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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왕국

last modified: 2015-11-23 03:08:39 Contributors

동중국해 남단의 류큐 제도를 영토로 하여 왕정 체제를 꾸렸던 나라였다. 현재는 일본에 합병돼 있으나 여전히 그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원래 류큐는 독립 왕국으로 명에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조선에도 간간이 조공을 바치거나 표류한 어민들을 송환하는 등 동아시아 세계의 비중있는 조연 역할을 맡고 있었다. 현재는 일본의 일부인 오키나와 현으로서 편입되었다.[14] 수도는 슈리(首里)였는데, 미국 통치기 이후 오키나와 현의 수도격인 나하에 소속돼 있다. 왕궁은 슈리성이었다.

Contents

1. 역사
1.1. 역대 국왕
1.1.1. 류큐 왕가의 이후
1.2. 조선과의 관계
2. 언어
3. 류큐의 심볼들

1. 역사



위 지도에서 아마미, 오키나와, 미야코, 야에야마 도서군(島嶼群)이 류큐 왕국의 영토였다. 이 중 아마미 군도(현 가고시마 현 소속)는 나중에 일본의 사쓰마 번에 빼앗겨, 대외적으로만 류큐 영토인 척을 하고 실제로는 일본 에도 막부와 사쓰마 번이 지배하는 땅이 된다.

류큐 제도의 역사의 출발점으로 보는 때는 공식적으로는 12세기경이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에도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북단의 아마미 섬의 경우 이나 왜의 중계 무역을 했다는 설도 있으며, 한국의 선우영준이라는 교수는 울릉도에 있었던 우산국의 주민들이 이 일대로 이주해 와서 지배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지만, 12세기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하다 할 만한 사료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설로 잡히는 내용은 없다. 사실 현대에 들어 중립적으로 류큐사를 연구하는 일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조선사를 연구하는 일이랑 똑같은 짓이기 때문에... 2007년엔 고려삼별초가 류큐로 건너가 류큐 왕국을 건설했다는 떡밥이 던져졌고 #, 또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 류큐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한 근거는 없어 믿기 힘들다. 고려의 기와가 발견된 걸로 보아 고려인의 이주와 정착은 사실로 보이나 아직까지는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였는지를 가늠하기엔 부족한 면이 많다.

일단 12세기 이후부터는 사료가 있기 때문에 이전은 그냥 각지의 토호들이 오랫동안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은 일본 규슈에서 류큐 지역으로 이주가 있었고, 그 이후로 교류가 제한돼 언어도 변하기 시작하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따라서 독자적인 역사 기록이 등장하는 이후부터 정식 류큐사로 취급하는 모양. 초기에 국가가 형성될 때에 슌텐(舜天·순천), 그 뒤를 이어서 에이소(英祖·영조)의 왕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의 역사는 실제 사실과 전설이 섞여 있어서 슌텐과 에이소 같은 인물들이 실존 인물인지도 확실하진 않다. 있긴 있었으니까 전설이 생기지 않았겠나 하는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슌텐의 경우 16세기부터 류큐 문헌에 이름이 전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일본사무라이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為朝)라고 적혀 있다. 일본의 유명 무사를 류큐 첫 왕이라는 슌텐의 아버지로 하는 것은 일종의 숭조 사업(崇祖事業)의 일환으로 보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얼마나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류큐인 스스로 일본인과의 연관성을 주장한 셈이다. 그래서 류큐가 일본에 합병된 다음에 이 이야기는 일류동조론(日琉同祖論), 즉 일본인과 류큐인의 조상이 같기 때문에 일본이 류큐를 지배하는 게 정당하다는 논리를 펴는 근거로 악용되었다(...). 자책골[15]

이후 이 왕통이 갈라져 삿토(察度·찰도) 왕통의 주잔(中山·중산), 오사토(大里·대리) 왕통의 난잔(南山·남산), 하니지(怕尼芝·파니지) 왕통의 호쿠잔(北山·북산)[16]의 세 왕국이 공존하여 이 시대를 산잔(三山, 삼산) 시대라고 한다. 참고로 1372년 명나라가 류큐에 사신을 보내 조공과 입조를 요구하자 삿토가 이를 받아들여 조공했다고 한다. 이 삿토의 통치기인 1389년에는 멸망직전의 고려에도 사절을 보냈다.[17]

삼산 시대의 혼란기 와중에서 산남의 왕이었던 온사도(溫沙道)라는 이가 조선 태조에게 망명했는데, 중산왕 삿토가 사신을 보내 그를 보내달라고 청했다는 기록이 태조실록에 실려 있다.# 일본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온사도를 난잔의 초대 왕인 쇼삿토(承察度·승찰도)로 보는 경우가 많다.[18] 태조실록의 이후 기록에 따르면 그가 조선에 망명하게 된 원인이 중산왕에게 축출당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19] 정확한 사정은 류큐 측의 기록이 부실하여 알기 어렵지만, 류큐가 셋으로 갈라져서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다투는 혼란기였음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429년 주잔에 제1 쇼씨(尚氏·상씨) 왕조가 시작되어 1470년까지 이어졌으며, 산잔 시대를 끝내고 오키나와를 하나의 류큐 왕국(유구국)으로 통일했다. 주잔이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류큐의 왕은 삼산 시대에 책봉 받은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의 칭호를 훗날 류큐가 일본에 합병돼 나라가 망할 때까지 사용한다. 명나라청나라로부터 대대로 그 칭호로 책봉 받았고 조선 등 다른 나라에 국서를 보낼 때도 이 칭호를 썼다. 또한 주잔(중산)은 류큐의 별명이 돼서 류큐 역사서 제목에 들어가기도 했다.[20] 류큐는 나라, 조선, 일본은 물론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까지 사절을 보내고 상인들이 활동했다.

1470년 궁정 쿠데타가 일어나 제2 쇼씨 왕조가 성립되는 데, 1477년 즉위한 왕조의 3대 왕 쇼신(尚真·상진)은 1526년까지 50년이나 재위하며 중앙집권의 확립, 지방 호족의 슈리(首里) 거주 정책, 불교 장려, 고유의 신녀(神女) 조직 확립, 지방 호족의 반란 제압으로 통일 국가 유지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쇼신이 죽은 뒤에도 한동안 류큐는 번영을 누렸는데, 1531년에는 오키나와 연구에 중요한 서적인《오모로소시》[21]가 편찬되기도 했다(《오모로소시》는 아마미 섬에 전해지는 ‘오모로(オモロ)’를 채집해 편집한 오키나와 최고(最古)의 가요집으로 전 22권에 노래는 1554수다. 제1권은 1531년, 제2권은 1613년, 나머지는 1623년까지 편찬되었다).

통일 직후에는 동남아시아, 일본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에는 조공을 바치고 왕의 책봉을 받았고,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22]

아시아 북단과 남단의 한가운데에 있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16세기까지 아시아 지역의 해양 허브국가로 상업을 진흥시켰다. 이후 유럽의 해양 진출과 맞물려 포르투갈스페인, 네덜란드 상인과도 교류할 정도로 번성했다. 당시 중계무역으로 뻗어나가는 류큐국의 자신감을 반영한 유물로는 슈리성 국진량의 종(1458년)에 적힌 명문(銘文)이 있다. 만국진량의 뜻 자체가 '세계의 여러나라를 잇는 가교'라는 뜻. 이 명문엔 주변의 나라에 빗대 류큐를 미화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흥미롭게도 삼한(三韓)을 명나라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어서 고려·조선을 가장 좋아했던 게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명문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류큐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하여 삼한(三韓=조선)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명나라)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일본)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봉래도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23]

그러나 1540년대 포르투갈인들이 동남아에 도착한 뒤 점차 대외 교역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1570년에 즈음하여 거의 단절되었다.

16세기 말에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위기가 찾아온다. 1591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군대를 보내 조선 침략군을 위한 군량미 제공을 강요하기도 했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력을 재정비하는 과정에, 당시 규슈 남단(지금의 고시마현에 있었던)의 쓰마 번이 1609년 류큐를 침공, 속방으로 삼음으로써 류큐는 일개 종속국가로 전락한다.[24] 그러나 당시 에도 막부쓰마 번은 교묘한 정책을 펴서 여전히 명나라(후대에는 청나라)가 류큐를 책봉하여 조공무역을 하도록 하고, 실질적으로는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쇼군과 쓰마 번의 시마즈 가문의 통제를 받도록 했다. 즉 2중(혹은 3중) 통치 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이후로 조정이 일본이 명에 조공하는 것을 금지하여 일본의 무역이 곤란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 주변의 나라들은 필요한 사치품의 대부분을 중국과의 조공을 통해서 조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조선과 달리 힘에 의한 지배를 하고 있던 일본은 권력자가 지배층을 단속하기 위한 사치품이 절실했다[25]. 다시 돌아와서,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에도 막부와 사쓰마 번은 류큐를 침략해 정복하면서도 중국에는 이 사실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류큐의 이름으로 중국에 대한 조공을 통해 사치품이 들어오면 일본은 이것들을 가로챈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이나 중국 역시 어느정도는 눈치채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인조실록을 참조해보면 이미 조선에서도 류큐가 일본에 신복(臣伏)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신을 보낸 기록을 찾아보면 명·청이 사쓰마번 침공 이후 두 나라를 대우하는 것을 보면 꽤나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쓰마번 침공 이후 류큐에서는 사쓰마번에 조공을 바치게 되는데, 15세기 이후 중개무역이 쇠퇴한데다[26] 류큐 자체에서는 그 조공의 양을 감당해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류큐 정부는 본토[27]이외의 구메지마, 야에야마 제도 일대에 사람 수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인두세를 납부하게 한다. 이 인두세가 매우 가혹했기 때문에 사람 수를 조절하기 위해 섬 자체적으로 사람을 모이게 한 다음 늦게 오는 사람들을 죽인다던지, 낙태를 유도한다던지 하는 매우 안습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류카(琉歌)[28]에서도 이런 끔찍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노래들이 많으며, 훗날 일제의 류큐처분 당시 인두세가 폐지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병합을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오키나와 일대에 인두세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190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 끔찍한 인두세는 폐지되게 된다.

그래도 아마미 군도 이남의 류큐제도 내에서의 통치는 허용되어 왔지만, 메이지 유신이 이뤄져 폐번치현 등으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시작한 일본 신정부는 1872년 류큐를 번으로 강등시키고 '유구국 중산왕' 쇼 타이(尚泰·상태)를 '유구번왕(琉球藩王)'으로 만듦으로서 류큐가 일본의 속령임을 확실히 선언했다. 이것을 '제1차 류큐 처분'이라고 한다.[29] 쇼 타이는 이 조치에 반발하여 청나라에 계속 '유구국 중산왕'의 명의로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아 왔는데,[30] 그러다가 대만에 상륙한 류큐인들이 현지 원주민들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청나라를 떠보기 위해 1874년 대만에 출병을 하였다. 청나라는 자기 영토인 대만에 일본군이 상륙하였으니 반발하긴 했으나 류큐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일본은 이로써 청나라가 류큐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합병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끝냈다.

마침내 1879년, 일본 정부는 500여 명의 군경을 파견해 류큐 번을 없애고 가고시마 현에 잠시 편입시켰다가 오키나와 현을 설치했다. 이와 동시에 쇼 타이 왕을 도쿄에 압송하였다. 이를 '제2차 류큐 처분' 이라 부른다. 쇼 타이는 강등돼서 후작에 봉해졌다. 이로써 1429년 오키나와 섬 통일 이래 450년에 이르는 류큐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당시 미국의 전직 대통령인 율리시스 그랜트는 이 소식을 접하고 깜짝 놀라 지체없이 청나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청나라에 도착해서 조정 내 실력자인 이홍장을 만나 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했는데 정작 이홍장은 시큰둥해 했다고 하며, 그랜트가 계속 설득하자 "정 그렇다면 당신이 한 번 일본과의 교섭을 주선해 보시구려"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그랜트의 주선 하에 청일 간 교섭 과정에서 류큐 3분안(그랜트의 중재안)[31]과 2분안(이토 히로부미의 제안)[32] 등이 나왔으나 결국 결렬되었다. 그래서 결국 그대로 일본 영토로 확정되고 말았다. 당시 청나라가 해양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류큐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부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33]

그래도 어쨌든 일본의 류큐 병합은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간섭에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펴게 된 동기를 제공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1876년에 일본 대표단이 청나라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부)을 방문하여 강화도조약의 '조선은 자주국'(제1조) 조항을 보여주자, 총리각국사무아문 측은 조선은 본래부터 그런 나라였다면서 그 표현이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중국에 의지했던 류큐가 한 방에 일본에 넘어가자 베트남이나 조선 등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류큐 처분은 정북향에 있는 어떤 나라에서 31년 후에 똑같이 진행된다.[34][35]

류큐의 강제병합은 주변국의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유운동(일본 유학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36]을 주도한 것으로 곧잘 언급되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판 보이 쩌우는 '유구혈루신서(琉球血淚新書)'를 써서 류큐의 망국사를 언급하며 독립이 왜 중요한가를 자국민들에게 깨우치기 위한 사례로 언급하기도 했고, 조선에서도 류큐가 강제병합되어 일본의 한 현으로 격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의 역사는 오키나와, 아마미 군도, 류큐 독립 운동을 참조할 것.

1.1. 역대 국왕

1.1.1. 류큐 왕가의 이후

제 2차 류큐 처분(1879) 이후 쇼타이 왕은 강등돼서 후작에 봉해졌다. 귀족 작위는 1947년까지 존재했다가 폐지되었으므로, 그때까지 쇼 타이의 후손들이 후작 작위를 세습했다.[37] 이후에는 별도의 작위가 없이 후계자들이 쇼 씨 가문을 계승하고 있다. 마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옛 황제의 후계자를 지정해 옛 전통과 문중 재산을 계승하는 것과 같다. 현재 제2 쇼 씨 왕조의 계승자는 쇼 타이 왕의 고손자(현손)인 1950년생 쇼 마모루(尚衞·상위)# 씨이다.

한편 제 2차 류큐 처분 당시 우둔(御殿)[38]은 28개 가문(왕자(王子, 직계왕족) 가문 2, 아지(按司, 방계왕족) 가문 26)이 있었다. 일본은 왕자 가문이던 나키진우둔(今帰仁御殿)의 당주(쇼타이 왕의 동생 쵸부(朝敷))와 오랜 세습 가문인 이에우둔(伊江御殿)의 당주에게 남작 작위를 주었고, 쇼타이 왕의 차남 쇼인(尚寅)[39]과 4남 쇼준(尚順)에게도 남작 작위를 주었다. 하지만 아지 가문들에게는 사족(士族)으로 지정했을 뿐 작위를 주지는 않았다. 왕공족제도의 프로토타입

1.2. 조선과의 관계

정부공식과는 달리 일부지역에서는 이전부터 알고지냈다고 한다, 수백년동안 지속된 동맹 우호국가로서 시작은 류큐에서 먼저 찾아왔다고 한다. 일본의 강제합병이전까지 조선왕조까지 을 하던 관계였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에는 유구국(琉球國)이라고 나온다.[40] 꾸준히 사신과 예물을 보내면서 교린하였지만[41]유구국이 사쓰마 번에 정복된 뒤에는 교류가 줄어들어서 거의 없어졌다. 이와 관련해서 조선왕조실록과 류큐쪽 자료를 근거로 조선과 유구의 상호교류와 상호인식을 시대순으로 분석한도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해도 좋다.

류큐 일대가 현재는 일본에 소속돼 있지만 과거에는 별도의 국가를 이루었던 점 때문에 한국의 제주특별자치도(옛 탐라)와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 두 지역은 과거에도 지리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도 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에 제주도 사람들이 류큐로 표류하거나 반대로 류큐 사람들이 제주도로 표류하기도 했기 때문에 조선과 류큐 양국 간에 이런 사람들을 상대국에 돌려 보내는 일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광해군 시절에는 류큐 왕자가 보물을 싣고 항해하다가 제주도에 표류하기도 했는데, 당시 제주도의 탐관오리들에 의해 목숨을 잃는 사태도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이 사실이 한양의 조정에 알려져서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다가 흐지부지 됐었던 듯.[42] 지금도 이에 관련하여 제주도에는 설화가 전하고 있기도 한다.

2. 언어

1872년까지는 일본과 다른 나라였기 때문에 일본 본토의 일본어와 구분되는 언어 또는 방언들이 쓰여 왔다. 이들을 일본어의 류큐방언군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일본어(류큐 지역의 말을 제외)와 류큐어로 나누고 이 둘을 일본어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자세한 사항은 류큐어 참조.

중국 측에서는 류큐와 중국의 민족적, 언어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중국 환구시보는 "과거 오키나와 주민 대부분은 중국 대륙의 푸젠 성, 저장(浙江)성, 대만 출신이며, 언어와 제도도 중국대륙과 같았다"고 했다.[43] 류큐의 지정학적 위치상 역사적 중국에서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고 많은 인적 교류가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류큐 민족의 주류는 절대로 중국계가 아니다.

3. 류큐의 심볼들

오키나와 현의 상징이나 류큐 독립 운동의 상징은 여기에 수록하지 않았다.


류큐 왕가의 문장인 히다리 미쓰도모에(左三巴)


19세기 중에 제정돼 1875년까지 사용된 류큐왕국(유구국)→류큐번의 기. 방사선 주의 표지와 헷갈리지 말자.


1875~79년에 사용된 류큐번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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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류큐 '왕국'과 같은 표기는 현대의 명칭이다.
  • [2] 류큐 왕국이 명나라에 의해 공인되기 이전에는 어원 불명의 流求로 기록되었으나, 이 표기가 쓰였던 당시에는 현재의 오키나와가 아니라 대만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는 게 다수설이다. 중국인들의 지리 인식이 빈약하여 대만과 오키나와를 구분하지 못하다가 명나라 초기에 流求(흐를 유, 구할 구)의 표기를 좀 더 그럴 듯하게 고친 琉球(유리 유, 공 구. 유리공 유리 구슬)를 오키나와 일대의 왕국의 이름으로 공인하게 되었다.
  • [3] 현대의 표기. 당대에는 '왕국'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 [4] 琉球國의 발음.
  • [5]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어 표기법으로는 りうきうこく로 적고 발음은 현재와 동일했다.
  • [6] 琉球王國의 발음.
  • [7]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어 표기법으로는 りうきうわうこく로 적고 발음은 현재와 동일했다.
  • [8] 琉球國의 발음이다. 琉球王國의 발음은 추가 바람.
  • [9] 琉球國의 발음.
  • [10] 현행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류추'로 쓰게 돼 있으나 '리우치우구오'나 '리오우치오우구오' 정도로 들린다.
  • [11] 琉球王國의 발음.
  • [12] 북한에서는 두음법칙을 폐지했으므로 류구(왕)국이라고 읽을 듯.
  • [13] Ryukyu의 과거 표기로는 Lewchew, Lew Chew, Loochoo 등이 있는데, 표준중국어 발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 [14] 원래 류큐 왕국의 최대 영토는 현재 가고시마 현에 소속된 아마미 군도까지 포함됐었다. 하지만 이후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침공, 결국 류큐 왕국이 아마미 군도의 지배권을 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마미 군도 항목을 참고할 것. 2차대전 직후 미군은 류큐를 일본에서 떼어내고 미국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만들었는데, 오키나와 현과 아마미 군도는 물론이고 한 번도 류큐의 지배에 들어간 적이 없는 카라 열도까지 류큐에 포함시켰다가 1950년대 초에 도카라 열도와 아마미 군도를 차례로 일본에 반환했다. 그래서 미국이 세운 류큐 정부의 관할 범위는 오키나와 현으로 축소되었고, 이후 1972년에 오키나와 현도 일본에 반환된다.
  • [15] 참고로 일류동조론의 조선 버전이 그 유명한 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다. 물론 한국인들은 스스로 일본을 상대로 자책골을 넣진 않았다(...). 기자조선이랑은 조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나? 일선동조론·일류동조론의 아류작으로는 일본인과 유대인의 조상이 같다는 유동조론(日猶同祖論)이 있는데 일종의 도시전설로 취급된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단, 일유동조론은 일본인만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게 아니라 유대인 중에서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을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주장한 적은 없다는 점에서 일선동조론·일류동조론과 차이가 있다.
  • [16] 여기서 발음 표기는 현대 표준 일본어 발음에 의거한 것이고 류큐어 발음으로는 차이가 있다. 글자를 뒤집어서 산추(山中·산중), 산호쿠(山北·산북), 산남(山南·산남)으로 부르기도 한다. 명나라에서 채택한 명칭은 표현은 중산·산남·산북이다.# 중산·남산·북산이라고 하든가 산중·산남·산북이라고 하지 일관성이 없다. 그래서 각각의 왕이 유구국 중산왕, 유구국 산남왕, 유구국 산북왕으로 책봉되었다.
  • [17] 류큐 왕국이 삼별초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해당 항목 참조.
  • [18] 왕통의 이름인 '오사토'와 '온사도'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 애초에 오사토(大里) 자체가 쇼삿토의 다른 표기이다. 참고로 쇼삿토는 실록에 기재된 표기이다.
  • [19] 참고로 오늘날 류큐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숙부 오에이지(汪英紫·왕영자)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는 설도 제시하고 있다.
  • [20] 《중산세감(中山世鑑)》, 《중산세보(中山世譜)》 등이 그 예이다.
  • [21] おもろさうし라고 적지만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어 가나 표기 방식으로 적은 것이다. 그래서 おもろそうし(う는 장음 표기)로 읽는다.
  • [22]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한국사에서 이 나라가 가장 자주 등장하는 시기는 조선 초기와 일제강점기 이후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류큐가 스스로 신하라고 칭하고 공물을 바치는 기록들이 보인다. 간혹 조공을 일방적으로 한쪽이 바치기만 하는 걸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조공을 받는 측에서 그와 맞먹거나 그보다 많은 하사품을 주게 돼 있다. 조공을 받는 대국이 받기만 하면 쪼잔해 보이잖아. 그래서 조공 무역이라는 용어가 나온 것이다. 조선에서는 류큐가 너무 자주 조공을 바치는 바람에 하사품을 주느라 부담스러워서 자국에 조공을 바치는 횟수를 제한하는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 [23] 琉球國者, 南海勝地, 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 以日域爲唇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異産至寶, 充滿十方刹.
  • [24] 1993년 NHK에서 대하드라마로 방영한 '류큐의 바람 드래건 스피릿(琉球の風 DRAGON SPIRIT)'이 이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진순신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 일본인으로 살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형과 류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애쓰는 동생의 갈등과 향토애를 그린 작품이다.
  • [25] 한 핵실험 이후에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 보석, 명품, 고급 자동차 등의 사치품에 대해 금수 조치를 내리자 발작적인 반응을 보였던 북한을 기억해보자.
  • [26] 명의 해금정책 해제, 포르투갈등의 서양세력 동남아 유입등이 큰 원인이 되었다.
  • [27] 오키나와 섬 일대. 류큐어로는 우치나 섬
  • [28] 류큐의 전통 노래.
  • [29] 이전까지 유구국(琉球國)이라는 이름은 외국의 이름이었고 발음을 전부 음독(音讀)으로 읽어서 류큐코쿠(りゅうきゅうこく, 당시의 가나 표기대로는 りうきうこく)라고 읽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일본인들이 유구국(琉球國)을 '류큐 번' 일대에 설치된 일본 국내의 쿠니(國)처럼 간주하게 되었다. 쿠니는 고대에 령제가 도입될 때 일본 전국에 설치된 행정구역인데, 당시에는 형식화된 행정구역이었다(실질 행정구역은 '번'이었는데, 본토는 폐번치현을 실시한 뒤 번 대신 '현'으로 대체). 이 때부터 유구국(琉球國)은 이전처럼 '류큐코쿠'로 읽지 않고, 마지막 부분은 훈독(訓讀)으로 바꿔서 '류큐노쿠니(りゅうきゅうのくに, 당시의 가나 표기대로는 りうきうのくに)'라고 부르기도 했다. 율령제에 따라 설치된 행정구역으로서의 國들은 國 부분을 대개 '~노 쿠니(~のくに)'라고 읽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오키나와에 대해 류큐노쿠니라는 쿠니를 설치했다고 명시한 적이 없고, 이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사례를 유추하여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차피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쿠니를 사용하는 일이 사실상 없어지고 새로운 행정구역에 적응해서 큰 의미는 없다.
  • [30] 일본의 관점에서는 류큐는 일개 번에 불과하니 류큐의 조공 무역이 '밀무역'으로 간주되었다(...).
  • [31] 류큐를 셋으로 쪼개서 서남부의 미야코와 야에야마 제도는 청이 먹고, 동쪽의 아마미 군도 일본이 먹은 다음에(어차피 아마미 군도는 이미 일본이 실질 통치해 온 지 오래였다), 중부의 오키나와 본섬은 독립을 회복시키되 청·일간 공동 관리 하에 두자는 제안이었다.
  • [32] 류큐를 둘로 쪼개서 서남부는 청이 먹고 나머지는 일본이 먹는 방안.
  • [33] 상세한 내용은 이 기고문에서 볼 수 있다.
  • [34] 실제로 류큐의 병합은 조선의 병합에 대비한 예행 연습의 성향이 강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구체제의 질서속에서 류큐의 위치는 실제야 여하튼 합병되는 그 순간까지도 일본보다 높았기 때문에, 조선을 병합시의 청의 대응을 보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그외에도 민족말살통치 같은 방법도 죄다 류큐에서 실험해보고 조선에 적용한 방식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의 치밀함이 드러나는 장면이고, 그보다 더 강렬한 것은 식민지 경영의 마루타가 된 류큐의 처절함이다. 더욱 가혹한 점은 식민지들중 유일하게 주권을 되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류큐는 일제시대에 일본 법률상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內地), 즉 본토로 취급되었다.
  • [35]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로 현 일본 영토 내의 아이누족의 땅을 완전히 지배하에 두긴 했지만 아이누족은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국가를 세운 적이 없다. 하지만 류큐는 미국과 조약을 체결할 정도로 국제적으로 존재가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가장 먼저 합병한 주권 국가가 되었다. 단 류큐는 내지(內地), 즉 본토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할양 받은 대만이 일본의 첫 식민지였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오키나와도 식민지나 마찬가지였지만...
  • [36] 이 운동은 결국 프랑스의 압력을 받은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로 끝났다.
  • [37] 쇼타이(1885~1901) -> 쇼텐(尚典, 1901~20) -> 쇼쇼(尚昌, 1920~23) -> 쇼 히로시(尚裕, 1923~47)
  • [38] 원래는 류큐 왕족의 저택을 일컫는 말인데, 그 집 주인에 대한 존칭으로도 쓰였다.
  • [39] 기노완우둔(宜野湾御殿)의 시조
  • [40] 당시 공식 표기가 이거였다. 류큐 왕국이니 하는 명칭은 현대에 이 나라를 부를 때 쓰는 이름이다. 동아시아에서 제국, 왕국, 공국, 민국/공화국 같은 표현들을 국호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시작한 것은 서양의 관례가 동아시아에 유입·정착되면서 이뤄진 것이다.
  • [41]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유구왕 찰도가 조선에 신칭한적도 있고 조공을 먼저 바치거나 광해군에게 명나라에 왕작을 받은것을 알리며 조선은 형,유구는 동생이라고 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42]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있다.#
  • [43]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3987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