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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올림픽 참사

last modified: 2015-01-30 21:42:38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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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들의 명단이 새겨진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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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범인 중 하나인 칼리드 자와드(Khalid Jawad).

1972 뮌헨 올림픽이 한창 열리고 있던 9월 5일 새벽 4시, 운동복을 입은 8명의 무장괴한들이 올림픽 선수촌 담장을 넘어 이스라엘 선수들이 묵고 있던 숙소로 침입했다. 이때 바로 옆이 대한민국 선수단 숙소였으나 이들은 다행히 전원이 무사히 피했다. 이스라엘 선수들은 괴한들을 피해 도망치는데 성공했지만 이때 이미 2명이 죽고 9명이 인질로 붙잡힌 상태였다. 괴한들은 자신들이 팔레스타인 무장 저항단체인 '검은 9월단' 이라고 밝히면서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포로들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서독 경찰에서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 경찰이 무력 진압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문제는 당시 서독 경찰에는 현대의 SWAT와 같은 전문 대테러부대가 없었다는 것. 그렇다고 서독 정규군의 특수부대를 투입할 수도 없던게 독일 헌법에 의거해 독일 정규군이 독일 국내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것도 방송카메라가 생중계하는 바람에 테러범들에게 들켜서 역시 실패했는데, 보도 통제 개념의 부재도 원인이지만 작전 자체가 워낙 어설펐기 때문. 속에 방탄복 입은 게 뻔히 보이는 자기 몸집보다 뭔가 이상하게 빵빵한 체육복을 걸친 남자 몇이 총들고 지붕 위로 올라왔는데, 이게 하필 TV 카메라가 생중계를 위해 맞춰 놓은 곳에 그대로 잡힌 것이다. TV 보던 테러리스트가 자기 머리 위 지붕에 거수자들이 얼쩡거리는 걸 보자마자 바로 테라스 너머에서 "쟤들 안 꺼지게 하면 인질 죽인다!"고 외쳤고 서독은 그 위장 경찰관들을 결국 철수시켜야 했다.

서독 경찰 당국은 테러범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면서 기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일단 헬기로 공항까지 이동시킨 다음 목적지까지 이동할 비행기 안에 경찰들을 승무원으로 위장해 태워놓고 저격수와 협동으로 사살하려고 했으나 이 위장 경찰들이 자기들끼리 작전을 취소하고 철수해 버렸다. 대체 왜? 빈 비행기임을 알자 남은 경찰들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결국에는 테러범들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이 와중에 인질 9명 전부가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사건 발생 직후 모든 경기가 중지되었다. 인질 사망 이후 주경기장에서 추도식이 거행된 후 34시간만에 재개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선수단은 동료의 주검을 가지고 전원 귀국하였다. 대회 포기 의견도 나왔지만 수 년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없단 이유로 인해 IOC와 독일정부는 재개를 결정하였다.

검은 9월단 사건 덕분에 서독의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고 가장 화려한 대회가 될 것이라는 서독의 관계자들도 그대로 얼굴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올림픽에서 조기가 게양된 최초의 올림픽 대회이기도 하다.

사태가 이렇게 커진 데에는 정보가 부족하기도 했고[1] 당시에는 대테러의 개념이 잘 정립되어 있지 않아 독일 경찰에는 대테러부대도 없던 것도 이유였다. 계획대로라면 저격수들이 공항에서 제거하려고 했으나 이 저격수들은 전문 훈련을 받은 저격수가 아니라 걍 사격이 취미였던 경찰들(...). 결정적으로 이들에게 지급된 G3 소총에는 스코프도 없었다.

게다가 이들이 장거리 사격을 해야 했던 시각은 어두운 한밤중이었는데, 장갑차량 등의 지원도 없었으며[2] 인질들이 죽어나갔던 것은 사건을 이따구로 크게 키운 독일의 잘못 때문이었다. 결국 이 사건의 여파로 독일대테러부대GSG-9을 창설하며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된다.

하지만 서독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분석도 많은데 굳이 독일이 아니라도 미국조차도 이런 일이 당시 터졌다면 상당수 비슷한 상황이라는 분석도 많다. 되려 이 참사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세계적으로 테러 대응에 시간이나 경험이나 조치가 오래 걸렸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인류 역사에서 당하기 전에 사건사고를 대응한 것보다 당하고 큰 피해를 입고나서야 고치거나 대응한 게 더 많듯이. 사실 당시만 해도 올림픽이라는 국제 행사에 이런 유혈 인질극과 같은 테러가 벌어지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몇몇 국제정치학자들 중에서는 뮌헨 참사를 현대의 테러리즘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한다.[3]

이 일이 일어난 뒤에 이스라엘은 '신의 분노' 라는 보복작전을 개시하였고 이것이 결국 지금까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 심화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내용을 각색해 뮌헨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바로 다음 열린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이 덕분에 안전경비를 상당히 증가시켰으며 이때 진 빚은 30년이 지나서야 겨우 해소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리고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도 10억 미국 달러의 빚이 남았다고 한다

덧붙여 뮌헨 올림픽 참사가 벌어졌을 당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은 네오 나치의 지원을 받았었다고 한다.#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인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 묘사되었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네오 나치 간의 커넥션이 형성된다는 그런 상황이 정말 현실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진영논리, "적의 적은 나의 친구"의 극한을 보여준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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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테러범들의 정확한 인원도 파악을 하지 못하고 협상팀의 증언만을 통해 4-5명 정도로만 추정을 했다. 진압작전 때 가서야 '왜 저렇게 테러범이 많지' 라며 당황했고 진압작전 실패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 [2] 장갑차를 보내긴 했는데, 공항까지 가는 길에 교통 체증으로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 [3] 당시 대테러 부대의 필요성을 느낀 나라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 아랍국가의 테러)과 프랑스(알제리의 테러)밖에 없었고, 이들 나라들도 조차도 뮌헨 참사 이전이 아닌 이후에 대테러 부대를 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