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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도미이치

last modified: 2015-03-29 23:15:22 Contributors

역대 일본 총리
80대 81대 82대
하타 쓰토무 무라야마 도미이치 하시모토 류타로



2014년 현재. 자민당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있다면 사민당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평생현역으로 있다.

村山富市[1] 1924년 3월 3일 ~

재임기간 1994년 6월 30일 ~ 1996년 1월 11일 (1년 195일)

신선같은 눈썹이 인상적이다.[2]

제 81대 일본 총리. 가타야마 데츠이후 역대 두 번째의 일본 사회당 출신 총리이다.

큐슈 오이타 현 오이타 시 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으며 1955년에 사회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 시의원과 현의원을 거쳐 1972년 첫 중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내리 8선을 했다. 1991년 사회당의 요직인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과반수가 무너지자 오자와 이치로의 신생당,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일본 신당, 간 나오토의 사회민주연합 등과 연합하여 전후 최초의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에 참여했다.

그러나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은 신생당과 일본 신당, 신당 사키가케등의 자민당 탈당파들이 만든 신당에게 표를 잠식당하면서 의석 수가 기존 136석에서 70석을 간신히 넘는 참패를 당했으며 연립정권 내에서도 가장 많은 의석수를 가지고도 각료 배분에서 고작 세 자리만을 얻는 불이익을 당했다. 결국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야마하나 사다오 위원장이 물러나면서 2인자인 무라야마가 위원장 자리를 넘겨받게 되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가와규빈 스캔들로 퇴진한 후에는 오자와의 신생당·공명당과 대립하면서 연립에서 이탈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결국은 같은 구성으로 하타 쓰토무 내각 참여에 합의했다. 그러나 총리 지명 이후 연립 여당의 일원이었던 민사당이 사회당을 제외한 여당에 통일 회파의 결성을 호소하자[3] 이에 분노한 무라야마와 사회당은 하타 내각에서의 이탈을 선언했다. 결국 소수 여당으로 하타 정권은 2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오자와 망했어요

1994년 6월 오자와가 조종하는 연립여당은 자민당의 가이후 토시키 전 총리를 수반으로 옹립해 자민당의 분열을 통한 정권 유지를 도모한다. 그러나 자민당은 사회당의 무라야마 위원장을 수반으로 하는 연립정권의 수립을 결정하고, 여기에 오자와의 노선과 대립하던 신당 사키가케가 참여하면서 자민당과 신당 사키가케, 일본사회당이 연립한 무라야마 내각이 발족했다. 이 당시만 해도 자민당은 미야자와 기이치, 고노 요헤이 등의 평화헌법을 지지하는 온건 보수세력이 주도하는 상황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오자와의 신당 세력보다 더 진보적인 부분도 있었다. 무라야마에게 총리 자리를 양보하면서 사회당과의 연립을 성사시킨 고노 요헤이는 이후 무라야마 내각에서 관방장관으로 일하면서 군위안부 문제에서 일본의 책임을 일부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한다.

무라야마는 총리로 취임한 직후의 국회 연설에서 기존 사회당의 당론인 비무장 중립정책을 폐기하면서 미,일 안보조약의 긍정을 표명했다. 이 노선전환은 당시 자민당과의 연립과정에서 당내의 충분한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고 발표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당은 내각 출범 초기부터 내분에 휩싸여 분당이나 해산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95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크게 패하면서 당내 지도력을 상실한 무라야마는 결국 1996년 1월 11일에 내각 총사퇴를 발표하고 정계에서 물러난다.

무라야마의 재임기간은 1년 6개월 남짓으로 아주 길지도 또 짧지도 않은 편이었으나, 이 기간동안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여러모로 우여곡절이 많았다.[4] 1995년 1월에는 토호쿠 대지진 이전까지 전후 최대규모의 피해를 낳은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고, 불과 석 달 뒤인 3월에는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이 일어나면서 국내 민심이 극도로 불안해졌다. 특히 고베 대지진에서 정부의 늑장 대처로 피해를 확산시켰다는 비판이 일어나면서 내각 지지율이 급락했으며 이후 1년동안 무라야마 내각은 낮은 지지율로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실 무라야마 본인도 개인은 파벌에 좌우되지 않는 청렴한 인물이었지만 권력의지가 약해서 재임 초반부터 사의를 밝히면 다른 각료들이 만류하는 식으로 간신히 내각을 이끌었으며 왠지 같은당 출신 누구와 비슷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노선전환을 둘러싼 당 내분에 재임기간 내내 시달렸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1995년 8월 15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명기한 총리 담화(무라야마 담화) 발표, 피폭자 구제법 성립, 미나마타 병 미확인 환자에 대한 전면 구제 등의 업적으로 나름 사회당 정권다운 모습을 조금은 보여주었다. 다만 사회당 내에서는 무라야마가 총리가 되고 싶어서 여기 저기 기웃거려서 사회당이 결국 망한거라고 비난하는 자들도 있는 모양.

1996년 정계 은퇴 이후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창설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의 이사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일본에서 몇 안되는 진보파 출신 전임 총리로서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흔 살에 총리가 되었는데, 최고령이나 최장수는 (일본이야 장수국가니까 당연히) 아니지만 아흔 살까지도 정정하게 활동하는 것은 보기 드문 모습이다.

2013년에 아베 신조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를 파기하느냐 계승하느냐로 말이 많은 가운데 무라야마는 니혼게이자이와의 인터뷰에서 무력으로 적국에 들어가면 그게 침략이지 뭐가 다른가?라고 일갈했다. 또한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의 폐기 또는 수정 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또한 한국의 JTBC와의 인터뷰에서도 아베 총리의 발언은 국제적 고립만 심화시킬뿐이라고 비판했다.

2013년 8월에는 아베 정권의 개헌시도에 맞서서 호헌을 기치로 야권세력이 뭉쳐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호헌을 기치로 한 야권재편은 쉽지 않은 상황인데, 개헌에 반대하는 세력이 민주당, 사민당, 공산당 등에 퍼져있고 이들이 호헌만을 가지고 뭉치기에는 너무 성향이 다르기 때문. 애초에 자민당 내에도 우경화 문제에 반발하는 정치인이 제법있는 판이라... 다만 무라야마 전 총리는 사민당에 대해서 야권 재편과정에서 해체될수도 있다고 말해 사민당 중심이 아닌것을 분명히 했다.

2014년 2월 11일, 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의 초청으로 방한하였다. # 한일관계 관련 논의를 위해 방문하였으며, 위안부 피해자들과의 만남을 갖기도 했다. 청와대를 방문해 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고려하였으나, 일정 상 성사되지는 않았고 대신 정홍원 국무총리와 면담을 갖는다.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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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돈짱(トンちゃん)이라는 애칭도 갖고 계신다.
  • [2] 인형도 나왔었다(...) 무라야마 총리 인형.
  • [3] 오자와 이치로가 사회당을 배제한 정계재편을 위해 민사당을 배후에서 움직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 [4] 여담으로 김일성이 죽은 사건이 총리에 오른 직후에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