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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훈

last modified: 2018-05-31 01:08:48 Contributors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연세대학교 시절.MVP를 수상했던 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시절.그의 프로 마지막경기인 직체육관 3월 19일 전주 KCC 이지스전에서.


이상한게 있는 것 같지만 넘어가자.
방송쟁이 서셀럽의 방송 데뷔작

이름 서장훈(徐章勳)
생년월일 1974년 6월 3일
국적 한국
출신학교 휘문고 - 연세대학교
포지션 센터
신장 205cm[1]
프로입단 1998년 SK텔레콤 농구단 입단
소속팀 청주/서울 SK 나이츠(1998~2002)
서울 삼성 썬더스(2002~2007)
전주 KCC 이지스(2007~2008)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엘리펀츠(2008~2011)
창원 LG 세이커스(2011~2012)
부산 KT 소닉붐(2012~2013)

1993~1994 농구대잔치 MVP
서장훈(연세대학교) 허재(기아자동차)

1996~1997, 1997~1998[2] 농구대잔치 MVP
김유택(기아자동차) 서장훈(연세대학교) 조우현(중앙대학교)

1999~2000 한국프로농구 MVP
이상민(대전 현대 다이넷) 서장훈(청주 SK 나이츠) 조성원(창원 LG 세이커스)

2005~2006 한국프로농구 MVP
신기성(원주 TG삼보 엑서스) 서장훈(서울 삼성 썬더스)
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
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

1999~2000 한국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조성원(대전 현대 다이넷) 서장훈(청주 SK 나이츠) 주희정(수원 삼성 썬더스)

2005~2006 한국프로농구 올스타전 MVP
찰스 민렌드(전주 KCC 이지스) 서장훈(서울 삼성 썬더스) 조상현(창원 LG 세이커스)

정규시즌
시즌 경기수 출전시간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락 턴오버 필드골 3점슛 자유투 TS eFG PPP EFF Gmsc PER KBL 공헌도
15 688 33:11 19.23 7.61 1.57 0.52 0.67 2.35 51.71 36.02 76.95 57 54 1.11 22.53 13.27 21.07 1361.24

플레이오프
시즌 경기수 출전시간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락 턴오버 필드골 3점슛 자유투 TS eFG PPP EFF Gmsc PER KBL 공헌도
11 41 34:49 18.73 7.17 1.56 0.63 0.49 2.17 50.16 27.17 85.03 57 52 1.11 21.51 12.59 15.52 119.04

Contents

1. 개요
2. 선수 생활
2.1. 프로 이전
2.2. 프로 이후 전설의 진행형
3. 팬들의 평가
4. 은퇴 이후의 재평가
5. 그 외
6. 방송 활동
6.1. 출연 경력
6.2. 현재 출연 중

1. 개요

센터 포지션을 넘어 한국 농구계의 살아있는 전설.
통산 최다 득점 13231점, 통산 최다 리바운드 5235개의 소유자[3]



대한민국의 前 농구선수이자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예능 늦둥이. 키 207cm. 전, 현역 통틀어 한국농구에 등록한 선수중 하승진에 이어 두번째로 큰 키이고,[4] 폭풍 2도움 하승진 등장 이전까지는 최장신이었는데, 실제 신장은 최소 신발 벗고 205cm, 신발 신고 잴 경우가 207cm은 된다는게 정설이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조금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선배 한기범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키를 한기범과 똑같이 적어냈다는 말도 있다. 대한민국 농구를 대표하는 센터. 사실 포지션을 따지지 않아도 대한민국 농구 역사상 최강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선수다. 센터 부문에서는 경쟁자가 없다.[5]

상대 선수들의 집중 견제 탓에 부상을 달고 살며 말년에는 골밑보다 외곽을 많이 도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우월한 신체 조건을 이용한 포스트업에도 상당히 능했으며, 이를 역이용한 미들슛 또한 상당히 정확했다. 미들슛만이 아니라 3점슛도 마찬가지.[6] 포스트업도 막기 힘든데 수비를 달고 쏘는 미들슛, 3점슛도 쏙쏙 들어가니 상대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 게다가 말년에 외곽을 많이 돌았다는 것도 상대적인 의미이지 실제로는 골밑을 자주 지키며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의 운동선수라는 조건에서도 의외로 공부도 상당히 잘했고 IQ 140이 넘을 정도로 머리도 좋다고 한다. 최화정의 파워타임에서 IQ 정확하게 측정한게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공부는 잘했다고 함.

서장훈의 역대 스탯 국내선수로서는 드물게도 시즌 평균기록 더블더블을 네 차례나 기록한 바 있다. 또한 평균 20점 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다. 서장훈 외에 시즌 더블더블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는 하승진으로 한 차례 기록한 바 있다.[7]

2. 선수 생활

2.1. 프로 이전

초등학교 시절에는 야구를 먼저 시작했다고 한다. '피자신' 이도형과 같은 초등학교 출신이었다고. 중학교 때까지 야구부활동을 했지만 중1 때 이미 180cm를 넘은 키는 농구부에서도 주목했고, 휘문중학교에 농구특기생으로 전학한 뒤, 1년 동안은 기본기만 다지다가 중3 때 15cm 폭풍성장하면서 197cm의 거인 센터가 되어 포텐이 터졌고, 이때부터 농구로 완전히 전향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부터 같이 활동하던 단짝이자 1년 후배인 현주엽과 함께 휘문고를 고교 정상급의 팀으로 이끌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나란히 93학번과 94학번 최대어.

그러다 1993년 연세대에 입학하고 93-94 시즌 농구대잔치에 등장, 1학년 주제에 기존 대학 팀들의 인사이더뿐만이 아니라 기존 실업팀의 국가대표급 센터들까지 떡실신시키며 농구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다. 당시 서장훈만한 키를 가진 농구 선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나마도 노쇠한 기아의 한기범과 기량이 두드러지지 못한 현대의 정경호 둘뿐이었고 서장훈만한 키에 서장훈만한 힘에 서장훈만한 민첩함에 서장훈만한 공격 기술을 가진 선수는 이전에 한국 농구에 없었다. 이 당시 국내 농구인들의 희망사항이 "한기범의 키에 김유택의 기량을 가진 선수가 있으면 좋겠다."였고, 서장훈은 이 조건을 충족시킨 한국 농구 역사상 두명 뿐인 선수중 하나다.[8] 다른 하나는 김주성.

서장훈은 당시 농구대잔치 리그에서 연세대가 한기범김유택이 있던 기아자동차를 이기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고, 플레이오프에서 재차 기아자동차와 대결하는 일은 없었지만[9], 결승에서 상무의 센터 정재근을 제압, 결승에서 1패를 당하긴 했지만 이상민, 우지원, 문경은, 김훈 등과 함께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최초의 대학팀 우승으로 이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면, 허재, 강동희, 김유택, 한기범이 모두 뛰고 있던 중앙대조차도 준우승만 하면서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10]

youtube(VWoliNhunBY)
93-94 농구대잔치 결승전 영상. 젊은 시절 몸놀림이 훨씬 가벼운 서장훈을 볼 수 있다.

1994년에도 서장훈의 공포는 이어졌다. 서장훈은 21점 20리바운드 10블록슛으로 트리플 더블을 달성하기기까지 하며 공포의 존재로 군림했다. 고려대가 전희철, 김병철을 비롯한 기존의 강력한 선수진에 현주엽까지 입학시키는 데 성공하며 연세대를 노리는 상황에서 두 대학이 마주한 농구대잔치, 경기 도중 이상민이 부상으로 실려나가면서 고려대는 동점을 만들었고 연장전만 가면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연세대에겐 한번의 슛 찬스밖에 없는 상태에서 서장훈은 눈앞에 수비수를 달고서도 중거리슛 한방을 버저비터로 꽂아넣으며 팀을 승리로 이끌고 고려대를 충격에 빠트렸다.


위의 영상이 바로 당시 경기의 영상이다. 참고로 이 영상은 KBL 07-08 시즌에 추억의 영상으로 KBS에서 편집하여 방송한 것인데, 편집영상이 끝나고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진행자는 다름 아닌 오정연 아나운서... 이미 두 사람의 인연은 여기서부터 예고되었던 것인가...흠좀무

이상민이 부상으로 잃은 상태에서 1번 시드 연세대는 8번 시드 삼성전자와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맞게 된다. 당시 삼성전자는 2번 시드 고려대와 만나기보단 이상민이 없는 연세대와 붙는게 유리하다고 판단해 정규시즌 막판 석연치않은 고의성 패배까지 불사하며 8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상민을 잃어버린 연세대가 불리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정작 1차전은 건재한 서장훈의 활약에 대학시절 내내 동기 이상민에게 가려 출전 기회도 제대로 잡지 못했던 백업 포인트가드 성헌[11] 이 선발출장해 그야말로 이상민이 빙의한 듯한 엄청난 활약으로 연세대가 손쉽게 승리를 가져갔다. 삼성은 2차전을 가까스로 잡고 다음 라운드 진출 여부를 최종 3차전으로 끌고갔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 농구에 길이 길이 흑역사로 회자될 일이 벌어진다. 서장훈만 철저히 틀어막으면 이긴다고 본 삼성은 서장훈의 학교 선배인 문경은까지 가세해서 서장훈에게 그냥 폭력에 가까운 파울을 남발했고, 그 와중에도 서장훈의 활약은 계속되었는데, 삼성의 센터 상관은 거친 파울 속에도 서장훈이 득점을 하고 리바운드를 따내자 아예 서장훈의 뒷통수를 그대로 두들겨 패 버리고 만다. 연수 부분에 충격을 받은 서장훈은 그대로 코트에서 혼수상태로 쓰러지면서 병원으로 실려간 후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탈 뻔하다 살아나고, 삼성은 서장훈을 해치운 덕에 결승에 올라간다.[12]

이 때 서장훈이 당한 부상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목 다친 부분이 약간만 더 빗나갔어도 전신마비가 올 수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서장훈은 한국 농구에 환멸을 느껴 1995년 미국의 산호세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나 애초에 트랜스퍼 제한도 걸린데다 산호세주립대학이 농구로 알아주는 대학도 아닌지라 미국에서 별로 보여준 건 없이 1년만에 귀국한다. 서장훈의 기량과 재능도 상당히 좋은데 미국에는 서장훈 이상의 키와 스피드, 파워를 지닌 선수들이 많아서... 조재중 심지어는 미국 본토인도 아닌 아르헨티나 출신의 마누 지노빌리조차도 서장훈을 넘사벽으로 압도했다. 마누 지노빌리는 2004년 올림픽 농구종목 금메달리스트.

서장훈은 국내 복귀 후 황성인, 택훈, 조상현, 조동현과 함께 다시금 연세대를 최강팀으로 이끈다. 그리고 다시 농구대잔치. 서장훈이 이끄는 연세대는 당시 센터치고는 단신이지만 주목받는 활약을 보여준 영필과 장신 슈터 김성철, 그리고 강혁을 앞세운 팀플레이를 보여준 경희대와 플레이오프에서 맞섰다. 서장훈은 이미 경희대의 골밑을 유린한 적이 있지만 경희대는 당시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에 새롭게 떠오르는 센터 영필과 서장훈의 맞대결이 기대되었는데, 택훈은 에이스 킬러짓으로 영필을 코트에서 응급실로 직행시켜버렸고 서장훈은 맞설 상대 없는 경희대 골밑을 손쉽게 접수한다. 경희대는 1차전을 그렇게 잃은 후 2차전에서 인사이드의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강혁이 팀을 이끌며 연세대와 대등하게 맞섰으나, 택훈강혁마저 병원으로 보내버리자 경희대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고 만다.

그리고 결승. 이상민, 조성원, 문경은이 있는 상무는 현주엽이 있던 고려대를 격파하고 올라오면서 이번에야 말로 우승하겠다고 벼르고 있었고, 준결승에서 연세대의 테러를 본 농구팬들은 상무에게 일방적인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상무에는 서장훈을 막을 선수가 없었다. 서장훈에 의해 제공권을 장악당하며 상무는 패하고, 서장훈은 다시 한번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후 프로화된 농구팀에 입단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었다. 당시 진로그룹은 신생 농구팀을 창단하는 과정에서 연세대 농구선수들에 대한 우선지명권을 가지고 있었고 당연히 서장훈을 자기들의 신인으로 지명해 놓았는데 이에 대해 서장훈은 선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거라며 반발했기 때문.

이와 관련해 서장훈의 농구 유학 자체가 이후 프로화되는 실업팀에 입단하면서 대우가 나빠질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 당시 진로 농구팀 단장이었던 사람이 농구대잔치에서 삼성 감독으로서 서장훈을 골로 보낼 뻔한 짓을 지시한 인건이었기에 서장훈이 진로 입단을 꺼렸다는 말도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서장훈이 졸업 후 현대전자로 가기로 밀약이 되어 있었다는 설. 그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현대는 KBL 출범 과정에서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프로 전환 후에도 팀내 베테랑 선수인 이영주를 내치는 등 갈지자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진로가 부도나고 농구팀은 SK에 인수, 그리고 SK측이 인건을 단장에서 부단장으로 찍어내려버리고 최고대우를 약속하자, 서장훈은 SK에 입단한다.

2.2. 프로 이후 전설의 진행형

신인으로 SK 나이츠에 입단한 서장훈은 함께 입단한 현주엽과 함께 소속팀을 우승시킬 것이라고 사람들은 예상했으나, 서장훈과 현주엽은 각자 스탯만 잘 쌓고 시너지 제로의 모습을 보이면서 '시즌 전엔 우승 못하면 바보, 시즌 끝나면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라는 SK나이츠의 전통 첫 장을 열기만 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 SK가 시즌 도중 활동범위가 겹치는 현주엽을 슈터 조상현과 트레이드하면서 황성인, 데릭 하니발, 키 존스와 함께 팀을 99-00 시즌 우승으로 이끈다. 시즌 MVP는 서장훈의 몫. 사실 데뷔 시즌에도 국내 선수로서는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리바운드 1위를 차지했지만, 팀 성적을 이유로 신인상을 못 받았는데, 그 한을 제대로 풀었다. 외국 선수와 대적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과시한 것. 그리고 2001-02 시즌에는 외국인 1명이 식물 상태였던 만신창이 SK 나이츠를 이끌고 당시 최고 전력을 자랑한 대구 오리온스와 맞서서 7차전 접전을 이끌면서 역시 서장훈이라는 찬사를 얻는다.

그리고, 01-02시즌 종료후 놀랍게도 FA자격으로 서울 삼성으로 이적한다. 팬들이 대단히 놀랄수 밖에 없는게 농구대잔치시절 서장훈에 대한 린치에 가까운 거친플레이를 가한 삼성(그때문에 당시 서장훈의 부친이 김인건 삼성감독에게 드잡이질을 했을정도.)이었고 이적 당시 서장훈을 목장훈으로 만든 당사자들인 이창수 & 박상관 두 선배(강을준은 은퇴)가 멀쩡히 팀에 있었기 때문에 삼성행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 사람들이 많았고 모비스의 최희암감독이 강력히 영입을 희망하기도 해서 모비스로 갈 것으로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삼성행이라는 최대의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등가교환이라고 당시 삼성이 샐러리캡을 맞추기 위해서 우지원을 내쳐버렸다.[13] 서장훈으로 인해 쫒겨난 선배가 이상민 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장훈을 목장훈으로 만든 주범들이었던 창수&상관은 동시에 방출됐다.[14][15] 스포츠계에서 감독이나 스타선수 영입이 있으면 껄끄러운 관계인 선수나 코치들을 방출시키는게 관행이라 비난할일만은 아니지만 서장훈으로 인해 주전급인 우지원과 나름 전력급 백업센터인 창수 & 상관이 동시에 팀을 떠났다. 자신의 이적으로 대학선배 우지원이 팀을 떠나게돼서 마음이 안좋았다고 하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이적으로 또다른 대학선배인 이상민을 떠나게 만들어서 너무나도 안타까웠다고 한다.

어쨌든 서장훈이 합세한 서울 삼성은 05-06 시즌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이 05-06 시즌 우승 과정에서 정규 시즌에서는 서장훈이 활약하며 생애 두 번째 MVP를 수상했지만, 챔프전에서는 안준호 감독이 의도적으로 강혁과 네이트 존슨의 픽 & 롤을 구사하면서 서장훈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연장까지 간 2차전에서는 강혁과 함께 팀을 캐리했고, 접전이었던 3차전은 결승점이 된 자유투 2개를 성공시켰으니 비중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삼성과 갈등이 생긴[16] 서장훈은 다시 한 번 FA로 KCC 이지스로 이적했는데, 이 때 보상선수로 이상민이 삼성으로 가게 된다.[17]

서장훈은 KCC에서도 나름 활약했으나[18] 하승진의 등장 이후 출전시간이 줄어들자 트레이드를 요구, 강병현이 포함된 3:1 트레이드가 성사, 인천 전자랜드로 이적했다. 전자랜드에서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던 팀을 재건, 은사 최희암 감독과 만나며 6강 진출을 이루었고 유도훈이 감독이 된 10~11시즌 문태종-버트 힐과 같이 서태힐 트리오를 결성, 전자랜드를 팀 성적 역대 커리어하이인 정규리그 준우승으로 이끌었다.[19]

데뷔 시즌부터 10~11시즌까지 통산기록 12,500점을 돌파[20]했고 리바운드 4,986개로 독보적 1위이다. 센터중 유일하게 어시스트 1000개를 넘어섰다. 전술한 폭행성 파울로 인한 부상을 제외하면 철저한 몸관리를 통해 잔부상도 별로 없이 꾸준히 시즌을 소화해온 프로의식도 칭찬할만한 부분. 더구나 현역 주전 선수이기에 프로농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특히 득점 통산기록이 대단한 것은 2위를 다투는 문경은추승균보다 2~3,000점 이상 차이가 나는 데다가 서장훈이 문경은보다 3살이나 나이가 어리다는 점이다.

2010-11 시즌후 FA자격을 얻었으나 연봉 2억5천에 인센티브 1억 총 3억5천만원에 1년계약으로 팀 잔류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후 LG 세이커스의 이현민+강대협과 1:2 사인 엔 트레이드 형식으로 LG 세이커스로 이적. 유도훈 감독은 2010-11 시즌을 치르면서 종종 팀에 남아달라 요청했었고 서장훈도 별다른 잡음없이 무난하게 팀에 남을줄 알았는데, 이런 트레이드가 터짐으로서(게다가 기사에서 서장훈은 사전에 트레이드 진행을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전자랜드 팬들은 프런트를 폭풍 성토. 더군다나 서장훈을 내주고 얻어온 대가가 많이 부족해 보인다는것도(트레이드의 명분을 리빌딩으로 삼았는데 강대협은 30대 중반, 이현민은 이제 30대 들어서는데다 현재 상무소속이라 로스터를 비워둔다고 해도 2011-2012시즌 5라운드 이후에나 합류 가능. 게다가 강대협, 이현민 모두 요근래 하향세를 보였으니...) 이번 트레이드에 대한 비난의 한 원인으로 보인다. 어쨌든 원치않은 저니맨(...)이 돼버린 서장훈과 이번 트레이드를 주도한 전자랜드의 2011-2012 시즌 성적은 어떨런지...

결과적으로 2011-12 시즌은 서장훈 농구 인생 최대의 흑역사가 되었다. 노쇠하고 발이 느려진 상태에서 문태영과 롤도 겹치고, 애런 헤인즈 위주로 공격을 풀어간 LG에서는 그의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수비 면에서는 송창무가 어느 정도 각성하면서 장신 선수 수비에 굳이 서장훈이 필요 없어진 상황. 여기에 부상까지 겹치면서 완전히 시즌을 망쳤다. 그를 트레이드시킨 전자랜드는 6강 PO에는 진출했지만,[21] LG는 6강 PO 진출에 실패하면서 묘한 대비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 은퇴냐, 선수 생활 지속이냐를 두고 진지한 고민중이라고 한다.

결국 전창진 감독의 부름을 받고 연봉 1억원에 KT와 계약을 맺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기자회견을 열어 KT에서 뛰는 12-13시즌 이후 은퇴와 연봉 전액과 사비 1억을 더해 사회기부를 발표했다. 서장훈 본인은 은퇴식을 고사했지만 KT는 전설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은퇴식을 준비, 2013년 3월 19일 KCC와의 홈 경기에서 은퇴식 및 은퇴경기를 가졌으며, 33득점이라는 놀라운 기록, 그리고 이날 경기의 마지막 득점을 남기며 25년에 걸친 농구 인생을 마감했다.

3. 팬들의 평가

기록만 봐서는 프로농구의 톱이었고 화려한 커리어로 농구팬들의 추앙만 받아왔을 것 같지만 현실은 국내야구 갤러리에서의 이종범, 축구팬들 사이에서의 이동국 수준으로 비난과 비판을 독식하였던 불운한 선수였다.

코트에서 잦은 항의를 하는 모습이 팬들이 서장훈을 싫어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리그 최고령 베테랑이 되었을 때에도 감정조절을 잘 못하는 모습을 보여 팬들의 질타를 받았었다. 2011년 11월 20일 서울 SK 나이츠와의 원정경기에서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해서 테크니컬 파울을 연속 2개 받고 바로 퇴장당해 팀 벤치 분위기를 다운시킨 것이 단적인 사례.
그러나 정말 일반의 편견과 다르게 서장훈은 심판에게 항의가 잦았을뿐 상대 선수에게 거친 파울을 하거나 교묘한 반칙을 한적이 거의없는 선수이며 테크니컬파울 역시 별로 없었다. 위의 사례처럼 테크니컬 파울 2개 연속은 서장훈 농구인생 전체에 희귀한 사례이다. 서장훈이 나이먹어가면서 노장으로 들어선이후 젊은 시절보다 감정조절이 힘든 모습을 아주 가끔 보이긴했으나,감정조절 못해서 팀분위기 망치는 수준의 악동행동은 커리어 통산으로도 거의 찾기 힘들 정도다.
단적인 예로 서장훈커리어 통산 5반칙퇴장이 거의 없다.
결국 서장훈이 감정조절 못해서 팀분위기 다운시킨다 주장은 서장훈 항의가 잦은 것으로 나쁜 이미지를 가진 이후 나온 편견인듯 보인다.

하지만 심판항의가 잦고 인상 많이 쓴건 사실인데 그것은 김주성, 하승진 외에는 서장훈을 정상적으로 수비할 수 있는 국내선수가 거의 없던 상황에서 그의 마크맨들이 늘 파울성의 거친 수비를 했고 심판들이 다른 선수들의 마크맨에 비해 너그러운 판정을 내렸던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과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서장훈만 그랬다면 비난을 독식해도 할 말이 없겠지만[22] 서장훈의 현역 시절 서장훈을 그렇게도 괴롭혔던 김주성 역시 짜증과 항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아니 오히려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물론 코트에서 욕설을 하고 잦은 항의를 하는 것이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수비를 빙자한 거친 폭력에 수도없이 노출되었고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힌 목부상을 두번이나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견제는 줄어들 줄 모르니 서장훈의 행동을 마냥 비난만 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그렇게 당하고도 대응하는 심한 반칙이나 폭력을 쓰거나, 감정을 못다스린적이 없는 프로다운 선수였다

참고로 이른바 '목장훈'의 상징인 목 보호대를 은퇴할때까지 차게 된 원인은 2004-05시즌 김주성에게 당한 일명 주성타 사건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서장훈이 골밑 싸움을 잘 안한다는 이유로 [23] 서장훈의 센터로서의 기량을 깎아내리고 김주성을 추켜세우는 사람들은 이 동영상만 봐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 [24]

자신을 욕한 관중에 대해 욕설을 했다는 루머도 있다. 그러나 중계화면에 잡힌 바로는 그 관중은 '이응사'[25]로 밝혀졌다. '이응사'가 서장훈을 욕하게 된 계기는 FA로 KCC로 이적하였을 때 삼성이 보상선수로 현대-KCC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이상민을 지목하여 그가 팀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 그러나 서장훈이 KCC로 이적한 이유부터가 대학선배 이상민과 다시 같이 뛰고 싶어서였는데 소속팀에서 이상민을 보호하지 않고 보상선수로 떠나보냈음에도 욕은 그가 다 먹었다. 사실 병크가 아니라 당연한 선택이었다. KCC는 서장훈-이상민의 콤비플레이를 맞춰주기보다는 노장인 이상민 대신 다른 선수 위주로 팀을 개편하고 싶어했고, 서장훈 역시 삼성보다는 우승권에 근접한[26] KCC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이상민과 같이 뛰고 싶다는 것은 단순한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다. 요컨대 서장훈-이상민의 특별한 관계를 떼어놓고 보면 상식선에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선수 이동이었고, FA 계약이었다. 이응사를 비롯한 일부 지나친 팬들이 말도 안되는 비난을 쏟아낸 판에 서장훈이 피해를 본 상황이었다. 상식적으로 서장훈이 자신이 떠날 팀에 어떤 보상선수가 올지 생각하면서 팀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전혀 그럴것 같지 않지만 경기력 면에서도 비판을 받았는데, 골밑경합, 리바운드 등 센터의 본분을 다하지 않고, 프로데뷔 당시만 해도 골밑에서 경쟁력이 있었지만 외국인 센터들의 수준이 높아지자 몸싸움을 기피하고 외곽으로 나와 중장거리 슛에만 몰두하며 팀 성적보다는 스탯관리에만 몰두한다, 센터로서 자격미달이다라는 내용의 비판이었다. 하지만 이는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농구 초보적인 비판에 불과하다. 현대 농구는 빅맨들에게도 정확한 중거리슛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상대 수비를 를 벌려놓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서장훈은 대학교 때부터 꾸준히 40%대의 3점슛 성공률을 기록할 정도로 중장거리 슛의 정확도가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격 옵션을 최대한 활용했을 뿐이다. 게다가 프로 이전부터 몇몇 상대팀의 수비를 빙자한 폭력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골밀에서 몸싸움을 할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노장 선수가 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리바운드 역시 수치상으로 매우 뛰어나며 [27] 본인은 자신의 득점의 6,70%는 항상 골밑공격으로 이루어진다고 항변해 왔다. [28]

느린 백코트와 불성실한 수비 또한 비판받았다. 다만 백코트의 경우는 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빠른 김주성과 비교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장훈이 억울한 면이 없잖아 있다.[29] 하지만 센터 포지션임에도 몸싸움 기피에 따른 불성실한 수비는 실제로 지적받던 부분인데, 이 때문에 서장훈을 영입하면 플레이오프 진출 보증수표지만 우승은 어렵다는 말도 있었다. 막강한 공격력은 얻지만 수비조직력을 다지기는 어렵기 때문. 그러나 실제로 서장훈이 활약한 SK나 삼성이 우승을 하거나, 우승권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전성기의 서장훈에게 이와같은 비판은 어울리지 않는다. 커리어 후반에서야 실제로 이런 점이 문제가 됐지만, 농구선수가 그 정도 나이면 누구든지 수비에서 문제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이는 프로시즌 이후의 농구팬들이 주로 가하던 비판이었으며,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그를 봐 온 올드팬들은 대부분 서장훈에 대해 불쌍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삼성전 때의 폭력 수비 사건. 그리고 프로에서 주성타를 비롯한 수많은 폭력 수비 등등. 그만큼 국가대표나 소속팀에서나 궂은 일을 많이하고 험한 꼴 많이 받아쓰닌 돌아오는 건 욕밖에 없으니... 사실 서장훈이 받는 비판의 대부분은 상대 선수들의 상식 이상의 견제와 목 부상에 기인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불쌍한 거 맞다.
하지만 위와 같은 비판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논파되거나 정상 참작되며 긍정적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어쨌든 한국 농구계의 전설적인 선수이니... 특히 베테랑이 되면서 인터뷰도 자주 있었고 신문 기사에서도 자주 본인의 목소리를 냈는데, 그 동안 농구팬들에게 험상궂고 짜증만 많은 이미지로 알려져 있던 서장훈은 인터뷰를 통하여 똑똑하고 말도 잘하는 이미지로 돌아서게 되며 이미지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후에도 늘 개념찬 인터뷰를 보여준다.
다만, 여러 팀을 돌아다닌 통에 어느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는 기억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어떤의미로 보자면 농구계의 저니맨. 한국을 대표하는 센터로 농구사에 길이 남겠지만, 특정 팀의 영웅은 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단 굳이 따지자면 서울 SK 혹은 서울 삼성의 레전드로 볼 수 있겠다.[30]

그 외에 01년과 03년에 음주운전 전과가 있어서 까이는 것도 있다. 01년 9월에 음주운전으로 인해서 면허가 취소되었는데 02년 7월 2002 월드컵 기념 대사면으로 면허가 회복되었다. 그런데 이후 불과 8개월만에 6강 플레이오프 중[31] 음주 운전이 적발되어 다시 면허가 정지되었다. 그리고 이 여파로 인해서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이 탈락했고 까임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4. 은퇴 이후의 재평가

선수 생활을 하던 시기 궂은 일을 안하고, 득점과 리바운드등 드러나는 성적에만 신경쓴다는 비판도 있으나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좀 억울한 면이있다. 사실 한국프로농구가 출범한 이후 외국인 선수 도입 이후 한국 농구의 방향이 바뀌어버렸다. 동양인에 비해서 흑인의 기본 신체적 능력이 아주 뛰어나기에 신체적 능력이 중요한 농구에서 흑인과 동양인과의 격차가 크며, 프로가 출범 이후 외국인 용병이 모든 팀의 주인공이 되었다. 득점, 리바운드등 농구의 핵심적 스텟을 용병이 장악해버렸다.

첫 우승팀인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경우 국가대표 센터 김유택이 순식간에 식스 맨이 되고, 허재가 팀에서 존재감이 없어져서 결국 밀려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두 명의 용병이 득점 리바운드를 장악해버리니, 그 동안 득점원 역할을 해줄 국내 선수 해결사는 필요없어지고, 그저 용병에게 패스 잘해주는 포인트 가드와 용병이 빼준공을 받아서 외곽슛 던져주는 슈터 정도, 그리고 용병이 쉴때 백업을 해주는 식스 맨이 필요할 뿐이었다.

결국 팀 플레이와 궂은 일을 잘하고 수비를 열심하는 선수 모아놓고 그 위에 뛰어난 용병 둘을 얹으면 우승하기 좋기에 당장의 우승을 위해선 감독은 그냥 용병 뒷받침을 잘해주는 선수를 모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연세대 선배인 우지원은 선수 후반기로 갈수록 수비 참여를 하고 캐치 앤 슈터로 변신에 성공해서 적응했고, 원래 고려대학교 센터 출신이자 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 동료였던 이규섭도 우지원과 비슷하게 수비력을 갖춘 캐치 앤 슈터가 되었다. 라이벌이었던 현주엽은 포인트 포워드라는 이름 아래 용병에게 패스 해주는걸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한국 선수가 보조가 아닌 중심이 되어서 경기를 끌어갈 수 있는 선수는 서장훈과 방성윤, 그리고 문경은의 프로 초기와 2000~01 시즌 MVP조성원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국내 선수중 살아남아서 각광받은 선수는 대부분 용병을 보조하는 궂은 일을 하는 선수들이었다.

서장훈은 인터뷰에서 이런 식으로 궂은 일을 하는 선수가 더 가치를 인정받는 KBL의 풍토가 아쉽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용병과 정면으로 대결해서 평균 20점씩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들도 팀의 중심이 되지 못하여 궂은일을 하는 스타일, 용병을 보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 실력 저하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장훈은 궂은 일을 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게 될 바에야 은퇴를 하겠다고 이야기 했던 선수이다.[32] 서장훈의 이야기가 틀린말이 아닌게 시즌이 진행될수록 점차 국내 선수의 득점과 리바운드 등의 기여도가 낮아져서, 2015년 현 시점에서 팀 공격의 중심으로 활약하는 국내 선수는 귀화선수인 문태영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식의 화려하고 개인 능력으로 득점하는 선수가 아닌 궂은 일을 하고 성실한 선수가 더 인정받는 KBL이 오히려 비정상이며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들도 나오는 상황이다.[33]

이 항목에서 많이 언급된 궂은 일은 쉽게 말해 외국인 선수가 에이스인 상황에서 보조를 한다는 이야기다. 경기의 주인공이 용병이 된 상태에서 용병 보조, 수비 가담을 열심히 하고 용병이 빼준 공을 노 마크 3점 슛을 던질 수 있는 선수가 각광 받는 시대란 이야기. 그 때문에 역대급 슈터로 불리던 문경은은 프로 초기에 팀의 중심이었지만, 벌크 업 실패 이후 수비에서 문제를 드러내며 단순한 캐치 앤 슈터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어 이충희같은 압도적 커리어와 스타일을 갖지 못햇다. 이후 등장한 방성윤은 해결사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잦은 부상으로 29세에 은퇴, 그 이후 조성민의 13~14시즌 각성 전까지 토종 슈터는 한동안 찾기 어려웠다. 또한 프로 초기에는 김승현같이 용병에게 볼 배급해주는 포인트 가드가 득세하다가 나중에는 궂은일 잘하는 양동근과 같은 포인트가드가 득세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국제 대회에 외국인 선수가 없는 상황에 접전 상황의 해결사가 없으니 받아 먹는 슈터가 아닌 자기가 만들어던지는 슈터와 큰 선수를 상대해야 할 빅맨이 부족한 황당한 상황으로 한국 농구가 흘러가기도 했다. 서장훈 이후의 스타인 김주성김승현은 원래 실력도 출중하지만, 외국인 선수에게 잘 맞춰주는 스타일로 더 주가를 올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 대회에서 국내 선수는 외국인 보조나 궂은 일만 하고, 해결은 외국인에게 의존하다 보니 정작 점수 낼 선수가 없어졌다. 만일 혼혈 선수인 문태종이 한국에 귀화해주지 않았다면 2014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서장훈도 나이를 먹으면서 외곽으로 밀려나는 경향은 있었으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득점하고 리바운드를 잡으며 경기를 이끌어가는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실력이 있었으니 가능했지만, 반대로 욕은 많이 먹었는데, 그 이유는 왜 블루워커가 되지 못하냐?였다. 그러나 서장훈은 마지막 두 시즌을 제외하고는 소속팀을 포스트시즌에 꾸준히 올린 선수였으며, 수비 능력도 나이가 많아 밀리는 것이지 기본적인 몫은 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력으로 보면 한국농구의 Best 5를 뽑을때 거의 무조건 뽑히는 선수다. 명장 유재학감독도 Best 5를 이야기 할 때 제일 처음 이야기 했던 말이 "일단 서장훈은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 였을 정도. 오히려 궂은 일 때문에 팬들에겐 저평가 를 받지만 지도자들에겐 높게 평가받는 아이러니한 상황.

5. 그 외

별명으로는 골리앗 센터, 언론에 쓰이는 공식 별명인 국보급 센터[34], 서장팔, 목장훈[35], 서역귀(패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며), 목도리도마뱀 등 부정적인 별명도 많이 갖고 있었다. 이미지가 좋아지고 KBL의 레전드 취급을 받게 된 말년 of 말년 시절부터 현재까지는 농구팬들이 장팔이형이라는 친근한 별명으로도 부른다.

방송 인연으로 2009년 오정연 아나운서와 결혼해 화제가 되었고 2011년 증권가 찌라시 발 불화설이 있었다. 여담으로 부인인 오정연 아나운서를 통해 전해지기로, 깔끔을 떠는 성격 때문에 가끔 부인한테 까칠까칠 댄다고. 결국 이혼 소송이 밝혀지면서 불화설은 사실로 밝혀졌다.

프로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리그에서 거의 손가락 꼽히는 고연봉자에다 재테크에 능해 백억대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1980년대 여자농구의 간판으로 활약했던 코끼리 센터 김영희는 8칸짜리 단칸방에서 한달 체육연금 50만원으로 생활을 하는데 거기다 희귀병인 거인병까지 앓는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통장을 확인해보니 몇달치 치료비가 입금되어 있었고 입금자 성명은 바로 서장훈. 후에 이 일이 알려지자, 서장훈은 머쓱해하며 '농구 선배의 딱한 사정을 듣고 약간의 성의를 보탰을 뿐' 이라며 쑥스러워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은퇴 당시 마지막 연봉을 유소년 농구발전을 위한 기금으로 쓰라고 기부하였다. 국보급 센터에 걸맞는 인품이라 할 수 있다.

은퇴할 때 동시에 강동희 감독이 승부조작에 연루되어 수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자신의 은퇴식에서 "강동희는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던 선배였는데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수사 결과를 지켜보고 너무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남겼다.#

6. 방송 활동

연예인은 아니고 단지 방송에 나오는 사람
무한도전이 발굴한 예능계의 보물 예능 공룡 무한도전의 케빈
2014년 후반기, 강남과 함께 떠오르는 예능계 블루칩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36]


보통 스포츠 선수들이 은퇴 후 원래 몸 담갔던 분야와 연관된 업종에 종사하는것과는 달리, 서장훈은 은퇴 후 농구판으로 돌아가지 않고 방송 활동을 하였다. 그 이유가 입담도 좋아서 그 전에도 예능에 자주 나왔는데[37] 은퇴 후 주변 인맥들을 통해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다보니 아예 방송계에 의도했든 아니든 많이 알려졌기 때문. 스포츠 선수였다가 예능인으로 전직했다는 점에선 강호동과 비슷하지만, 강호동이경규라는 강력한 버프를 받고 있었고 주로 메인으로 활약한 것과는 달리 서장훈은 서포트 없이 개별적으로 활동하며 메인 보다는 (존재감 강한) 보조로 나오는 느낌이 강하다.

원래도 스포츠를 통해 인지도가 높았지만 방송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인지도가 쌓였기 때문에 우리동네 예체능, 런닝맨 같은 방송사들의 간판급 예능 프로에도 다수 출연했다. 2013년 7월 6일 방송된 무한도전 웃겨야 산다 특집때 뮤지컬 중 목부상으로 입원한 정준하의 대타로 출연해 국내 최장신 예능인 반열(...)에 올랐다. 본인은 이거로 뜨고 싶은 마음 없어요. 이게 마지막 방송이에요 라며 격하게 부정했지만 유재석은 녹화장에 나타나자마자 못친소 2회를 위해 아껴둔 게스트라며 기대감을 표출했을 정도.

결국은 2014년 1월 3일부터 시작된 금요 예능 사남일녀에서 김구라, 김민종에 이은 셋째 역할로 고정 예능인으로 데뷔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합격점을 받았다. 물론 힘쓰는 장면도 많이 나오긴 하지만 이제 운동만 잘한다는 이미지는 거의 벗어던진 셈. 이상민이 삼성 감독에 취임한 후 서장훈이 코치로 하마평에 오르내리자 시청자들이 드립일 뿐이라도 '사남일녀 해야된다 가지마라' 라는 반응을 보인 것을 보면 시청자들의 지지도 받고 있다. 본인 역시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지도자 생활보다는 예능이 재미있다며 이상민 감독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사남일녀 출연덕분에 라스에도 출연하였고 여기서 재밌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연말에 한해동안 가장 재밌었던 게스트중 한명으로 한번더 라스에 출연하면서 상당한 예능감을 보여줬다. 거기다 예전부터 김구라가 종종 자기가 부러우니까서장훈의 재테크(전술한 부동산 수익)를 언급한 일이 있었는데 이덕에 라스에서 윤종신이 붙인 서셀럽이 캐릭터화되면서 예능 안착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전부터 방송 적응이 잘되기도 해서 전업 예능인이 되기에 좋은 운을 탄 상태.

2014년 8월 10일 아빠! 어디가?의 농구선생님으로 출연했다. 의 팬이라고... 과연 마성의 사내

그 후 새로 개편된 세바퀴의 고정이 되었다.

2014년 12월 13일 무한도전 유혹의 거인 편에 의리보단 시청자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옴부즈맨의 정신으로 주연으로 출연, 맹활약을 펼쳤다. 무려 3주에 걸친 낚시로 무한도전 멤버들을 훌륭하게 낚았다. 정준하, 하하, 박명수와는 원래부터 친분이 있었고, 정형돈도 후배인 이규혁을 통해 연락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무도 멤버들과 친한 사이라서 시너지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준하와 함께 멤버들을 꼬여내기 위해 갖은 사탕발림과 협박을 적절히 배합하는 진상 콤비는 이날 방송의 백미였다. 적절한 리액션과 자연스러운 멘트로 유재석을 비롯한 무도 멤버들로부터 MC 꿈나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리고 이후 무한도전 나 홀로 집에에서도 최종보스 역으로 출연 준비된 예능인이자 사실상 이전의 데프콘처럼 비정기 객원 멤버 취급이다(…).[38] 무도큰잔치에서는 농구계 동료 현주엽을 데리고 나왔는데 유재석에게 "1달에 1번씩 꼭 나온다"며 디스당했다.

일밤 아빠! 어디가? 의 후속 프로그램인 애니멀즈에 캐스팅되었다. MBC 계약직

1월 15일 썰전에도 나왔는데 본인이 방송을 하게 된 계기중 하나는 본인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데 그걸 깨고 좀 더 소통하기 위해서 라고 밝혔고 언젠가 자신에 맞는 팀을 지도해보고 싶다는 말도 하였다.
1월 28일 미스틱 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2015년 2월 20일 MBC SPORTS+의 프로농구 SK-KT 경기 중계에서 일일 해설을 맡았는데 무도큰잔치 녹화 중에 현주엽이 자기 해설할 때 한번 같이 하자고 해서 나왔다고 한다.###

6.1. 출연 경력

6.2. 현재 출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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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착화신장은 207cm다.
  • [2] 1997~1998 시즌을 기점으로 농구대잔치는 아마추어 농구 대회가 되었다.
  • [3] 평균을 내면 19.2점 7.6리바운드
  • [4] 이 기록은 중앙대 김병오 선수가 2013년 KBL팀과 계약해 데뷔한다면 깨질 수 있지만, 김병오는 인증이 있는데다 경기 출장을 거의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엉망이라 프로 데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한다.
  • [5] 다만 하승진이 대한민국 역대 최고 센터라고 보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그러나 업적 면에서 보면 아직도 큰 격차가 있다. 서장훈이 여러 차례 기록한 한 시즌 평균 20점 10리바운드 이상도 하승진은 기록한 적이 없으며 (평균 20점도 넘긴 적이 없다) MVP도 아직 없다. 30이 넘은 하승진이 누적된 부상으로 인해 위력이 현저히 줄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 격차가 좁혀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 [6] 손을 많이 쓰는 야구선수 경험이 있다는 것이 도움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 [7] 하승진의 경우는 반올림을 해서 딱 10리바운드로 더블더블을 기록하였다. 정확하게는 9.95 리바운드
  • [8] 이때 국가대표 에이스 센터이자 한국농구 최초로 국제무대에서 그나마 이름값을 해본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센터중 하나인 김유택은 서장훈에 대해, "우리는 매번 중국,서양팀들에게 20점차 대패하는게 일이었는데, 서장훈 덕에 10점차 정도까지 줄일수 있었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 [9] 당시 기아자동차는 플레이오프에서 중앙대에게 떡실신당하며 탈락하는 굴욕을 겪었다.
  • [10] 근데 이 당시는 워낙 나이가 깡패였던 시절이라... 심판도 대놓고 상대에게 편파판정을 해대서 중앙대 선수들이 항의의 표시로 경기중에 그냥 서 있기만 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 [11] 김성헌은 이상민의 동기인 91학번으로 경복고 시절 포인트가드 랭킹 2위의 유망주였지만, 하필이면 랭킹 1위 이상민이 고대에서 연대로 갑자기 진로를 틀어버리는 바람에 4년 내내 벤치만 달구다시피 했지만 중도이탈 없이 4년을 잘 다니다가 이상민의 아웃때 기회를 잡았다. 이 시리즈에서 성헌의 활약만큼은 과장 좀 보태 제레미 린이 갑툭튀한 수준과도 같았다. 4년동안 경기에 거의 출장도 못하던 선수가 졸업 고별무대와도 같은 농구대잔치, 그것도 플레이오프에서 갑자기 주전으로 나와 엄청난 활약을 보인데다 연세대의 높은 인기 탓에 당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후 인천 대우 제우스에서 프로생활을 한뒤, 2014년 현재는 인천 전자랜드의 사무국장으로 재직중.
  • [12] 코트를 폭력 영화의 장으로 만들며 결승에 올라간 삼성은 허재, 강동희, 김유택에게 돌아가며 두들겨맞으면서 기아자동차에 떡실신 크리.
  • [13] 우지원은 SK에서 보상선수로 지목받자마자 김영만과 맞트레이드되어 모비스로 가게 된다.
  • [14] 창수는 울산 모비스를 거쳐 창원 LG에서 현역 최고령인 42세로 은퇴했다. 상관은 대구 오리온스에서 2004년 은퇴했다. 모두 이 사건때문에 인간말종 취급받아 저평가를 많이 받았지만 두 선수 모두 블루워커로써는 상당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서장훈은 창수의 은퇴경기에 앞서서 창수의 롱런을 칭찬하는 인터뷰를 했고 경기중에도 창수와 대화를 나누는듯한 모습을 보여서 앙금을 푼듯하나 그때의 부상으로 목쪽에 고질적인 부상을 안게된건 여전히 본인 입장에선 마음이 아플듯.
  • [15] 여담이지만 박상관의 딸 박지수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구선수를 하고 있다. 1998년생에 더군다나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김연경과 동일하며 아직도 성장 중이다. 2014년 현재 고1로 동연령대 선수 중에서는 최고로 국내대회뿐만 아니라 국제대회도 그야말로 씹어먹는 중. 몇 년 후에 박지수 개별항목이 생길지도.
  • [16] 일설에는 우승 축하연을 안 갔다고 한다.
  • [17] 서장훈의 이적과 이상민의 영입으로 삼성은 3가드 시스템을 가동하는 전력을 썼고, 이는 팀의 2차례 준우승과 인기몰이 등 호성적을 가져다주었다. 다만 등가교환으로 높이와 수비력이 급격하게 약해져 11~12시즌 삼성 추락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 [18] 10,000득점 마일스톤은 KCC에서 달성했다.
  • [19] 전자랜드는 저 때가 우승을 노릴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지만, 정규시즌엔 부산 KT 소닉붐에 밀려 준우승, 4강 플레이오프에선 KCC에게 패해 챔결 진출이 무산되었다.
  • [20] 서장훈이 10,000점을 넣던 그 경기에서 현주엽이 상대팀으로 만났는데 서장훈의 기록을 세워주기 위해서 일부러 골을 허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10,000득점을 달성한 직후의 서장훈은 같은팀 동료들로 뿐만 아니라 상대팀 선수들에게도 축하를 받았고 전광판에는 그 동안의 서장훈의 농구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담았다.
  • [21] 다만 KT에게 1차전을 따내고도 5차전까지 간 끝에 분패하고 만다. 여담으로 5차전은 연장 접전이 펼쳐진 명승부였다.
  • [22] 사실 코트에서 욕을 자주 하는 편이기도 하다. 카메라맨도 서장훈이 욕하는 장면을 담기 위해 서장훈의 얼굴을 자주 찍는다. 파울을 당한 뒤 서장훈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욕하는 입모양을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주는 리플레이 장면은 농구팬이라면 수십번은 봤을 장면. 하지만 서장훈 정도로 견제를 당한다면 욕설로라도 푸는게 당연하다.
  • [23] 게다가 이건 오해에 가까운데 서장훈은 리바운드왕을 차지한 유일한 국내센터이며 커리어 말미에 크게 노쇄하기 전까지 리바운드 수치가 리그 최고수준이었다. 게다가 서장훈은 국제대회에서 야오밍을 상대로도, 하승진을 상대로도 맞상대하며 치열하게 몸싸움을 했지 피한적은 없다.
  • [24] 실제로 서장훈은 심판에게 항의하는 이미지 때문에 과다하게 욕을 먹는반면, 김주성은 이미지로 인해 비난을 적게 받는 측면이 있다. 김주성이 깨끗한 사생활, 효자이며 한국 역대 최고 빅맨중 하나이지만, 리그에서 가장 헐리웃 액션을 많이 하는 선수이며 경기매너도 그리 깔끔한 선수는 아니다.
  • [25] 이상민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약칭이자 팬카페의 이름. 이들은 극성팬으로 악명이 높았다.
  • [26] 다만 삼성은 서장훈이 떠난 이후에도 2번의 준우승을 기록하였다.
  • [27] 앞서 언급된 대로 국내 선수중 평균 리바운드가 두 자리수를 넘긴 선수는 서장훈(네 차례)와 하승진 뿐이며 그나마 하승진은 반올림해서 10리바운드다. 커리어 후반에도 6~7개는 올려줬으며 이는 국내선수중 상위권이며 김주성과 비슷한 수준. 몸싸움을 안하는 빅맨이 리바운드왕을 하는게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는지 생각해보자.
  • [28] 30대 초반까지 경기당 삼점슛 성공갯수가 한 개 정도였다. 이때 서장훈이 20점 가까이 넣은걸 생각하면 실제로 3점슛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적었다.
  • [29] 사실 나이가 먹고 체중이 늘어나면서 느려졌지만 본래 서장훈은 100m 13초대가 나올정도로 스피드가 좋았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1974936
  • [30] 이는 서장훈의 2번의 MVP와 우승을 차지한 팀이 각각 SK와 삼성이고 그가 뛴 기간동안 최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등번호인 11번이 영구결번 된다면 이 두 팀에서 받을 가능성이 높은데, 13년 SK의 11번은 김동우가 달고 있으나 김동우가 응해준다면 가능성은 없지 않다. 과거에 문경은전희철팀의 프랜차이즈가 아님에도 농구계의 전설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영구결번을 지정했기 때문에 서장훈에게도 이를 적용할 가능성이 있으며, 삼성은 이상민이 11번을 이어받은 후 현재까지 11번을 단 선수가 없으며, 서장훈과 이상민이 동시에 영구결번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단 이상민은 이미 KCC에서 지정되어 있으며 서장훈은 삼성 이적 전까지만 하더라도 삼성과의 사이가 껄끄러웠던 편이었던데다(대표적인 것이 연세대와 삼성전자간의 사건) 05-06 챔프전에서는 비중이 낮은 탓에 팀간의 갈등이 있는 것도 사실.
  • [31] 당시 음주운전에 적발된 이후의 기사.
  • [32] 실제 안티들이 서장훈을 폄하할때 '기록만 신경쓴다.', '센터인데 왜 궂은 일을 하지 않느냐?' 라는 식의 비판을 많이 받았다.
  • [33] 궂은일을 하는 선수는 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건 당연하지만 그 선수가 화려하게 득점하고 에이스 역할 하는 선수보다 결코 잘하는거라 볼 수 있는건 아니다.
  • [34] 언론에서 골리앗 센터를 공식 별명으로 썼는데 본인이 이미지가 나쁘다고 국보급 센터로 바꿔 줄 것을 요청했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종교적인 이유로 골리앗이라는 별명을 쓰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참고로 국보급 센터라는 별명도 기자들이 지은 것이지 서장훈 본인이 지은 것은 아니다. #
  • [35] 위에 서술한 04-05 시즌에 당한 목부상 이후 목보호를 위해 거의 항상 목보호대를 하고 나온다.
  • [36] 본인과 관련된 설을 부정하는 멘트였는데,어느새 서장훈 고유의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 [37] 대학생 때도 워낙 유명한만큼 예능에 나왔었는데, 심지어 미국 유학 직전에 연대 동문 박진영과 토요일 SBS 예능에 나와서 박진영은 유학을 말리고 서장훈은 가겠다고 고집하는 설정으로 유학여부를 가리는 자유투 내기를 했다(...). 물론 말도 안되는 내기이나, 당연히 서장훈이 이겨서 유학을 다녀 오긴 했다. 이 때 운동장에 서장훈을 보러 온 여성 팬들이 일부 있었는데, 내기 후에 내 팬은 여동생 밖에 없는 줄 알았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프로 선수 활동 중인 때도 SBS 심만만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다.
  • [38] 그 전 녀석 이 무한도전에 편입할때랑 비슷한 루트를 타고있다. 길도 처음엔 서장훈과 비슷한 역할을 하다가 자연스레 무한도전에 정식편입되었었다. 문제는 이 사람 전술했듯 이미 음주운전 2번이나 걸린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예능은 몰라도 무한도전에 출연할 때 만큼은 무한도전 고정멤버 설에 대해 매번 언급하고 매번 부정하려고 하지만 언제나 유반장에게 커팅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