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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

last modified: 2015-01-20 01:48:04 Contributors

Contents

1. 중국의 인물
1.1. 소개
1.2. 미디어 믹스
2. 방송, 통신의 줄임말

1. 중국의 인물

龐統

1.1. 소개

후한 말기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유명한 군사(軍師)이자 유비의 주요 모사(謀士). 는 사원(士元)이며 별호(도호, 별명)는 봉추(鳳雛)이다.

생몰년도는 178 ~ 213년(정사 삼국지) 또는 179 ~ 214년 4월(자치통감)이다. 참고로 중국 위키는 방통의 생몰년도를 정사 삼국지가 아닌 자치통감의 것을 채용하고 있다.

숙부는 방덕공이고 동생은 방림이다.

양양 사람으로 젊었을 때 순박하기만 해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영천의 사마휘가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력이 있었는데, 방통이 약관의 나이에 사마휘를 만나 보러 갔다. 사마휘는 뽕나무 위에서 뽕잎을 따면서 방통을 나무 아래에 앉게 해 낮부터 저녁까지 이야기를 나눴으며, 그 결과 사마휘는 방통을 남다르게 여겨 그대는 남주의 선비 중에서 으뜸이라고 했고 이로 인해 그의 이름이 점점 드러나게 되었다.

위의 기록은 촉지의 기록으로 세설신어에서는 사마휘가 영천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2천 리나 달려가서 그를 방문할 때 뽕나무를 따고 있는 사마휘와 방통의 대화가 나오며, 양기에서는 방덕공이 사마휘에게 소개해준 것으로 방통을 알게되는 것으로 나온다.

정사 삼국지 선주전에 달린 양기 주석에 이런 기록이 있다. 수경선생 사마휘유비를 만난 자리에서 유비가 그에게 현 정세에 대해 질문하자 "이를 아는 건 시무를 아는 준걸뿐이며 와룡(= 복룡)과 봉추인 제갈량과 방통이 바로 그들이다." 라고 대답하며 은근히 제갈량과 방통을 높인다.

보통 사마휘를 제갈량과 방통의 으로 알고 있지만 정사에 의하면 수경선생 사마휘는 이들을 가르친 사실이 없고 단지 그들이 가진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을 뿐이다. 실제로 제갈량과 방통이 와룡과 봉추로 성장하도록 도와주었던 조력자는 방통의 숙부이자 제갈량의 사돈(제갈량의 둘째 누나가 방덕공의 아들 방산민에게 시집갔기 때문에)인 방덕공(龐德公)이었다. 사마휘의 별호인 수경(水鏡) 또한 이 방덕공이 지어준 것이며 사마휘 또한 방덕공을 형님으로 모시면서 공경하였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방통은 순욱의 중숙(仲叔-형제뻘 또는 막상막하, 가히 비길만한 상대)이다." 라고 평(評)했으며, 그밖에 정사에서 본래 유표를 섬기다가 뒤에 위나라의 대신이 된 부손이 방통을 평하기를 "재지(재주)가 뛰어난 영웅이지만 기량(재능)이 불완전(不完全)하다."[1] 고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그 당시 방통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아니었는가 싶다.

이를 연의에서는 '와룡과 봉추 중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제패할 수 있다' 라고 띄우는데 유비는 그 둘을 모두 얻었는데 결국 천하를 제패하진 못했으니 짐작은 결국 틀렸다. 그리고 사마휘의 계획대로 천하는 사마씨의 손에

따져보면 손권손제리마속, 이엄 등의 '내부의 적'이 문제였지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아마도 조언을 전적으로 따른다면 천하를 제패할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실제로 유비는 제갈량과 방통의 간언을 몇 번 무시한 적이 있었다.

  • 예를 들어 형주의 유표가 위독하자 방통은 유비에게 얼른 그를 치고 형주를 빼앗으라 했지만, 유비는 인의를 내세워서 방통의 건의를 기각했다. 또한 유비가 방통과 함께 유장을 만나러 갔을 때, 유장을 곧바로 죽이라는 방통과 법정의 충고를 무시하였고, 이러한 유비의 결정은 서촉정벌전을 길게 끄는 원인이 되었다. 유비는 제갈량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릉대전을 일으켜 촉의 국력을 쇠진하였다.

그러나 유장을 바로 죽이라고 했던 강경한 모략과는 별개로 군주이던 유비가 추구하던 인덕의 이미지를 이해하고 배려할 줄 또한 알았다. 유비가 유장을 배신하고 양회와 고패의 목을 베며 승리를 거두자 형주가 함락당할때도 인의를 지키던 유비가 그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오늘의 연회는 실로 즐겁다고 할 수 있다." 그러자 방통이 이에 대해 "다른 이의 땅을 빼았고 즐거이 여기는 것은 어진 이의 도리가 아닙니다" 라고 진언하였는데 이에 유비는 술에 취하여 노하였기에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유비가 곧 후회하여 얼마뒤 방사원을 다시 부른 뒤 물었다. "종전의 논쟁은 누가 잘못하였는가?" 방통이 "군신이 모두 잘못하였습니다" 하고 답하니 연회는 다시 제 분위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생각컨데 법정과 같은 모략꾼적인 면모가 있으나 군주의 기분을 어느 정도 헤아리고 진언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로 중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 주유조인을 내쫒고 형주를 차지했을 때, 방통은 주유 밑에서 임관하여 벼슬을 하게 됬다(적벽대전에서의 언급은 창작이다. 아래 참고). 주유 밑에서 공조(功曹, 관리를 임명하는 직책)를 맡았고 주유가 211년에 죽을 때 까지 그의 밑에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유가 죽자 방통은 주유의 관을 운구하는데 동행하여 강동으로 갔고 그 곳에서 육적 등과 친분을 맺었다.

삼국지연의에서 적벽대전중에 조조에게 거짓 계책(연환계)을 알려주어 오나라 군대의 화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한 이야기는 소설에서의 새로운 캐릭터 등장을 위한 설정이다. 좀 더 정확한 상황은 다음과 같다(홍신 평역판 ).

장간이 두 번째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주유는 얼른 방통에게 서신을 보내 작전을 짰고(장간 항목 참고), 주유는 장간을 보자마자 너 때문에 계책이 어그러졌다면서 한껏 성을 내고는 뒷산의 암자에 감금했다. 심란해진 장간이 암자를 나와 떠돌다 보니 경비병이 없는 걸 보고 몰래 도망쳤고, 도중에 글을 읽고 있던 방통을 만나게 되었다(물론 방통은 주유의 명에 의해 거기서 대기하고 있었다).
방통은 주유의 계책대로 장간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대했고, 은근슬쩍 동오와는 원수지간이 된 것처럼 반응을 보였다. 이에 장간은 방통에게 같이 조조에게 가자며 동행할 것을 권하였는데, 방통은 못 이기는 척 장간과 함께 북위로 갔다. 조조는 매우 기뻐하며 방통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방통은 명쾌한 대답을 하여 그의 환심을 샀다.
어느 날, 조조는 방통에게 자신이 동오를 정벌할 때 가장 고민거리가되는 수군의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허나 방통은 무작정 좋다는 말과 함께 주유를 욕하여 조조를 안심시켰다. 이에 기분이 좋아진 조조가 배 안으로 방통을 불러들여 술잔치를 벌였는데, 방통은 잔치 도중에 몇 번이고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이에 조조가 원인을 묻자 방통이 대답하기를, "배멀미가 도졌으며, 혹시 위군도 그런 상황을 겪는 건 아니냐고 했다. 조조는 약점을 찔렸다는 걸 깨닫고 방통에게 대책을 물었고, 방통은 조조에게 계책을 말했다.
"모든 함선을 쇠사슬로 연결하여 커다란 배 한 척이 된 것처럼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아무리 파도가 크게 친들 배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방통의 말대로 하니 배가 흔들리지 않고 육지와 같아서 위군은 배 위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등 한껏 기뻐했다. 그 직후 방통은 채중채화의 일을 생각하고는 "동오에 가서 다른 장수들을 항복하도록 설득하려 했는데, 가족들이 걱정이 됩니다."라고 운을 떼어 그 문제를 먼저 언급하여 사전에 차단했다. 이에 조조는 공문을 써서 주며 그의 가족들이 전란에 휘말리지 않게 하였고, 방통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 몇 번이고 돌아보다가 완전히 동오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된통 깨졌다. 야 신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어 동오로 돌아온 후, 노숙이 방통의 공을 언급하며 손권에게 그를 등용하도록 권유했지만 손권은 그의 외모와 태도[2]에 질려서 그를 내쳤다. 이에 노숙이 [방통을 따라와서 사과하다가 그의 태도를 떠올리고는 애초부터 손권을 따를 마음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노숙은 방통에게 유비를 섬기라고 권유하고, 방통도 흔쾌히 받아들인 뒤 노숙의 추천장[3]을 받고 유비에게 갔다.

그 뒤 형주로 되돌아와 유비 밑으로 임관하였는데, 처음에 유비는 그를 뇌양현의 현령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대한 일화의 설명은 연의와 정사가 조금 다르다.

연의에서는 방통이 유비의 휘하로 들어왔을 때, 유비는 방통의 추한 외모를 보고는 그에게 뇌양현이라는 작은 마을의 현령 지위를 맡겼는데, 방통은 거기서 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후에 제갈량이 방통을 천거하는 편지를 읽은 유비는 방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기본적으로 공명이 주유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후, 동오에서 유랑하고 있던 방통을 만나서 써 준 추천장이 등장하지만, 판본(여기서는 김홍신 평역판)에 따라 손권에게 임관을 거절당한 방통이 노숙과 대화 후[4] 노숙의 추천장을 받기도 하였다.
지방관으로 보냈더니 탱자탱자 놀기만하는 방통을 혼내주러 장비가 갔다가[5] 방통이 그동안 쌓인 업무를 반나절동안에 해치우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6] 방통의 능력을 돋보이게 한 일화이기도 하다.주민들은 속이 터졌겠지 그러나, 방통의 능력이 어떻고 간에 그는 정벌 중 요절했으니, 그의 탁월한 능력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다.

반면에, 정사에서는 외모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또한 유비와 직접 만났다는 기록이 없다. 방통이 시골 현령을 맡기는 했는데, 그가 제대로 마을을 다스리지 않은데에 기인한 이야기는 있으나, 업무를 반나절동안에 해치워 버리는 이야기는 없다. 이후 노숙과 제갈량의 천거로 유비가 방통과 직접 면담을 한 후에 유비가 방통을 크게 평가하고 높은 대접을 해주었다.[7]
  • 그런데 이상한 건 제갈량과 쌍벽급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제갈량을 맞이할 때는 삼고초려까지 하더니만 왜 방통은 직접 만나보지도 않고 겨우 시골 현령자리나 맡긴 것일까? 제갈량을 얻었으니 천하의 반절은 얻었다고 자만하는 건 아닐 테고(…), 다만 추측하자면 주유 밑에서 오래 일한 경력이 있는 방통이기에 백면서생이었던 제갈량을 등용할 때처럼 그를 전적으로 믿고 높은 직책을 맡기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즉 유비가 사람을 채용하는데 신중히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비가 방통이 지녔던 능력과 지식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만약 방통이 군무에 능한 장관급의 모략가였는데, 한 도시의 시장으로써 업무를 감독했다면 일에 차질이 빚어질 수 밖에 없지않나?

이때 유비가 직접 방통을 대면함으로 인해 방통의 인생은 피게 되었는데[8] 유비는 사마휘, 방덕공과 마찬가지로 그의 능력이 제갈량과 비견된다고 파악하여 제갈량과 버금가는 대우를 하였고, 그를 제갈량과 나란히 군사중랑장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그 뒤 유비는 촉을 공격하는데 방통을 동행시켰다. 이 때 방통은 유비를 위해 여러가지 계책을 내면서 상당한 활약을 하다 얼마 뒤 전사했다.

방통의 죽음에 대해서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서촉으로 쳐들어가는 중에 방통은 낙봉파에서 유장군의 매복병의 활에 맞아 사망했다. 고 서술되어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술이 약간 방통을 비하하는 내용이다. 제갈량이 운이 좋지 않은 점괘가 있으니 복병을 조심하라고 유비한테 전했지만, 방통은 제갈량에 대한 경쟁심리에서 본인도 불길한 점괘인 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운이 좋은 점괘라고 조언하여 유비는 먼 곳에 있는 와룡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봉추의 진언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진군한다. 그러다 방통이 탄 말이 갑자기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유비가 자신이 타고 있던 순한 백마를 양보하고, 유비의 말을 탄 방통을 유비로 오인한 매복병한테 활을 맞고 전사했다.

유비가 방통에게 양보했던 말이 주인을 죽음으로 내몬다는 적로여서 결국 방통을 죽일 수 있었다라는 해석이 있는데, 시판되는 삼국지 서적이나 여러 커뮤니티에서 이런 이야기가 떠도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연의의 내용으로는 유비가 방통에게 양보한 말이 반드시 적로였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말은 단순히 백마로 묘사되어 있고, 유비가 탔던 바로 그 적로마라고 특정하게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통이 공격을 받은 이유는 이 백마를 탔기 때문에 장임의 군사들이 유비로 착각했기 때문이다.[9] 게다가 적로는 백마가 아닌데, 그 이유는 말의 이마에 흰 점이 박혀있다는 묘사가 있기 때문이다. 백마의 이마에 흰 점이 박혀있을 수는 없는 것이며, 때문에 다른 많은 매체에서도 적로를 갈색마로 묘사한다. 다만 이전에 유비가 적로마를 얻었고, 적로가 "주인을 죽이는 말"이라는 속성에도 이 이야기가 어느 정도 들어맞기 때문에 적로마로 해석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나 정사를 따른 분명한 사실은 방통이 죽은 곳은 낙성이며, 삼국지평화에서도 정사와 비슷하게 공성전 중에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즉, 연의와는 달리 적의 책략에 걸린 것도 아니고, 위험하고 희생이 많이 따르는 공성전 중에 화살에 맞았다. 따라서, 삼국지연의에서 방통의 죽음은 뒷부분의 진 주인공인 제갈량을 보다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나관중의 창작이다. 쓰촨성에 가보면 낙봉파라는 관광지가 있지만, 그 동네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이해해 주자.(…)

유비는 방통의 죽음을 대단히 애석하게 생각하였고, 그에 대한 대화가 다른 사람들과 오갈때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0] 또한, 장존이라는 관리가 방통의 죽음을 애석히 여기는 유비에게 눈치 없게도 방통은 인의가 없는 인물이라며 헐뜯었다가 분노한 유비에 의해 그 자리에서 파직될 정도였다.

방통이 살아있었더라면 이미 당시에 제갈량과 동급인 군사중랑장 대우를 받은데다가 유비와 함께 동진하였으므로 촉 정벌에 뒤따른 군공까지 추가되었다면 제갈량을 넘는 대우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겠다. 이러한 점에 대해 제갈량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있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형주에 남아있었던 제갈량이 손권에게 보낸 답신에서, "방통과 요립은 초나라의 우수한 인재들로, 후세에 전해질 제왕의 사업을 보좌하여 일으킬 수 있는 자들입니다."[11]라며 후에 서민으로 강등됬던 요립을 은근히 방통과 묶었고, 촉 정벌 중에 방통의 천거를 받은 뒤 승승장구했던 팽양을 좌천한 것[12]으로 보아 방통에 대하여 호승심을 가졌었다고 여겨질만 하다.

그들은 결코 무능하지 않았다. 요립은 기록에 따르면 30세가 되기도 전에 장사태수가 되었고, 후에 여몽이 형주를 침입하자 그는 성도로 도망쳤는데, 유비는 그에게 죄를 묻지 않고 예우하였고 그에게 파군태수의 직책은 제수하였하 한다. 유비가 저 정도로 요림 중용했다면 앞서 서술한 제갈량의 그에 대한 평가는 합당하다. 다만 요립이 서민으로 강등 된 결정적인 이유는 장수교위에 임명되어 이엄의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고 자신을 찾아온 장완 등에게 관우를 비롯하여 촉의 여러 인재들, 게다가 유비까지 은근히 무능(...)하다고 까는 등의 오만하고 위험한 발언을 했기에 처해진 형벌이었다. 한마디로 인성문제
또한 팽양의 경우는 능력이 있어 중용을 받았지만 과거 형벌을 받은 죄인에서 높은 자리에 이르며 총애를 받다보니 점점 오만해지는 등 불안요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제갈량의 진언으로 강등당하자 불쾌해하며 마초를 찾아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마초에게 "(유비가)이미 늙어서 황망하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당신이 외부(군사)를 맡고 내가 내부(내정)을 맡으면 천하가 충분히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잘못하면 바로 반역이 될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을 했다. 게다가 당시 마초는 유비에게 합류한 지 얼마 안 되는지라 잘못하면 애꿏은 마초까지 휘말려 죽을 수 있었다.[13][14] 결국 얘도 능력이 문제가 아니다.

군략의 방통, 정치의 제갈량이라는 설이 있다. 북벌 이전까지 군권을 맡은 적이 2차 증원군으로 익주에 들어왔을 때 1번밖에 없는 제갈량에 비해서 방통은 들어오자마자 서촉정벌군의 참모가 되었기 때문. 실제로는 그다지 근거는 없어보이나 서촉을 정벌하면서 연속으로 크리티컬을 해냈으며 방통이 죽은 뒤에는 유비가 유괴, 장임 등을 상대로 연승을 하며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하고는 있었으나 낙성을 두고 1년 이상을 대치하며 제갈량 등에게 원군을 지원한 것을 보면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보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방통이 유비에게 냈다는 책략들은 꽤 기책들이었는데, 예를 들어 유장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유장을 사로잡아야 한다든지 또는 정예병을 뽑아 수도를 급습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들이었다. 이는 주로 정공법을 고집하였던 제갈량과 대조적이었다.[15] 또한 진수가 법정전의 말미에 방통과 법정을 나란히 평했는데 방통은 평소에 모책을 좋아하였다고 한다.[16]

그러나 또 다른 의견중에는 방통이 제갈량을 제치고 서촉정벌군의 참모가 된 것은 유비가 주력을 형주에 남겨두고 서촉 공략에는 여력을 투입하는 안전빵 방침을 취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다. 제갈량 뿐 아니라 관우, 장비, 조운도 죄다 형주에 남아있었고 1차 서촉 공략군의 주축은 황충위연처럼 형주를 얻은 이후에 유비진영에 합류한 장수들이었다는 점에서 방통 역시 1진급인 제갈량에 비해 2진급으로 평가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견.
여러모로 그런 뉘양스가 많기는 하나, 제대로 활약도 해보기 전에 일찍 죽어서 확실히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방통의 아들 방굉(龐肱)은 자가 거사(巨師)이며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전한다. 그는 방통 사후 유비에게 종사하여 유선 때까지 촉을 섬겼다. 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의 죽음으로 국정이 혼란스러워졌으며 진지와 같은 권신과 황호 등의 관이 국정을 농단하기에 이르렀다. 방굉은 이러한 상황에 반발하여 출세를 하지 못했으며 부릉태수(涪陵太守)를 지냈다.
254년 그는 거군 관할의 홍사현으로 민정을 살피러 나갔다가 배를 타고 군 소재지로 돌아오는 도중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방굉이 죽자 백성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통곡하는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1.2. 미디어 믹스

2. 방송, 통신의 줄임말

"방송통신위원회"를 줄여서 "방통위"라 한다거나, "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줄여서 방통대라고 부르는 것 등에서 그 용례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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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즉, "싹수는 있으나, 아직 갖추어지지는 못했다."는 얘기
  • [2] 사실은 손권이 잘못한 탓이 크다. 먼저 심드렁하게 물은데다 일부러 주유를 들먹이면서 "그대의 재주가 주유에 비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라며 은근히 비교하여 깎아내리는 말을 했으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방통으로서는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주유의 장례식 때 제갈량과 이미 선약(유비를 섬긴다)을 했으므로 아쉬울 것은 없었다.
  • [3] 주유의 장례식 때 문상을 하러 건너온 제갈량에게서 추천장을 받았기도 하다.
  • [4] 방통이 손권의 대답에 성의 없이 대답한 걸 보고 노숙은 '애초에 우리 주군을 섬길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닙니까'라고 짚었고, 이에 방통이 그렇다는 반응을 보인 뒤 조조에게 가볼까 한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하자 화들짝 놀라서(…) 유비를 추천하며 동오와의 화친을 다져 달라고 부탁한다.
  • [5] 연의에서는 어김없이 장비의 성질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곧바로 방통의 목을 치지 못하게 손건을 붙여 보냈다는 설정이 붙어 있다.
  • [6] 한 일화에서는 정무를 보지 않던 동안 사실은 현장에 나가 하며 사건을 조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참고로 그당시 뇌양현의 술맛이 너무 좋아 시찰온 장비가 업무를 보지 않을까봐 술 대신 물을 팔라고 명을 했다.
  • [7] 참고로 연의에서 제갈량이 유비에게 '방통은 백리지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정사에서는 장완을 변호해주면서 한 말이다(장완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장완은 이 사건 이후로 유비가 사망할 때까지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
  • [8] 이 때까지 방통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방덕공과 사마휘였다. 이들은 방통에 대해서 제갈량과 쌍벽이라고까지 말하지만 방통이 임관한 뒤 주유와 유비 밑에서 시시한 관직에 머물고 있었던 것을 본다면, 이것이 사람들에겐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지진 않은 것 같다. 다만 인물에 대해서 평하는 부분만큼은 유명하였다. 하지만 당시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신의 경지라 일컬어지던 유비는 그의 재능을 한번의 대면으로 훤히 꿰뚫어보았다.
  • [9]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일전에 유비를 본 적이 있는 군사가 '저기 백마를 타고 오는 장수가 유비일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이에 장임이 보니 과연 백마를 탄 사람이 있기에 그 사람에게 활을 집중적으로 쏘게 했다."고 한다.
  • [10] 인재가 부족한 유비의 입장에서 방통과 같은 인물의 죽음은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방통의 죽었을 때의 나이는 36세로 상당히 젊은 나이였다.
  • [11] 이에 요립은 자신의 재주와 명성이 제갈량 다음간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유비의 사후 중용되지 못하고 이엄의 수하의 위치가 되자 조정에 불만을 제기하다 유배당하고 말았다.
  • [12] 후에 팽양은 감옥에 갇혀 제갈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방통이 급작스럽게 화살에 죽어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이라는 의미가 담긴 내용을 남겼다.
  • [13] 이에 팽양은 위에서 언급한 편지에 나는 조조를 토벌하자는 의미로 말한 것인데 마초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도 못한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 [14] 본문과 전혀 상관없지만 팽양 항목에 없는 대신 방통 항목에 팽양에 대한 기록이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는데, 이것은 정사 삼국지에서 해당 인물의 기, 전에 다른 사람의 기록이 어느 정도 할애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 [15] 그래서인지 몇몇 매체에서는 제갈량이 방통에 대해 말하면서 군략에서는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다만 제갈량도 기책을 써서 성공시킨 적이 있다. 1차 북벌때 조운을 위군으로 삼아서 조진의 대군의 발을 묶었는데 이 또한 기책이다.
  • [16] 참고로 정사에서 방통은 인물평에도 능한 것으로 서술되었다.
    하나의 일화로 방통이 인물들을 평가하는 실제 능력을 뻥튀기해서 과찬하니 사람들은 왜 그러냐했는데 방통은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바른 도가 쇠퇴하니 선인이 적고 악인이 많습니다. 바야흐로 풍속을 일으키고 도업(道業)을 기르려 하는데, 그 칭술하는 말을 아름답게 하지 않으면 명성이 흠모하며 따르기(慕企)에 부족할 것이고, 흠모하여 따르기에 부족하면 착한 일을 하는 자가 적을 것입니다. 이제 열을 뽑아 다섯을 잃는다 해도 오히려 그 절반을 얻는 것이고, 세상의 교화를 높이고 뜻있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힘쓰게 할 수 있으니 또한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세상에 인재가 적으니 고양이라도 호랑이라 불러주면 제 풀에 호랑이 흉내라도 낼 거고, 또 그거 보고 따라하는 사람들도 생길 겁니다...라는 것. 삼국지에서 인물평 잘한다는 다른 사람들이 남을 까기를 잘 하는 것에 비하면 그릇은 확실히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