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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서

last modified: 2014-12-25 01:04:09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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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이글스 역대 감독
1985년 팀 창단 배성서(1986~1987)[1] 김영덕 (1988~1993)
MBC 청룡 역대 감독[2]
유백만 (1988) 배성서(1989) 백인천 (1990~1991)

Contents

1. 소개
2. 감독 경력
3. 각종 일화
4. 근황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야구 감독.

1944년 5월 26일생으로 고향은 평안북도 영변군이지만,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선린상고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한일은행에서 실업 선수로 활동했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수였다.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의 창단 감독이지만, 그가 부임했을 당시에는 빙그레의 성적이 좋지 않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강훈련을 통해 선수들의 기본기를 다듬었고, 장종훈을 중심으로 한 초기 빙그레 이글스의 팀 컬러인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2. 감독 경력

1973년부터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경력이 영남대학교 야구부 창단 감독인데, 이 당시 혹독하게 선수들을 훈련시켜 빠른 시간에 대학 리그 정상 등극에 성공한다. 당시 그 밑에 있었던 선수가 바로 내야수 김재박이었다. 아울러 만화가 이현세의 조카가 그 훈련 장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해 삼촌에게 소개시켜 줘서 탄생한 만화가 바로 공포의 외인구단이다. 공포의 외인구단 작품 속 지옥 훈련의 절반 정도가 실제 영남대학교 야구부 훈련이었다고 한다. 흠좀무. 덤으로 드라마에서 감독을 맡았던 손병호의 모델이 바로 배성서였다는 점. 영남대학교 감독 재직 후에는 1977년에 동국대학교 감독으로 임명된다.

그 뒤 1982년 한국프로야구의 출범과 함께 MBC 청룡의 창단 당시 초대 감독으로 내정되었고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상황에서 인사차 MBC 본사에 갔다가, 날벼락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일본프로야구에서 활동하던 백인천의 귀국 소식에 높으신 분들이 그를 대신해서 백인천을 감독으로 임명한 것. 이 때문에 프로 감독 진출은 무산되었다.[3] 그 뒤 서울 세계선수권 대회 국가대표팀 코치와 한양대학교 감독을 거쳐 1985년에 창단한 빙그레 이글스 초대 감독으로 부임한다. 스파르타식 훈련과 기초 체력을 중시하는 야구로 훈련을 많이 시켰지만, 신생 팀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하고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채 계약 기간이 끝난 후 재계약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임으로 영입된 김영덕 감독은 선수들의 기본기가 많이 좋아졌다며 그에게 고마워하기도 했다.

그 뒤 1989년에 유백만의 후임으로 MBC 청룡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당시 팀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강한 훈련으로 기강을 바로잡아 달라는 의도였지만, 오히려 항명 파동의 주인공이 된다. 세 차례 합숙 전지훈련을 감행했는데, 마지막 전지훈련에서 투수 정삼흠이 "여기가 공산당이냐"고 반발한 것.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시즌 도중에는 고참 선수들이 구단 사장과 만나 감독 퇴진을 요구하는 초유의 하극상을 일으켰다. 그 결과 단 1년 만에 또(...) 백인천에게 감독직을 넘겼고, 그 뒤로 프로 무대에 다시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하극상이 일어난 이유는 배성서 감독의 스파르타식 훈련과 MBC 청룡 선수들의 느슨한 태도 및 파벌이 결부된 결과라고 전해진다.

선수 육성 능력은 나름대로 뛰어나서, 밑에서 길러 내어 프로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던 선수들이 많다. 앞에서 말한 영남대학교 시절의 김재박도 있고, 동국대학교 시절에 김성한, 한대화[4] 등을 키워냈다. 그리고 빙그레 이글스 시절 연습생으로 발탁한 내야수 장종훈도 있다.

3. 각종 일화

매서운 듯한 외모와는 달리 굉장히 유머 감각이 풍부한 면을 갖고 있다. 몇가지 일화를 주워섬겨 보자면,

  • 1986년 창단 첫해 빙그레 이글스는 무려 29번의 1점차 패배를 당했다. 이듬해 시즌 중반 배성서가 기자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올해는 1점차 패배가 많이 줄었다" 면서 호탕하게 웃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표정을 구기며 한 기자에게 귀띔하기를
    "근데 2점차 패배가 늘었단 말이지. 젠장(...)"

  • 배성서는 영남대학교 감독 시절부터 등번호 88번을 애용했다. 자신의 몸무게가 88kg나 나간다는 것을 알리고 자 했대나(...). 그럼 코끼리 감독은 세자릿수 번호 달아야 하나? 빙그레에서도 88번을 달았는데 이유가 좀 달랐다. 선수들이 팔팔하게 움직이라는 의미였다나.

  • 전일보 체육부 소속이었던 이원재 기자와는 상당히 막역한 사이였다. 근데 이원재 기자와 배성서 사이엔 묘한 징크스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기자가 홈경기 플레이볼 전에 배성서에게 아무 이유 없이 욕을 먹으면 그날 빙그레 승률은 거의 100%에 가까웠다는 것. 그래서 이기자는 빙그레 홈경기 때마다 고향 팀을 위해 덕아웃에서 배성서에게 공연히 욕을 먹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 배성서가 홈 경기를 앞두고 이기자를 애타게 찾았지만 끝내 경기 종료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인 즉슨 그날 상대 선발이 해태 타이거즈선동열(...). 질 것이 뻔한데 괜히 욕먹을 필요가 있냐며 잠적해 버린 것이었다.

  • 배성서는 연습생으로 들어온 장종훈을 유난히 예뻐했다. 대형 유격수의 자질이 보이기도 했지만 미국으로 유학간 아들(그가 바로 북한에 억류당했다가 풀려난 케네스 배, 배준호이다)과 동갑이어서 그랬기도 했다. 그런데 배성서는 경기 중 장종훈 타석에서 중요한 시점이다 싶으면 장종훈을 불러 거시기를 주무르곤 했는데, 장종훈에게는 하늘같은 감독이라 꼼짝없이 당하기만 했다. 신기한 건 그러고 난 후 장종훈은 70~80%의 확률로 안타를 뽑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종훈은 아예 자진해서 만져달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중에 배성서는 "종훈이의 긴장을 풀어주려 했던 것" 이라고 밝히기도. 그런데 이 징크스는 포수들만 차던 급소 보호대를 장종훈도 차기 시작하며 슬그머니 사라졌다고 한다... 생활 잡지식을 모아놓은 어떤 책에서 남자가 긴장하면 오그라드는 것(...)이란 제목으로 이 사례를 들었는데, 긴장해서 오그라들었으면 안타를 못치고, 멀쩡하면 안타를 쳤다는 후문이 있었다.

  • 배성서는 애연가였다. 그런데 피우던 담배를 2번 바꾸었는데, 애초에 피던 담배는 아리랑 이었지만 "십리도 못가 발병이 나니 역전패가 많다" 라는 주변 얘기에 담배를 로 바꾸었다. 하지만 솔은 (상대팀에)점수를 "솔솔" 내준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얼마 안가 끊어버렸고 그 다음에 바꾼 담배는 태양, 타격이 태양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라는 주문 이었다.
    그러나 정작 태양의 효과가 나타난 것은 배성서가 팀을 떠나고 김영덕 감독이 부임한 1988년 이후였다(...).

  • 1987년 해태와의 청주 경기 때 빙그레 마운드는 김성한에게 3연타석 홈런을 허용하고 9회초에 다시 김성한과 대결하게 되었다. 이미 승부는 해태 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상황이라 투수이던 문곤은 배성서에게 거르겠다는 사인을 보냈지만, 배성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면 승부를 하라고 지시했다. 문곤은 "4연타석 홈런이란 대기록이 걸려있는데...?" 라면서 의아해했으나 감독 지시대로 정면 승부를 했고, 결국 큼지막한 외야플라이로 김성한을 잡아 냈다.
    경기 후 기자들이 "왜 그때 정면 승부를 지시했는가?" 라고 질문하자 배성서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딱 한 마디만 했다. "흥, 어차피 김성한도 내 새끼 아닌감?" 김성한동국대학교 시절 배성서 감독의 제자였다.

  • 1987년 신인 2차 지명 때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으로 이정훈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1986년 시즌 빙그레는 최하위, 청보 핀토스는 6위에 그치며 2차 지명에서 각각 전체 1, 3순위와 2, 4순위 지명권을 득템했는데, 지명회의가 열리기 직전 청보의 박정삼 단장이 빙그레 노진호 단장, 배성서 감독과 환담을 나누며 "우리가 어차피 먼저 뽑는데 서로 카드를 공개하자. 누굴 뽑을 건가" 라고 묻자 노 단장이 당시 2차 지명 신인 중 최대어인 투수 동석[5]을 뽑을 것이라고 했고 그 다음엔 외야수 상진이라고 했는데, 옆에 있던 배성서가 "투수가 부족한데 투수를 더 뽑아야지 야수는 필요 없다"고 펄펄 뛰는 것이었다. 이에 박단장은 '어라 빙그레는 이정훈에 관심이 없나 보네. 그럼 우리도 2순위로 투수를 찍고 4순위로 이정훈을 뽑아야지' 라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지명회의 시작. 앞서 말한대로 빙그레는 1순위로 이동석을 뽑았고 이어 청보는 투수 이상훈(야생마 이상훈과 동명이인)을 2순위로 지명했는데 3순위에서 빙그레는 기습적으로 이정훈을 지명했다. 순간 박 단장은 속았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고,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청보 핀토스 감독 강태정은 책상을 발로 걷어차는 등 분통을 터트렸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고... 이렇게 배성서의 허허실실로 빙그레 유니폼을 입은 이정훈은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지 못한 분풀이라도 하듯 데뷔 첫 정규 시즌 중 김시진에게 끝내기 홈런을 뺏어내기도 했고,[6] 22경기 연속 안타 등 맹활약을 펼치며 0.335의 고타율로 그 해 신인왕을 수상, 배성서의 기대에 100% 이상 부응했다.

4. 근황

야구계를 떠난 후로는 대구에서 보험업에 종사한다고 알려졌다. 현재는 수원시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2012년 11월 북한에 억류된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본명:배준호)의 아버지로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 이는 미국 워싱턴시애틀의 한 교회에서 배성서가 아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예배를 하는 모습이 보이면서 알려졌다. 아들 상봉을 위해 북한 당국의 동의를 얻어 방북, 케네스 배와 평양순안국제공항에서 상봉하였다.[7]상봉 당시의 사진이다. 아들이 15세 되던 해에 온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배성서가 빙그레 이글스의 초대 감독을 맡게 되어 귀국한 뒤 기러기 아빠 생활을 했다고 한다. 미국 정부의 노력 끝에 케네스 배는 2014년 11월에 석방됬으며, 동네 기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다가 석방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경상북도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고향이 평안북도 영변군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이북을 잘 안다. 그러니 다시는 북한 근처로 아들이 못 가도록 막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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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군 데뷔부터 계산
  • [2] 후신 팀 LG 트윈스 포함
  • [3] 그 당시 하기 싫다고 버티던 배성서를 설득하여 MBC 감독으로 추천했던 이는 당시 MBC 스포츠국 국장이던 조광식(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출신으로 후일 LG 트윈스 단장을 지냈다. 2011년 별세.)이었는데, 평소 배성서와 호형호제하며 막역한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백인천 때문에 배성서 감독 선임건이 없던 일로 되자 조광식은 몸둘 바를 모르며 배성서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고 한다(...). 펄펄 뛰며 화를 내던 배성서도 형님의 사과에 마음을 풀었다고.
  • [4] 1982년 세계선수권 당시 대표팀 코치이던 배성서가 그를 국가대표로 추천하였다. 한대화는 이 때의 인연으로 1986년 해태에 트레이드되기 전에, 빙그레로 보내 달라고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 [5] 군산상고-동국대학교 출신의 투수로. 연고 팀인 해태의 지명을 받지 못해 2차 지명에서 빙그레 유니폼을 입었다. 1988년 4월 해태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의 쾌거를 이룩했는데 상대 투수가 무려 선동열(...). 이후 쌍방울 레이더스로 이적하여 7시즌 통산 12승 16패 7세이브, 평균자책 5.01의 성적을 남기고 1993년 은퇴했다. 현재는 군산상고 야구부 감독.
  • [6] 그 끝내기 홈런은 빙그레 창단 후 최초의 끝내기 홈런이었다.
  • [7] 절대로 코렁탕 아니다. 모두 당국의 승인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