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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됭 전투

last modified: 2018-08-19 02:31:49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독일군의 대공세
3. 양측의 피해
4. 그외


1. 개요

"지옥도 이렇게 처참할 수는 없다. 모두가 미쳤다."
- 베르됭 전투에 왔던 한 프랑스 육군 장교. 얼마 뒤 전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1916년 2월 21부터 7월까지 한 독일의 공세.
슐리펜 계획이 1차 마른 전투의 패배로 실패로 돌아가자, 소 몰트케의 후임으로 참모총장에 온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1915년에는 동부전선에 주력한 뒤, 1916년 서부전선의 공세를 기획했다. 그는 극적인 전선돌파에 따른 신속한 전쟁 종결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전쟁을 이기려면 사실상 요새인 전황을 타개시켜야 한다고 봤다. 우선 최단거리로 요새를 돌파해서 파리로 나간다는 작전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게 실패할 때 대비한 대체 작전이 엄청났다. 일명 '사형터 작전'인데 전선의 한곳에 적군을 끌어들여서 적을 소모시키고 그걸 바탕으로 전선을 붕괴시킨다는 것이었다.

한국군 vs 북한군에 비유하면 한국군이 '전쟁이 벌어지면 진격로를 확보하고 빠르게 북진해 평양을 점령하고 전쟁에 이긴다.'인 상식적인 작전이 아니라 평양을 미끼로 북한군을 죄다 낚아서 다 쳐죽여서 전쟁에 이긴다.는 작전을 세웠다는 소리다.(…) 이건 뭐, 날리기도 아니고

소모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런 전략은 상대방의 전력을 효과적인 교환비로 꾸준히 깎아먹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정말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쪽수는 그 자체로도 질적인 우위를 점하는 법이다.

이 작전은 모두 계획대로 잘 나가면 적과 아군 피해 비율이 5:2라는 극단적인 소모전으로 계획했고, 프랑스의 군인들을 가장 잘 빨아먹을 장소로 요새지대인 베르됭을 골라, 공세를 폈다. 베르됭은 전통적으로 프랑스 최고의 요새였으나 대전 초 벨기에의 리에주 요새 지대가 대구경 공성포의 포격 앞에 힘없이 무너져 가치가 평가절하한 상태였다.

2. 독일군의 대공세

하여튼 독일군은 이 지역을 골라, 1916년 2월 21일 최고급의 공격사단들을 넣어 공세에 나서고 프랑스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2월 25일에는 마지막 전방보루인 두오몽 보루를 독일군이 함락시켰다. 이 때 전술이 우선 1500여 문의 야포에서 30만 발을 쏟아붓는 압도적인 포격으로 요새를 마비시키고, 그 뒤를 이어서 하는 보병의 진격이었다. 대략 1km 단위로 포격과 진격, 포격과 진격을 되풀이했고 그 결과 프랑스군 사상자가 10만 가까이 나오는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1]

그러나 뚝심 하나만큼은 최고였던 조프르는 당황하지 않고 앙리 필리프 페탱 장군을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해 방어전에 나서게 했다. 전선에 온 페탱은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전력비가 1:3까지 커짐을 알고 최단기간에 20만 병력과 그에 필요한 군수물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2] 그리고 병력 보강이 끝나자 바로 전투에 들어갔고, 끝내 잃은 영토를 원상복구시키기까지는 성공했다. 그 뒤부터는 철조망과 기관총이 피를 빨아먹는 전형적인 참호전이 나타났다. 끝내 초기에 보이던 팔켄하인의 5:2 플랜은 깨져서, 마지막 순간에는 5:4까지 근접했다. 그야말로 동반자살에 가까운 상황.

동년 7월에 영국군이 솜 공세를 펴고, 독일군의 추가적인 공세 여력은 사라지며 베르됭 공세를 취소했다. 최종적인 인명 손실은 독일군 43만 4000명~35만 3000명, 프랑스군 54만 2000명~40만 2000명이었다. 이게 얼마나 거대한 피해인지를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현재 대한민국 육군의 병력이 50만일 뿐이다. 오죽 지독했으면 프랑스군은 이 전투를 분쇄기라고 불렀다.

3. 양측의 피해

베르됭 전투 전체의 양측 손실비는 5:4였지만, 초기 공세기간의 급격한 손실을 뺀 나머지 전투 기간의 프랑스와 독일 양측의 병력 손실비는 거의 1:1에 근접했다. 이는 이전까지 독일군에게 밀리던 프랑스군의 전투력이 독일군과 비등해졌고, 더 이상 독일군이 우월한 전투력을 바탕을 쓴 공세로 프랑스군에 소모전을 강요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베르됭 전투 뒤 솜 전투, 제 2차 아라스 전투, 니벨 공세, 제 3차 이프르 전투 등 1917년 내내 독일군은 수세적 입장에서 전쟁을 폈다.[3]

이 작전의 실패로 팔켄하인은 참모총장에서 물러나 동부전선으로 갔고, 페탱은 구국의 영웅으로 떠받들렸다. 페텡은 이 때의 명성으로 뒷날 비시 프랑스의 수반도 했지만, 그 뒤 그가 어떤지를 안다면 뭐…

페탱을 변호하는 쪽에선 이 베르됭 전투 당시의 경험이 페탱으로 하여금 비시 정부의 수반으로 활동하며 독일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게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베르됭 전투 당시 프랑스군이 입은 엄청난 피해가 페탱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고, 또다시 조국에게 그런 희생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는 것. 패탱 항목에서도 언급되다시피, 1차대전 당시 그의 가장 큰 공은 장병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개선하는 것을 통해 장병들의 항명, 태업사태를 진정시킨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독일군과의 전투나 병력 동원을 극단적으로 회피했으며, 이로인해 영국과 마찰을 빚어 결국 연합군 총사령관의 자리를 포슈에게 양보해야 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호전적이거나 장병들의 희생을 쉽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페탱의 친독 부역 행위와 관련해 큰 논란 거리로 남아 있다.

4. 그외

본래 연합국 주요 4개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회담에서는 1915년에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를 배려하여 동부전선에서 현상유지를 하고 나머지 3국이 일제히 서부전선에서 총공세를 펼치기로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세에 나서기도 전에 선수를 친 것이 바로 베르됭 전투. 상황이 급해지자 프랑스는 합의건 뭐건 때려치고 러시아에 급히 헬프를 치고 러시아가 이에 호응하여 벌어진 것이 제정 러시아 최후의 공세작전 브루실로프 공세이다.

훗날 프랑스 해군 원수가 되는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도 위관급 장교로서 해군 육상 포병부대의 일원으로 이 전투에 참전했었다. 그밖에도 샤를 드 골 육군대위가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고, 독일측에서는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육군 위관급 장교로 참전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이자 피해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도 포병 장교로 참전했다.
얼마나 참호전이 처절했던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베르됭 일대의 지형은 포격으로 패인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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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방법을 1차 솜 전투에서 영국군이 그대로 재현하려고 시도했으나 대차게 실패했다. 사거리를 안 고려하고 포만 쏴대니 유효탄이 제대로 안 나왔으며, 굳건히 방어선을 형성한 독일군 참호 앞으로 병력을 들이민 꼴이었다. 지휘부는 작전이 당연히 성공했으리라 보고, 중간 결과 파악을 못한 상황에서 병력을 진격시켰이니 피해가 없던 독일군 방어선 앞에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반면 영국군이 이런 삽질을 할 사이 솜 동부에서 조공을 맡은 프랑스 6군이(매도 맞아본 놈이 잘 맞는다고) 솜 강을 도하할 악조건 속에서도 순조롭게 공세를 펴 주공인 영국군보다 더 많이 진격했다.
  • [2] 이 계산을 전장에 온 지 반나절만에 계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3] 이 상황에 독일 황태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 전부터 있던 정예병은 대부분 베르됭에서, 그나마 남았던 이들은 다 솜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