 축에 속함을 알 수 있다. 당장 이원복이 신성 로마 제국과 비교한 프랑스의 경우 위그 카페 시절에는 대주교가 대놓고 왕을 무시하고 국왕을 선거제로 뽑아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카페 왕조 초기에는 프랑스 왕 역시 신성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선거왕제였다. 다만, 왕조가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이 많았던 초기 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운 좋게 부자계승이 여러 세대 동안 지속되면서 카페 왕조의 지위가 공고해진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왕 자체의 세력은 오히려 다른 대영주들에 비해 크게 못미치는 등 신성 로마 제국보다 낮으면 낮았지 높다고는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또 잉글랜드의 사례와 비교는 불가능한 것이 잉글랜드는 외세인 정복왕 윌리엄이 기존의 색슨인들을 몰아내고 대륙인들을 등용한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혹은 프랑스와 1:1로 대응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선거제는 대단히 안정된 체제였다. 7명의 선제후들은 황제가 죽기 전부터 다음 황제를 미리 선출해놓았으며 그것도 대부분은 온갖 사탕발림과 갈굼 등으로 현 황제의 후계자를 지명할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먼나라 이웃나라에 황제들이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허울에 즐거워하고 (북)이탈리아에만 신경을 쓰느라 독일 지역의 영주들이 힘을 키우는 것을 방관했다고 써놓은 부분을 무조건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제국의 황제에 이런 멍청이들만 올랐을 리가 없다(...). 제국 황제들의 중앙집권화 노력에 대해 더 알고싶다면 하인리히 4세, 프리드리히 1세 항목 등을 참조하자. 여기서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그 황제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후일담으로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종국에는 시칠리아로 쫓아버려 죽게 한다(...). 이처럼 중세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황제와 교황이 끊임없이 영향력을 다투는 시기였고 그나마 카노사의 굴욕 전까지(=중세 중기 이전)만 해도 교황은 황제의 봉신(封臣. 봉토를 받은 제후) 취급을 당해야 했었다.

오히려 제국의 분권화는 중세가 지난 이후부터 급속히 진행된다. 중세 말기부터 이웃한 유럽 국가들은 점차 근대의 국민 국가로서 군주가 봉건제후의 영지를 서서히 흡수해갔다. 반면 제국은 황제를 선거로 뽑는 제도와 그에 의한 봉건제후의 갈등, 여러 왕조들의 단명, 독일 지역의 높은 인구 밀도[5], 그리고 제국 내의 여러 민족 등으로 인해 봉신들의 영지 하나하나가 근대국민 국가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 '결과' 역시 원인을 소급하자면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성 로마 제국의 결정적인 실패는 여러 왕조들이 단명하였고, 왕조가 단절될 때마다 선거 왕제로 복귀하거나, 심하면 대공위 시대까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웃한 랑스 왕국의 경우 1,000년 가까이 카페 왕조가 유일한 왕가로서 존재하였으며, 발루아 왕조나 부르봉 왕조도 결국 따지고 보면 카페 왕조의 방계에 불과하다. 이러한 안정적인 왕위 계승 덕분에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중앙집권으로 가는 길이 정체되지 않고 꾸준히 이어졌던 것이다.

또한 제국 내부에서 성직자 서임권을 가지지 못하고 주교령의 독립적인 정치적 지위 까지 인정해야 했던 신성 로마 제국와는 달리, 프랑스 왕은 왕국 내의 교회를 높은 수준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또 중앙 집권 능력에 차이가 나게 된다. 다만, 프랑스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특수성'으로 봐야 할 것이다. 유럽에서 프랑스 카페 왕조처럼 오랫동안 꾸준히 버티면서, 서서히 중앙집권을 강화해온 왕조는 훗날 이탈리아를 건국하게 되는 사보이 왕조 뿐이다.

결국 제국은 30년 전쟁과 그에 따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해 영방국가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고 판정지어졌고 19세기 초 결국 나폴레옹의 손에 해체되기에 이른다.

4.3.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의 나라이다?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이 집권한 독일을 제3제국이라 하면서 호엔촐레른 왕가의 독일 제국을 제2제국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제1제국으로 하면서 발생한 오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만의 제국이라 보기는 어렵다. 카롤루스 대제가 이룩한 프랑크 왕국 자체가 독일 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까지를 포괄하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이후 그의 손자대에 이르러 베르됭 조약을 통해 셋으로 분리될 때에도 그 기준은 민족이나 언어가 아니라 단순한 지형이었다.

오토 1세 이후 독일 왕국 중심의 제국을 놓고 봐도 독일 민족만의 국가라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신성 로마 제국은 동부로의 팽창을 자주 시도했고, 따라서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정확히는 독일 오스트리아의 게르만인)이 주를 이루기는 했지만 보헤미아인, 이탈리아인, 프랑크인, 그외 동부의 슬라브족 등 수많은 민족들이 존재한 다민족 국가였다. 사실 고대 로마만 하더라도 라틴족 뿐만 아니라, 그리스인을 비롯한 온갖 민족들이 모여살던 국가였다. 로마시에서는 라틴어가 통하지만, 제국의 동부는 그리스어 문화권이었고 그 외에도 지방마다 고유한 언어가 통용되었다. 당장 이스라엘 지역만 하더라도 아람어(예수의 모어)가 쓰였다. 중세 로마(이른바 비잔티움 제국)도 그리스인을 비롯하여 불가리아인, 페르시아인, 이탈리아인 등 온갖 민족들이 모여살던 동네였다. 옛 제국들을 현대의 민족국가에 대입하여 보는 것은 분명히 오류이다. 비슷한 예로, 중세 로마를 보고 '라틴어를 안쓰다니!', '그리스인이 주축이라니!'하면서 로마의 정통성을 이어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당연히 오류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미 고대 로마에서도 그리스어가 잘만 쓰였다. 당장 신약성경만 하더라도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유럽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발생한 것은 아무리 일찍 잡아도 근대를 넘길 수는 없다. 아니, 그 개념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나폴레옹의 등장 이후부터이다. 크리스트교를 믿지않는 사라센인이나 본격적으로 개종하고 카르파티안 분지에 정착하기 전인, 9세기 즈음의 마자르인이 아니라면 딱히 이질감은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경우 결코 현대 민족적인 관점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중세 유럽의 유일무이의 진리나 아니면 정주민이 아닌 기마 유목민이라는 딱 봐도 눈에 보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화적 관점에서 배제된 것이다. 실제로도 마자르, 폴란드 등 저러한 생활 문화적 관점에서 이질감을 유발했던 이민족 또한 10세기를 넘어 점차 정주민화 되어 가고, 기독교와 봉건제를 받아들이며 중세 보편 기독교 세계 (Christendom)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융화되어 갔다. 심지어 국가간의 국경조차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민족적 관점에서 '독일인'이란 개념이 정립된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이 망한 19세기의 일이니, 나중에 온 민족 국가 독일의 관점에서 역사적 전례이기는 하지만 근대 민족 국가 독일과 직접적으로 법통이 이어진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을 분석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관점에서 오류이다.

결정적으로 국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황제를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의 귀족들은 자신의 뿌리를 로마와 로마가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카톨릭 신앙에서 찾으려 했다. 프리드리히 1세를 비롯한 많은 황제들이 이탈리아에 그렇게도 집착했던 이유는 교황과의 정치적, 종교적 갈등 뿐만이 아닌 것이다. 참고로 독일인들이 자신의 조상을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게르만족들에게 찾으려고 한 것은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 빌헬름 1세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등 근대나 현대에 들어서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만의 제국이라 보기는 어려우며 이를 억지로 부인하고 독일인만의 제국이나 독일만의 역사로 보는 것은 나치즘같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근거한 행위거나 서양 중세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발언이다.

5. 신성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6. 매체

보통 서브컬처 주로 판타지물에서 신성 ○○ 제국이 주구장창 나오는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을 패러디한 명칭이다.
예)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5의 '신성 그리핀 제국', '신성 중고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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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독일 제국나치 독일이 각각 제2제국, 제3제국으로 불리는 것처럼 신성 로마 제국도 제1제국(제1라이히)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이후의 분류로, 본토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 [2] 볼테르가 비꼰건 신성로마제국 뿐만이 아니라 비잔틴 제국 또한 로마의 명맥이 끊겨 천년동안 내시 여인내 이방인들의 암투와 야만적인 통치 뿐이었다라며 역사의 무지한 수준 인증을 했다. 딱히 볼테르가 무식해서가 아니라 그시대의 지성의 한계다. 인물 디스로도 서로 한때 서로의 지성을 후빨했던 루소와 사이가 틀어지자 사생아 낳고 도망갔다며 이건 사실인데 인신공격이나 하는등 볼테르가 근대 이성의 상징(?)으로 불리기엔 지금으로 치면 무리가 있다.
  • [3] 독일어 'Reich'는 라틴어 'Imperium'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제국"을 의미한다.
  • [4] 오해해서는 안 될 점은, 먼나라 이웃나라가 베스트셀러 국민 학습만화(?)이기에 시도때도 없이 까이는 것일 뿐이지, 애초에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유럽교양서(역사책도 아니다)를 가지고 역사를 이해하려는 태도부터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책에 역사책 수준의 정확성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가 있으며, 엄청 오래전 이원복의 유학시절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서술된 책이므로 당시의 낡은 역사책들의 관점의 영향을 받은 면도 많다. (개정을 나름 하긴 했는데, 아주 열심히 한건 아닌 부분은 까여도 되지만) 잘못된 상식으로 자리잡은 것들을 지적하는건 필요하지만, 너무 저자만 깔 일도 아니다. 역사뿐만 아니라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요리나 와인에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잘 아는 분야별로 오류를 조목조목 집어내면서 가루가 되도록 까는 경향이 있는데, 애초에 청소년층 타겟의 오래된 유럽교양서일 뿐이지 역사책도, 경제책도, 요리나 와인 서적도 아닌 책에 그렇게 세부적인 태클을 걸면 무수히 까일 게 나오는게 당연. 사실은 역덕들도 어릴 적 먼나라 이웃나라를 마르고 닳도록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 대다수인지라 애증이 생겨서 그렇다 중2시절의 자신의 지식수준을 혐오하는 거다 왈가왈부 하기 전에 애초에 역사책이 아니라는 것.
  • [5] 중세 말부터 독일 지역은 한자동맹의 개발이나 남독일 지역의 공업 발달 등으로 인해 유럽 내에서 손꼽히는 인구밀집 지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