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솜 전투

last modified: 2018-08-19 03:14:29 Contributors

솜 전투
날짜 1916년 7월 1일 ~ 11월 18일
장소 솜므 강(Somme River)
교전국 영국-프랑스 연합 독일 제국
지휘관 더글라스 헤이그
페르디낭 포슈
핸리 롤린슨
에밀 파욜
휴버트 고프
조세프 알프레드 미켈러
바이에른 대공 루프레히트
맥스 폰 갈비츠
프리츠 폰 벨로우
병력 7월 1일
24개 사단[1] 10과 ½개 사단
11월 1일
99개 사단[2] 50개 사단
피해 규모 623,000여 명[3] 465,000 ~ 595,000여 명
결과 11월 18일, 영-프 연합군 공세 중지.

Contents

1. 개요
2. 전투 이전
3. 전투 경과
4. 트리비아














1. 개요

Battle of Somme.

제1차 세계대전 중 1916년 7월 1일부터 동년 11월 18일까지 벌인 영국의 공세. 1918년 아라스 전투와 비교하기 위해서, 1차 솜므 전투라고도 부른다.
1916년, 서부전선에서 펼처진 대규모 전투 중 하나. 철조망기관총이 군인들의 목숨을 추수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가운데 가장 잔인한 학살극을 벌인 전투다. 개전 당일 인명 손실이 영국군에서만 5만 8천명으로 대략 3~5개 사단이 하루만에 녹아 없어졌다. 이 때문에 영국 미디어들은 매년 7월 1일만 되면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기사를 내보낸다.

최초의 전차 투입, 이동 포격 탄막 전술의 전개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2. 전투 이전

1916년에 접어들 당시, 연합군측은 러시아군의 피해가 컸던 동부전선에서는 수세로 전환하고, 서부전선에서는 영국-프랑스-이탈리아 3국이 대규모 공세를 시도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독일군베르됭 전투를 걸어오면서 무산된다. 베르됭 전투로 인해 공세의 주력을 담당할 것으로 여겨졌던 프랑스군이 대거 빠져나갔고, 반면 영국은 병력 증강을 위한 대규모 모병 활동의 결과로 비로서 프랑스군에 필적하는 규모의 군대('키치너 군대')를 갖추게 되면서 솜 전투는 1차 세계대전 역사상 최초로 영국군이 주도하는 공세가 되었다. 실제로 이 전선에서 프랑스 총사령관인 조르프는 영국군 총사령관인 헤이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

또한 최초 계획이었던 8월 1일에서 7월 1일로 공세 일자가 앞당겨졌는데, 이는 베르됭 전투의 전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면서 프랑스측이 공세 시기를 앞당기기를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쪽에 브루실로프 공세를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어떻게 해서든 베르됭에 가해지는 독일군의 압력을 줄이고자 하였다.

초기 전투 목표는 베르됭 전투의 독일군과 비슷한 것이였다. 즉 독일군의 예비병력을 최대한 고갈시켜버리겠다는 것. 그러나 독일군의 주력이 베르됭으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공격의 주도권을 쥔 영국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는 '이참에 여길 뚫어서 독일군 서부전선을 확 붕괴시켜버리자'는 야심찬 목표를 품게 되었다.

3. 전투 경과

8일 간의 준비포격에 이어 7월 1일 영국군의 돌격이 벌어졌다. 하지만 대량 포격에도 독일군의 종심방어망은 상당부분 남아있었다. 포병이 다 때려부쉈으니 소총 들고 유유히 걸어가 깃발만 꽂으면 된다고 교육받았던 영국군의 보병들은 개전 첫날부터 독일군에게 대량으로 학살을 당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단 하루만에 5만 8천명의 인명이 사라졌는데, 심한 곳에서는 기관총반 한 두팀에게 대대급 병력이 쓸려버린 곳도 있었다고.

공격준비 포격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에는 여러 주장이 있는데, 영국군 포탄의 품질 불량으로 불발탄이 많이 나왔다는 주장도 있고 무른 솜 지방의 토질을 들기도 한다. 아직도 경작지 개간 중에 불발탄이 심심찮게 나온다고. 여기에 워낙에 많은 수의 야포를 일단 동원하다 보니 발생한 사거리 격차 문제도 심각했다. 프랑스군이 동원한 포는 사실상 목표거리를 달성했지만, 소구경까지 끌고 온 영국군의 포격은 허울만 좋았지 사실상 전장에 닿지도 못하고 중간에 떨어졌다. 게다가 영국군이 쓴 포탄의 대부분은 참호나 철조망 등의 시설물의 파괴를 기대할 수 없는 인마살상용 유산탄이었지 참호 등의 구조물들을 부수는 유탄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대로 포격한 곳은 진격했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위에 언급한 예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이 뒤부터는 마찬가지로 참호전의 연속. 최초의 전차Mark I이 공세 후반기인 9월 15일 전선 돌파를 위해 나온 것이 특기할 만하다. 다만 전투에서만 쓸 만했지, 작전술적이나 전략적인 돌파를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직 전차를 쓰기엔 기술적으로도, 작전적으로도 조건이 성숙하지 못한 때였다.

최종적으로 연합군은 12km 앞으로 전진했는데 이 때 발생한 인명 손실은 영국군(영연방군 포함) 42만명, 프랑스군 20만명. 이를 막기 위해 싸웠던 독일군의 인명 손실은 50만~60만 명 가량. 양측 피해를 합치면 1km 당 대략 10만, 전체 약 120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셈이다. 이쯤되면 공격으로 얻은 땅이 전사자 매장하기도 부족하다라는 참호전의 평가가 실감이 나는 수치다.

4. 트리비아

  • 당시 아프리카 가봉에서 아프리카인들에게 무상 의료를 하던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이 전투 소식을 듣고 침울했다. 그 무렵 아프리카 사람들은 전쟁을 벌일 때 아이들이나 여자(그러니까 비전투원)는 죽이지 않고 저항하지 않은 자는 건드리지 않으며 승자는 패자의 보상금으로 가축을 준다[4]는 이야기를 하면서 "백인은 전쟁을 하면 몇 명이나 죽습니까?"라고 묻길래 이 솜 전투를 생각했지만, "당신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많은 수가 죽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어지는 아프리카인들의 반문이 걸작.

"그럼 백 명도 넘게 죽입니까? 백인은 너무나도 잔인하군요."
"백인은 부자로군요. 그 많은 사망자에게 보상을 줘야 할 테니까요."

이런 답변이 돌아와 슈바이처는 더더욱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바리에이션이 많아서 식인 풍습이 남아 있는 오지의 원주민과 선교사의 다음과 같은 얘기도 있다.

원주민 : "그렇게 많이 죽습니까?"
선교사 : "그렇습니다."
원주민 : "그러면 백인도 죽인 적의 시신을 먹나요?"
선교사 : (질겁을 하며)"아닙니다."
원주민 : "백인들은 참 이상하군요. 먹지도 않는다면서 사람을 왜 그렇게 많이 죽입니까?"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TV 드라마인 인디아나 존스에서도 나왔는데, 거기에선 좀 다르게 원주민들이 말하는 한번의 전투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 수가 10명으로 나온다. 일명 '문명인'이 오히려 '미개인'보다 잔혹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

  • 또한 여담으로 반지의 제왕 작가로 유명한 존 로널드 루엘 톨킨도 영국군 장교로 이곳에 왔다가, 간신히 살아돌아왔다. 그의 작품인 반지의 제왕에 여러 영향을 끼친 일 가운데 하나.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참호 독감 (Trench Fever)에 걸려서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하지만 후송 직후 톨킨의 동창이자 친구들, 대대원들 그리고 자신의 부대를 지휘한 임시 부대장까지 전사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 1차대전 뒤 예술가지식인들이 괜히 데꿀멍한 게 아니다. 1차대전 뒤에 나타난 다다이즘 미술 사조와 허무주의적인 문학은, 전쟁을 거쳐 드러난 물질 문명의 추악한 모습(기관총, 독가스)을 반영했다고 보면 충분하다.

  • 영국군에서 전투의 준비 및 초반을 기록영화로 촬영했고, 이것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도 했다. 홍보영상이라 당연히 전쟁의 참상이 아닌 깔끔하고 해맑게 웃는 병사들만 나오는데, 이랬던 그들의 절대 다수가 죽었으리라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다.#

  • 2014년 8월 14일 영국 BBC3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기념 다큐드라마 '아워 월드 워Our World War' 2화로 솜 전투를 그린 "Pals"를 방영하였다. #
----
  • [1] 영국군 13개 사단, 프랑스군 11개 사단
  • [2] 영국군 51개 사단, 프랑스군 48개 사단
  • [3] 영국군 사상자 419,000여 명, 프랑스군 사상자 204,000여 명
  • [4] 승자가 안 빼앗고 패자에게 보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