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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last modified: 2019-02-25 12:50:38 Contributors


삼전도비.[1]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원인
4. 전쟁의 발발과 흐름
5. 결과와 영향
6. 영향과 평가
7. 여담
8. 관련 항목


1. 개요

"여러 해 동안 강화도를 수축하는데 검찰사 이하가 날마다 술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더니, 마침내 백성들을 다 죽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냐! 나의 네 아들과 남편은 모두 적의 칼날에 죽고 이 한 몸만 남았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 <연려실기술> 인조조고사본말, 병자노란[2]

丙子胡亂
인조 14년 병자년 음력 12월 2일부터 정축년 음력 1월 30일까지, 양력으로는 1636년 12월 28일부터 1637년 2월 24일까지 벌어진 조선청나라의 전쟁.[3]

2. 배경

정묘호란(1627) 이후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조선은 강화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친명배금정책으로 일관하였다는게 세론이며, 여기에 대해 인조는 명분상으로만 그러했지 실제로는 어느 정도 광해군의 스탠스를 이어갔다는 견해도 일부 있다.[4]

당시 청으로 국호를 고친 청태종 홍타이지명나라와의 전면전 전에 친명 성향의 조선을 확실하게 무력화시키려고한 전쟁이다. 또한 경제적 이유에 대한 논의도 있다. 당시 청나라는 내몽고를 제압하고는 만리장성 축조가 제대로 되지 못했던 내몽고 지역으로 우회하여 명나라의 북부에 들어가 대규모 약탈과 공격행위를 벌이고 있었지만,바이두 백과사전의 청병입새[5] 이와 별개로 1626년 영원성 전투 이후 대명 전선은 사실상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다. 명나라와의 교역이 중지됨에 따라서 태조 누르하치 때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명과의 인삼, 교역은 파탄상태에 있었으며 청은 만주족뿐만 아니라 요령의 한족, 새로이 손에 넣은 몽골인까지 먹여 살려야 했다.

이미 청나라의 인적 자원은 약탈 경제로는 유지되기 어려운 수준이었고, 일종의 현물로 가지고 있는 인삼, 모피 등도 명나라와의 교역이 중지됨에 따라서 의미가 크게 떨어지고 만다. 인삼, 모피가 썩어문드러지도록 많고 금은보화가 있다한들 생필품과 밥을 먹어야 사람이 살 것이 아닌가. 이미 누르하치 시대부터 청나라는 시하(柴河)·범하(范河)·삼차얼(三岔兒) 등을 개간하며 상업에서 농업 위주로 경제 전환을 노려봤으나 기상 악화로 실패했다. 결국 만주족은 요령의 한족에게서 식량을 쥐어짜내야 했기 때문에 한족과 만주족의 대립이 심각해졌고 상황은 1633년의 식량위기까지 겹치면서 경제적으로 극한 상황에 달해있었다. 새로 항복한 뱅성들에게 줄 땅이 없었고, 병자호란 직전인 1635년과 직후인 1637년에도 식량 위기에 직면했다.[6] 청나라가 영원성 - 산해관을 뚫지 못했다고 쳐도 길게 우회하여 베이징 앞쪽까지 공격 할 수 있었으니 명나라의 동북 방어선이 방어가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연운십육주 획득 후의 요나라나 금나라와 같은 수준도 아니고 '습격 후 약탈' 이라는 전형적인 유목민식 전략 외엔 바로 당장의 돌파구도 없었던 상황이니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국내의 병자호란 사 담론은 이상하게도 침입한 청나라의 시각을 고려하는것보다도, 침략을 당한 주체인 조선의 사정만으로도 이야기를 전개하려는 모습이 있다. 마치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폴란드 침공을 서술하며 독일 내부의 사정보다도 폴란드 내부의 사정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꼴. "왜 쳤냐" 가 아니라 "왜 맞았냐" 만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는 꼴인데, 이에 대해서 서울대의 오수창 교수는 『청淸과의 외교 실상과 병자호란』이라는 논문에서 이런 '자초한 전쟁' 이라는 통념들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했다.“병자호란 조선이 자초한 전쟁 아니다"

군사적으로 막으려면 대대적인 군비 증강이 필요했지만 임진왜란 이후인 당시 조선 현실에서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전 글에서 인조가 군제 개혁에 대한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고 했지만 오히려 실상 인조대는 청과의 전쟁 위협을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군대를 쓸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갖은 노력이 행해졌다. 인조반정 이후 당시 조선군의 주력이었던 속오군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조정 주도로 조총 생산을 서둘러 각 지방에 보급했고 호패법 등의 시행을 통해 속오군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하려 했다. 임진왜란때 큰 문제를 드러낸 각 지방 수령이 그대로 지휘권을 행사하는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전문적인 무관이 평시 훈련과 전시 단위부대 지휘를 담당하게 하는 전담 영장제가 실시된 것 역시 인조대부터 였다. 정권 보위의 핵심이라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 훈련도감 대신 실질적으로 전투를 담당할 수 있는 중앙군으로 어영군, 총융군, 수어청 군대가 창설되고 강화되기 시작한 것 역시 이때였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서 병자호란 직전에는 어영군 5천 여명, 총융군 2만여명의 병력이 준비되었고 전국적으로 8-9만 가량의 속오군이 마련되었다.(다만 총융군 병력의 다수는 속오군이었기 때문에 병력이 겹친다.) 또한 전국적으로 36-38개의 영(營 - 기효신서 체제의 단위부대로 대략 2500에서 3000가량)과 이를 담당하는 전문 무관인 전담영장이 설치되면서 이러한 병력에 대한 지휘체계도 잡혔다. 하지만 이괄의 난에서 12000 가량의 정예병이 손실되었던 것을 제대로 회복했다고 보기 어려웠고 또한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재정적 문제로 인해 병자호란까지 이런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실제 전란이 일어났을 때 왕과 최고지휘권을 가진 체찰사 김류가 남한산성에 갇힌 상황에서 지휘권을 행사해야 할 도원수 김자점이 전쟁지도를 실질적으로 포기해 버려 이 병력들이 다 따로 놀았다는 점이었다.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성격이나 이괄의 난에서 사라진 정예병들을 생각하면 그 수준은 훨씬 덜했을 거라는 가정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만, 광해군의 외교를 잘 받아주던 온건파 누르하치[7]와 달리 강경파인 홍타이치가 광해군의 외교를 잘 받아들여줬을지 의문이며, 아니면 명이 고려하던 것처럼 조선 단독으로 후금을 공격한다는 계획이 실행되었을 수도 있다.[8] 게다가 청에게는 명을 치기전 배후를 안정시켜야 했고 자연재해로 어려워진 경제사정을 외정을 통해 안정시킬 필요성도 있었다. 결과의 변화는 어느정도 예상할 수는 있겠지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변수는 한두가지가 아니란 점을 생각하면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어도 호란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wikI:"삼전도의 굴욕"다만 막을 수는 있었겠지.

3. 원인

전쟁이 촉발된 가장 큰 원인은 1636년 2월 중순 청이 황제를 선포하면서 조선에 의견을 묻는 이라고 쓰고 사실상 강요로 읽는 사신으로 용골대, 마부대 등과 새로이 복속된 몽골의 왕족들을 보냈기 때문이다. 사신도 명목상 당시 죽은 인조의 왕후에 대한 조문단으로서 왔는데, 하는 소리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소리였다. 거기다 이미 정묘호란 때 후금은 조선과 화약을 맺으며, 조선과 명 간의 특별 관계(군신 관계)를 인정하고 조선이 청이 아닌 명과도 외교를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자세한 건 정묘호란항목 참조).[9] 그런 상황에서 청의 칭제 선언은 조선에 대해 명과 청 사이에서 양다리 서지 말고 이제는 설 줄을 명확히 해라는 요구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런 사절이 청 태종 자신의 명의가 아닌 모두가 왕자급에 불과했던 8명의 호쇼이 버일러(hošo-i Beile, 和碩 貝勒), 17명의 구사이 어전(gūsa-i ejen, 固山 牛祿),[10] 49명의 버일러 명의로 왔다는 외교적 결례까지 있었다.

정묘호란 이후 광해군의 현상유지적 기미정책을 어느 정도 계승하여 후금의 무리한 요구까지도 대부분 받아들이곤 했던 인조 및 대신들은 이에 대해 격앙된 반응을 보였으나(심지어 강경한 외교문서로 답하려는 기미도 있었다) 정묘호란으로 인해 상대가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대응문제로 시간을 끌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자 후금 사신들은 조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바로 돌아가면서 전운이 고조된다. 게다가 사신이 떠나면서 백성들이 돌팔매 등으로 응수한 것도 사태를 키웠다. 조선의 강경한 반응에 따라온 몽골왕족들이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나라이니 후금이 황제가 된다면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어찌 이런 반응을 보이느냐?"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소릴했다. 사이가 좋아서 형제가 된 게 아니란 말이지 세컨드 염장

그 후 인조는 조선 내에 전쟁대비를 하라는 강경한 선전(宣戰)의 교서를 내렸는데 그 교서들 중 한 장이 돌아가던 후금 사신들의 손에 넘어간다. 인조가 보내려던 강경한 외교문서도 백마산성에서 잠시 가로막혔으나 역시 후금 사신의 손에 넘어간다

이후로도 지휘관들을 교체하는 등 준전시체제로 돌입하나 대 후금 외교의 베테랑이던 박로가 "지금 우리 걔네 막을 힘 없어요.[11] 지금이라도 미안하다 하고 받아들여요."라고 상소를 올렸고 압록강이 얼어붙으면 끝장이라는 최명길의 상소도 뒤를 잇자 결국 이를 인식하고 화해를 요청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인조는 이쯤되면 전쟁 한판 하자 이거지요?란 강경론을 주도하며 전쟁분위기를 조성해놓고 정작 최명길을 비롯한 현실론의 반박이 있자 충격을 먹고는 자신에게 고무되어 최명길을 비판하는 삼학사등에게 젖비린내나는 애송이라고 꾸짖는 등 완전히 입장을 바꾸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러나 누가 이 조서를 가지고 갈 것이냐를 놓고 거진 7개월 동안 조정에서는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뭐병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런 조서를 가지고 간다 해서 그게 쉽게 받아들여질 것 같진 않고, 사신으로 가는 사람은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으니... 실제로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정묘화약때 우리와 명의 특별한 관계를 인정하고 애매하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그쪽도 알잖슴? 칭제 인정건은 좀 넘어가 주세요."라는 취지의 글을 몇번씩 보냈지만 무반응이었다.

결국 11월에 이르러서야 화친 얘기를 꺼낸 박로가 사신으로 직접 가서 화해를 요청하기로 하고 출발했지만...

사신으로 간 박로가 압록강을 채 넘기도 전에 청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12] 과연 최명길의 말대로였다.

4. 전쟁의 발발과 흐름

1636년 12월 겨울, 청태종은 타타라 잉굴다이(용골대), 마푸타(Mafuta, 馬福大, 馬福塔)를 지휘관으로 하여 인, 몽골인, 만주인 혼성부대 10만[13]을 거느리고 침공하였다. 당시 조선의 맹장이었던 의주부윤 임경업은 소수의 병력(고작 400명!)으로 백마산성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나 청군은 이 길을 피하여 남하하였고 안주, 평양, 개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7일 만에 한성에 다다른다. 이는 상당한 무리수였는데 조선군이 보급선을 끊고 곳곳에서 압박에 들어간다면 항복을 하는 쪽은 인조가 아니라 오히려 홍타이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초고속으로 진격하여 인조를 굴복시키는 데 실패하면 청군의 패배는 필연이었다.이런 전쟁을 지다니 ㅡㅡ 거란(요나라)과의 여요전쟁을 생각해보자.

그러나 청도 나름 생각이 있었는데, 당시 조선군이 임진왜란의 충격을 간신히 추스리던 참에 이괄의 난이 터져 금쪽같은 평안도 북방 정예병 12000명이 절단나버리는 바람에 청의 진격로 상에 제대로 된 군대가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즉 형식상의 방어라도 했다면 모르지만 아예 방어병력 자체가 없었기에 무조건 진격을 거듭하면 조선군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병력을 소집, 배치하기 전에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물론 의병을 일으키고 청군을 본격적으로 압박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겠으나 불과 1주일밖에 되지 않는 시간은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급보를 접한 조선은 두 왕자(봉림대군·인평대군)를 비롯한 비빈들과 문, 무반과 그 가족들을 우선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고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뒤따라가려 하였으나 이미 청군이 한강을 도하하여 통진, 김포 일대를 점령하는 바람에 광주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당시 청군의 공격전략은 산성 따위는 무시하고 큰 길을 통해서 초스피드로 기동하는 것이었다. 조정도 손놓고 있었던 건 아니라서 일반적인 농성전에서 벗어나 산성에서 나와 방어진을 구축할 것을 명령했지만 북도 방위를 맡았던 도원수 겸 매국노 김자점은 이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가 이끌던 함경도군 2만은 산성에 틀어박혀 방어에만 전념했던 것. 청태종은 인조와 조선 백성들에게 각각 문서를 보낸다.

인조에게 보낸 문서.

대청국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서 조서를 내려 유시[14]한다.

우리 군대가 지난날 동쪽으로 량하를 정벌했을 때 너희 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맞아 싸웠다. 그 뒤로 또 명나라를 도와서 우리에게 해를 끼쳤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생각해서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우리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들을 유인하여 명나라에 보냈다. 짐이 진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들 벌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이로써 강대함을 믿고 약자를 업신여겨 이유없이 군대를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너는 또 무엇 때문에 너희 변방 신하에게 글을 보내 "사세[15]가 부득이하여 무리한 요구에 얽혔지만, 이제는 정의로써 결단할 때이니, 경은 여러 고을을 깨우쳐서, 충의의 인사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정벌하는 대열에 따르게 하라'라고 했느냐. 이제 짐이 몸소 대군을 통솔해서 싸우러 왔다. 너는 왜 지모있는 자로 하여금 계책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싸우는 대열에 나서게 해서 친히 일전(一戰)을 시도하지 않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서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써 우리의 변경을 소란하게 하고, 우리의 지경 안에서 인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명나라에 보냈으며,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두 사람이 짐에게로 귀순코자 했을 때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러하자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이번 전쟁의 원인은 실로 너희 나라에 있다.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가서 화친을 애걸했을때 바로 그 왕들 앞으로 글을 보내지 않았더냐. 짐의 조카나 아우가 어찌 너만 못하단 말인가.

그리고 외번의 여러 왕들이 너에게 글을 보냈는데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손인데 어찌 또 너만 못하랴. 원나라 때 조선은 공물을 바치기를 그치치 않았다. 오늘날 어찌 하루 아침에 이처럼 오만해졌단 말이냐. 그들이 보낸 글을 거절해서 받지 않은 것은 너희 혼암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너희 조선은 요,금,원 세나라에 대하여 해마다 공물을 받치고 신(臣)이라 일컬었었다. 예로부터 너희 나라는 신하로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남을 섬겨 평안을 보전하지 않은 때가 있었단 말이냐.

짐이 이미 너희 나라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16]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고 백성들을 도탄에 몰아넣었다. 을 비우고 궁궐을 버려서 처자와 헤어지고 단신으로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가 설사 목숨을 연장하여 천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느다면서 지금의 이 치욕은 어떻게 씻을 것인가.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한다면 무엇 때문에 몸을 움츠리고 들어앉아서 울타리 안에 사는 부녀자의 짓을 본받는단 말인가. 네가 비록 이 성안에 몸을 숨기어 구차스럽게 살기를 바라지만 짐이 어찌 너를 그대로 버려 두겠느냐.

짐의 내외 여러 왕과 문무의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권하여 올렸다. 너는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우리 군신이 차마 듣고 참을 수 있는 말인가" 했다는데 이는 또 무슨 까닭이냐. 무릇 황제의 칭호를 올리고 안올리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지 않다. 하늘이 도우면 평범한 지아비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도 한 이름없는 사내가 되는 것이니, 네가 한 말은 심히 방자하고 망령스럽다.

또한, 맹약을 어기고, 성을 수축하였으며, 우리의 사신을 접대하는 예의가 소홀했다. 또 우리의 사신이 가서 너희 나라 재상을 만났을때 계교를 써서 우리 사신을 사로 잡으려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로 섬기면서 우리를 해치려 꾀했음은 또 무슨 까닭인가. 이상은 너의 죄목 중에 큰 것을 들었을 뿐이고, 그 밖의 사소한 것은 이루 열거하기 어렵다.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의 8도를 무찌르려고 하는데, 네가 부모처럼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어떻게 너희를 구해 주는지 보고 싶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네가 스스로 무고한 인민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의 많은 사람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만일 할 말이 있거든 서슴치 말고 소상하게 알려라.

지금까지 강대국들에게 사대해놓고 우리에게만 까불었지? 어디 너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명나라가 도우러 오는지 안오는지 보자꾸나. ㅋㅋㅋ 정도가 되겠다. 근데 인조에게 보낸 이 문서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누락되어 있고 병자록과 청나라 실록에만 실려 있다. 근데 신하들과 인조가 이 문서를 받고 열받아서 길길이 뛰는 내용은 또 있다.

조선백성들에게 보낸 포고.

"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짐은 그대 나라와 그 동안 털끝만큼도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대 나라가 기미년에 명나라와 서로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해쳤다. 짐은 그래도 이웃 나라와 지내는 도리를 온전히 하려고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동(遼東)을 얻고 난 뒤로 그대 나라가 다시 명나라를 도와 우리의 도망병들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다시 저 사람들을 그대의 지역에 수용하여 양식을 주며 우리를 치려고 협력하여 모의하였다. 그래서 짐이 한 번 크게 노여워하였으니, 정묘년에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그대 나라는 병력이 강하거나 장수가 용맹스러워 우리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짐은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끝내 교린(交隣)의 도를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우호를 돈독히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 그대 나라 군신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망한 이들을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명나라 장수가 투항해 오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막고 끊었으며, 우리의 구원병이 저들에게 갈 때에도 그대 나라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대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 배를 요구했을 때는 그대 나라가 즉시 넘겨 주면서도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신이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國書)를 마침내 못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密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입각해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關門)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策略)을 다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

짐이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대 나라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 것이요, 망령되게 스스로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고 성 안이나 초야에서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반드시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이를 그대 무리에게 유시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
1637년 1월 2일.

즉 난 너네 나라가 자꾸만 우리에게 시비 걸어도 자비롭게 참고 친하게 지내려 했는데 이게 다 인조와 조선 조정 때문이다. 그러니 쓸데없이 달아나거나 항전하지 말고 생업에나 종사해라?로 요약된다.

이후 각지에서 방어하려 했던 조선군이 황급히 한성으로 집결해 근왕을 하거나 평지에서 적을 막으려 했으나 대부분은 이미 청군보다 움직임이 한참 늦었으며, 거기에 한심한 지휘관 때문에 패하거나 고립되는 상황이었다.

청군은 식량 등의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하며 기동력을 발휘해 한성에 들이닥첬다. 현지조달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청군도 상당한 모험을 벌인 것이었다. 일단 몽골은 정리했지만 배후에는 아직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명군이 있었으며, 당시 만주에는 기근이 들어서 식량도 부족했다. 청이 비록 요동의 한족 인구를 흡수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인구에서는 조선이 많았으며, 청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후방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오직 "왕"만 노리고 공격해왔다.

조선군으로서는 민간의 막심한 피해를 무릅쓰고 청야전술을 시행하는 것이 방어전략의 핵심이었다. 인조가 멀리 도망치면서 근왕군을 모으고, 청군의 기세를 죽이면서 시간을 끌어서 청이 더 이상 못 버티고 물러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조선의 전략이었다. 조선이 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면 청군으로서는 영락없이 여수전쟁 때의 우중문, 여요전쟁 때의 소배압 꼴 나기 십상이었겠지만, 조선군의 전략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17] 애당초 성 방위군을 제외하고 전략적으로 기동할 수 잇는 야전군이 집결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수전쟁, 여요전쟁같은 전략을 제대로 운용하기 어려웠다.

조선군은 청군을 제대로 저지조차 못했고, 한성은 개전한지 단 일주일만에 함락 당해 임진왜란 때의 기록(29일)을 큰 차이로 경신했으며,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갈 시간조차 충분히 벌지 못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후방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 제대로 된 군대 하나 없는 상황에서 이는 청군의 포로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의 방위력은 충분 이상이라 평할 수 있었고, 실제 40여 일간 벌어진 공방전에서 대부분 조선군이 승리했다. 12월 18일에는 원두표가 응모한 군사들이 출전해 6명의 청군을 죽였고, 이틀 뒤 20일에는 신경진의 군사가 출전해서 30명의 청군을 죽이며 청군의 진입을 저지했다 하며, 심지어 19일에 청군이 공성을 위해 서양 대포인 홍이포를 남성으로 끌고 와 쐈을 때는 되려 천자총통으로 홍이포를 저격(…)해 버리는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다. 치밀했던 청군이 유일하게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처 성 외부에 있던 식량고에서 성 안으로 식량을 운반하지 못 해,[18] 남한산성 안의 식량은 쌀 1만 4천여 섬, 간장 100여 독에 불과하였다. 군사 1만 2천여 명이 먹기에는 겨우 50여 일 분. 더구나 그해 병자년 겨울은 정말 추웠기 때문에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결국 포위된지 45일 만에 식량 결핍과 추위로 말미암아 성내의 장병은 방어할 기력을 거의 잃게 된다.

물론 조선군이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어서 곧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한 근왕병이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청군 또한 이런 움직임에 대응, 남한산성 주변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연이은 전쟁과 정치적 혼란으로 정규군이 사실상 소멸된 조선군은 속오군을 강제로 끌어다 머릿수만 채워서 밀어붙이나 전술이나 쓸 수밖에 없었고 정규군인 청군은 이런 조선군을 아주 가볍게 밟아 버렸다. 한국전쟁이 다시 발발하면 조선인민군이 이렇게 되지 않을까?

대표적인 패배 케이스가 청군 선봉 기병 300 + 그 후방의 수천 병력에게 대군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주한 쌍령 전투인데, 인조가 후방 피신 대신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것도 이런 꼴을 보면 대략 이해가 될 것이다.[19]

그래도 조선군이 아주 깨지고만 있던 것은 아니어서 광교산 전투김화 전투 등에서는 근왕군이 값진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광교산 전투에서는 청 태종의 사위 양굴리(Yangguri 揚古利, 楊古利, 樣吉利, 白羊高羅)를 비롯한 청군의 굵직한 장수 세 명을 조총으로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전투는 속오군이 아닌 정규군이 주축이 되었기에 가능했고, 여기에 기병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제한되는 산악 지대를 방어선으로 활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전투가 제한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군이 전반적으로 형편없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나마 조선에 남아 있던 최정예 병력인 함경도군 2만을 거느린 도원수 김자점은 태세를 정비한다며 성이 포위당한 수십일간 아무 것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었다(…). 김자점이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김자점 휘하에 있던 병력은 함경도군이 아닌 황해도군이었으며 그 규모도 수천에 불과했다. 초기에 김자점은 이 병력을 끌고 청군과 교전에 나섰다 패전하고 산성에 짱박혔다. 이후 함경도군이 와서 김자점군에 합류했으나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애시당초 홍타이지는 후방 따위는 무시하고 무작정 밀고 들어와 청군의 상태도 결코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배후에서 타격에 나섰다면 장기전에서 홍타이지의 운명은 물론, 최악의 경우 명군의 카운터로 청나라의 사직마저 끝났을 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던 탓에 근왕군은 남한산성 구원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으며,[20] 지휘권이 분산되어 있어서 통일적인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물론 지휘권을 통일했다 해도 그 전력이 속오군이었기에 청군의 상태가 되지 않아 격파-후퇴-반격-격파-후퇴를 반복하게 된다. 사실 대규모의 병력이 집결만 했어도 청군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청나라가 이자성을 칠 때 동원한 병력이 18만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 청은 명을 견제할 최소한의 병력 외에는 다 끌고 내려온 것이었다. 당시 조선 속오군은 8도 속오군을 다 합쳐 8만이었다. 후방도 전혀 안정되지 않고 10만이 그대로 수도권에 대기타고 있는 상황에서 10만 가까운 조선군이 집결하기만 해도 청은 남한산성의 포위를 오랫동안 지속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에 대해 집결명령을 내릴 수 있는 명령권자- 즉 동원수 김자점이 지휘를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통일적 움직임이 없다시피 했다.

청군은 비록 대포까지 동원하고도 조선 본진인 남한산성 공략에는 끝내 실패했으나, 계속되는 조선군의 구원을 물리치면서 남한산성 내의 인조와 장병들을 심리적으로 강하게 압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버티자 결국 강화도를 공격했는데 당시 방어를 맡았던 김경징이 제대로 싸우지 않으면서 청나라 수군에게 강화도가 함락되고 말았다. 세자와 왕족들은 남한산성으로 압송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인조는 얼마 후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로 가게 된다.

인조가 항복한 이유는 간단하다. 다 끝났기 때문이다. 조선군의 상태는 이미 쌍령 전투로 증명되었고, 남한산성 함락도 사실상 시간문제인 상황이었기 때문. 물론 인조가 포로가 되거나 전사한다고 해도 강화도가 건재했다면 조선군의 저항은 지속되었을지 모른다. 어떻게든 이렇게 버텼다면 대몽항쟁 때와 달리 장기전에 대한 대책도 없던 청군은 철수하거나 궤멸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인데, 강화도가 함락됨으로써 조선 정부 전체가 완전히 궤멸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항복을 거부한다면 최소한 인조와 그 자손들은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5. 결과와 영향

음력 1월 10일 이후 최명길 등이 여러 차례 청군과 화평교섭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몇차례 망신을 당하기도 했고 강화도가 함락되었단 소식에 마침내 전의를 상실하여 1월 27일에 항복문서를 보낸다.

조선 국왕 신 이종[21]은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신이 이달 20 일에 성지(聖旨)를 받들건대 ‘지금 그대가 외로운 성을 고달프게 지키며 짐이 절실히 책망하는 조서(詔書)를 보고 바야흐로 죄를 뉘우칠 줄 아니, 짐이 넓은 도량을 베풀어 그대가 스스로 새로와지도록 허락하고, 그대가 성에서 나와 짐을 대면하도록 명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대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복종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고 전국(全國)을 회복시켜줌으로써 회군한 뒤에 천하에 인애와 신의를 보이려고 함이다. 짐이 바야흐로 하늘의 돌보심을 받들어 사방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니, 그대의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남조(南朝)의 본보기를 삼으려 한다. 만약 간사하게 속이는 계책으로 그대를 취한다면 천하가 크기도 한데 모두 간사하게 속여서 취할 수 있겠는가. 이는 와서 귀순하려는 길을 스스로 끊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성지를 받들고서부터 천지처럼 포용하고 덮어 주는 큰 덕에 더욱 감격하여 귀순하려는 마음이 가슴 속에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자신을 살펴보건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폐하의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게 드러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서를 내림에 황천(皇天)이 내려다 보는 듯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여러 날 머뭇거리느라 앉아서 회피하고 게을리하는 죄만 쌓게 되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폐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 하는데, 만약 일찍 스스로 나아가서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마한 정성도 펼 수 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신이 바야흐로 3백 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에게 우러러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리(情理)상 실로 애처로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일이 어긋난다면 차라리 칼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조지(詔旨)를 분명하게 내려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최명길은 인조의 굴욕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곤룡포를 입을 것을 허락해줄 것과 삼배구궤두 대신에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향해 절을 하는 것 정도로 의식을 대신하는 것을 제안하는 등 최대한 노력했지만 용골대는 완강했고 죄인인 인조가 남문으로 나오는 것도 허락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날 김상헌과 정온이 자결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월 28일 청태종의 답변이 도착한다.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詔諭)한다. 보내온 주문(奏文)을 보건대, 20일의 조칙 내용을 갖추어 진술하고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에 대한 계책을 근심하면서 조칙의 내용을 분명히 내려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하였는데, 짐이 식언(食言)할까 의심하는 것인가. 그러나 짐은 본래 나의 정성을 남에게까지 적용하니, 지난번의 말을 틀림없이 실천할 뿐만 아니라 후일 유신(維新)하게 하는 데에도 함께 참여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지난날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規例)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君臣)이 대대로 지킬 신의(信義)로 삼는 바이다.

그대가 만약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여 은덕을 잊지 않고 자신을 맡기고 귀순하여 자손의 장구한 계책을 삼으려 한다면, 앞으로 명(明)나라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헌납하고, 그들과의 수호(修好)를 끊고, 그들의 연호(年號)를 버리고, 일체의 공문서에 우리의 정삭(正朔)을 받들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는 장자(長子) 및 재일자(再一子)를 인질로 삼고, 제대신(諸大臣)은 아들이 있으면 아들을, 아들이 없으면 동생을 인질로 삼으라. 만일 그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다.[22]

그리고 짐이 만약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보병(步兵)·기병(騎兵)·수군을 조발하거든, 혹은 수만 명을 기한내에 모이도록 하여 착오가 없도록 하라. 짐이 이번에 군사를 돌려 가도(椵島)를 공격해서 취하려 하니, 그대는 배 50척을 내고 수병(水兵)·창포(槍砲)·궁전(弓箭)을 모두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대군이 돌아갈 때에도 호군(犒軍)하는 예(禮)를 응당 거행해야 할 것이다.

성절(聖節)·정조(正朝)·동지(冬至) 중궁 천추(中宮千秋)·태자 천추(太子千秋) 및 경조(慶吊) 등의 일이 있으면 모두 모름지기 예를 올리고 대신 및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을 받들고 오게 하라. 바치는 표문과 전문(箋文)의 정식(程式), 짐이 조칙을 내리거나 간혹 일이 있어 사신을 보내 유시를 전달할 경우 그대와 사신이 상견례(相見禮)하는 것, 혹 그대의 배신(陪臣)이 알현(謁見)하는 것 및 영접하고 전송하며 사신을 대접하는 예 등을 명나라의 구례(舊例)와 다름이 없도록 하라.

군중(軍中)의 포로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고 나서 만약 도망하여 되돌아 오면 체포하여 본주(本主)에게 보내도록 하고, 만약 속(贖)을 바치고 돌아오려고 할 경우 본주의 편의대로 들어 주도록 하라. 우리 군사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다 사로잡힌 사람은 그대가 뒤에 차마 결박하여 보낼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내외의 제신(諸臣)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하도록 하라. 신구(新舊)의 성벽은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대 나라에 있는 올량합(兀良哈) 사람들은 모두 쇄환(刷還)해야 마땅하다. 일본(日本)과의 무역은 그대가 옛날처럼 하도록 허락한다. 다만 그들의 사신을 인도하여 조회하러 오게 하라. 짐 또한 장차 사신을 저들에게 보낼 것이다. 그리고 동쪽의 올량합으로 저들에게 도피하여 살고 있는 자들과는 다시 무역하게 하지 말고 보는 대로 즉시 체포하여 보내라.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말도록 한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짐은 그대 나라가 되풀이해서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이렇게 교시(敎示)하는 바이다. 숭덕(崇德) 2년 정월 28일.

세폐(歲幣)는 황금(黃金) 1백 냥(兩), 백은(白銀) 1천 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백 부(副), 표피(豹皮) 1백 장(張), 다(茶) 1천 포(包), 수달피(水㺚皮) 4백 장, 청서피(靑黍皮) 3백 장, 호초(胡椒) 10두(斗), 호요도(好腰刀) 26파(把), 소목(蘇木) 2백 근(斤), 호대지(好大紙) 1천 권(卷), 순도(順刀) 10파, 호소지(好小紙) 1천 5백 권, 오조룡석(五爪龍席) 4령(領), 각종 화석(花席) 40령, 백저포(白苧布) 2백 필(匹), 각색 면주(綿紬) 2천 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백 필, 각색 세포(細布) 1만 필, 포(布) 1천 4백 필, 쌀 1만 포(包)를 정식(定式)으로 삼는다.

인조는 음력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오늘날의 송파구에 있었던 하중도)에 설치한 수항단에서 청 태종에게 갓에 철릭 차림으로 삼궤구고두의 항복 의식을 치른다. 후에 이것은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불리게 된다. 해당 항목 참조.

청은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까지는 어려웠다고 해도[23] 인조를 잡아가거나 혹은 퇴위시키고 세자를 왕으로 대신 세움으로써 원나라가 그랬든 조선을 보다 직접적으로 조종할 수도 있었다. 애시당초 전쟁 패배 책임만으로도 인조가 퇴위당할 이유는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청은 그러지 않았다.[24] 요나라나 금나라 예처럼 한반도에 발목을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도 있고, 조선이 생각 외로 극렬하게 저항하는 대신 조용히 항복을 택하고 패전에 따른 복종의사를 표시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혹시 모를 일본의 침입에 대한 일종의 방파제로 염두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외에 다양한 가능성이 있지만, 진짜 본심은 그 당사자들 외에는 알 수 없다. 여하간 청은 목표했던 물자를 해결했고, 후방의 위협을 제거한 것이다.

어쨌든 결국 조선은 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강화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명 황제가 수여한 고명, 책인[25]을 바칠 것.
  • 명과의 국교를 끊고 청과 군신관계를 맺을 것.
  • 명의 연호 대신 청의 연호를 쓸 것.
  • 세자, 왕자 및 대시의 자제를 청의 수도(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 청이 명과 가도[26]를 공격할 때 원병을 보낼 것.
  • 정기적으로 조선은 청에 사신을 파견할 것.
  • 조선의 인질이 조선으로 도망할 경우 무조건 심양으로 송환할 것.[27]
  • 양국 신하 자제들과의 통혼을 장려, 우의를 다질 것.
  •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지 말 것.[28]
  • 조선은 매년 예물을 청에 세폐로 보낼 것.

세폐의 양은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활을 만들 때 필요한 소의 뿔[29]) 200우, 표범 가죽 100장, 차 1,000포, 수달 가죽 400장, 청서피(靑黍皮; 다람쥐류의 가죽) 300장, 후추(胡椒) 10두, 호요도(好腰刀) 26자루, 단목 200근, 호대지(好大紙) 1,000권, 순도(順刀) 10자루, 호소지(好小紙) 1,500권, 오조룡석(五爪龍席; 화문석의 일종) 4령(嶺), 각종 화석 40령, 백저포(白苧布; 두루마기의 일종) 200필, 각색 면주(綿紬; 명주) 2,000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00필, 각색 세포(細布; 麻布) 10,000필, 포(布) 1,400필, 쌀 10,000포.[30]

이로써 조선은 개국 이래 이어오던 명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이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요구사항을 놓고 보면, 일단 세폐가 어마어마한 수치로 늘었다. 이는 나라에 보내던 조공품의 몇배에 달하고 병자호란 이전에 청의 공갈협박에 보내던 세폐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거기다 하사품도 별거 없어서 그야말로 등골 빠지는 수준의 세폐를 요구했다. 임란 이후 명 사신들이 와서 뜯어가는 걸 고려한다 해도 청나라의 요구로 세폐가 너무 크게 늘어서 조선이 지는 부담은 엄청나게 가중되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는 청이 세폐를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명나라 공격에 원정군을 자비로 파견해야 했다는 점도 엄청난 부담이였다. 실제로 조선군이 참전한 전투 중에는 나중에 항복한 명군 장수들이 조선군의 저격[31]에 피해가 컸다며 이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다 청은 전쟁 직후 귀환할 때도 약탈을 해대서 치를 떠는 기록이 존재하며, 남하시 현지보급으로 초토화된 서북방면 대신 약탈을 피했던 함경도 방면으로 귀환하는 등 계획적으로 약탈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 북도 일대의 피해는 가중되었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임진왜란 이후의 명나라에 사대하던 시절보다 크게 나빠진 게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어마어마했던 세폐도 청이 입관한 이후 크게 줄였고 하사품이 늘어나 이전의 정상적인 조공외교 관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사이에 뜯긴 걸 돌려주지는 않았기에 조선은 전쟁에서 진 대가를 분명히 치러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조공을 하던 오랑캐에게 반대로, 조공관계를 맺는 속국이 된 사실[32] 조선인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는 가히 윤관의 여진 정벌 이후 순식간에 완안아골타의 금나라가 군신관계를 주장한 상황 그 이상이었다. 생각해보자. 세종대왕 때는 4군6진의 땅을 뜯어내기도 했고, 유목민[33] = 예비 약탈자라는 상황 탓에, 약탈하러 오기 전에 작살내 놓자는 생각으로(예방전쟁) 조선군이 틈틈히 쳐들어가서 여진족의 농토에 소금을 뿌리고 건물들을 작살내는 통에 노약자들이 울부짖었다는 기록도 많다. 그러니까 조선 초의 여진족은 그냥 조선군과 명군의 동네북이였다. 그것이 이렇게 뒤집힌 것이었다.

또한 당시 청군이 끌고 간 "환향녀" 문제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시댁을 다시 찾았는데 인조가 직접 강간피해는 이혼의 대상이 아니라며 내치지 말라고 명령했음에도 사대부들이 무시함으로써 조선의 평판을 크게 깎는 데 기여했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비구니가 되거나 아니면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는 성매매를 하게 된다.

물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조선은 얼마 뒤 멸망한 명나라에 비해 매우 관대하다고 볼 수 있는 피해를 받았다. 조선 국왕 인조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퇴위당하지 않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지만 여러 방법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탈출한 조선인들에 대한 청나라의 강제적인 송환 요구도 초기의 일이지, 나중에는 적당히 눈감아주는 쪽으로 바뀐다.[34] 조선은 속된 말로 삥을 뜯겼지만 명나라처럼 점령당하지도 않고, 한족들처럼 변발로 머리가 밀리는 등 풍습에 변화를 겪지도 않았다. 당시 동북아시아 각국의 군사적 외교적 관계가 어느 정도 적용이 되었겠지만, 청이 조선에 대해 매우 호감을 가졌음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위 왕족들이 조선 여인과 결혼을 하려 한다거나[35], 명을 칠 때 조선을 끌어들이거나, 러시아가 남하하자 나선정벌에서 병력을 요청한다거나.

결과적으로 이 전쟁의 승리로 청은 뒷통수가 약간 근질근질하던 후방을 단단히 다져두었고, 경제 문제를 상당히 해결했으며, 명을 공격하는데 모든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었다.

여담으로 인조는 왕좌를 지킨 이후에 대대적인 복수극을 벌여 김경진, 장신을 비롯해서 강화도에서 달아났던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고 호종하지 않은 신하들과 근왕병을 데리고 오지 않은 장수들을 적을 눈앞에 두고 임금을 벌리고 달아난 죄를 물어 엄벌했다. 이때 김자점도 도원수가 되어 뭉기적거리고 있었다고 처벌당했으나 이후 강빈의 사사와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 때 인조에게 영합함으로 최고 권신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호종한 신하들에겐 상을 주었으나 김상헌, 김상용 등에게는 영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강도(江都) 수호의 임무를 받은 제신(諸臣)들이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날이나 보내면서 노닐다가 적의 배가 강을 건너자 멀리서 바라보고 흩어져 무너진 채 각자 살려고 도망하느라 종묘와 사직 그리고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을 쓸모없는 물건처럼 버렸을 뿐 아니라 섬에 가득한 생령(生靈)들이 모두 살해되거나 약탈당하게 하였으니, 말을 하려면 기가 막힙니다.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 부사(副使) 이민구(李敏求),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 경기 수사 신경진(申景珍), 충청 수사 강진흔(姜晋昕)은 모두 율을 적용하여 죄를 정하소서.

군부(君父)가 외로운 성에 거의 두 달이 되도록 포위당하여 군사는 고단하고 양식은 적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으므로 머리를 들고 발돋움하며 구원병이 이르기만을 날마다 기다렸지만 팔도의 군사를 거느린 신하로 한 사람도 성 밑에서 예봉을 꺾고 죽기를 다투는 이가 없었으니, 군신(君臣)의 분수와 의리가 땅을 쓴 듯 없어졌습니다.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 경상 감사 심연(沈演), 황해 감사 이배원(李培元), 북병사 이항(李沆), 남병사 서우신(徐佑申),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 충청 병사 이의배(李義培)를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경징·이민구·장신 등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신경진·강진흔 등은 그들이 지킨 곳을 김경징에게 물은 뒤에 처치하라. 민성휘 등은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으니 우선 죄를 논하지 말라. 삼남(三南)의 병사는 이미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하였다.

6. 영향과 평가

그 피해가 상대적으로 경미했다고 해서, 조선에서 청에 대한 치욕이 잊혀진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명분상으로나마 북벌론이 제기되었으며 박씨전, 임경업전 같은 정신승리 가상소설이 출판되었다.

오늘날 조선 중기는 사극에서도 역덕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시기이지만 호란에 대한 관심은 왜란과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미미하다. 왜란은 시작은 안습했을지언정 마지막은 침략자를 몰아내는 통쾌함도 있었거니와 이순신 등 수많은 명장들이 활약하며 이야기거리를 양산했지만, 호란은 시작부터 끝날때까지 안습의 연속이라 완전히 흑역사가 되어버렸다.[36] 추노(드라마) 정도가 그에 근접한 시대를 다루었고, 병자호란 시대를 다루려는 추노2가 기획되었으나 현재까지는 깜깜 무소식.

흑역사지만 여러 매체에 역사물을 다룬 작품들 중에서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의외로 침략자에 대해 관대하게 평가받는 역사이기도 한데 심지어 어느 매체에서는 청나라에 우호적이지 않은 집단들은 대차게 까이기까지 한다(...). 청나라를 관대하게 보면서 지나치게 미화, 왜곡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물론 당시 조선 정부의 잘못도 있었고 명에 비하면 훨씬 나은 처분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금나라와 청나라가 이때에 저지른 짓들이 용서가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기록만 봐도 <지천집>: 50만 명이 포로, <남한일기>: 심양으로 속환한 사람 60만 이상.
<산성일기>: 심양 시장에서 팔린 사람 66만 이상, <비어고>: 60만 이상이 포로. 사실상 고려사 몽골군 수준~~

7. 여담

병자호란 이전 조청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안 일본은 조선측에 군사원조를 제의한 적이 있었다. 물론 조선에서는 단칼에 거절(...). 이괄의 난 때 이괄군의 항왜(왜관)를 대응하는 것조차 주저했던 조선이다. 실제 일본에서 정말로 군사원조를 해줄 생각이 있었는지는 따져봐야 할테지만 만약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면 청일전쟁은 260년 앞서 일어나게 됐을 것이다.[37]

사실 일본은 정묘호란 직후부터 조청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대단히 촉각을 곤두세웠다. 쓰시마 도주는 정묘호란 직후의 혼란한 틈을 타 조선과의 관계에서 실익을 챙기고자 노력했고 실제로 조선한테서 삥을 뜯는것도 성공한다. 문제는 쓰시마의 가로(家老)이던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쓰시마 도주 소오 요시나리와 뒤집어지게 싸우다가 쓰시마가 조선에게 쳤던 사기[38]에도 막부에 까발려서 크게 문제가 되었다. 시게오키는 막부 핵심인사와 친한 자신의 인맥을 믿고 이런 하극상을 벌였지만 정작 막부측에선 조선과의 외교관계가 중요했기 때문에 대조선외교 노하우를 지닌 소오가문을 내칠수가 없어 결국 요시나리의 손을 들어주고 시게오키를 처형한다. 이 사건은 조선에서도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는데, 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일본에서 조선과의 외교를 전담하는 쓰시마를 건드리고 있으니 불안할 수밖에. 결국 조선은 남쪽방면의 안정을 위해 일본에 유화책을 쓸수밖에 없게 된다.

병자호란이 터지고 인조가 항복한 이후에 명나라로부터 조선에게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황제의 서한을 받는다. 이 당시 명나라는 바로 그 이자성이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그 외 여러곳에서도 도적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던 상황이여서 조선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고, 애초에 병자호란의 전개가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서 만약 임진왜란때처럼 제대로 돕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 해도 제대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다만 전혀 돕지 않으려 한건 아니라서 그나마 명맥상 산둥 지방에서 약간의 수병을 보내려고 했다 하는데, 이 마저도 풍랑 때문에 중단됐다고 한다(...). 물론 이 약간의 수병으로 전쟁의 결과가 뒤바뀌진 않았겠지만, 그나마 강화도를 수비하는데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수 있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아예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기 바빴던 김경징 보단 나았을테니. 결국 명나라는 임진왜란과 달리 병자호란에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못하고, 그 후 10년도 못가서 이자성의 반란군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청군이 백마산성을 피해서 한성으로 직행하는 바람에 청군과 직접 싸울 기회가 전혀 없었던 임경업은 이 당시 후방 생각을 안하고 쳐들어온 청군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으로 역침공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다. 청태종은 당시 조선 침략에 정예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올인한 상황이였으니 실로 아이디어 자체는 좋았다고 볼 수 있다. 허나 제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카르타고의 뒤통수를 쳤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달리 임경업의 군은 고작 400명 밖에 안됐고, 고로 아마 명나라의 군대나 김자점의 북방군과 연계해서 역침을 할 계획이였을듯 한데 이미 위에 언급된거처럼 김자점은 애초에 청나라군과 싸울 의지가 없었고 명나라는 각종 도적들의 반란들 때문에 이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이 앞뒤사정을 알고 있었던 임경업은 대신 평안병사인 유임과 함께 연합전선을 펴고자 했지만 유임은 임경업이 공을 세울것을 시기하여 어명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39]는 일화도 존재한다. 결국 임경업은 이미 화의를 맺고 철군하던 청나라 황제의 조카 요퇴의 병력 300을 압록강 인근에서 공격하여 격파했으나, 전쟁은 이미 끝난 뒤였다.

병자호란 직전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됐던 조선 통신사들은 전쟁 직후에 귀국을 해서 전쟁을 피했다. 그러나 돌아와보니 종로 길거리가 폐허로 변해있었던 것은 큰 충격. 일본 가서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는 등 성공적인 외교를 펼치고 돌아오니 이 모양 이 꼴이 된 상황에 통신사들은 땅을 치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임진왜란과는 달리 병자호란에선 준비도 철저히 하고도 패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인조 본인과 당시 서인정권 때문이었다. 예초에 정당성이 부족하였던 인조정권은 이괄의 난 이후 전국에 있는 모든 군을 더욱 엄격하게 감시하였는데 감시한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전쟁에 꼭 필요한 진법훈련과 집단훈련을 못하게 한것이다.[40]

아마도 진법훈련이나 집단훈련을 못하게 해서 지방군이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막을려고 했던 의도였을 것이다. 실제로 진법훈련이나 집단훈련을 실시한 군사령관들은 인조정권의 감시체계에 걸려 반역으로 죽거나 파직당하는등 보복을 하였고 각지에 있는 군사령관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진법훈련을 하지 않았다.

8.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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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시 예문관제학이자 효종 대의 영의정이었던 이경석이 썼다.
  • [2] 전쟁 중 온 가족을 잃은 어떤 노파의 절규. 병자호란 직후 백성들의 심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 [3] 이때문에 병자호란은 음력으로는 병자-정축년에 걸쳐있으나 양력으로는 사실상 1637년에 벌어진 전쟁이다. 1627년 정묘호란 발발후 9년만에 다시 일어난 전란이다.
  • [4] 그 견해의 대표적인 근거 중 하나로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정권의 실세이던 대북파는 쑥대밭이 됐지만 광해군대 외교담당() 실무진들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들곤 한다. 하지만 광해군 대의 양면화친 외교를 주도한 게 광해군 자신이라는 점과 당장의 후금과의 외교단절(정묘호란 화약 전까지)만 보더라도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보긴 힘들다. 또한 인조가 광해군의 스탠스를 이어가지 않았다는 증거가 다름아닌 강홍립에 대한 인조의 처우인데 광해군이 조선을 지키려고 일부러 파견한 강홍립을 인조는 삭탈관직 시켜버렸다.
  • [5]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변방에서 명나라가 청나라를 막고는 있었지만 우회해서 들어온 청군이 베이징 주변의 현대 행정구역 기준으로 허베이성, 멀게는 산둥성까지 내려가서 약탈을 행했다는 내용. 병자호란이 있던 1636년도에는 홍타이지의 동생인 아지개가 만리장성을 우회해 현대 행정구역상 베이징시 외곽구역인 창핑구 외 16곳을 공격해서 가축 17만여 마리를 약탈하였다. 명나라로서는 수도 앞마당까지 약탈당한 셈. 병자호란 이후에도 명에 대한 약탈은 계속되어, 병자호란 2년후에는 명으로부터 가축 46만마리를 약탈하였으며, 1642년, 즉 병자호란 6년 후에는 금 2200냥, 은 200만냥, 진주 4400개가량, 가축 32만마리를 약탈하는 등 청나라는 지속적으로 명나라를 약탈해서 엄청난 물자를 얻어냈다. 조선이 금화 100냥, 은화 1000냥을 청에 바치는 것도 힘겨워한 것에 반해, 병자호란 6년 후 시기에 명나라로부터 청나라가 약탈한 물자는, 조선이 바쳤던 공물을 기준으로 금 22배, 은 2000배에 달한다.
  • [6] 출처는 예일 대학의 중국사 교수이자 청나라 시기의 변경사에 대하여 세계적인 권위자인 피더 퍼듀 교수의 China Marches West 중 pp.166 ~ 167
  • [7]태조로 홍타이치의 아버지이며 조선과는 원수를 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면 조선과는 화친을 원했다.
  • [8] 명의 마지막 명장이자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원숭환이 고려하던 계획 중 하나. (출처 :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하지만 이건 조선 입장에서 적당히 핑계대고 생까면 끝이다. 조선과 명을 잇는 요동을 광해군 13년에 후금에게 잃은 이후, 명 입장에서 조선에게 적극적인 요구를 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중립외교'를 주장한 건 그나마 광해군 정권에서 광해군 혼자에 가까웠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또한 홍타이지의 강경노선을 좀 잘 봐야 하는게 이 양반은 광해군 재위기에도 누르하치에게 반드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진언하던 양반이다.
  • [9] 여기에는 명과의 조공무역으로 값진 물건을 얻어서 자신들에게 싼값에 파는 빵셔틀이 되라는 이유가 존재했다. 이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마찬가지(명과의 조공무역은 막았지만 일본과의 무역에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 [10] 구사(gūsa, 固山)가 만주어로 기(旗)라는 뜻이므로 팔기대신(八旗大臣)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즉, 각 팔기의 대신들.
  • [11] 조선의 방위체제, 특히 청을 막아야 할 평안도의 방위체제는 이괄의 난을 계기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 [12] 그런데 박로는 이런 상황에서도 용케도 살아남아 남한산성에 피란간 인조에게 합류했다. 본격 생존왕?
  • [13] 이 혼성부대에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 [14] 諭示, 타일러 가르친다
  • [15] 事勢, 일이 진행되는 형세
  • [16] 背逆, 은혜를 저버리고 거스리는 것
  • [17] 최정예 병력인 북도군을 거느린 도원수 김자점이 한달 넘게 가만히 있던 게 컸다.
  • [18] 처음 축성될때 성 안에 있던 식량창고를 광주목사 한명욱이 험준한 산에 창고가 있으면 운반하는 백성들에게 민폐라며 성 밖으로 끌어냈는데 이것이 큰 실책이었다. 게다가 이것도 사실 운송을 담당한 상인과 야합했다는 말이 있다.
  • [19] 지휘관이었던 경상좌병사는 허완은 말에서 3번이나 떨어지다 결국 도주하는 아군 병사들에게 밟혀죽었다(…). 연려실기술의 쌍령 전투 기록이 과장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조선의 속오군은 정말 한심할 정도로 전투력과 군기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청군의 목적 자체가 조선군의 섬멸이 아니라 패퇴에 있었기에 사상자는 많지 않았다. 이후 반격을 준비하지만 그 전에 인조가 먼저 항복하게 된다.
  • [20] 참고로 조선 각지의 근왕군이 임진왜란 당시 유연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선조가 안전을 보장받은 게 컸다.
  • [21] 실록 원문에는 임금의 이름을 피휘 하기 위해 성휘姓諱 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 [22] 이게 나중에 인조가 소현세자를 적대하는 주요 떡밥이 된다.
  • [23] 애시당초 명이 아직 건재한 상황인데다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조직되고 정규군이 다시 반격하는 한편, 각 지역의 수비군이 산성을 나와 게릴라와 보급선 차단을 목적으로 반격에 착수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쌍령 전투는 남한산성 구원을 위해 오합지졸인 속오군을 제대로 된 훈련과 조직화도 없이 무리하게 끌어다가 투입했기에 일어난 참사고, 정규군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 [24] 대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잡아갔다. 그리고 인조는 야사를 중심으로 반청을 했다는 인식과는 달리 청에 대한 복수심을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 [25] 고명(誥命)은 황제가 제후 등등에게 준 임명조서, 책인(冊印)에서 책은 책봉 내용을 담은 문서, 인은 인장을 뜻한다.
  • [26] 모문룡이 거처하고 있던 섬을 말한다.
  • [27] 다만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켜지지 않는 일도 있었다. 애시당초 노동력 부족 때문에 끌고 간 것이어서 생긴 문제였지만.
  • [28] 이것 때문에 효종이 즉위년에 성곽을 개수하려다가 청나라 사신의 질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만 이경석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유배가 있었던 김자점이 효종의 대외정책을 청에 고자질한 것이다. 결국 김자점은 이 사건으로 반역 혐의가 적용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 [29] 그냥소가 아니라 물소의 뿔인데, 조선군의 주력무기중 하나인 각궁의 주요 재료다. 문제는 이게 정작 조선땅에선 나지 않아서 명나라 아니면 일본을 통하여 오키나와에서 수입하던 것...
  • [30] 이중 후추는 조선에서 나지 않는 향신료였다. 요즘은 흔해 빠진게 후추지만 당시엔 값도 매우 비쌌고 물량은 전량 일본에서 수입해 조달해야만 했다.
  • [31] 실제로 청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이기고 있을 때에도 조선군 조총병의 기량은 상당히 높게 평가한 바 있다.
  • [32] 다시 말하지만 청은 당시 조선(1,100만명 내외)보다 인구가 훨씬 적었다. 여진족이 50만~100만인 판국에 조선에서 끌려간 포로가 50~60만에 정묘호란까지 합치면 70~80만명에 육박한다. 물론 그때 청에는 귀부한 한인도 여진족만큼 있었고, 몽골인(20만)에다 이들 전체 숫자와 맞먹는 하층민들까지 있어서 총 인구는 그래도 200만~400만까지 나오므로 포로와 여진족 인구가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지나치게 증가한 인구로 인한 식량부족도 병자호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 [33] 다만 여진족은 유목민이라기 보다는 농사와 수렵, 수렵으로 확보한 모피등을 내다 팔고 부족한걸 사오는 교역을 더 중시하는 반농반수렵 민족이였다. 주변 털러 다니지 않은건 아니였지만.
  • [34] 그래도 많은 백성들이 속환되는 일이 어려웠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병자호란 후 인조정권의 권력자들이 포로로 잡혀간 본인들 가족들만 빨리 구하기위해 은 수천냥에서 수만냥의 몸값을 치르자 조선인 포로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갔고 당연히 이런 돈이 없는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간 가족이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조선인 포로 주인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35] 이 경우는 극소수 였으며 포로에서 첩으로 끌려간 조선여인들은 청나라 남편이나 본처들에게 심한 학대를 받아 죽거나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아져 사회문제가 되자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여인을 학대하는 남편은 처벌하고 조선인 첩을 학대한 본처는 남편 사망시 무조건 순장하도록 칙령을 내릴 정도였다
  • [36] 게다가 왜란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걸쳐 7년 정도의 장기전(물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엔 휴전 기간이었으나 왜군이 남부 지방에 왜성을 쌓아 주둔하긴 했다.)이어서 더욱 영향이 심했으나 호란은 2달 정도의 단기전이란 차이도 있다.
  • [37] 재미있는건 임진왜란 당시엔 여진의 누르하치 측에서 조선에 원병제의를 했다는것.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 제안은 명과 조선 양측에 의해 거절된다. 오랑캐는 ㅈㅅ여
  • [38] 일개 번에서 보낸 사절을 막부의 사절이라 속이고 국서를 위조했다.
  • [39] 그러나 유임의 거절 이유도 충분히 타당하다. 청나라의 수도를 공격하는 것과 같은 국가적 중대사는 임경업과 유임 정도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 [40] 진법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전쟁은 집단전이며 이런 집단전에서 효율적인 작전운영을 위해서라도 진법훈련을 통한 집단공격이나 집단방어를 일사분란하게 실행하여 군전체가 무너지는것을 막는다. 중국 송왕조도 문치주의에 입각하여 군지휘관을 수시로 교체하였고 집단훈련을 못하게 함으로써 이민족 침입에 숫적우위에도 불구하고 집단적인 공격이나 방어를 하지 못해 허구헌날 털렸다. 실제로 체계적으로 진법훈련을 받은 금군 20명에게 수천의 송나라 군대가 대패한 기록이 있다.
  • [41] 비중은 크지 않으나, 우리나라에 강시가 생긴 계기로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