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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식

last modified: 2015-04-01 13:39:39 Contributors

Contents

1. 1970년생 야구인
1.1. 소개
1.2. 아마추어 시절
1.3. 프로 선수 시절
1.4. 은퇴 이후
1.4.1. 선수협 사무총장
1.5. 연도별 주요 성적
2. KT 위즈의 투수 박충식


1. 1970년생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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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박충식(朴衷湜)
생년월일 1970년 9월 3일
출신지 광주광역시
학력 광주상고-경희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3년 2차지명 1라운드(전체 7번)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1993~1999)
해태-KIA 타이거즈(2000~2003)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7번
김성길(1988~1992) 박충식(1993~1999) 전병호(2000~2008)
KIA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이강철(1989~1999) 박충식(2000~2001) 이강철(2002~2005)
KIA 타이거즈 등번호 15번
강영식(2000~2001) 박충식(2002~2003) 허준

당시 연장 15회 제한이 없었으면 난 20회, 30회도 던졌을 거다.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던지겠느냐고? 물론이다. 그게 내가 아는 야구다.

1.1. 소개

전 야구선수. 포지션은 투수, 한희민-이강철-박충식-정대현으로 이어지는 언더핸드 투수 계보의 한 축. 이승엽이 만개하기 전, 원조 라이언 킹. 지금은 자기 배만 챙기는 박식충 서재앙과 함께 김성근안티테제

1.2. 아마추어 시절

원래는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광주상고에서 뛰었다. 1988년 대통령배에서 광주상고가 우승했으나 당시에는 큰 활약은 없었던 편.[1] 경희대 졸업 당시 당연히 해태 타이거즈에 갈 줄 알았으나, 해태 타이거즈가 당시 이종범을 1순위로 지명했고, 박충식은 삼성 라이온즈가 지명하여 삼성으로 가게 되었다.[2] 대학시절 당시 고려대의 이상훈(LG 트윈스)과 친분이 있었는데, 야구부의 선배들을 무서워해서[3] 이상훈은 경희대로, 박충식은 고려대로 도망다니다 자주 마주쳤다고 한다.

1.3. 프로 선수 시절

1993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신인으로 14승(팀 내 최다승) 7패 2세이브, 방어율 2.54 를 거두면서 사이드암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등번호는 17번(삼성)-19번-15번(이상 KIA).

요새야 새로울 것도 없지만 그 당시에는 사이드암임에도 불구하고 최고구속이 140km가 넘는 희소성 있는 투수[4]였으며, 거기에 엄청난 각도의 슬라이더와 강력한 싱커로 90년대를 풍미하였다.

박충식 하면 대부분의 팬들은 문희수-선동열-송유석 3명의 해태 에이스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피칭을 하며 15이닝 2실점 무승부를 거둔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을 떠올리지만당시 그의 활약상 그의 진가는 1994년 14승,(김태한과 함께 팀내 최다승), 1995년과 1996년에는 방위병 복무로 홈경기에만 출장하면서도 각각 9승과 8승 12세이브, 1997년과 1998년에는 각각 13승과 11승을 거두는 등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매해 150이닝 이상을 던지는 꾸준한 활약을 펼쳐 김태한, 김상엽과 함께 삼성 마운드의 트로이카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으며, 1990년대 중반의 삼성 암흑기 동안 마운드를 지탱해 1990년대 후반 이후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 중요하진 않지만 1997년 5월 4일 삼성이 한경기 팀 최다 득점 기록을 세우던 경기의 승리투수였다.

그러나 1999년 부상으로 인한 수술 후 2000년 이강철의 보상 선수로 KIA로 이적하게 되었다. 당시 삼성 구단에선 '설마 부상 중인 선수를 데려가겠어?'라는 생각에 보호선수 명단에 묶지 않았는데 그 설마가 사실이 되었다.(…).[5] 이후 선수협 파동과 열악한 해태의 재활시스템으로 제대로 된 재활을 하지못했음에도 중간계투로 나서 2001년에는 3승 2패 3세이브 2홀드를, 2002년에는 5승 3패 8세이브 12홀드를 기록하는 등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나름대로 한몫을 했다. 그러나 부상이 재발해 2003년은 재활로 보내며 결국 시즌 종료 뒤 은퇴하고 가족들이 있던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갔다.

해태로 이적한 직후 없다시피한 재활 시스템[6]과 쌍팔년도 수준의 구타, 폭력에 황당했다고 한다.

1.4. 은퇴 이후

호주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유소년 야구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가 2011년 10월에 귀국했고, 11월에 양준혁이 이사장으로 있는 양준혁 야구재단에서 창단한 '멘토리 야구단[7]'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1.4.1. 선수협 사무총장

2012년 1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신임 회장인 박재홍의 말에 따르면 이 당시에 아무런 연줄이 없던 그였기에 오히려 사무총장으로 적당하다는 판단 하에 그를 밀어줬다고 한다. 그런데 여러 비리 의혹을 받고 있던 권시형 전 사무총장이 측근을 통해 '박충식이 거액의 도박빚이 있다'는 루머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또한 권시형 파에 속했던 현재윤, 이혜천, 박명환, 김상현 등이 이사회에 참여도 하지 않고는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사회가 진행되었다는 주장과 긴급이사회에 절차상 하자가 있었다는 주장이 적힌 반대성명을 내 음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재홍이 인터뷰를 통해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언론에 퍼졌던 박충식과 관련된 안좋은 소문들은 자취를 감추는 듯 했다. 그러나...

2014년 12월 16일, 비시즌 단체훈련 금지와 관련해 한화 이글스와 김성근 감독을 걸고 넘어지며 규정을 강화하게 만든 김성근이 문제며 작년과 같이 애매한 선에서 몰래 훈련한 넥센은 사실상 변경된 규정에 의한 피해자라는 얼토당토않은 인터뷰를 해 야구 팬들의 분노를 샀고, 계속 좋지 않은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1.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3 삼성 라이온즈 32 155⅔ 14
(3위)
7 2 - 0.667 2.54 122 10 51 97 51 44 1.041
1994 32 203⅓
(3위)
14 8 3 - 0.636 2.35
(2위)
174 16 38 130 64 53 0.993
1995 19 128 9 6 0 - 0.600 3.16 106 10 39 72 55 45 1.039
1996 29 89⅔ 8 2 12
(5위)
- 0.800 2.01 67 4 14 56 23 20 0.825
1997 31 170⅔
(5위)
13 6 2 - 0.684 4.32 174 18 45 92 91 82 1.190
1998 24 159⅓ 11 10 0 - 0.524 3.25 163 14 40 100 68 61 1.180
1999 3 4 0 0 0 - 0.000 0.00 2 0 1 3 0 0 0.75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KIA 타이거즈 1군 기록 없음
2001 23 31 3 2 3 1 0.600 3.19 23 5 7 18 11 11 0.871
2002 48 47⅔ 5 3 8 12
(3위)
0.625 3.97 46 5 8 33 21 21 1.070
KBO 통산(10시즌) 241 989⅓ 77 44 30 13 0.636 3.07 877 82 243 601 384 337 1.054

2. KT 위즈의 투수 박충식


KT 위즈 No.101
박충식
생년월일 1996년 5월 6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학교 성동초-휘문중-덕수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미지명, 2015년 KT 위즈 신고선수 입단
소속팀 KT 위즈(2015~)

kt 위즈 등번호 101번
결번 박충식(2015~) 현역

1996년생으로 KT 위즈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공교롭게도 1과 같은 투수 포지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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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 때 광주상고의 에이스는 우수투수상을 받았던 고천주였으나 원광대 진학 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원대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
  • [2] 이 부분은 알려진 것과는 다른데, 해태가 이종범과 함께 1차지명 저울질을 했던 선수는 박충식이 아니라 성영재였다. 성영재는 쌍방울로 입단했다.
  • [3] 군대보다도 구타가 더 심했다고..
  • [4] 지금이야 이전의 임창용이나 지금의 심창민처럼 사이드암이라도 150km를 넘나드는 속구를 가진 투수가 드물지 않지만, 1980년대-1990년대만 해도 사이드암-언더핸드는 120-130대의 속구와 슬라이더 또는 커브 그리고 싱커로 먹고사는 타입이었다.
  • [5] 비슷한 시기에 김동수의 보상 선수로 LG로 이적하게 된 김상엽도 같은 케이스.
  • [6] 손혁도 이걸 대단히 까며 트레이드를 거부하였다.
  • [7] 저소득층 자녀나 다문화 가정 자녀로 이뤄진 유소년 야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