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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전쟁

last modified: 2015-04-03 22:23:29 Contributors

反蔣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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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좋았던 그들. 그러나 이 사진이... 좌로부터 풍옥상, 장개석, 염석산. 이들은 얼마 후 전쟁을 벌인다.

Contents

1. 개요
2. 편견회의
3. 이종인의 반란 (장계전쟁 蔣桂戰爭)
4. 풍옥상의 반란 (장풍전쟁 蔣馮戰爭)
5. 장발규의 반란
6. 풍옥상의 2차 반란
7. 내전의 확대
8. 중원대전
9. 여담

1. 개요

반장(反蔣)의 반장(班長)이 되기위한 전쟁
중원대전(中原大戰)이라고도 한다.

중화민국 초기인 1930년, 장개석(蔣介石)에 반대한 군벌들이 일으킨 전쟁. 그야말로 흑역사급. 장개석은 북벌을 완수하기 위해 군벌들을 회유해 끌어들였고 이들 군벌들은 일단 장개석편을 들었다가, 북벌이 성공한 뒤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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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당시의 중국 군벌이 지배한 영역을 표시한 지도. 적색 지역이 다 군벌들이 다스리는 땅이다.

문제는 위의 지도를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듯이 군벌들이 차지한 땅이 전국시대의 각 제후국이 차지한 영토보다 넓었다는 점이다. 처음 북벌을 시작했을 때의 국민당 장악지역은 광동성을 중심으로 한 남쪽에 있는 청색으로 칠해진 작은 지역에 불과했다. 이때 노선 차이가 있었는데 장제스는 빠른 중국 통일을 위해 군벌들을 적극 흡수할 것을 주장했고 소련 고문인 게일런[1]은 그러면 병사들의 질이 떨어지고 기강이 해이해진다고 반대했다. 게일런과 소련 고문들은 소수 정예 병사들을 양성하여 소(小)군벌들부터 차례로 제압하며 천천히 규모를 키우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도권은 황푸군관학교 교장인 장제스에게 있었고, 결국 황푸군관학교의 커리큘럼이 간소화되고 군벌들을 적극 회유, 흡수하기로 했다.

당연하게도 회유의 결과 대부분의 군벌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을 그대로 유지하고 사실상 독자적인 통치를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국민당으로 완장만 바꿔단 셈이다. 여기에 무대는 인구가 많기로 유명한 중국. 그래서 내전이나 반란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정부군이나 반란군이나 수십만의 대군을 일으켜서 그야말로 치열한 교전을 펼쳤다.

그런데 이 반장전쟁이 일어난 시기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소련이 중국과 단교를 선언하며 만주를 침공하던 때다. 이렇게 외세의 침략에 대해 일치단결해도 모자랄 판에 대규모 내란을 벌였다. 이뭐병.

2. 편견회의

1929년 6월, 북벌을 완수한 장개석은 북벌기간 지나치게 비대해진 국민혁명군을 재편하는데 착수한다. 당시 국민혁명군은 84개 군, 3백 개 사단으로 팽창하여 군인의 수는 220만 명이 넘었다. 거기다 이 숫자는 장학량(張學良)의 동북군과 운남, 사천의 지방군을 포함하지 않은 숫자다. 여기에 연간 국가수입이 4억 5천만 원으로 이중 외채 지불액을 제외하면 3억 5천만 원 정도였는데 이중 3억 원이 군비로 사용되고 있었다. 때문에 1929년 1월, 국민정부는 남경에서 장개석을 위원장으로 편견회의(編遺會議)를 열어 군대 재편을 논의하였다.

이 결과

1. 전국을 6개의 편견구로 나누어 통괄한다.
2. 전국의 육군병력은 보병 65개 사(師, 사단), 기병 8개 여(旅, 여단), 보병 16개 단(團, 연대), 공병 8개 단의 계 80만 명 이하로 한다.
3. 군비는 국가 총수입의 4할을 초과하지 않는다.

라는 내용을 결정하고 1월 25일 회의를 마친다. 이렇게 줄이고 줄였지만 80만이라는 수는 상비군으로서 세계 최대 규모였다. 그나마 이 이상은 줄일 수도 없다.

3. 이종인의 반란 (장계전쟁 蔣桂戰爭)

하지만 이 편견회의는 군벌들의 반발을 샀다. 사실상 지방의 독립군주로 행세하던 군벌들이 자신들의 기반인 군대를 줄일 리 없으니. 결국 화중, 화남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광서파의 국민정부위원 이종인(李宗仁)이 최초로 반기를 들었다.

편견회의 후, 집단군이 해체되고 이종인은 군사 참의원장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이 조치에 불만을 품고 1929년 2월 21일, 국민당 무한정치분회 주석의 명의로 호남성 정부 주석 노척평(魯滌平)을 해직하는 월권행위를 벌인다. 그리고 부하인 제52사장 섭기(葉琪), 제15사장 하위(夏威)의 부대를 장사로 출동시켜 노척평을 강서로 내쫓아 버렸다.

이에 2월 28일 정부군은 채원배(蔡元培), 하응흠(何應欽)에게 광서군의 호남 침입사건을 조사케 한다. 그러자 이종인은 남경을 떠나 상해로 들어가 자신의 부대를 재편성,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무한 방면에서 장강의 교통을 차단하고, 병력 수송 준비를 시작하였다.

3월 13일 중앙정치회의는 각지의 정치분회를 모두 철폐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19일에는 섭기의 군대에 대해 무한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나 섭기는 이 명령을 거부한다. 여기에 이종인의 옛부하로 하북성 당산에 주둔하고 있던 전 제4집단군 전선 총지휘자 백숭희(白崇禧)가 섭기에 호응하여 장교들을 모아 회의를 개최, 남경으로 진공을 결정한다.

장개석은 국민정부 주석의 이름으로 전 제4집단군의 자중을 호소했고 군장 이품선(李品仙)이 중앙을 옹호한다고 통전해 백숭희의 반란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백숭희는 이후 천진을 거쳐 홍콩으로 도망쳤다.

이종인은 전 광동성 정부 주석 이제심(李濟深)도 끌어들이며 반란을 진행해 나갔다. 국민정부는 3월 23일 이제심을 체포하고 24일 섭기, 하위를 해직하고 26일 이종인 토벌을 명령한다. 이종인은 광서로 들어가 광서성 정부 주석 황소횡(黃紹竑), 홍콩에서 돌아온 백숭희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호당 구국군 총사령'을 자칭하며 광동으로 침공하였다(월계전쟁 粤桂戰爭). 그러나 정부군의 토벌로 5월 10일 광서의 성도 계림이 점령되고 6월 중 광서 전역이 제압당했다. 결국 이종인은 도망쳤고 황소횡, 백숭희는 하야하겠다고 발표하며 이종인의 반란은 끝이 난다.

4. 풍옥상의 반란 (장풍전쟁 蔣馮戰爭)

기껏 이종인의 반란을 진압했더니 이번엔 풍옥상(馮玉祥)이 반란을 일으킨다. 풍옥상은 이종인과 내통하였는데 이종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1929년 4월 24일 부하 장교들을 모아 군사회의를 연 뒤, 산동성 서부에 주둔하고 있던 손양성(孫良誠)의 부대를 귀환시키고, 다시 부대의 주력을 동관에 집결시켰다. 5월 15일 손양성, 한복구(韓復榘)의 추대를 받아 '호당구국 서북군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철도를 파괴하고 중앙정부가 급료지급을 중지했다고 병사들에게 선전하였다. 5월 24일 국민정부는 풍옥상의 모든 공직을 박탈하고 체포령을 내리면서 급료지급을 막은 건 풍옥상이라고 선전하였다.

이 선전에 동요한 풍옥상군의 간부인 한복구, 석우삼(石友三)은 자신들의 병력을 이끌고 동관에서 정주(鄭州)로 철수해버렸다. 이때 전 제3집단군 총사령 염석산(閻錫山)이 풍옥상에 대한 체포령을 취소하면 자신과 풍옥상이 함께 하야하여 외유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풍옥상은 염석산의 제안을 받아들여 5월 27일 입산독서를 선언하며 염석산의 근거지인 태원으로 도망쳤다. 국민정부도 7월 5일 풍옥상의 체포령을 취소하며 풍옥상의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다.

5. 장발규의 반란

이런 와중에 중화민국은 일본의 만주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여기에 장개석은 개인적으로 암살 당할 뻔 하는 등 나라가 아주 개판이었다. 하지만 반장전쟁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번엔 장발규(張發奎)가 반란을 일으켰다.

장발규는 1927년 11월 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었다가 이후 이종인의 반란때 장개석을 지지하여 제4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풍옥상이 반란을 일으키자 농해(隴海) 철로 수비를 명령받으나 이를 거부하고 왕정위(汪精衛)와 손잡았다. 그리고 부대를 호남성으로 남하시켜버렸다. 여기에 광서성 주석 유작백(兪作柏)과 사장 이명서(李明瑞)가 호응하여 1929년 9월 7일 광서성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국민정부는 10월 7일 진제당(陳濟棠)에게 토벌을 명령하였고 광서군 간부 양등휘(楊騰輝)는 항복하였으나 유작백은 용주로 달아났다.

6. 풍옥상의 2차 반란

10월 10일 풍옥상계 장교인 송철원(宋哲元), 석경정 등 27명이 편견에 반대한다고 중앙정부에 항전할 것을 통보하였다. 태원에 머물고 있던 풍옥상은 자신의 부하들과 밀접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또한 그의 휘하에는 30만에 이르는 병력이 있었다. 마침내 풍옥상군은 9갈래로 나뉘어 일제히 섬서성에서 하남성으로 진출해 농해철도를 따라 동진하였다.

국민정부는 11일 송철원, 석경정에 대해 체포령을 내리고 무력토벌 방침을 결정하였다. 장개석은 14일 스스로 토벌군의 총사령이 되었다. 당생지, 방정영이 이끄는 국군은 송철원, 손양성, 석경정의 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1월 16일 등봉과 임여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풍옥상군을 궤멸시켰다. 이로써 풍옥상의 반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7. 내전의 확대

풍옥상군과 대격전을 벌이는 중 장발규가 광서성 북부로 군을 이동시키고 11월 16일 공성에서 광동탈취를 선언하고 '호당구국군 제8로 총사령'을 자칭하였다. 여기에 광서성 주석 여환염과 이종인의 잔당들이 호응하였다.

정부군은 하응흠을 광동 행영 주임에 임명하여 토벌을 명령하였다. 하응흠은 12월 2일 광주에 도착해 19일 반란군을 제압하였다. 그러나 이번엔 석우삼과 당생지(唐生智)가 반란을 일으켰다.

국민정부는 안휘에 주둔하고 있던 석우삼에게 광동성 방위를, 당생지에게 장발규의 배후를 위협하라고 명령을 내리나 석우삼은 광동행을 거부했다. 12월 2일 석우삼은 '호당구국군 제5로 총사령'을 자칭하며 수도 남경을 습격할 태세를 보였다. 또한 당생지는 12월 5일 정주에서 '호당구국군 제4로 총사령'을 자칭하며 석우삼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12월 20일 염석산과 장학량이 중앙정부를 지지하면서 석우삼은 싸우지 않고 무기를 버렸다. 남은 당생지군은 폭설로 식량보급이 끊긴데다 정부군의 포위때문에 1930년 1월 13일 항복하고 만다. 당생지는 변장을 하고 개봉, 천진을 거쳐 홍콩으로 달아나버렸다.

8. 중원대전

그러나 반장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염석산이 들고 일어났다.

1930년 2월 10일 염석산이 장개석에게 함께 은퇴하자고 제의하였고 장개석은 당연히 거부하였다. 그리고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무력으로 진압하겠다고 염석산에게 간접경고를 날렸다.

이에 염석산은 2월 23일 풍옥상, 이종인, 왕정위 등 45명과 함께 국군의 재편견을 요구하였다. 이어서 3월 15일 풍옥상의 부하 녹종린(鹿鍾麟) 등 57명의 장군들이 염석산을 '육, 해, 공군 총사령'으로 풍옥상, 이종인, 장학량을 '부사령'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장학량은 취임을 거부하고 장개석을 지지하였다. 동시에 산서군은 북경으로 침입하여 정부의 군사, 정치기관을 접수했으며 평한(平漢), 농해 양철도를 이용해 병력을 진출시켰다.

마침내 4월 5일 국민정부는 염석산의 체포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5월 1일 전군에 토벌령을 내려 중국 근대사에 있어서 전에 없을 내전인 중원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하남성 농해철로의 공방이 우선 초점이 되었다. 녹종린이 전선 총지휘, 손양성, 유욱분, 송철원이 각각 제1, 2, 3군단장이 되어 농해철로를 따라 하남성을 동진하여 개봉, 귀덕(歸德)을 점령하고 서주로 육박했다.

중앙군도 5월 12일 제2군단 제3사를 선봉으로 하여 서주에서 농해철로를 따라 그들을 공격하였다. 5월 18일 귀덕을 재탈환하고 6월 1일 난봉(蘭封)까지 적을 밀어부쳤으나 염석산, 풍옥상의 기병대가 중앙군 후방에 출몰하며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제3군단은 언성 일대에 집결하여 북상 6월 5일 허창에서 적장 번종수(樊鍾秀)를 죽이고 이튿날 7일 허창을 점령하였으나 더 이상 전진하진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종인, 장발규의 잔존부대와 염석산, 풍옥상의 4만 병력이 북상하여 중앙군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백숭희가 이끄는 남방 반군은 5월 27일 형양, 6월 3일 장사, 8일 악주를 점령하여 호남을 제압, 무한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이와중에 호남석 주석의 인선을 놓고 이종인과 장발규가 서로 내분을 벌였고 무한행영 주임 하응흠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격에 나서 남방반군을 격퇴하였다.

이미 북경을 점령한 염석산의 산서군은 6월 24일 부작의(傅作義)가 이끄는 대군을 가지고 황하를 건너 산동 방향으로 남하하였다. 중앙군은 진포(津浦)철로를 따라 포진하며 반격하였으나 한복구군이 붕괴되어 제남을 잃고 패주하였다. 7월 12일에는 곡부(曲阜)성마저 반군의 공격을 받아 산동 전체에 수세에 몰렸다.

반군의 염석산, 왕정위, 진공박(陳公博)이 국민당 번산파 추로(鄒魯), 사지(謝持)와 연락을 취하며 정치공세로 전환, 7월 13일 북경에서 확대회의 개최를 요구하였다. 8월 7일 그들의 요구대로 북경에서 확대회의가 개최되었고 여기에서 장개석을 비난하는 선언을 발표하며 새로운 국민정부를 조직하려 했다.

그러나 전세는 중앙군쪽으로 역전되어 7월 21일 중원전선의 위협이던 박주성을, 8월 2일 태안을 공략하였고 마침내 8월 15일 제남을 탈환하였다. 사실상 제남에서 전국의 대세가 결정됐다.

이러는 와중에도 염석산 등은 북경에서 계속 정치공작을 진행하였다. 9월 1일 '국민정부 조직대강'를 공표하여 주석에 염석산, 정부위원에 염석산, 풍옥상, 왕정위, 이종인, 당소의(唐紹儀), 사지, 장학량을 선출했으며 9일 염석산이 주석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장학량은 계속 장개석을 지지했으며 결국 19일 염석산은 산서로 철수했다. 북경, 천진에는 장학량의 군대가 진주했고 10월 29일 중앙군은 서안까지 도달했다. 이에 염석산, 풍옥상은 11월 4일 권력을 포기하고 시골로 돌아간다며 성명하고 각각 대련과 산서성으로 달아나버렸다.

이로써 6개월에 걸친 중원대전은 종식되었다. 이 대전으로 중앙군 100만, 반군 60만이 동원되었고 사상자는 중앙군 9만 5천, 반군 20만에 달하였다. 중화민국의 통일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 컸던 셈이다. 하지만 군벌조직이 이것으로 모두 와해된 것도 아니고, 군벌은 중일전쟁기간에도 존속하였으며, 결국 국공내전이 끝날때야 소멸되었다.

9. 여담

반장전쟁을 모티브로 한 보드게임이 존재한다.



좌상단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장개석(장제스), 하응흠(허잉친), 장학량(장쉐량), 이종인(리쭝런), 염석산(옌시산), 풍옥상(펑위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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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본명은 바실리 블류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