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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훈

last modified: 2015-02-14 23:20:14 Contributors


잉여를 모으는 백발 감독을 조심해...

이름 박경훈(朴景勲 / Park Kyung-Hun)
생년월일 1961년 1월 19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서울특별시
출신학교 청구고 - 한양대
포지션 오른쪽 풀백
신체조건 172cm / 67kg
등번호 2번
프로입단 1984년 포항제철
소속팀 포항제철(現 포항 스틸러스)((1984~1992, 124경기 4골)
예딩 FC(1993~1994)
국가대표 94경기[1] / 1골
코치 전남 드래곤즈(1994~1996)
부산 아이콘스(2000~200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U-23(2003~2004)
감독 청구고등학교(1996~2000)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U-17(2004~2007)
제주 유나이티드(2009~2014)
교수 전주대학교 축구학과(2008~2009, 2015~현재)

1988년 K리그 MVP
해원(대우 로열즈) 박경훈(포항제철 아톰즈) 수진(유공 코끼리)

2010년 K리그 감독상
최강희(전북 현대 모터스) 박경훈(제주 유나이티드) 최강희(전북 현대 모터스)

1984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최순호
FW
이태호
FW
종철
MF
박창선
MF
허정무
MF
영증
DF
용환
DF
박경훈
DF
박성화
DF
종수
GK
연교
1987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상국
FW
해원
FW
김주성
MF
김삼수
MF
수진
MF
이흥실
DF
상범
DF
기봉
DF
용환
DF
박경훈
GK
풍주


Contents

1. 소개
2. 선수시절
3. 선수 은퇴 후
4. 만만치 않았던 프로 감독 데뷔 시즌
5.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6. 패셔니스타
7. 기타

2. 선수시절

서울 출신으로 본래 미술학도를 꿈꾸었으나 집안사정이 여의치 않아 중학교 졸업 후 미술의 꿈을 포기하고 놀던 중 당시 실업 축구 팀 포항제철(現 포항 스틸러스)의 감독을 맡고 있던 흥기의 스카웃으로 축구 명문인 대구 청구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축구를 시작했다. 청구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포항제철로 가기로 했었으나 부모님의 권유로 한양대학교에 진학, 이 때부터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1984년 포항제철에 입단하며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포항제철에서는 9년 동안 124경기 4골의 기록을 올리며 팀의 3회 우승을 이끌었다.[2] 국내 은퇴 후 영국으로 유학을 가 있는 동안 세미프로인 3부리그 예딩 FC[3]에서 조기축구하는 정도로 축구를 했고 FA컵에도 출전했었다. 참고로 예딩 FC 역사상 전무후무한 월드컵 출전경험 선수.(...) 그러니깐 월드컵 출전경력만 따지면 구단 레전드다

대표팀은 1980년부터 선발되어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 참가하여 전 경기에 출전했고 1988 서울 올림픽에도 출전했다.[4]

선수시절 포지션은 오른쪽 윙백. 청구고 동기였던 전 대구 FC 감독 병주와 함께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른 선수 중 하나였다. 동 시기에 국가대표팀에서 같이 활약했던 현 전북 현대 모터스 감독 최강희와 포지션이 겹치는데 최강희 감독이 수비적인 옵션이라면 박경훈 감독은 좀 더 공격적인 옵션으로 기용되었고 최강희 감독이 센터백, 박경훈 감독이 윙백 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동시에 기용되기도 했다.

3. 선수 은퇴 후

영국 유학 도중 1994년에 K리그에 새로 창단한 전남 드래곤즈의 초대 감독인 병탁 감독에게서 수석코치를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아 1년 반의 짧은 유학 생활을 마치고 국내로 복귀하며 지도자로 데뷔한다. 하지만 첫 지도자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이후 모교인 청구고등학교 감독, 부산 아이콘스 코치,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코치 등을 거치다가 2004년에 17세 이하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지도자 박경훈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특히 2007년에 국내에서 열린 FIFA U-17 월드컵에서 홈인데도 불구하고 조별예선을 통과하지 못하며 기대에 못미친 결과가 나오자 부정적인 면에서 이름이 알려진 점이 컸다.[5][6] 이후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사임하고 2008년부터 전주대학교 축구학과 교수로 정식 임용되어 축구 이론에 대해 공부를 했다.

4. 만만치 않았던 프로 감독 데뷔 시즌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2009년 10월 30일, 제주 유나이티드가 성적 부진을 이유로 브라질 출신의 알툴 베르나르지스 감독을 해임하고 박경훈 교수를 감독으로 선임한다.

하지만 알툴 감독 시절에 제주는 포항에 8:1 대패를 당할 정도로 팀이 막장인 상태라 팀을 끌어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고 결국 15개 팀 중 14위로 프로 감독 데뷔 시즌을 마친다.

5.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제주 유나이티드라는 팀이 제주특별자치도로 연고를 옮긴 이후로 워낙에 그저그런 팀이었기에, 또 박경훈 감독도 지도자로 데뷔한 이후 특기할만한 성과를 보여 준 적이 별로 없었던 지도자이기에 K리그 팬들 내에서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장이 취임하고 이 사장에게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받아 중국으로 떠났던 김은중을 불러오고 수원에서 벤치만 달구던 배기종, 박현범 등 알토란 선수들을 영입하며 팀을 새롭게 만든 결과 2010년 K리그 정규리그 2위, 포스트시즌 2위의 놀라운 성적을 거둔다. 이 한 시즌으로 K리그 팬들에게 명장의 반열에 거론되는 감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K리그 토토팬들에겐 본격적인 헬게이트가 열렸다 2011 시즌 역시 중반까지 리그 3~5위를 오가며 이전까지 약팀이던 제주를 확실히 6강권의 강팀으로 변모시켰다.

조광래 감독 해임 이후 신임 대표팀 감독 후보로 국내 감독들 중 최강희, 신태용 감독과 함께 거론되었으나 최강희 감독이 선임되었다. 제주 구단 입장에서는 잘 된 일

2012 시즌을 앞두고 2012년 제주의 축구는 방울뱀 축구(...)라며 홍보를 했으나 인지도는 그다지 신통찮은 듯. 하지만 성적면에서는 7월까지 4~5위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청대 시절부터 눈여겨본 송진형을 데려오고 전술에 짜임새가 생기면서 제주가 더욱 강해졌다는게 전문가들의 의견.

관중 수도 나날이 늘어나고 있어서 많은 이들이 놀라는 중. 성적도 올리고 팬들도 늘고

2013 시즌은 예년만 못한 경기력으로 결국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졌고 전체 9위(하위스플릿 2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박경훈 감독에 대한 팬들의 신뢰도 많이 떨어진 상황. 강경 팬들 사이에서는 경질론까지 나오고 있다. 2014 시즌이 제주에서의 감독 생활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그리고 2014 시즌 여름에 망하는건 여전하지만 상위 스플릿에 재등극했다.

계약기간 1년을 남겨 두고 2014년 12월 3일 감독직 사임을 발표했다. 이미 올 시즌부터 사퇴하기로 마음먹었었다고. 전주대학교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쓰실 예정이다.

6. 패셔니스타


자타가 공인하는 K리그 감독 선수 포함 최고의 패셔니스타다. 172cm의 단신이지만 간지폭발의 백발, 군더더기 없는 몸매로 인한 수트간지. K리그 양대 패셔니스타로 꼽히는 신태용 감독과 비교하자면, 비교적 나이가 어려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과감한 패션을 시도하지 못하는 신태용 감독과 달리 박경훈 감독의 패션에는 거침이 없다.


과연 누가 시상식에 체크무늬 바지를 입고 나올 수 있을까 여기서 이런 분이나 런 분을 떠올리면 지는거다!


주임원사 포스.상무도 간 적이 없는데[7]

7. 기타

어린시절 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선수 시절에도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렸고 2008년 전주대학교의 교수로 부임한 이후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 했으나 1년도 안돼서 다시 축구판에 뛰어들게 되어 다시 미뤄두었다고. 대신 지인과 함께 작은 미술관을 만들어 운영 중이고 나중에는 자신의 작품도 전시하는 게 꿈이라고 한다.


감독 생활을 그만둔 뒤, SBS 객원해설로 2015년 AFC 아시안컵 중계진에 합류했다. 첫 중계가 우즈베키스탄 경기. 해설위원이 익숙지 않아서 인지 결국 결승까지도 말을 잘 못한다는 평이 많았다. 치고 빠지기도 어려운 마당에 박문성이 쉴새없이 떠들어대니 가끔 말 꺼내도 딱히 칠 멘트가 네이버에서 특히 욕을 먹는 것을 보아 이곳에는 박문성 팬이 많아서 더 욕을 먹는 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축구인들이 전부 이영표처럼 말 잘하면 진즉에 선수 출신 해설자들이 많았겠지. 대체적으로는 표현을 잘 못 하지만, 역시 한 달 전까지 현장에 있던 사람이라 은근히 직구를 잘 던지다는 평. 아무래도 꾸준히 중계를 해 온 전문 해설가와 동일선상에 두기에 가혹하기는 하다. 그러니 덜커덕 빅 이벤트로 가지 말고 케이리그든 해외축구든 꾸준히 해서 올라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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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대한축구협회 기록실에는 올드 선수들의 기록이 보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기록은 자료마다 다르게 명시하고 있다. 한국어와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88경기로, 어디에서는 92경기로..
  • [2] 이러한 공로로 포항 스틸러스 구단 명예의 전당 최초 13인에 포함되었다.
  • [3] 2007년 이후로는 하예스 FC와 합병되어서 하예스 & 예딩 FC.
  • [4] 당시 올림픽 축구에는 23세 이하 + 와일드 카드 제도가 없었다. 나이제한은 1992년, 와일드카드는 1996년부터 도입.
  • [5] 이 때 박경훈 감독의 미래가 얼마나 암울했냐 하면, 축구계 안팎에서 다시는 감독을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었고 박경훈 감독도 '다시는'까지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감독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전주대학교 교수로 가게 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 [6]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당시 주축멤버들이 2009 U-20 월드컵 8강, 2012 런던 올림픽 축구 동메달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2007년 U-17 결과만 놓고 보면 박경훈 감독을 실패한 감독으로 단정지을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선수들을 대한민국 축구의 새로운 '황금세대'로 만든 것 역시 박경훈 감독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 [7] 86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병역 혜택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