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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미 소사

last modified: 2015-01-07 12:35:03 Contributors


이름 Samuel Peralta Sosa
생년월일 1968년 11월 12일
국적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지 산 페드로 데 마코리스
포지션 우익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5년 텍사스 레인저스 계약
소속팀 텍사스 레인저스 (1989)
시카고 화이트삭스 (1989~1991)
시카고 컵스 (1992~2004)
볼티모어 오리올스 (2005)
텍사스 레인저스 (2007)

1998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MVP
래리 워커
(콜로라도 로키스)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치퍼 존스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1998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스미스 새미 소사 & 마크 맥과이어 국 여자축구 대표팀

2000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홈런 더비 우승자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루이스 곤잘레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Contents

1. 개요
2. 데뷔
3. 전성기
4. 말년
5. 명예의 전당 투표 현황
6. 이모저모

1. 개요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야구 선수. 마크 맥과이어, 배리 본즈와 함께 시대를 풍미했던 약쟁이슬러거다.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낸 라틴계 메이저리거의 대명사격 존재로, 모국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국민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90년대 후반 맥과이어와 벌였던 세기의 홈런 레이스는 지금도 종종 회자될 정도. 통산 609홈런으로 역대 홈런 랭킹 8위에 랭크되어 있다.

하지만 이후 코르크 배트 사건과 금지약물 복용 의혹으로 빛을 잃었다.

한국의 모 전철역의 명예역장직을 노렸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2. 데뷔

도미니카 공화국의 빈민촌에서 태어난 소사는 7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이후 구두닦이, 세차, 과일 장사 등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돕는 고달픈 유년 시절을 보냈다. 수많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소년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야구 선수가 꿈이었는데, 변변한 야구 장비를 구할 수 없어서 우유 케이스를 찢어 글러브를 만들고, 양말을 말아서 공으로 사용했다.

그렇게 16세가 되었을 때 텍사스 레인저스의 스카우터의 눈에 들어서, 1985년 계약금 3,500달러를 받고[1]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하게 된다.

이후 마이너리그를 거쳐 1989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데뷔 당시에는 파워보다는 빠른 발이 돋보이는 리드오프 스타일[2]이었는데,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시즌 중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된다[3].

1990년, 소사는 화이트삭스의 주전 우익수로 발탁되어 0.233의 타율에 15홈런 70타점 32도루를 기록했는데, 풀 타임 첫 해를 맞는 루키의 성적으로는 나름대로 준수했으나, 출루율이 채 3할에 닿지 못한 데다가 리그 4위인 150개의 삼진을 당하는 등 뚜렷한 약점을 보였다. 이듬해인 1991년에는 개막전에서 멀티 홈런을 기록하며 쾌조의 출발을 했지만, 이후 극악의 선구안이 조금도 개선되지 않으며 타율 0.203의 부진을 겪다가 마이너리그로 강등당했다.

그리고 화이트삭스는, 이듬해 3월에 그를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한다.

3. 전성기

컵스 이적 후 첫 시즌인 1992년에는 부상으로 67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0.260, 8홈런의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이듬해인 1993년, 소사는 0.261 33홈런 93타점 36도루의 깜짝 활약으로 컵스 역사상 최초의 30-30 클럽 가입자가 된다.

파업으로 인한 단축 시즌이었던 1994년에는 0.300, 25홈런 70타점으로 버크너 이래 13년만의 팀 내 3관왕이 되었고 1995년에도 0.268 36홈런 119타점 34도루의 맹활약으로 생애 첫 올스타전 출전과 동시에 실버슬러거까지 수상한다. 이후 1996년에는 40홈런, 1997년에는 36홈런을 치면서 크 그레이스와 함께 컵스의 간판타자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1998년.

로저 매리스의 단일 시즌 61홈런 기록을 놓고 소사는 마크 맥과이어와 함께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홈런 레이스를 벌이게 된다. 시즌 초반에는 맥과이어의 독주 체제였지만 소사가 6월에만 월간 신기록인 20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맥과이어를 맹추격했고, 이 둘의 경쟁은 파업으로 시들해진 메이저리그의 인기를 회복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결과적으로 맥과이어가 70개의 홈런으로 승자가 되었고, 소사는 66홈런을 기록했다. 하지만 158타점으로 리그 1위를 기록했고,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큰 공을 세운 점을 인정받아 내셔널리그 MVP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재단을 만들어 고국인 도미니카 공화국의 학교와 병원을 지원하는 등 활발한 자선 활동도 펼치면서 그 해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도 수상했다.

1999년에도 0.288 63홈런 141타점의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고, 그 해 제정된 행크 아론 상의 초대 수상자가 된다. 2000년에는 0.320 50홈런 138타점을 기록, 생애 첫 홈런왕의 영예를 안았고, 2001년에는 0.328, 64홈런 160타점으로 단일시즌 60홈런 이상을 세 차례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시즌 후 컵스와 4년 7,200만달러의 대형 계약을 맺었는데, 2002년에는 0.288 49홈런 103타점으로 두 번째 홈런왕을 차지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소사는 매년 올스타전 출전과 더불어 실버슬러거를 수상했다. 여기까지가 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말년

소사의 추락은 200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소사는 그 해 6월 4일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전에서 코르크 심이 박힌 배트로 타격을 했다가 적발되어 퇴장당했고, 이후 8경기 출장 정지의 징계를 받게 된다. 코르크 배트는 일반 배트보다 가벼워 뱃 스피드와 타구 비거리를 늘릴 수 있는 부정 배트로 간주되었는데,[4] 소사는 "타격 연습 때 팬서비스용으로 사용하던 것을 실수로 경기에 들고 나간 것" 이라고 해명했지만 이 사건으로 홈런왕 소사의 이미지에는 커다란 금이 가게 된다.[5]

그렇게 시즌을 0.279 40홈런 103타점의 성적으로 마쳤고 이듬해인 2004년에는 0.253 35홈런 80타점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성적을 기록했다. 여기에 그동안 뛰어난 성적에 가려져 있던 그의 독선적인 성격은 코칭스태프, 동료들과의 불화로 이어졌고, 결국 2005년 2월, 소사는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트레이드된다. 그리고 메이저리거들의 약물 복용 의혹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소사는 마크 맥과이어, 라파엘 팔메이로와 함께 그 해 3월에 스테로이드 관련 의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하게 되는데, 소사는 여기서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어쨌든 볼티모어에서 팀 동료인 라파엘 팔메이로와 함께 500홈런 듀오로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성적은 0.221 14홈런 45타점으로 바닥을 쳤다. 시즌 후 FA로 풀렸지만, 그를 데려가려는 팀은 나타나지 않았다. 워싱턴 내셔널스가 1년 50만 달러의 계약을 제시했지만 소사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그렇게 1년을 쉬게 된다.

하지만 600홈런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은퇴할 수 없었던 소사는 2007년 친정팀인 텍사스 레인저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게 된다. 스프링캠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고, 이후 지명타자로 활약하게 된다. 그리고 6월 20일, 시카고 컵스와의 인터리그 경기에서 대망의 통산 600홈런을 쏘아올리게 된다. 시즌 최종 성적은 0.252 21홈런 92타점을 기록.

그 해 말, 메이저리거들의 금지약물 복용 실태를 폭로한 '미첼 리포트'의 발표로 메이저리그 전체가 발칵 뒤집히게 되는데, 미첼 리포트에 소사의 이름은 없었으나, 이후 미 법무부의 사법 처리 관련 자료에 소사가 암페타민 등 각성제를 복용한 사실이 포함되었다는 보도가 나온다.

텍사스와의 계약이 만료된 이후에도 선수생활을 지속하려 했으나 찾는 구단이 나오지 않았고, 결국 2009년 6월 3일 공식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그리고 은퇴 선언 며칠 후, 2003년 메이저리그 도핑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을 보였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빼도박도 못하는 약쟁이로 낙인찍히게 된다.[6]

5. 명예의 전당 투표 현황

은퇴 후 소사 본인은 명예의 전당 입성을 내심 기대하는 듯한 말을 했으나, 약쟁이였다는 게 깨끗히 들통난 마당에 그의 입성 가능성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결국 2013년 명예의 전당 투표 첫 턴에서는 12.5%의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고, 2014년도에는 7.2%로 겨우 후보자격만 유지했다. 2015년도 역시 6.6%로 간신히 유지하는 선에 그쳤다.

사실 금지약물 복용 전과가 밝혀지기 전에도 소사의 명예의 전당 입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는데, 상기한 코르크 배트 사건 이후 이미지가 많이 실추된데다 호세 칸세코의 자서전을 비롯해 소사의 금지약물 복용 여부에 대해서 반 확신(...)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단지 '의혹' 만으로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부질없는 논쟁이 되어버렸다.

6. 이모저모

  • 재채기를 하다가 허리가 삐끗해서 15일자 부상자 명단에 올랐던 적이 있다(...) 실제로 재채기를 하다가 허리를 삐끗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재채기가 온몸에 의외로 부담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 잘못하면 걸음도 못 걷는다!


  • 2002년 초, 이승엽이 초청선수 자격으로 시카고 컵스 스프링캠프를 방문했을 때 소사와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약으로 만들어진 팔뚝 크기가 가히 압권으로, 옆에 있는 이승엽은 거의 말라깽이 수준. 이 친구, 빼빼 마른거 보니 빠른 발을 가진 교타자인가 보군 참고로 이때 새미소사를 만난 이승엽은 그의 벌크업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자신도 무리하게 벌크업 하다가 결국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이 근육들은 전부 약물로 만들어 진 것이 드러나는데...

  • 박찬호가 새미 소사를 상대로 강한 모습을 보였는데 통산 42타석동안 .194 .310 .472 3홈런 8타점 13삼진을 기록했다.


  • 2009년 부터 앓기 시작한 백반증이 점점 심해져서 2013년 이후의 모습은 그야말로 과거의 소사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백반증이 심해진 나머지 피부가 거의 백인수준으로 변했다. 이것 역시 스테로이드 부작용중 하나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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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계약금으로 소사는 자전거 한 대를 사고 나머지는 어머니에게 드렸다고 한다
  • [2] 장타력이 돋보이던 경쟁자 유망주 후안 곤잘레스와는 대조되는 스타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고르는 이후 10년 가까이 텍사스의 주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 [3] 트레이드 상대는 조지 벨이었는데, 왕년의 강타자 조지 벨은 이후 출루율 3할도 못 찍으면서 몰락한다.
  • [4] 다만 디스커버리 채널의 MythBusters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코르크 배트의 효과에 대해 부정했다.
  • [5] 조사 결과 그가 가진 배트 중 부정배트는 하나 뿐이었고 평소 시합 때 쓰던 배트와 차이가 있었기에 소사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기는 했다. 다만 약물 복용으로 인해 이제 그의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남아있을지는...
  • [6] 소사는 2005년 청문회에서 금지약물 복용사실을 부인했었기 때문에 위증 혐의까지 받게 되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흐지부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