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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관연락선

last modified: 2014-04-17 22:41:52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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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일본측 명칭)

Contents

1. 개요
2. 운항 목적
3. 운항 선박
4. 기타

1. 개요

1905년 9월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汽船株式會社)에 의해 개설되어 조선부산항과 일본시모노세키항을 연결하던 해운 노선.

경부선철도의 부산잔교역과 일본의 산요 본선 시모노세키역을 연결하는 노선이었기 때문에 연락선이라는 명칭이 붙었다[3]. 1945년 6월 공습과 어뢰/기뢰에 의한 공격이 잦아지자 정기 항로로서의 부관연락선은 휴항하였고, 사실상 이것으로 부관연락선의 역사는 끝난다. 이 노선은 한일국교정상화 이후인 1970년 6월부터 부관페리/관부페리에 의해 부산과 시모노세키간에 항로가 복구되어 지금도 운항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철도연락선이 아닌 일반 카 페리 노선으로 운항중이므로 완전히 같지는 않다.

일제강점기 당시 인적/물적 수송의 대동맥 중 하나로 식민지 시기 사회/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 해운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2. 운항 목적

일제의 조선 침탈의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이 항로는 일본 - 조선 - 만주로 이어지는 대륙 침탈 기지의 중계 노선으로서도 중요했기 때문에 국가 정책적 / 군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노선이었다.

통계에 의하면[4] 노선이 개설된 1905년의 부산, 시모노세키간 총 수송 승객 수가 39,956명인데 이것이 점차 늘어나 1910년대 말에는 40만명을 넘고, 1930년대 후반이 되면 100만명을 넘어서며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징용/징병하기 시작하는 1940년대가 되면 200만에서 많게는 300만에 가까운 인원을 수송하게 된다. 이 노선은 1905년부터 운항이 중지되는 1945년까지 40년간 총계 약 3천만에 달하는 인원을 수송하는 등 명실상부한 조선과 일본 간의 대동맥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조선과 일본을 잇는 다른 해운노선도 많았지만, 통계자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조선과 일본간을 도항한 약 8,90%의 인원이 부관연락선을 통해 한일간을 왕복했다. 물론 물류 수송의 측면에서도 부관연락선은 큰 역할을 담당한 노선이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의 경우는 유학생, 사업가, 노동자 등이었으며 노동자의 경우 일본 내에서 값싸고 일본인에 비해 힘이 세다는 이유로 수요가 많았다. 전시 체제가 가동되던 1930년대 말~ 패망까지의 시기에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의 경우는 대부분 일본의 조선 이주 정책으로 인해 신천지를 찾아온 농민들이 많았다. 이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싼 값으로 토지를 불하받아 자영농이 되었다. 물론 이 땅은 조선 농민들에게서 빼앗다시피 한 땅

자매품으로 하코다테 본선 하코다테역도호쿠 본선 아오모리역을 이었던 세이칸 연락선, 소야 본선 왓카나이역가라후토 동선 오토마리역을 이었던 치하쿠 연락선이 있었다. 치하쿠 연락선은 부관연락선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폐지, 세이칸 연락선은 현재 세이칸 터널로 대체되었다.

3. 운항 선박[5]

선명 운항기간 총 톤수 길이(m) 정원(명) 적재량(t) 속도(Knot)
이키마루(壹岐丸)[6] 1905.9 ~ 1931.5 1680 79.4 337 300 15
쓰시마마루(對馬丸)[7] 1905.11 ~ 1925.12 1679 82.5 337 300 15
고마마루(高麗丸) 1913.1 ~ 1932.10 3029 102 603 930 16
시라기마루(新羅丸)[8] 1913.4 ~ 1945.5 3024 98.9 603 930 16
게이후쿠마루(景福丸) 1922.5 ~ 1945.6 3620 114.3 949 430 20
도쿠쥬마루(徳壽丸) 1922.11 ~ 1945.6 3620 114.3 945 430 20
쇼케이마루(昌慶丸) 1923.3 ~ 1945.6 3620 114.3 945 430 20
곤고마루(金剛丸)[9] 1931.11 ~ 1945.5 7082 134.1 1746 3170 23.2
고안마루(興安丸)[10] 1937.1 ~ 1945.6 7082 134.1 1746 3170 23.2
이키마루(壹岐丸)[11] 1940.11 ~ 1945.6 3519 103.8 - 4617 17.2
쓰시마마루(對馬丸)[12] 1941.4 ~ 1945.6 3516 103.8 - 4617 17.2
덴잔마루(天山丸)[13] 1942.9 ~ 1945.6 7907 143.4 2048 2223 23.3
곤론마루(崑崙丸)[14] 1943.4 ~ 1943.10 7908 143.4 2050 2223 23.4

배 이름을 보면 묘한 특징이 있는데 아직 정식으로 일제의 지배가 시작된 것이 아닌 1900년대에는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섬들(이키, 쓰시마 섬)에서 일제의 한국 식민지배가 본격화된 1910~1930년 사이에 취항한 배의 이름은 한반도 내의 왕조 이름(신라, 고려), 궁궐 이름(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산 이름(금강산)으로 옮아가고,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기에 접어드는 1930년대 이후에는 만주, 중국의 지명{싱안(싱안링산맥), 톈산(톈산산맥), 쿤룬(쿤룬산맥)}으로 옮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일본 → 대한제국 → 만주 → 중국으로 점차 확장되는 일제의 침략 의도가 배 이름에 들어 있는 것.

4. 기타

운임은 1905년 노선 개설 당시에 1등석 12엔, 2등석 7엔, 3등석 3엔 50전이었다. 이후 1942년 조정된 운임은 1등석 20엔, 2등석 10엔, 3등석 5엔.

일본인들의 조선 도항에는 큰 제한이 없었으나 조선인들의 일본 도항에는 여러 차례 제한이 있었다. 일본 도항을 위해서는 도항증명서를 얻어야 했는데, 이런 도항 허가제는 일본 본토의 정치/경제 사정에 따라 여러 번 폐지되었다가 다시 생기기를 반복했다. 최종적으로 내지 도항제한이 완전히 철폐된 것은 1945년 3월에 이르러서였는데 이것은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일본 본토 내의 노동력이 부족해 더 이상 도항 제한을 둘 이유가 없었던 일제의 생색내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한기주와 함께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여가수였던 윤심덕이 1926년 8월 4일 이 노선의 도쥬쿠마루를 타고 가던 중 새벽 4시 대마도 근해를 지나던 중 애인이었던 유부남 김우진과 함께 자살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으며, 1991년 '사의 찬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가 탔던 배도 이 부관연락선이다.

현재 코레일JR 6개사가 연계하여 판매하는 한일공동승차권이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 KTX(서울 - 부산) <-> 부관페리(부산 - 시모노세키) <->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각지로 철도가 연계되는 구조. 하지만 항공편에 비해 시간대비 가격의 메리트가 떨어지는 지라 이용률은 저조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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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일제는 부관연락선을 경부선과 산요 본선을 잇는 철도 노선의 연장선상으로 인식했고, 실제 운영도 철도 시간표에 맞추어 연계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 [2] 옛 부관연락선과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
  • [3] 일본의 입장에서 경부선은 산요 본선과 도카이도 본선의 연장이었고, 따라서 당시의 부산역경성역행 열차는 상행이 아니고 하행이었다. 일본의 수도였던 도쿄도쿄역 방향이 상행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연락선에서 내려 열차를 갈아탔는데 경성행이 상행이 아니고 하행으로 표기되었다는 것에 괴리감을 느낀 사람들의 증언이 남아 있다.
  • [4] P.31『부관연락선과 부산』, 논형, 2007
  • [5] P.35『부관연락선과 부산』, 논형, 2007. 이 외에도 부관 항로에 일시적으로 투입되었던 선박은 많으나 임시선이 아닌 정기선으로 장기취항한 선박만 목록에 넣었다. 또 운항 기간은 부관 항로만의 운항기간으로 부관항로에서 퇴역한 이후에 일본군에 징발되거나, 다른 항로에 투입되거나 한 선박도 많다. 예를 들면 게이후쿠마루(경복환)는 토야마루호 침몰사고 이후 세이칸 항로의 연락선으로 투입되었고, 현역에서 물러난 뒤에는 하코다테에서 선상 호텔로 사용되다가 해체되었다.
  • [6] 최초 취항 선박
  • [7] 1925년 12월 17일 좌초 사고로 침몰(사상자는 없음)
  • [8] 1945년 5월 25일 관문해협상에서 기뢰에 피침, 침몰.
  • [9] 1945년 5월 27일 하카타 항에서 기뢰에 피침, 침몰(사망자 1명, 부상자 4명)
  • [10] 1945년 4월 1일 기뢰에 피침, 항행불능
  • [11] 화물선. 앞의 이키마루와는 다른 배. 1945년 4월 5일 기뢰에 피침, 항행불능
  • [12] 화물선. 앞의 쓰시마마루와는 다른 배. 1945년 8월 13일 청진항에서 소련 전투기/폭격기의 공습으로 격침, 침몰.
  • [13] 1945년 7월 28일 미군기의 로켓 공격으로 항행불능. 침수되기 시작하여 침몰.
  • [14] 1943년 10월 5일 미 해군 잠수함 와후 호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 승무원과 승객 중 583명이 사망했다. 와후 호는 이후 일본의 상선 2척을 더 침몰시킨 뒤 홋카이도의 소야 해협을 통해 태평양으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일본군의 감시망에 걸려 폭뢰공격으로 격침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