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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우차오 사건

last modified: 2015-01-24 14:05:27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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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gou_battle.jpg
[JPG image (Unknown)]

루거우차오 다리 위의 국민당 군대

Contents

1. 개요
2. 전개
3. 음모론
4. 기타

1. 개요

盧溝橋事件.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 중국에서는 7.7사변(七七事変)이라 부른다.

이 사건의 배경이 된 '루거우차오 (卢沟桥, Lúgōu Qiáo)'는 베이징 시에 있는 다리의 이름으로, 한국 한자음으로 읽어 '노구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양에선 마르코 폴로가 이 다리를 언급했던 탓에 '마르코 폴로 다리'라고도 부른다.

2. 전개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하고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웠다. 그 이듬해에는 러허 성(오늘날의 허베이 성 동북부)까지 차지하여 점점 베이징(당시는 베이핑)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37년,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루거우차오는 국민당의 입장에서나 일본군의 입장에서나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었던 탓에 쑹저위안이 지휘하는 국민당군 제29군의 일부와 일본군이 다리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7월 7일, 야간훈련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병사 한 명이 실종되었다.[1] 일본군은 발칵 뒤집혔지만 실종된 병사는 20분 뒤에 돌아와서 "똥 싸느라 늦었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사실은 감쪽같이 숨긴 채 중국군에게 실종 병사를 찾기 위해 중국군 주둔지역을 수색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군이 이를 거절하자 연대장인 무타구치 렌야는 독단으로 전투태세를 명령하여 과연 독립군. 이것은 조선독립운동의 일환! 다음날 8일 새벽에 중국군 진지를 포격하고 불시에 공격을 퍼부어 루거우차오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지휘부는 중국군의 루거우차오 철수, 사태 책임자의 처벌, 중국측의 사죄를 요구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전협상에 응하지 않겠다며 되레 적반하장식의 태도를 보였다.

결국 양측의 공방끝에 일단 열린 정전 협상에서 일본은 북경내의 반일운동 세력의 소탕, 루거우차오 사건에 대한 중국측 책임을 인정할 것, 그리고 쑹저위안과 29군 고위장교들의 사과를 요구했고 7월 11일에 일본군 특무기관장인 마쓰이와 중국측의 친더춘 간에 가까스로 3개항의 합의가 이뤄졌다. 그 내용은 쌍방은 즉시 사격을 중지한다, 중국군은 영정하의 우안으로 일본군은 풍대로 철수한다, 원평현성의 수비는 반일성향이 강한 부대 대신 다른 부대를 배치한다 등이었다(마쓰이-친더춘 협정).

그러나 애당초 일본은 협상을 타결시켜서 전투를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미 7월 10일에 일본군 참모본부는 중국 내 주둔군의 방어와 거류민의 보호를 위해서는 북지(중국을 가리키는 당시 일본의 용어)파병이 불가피하다는 보고를 육군성에 올렸기 때문이었다. 마쓰이-친더춘 협정이 체결된 그날 일본 국내에서는 이미 5개 관련부처 장관들이 중국에 일본의 위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3개 사단의 파병이 합의되었고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이를 밀어붙임으로써 중일전쟁이 본격화된다.

결국 사태가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은 장제스는 7월 12일 노산에서 "만일 현재의 사태가 최후의 관두에 다다르면 민족의 역량을 걸고 항전할 결심이다" 라는 담화를 발표해 중국과 일본은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3. 음모론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총성에 대해서는 양국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일본은 '중국군이 자신들을 향해 발포했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고, 중국은 '우리가 쏜게 아니라 일본쪽 진영에서 들리던데?'라는 식.

또한 전투에 들어가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일본은 '중국측의 사격 이후 실종된 병사의 수색에 중국이 합의를 했음에도 그 후 또 한번 중국측의 사격이 있었고, 이로 인해 전투에 들어갔다', 중국은 '애초에 그딴거 합의한 적도 없는데 일본군이 수색을 구실로 부대를 끌고서 쳐들어오길래 반격했다'.

결국 일본에서는 중국군의 우발적 발포로 원인을 돌리고 있고, 중국에서는 싸울 구실을 찾기 위한 일본측의 자작극으로 보고 있는 추세다.

일본 극우파측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음모라는 식의 주장도 내놓고 있다. 가사이 준이치라는 사람이 중국 공산당 음모론의 대표적 인물로, 그는 중국 공산당의 팸플릿에서 "루거우차오 사건은 샤오치(후에 중화인민공화국 제2대 국가주석이 된다)의 지시로 이뤄진 것이다" 라고 쓰여진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가사이가 자기가 봤다는 중국 공산당의 팸플릿 실물을 내놓지 못해서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치부되고 있다.

4. 기타

대만 영화 호소자 2에서 산속에 살면서 할아버지에게 무술만 수련받아서 상식이나 역사는 도무지 모르는 세 손자를 타이베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려던 할머니가 아이들을 교장에게 데려다주는데 교장이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7월 7일에 벌어진 사건을 토대로 벌어진 전쟁이 뭐냐?" 라는 질문을 한다. 이에 한 손자가 "초류향이 싸움을 벌여 이긴 날이었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답변을 하여 교장을 뒤집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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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참고로 이 중대가 속한 대대의 대대장은 '이치키 기요나오(一木 淸直)' 인데, 바로 과달카날 전투에서 900명을 잘 정비된 미군 진지로 몰아넣어 전멸시킨 그 이치키 지대의 이치키 대좌다(...) 연대장도 대대장도 막상막하로 막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