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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last modified: 2015-10-30 09:40:01 Contributors

  • 맹가는 여기로 연결되니 Miss A의 멤버 지아의 본명인 맹가를 찾는다면 해당 항목을 참조할 것.

孟子

Contents

1. 소개
2. 활동
3. 사상 및 철학
4. 후대의 수용
5. 후손
6. 『맹자(서적)』
6.1. 책 『맹자』의 목차


1. 소개

孟子(BC 372 ? ~ BC 289 ?)

무려 2000년전에 권력의 근본을 백성에게서 찾은, 시대를 앞서간 성현

중국 전국시대 후기의 철학자, 정치가, 정치사상가로, 공자의 학풍을 현실정치에 적용하여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인물. 이름은 가(軻).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만장과 공손추 등이 있으며, 주자(주희)에 의해 특히 부각되어 현재까지 한국에서 '유교의 대표 인사'로 꼽히고 있다. 성인 공자에 이은 제2의 성인이라 하여 아성(亞聖)이라 불리기도 한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백성의 저항'을 옹호하고, '왕의 권력은 백성들이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시대를 감안할때 매우 진보적인 주장을 한 인물이다. 맹자의 사상은 계몽주의 이후에 나타는 사회계약론과 굉장히 닮아있다. 사실상 동양 버전의 사회계약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1]

원 문종 3년(지순至順 원년, 1330년)에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2] 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이것이 현재 성균관 대성전 등지의 공문사당孔門祠堂 위패에 표기되는 공식 존호이다.

라틴어로는 멘시우스(Mencius)라 한다. 공자와 같은 이유로 라틴어화된 이름으로 불리는 둘뿐인 중국 학자이다.


2. 활동

공자의 사상을 독자적으로 연구하면서, 양주묵적을 까고, 전국시대의 패도적 부국강병을 반대하고, 도덕적으로 정치하면 오히려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는 왕도정치를 말한 사상가.

사마천의 《사기》 맹순열전에 따르면 맹자는 공자의 손자라고 하는 자사 계열에서 배웠다고 하지만, 맹자 본인은 그냥 사숙(私淑, 사적으로 혼자 배웠다)했다고 한다. 참고로 지금 우리가 쓰는 사숙이라는 말 자체가 맹자에서 유래된 말이다. 또한 공자는 방대한 제자들을 길러놓았고, 이들이 대륙 각국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맹자만 특별히 공자의 학통을 계승한 건 아니다. 오히려 맹자는 공자의 학통에서 보면 극단적인 지류에 가깝다.

사마천은 맹자의 주장이 당대 군주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렸을 거라는 평을 내리고 있다. 맹자는 당대 강국이었던 위(양)나라[3]와 제나라 등에 초청되어 차례대로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국시대에 그의 주장은 법가와 군현제의 확산에 눌러 기를 펴지 못했다. 맹자라는 책은 사실상 맹자의 실패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가 맹자가 밀려나고 밀려나고 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맹자는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았던 동시에 자부심도 강한 인물이었다. 생존시의 명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공자보다도 더 높았던 것이 맹자였다. 때문에 왕들은 앞다투어 맹자를 초빙하였고 높은 관직과 많은 녹봉을 주었다. 단적으로 맹자는 제나라에서 경-대부-사라는 춘추시대의 3단계 직급중에서도 최상위인 경의 직책에 있었고, 위나라에서 경의 직책에 있었다. 약소국 노나라의 대사구라는 대부 직책에 있었던 공자와 초강대국 제나라의 경의 직책에 있었던 맹자의 녹봉은 그 격이 달랐다. 단적으로 당시 화폐단위가 되었던 를 기준으로 할 때, 공자의 연봉은 조 90톤이 한계였지만 맹자의 연봉은 15000톤에 이르렀다. 너무 많아서 과장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지경이다. 이게 아니라도 맹자가 한번 지나갔다고 하면 주변 군주들이 노자돈을 주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맹자가 제나라를 떠나서 추나라로 돌아갈 때, 지나가는 길에 있던 송나라와 설나라의 군주들은 맹자에게 황금 36kg을 노자의 명목으로 주었다. 왕들이 아니라도, 임나라 왕의 동생 계임은 맹자가 군주들에게 명성을 얻기 전부터 후원을 하였고, 제나라의 고위관직에 있던 저자 역시 맹자에게 자금을 주었다. 이것은 맹자의 명성이 드높았으며, 동시에 평가도 높았다는 반증이다. 맹자의 인치는 인기가 없었지만, 묵가도가처럼 무정부주의 성향을 보이지 않는 것은 왕들이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맹자의 명성과 학교를 곁에 두고 싶어하였다. 그리고 작은 나라의 군주들은 맹자를 통해서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을 보장받고 싶어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맹자는 이런 것에 휘둘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맹자는 고자편에서, '예를 다해주고 말도 들어주면 관직에 나가지만, 예는 다하지만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관직에 물러나는 것'을 임관의 첫번째 기준으로 꼽았다. 하지만 실리적이었던 맹자는 2번째와 3번째에서는 기준을 낮춘다. 두번째는 '말을 들어주지는 않지만 예를 갖춰주면 관직에 나가고, 예도 갖춰주지 않으면 물러나는 것'이고, 마지막은 '굶어죽게 되었는데 왕이 이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구제하여 준다면 나가는데, 굶어죽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맹자의 기준은 당연히 첫번째에 있었다. 제나라 왕이 자기 말을 안 들어준다 싶으니 바로 사직계를 내놨다. 제나라왕은 맹자의 명성을 바란 것이었기 때문에 학교건물까지 세워두고 경 관직에서 1/10 정도의 녹봉으로 국학을 맡아줄 것을 대신 청했다. 이것도 국학기준으로는 상당히 파격적 대우이지만 맹자는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떠나는 맹자에게 제나라 왕은 송별금조로 '순도 높은 금 100'을 보냈다. 도량형이 적혀있지 않지만, 이것을 같은 단락에서 언급된 것으로 보면 '일'이라는 단위가 되는데 이 기준에서 본다면 황금 30kg 정도에 해당한다. 맹자는 이것을 받지 않고 떠났다. 맹자 공손추 하편에서는 이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유를 설명[4]하고 있는데, 아무리봐도 제나라 왕과 틀어져서 화가 나서 그냥 안 받았다 쪽이 가장 합당한 해석으로 보인다. 맹자는 그 만큼 자신의 위치와 역량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었고, 그런 맹자를 써먹으려 했던 이들과 서로 투닥투닥하면서 평생을 보냈다.

맹자가 말싸움의 달인이었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맹자의 내용을 보면 말싸움이 아니라 그냥 자기들 주장만 늘어놓고 있어서 누가 논파되었는지 나타나지 않는다. 맹자의 무수한 아가리파이트 승리기록인즉 그것이 맹자가 남긴 기록이기에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이 있으나, 원문을 읽어보면 승리했다라는 식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그냥 그 사람은 이렇게 주장했고, 맹자는 이렇게 주장했다는 구조. 소크라테스처럼 직접 맞장 떠서 논파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사실 소크라테스도 말싸움으로 상대를 이겼다기 보다는 상대의 원한만 사는 경우가 많았고, 댓글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이 그의 죽음으로 연결되었다.

단지 맹자가 말하는 스타일이 매우 독하기는 했다. 또한 맹자의 말이 남고, 다른 사람들의 말은 사장되었기 때문에 맹자가 결과적으로는 이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양식적으로도 맹자가 다른 사람의 말에 반박하고는 한 단락이 끝나는 구조라서 맹자의 주장에 무게가 실리는 편집방식이다.[5]

3. 사상 및 철학

교과서에는 맹자가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그보다 한 세대 아래의 순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이는 서양철학의 존재론적 관점으로 대충 규정한 것으로, 여기에 기반해서 "아하! 맹자는 인간 본성을 가리켜 덮어놓고 선하다 했고, 순자는 인간 본성을 가리켜 덮어놓고 악하다 했구나! 우왕☆ 선악 라이벌 구도 재미지네영 ㅎㅎ"라고 이해한다면 전형적인 오독이다.

일단, 맹자라는 책을 읽어 봐도 맹자는 인간이 나쁜 짓을 하는 현실에 대해 개탄하고 있다. 전국시대의 카오스 상황 속에서 살았던 인간이 덮어놓고 인간은 선하다고 주장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것.

맹자의 주장은 서양의 존재론마냥 본질적으로 선하니까 어찌됐든 인간은 선하게 행동한다는 말이 아니다. '선함'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이것을 놓치지 말고 꽉 붙잡아서 선하게 살려는 노력을 하라는 뜻이다.

다음 대화에서 이와 관련된 맹자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曰: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이) 말했다:

不爲者與不能者之形, 何以異?
하지 아니하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의 모양새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曰: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挾泰山以超北海’, 語人曰, ‘我不能!’
'태산泰山[6]을 옆구리에 끼고서 북해北海[7]를 뛰어넘는 일'을 두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못한다!'라 합니다.

是誠不能也。
이는 실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爲長者折之', 語人曰, ‘我不能!’
'어른을 위해 나뭇가지를 꺾는 일[8]' 을 두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못한다!'라 합니다.

是不爲也, 非不能也。
이는 하지 아니하는 것이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천적으로 선을 지각(양지良知)하고 있으며, 선천적으로 선을 실천할 능력(양능良能)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지각하고 있다는 것은 '사려하지 않고도 이미 잘 알고 있음'을, 실천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학습하지 않고도 이미 잘 행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곧 우리에게 선을 능히 행할 수 있는 재질이 태어나면서부터 구현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재질이 있으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타고난 것을 자기기만으로 찍어 눌러서 하지 아니하는 것이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맹자는, 선이라는 것은 결코 공허한 담론이 아니며, 어린아이나 평범한 사내, 아녀자에서부터 공자와 같은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상 생활에서 쉬이 행할 수 있는 것임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을 강권하는 것이 아니다! 성리학에서 이르는 덕성이니 뭐니하는 거창한 우주론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순자는 비판을 가하며 인간의 본성이 혐오(嫌)스럽다는 성오설性說을 말하고, 본성으로부터의 선이 아닌, 후천적 교육으로부터의 선이 유학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는데, 사실 순자나 맹자나 후천적 교육을 중시하기는 마찬가지다.[9][10]

원래 동아시아에는 서양처럼 실체로서 악(Evil)이나 악마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惡)의 반대는 노자대학에 나오듯 미(美). 사실 善도 惡의 반대로 쓰이긴 했는데, 善은 착하다는 의미보다 좋다는 의미가 훨씬 강했다. 일단 다다익이란 말의 뉘앙스를 보자. 한자 (魔)라는 글자도 불교마라(mara, 악마)를 음역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낸 글자다.

맹자는 왕 앞에서 대놓고 잘못된 왕은 갈아치워야 한다, 백성을 착취하는 왕과 관료들은 도둑놈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갈긴 인물이다. 여기에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신(神)은 갈아치워야 한다라는 말도 한 인물. 모든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권위를 마냥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11]

이것은 단순히 이해득실을 따지는 공리주의가 아니라, 군주와 종교 권위의 정당성이 어디까지나 백성에게 있다는 말이다. 맹자가 굉장히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것을 독점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백성들과 함께 하라'는 것이다.

비슷한 발언으로 "필부 하나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란 발언도 있다.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탕왕과 무왕이 각각 걸왕과 주왕을 쫒아낸 사실을 언급하며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이 타당합니까?"라고 질문하자 저 대답을 한것. 즉 맹자의 주장은 "백성을 저버린 폭군은 임금이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죽여도 무방하다"는 것.

특히 (天)을 백성과 동일시하여 천명(天命)의 개념을 인문주의적으로 뿌리박았고, 이 천명이 바뀌는(革) 기준을 민심으로 규정하여서 민본(民本)의 개념을 정치의 축으로 세웠다. 또한 '명분에 집착하며 현실성이 없다'는 오늘날의 유교에 대한 뒤틀린 평가와는 달리, 맹자의 정책은 정전제로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민생을 구해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지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애초에 맹자는 당대 패권자들에게 정책 파트너로서 초청을 받은 사람이다. 그냥 바른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사람이었고, 그를 초청한 군주들도 그 말을 실제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맹자의 민본주의가 민주주의로 연결되었다는 주장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민본적 사상이 민주주의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는 정도. 그럼에도 맹자의 민본 사상이 중요한 것은, 민(民)과 천(天)을 동일시하면서 국가의 정통성에 있어서 '민심'을 중시하도록 만들어 놓은 데 있다.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권력자가 갈린다'라는 주장은 민주주의가 대세가 되기 이전에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사상이다. 특히 법가의 등장 등으로 군주권의 강화와 일반민에 대한 철저한 통제를 지향하고 있던 기원전 4세기의 상황을 고려하면 맹자의 사상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 서민 사회의 형성과 사회적인 심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맹자의 시대에 그의 학설이 제도적으로 뿌리내리지는 못했고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맞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맹자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대의 한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시선으로 보더라도 전국시대는 까마득한 옛날이었고, 맹자의 주장을 당시의 조선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유학자들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자의 근본적인 메세지는 조선시대에 유효하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장이다. 막말로 윗동네 지도자들이 맹자의 사상만 잘 실천했어도 그 꼬라지는 나지 않았다

4. 후대의 수용

맹자는 송나라사서에 포함되면서 주류학계에서 처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철저히 묻혀 있던 책이고 그 이후에도 많이 위축되었다. 한국에서는 특히 두드러지게 유교를 공맹의 가르침이라고 말하고 있는 편이고, 중국은 우리에 비하면 다소 이름을 날리지 못했고, 일본에서는 아예 묻혔다. 특히 군주 앞에서 '너 정치 똑바로 못하면 바로 갈린다'는 말을 한 맹자의 철학이 당대의 군주들에게 위험해보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특히 한국의 경우, 여말 때의 정치가 정도전이 이 책을 탐독하면서 역성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고, 신진 무장인 이성계와 손잡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잇는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 정도전에게 맹자를 선물한 사람이 그의 절친이면서 고려 최후의 보루였던 정몽주였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12]

다만 기원전 2세기때부터 맹자를 공부하는 박사 직위가 있었음을 볼 때 이미 오래전부터 그 가치는 인정받은 듯하다. 한서 고금인표에서 맹자는 자사, 순자와 마찬가지로 제2등급인 상중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후한 말의 조기라는 인물 외에는 맹자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13] 이를 발굴해낸 인물이 주자(주희). 주자가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라는 개념을 만들면서 맹자가 비로소 중시되었고, 공자 다음의 성인으로 추대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 또한 맹자의 학풍을 계승하여 이어가는 데에는 적극적이지 못했다. 일단 상술했듯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신은 갈아치워야 된다며 "괴력난신을 논하지 말라"는 유교적 가르침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맹자와 달리, 주자의 이기론은 형이상학적 성향이 매우 강함은 물론이고 나중에 가면 과거제를 통한 전제적 신분질서를 공고히 옹호하는 논리가 된다는 점에서도 맹자와 대립각을 보인다. 주자가 맹자를 중히 여긴 것은 맹자의 성선설을 유학의 적통으로 여겼기 때문인데, 맹자의 성선설은 오히려 반체재적인 면을 보이는 반면[14] 주자가 재해석한 성선설은 "학문이 높아 과거제에서 성공한 자는 인격에 있어서도 본연의 성(聖)을 이룩하고 혼탁함을 극복한 것이다"라는 논리가 되어 기존 체재에 매우 친화적이 된다. 맹자: 이거 뭔가 이상한데 주자 본인은 과거 합격자 순위 200등 밖이었다는 게 함정 이 때문에 후기 주자학에서는 국가에도 가부장제의 개념을 적용, 위정자를 국가의 어버이로 상정하기까지 한다.[15] 맹자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이었다고는 보기 힘든 부분들이다. 지못미

5. 후손

우리나라신창 맹씨맹자의 후손이며, 유명한 사람으로 맹사성이 있다.

6. 『맹자(서적)』




맹자의 저서.[16] 단순한 철학책이 아닌, 엄연한 실용정치 서적이다.

춘추시대에 비해 전국시대 들어서면서 언어가 더 정밀해졌다는 말도 있지만, 20세기 말의 고문헌 발굴로 인해서 공자의 손자 자사시대 때 이미 중국문헌이 매우 고차원적으로 작성됐다는 것이 유물로 입증되었다.

구어체라서 매우 축약적인 논어에 비해 훨씬 문장이 매끄럽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맹자처럼 배경지식이 많이 필요한 문헌도 없다. 대충 술술 읽히기는 하지만, 뭔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한문 초심자가 공부할 때 논어를 첫 텍스트로 해야 하는지, 맹자를 첫 텍스트로 해야 하는지는 사실 개인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사실 주옥같은 명언과 재기 넘치는 명대사(?)도 많아서, 고전은 골치 아프다는 편견을 버리고 읽으면 의외로 재미있는 게 맹자다. 맹자의 말투를 보고 있으면, 왕한테 건방지다고 끔살 당하지는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독하다(...) 사실 그래서 더 재밌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다.
孟子見梁惠王[17][18]

맹자께서 양혜왕을 뵈시니,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19]
왕이 말하였다. "노인께서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오셨으니, 또한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겠습니까?
孟子對曰,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왕은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맹자》<梁惠王.上>편- [20]

맹자가 "만일 왕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제 힘은 백 균의 무게는 충분히 들 수는 있지만 깃털 하나는 들 수 없고, 제 시력은 가을날의 짐승 터럭을 살필 수는 있지만 수레에 실은 땔감 더미는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왕께서는 그 말을 인정하겠습니까?"라고 묻자, 왕은 "아닙니다"고 했다.
그러자 맹자가 말했다.[21]
"지금 왕의 은혜가 금수에게 미칠 정도로 충분하면서도 그 공적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는 것은 유독 무슨 까닭입니까? 그렇게 볼 때 깃털 하나를 들지 않는 것은 힘을 쓰지 않기 때문이고, 수레에 실은 땔감 더미를 보지 않는 것은 '시력'을 쓰지 않기 때문이며, 백성들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것은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하는 것은 실은 하지 않기 때문이지 못 해서가 아닙니다."
-양혜왕, 상-

맹자가 말했다.
"고정적인 생업이 없으면서 항심[22]을 지니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일반 백성의 경우는 고정적인 생업이 없으면 그로 인해 항심도 없어집니다. 만일 항심이 없다면 방탕하고 편벽되고 간사하고 사치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죄에 빠지는 데 이른 이후에 그것을 좇아서 형벌에 처한다면, 그것은 백성들을 그물질해 잡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진 사람이 임금의 지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그물질해 잡는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밝은 왕은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충분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릴 만하게 하여, 풍년에는 언제나 배부르고 흉년에도 죽음을 면하게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 백성들을 몰아서 선한 데로 가게 하므로 백성들이 따르기가 쉽게 됩니다.
지금은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여, 풍년에는 내내 고생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래 가지고서는 죽음에서 자신을 건져 낼 여유조차 없는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익히겠습니까? 왕께서 만일 어진 정치를 시행하려고 하신다면 어째서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오 무(畝) 넓이의 집 둘레에 뽕나무를 심으면 오십 세 된 노인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닭과 돼지와 개 등의 가축을 기름에 있어서 적절한 시기들을 놓치지 않으면 칠십 세 된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백 무 넓이의 밭을 농사짓는 데에 일손 바쁠 때를 뺴앗지 않으면 여러 식구의 가족이 굶주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상(庠)과 서(序)에서의 교육을 엄격하게 시행해 효도와 공경의 의미를 거듭해서 가르치면 머리가 희끗한 사람이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고 다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칠십 세 된 노인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헐벗지 않게 하고도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양혜왕, 상-

맹자께서는 제나라 선왕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왕의 신하로 자기 처자를 그의 친구에게 맡겨 놓고 초나라에 가서 돌아다니던 사람이 있다고 하십시다. 후에 그 사람이 초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친구가 자기 처자를 추위에 얼고 굶주리게 해놓고 있다면, 그 친구라는 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 물음에 선왕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그자와 절교하고 말지요."
곧이어 맹자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전국의 옥사(獄事)를 맡아보는 사사(士師)가 그의 밑에서 일하는 여러 사(士)들을 통솔해 나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선왕은 이번에도 역시 서슴지 않고 말했다.
"그자를 파면시켜 버리지요."
맹자께서는 다시 이렇게 물으셨다.
"사방 국경 안의 땅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그런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선왕은 자기의 책임을 추궁당하게 되어 답변할 길이 없게 되자, 맹자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좌우에 있는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딴전을 부렸다.
-양혜왕, 하-

만장이 물었다.
"요임금이 천하를 순임금에게 주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아니다. 천자라도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없다."
(중략)
맹자가 대답했다.
"순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자 모든 신들이 제사를 받아들였으니, 이것이 곧 하늘이 받아들인 것이다. 또 순에게 정사를 맡기자 정사가 잘 되어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백성들이 받아들인 것이다. 하늘이 천하를 주고 백성들이 천하를 주는 것이므로 천자가 천하를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만장, 상-

군자에게 세가지 즐거움[23]이 있으니 왕 노릇 따위에 비할소냐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在焉
부모님께서 살아계시고 형제가 탈이 없는 것이 첫째 즐거움이요,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봐도 거리낌이 없음이 두째 즐거움이요,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째 즐거움이다.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
-진심(盡心)편-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고 할 때는
天將降大任於是人也
반드시 먼저 마음을 괴롭게 하고 육체를 지치게 하며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그 배를 굶주리게 하고 생활을 빈궁에 빠뜨려
餓其體膚 空乏其身
하는 일마다 어지럽고 힘들게 만든다
行拂亂其所爲
이는 분발하고 참을성을 길러주어 이제까지 해내지 못하던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려는 것이다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고자(告子)편-

불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후손 없음이 가장 큰 죄이다. 그니까 솔로는 죄인이란 거다 고자는? 그래서 고자랑 대립했던 건가

不孝有三無後爲大
-이루(離婁)편-[24][25]

맹자가 말했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하찮다. 그러므로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가 된다.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제후를 바꾼다. 이미 살진 희생을 마련하고 제물로 바친 곡식이 정결하며 떄에 맞게 제사를 지냈는데도, 가뭄이 들거나 물난리가 나면 사직의 신을 바꾼다."
-진심, 하-



맹자는 왕의 앞에서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하기로도 유명하였다. 양혜왕 편부터 그 진가가 드러나는 구절이 많다. 설교만 줄창 늘어놓는 맹자 앞에서 왕이 '호색好色'하다 하며 맹자를 비꼬니 맹자는 '호색하면 백성과 더불어 함께 하라'라며 받아치고,[26] 맹자 또한 왕에게 대놓고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니 전쟁으로 비유해서 말해드리지요'하며 비슷하게 말을 시작하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이 전쟁으로 말해보겠다며 왕에게 논변을 펼친 것에서 나온 말이 바로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27]

맹자 관련 고사와 명언 가운데 쓸데없이 맹모삼천지교만 강조해서 학부모 등골을 빼먹는데, 사실 이 뒤에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나온다. 공부를 포기하고 돌아온 맹자를 보면서 어머니가 옷감을 찢으며 공부를 도중에 그만두는 건 짜던 옷감을 도중에 찢는 것과 같다고 다그치는 장면, 어머니가 병들어 죽음이 가까워오자 아들에게 할 일을 하라고 말하고 어머니 자신은 아들의 짐이 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리는 내용 등등...

오십보백보, 연지기, 대장부, 자포자기, 부지용, 과부적 등의 말이 맹자에서 유래된 말이며, 생활, 학교 등 일상용어 중에도 맹자에서 온 말이 있다. 그러나 요즘엔 어째 그 자신의 사상보다 교육열을 나타낸 맹모삼천지교, 맹모단기지교만 두드러진 것 같다. 해당 항목 참조.

6.1. 책 『맹자』의 목차

  • 양혜왕(梁惠王)
    맹자가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뜻을 피력하는 부분으로 상편은 7장, 하편은 16장으로 되었다. 그는 魏나라 혜왕惠王[28]에게 왕도정치를 실시하라고 조언하고 있는데 왕은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려야 그 즐거움이 오래갈 수 있으며, 왕이라도 잘못하면 왕위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공손추(公孫丑)
    맹자는 그의 제자인 공손추公孫丑와 왕도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패도정치를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가의 의리義理를 밝히고 자신의 포부를 나타내었다. 상편은 9장, 하편은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저기(反求諸己), 연지기(浩然之氣), (人和)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 등문공(滕文公)
    맹자가 나라 세자인 등 문공滕文公을 만나 왕의 국가통치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상편은 5장, 하편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이 중국 전대륙을 통치하는 천자가 되기 원한다면 먼저 백성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에게는 이 가장 중요하니 이를 저버리면 아무리 훌륭한 행실을 해도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 이루(離婁)
    상편 28장, 하편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의 본성을 추구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맹자는 자신을 바르게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제목의 이루離婁는 시력이 대단히 밝은 사람으로, 아무리 감각이 발달해도, 즉 선함과 법이 있어도 컴퍼스와 같은 기준, 즉 선왕의 도를 따르는 것이 없다면 원과 사각형을 반듯하게 그릴 수 없다,즉 바른 정치를 할 수 없다는 비유이다.

  • 만장(萬章)
    상하 편 각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장은 덕이 천도에 합치하면 도를 얻을 것이고, 어질면 천하사람을 얻을 것이라며 인도(仁道)를 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민의가 천의라는 사상과 관직에 나아갈 때에도 때에 맞게 해야한다는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만장萬章은 노자가 만난 사람 이름으로, 만장과 여러이들의 질문을 맹자가 답하는 것으로 구성된 장이다.

  • 고자(告子)
    맹자와 고자告子라니가 인성(人性)에 대하여 대화를 한다. 대강 말하면 맹자는 성선설을, 고자는 성무성악설을 설파한다. 고자는 은 왼쪽 비탈로 보내면 왼쪽으로, 오른쪽 비탈로 보내면 오른쪽으로 흐른다며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맹자는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선도 인간의 인성이라고 주장한다. 인의(仁義)는 내적인 것이니 구하면 얻을 수 있고, 구하지 않으면 잃어버린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상편은 20장, 하편은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차히 살지말고 의로운 삶을 살라고 이야기 한다. 왕도가 쇠퇴하는 것은 제후나 대부가 도를 숭상하지 않기 때문이고, 왕이 백성에게 예의를 가르치지 않고 이용만 하는 것은 백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진심(盡心)
    백성이 나라에서 가장 귀하고, 학문에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상편 46장, 하편 3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속적인 욕망에 앞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이 군자로서 더 추구해야할 것이며, 성인의 도를 배우는 데에 순서가 있으며 꾸준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제목의 진심盡心은 "자기의 마음을 다하면"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면 자신의 성性을 안다. 자기의 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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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만 맹자의 주장을 민주주의라고 하기는 힘들고 민본주의라고 해야 옳다. 물론 맹자의 민본주의가 민주주의와 어느정도 닿는 면이 큰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 [2] 추鄒라 함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존재했던 맹자의 고향 나라의 이름이다. 학계에서는 이 추나라를 노魯나라 산하의 식민지(...) 비슷하게 보고 있다. 국國이라 함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나라'의 뜻. 아亞라고 함은 '버금가다'의 의미로, '공자께 버금가시는 분'이라는 극존숭極尊崇의 표현이다. 성聖이라 함은 앞의 '아'를 받아 '~ 성인聖人'의 의미로 연결되어 '지극하신 성인이신 공자께 버금가시는 성인', 즉 '아성亞聖'을 맹자의 고유 칭호로 만든 것이다. 공公이라 함은 쉽게 말해 공작公爵. 앞에서 굳이 추나라〔鄒國〕를 언급한 것은 바로, 이 '공작'이 제후의 작위이므로 반드시 거할 나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맹자는 자기 고향 나라의 영주로 봉해진 셈.역성혁명의 주창자답군!
  • [3] 위는 삼진에서 갈라져 나온 직후인 전국시대 초기에는 황하 중류 일대를 장악하여 잘 나가는 국가였다. 하지만 방연이 조나라를 치는 틈을 타 제나라의 손빈이 원군을 지휘해 위를 직접 공략한 후 마릉에서 위군을 격멸했고, 이후 진(秦)의 상앙이 황하 서쪽 영토를 탈취하는 바람에 많은 영도를 잃으며 국력이 급격히 쇠퇴한 끝에 수도를 안읍에서 대량(大梁)으로 옮기기에 이른다. 이후 위나라의 별칭이 수도를 따 양이라고도 불리게 되었기 때문에 맹자 첫 장에 등장하는 양 혜왕은 바로 위의 국왕이다.
  • [4] 송나라는 노자하시지요라고 했고, 설나라는 호위병을 구하라고 돈을 줬는데 제나라는 그런 말이 없었으니, 이유 없이 준 돈은 매수하려고 준 돈이다라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송과 설 나라가 정말 저 이유 때문에 줬을 것이라고는 맹자도 믿지 않을 것이고, 제나라 왕도 저 금을 주면서 인사치레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며 송나라에서 받은 돈이 다 떨어져서 설나라에서도 받았다고 하기에는 송나라에서 준 황금 21kg이 너무 거금이란 점을 고려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감은 있다. 때문에 이 대목에서 진진의 질문은 자연스러운 반면에, 맹자의 답변은 영 껄끄러울 수 밖에 없다.
  • [5] 이런 편집방법은 중국 고전의 여러 사상책에서 찾아볼 수 있고, 현대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두 사람이 만나 토론을 나누고 그 결과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책을 저술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싣기 때문이다.비단 맹자뿐 아니라 위키에서도 수없이 많고, 또 끝없이 변화한다.
  • [6] 공자가 태어나고 자랐던, 그 옛날의 노魯나라 지방에 있는 산 이름. 중국 5대 명산의 하나로 동악東岳이라고도 불리운다. 공자는 태산을 좋아하여 자주 소풍놀이(...)를 했다. 《논어論語》에도 태산에 대한 언급이 몇 번 보인다. 하여튼 무지막지하게 큰 산.
  • [7] 발해渤海를 말한다.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의 그 발해가 아니라 요동반도遼東半島와 산동반도山東半島 사이의 바다. 랴오둥과 산둥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하여튼 꽤 큰 바다.
  • [8] 후한대後漢代의 주석가 조기趙岐는, 이 문장은 '어른을 안마해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였다. '나뭇가지를 꺾는다'라고 함은 관절부를 아주 시원스레 주물러서 똑! 소리가 나는 현상을 비유한 말이라는 것. 맹자의 고향인 추鄒나라 및 그 근방의 관용 표현인 듯 싶다.
  • [9] 참고적으로, 순자의 성론性論이 맹자의 성론을 저격(...)하는 포인트는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 부분이라기 보다는 그 저면에 깔린 양지(선천적 도덕 자각 능력), 양능(선천적 도덕 실천 능력) 부분이다. 순자가 부정하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선을 알고 행함'이다. 맹자는 양지, 양능을 말하며 "포대기에 싸여 방긋방긋 웃는 젖먹이 아이라고 할지라도 그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경우는 없으며, 후일 장성하여서는 그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경우는 없다. 육친을 친애하는 것이 인仁이고, 연장자를 공경하는 것이 의義이다. 여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나니, 다만 천하에 두루 미치는 바-즉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연히 지닌 보편적인 덕德-인 것이다"라 하였는데, 순자가 볼 때 '젖먹이 아이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인仁이 아니고 다만 동물적 가족애이며, '장성하여 형을 공경하는 것'은 분명 의義이지만 그것은 순종적 본성의 발로가 아니라, 예禮를 가르친 결과이다. 물론 순자도 인의仁義의 시발점이 맹자가 말한 '양지+양능', 즉 순자 입장에서의 '동물적 가족애', '예를 가르치면 의를 행할 수 있는 자질'-에 있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순자는 인간이 타고난 바 중에는 좋다고 할 만한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이를 '아기의 좋음으로부터 비롯된 아기의 좋음'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어버이의 좋음으로부터 비롯된 아기의 좋음'이다. 아기가 어버이를 사랑하는 이유는 '인仁', '효孝', '인륜人倫'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울면 당장에 어버이가 달려와 토닥여 주고, 안아 주고, 젖 먹여 주기 때문이지, 선험적 윤리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다. 먼저 어버이가 베풂으로써 아이의 사랑, 감성이 촉발된다. 부모-자식의 신성한 관계도 실질적으로는 이익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므로 순자는 말한다: "이익을 좋아하고, 무언가 얻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의 정情이요, 성性이다."
  • [10] 결국 맹자와 순자가 성性을 보는 관점은 한끗 차이다. 맹자는 선善의 자질을 '선'으로 보았고, 순자는 이를 그냥 '계발할 건덕지가 있는 자질'로 보았다.
  • [11] 다만 '제선왕' 입장에서는 맹자의 혁명 이론은 불쾌한 것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선왕이 속한 제나라의 전씨 왕조는 이미 여씨 왕조를 몰아내고 역성혁명을 벌인 '찬탈자'이기 때문이다. 제선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조상들이 버린 찬탈을 긍정하는 이론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 [12] 정몽주는 맹자의 후손인 신창 맹씨 가문의 맹희도(孟希道)와 친했는데, 맹희도의 아들이 바로 맹사성이다.
  • [13] 전문적으로 연구하진 않았다지만, 사실 당송唐宋 학자들의 주된 갑론을박 대상이 맹자였다. 당대唐代의 한유韓愈와 그 제자인 이고李翺가 맹자를 '공문도통孔門道通'의 마지막 귀감으로 추앙한 이후, 송대宋代의 구양수歐陽修, 사마광司馬光, 왕안석王安石, 정호程顥, 정이程頤, 소식蘇軾 등이 맹자를 두고 이 양반이 진정 성인인지(...)를 다퉜다. 사마광은 '맹자는 예를 모른다'라며 『의맹疑孟』이라는 비판서까지 출판하면서 신랄하게 깠고, 구양수는 사마광과 같은 구법당이라서 보수적일 만도 한데 의외로 맹자를 존경했다(사실 구양수는 신법 실시 전까지는 왕안석 편이었다. 왕안석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그를 등용한 이가 바로 구양수였는데, 시행된 신법이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자 가장 강력한 적수 중 하나가 되었다. 구법당의 대표 인사로 꼽혀서 그렇지, 구양수의 정치적 색깔을 보면 개혁가적인 면모가 다분하다. 그가 맹자를 존숭한 것은 이상해 할 일이 못 된다). 왕안석은 '공묘에서 맹자의 제사도 함께 지내야 한다'면서 송대 맹자 존숭의 스타트를 끊었다. 정호, 정이 형제는 말할 것도 없이 주자의 사상적 스승들이니 맹자의 학설을 공자 이래 으뜸으로 쳤다. 소식은 자신의 문학성이 맹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맹자 철학에는 비판적이었다.
  • [14] 맹자는 성선설을 통해 자신이 제시하는 왕도정치가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 부합하는 정치이며 따라서 결코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했다. 또한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반면에 이렇게 실천하는게 어렵지 않은 왕도정치를 실천하지 는 군주는 과감하게 디스했다.
  • [15] 황제 = 아버지, 관료계층 = 어머니
  • [16] 저자가 누구인지는 다소 논란이 있다. 보통은 '여러사람이 썻다고 보기에는 문체가 일관되었다는 점', '맹자 사후의 어휘 등이 보인다는 점' 등으로 인해서, 맹자가 주도하여 쓰고 후대에 교정된 부분이 있다고 본다. 사실 이런식의 저자 논란은 고대에 쓰여진 서적 대부분(논어, 대화편, 아리스토텔레스 서적, 성경 등등)이 겪는 문제이다.
  • [17] 맹자의 1장 1편. 한 마디로 첫 페이지이기 때문에 유명세가 높다. 이게 얼마나 널리 퍼졌냐면 김시습의 시에도 흥부전에도 심지어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보이는 오광대나 들놀음에서 대사로까지 등장한다. 흥부전 -박통 속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맹자 견양혜왕하신데,왕왈수불원천리이래하시니,역장유이이오국호이까. 마상에 봉한식하니, 도중에 송모춘을, 가련 놀보 망하니, 불견상전인가." 놀보가 듣고 하는 말이, "어디 그게 박 속이냐, 정녕한 서당이지. 귀글은 당음(唐音)인데, 강포(江浦)가 놀보 되고, 낙교(洛橋)가 상전되니, 그것은 웬일인고."-. 동래야류 연희본 -'이전에는 대들보 양자를 씨더니 많은 남이 정간목에 다 듈어가고 맹자孟子가 견양혜왕見梁惠王 자자子字를 씨오.'-
  • [18] 그런데 '孟子見梁惠王' 구절을 맹자견양혜왕이라 읽는 것이 워낙 보편화되어서 그렇지, 사실 맹자'현'양혜왕으로 읽어야 옳다. 맹자는 양나라의 혜왕이 예물로써 자신을 초청하자 선비 내지 현자의 예로써 그에 응한 것이니, 곧 왕을 '알현謁見'한 것이다.
  • [19] 원문에서의 叟자는 '늙은이 수'자로, 長老의 칭호이다.
  • [20] 해석 : 成百曉. 《孟子集註》
  • [21] 이 왕(제나라 선왕)은 도살되려는 소가 불쌍해서 차마 볼 수 없다고 하였다.
  • [22] 恒心, 흔들림 없는 도덕적인 마음
  • [23] 이른바 군자삼락
  • [24] 조기(趙岐)의 주: 불효(不孝)에는 크게 3가지가 있는데於禮有不孝者三事첫째는 부모의 뜻에 아첨하여 굽은 것을 따라서 부모를 불의에 빠지게 하는 것이고謂阿意曲從, 陷親不義, 一也둘째는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었는데도 녹을 위하여 벼슬하지 않음이며家貧親老, 不爲祿仕, 二也셋째는 결혼을 하지 않아 후손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니 이중 이 셋 가운데에 후손 없음이 가장 큰 죄이다.不娶無子, 絶先祖祀, 三也。 三者之中, 無後爲大。
  • [25] 맹자는 남녀 관계를 인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 여겨 부모의 허락을 안받고 결혼한 것도 괜찮다고 보았다(...)
  • [26] 王曰, 寡人有疾, 寡人好貨. 對曰, 昔者公劉好貨 詩云, 乃積乃倉, 乃裹餱糧, 于橐于囊. 思戢用光. 弓矢斯張, 干戈戚揚, 爰方啓行. 故居者有積倉, 行者有裹糧也, 然後可以爰方啓行. 王如好貨, 與百姓同之, 於王何有.
  • [27] 孟子對曰, 王好戰, 請以戰喩. 塡然鼓之, 兵刃旣接, 棄甲曳兵而走. 或百步而後止, 或五十步而後止. 以五十步笑百步, 則何如? 曰, 不可, 直不百步耳, 是亦走也. 曰, 王如知此, 則無望民之多於隣國也.
  • [28] 梁나라의 군주가 아니다! 秦나라의 압박을 피하고자 수도를 대으로 천도했기에 혜왕으로 불리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