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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last modified: 2015-04-02 03:11:47 Contributors


이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한자명 안돈(安敦)[1]
출생지 로마 제국 라누비오
생몰년도 121년 4월 26일 ~ 180년 3월 17일
재위기간 161년 3월 7일 ~ 180년 3월 17일

Contents

1. 개요
2. 재위기간
2.1. 고난의 연속
2.2. 황제와 철학
3. 기마상을 남긴 황제
4. 미디어믹스

1. 개요

흔히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많이 불리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다섯 번째 황제. 여기서 철(哲)자는 철학자의 철. 대표적인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중 한명으로 꼽힌다.

자질 있는 자를 양자로 삼아 자리를 물려준 다른 오현제들과는 달리 불초한 친아들에게 물려주었다고 자주 비판받는다. 하지만 다른 황제들은 친아들이 없었기에 양자에게 물려준 것이지 일부러 다른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고, 이런 이유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다 잘했는데 그것만 못했다는 식으로 씹은 세베루스 황제도 결국 황위는 친아들에게 물려줬다. 황위를 물려받지 못한 친아들의 존재가 로마의 정치 구조를 어디까지 파탄으로 몰고갈 수 있는 지는, 다름아닌 디오클레티아누스 은퇴 후의 일이 증명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런 이유로 비난 받는 건 콤모두스가 대단히 책임감이 박약하고 무능했던 황제여서이고 이러한 문제는 세습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킨다는 제정 시스템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이런 걸로 그를 비판하는 학자는 적어도 오늘날엔 없다.

2. 재위기간

2.1. 고난의 연속


그리스 철학자처럼 헌옷을 입고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서 어머니의 골머리를 썩히던 어린시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스 문화 애호가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는 오히려 좋아라 했다고,,,

재위기 동안 힘든 삶을 보내야 했는데, 일단 철학을 논하고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재위기간 내내 이민족과의 전쟁에 시달렸고 황제가 된 이후 계속해서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게다가 당시 로마에는 유행병이 퍼져서 제국은 혼돈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던 도나우 강 방어선에서 그 유행병으로 병사하며 삶을 마감했다. 황제의 무거운 책임을 조금이라도 나눠볼까 하여 친구이자 하드리아누스의 첫번째 후계자 케이오니우스의 아들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황제로 삼았지만 루키우스는 향락에만 젖어 있다가 일찍 죽어버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본인은 득본건 하나도 없고 의동생 덕에 골머리만 더 앓았지만, 이런 선례가 있어 후기 로마 제국은 황제를 여럿 두어서 산적한 난제에 유기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현제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추위에 벌벌 떨며 쿨럭거리면서도 최전선에 항상 나갔으며, 틈틈히 로마로 돌아와서 국정을 보고, 전장에서도 사무처리를 하는 등 성실하면서도 근면한 태도를 유지하였고, 학문에 파묻힌 서생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군사능력을 비롯한 다른 방면에도 유능했다. 그래서 그가 죽기 직전의 로마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서 보헤미아 지역을 평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서 전임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절에 태평성대가 지속됨에 따라 약해진 로마군의 체질을 다시 개선하였다. 워낙 위기가 많아서 그런지 최전선으로 많이 달려나갔기 때문에 이루어진 듯 하나, 이런 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죽고 무능하고 해악한 콤모두스가 즉위해서 나라를 개판 오분전으로 만들어도 국경선은 튼튼했고 외적의 침입도 거의 없었으며, 국경선을 지키는 장군들은 다 제자리를 지켰다.[2] 대규모 내란이 일어난 것은 콤모두스가 측근에게 암살당한 뒤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아들 그 자체를 빼놓고는 나름대로 자신의 사후를 대비한 황제이기도 했다.

그를 죽인 유행병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즉 이 항목의 주인공)가 그 병으로 죽었다고 해서 안토니누스의 역병이라고 불렸는데, 이 병의 정체는 천연두 혹은 홍역으로 추정되며, 총 사망자 수는 4백만 명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부터 로마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국방력이 약화된 주요 이유 중 하나로 이 '안토니누스의 역병'을 꼽는 사람들도 있다.

시오노 나나미가 카이사르형 리더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박한 평가를 한 면이 여기서 불거지는데, 당연히 이 부분은 문제가 있다. 단순히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 당시 병사들을 다루던 태도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그것이 다르다고 문제 있다고 하는 게 아니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카이사르는 쉽게 다루었던 게르만 전역에서 카이사르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걸, 그의 시대에는 카이사르만한 명장이 없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역량이 그 정도도 아니라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볼 수 있는 의견을 내는데 있다.

당시에는 게르만족 사회의 전투력과 동원력 그리고 전략적 안목이 성장해 있었다. 일례로 카이사르만 못지 않을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던 콘스탄티누스조차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래로 대 게르만족 격퇴에 여러 황제의 손을 거치며 백수십 년 동안이나 개편을 거친 로마군 갖고도, 확고한 우위로 통제할 수 있었을 망정 영구히 복속시키진 못했다.

로마 문화와 자신의 정략에 대한 절대적인 우월감을 바탕으로 일을 진행하던 카이사르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괴로워하며 책무를 수행한 마르쿠스를 비교하기 위한 측면이 있다고 해도, 이런 부분은 카이사르 시대의 게르만족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기의 게르만족 자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르쿠스 당시와 트라야누스 당시에는 차이가 또 있기에 트라야누스와 비교해보는 시각도 대단히 문제가 크며, 카이사르의 전쟁 수행 이야기는 전대 황제들의 게르만 정책들을 논하는 연장선상에서 하는 얘기라면 앞서의 이유로 더욱 무리한 서술이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게르만족들에 대해 빌빌댄 것을 그의 군사적 경험 부족으로만 보는 것은, 게르만족 사회의 변화와 로마 체제의 변화에 대해 거의 무지한, 시오노 나나미의 사심만이 반영된 부당한 평가라고밖에는 볼 수가 없다.

물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부족한 군사 경험과, 이를 초래한 안토니누스의 황제 수업에 의구심을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시오노 나나미가 창안한 개인의 주관적 견해가 아닌 그의 일생을 다룬 서구의 다양한 서적과 문헌에서 많은 저자들이 비슷한 입장을 보이는 건 사실이다.[3]

예를들면 정보와 기술의 교류가 높아진 근대에 해당되는 18세기, 19세기, 20세기의 유럽의 대규모 전쟁들은 거의 비등한 전술의 교육을 받은 장교들이 비슷한 무장을 가진 군대를 이끌고 전투와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절조차 타인을 능가하는 재능을 가진 지휘관이 다른 이들을 압도하여 큰 영토를 정복하는 양상이 일어났음을 목격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15개에 달하는 로마 군단병을 투입하고도 마르코메닉 부족을 14년간 제압하지 못한 이유를, 그의 자질 부족에서 찾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예는 아주 적절하다고는 볼수 없는것이 18, 19세기 유럽국가간의 전쟁은 문명권과 비문명권의 식민지 혹은 정복전쟁의 성격을 뛴것이 아니라 같은 문명권 사이의 비약하여 표현하면 군주끼리의 영지 쟁탈전이었기때문에 해당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첨여하지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실제로 국민국가간의 전쟁을 성격을 뛴 1차 대전만 하더라도 전황이 지지부진했고 전쟁사에서 손꼽히는 천재인 나폴레옹조차 스페인을 제대로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예를 들면 아우렐리우스 황제 이후의 로마시대에도 벨리사리우스와 같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수의 병력으로 이미 전술적, 무장수준으로 비등할 다수의 적을 격파한 뒤 정복을 이루어낸 장군이 등장하며, 이를 참고할 경우 정복이 지지부진했던 것을 게르만족의 기량 상승문제로 어떤 이가 와도 피할 수 없다라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당대에 로마가 보인 물량과 자원, 시간 투입을 본다면 전선의 교착상태는 황제가 일개 소대도 지휘해본 적 없는 상태로 대규모 전선을 맡아 군대를 지휘한 반면, 적 게르만족의 사령관은 군사 경험이 풍부하였기에 일어난 일이라 볼 수 있다. 일례로 시간이 지나면서 황제의 지휘 기량이 능숙해지면서 승전을 거듭해 갔으며, 전쟁말년엔 죽음으로 인해 이루지 못했을 뿐 정복을 거의 확실시 할 수 있는 상태로 바꾸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단, 그렇다고 당대 게르만족 사회 및 그 군대의 동원 능력, 무장도, 편제, 예비대 운용 등을 비롯한 군사적 운용 능력의 향상 등을 마냥 도외시하는 관점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리고 저 예의 벨리사리우스만 봐도, 벨리사리우스 시대의 로마군은 다름아닌 훈족 및 사산조 페르시아군을 대상으로 철저하게 벤치마킹했던데다, 당대 로마 제국의 군사학은 여전해서, 적에게 맞는 여러 맞춤형 전술이 가능해졌기에 그런 전과도 낼 수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카이사르나 트라야누스와 같은 사령관이 부임했더라면 반드시 제패가 가능했을 거란 가정은 그들이라도 결코 불가능했을 거란 가정 못지 않게 IF의 영역에 불과하다.

위와는 별개로 시오노 나나미가 당대에 그다지 정숙한 편은 못되었던 파우스티나 황후에 대해서는 대단히 정숙한 부인으로 격상된 평가를 하는데, 이런 정반대의 얘기를 역사서술에 담는 "각색"은 문제 있다 할 수 있다..

2.2. 황제와 철학

참고로 그의 저작이자 훌륭한 철학서라고 인정받는 《상록》은 사실 전쟁터에서 쓴 것이다. 남경태의 경우, 이름 남길 방법이 없으니 최후의 수단으로 책을 써서 간신히 현제에 들어갔다는 해석도 할 정도. 게다가 그 후임을 이용해 비교우위까지 썼다는 농담까지.

현대에 와서 이 명상록은 자기개발서적인 명언집으로 잘 팔려나간다. 현대인이 보기에 내용이 주로 '아 이딴 논리로 정신승리하다니 난 참 찌질하구나. 그냥 내 삶을 반성해야 쓰겠다'여서, 보통 사람들이 사회생활 하면서 느끼는 짜증과는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위로가 되는 책이다.[4]

앞서 말했지만 도회지에서 책과 씨름하며 사색에 잠기고 싶은 사람이 북방의 최전선에서 칼바람 맞으면서 냄새나는 금발야만족과 혈투를 벌여야 하니 짜증이 안 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거기에 더해서 명상록에 현실 푸념만 하고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으면 또 모를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다 했다. 국가 재정이 부족하면 선대 황제로부터 물려받은 황실 창고를 열어서 팔아넘겨 재정을 보충했고 몸이 건강한 편은 아니지만 전쟁이 필요하다면 게르만 땅으로 가서 전투를 진두지휘하다 건강이 악화되서 죽었다. 그 와중에 틈틈히 황제로서 시민들의 송사도 맡아 이런저런 현명한 판결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심지어는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시오노 나나미도 몇몇 판결을 인용하며 과연 상식적이라고 평했을 정도. 여러 자연재해나 질병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런건 현대국가도 어떻게 해결 못하는 부분인데 그걸 고대제국의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건 좀 무리한 면이 있다.

더군다나 스토아 철학의 핵심은 '공공에 대한 헌신'이고 로마의 지도층을 이끌어가며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지탱해온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5]상록》의 주된 내용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에서오는 짜증,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극복과 같은 개인적인 내용도 있지만 공공에 대한 헌신 또한 굉장히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상적인 황제로 여겨지고 후세에도 유명하며 당대에도 많은 황제들이 그의 정치를 이어 받겠다고 한것도 그가 로마 제국을 지탱해온 '스토아 철학'의 완벽한 구현자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신은 철학적인 두뇌에 허약한 육체를 타고났음에도 자신에게 맞겨진 황제라는 직책에 맞게 공공을 위해 허약한 몸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수많은 전투를 지휘했으니까.

이런건 누군가가 말하는 "단순한 이미지 관리"가 아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당대에도 으로 유명했고, 심지어 그에게 반란을 선포한 자도 그가 덕이 있는 황제라는 것은 부인하지 못했으며, 고작 내세운 명분이 그가 눈이 어두워서 간신을 써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라고 할 정도였다. 일반 백성들의 이미지도 산사태처럼 쏟아진 위기를 연약한 몸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다 해결하고 하얗게 다 타서 쓰러진 황제일 정도였으니...후대의 군인 황제들이 즉위할 때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를 본받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이상적인 황제상으로 여겨졌다.

3. 기마상을 남긴 황제


그의 생전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는 마르코만니 전쟁을 기둥에 묘사한 부조화(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둥. 현재는 키지 궁전 앞 콜론나 광장에 위치.)와 청동 기마상이 남아있는데, 이교도 문화 척결로 수많은 황제들의 청동상이 파괴되었으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은 교회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마상인줄 알아서 라테라노 대성당 옆에 있었음에도 녹이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로마 캄피돌리오 언덕을 정비할 때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을 캄피돌리오 광장 가운데에 갖다 놓았고, 그 후로 수백 년 동안 광장을 지키던 기마상은 현대의 대기오염으로 인한 부식을 피하기 위해 진품은 인근의 카피톨리니 박물관으로 옮기고 복제품으로 교체했다.

여러모로 안습한 삶을 살다 간 황제지만 그래도 리그베다 위키에선 오현제 중 가장 처음으로 작성되었다.

4. 미디어믹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등장하는 늙은 로마 황제가 바로 이 인물이다. 로마 공화정의 전통 부활을 논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상록에서 그의 공화주의적인 성향이 일부 드러나기는 하지만, 공화정 부활을 꾀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의 설정이다.
명상록
만화 테르마이 로마이에서는 소년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도 인정할 정도로 매우 현명한 인재로 등장하며, 본래는 황제 자리를 물려줄 생각까지 했으나 아직 나이가 어려서 세습은 포기하고 대신 중신으로 기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실제로는 황제 자리까지 올라가지만. 만화에선 안토니우스 피우스가 즉위하는 장면까지 나오는 관계로 그 이상은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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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서기 166년에 중국 나라에 '서방 대진국 왕 안돈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단 로마 쪽에서는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은 커녕 중국에 로마와 맞먹는 한나라라는 대국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정황이 많다. 따라서 로마 상인이 교역을 요청한 것을 한나라에서 조공 사신으로 이해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 [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기간 동안 지겹게도 게르만족과 싸운 탓에 게르만족 또한 전력 소모가 심하긴 했다.
  • [3] 단, 그들은 시오노 나나미처럼 이런 부분에서 구태여 "카이사르"를 들먹이진 않는다. 즉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을 쉽게 박살냈는데 마르쿠스는 못했으니 무능하단 소리는 안 한다는 것이다.
  • [4] 철학사적으로 이는 고대 헬레네 철학과 레니즘 철학의 차이를 나타내는 부분이다.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영 문제 있는 시각이다. 실제로는 복잡하고 거대한 제국에서 황제라 하더라고 한 사람이 무언가 세상을 바꾸기는 힘들어졌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면에 침잠하는 경향성을 이 사람도 보였던 것이다. 단순한 비현실적 몽상이 아니라, 체제 앞에서 무력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취하는 정신승리라는 면에서 까지만 말고 이해하자. 대인도 고대 그리스처럼 소규모 공동체가 아니라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 사람과 처한 상황이 비슷해서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상록》에는 스스로가 황제이면서도 별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한탄하는 것도 나온다.
  • [5]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제국의 지도층이 공공건축 등에 심취한것도 스토아 철학의 영향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들의 성취욕이라고 주장했지만 공공건축, 공공에 대한 봉사등이 성취할만한 위업이 된것 또한 당연히 스토아 철학의 영향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간혹 스토아 철학이 로마의 지도층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틈만 나면 강조하는 것과, 필요한 언급을 안 하는 건 전혀 상관없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