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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

last modified: 2018-08-04 18:24:43 Contributors

영어: American War of Independence, American Revolutionary War[1]

오늘은 어떤 중대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1776년 7월 4일, 미국에서 독립 선언문이 작성 된 날, 영국조지 3세의 기록[2]

Contents

1. 개요
2. 발단
3. 계란으로 바위치기
3.1. 보스턴 공방전
4. 승리로 도약하다
4.1. 요크타운 전투의 의의
5. 결과
5.1. 프랑스
5.2. 세계사
6. 당시를 다루는 작품

1. 개요

1775년부터 1783년까지 대영제국과 Thirteen Colonies(13주 식민지.당시의 명칭) 사이에 벌어진 전쟁. 그 결과 미국이 대영제국으로부터 분리되었다.

2. 발단

근본적인 원인은 식민지와 본국 간의 갈등이었다. 본래 본국과 북미 식민지의 사이는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다. 북미 식민지는 영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식민지 개척을 했던 19세기와는 양상이 달랐다.(이후 영국이 개발한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 뉴질랜드와 동급의 대우를 받았다. 솔직히 이 정도면 자국 직할속령이라고 봐야지 단순한 수탈 목적의 식민지라고 보기엔 과분한 대우다. 당장 영국이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에 해준 거랑 아프리카나 아랍 인도 쪽에 한 짓의 차이를 생각해 보자) 물론 16세기의 로어노크 식민지 이주시도나 17세기의 제임스타운 개척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성공한 식민 이주는 메이플라워호로 이주한 청교도들 이후였다. 본국은 북미 식민지에 총독을 임명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총독들은 본국 출신보다는 북미 식민지 태생의 이민 2세대나 3세대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각 식민지들은 영국과 국왕에 충성한다는 조건 하에서 자체적으로 의회와 주정부를 구성하여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영국도 이렇게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이 편했다.

그러다가 '프랑스-인디언 전쟁'(프랜치-인디언 전쟁, French and Indian War.)[3]이 일어나자 북미 식민지와 영국 본국은 프랑스에 맞서 일치단결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본국과 식민지가 단결하여 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양측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7년 전쟁에 포함되는 전역 중의 하나였고, 비록 영국이 승리했을지언정 7년 내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느라 재정이 버거운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이 전쟁에만 든 전비가 무려 6,500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하는데,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면 수백억에서 수천억 파운드까지 갈수 있는 어마어마한 비용이다. 2013년 9월 1파운드는 1,700원 내외이니 가장 적은 숫자인 100억 파운드 라고 하더라도 17조 2,482억 원, 5,000억 파운드라면 862조 4,100억 원.

이를 충당하기 위해 영국의회는 1764년 설탕조례를 제정했고 이듬해인 1765년에는 인지조례를 통과시켰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것은 인지조례였는데 식민지에 유통되는 모든 종이에 3페니의 인지를 붙여야 한다라는게 법안의 핵심이었다.[4] 그러나 식민지인들은 지난 전쟁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공헌했는데 돌아오는 보답이 세금이냐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런 반발의 배경에는 기존 세금이 간접세였던 것과 달리 인지조례가 제정되어 시행되는 인지세는 직접적으로 부과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반발이 더 커진 것이고… 반대로 영국은 식민지인들은 전쟁에서 거의 한게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공을 영국군에게 돌렸다. 때문에 인지세는 "한게 없으면 세금이나 내"라는 의도였다. 영국의 이런 주장이 완전히 억지인 것은 아닌게,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의 징세율은 영국 본토에 비해 매우 낮았다. 아메리카 식민지의 간접세를 인구 평균으로 계산하면 1인당 2펜스였는데 당시 영국 본토의 세율은 1인당 14펜스 수준. 게다가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의 1인당 GDP는 영국 본토의 그것을 상회했다. 이런 세율 차이와 7년 전쟁 당시에 영국이 들인 저 엄청난 전비를 생각해 보면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인의 전공을 과소평가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이건 영국 사정이고 식민지인들에게 갑작스런 세금 징수가 반발을 가져오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게다가 식민지인들은 이런 직접세 부과를 식민지 자치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결국 인지세에 반대하면서 식민지인들이 내놓은 말이 그 유명한 "대표없는 곳엔 세금도 없다!"[5]였다. 당시 식민지인들이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낼수가 없었던 이유는 영국과 북미 식민지에서 동시선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영국 역사를 살펴봐도 영국은 식민지에서는 총선을 치루지 않았다. 만약 식민지도 영국 의회에 의원을 보낼수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6]

연일 격렬한 항의와 시위가 벌어졌고 북미 식민지의 거상들은 자신들과 거래하는 영국 상인들에게 인지세 폐지 안해주면 너희들과 장사 안할거임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북미와의 교역으로 이득을 많이 보고 있던 영국 상인들도 의회에 인지조례를 폐지해달라고 사정했고 결국 인지조례는 곧 철폐됐지만 불만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은 영국 의회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식민지인들의 조직적 반발로 의회의 결정이 되돌려지자 영국 의회에서는 "이놈들 봐라?"라는 생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이러자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권위를 세우기 위해똥개훈련 갖가지 세금을 물리는 법안을 잇달아 만들기 시작했다. 1770년에 이런 경향이 매우 강했는데 이를 "타운센드 법안들"이라 한다. 타운센드 법안들이 통과되자 식민지에서는 다시금 강력한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다시 법안은 폐기 되었지만 기묘하게도 홍차에 붙인 세금만은 폐지되지 않았다. 영길리 : 헤헷 홍차는 소금이나 철과 동급의 물자니 무조건 사겠지?

물론 이런 갈등을 사람들이 넋놓고 바라보지는 않았다. 어쨌든 북미 식민지를 유지하는게 영국으로서도 이득이었다. 당시 북미 식민지의 GDP는 대영제국의 전체 GDP 중 최소 1/3, 많이 잡으면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를 자랑했다. 이걸 유지하지 않는게 더 이상한 일이다. 수상을 지낸 바 있던 영국의 윌리엄 피트는 영국에 체류중이던 식민지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과 접촉하면서 어떻게든 타협점을 모색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당시 수상이던 프레데릭 노스는 조지 3세의 동의를 얻어 식민지에 강경책을 펴려 했다.

거기다 계속 서부로 진출하려는 식민지인들과 이로 인해 벌어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충돌로 인한 비용 지출을 막기 위해 영국이 이를 저지함에 따라 갈등이 격화되는 와중 스턴 학살 사건으로 인해 이 때까지만 해도 소수 세력이었던 독립파들이 세력을 키우게 되었고[7]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이 사건으로 제대로 열받은 영국은 군대를 파병했고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 주 자치령 폐기선언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미국에서는 2번에 걸친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대륙회의는 어떻게든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자는 입장으로 모인 자리였지만 영국의 입장은 단호했고 결국 독립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미국은 전혀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거친 자연환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군대를 제대로 키울 여력도 되지 않았던 데다가 식민지인들 중 독립에 반대하거나 전쟁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거기다 상대는 대영제국. 물론 18세기의 막강한 위세가 19세기에도 그러했던 것은 아니고 다른 유럽 열강의 막대한 견제를 받았으나, 이미 세계에서 전쟁을 치르던 영국군과 식민지인들의 경력 차이는 비길 것이 아니었다.

물론 영국 본국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각지에서 민병대가 조직되기는 했으나 민병대는 본질적으로 내 고향만 지킨다는 주의가 강했다. 게다가 이들을 규합해서 이끌만한 세력 주체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 계란으로 바위치기

3.1. 보스턴 공방전

독립전쟁의 시작은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주에서 시작되었다. 레삭빠들의 선조인 보스턴 사람들은 영국의 매사추세츠주 자치령 폐기에 격분했고 영국군에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각지에서 민병대가 우후죽순으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은 토마스 게이지가 이끄는 4개 연대가 보스턴 시내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보스턴 밖까지 통솔권이 미치지 못했다.

결국 토마스 게이지는 보스턴을 위협하는 민병대부터 제압하기로 결심하고 1775년 4월 18일, 700명의 병력을 파견해 콩코드에 있는 민병대의 무기창고를 제압하고 민병대를 무장해제 시키도록 지시했다. 독립파에 속했던 리비어는 영국군의 움직임을 알고서는 말을 타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든채로 렉싱턴으로 가서 영국군이 쳐들어온다고 알려주었다.[8] 이에 렉싱턴의 민병대 77명이 소집되어 영국군을 기다렸다.

4월 19일 아침, 영국군이 렉싱턴의 초지에 이르러 민병대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실상 렉싱턴에서의 교전이 독립전쟁의 시작으로 간주된다.(싱턴-콩코드 전투) 영국군은 렉싱턴을 지나 콩코드 근처 노스브릿지에서 민병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민병대에게 밀려 보스턴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퇴각하는 영국군을 각지에서 몰려들어온 민병대들이 공격했고 영국군은 궤멸직전에 보스턴 시내에서 지원군을 보내 겨우 보스턴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민병대들은 이제 보스턴 시내를 탈환하려는 구상을 하기에 이르렀다.(스턴 포위전) 대륙의회도 결국 싸움을 피할수 없음을 깨닫고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는 민병대들을 규합하게 했다. 영국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윌리엄 하우가 이끄는 4,500명의 원군을 파병했다.

1775년 7월, 조지 워싱턴이 보스턴에 도착했다.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는 민병대들은 총만 들었을뿐인 오합지졸들이었고 워싱턴은 이런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최강 전력인 영국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장교급이라고 있는 인물들도 보고서를 어찌 써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결국 워싱턴이 일일히 다 가르쳐줘야 했다고.

당연히 초장에는 계속 개발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물자 보급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영국의 약점을 이용, 전투를 피하고 계속 시간을 끄는 소모전으로 나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777년 벌어진 사라토가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 전투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첫 승리로 평가된다. 트랜턴에서 한 번 이기긴 했는데 그건 영국군 소속 독일 헤센 용병들이 크리스마스라고 방심했다가 당했던 거고…

4. 승리로 도약하다

한편 이 시기 벤자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유럽으로 건너가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벤자민 프랭클린이 프랑스에게 준 것은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열등감을 자극한 것 뿐이었다. 그럼에도 벤자민 프랭클린의 전략은 기가 막히게 성공적이어서, 루이 16세로부터 영국을 북미에서 몰아내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당시 프랑스는 프랜치-인디언 전쟁과 7년 전쟁의 패배로 신대륙에서 실익을 얻을 만한 영역을 모조리 영국에게 빼았겼고, 유럽에서도 망신을 당한 상태였다. 게다가 신대륙에서 뽕을 뽑고 있는 영국에게 심각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독립전쟁이 발생하고 미국에서 구원요청이 들어오자 원군을 약속하고 실제로 엄청난 원군을 보냈다.

그 결과 프랑스(사실 여기는 1777년부터 비공식적으로 미국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네덜란드, 에스파냐 등이 지원하게 되어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전쟁의 양상도 미국에게 좀더 유리해졌지만 좀처럼 결착이 나지 못한다. 이유는 양측 모두 내분이 장난 아니었기 때문.

미국 측에서는 점차 돈이 부족해지자 군인들에게 줄 월급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탈영병들이 속출하게 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반란을 일으키려 하기도 했다. 베네딕트 아놀드 같은 경우는 아예 미국의 이완용이 되어버렸다(항목 참조). 거기다 장기화되는 전쟁으로 점차 반전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국 또한 전쟁의 장기화로 늘어가는 빚과 미국의 근성, 군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점차 미국 독립 의견이 늘게 된다. 그럼에도 조지 3세와 영국 정부는 포기하지 않고 대병력을 보내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요크타운의 항복. 1797, 존 트럼블 그림.

1781년, 영국군 사령관 콘월리스가 이끄는 북미의 영국군 주력부대가 요크타운 요새에 고립, 포위되었다. 요새에 대한 포위를 풀고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최강이라는 대영제국 해군이 나섰으나 프랑스 해군에게 체사피크 만 해전에서 참패, 봉쇄망을 뚫지 못했다. 결국 콘월리스는 포위망을 뚫을 가망이 없어보이자 GG쳐 버린다. 이 사건 이후 영국에선 전쟁 지지자들이 크게 줄게 되었고 결국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영국 의회는 영국군에 귀환을 명하게 된다.

4.1. 요크타운 전투의 의의

흔히 미국 독립전쟁을 결정지은 전투로 요크타운 공방전을 꼽기에, 영국 '주력부대'를 요크타운에서 패배시킴으로써 전쟁이 종결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영국이나 미국 모두 전쟁 지속 능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이었고, 이때 교착상태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영국이 일부 병력을 떼내 미국 남부지역을 뒤흔드는 회심의 한수를 던졌으나 그것이 요크타운 패배라는 대실패로 막을 내림으로써, 결국 전쟁 지속 동력을 먼저 잃어버린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전쟁을 끝내게 만든 결과를 가져온 정도로 요크타운 전투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콘월리스의 부대는 처음에는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고, 영국군 주력부대는 점령지 뉴욕에 주둔하고 있는 - 콘월리스의 상관인 - 클린턴의 부대였다. 콘월리스는 미국 남부지역을 흔들 목적으로 방비가 미약한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침공했으나, 초기의 빛나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게릴라전을 벌이는 미국 민병대에 피해가 누적되자 이를 버티지 못하고 독단으로 버지니아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역시 같은 목적으로 파병되었던 다른 영국군 부대들을 규합하면서 병력이 커졌지만, 그렇다해도 7,000명 정도로 뉴욕에 주둔한 클린턴의 17,000명에 비하면 주력병력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리고 미군 총사령관 워싱턴은 뉴욕을 탈환하고 '주력부대' 인 클린턴을 항복시켜 곧바로 전쟁을 끝내고 싶었지만, 장기간의 점령으로 방비가 강화된 뉴욕을 탈환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에 결국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막판에 들어온 콘월리스의 버지니아로의 이동 정보에 따라 남부지역을 흔들고 있는 영국군을 일소하기 위해 공격 목표를 콘월리스로 바꾸게 된 것이다. 요크타운 전투 후, 미국의 입장에서는 뉴욕을 점령하고 있는 클린턴의 주력부대가 있기에 요크타운 전투의 승리를 전쟁의 종결로 곧바로 연결시킬 수 없었고, 반대로 영국 입장에서는 클린턴의 주력부대로는 미국-프랑스 연합군을 상대로 전황을 역전시키기는 커녕 뉴욕 방어나 간신히 가능한 상황이라 결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만약 요크타운 같은 승리가 없었다면, 미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겪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전시경제상황이 한계에 이를대로 이른 미국이 먼저 붕괴하거나 혹은 별 성과없이 막대한 전쟁자금만 소모하는데 싫증이 나기 시작한 프랑스가 발을 빼거나 혹은 유럽 중립 열강들의 중재로 평화협상을 한다해도 영국이 쟁쟁한 군사력으로 뉴욕과 남부 일부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주 불리한 조건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5. 결과

1783년 리 조약으로 미국은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1787년 필라델피아 대표 회의에서 미국 헌법이 규정되었다. 한편 미국은 '영국 국왕을 대체할 통치자'를 요구했고, 그 결과 투표로 인한 선출로 그 사람이 뽑혔다. 이것이 인류사 최초의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었다.

한편 파리 조약에서 미국의 영토는 미시시피 강 동쪽까지로 인정되었다(기존의 공식적 영역은 팔레치아 산맥까지였다. 물론 그 서쪽에도 이미 미국인들이 진출해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순순히 떠날리 없었고, 이는 결국 노스웨스트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 ~ 1795)을 유발하게 된다.

5.1. 프랑스

미국 독립 전쟁은 프랑스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정부인사들은 영국에 대한 열세 의식에서 무리하게 전쟁을 추구했고, 루이 16세는 이때 막 왕위에 오른 22세 청년이라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했다. 당시 루이 16세에게 외교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 관료들이 올린 보고서는 이러했다.

'프랑스 서인도제도의 섬들이 위험하다. 이유는'
1. 식민주를 돕지 않아 영국이 무력 진압에 성공할 경우 :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메꾸기 위해 영국은 프랑스를 공격한다.
2. 식민주가 자력으로 독립에 성공한다면 : 영국은 상처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를 공격한다.
3. 영국이 식민주에게 양보해 평화적으로 독립할 경우 : 영국은 새로운 영토 확보를 위해 프랑스를 공격한다.
4. 식민주가 영국에 양보해 항복할 경우 : 식민주는 프랑스를 원망하며 영국에 협력할 것이고, 영국은 프랑스를 공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식민주를 도와 영국을 공격한다.
그러나 영국미국을 도와 우리를 공격한다!

다만 프랑스의 입장을 단순히 이렇게 우스꽝스럽게만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시는 현대와는 달리 국가간의 이해관계를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무력충돌로 해소하는 경우가 빈번했고, 그렇기에 불과 십수년전에 프랑스는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북미지역 식민지를 영국에게 상실한 바 있다. 한마디로 영국-프랑스 사이에서 힘의 불균형이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던 상황에서 영국 내부에서 '내분'이 발생한 것이고, 프랑스에게 이것은 힘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는 둘도 없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만약 영국과 북미 13주 식민지의 관계가 봉합되었더라면, 향후 서인도제도의 분쟁에서 영국은 상대적 우위에 있던 해상전력과 함께 북미 식민지에서 손쉽게 육군병력을 증원하고 보급품을 확보할 수 있는 전략적 우위를 누렸을 것이다.

이리하여 영국 정규군에게 곧 제압당할 수준이었던 "식민지 반란"이 프랑스의 자금과 군사적 지원으로 성공. 북미 13개 식민주에서 영국군을 몰아내고 미국이 탄생했다. 이 때 프랑스는 얼마나 두고두고 즐거워했는지 후일 미국에 독립 100주년 기념선물로 자유의 여신상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즐거움도 완전 잠시. 프랑스는 미국 원정으로 인해 엄청난 부채를 뒤집어 쓰게 되었으며, 더불어 원정 직후를 기점으로 불어닥친 폭설과 기근으로 국가적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미국에 원정갔던 프랑스의 장교와 병사들(대표적으로 라파예트 장군)이 자유와 박애 정신을 식민지에서 배워왔던 것이다. 사실 계몽사상이라고 하면 프랑스가 오히려 앞서 있었지만, 이전까지 계몽 사상들은 학자들의 탁상공론에 가까웠기 때문에 영향력에 한계가 있었으나, 미국 독립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은 실제로 현실에서 공화주의와 평등사상, 자유주의가 실제로 실현되어 "국가'를 만들어내는 현실을 눈 앞에서 목격하였던 것이다.

깡촌 신대륙의 별 볼일 없는 식민지(당시 미국이 유럽 대륙과 비교하자면 그랬다.)에서 몽사상에 기초한 이상적인 공화제 국가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유럽 한 가운데의 최고 문명국 프랑스에서도 실현할 수 없을 이유가 없지 않을가? 루이 16세의 뒤늦은 진화 노력도 잠시,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을 일으켜 버렸다. 이렇게 원정 갔던 군인들에 의한 사상수입은 특이한 게 아니여서,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러시아 제국 장교들 중 일부도 귀국 후 어설프게 혁명을 시도했다가 진압당했다.

사실 프랑스의 주요 수입은 서인도제도 섬들의 특산물을 가공해서 내다 파는 것에 있었지 퀘벡 등 북미 식민지가 주력은 아니어서, 이게 결정적인 참전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문제는 그 수익을 써먹을 정도로 루이 16세가 오래 살지는 못했다는 것

덤으로 프랑스는 얼마뒤 루이지애나wiki"루이지애나 구입" 헐값으로 매각해서 미국에게 정말 톡톡히 좋은 일을 해줬다.

5.2. 세계사

미국 독립은 전 세계에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내셔널리즘[9]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스페인포르투갈의 타격과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열풍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시몬 볼리바르가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을 건립한 모습은 조지 워싱턴을 똑 닮았다. 하지만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은 끝내 분열되면서 두 아메리카의 진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그리고 영국 요리를 먹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10]

6. 당시를 다루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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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미국 내에서는 이렇게 불리는게 일반적.
  • [2]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당시 기술력으로는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것이 바다 건너 영국까지 보고되는데는 엄청난 시간이 걸리기 때문.
  • [3]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쟁의 발발 원인은 한 식민지 출신 영국 장교가 우발적으로 프랑스 외교관을 살해한데서 시작되었다. 일각에서는 이 정체불명의 식민지 출신 영국 장교의 정체가 조지 워싱턴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만약 조지 워싱턴이 전쟁의 발발 원흉(?)이었다면 결국 그의 우발적 살인이 미국 독립이라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셈?
  • [4] 심지어는 트럼프 카드에도 인지를 붙여야 했다고 한다. 흠좀무. 오늘날에도 스페이드 에이스만 유난히 도안을 크고 화려하고 복잡하게 그리는데, 이때 붙인 인지의 흔적이다.
  • [5]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라임 굿
  • [6] 다만 이랬다간 조만간 식민지와 본국의 관계가 역전될 우려가 있다. 특히 미국의 엄청난 인구 증가율을 본다면 오히려 영국이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 다 사이좋게 인도의 식민지가 되었겠지
  • [7] 사실 보스턴 학살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었지만 독립파들은 이 사건을 아주 잘 활용했다. 언플의 힘
  • [8] 정확히는 여기여기 참고. 폴 리비어가 한 말이 "The British are coming!" 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는 "The Regulars are coming out." 이라고 한다.
  • [9] 굳이 민족주의가 아닌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영국과 미국 사이 '민족의 차이'가 있지 않았기 때문. 반면 특정 공동체를 대표하는 별개의 'nation'을 건국해야 한다는 내셔널리즘에는 부합한다.
  • [10] 이건 어디까지나 개드립에 가깝다는 것을 명심하자. 미국 요리가 영국 요리와 달라지게 된 것에는, 영국 본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식품의 생산 능력과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의 음식 문화가 어우러진 영향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