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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last modified: 2015-06-03 04:10:42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역사
3. 여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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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를 장화라고 생각한다면, 딱 발 끝 부위에 위치한 차기 좋게 생겨먹은 섬이다.이탈리아인의 축구실력은 영토에서 예견되었던 거시다 하지만 비유와는 달리 지중해 최대의 섬이다. 면적은 25,709㎢, 인구는 4,866,202명(2001 추계)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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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는 그리스계 주민들이 이주하여 그리스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메시나 등의 폴리스가 있었으며,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이쪽으로 진출하자 로마에 구원을 청하여 그 이후로 길고 길게 이어진 포에니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포에니 전쟁 이후로 로마 세력권에 들어왔으며, 대규모 농장이 건설되어 플랜테이션 농업이 시작되었다. 로마의 밀셔틀 제1호.

로마 제국 시대에는 노예 반란이 좀 일어난 것을 제외하면 평화를 누렸으나, 제국 멸망 이후에는 북아프리카이슬람 세력과 이탈리아의 기독교 세력 사이에서 수시로 점령 세력이 바뀌는 혼란스러운 역사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11세기를 경계로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노르만계 왕국인 칠리아 왕국이 성립되면서 가톨릭계 왕국이 이 섬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시칠리아 왕국은 남 이탈리아를 정복해 세력을 넓혀 근대까지 왕국이 존속하게 되었다. 이른바 양 시칠리아 왕국. 중세왕국의 특징에 따라 단일혈통 왕국이 아닌 결혼과 상속을 통해 계속해서 바뀌게 되었다. 왕국을 성립시키고 발전시킨건 노르만계(오트빌 왕조)지만 이후 이 계통이 단절되면서 사위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신성로마제국 황제가문)이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체를 원했던 호엔슈타우펜 왕가는 결국 교황과 반목하게 되었고 교황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원했던 프랑스와 결탁해 당시 카페왕조의 왕인 루이9세의 동생인 앙주백 샤를을 초빙해 호엔슈타우펜 왕가를 물리치고 시칠리아 왕으로 삼았다. 왕이된 앙주백 샤를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고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원정(비잔틴제국을 침략하여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있었다.)과 원정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시칠리아에 물었고 이는 많은 반감을 사게되 결국 시칠리아의 만종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앙주가는 시칠리아에서 쫒겨났고 호엔슈타우펜 왕가 출신의 마지막 왕인 만프레드의 사위인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 왕이 되었다. 이후 아라곤 왕국이 카스티야 왕국과 합쳐져 스페인 왕국이 되면서 계승권이 스페인으로 넘어가 스페인계 왕국(합스부르크 왕가)이 되었으며 계승되오다가 나폴레옹에 의해 왕가가 교체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통일이 되면서 통일왕국에 흡수되었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엄청난 역사를 자랑한다. 청동기 시대에 시크리 인, 시카니 인, 엘류미 인이 거주, 주석(錫)무역의 중계지로 미케네 문화와도 접촉하며 고유의 문화를 지녔다. B.C. 8세기에 그리스 인이 도래한다. 카르타고 인의 모튜에 건설에 따라 그리스 화한다. 낙소스, 시라쿠사이(현재 시라쿠사), 게라(현재 제라), 메가라 히부라이아 등 그리스 식민시의 건설에 따라 선주 민족은 내륙으로 밀리고 해안 지역은 완전히 그리스 화했다.

B.C. 6세기부터는 세리누스(현재명 세리눈테), 아크라가스(현재명 아크리젠트), 세게스타(현재명 세제스타) 등이 건설되어 마그나 그라에키아의 일부로 됐다. 미술도 그리스 본토와 이오니아 지방과는 달리 부드러운 요소를 지니게 되어 B.C. 4세기 후반 이후 첸투리베 등에서 독특한 도기도 만들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B.C. 201)을 거쳐 로마의 속주가 되나 공화정기에는 정체의 시대로 2세기 이후 로마의 곡창으로 번영했다. 고대 말기에는 피아차 알메리나메 대규모 모자이크 장식의 큰 별장 등이 건설되었다.

비잔틴 통치 시대인 827년에서 아랍 통치 시대의 요소는 다음 노르만 왕조시대(1071~1266)의 미술에 계승되어 팔레르모의 궁정예배당(카펠라 팔라티나), 몽레아레 대성당, 체파르 대성당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있다. 시칠리아의 노르만 미술에는 비잔틴적 요소와 함께 이슬람 파티마 조의 미술전통이 존속되었다. 견직물은 아랍 인에 의해 시칠리아에서 제조가 시작되고 다시 유럽으로 퍼져감. 남이탈리아와 함께 상아 세공이 발달하여 일군의 채화장식으로 된 상아상자는 12~13세기의 시칠리아 제로 되어 있다. 13세기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Ⅱ, 1194~1250, 나폴리 ∙ 시칠리아왕으로는 프리드리히 1세. 1215년 이후 신성로마황제) 시대는 동서문화의 융합을 꾀하여 시칠리아 ∙ 르네상스라고도 불리는 시대로 문화적으로 활발하였으나 섬 내에서 당시의 미술유품은 적다.

1442년부터 다시 나폴리 왕국과 함께 동일한 왕을 모시게 되어 남이탈리아와 문화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게 된다. 15세기에 활약한 안트넬로 ∙ 다 ∙ 메시나는 시칠리아가 탄생시킨 최대의 화가임. 바로크 시대의 미술은 스페인의 영향이 강하고 바로크 도시로서의 노드는 당시의 양상을 가장 잘 전해주고 있다. 시칠리아의 미술은 지중해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항상 외래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현대에는 마피아의 본거지로 유명하다. 남쪽에 몰타 섬이 있다.

3. 여담

참고로 서유기에서도 언급된다. 해가 지는 땅이라며 저팔계가 59장에서 언급한다. 화염산에 가까워졌을때 일행이 "왜 이렇게 덥냐"고 불평하자 저팔계가 서쪽에는 시칠리아라는 해가 지는 땅이 있다며, 엄청 덥다고 애기하자 손오공이 시칠리아는 엄청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핀잔을 준다. 여기서 나오는 시칠리아는 몇몇 영어 번역에서는 Sicily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할리(원본에는 사합리(斯哈哩)로 등장한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중에 상당수가 시칠리아 지방 사람들의 후손이다. 대표적으로 마틴 스콜세지의 증조부가 시칠리아 이민자다. 2차 세계 대전 도중에 미군이 시칠리아 섬에 주둔할때 꽤 많은 이탈리아계 미군 병사들이 혹시나 자신들의 먼 친척이 있나 알아보려고 시칠리아 섬을 돌아다녀봤고 꽤 많은 이탈리아계 미군 병사들이 본인들도 존재하는지 몰랐던 먼 친척들을 만났다고 한다.

시칠리아 북부 해안 마을 "카네토"(Canneto)는 악마가 출몰하는 마을미스터리 매니아들에게 유명하다. 2004년을 기점으로 마을 전체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 때문에 엑소시즘을 해야 한다느니 마을 전체에서 전선을 뜯어내야 한다느니 말들이 많다고 한다. 일단 현재까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전기 화재" 정도밖에는 알아내지 못한 듯. 위키피디아(영어)

많은 축구팀이 있는데 주도 팔레르모를 연고로한 US 팔레르모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