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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바조

last modified: 2015-04-10 00:23:43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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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이탈리안 판타지스타 퀄리티. 오오.


현재는 미중년이시다.

이름 로베르토 바조
(Roberto Baggio)
생년월일 1967년 2월 18일
국적 이탈리아
출신지 칼도그노
포지션 포워드
프로입단 1983년 비첸차 칼치오
소속팀 비첸차 칼치오(1983~1985)
ACF 피오렌티나(1985~1990)
유벤투스 FC (1990~1995)
AC 밀란 (1995~1997)
볼로냐 FC 1909 (1997~1998)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98~2000)
브레시아 칼치오 (2000~2004)
국가대표 56경기 27골

1993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로베르토 바조
2위
호마리우
3위
데니스 베르캄프
1994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호마리우
2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3위
로베르토 바조
1993 Ballond'or
수상
로베르토 바조
2위
데니스 베르캄프
3위
에릭 칸토나
1994 Ballond'or
수상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2위
로베르토 바조
3위
파올로 말디니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탈리아만 그를 넘버원이라 인정하지 않았다." by 지네딘 지단

"PK를 득점했다는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실축했던 것은 모든이에게 영원히 기억 된다."

브레시아 칼초 영구결번
No.10

Contents

1. 약력
2. 클럽 경력
3. 대표팀 경력
4. 플레이스타일
5. 기타
6. 경력
6.1. 대회 기록
6.2. 리그 기록
6.3. 개인 수상

1. 약력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소위 말하는 판타지스타의 대표적인 선수. 등번호 10번.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시기를 대표하는 공격수. 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거느린 간지폭풍이자 불꽃 남자. 그리고 비운의 축구 스타로 낙인 찍힌 인물.
  • 프로통산 488경기 218골. A매치 56경기 27골.[1]
  • 1993년 발롱도르(유럽 최우수선수) 수상.[2]
  • 1993년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994년 미국 월드컵, 1998년 프랑스 월드컵 3개 대회에서 모두 골을 기록한 이탈리아 축구사상 최초의 선수.
  • 2004년 세리에 A 통산 200골 돌파.[3]
  • 2004년 FIFA 100주년 최고의 선수 100인 선정.

최근 표기법에 맞춰 '바조'로 표기했지만, 사실 '바죠'나 '바지오' 등 쓰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하지만, 표기법이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 "말총머리" 한마디면 다 알아듣는다. 동시기 국가대표 동료 미드필더 디노 바지오(Dino Baggio)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말총머리가 주목받았다.

불교도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정확하게 말하면 SGI(창가학회) 신도. 이것때문에 가톨릭의 본산인 이탈리아에서 그의 개종 루머는 수시로 떠돌았고 "이탈리아인들이 바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설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연을 즐기는데는 보는 것만으론 부족하다며 자신의 농장에서 사냥을 즐긴다.

2. 클럽 경력


고향 비첸차의 유소년 팀을 시작으로, 1983년 6월 5일[4] 세리에 C 비첸차 팀에 데뷔했다. 84/85 시즌엔 12골을 넣으며 활약하면서 팀이 세리에 B로 승격하지만, 1985년 5월 오른무릎의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는다.[5] 그런데 그런 큰 부상중임에도 바조는 그 해 여름에 세리에 A 피오렌티나로 이적하게 된다. 재활을 마치고 1986년 1월 복귀한 바조는 컵 대회로 복귀를 알렸고, 가을에 리그에 정식으로 데뷔... 했는데 곧장 무릎 부상 재발로 7개월 결장. 이런 우여곡절 끝에 바조는 87/88시즌부터 본격적인 피오렌티나의 에이스로 자리잡는다. 이 활약으로 인해 그는 1990년 사상 최고의 이적료 150억 리라[6]를 받고 유벤투스로 이적한다.[7]

유벤투스에서 미셸 플라티니의 10번을 이어받은 바조는 매년 20골 이상을 넣는 준수한 활약을 보인다. 특히 92/93시즌 리그와 대회를 통틀어 30골, 93/94 시즌엔 22골을 기록했는데, 시즌이 아닌 연도 즉 1993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 동안 39골을 넣으며 절정기를 누렸다. 특히 1993년 UEFA컵(現 유로파리그) 결승전 당시 1,2차전을 통틀어[8] 혼자 5골을 때려넣는 원맨쇼로 유벤투스에 유럽대항전 트로피를 안겨주었고, 해당시즌 FIFA 올해의 선수상발롱도르를 휩쓸어버린다.

그러나 바조는 하술된 1994 월드컵의 실축 이후 크나큰 심적 고통을 겪게 된다. 마르셀로 리피[9]는 신임 유벤투스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공개적으로 바조가 팀 전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주전 자리를 차츰 앗아갔다.

설상가상 그해 11월 무릎 부상 재발로 뛰지 못하는 동안, 하필이면 리피가 직접 데려온 애송이 델 피에로가 훌륭히 빈자리를 메꾼다. 94/95 시즌 막바지에 복귀한 바조는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맛보지만, 팀에서 입지는 예전 같지 않았고 결국 잉여 전력외 판정을 받고 팀을 떠난다.

이때 인테르로 이적한단 루머가 파다했지만 결국 1995년 여름 AC 밀란으로 이적하는데, 파비오 카펠로[10] 감독 역시 판타지스타 바조를 탐탁치 않게 여기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95/96시즌 AC밀란이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유벤투스 때와 같이 바조가 우승에 공헌한 바는 미미했다. 다음해 카펠로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를 맡으면서 숨통이 트이는가 했지만, 결국 아리고 사키 감독이 들어온다. 사키 감독은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을 맡았는데... 당시 GK가 퇴장당하자 교체선수로 바조를 빼고 새 GK를 넣은 인물이었다. 망했어요.

96/97 시즌 AC밀란은 리그 11위를 기록하는 부진을 보이며 사키 감독을 해임했는데... 후임으로 카펠로 감독이 다시 왔다. 망했어요. 결국 카펠로 감독에게 전력외 통보를 받은 바조는 볼로냐로 이적, 리그 30경기 22골을 기록하며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한다. 하지만 여전히 볼로냐 감독과 불화(...)를 일으켰다.

1998년 월드컵이 끝나고 바조의 건재함을 확인한 터밀란이 오퍼를 넣어, 바조는 등번호 10번을 받고 이적한다. 그리고 이때 인터밀란에 호돈신 호나우두가 있었다. 축구팬들은 신구세대 최고 공격수 두 사람이 환상의 투톱을 이룬다고 기대와 설레발… 호나우두가 부상크리. 지못미.[11] 이 무렵 인터밀란은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하고 애먼 감독 모가지만 연달아 날렸는데, 결국 작심하고 데려온 승부사가… 마르첼로 리피 감독. 망했어요.[12]

결국 바조는 2000년 들어 무소속이 된다. 안습. 사실 해외 팀에서 제안이 있었지만, 2002년 월드컵에 참가하려면 세리에 A에서 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다행히 2000년 9월 브레시아에 입단해 선수생활을 계속한다. 서른 다섯을 바라보는 나이로 진작 선수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지만, 탁월한 감각은 변함없어 매 시즌 꾸준히 10골 이상은 넣는 페이스를 보였다.

하지만 월드컵을 코앞에 둔 2001년 10월, 왼쪽 무릎 부상으로 3개월 결장. 재활을 거쳐 다음해 1월 복귀했지만 통증 재발로 끝내 수술대에 오른다. 회복까지 최소한 넉달은 넘게 걸린다는 예상이었지만, 바조는 기자들에게 '나는 기적을 믿는다'고 담담히 밝힌다. 그리고 77일 만에 시합에 복귀했다. 복귀한 김에 두 골을 넣었다. 흠좀무.

이전까지 바조의 축구 인생은 사실상 끝났네 어쨌네 하던 축구팬들도 이런 집념 앞에선 결국 포기하고(...) 님이 짱드셈을 선언한다. 안타깝게도 트라파토니 감독은 바조의 몸 상태가 100% 올라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대표팀에 뽑지 않는다. [13] 그러니까 탈락했지.

월드컵이 끝난 뒤로 줄곧 리그에 전념, 2002년 10월 세리에A 400경기 출전, 12월 프로통산 200골을 달성한다. 2003년 바조는 브레시아를 3년 연속 세리에 A에 잔류시켰지만, 7월에 무릎 수술을 받고 11월에 요통으로 장기간 결장하는 등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결국 12월 29일,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2004년 3월 세리에 A 통산 200골을 달성했고, 5월 시즌 마지막 경기 AC밀란 원정시합에서 8만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브레시아에서는 그를 기리며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

3. 대표팀 경력


1988년 네덜란드를 상대로 등번호 11번을 달고 대표팀에 데뷔했다. 바조가 전국구로 이름을 날린 때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으로, 5경기 2골을 기록했다.

이탈리아 월드컵 득점왕을 차지한 스킬라치를 앞세운 이탈리아는 자국민들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고 24강 조예선을 3전 전승으로 가뿐히 통과하고, 16강전 우루과이, 8강전 아일랜드마저 연파하며 4강에 진출했다. 4강 상대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였는데, 1:1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이 경기에서 바조는 선발이 아닌 교체로 출전했는데, 덕분에 감독이 대차게 까였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선 이탈리아가 조예선 탈락을 걱정할 만큼 초반에 극히 부진했다. 사실 E조 조편성이 노르웨이, 멕시코, 아일랜드, 이탈리아로 어느 팀이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하필 네 팀이 똑같이 1승 1무 1패 골득실 0를 장난하냐? 기록해 버렸다. 당시 조 예선은 24강 제도였기 때문에, 조 2위까지 본선 진출하고 3위를 차지한 여섯팀 가운데 네팀이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이런 복잡한 경우의 수(...) 놀이 끝에 가까스로 본선에 올라갔으니, 이탈리아 사람들 성질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팀은 물론이고 그리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 바조 역시 대차게 까였다. 그런데 토너먼트에서 바조가 해결사 본능을 발휘한다.

1994 미국 월드컵에 참가한 이탈리아의 전력은 프랑코 바레시, 파올로 말디니, 코스타쿠르타, 타소티 등 아예 밀란을 통째로 뽑아온 수비진에 알베르티니, 디노 바죠의 공수 양면으로 뛰어난 미드필더진 등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바조를 비록한 카시라기, 졸라, 시뇨리, 마싸로 등의 공격진은 개인기량이야 뛰어났지만 부상 후유증이나 경험 미숙 아니면 국대 징크스나 조직력 등 여러가지 이유로 별로 믿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가 결승까지 7경기 동안 득점했던 8골 중에 바조는 5골을, 아주 결정적인 순간마다 작렬시켰다.

16강 나이지리아전, 졸라가 퇴장당한 이탈리아는 후반 40분이 넘도록 스코어마저 1:0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다음 대회를 기약해야 할 것처럼 보였으나 바조의 발에서 후반 43분 극적인 동점골이 터졌고, 연장전에서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세를 몰아쳐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경기를 끝낸다. 8강에서 전통의 강호 스페인과 1:1로 접전을 벌이던 후반 42분, 바조는 다시 한번 극적인 결승골을 작렬한다. 4강 상대는 스토이치코프가 이끄는 불가리아로 바조는 이 대회 최고의 활약상을 선보인다. 전반 20분, 25분에 연달아 골을 터뜨리고, 뒤늦게 스토이치코프가 한 골 만회한 불가리아를 2:1로 누르며 결승에 오른다.이러한 활약으로 바조는 이탈리아에선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며 온갖 찬사와 칭송을 누리고 있었다.

운명의 결승전 이탈리아는 브라질과 맞서게 된다. 당시 차례로 득점왕을 차지하며 라 리가를 호령하던 호마리우베베토 등 이탈리아 못잖은 스타플레어들이 포진한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격돌 끝에 스코어는 0:0, 결국 승부차기로 우승자를 가리게 된다. 브라질은 키커 네명 가운데 세명이 성공하고, 이탈리아는 두명이 성공해서 승부차기 스코어는 3:2.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고, 또 바조가 성공하더라도 다음 브라질 키커가 성공하면 패배하는 상황에서 바조가 찬 슛은 크로스 바를 넘어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14]

이 실축의 임팩트는 엄청난 것으로 실축 직후 이탈리아에서는 팬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바조의 인형을 불태우고 초상화도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해져서, 토너먼트나 경기에서 활약이 좋았던 선수가 승부차기는 실축하는 경우 자주 바조의 이름을 언급하곤 한다.

멘탈 공황 상태에서 간신히 벗어난 후 리그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에 뽑인 바조는 에리와 짝을 이뤘다. 32강 조별리그 첫 경기 상대는 남미의 다크호스 칠레였고, 유럽에서 뛰는 살라스와 사모라노 걸출한 두 공격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경기 초반 비에리의 득점으로 손쉽게 경기를 지배하나 했지만, 살라스에게 잇달아 두 골을 내주고 오히려 끌려다니는데... 여기서 판타지스타로서의 바조가 지닌 천재성이 발휘된다. 칠레의 밀집 수비에 공격의 활로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페널티에어리어 측면에서 공을 잡은 바조는 패널티에어리어 안에 있던 칠레 수비수의 손을 공으로 맞혀버린다. 다분히 패널티킥을 일부러 얻으려 한 동작. 결국 얻어낸 패널티킥을 후반 40분 바조가 침착하게 패널티킥을 성공시키며 동점으로 마무리 짓는다. 이 시합에서 바조는 월드컵 3개 대회에서 골을 기록했다. 이후 이탈리는 2승 1무 조1위로 무난히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16강 상대 노르웨이를 꺾고, 마침내 8강에서 홈팀 프랑스를 만난다. 이 경기에서 바조는 후반 교체 멤버로 뛰었으나 득점을 기록하진 못했고, 양팀은 0:0으로 비긴채 승부차기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탈리아 첫번째 키커가 바조... 감독 미친 거 아냐? 경악과 불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조는 침착하게 성공한다. 이때 킥을 성공시키고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세레모니를 했다. 이를 본 국내 해설진은 '자기 옛날 월드컵 이야기 하지 말라는 걸까요?' 하며 웃음을 지었다.[15]

하지만 마지막 키커 디 비아조가 실축하면서 끝내 이탈리아는 4:3으로 패한다. 이 실축은 4년 전 월드컵 결승전에서의 바조의 킥과는 달리 골대 윗부분을 맞고 튀어나왔다. 망연자실해 그라운드에 누워버린 디 비아조에게 바조가 다가가 위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니맘 다 알아...

의욕을 불태웠던 2002년 월드컵 참가는 끝내 이루지 못했으며, 2003년 은퇴를 표명하자 그에게 존경을 표하는 뜻으로 2004년 4월 28일 스페인과 친선 경기에 발탁했다. 이 시합이 바조의 대표팀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시합 후 인터뷰에서 은퇴나 지금까지의 대표팀 생활을 거론하지 않고 당장 오늘 치른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한게 아쉽다고 발언하며 골잡이로서의 자존심을 드러냈다.

참고로 유로컵 본선 무대를 밟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유로 92 때는 이탈리아가 지역 예선에서 소련에 밀려 탈락하면서 아예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그리고 유로 96 때는 아리고 사키 감독과의 불화로 제외되었으며 유로 2000 때는 하향세로 제외되었다.

4. 플레이스타일

바조는 몇 안되는 판타지스타라 불리우는 공격수다. 바조는 최전방에 못박혀 득점을 노리는 득점 기계 타입의 선수가 아니었다. 피치 위에서 포워드가 맡을 수 있는 대부분의 자리들, 그러니까 윙 포워드/최전방/투 톱 등의 위치를 소화해 본 경험이 있었지만, 그가 가장 선호한 위치는 어시스트와 득점을 모두 노릴 수 있는 세컨드 톱 자리였다. 미셸 플라티니는 그런 바조를 환상적인 9.5번으로 표현했다. 말 그대로 트레콰르티스타였던 것이다.

역시 판타지스타로 불리우는 델 피에로와 흡사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판타지스타의 정의에 부합되는, 보는 이를 홀리는 플레이라는 관점에서 바조가 훨씬 판타지스타답다. 델피에로는 20대 초반에만 그런 모습을 보였다. 델피에로가 큰 경기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플레이로 팀을 살린 적이 얼마나 있나 생각해보면, 바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조가 델 피에로보다 극적이고 화려한 공격수였던 것도 사실이다. 94 미국 월드컵에서 5골을 모두 소설 같은 시점에서 작렬시키며 결승행을 이끌었던 공격수는 다름아닌 바조였다. 토너먼트에서 팀을 승리로 이끄는 순도 높은 골로 팀을 결승에 이끈 선수를 경기력으로 비판하는 건 말도 안되는 거다. 그 당시 아리고 사키의 전술 자체가 미드필더에서 빌드업 자체를 못해주고 고작 소수의 기회만을 주는데 그걸 전부 골로 연결시킨 것이 바조다.

이건 바조가 왜 그 이후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는가와도 관계가 있는데, 카테나치오같은 수비적 전술을 들고 나온다면 바조가 더 맞는 카드다. 토너먼트에서 어떻게든 막고 바조에게 연결하면 어떻게든 해결시켜 주니까. 하지만 전술의 이탈리아가 낳은 많은 이탈리아의 명장전술덕후들은 판타지스타의 원더플레이와 골에 의존하기 보단 좀더 조직적으로 골을 만들어내고 감독의 계산 하에 안정적인 게임을 하길 원했다. 거기에는 델피에로가 훨씬 맞는 카드였던 것. 물론 그 델피에로조차 토티라는 더 전술에 맞고 셋피스에 뛰어난 선수에게 밀려나게 된다. 바조가 정말 불운했던 건 그 당시 바조를 외면했던 감독들이 사키 이후 연이어 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소속팀마저 따라와서 감독을 하면서 바조를 외면했던 것이다.

현대 전술의 흐름에 외면당했지만, 보는 이를 감탄시키는 환상적인 플레이로 많은 팬을 만들고 뇌리에 박히는 판타지스타 중의 판타지스타. 그것이 바로 로베르토 바조.

5. 기타


일부 호사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바조와 델 피에로를 저울질하기를 정말 좋아하는 듯 하다. 앞서 적었듯 바조가 한창 멘탈공황 상태일 때 혜성처럼 등장해, 바조와 거의 흡사한 플레이스타일로 소속팀에서든 국가대표에서든 바조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꾸며, 자의가 아니겠지만 바조가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모조리 빼앗아갔으니... 심지어 소속팀과 국가대표에서 둘 다 바조의 전유물이자 상징적 번호였던 10번까지 빼앗았으니.

바조 본인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고 델 피에로 역시 바조를 정말 존경하고 좋은 사이라며 여러 번 언급했지만... 요즘에도 가끔씩 둘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만해 미친놈들아

월드컵 결승전에서 놓친 PK로 인해 바조=PK 삽질이란 이미지가 박힌 듯 한데, 바조는 현역 은퇴할 순간까지 통산 122시도 106골, 약 86%라는 놀라운 PK 성공률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이탈리아 역대 최고확률이며,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그를 능가하는 강심장은 없었다는 소리다. 그저 “하필”이라는 단어밖에는 떠오르지 않던 상황이고 누군가가 손가락질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뼈도 심장도 아팠을 순간이다. 본인이야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바조는 은퇴 후 어느 인터뷰를 통해 이런 토로를 남겼다.

"선수 생활에 미련도 후회도 없다. 다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 PK는 다시 차고 싶다. 나는 4년간 악몽에 시달렸다." 바조 까지마 어흑

은퇴 후 이탈리아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으로 일하다가 지난 2010년 노벨 평화최고상을 받았다.[16] 그동안 바조가 미얀마 민주화의 영웅 아웅산 수치 여사의 석방과 아이티 지진 피해자 돕기 등 많은 자선활동을 한 공로를 인정하는 의미인 듯. 판타지스타는 은퇴해도 판타지스타


6. 경력

6.1. 대회 기록


6.2. 리그 기록

시즌클럽소속리그리그FA컵대륙대회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2/83 비첸자 이탈리아 세리에 C1 1 0 - 0 0 - -
1983/84 비첸자 이탈리아 세리에 C1 6 1 - 6 1 - -
1984/85 비첸자 이탈리아 세리에 C1 29 12 - 5 2 - -
1985/86 ACF 피오렌티나 이탈리아 세리에 A 0 0 0 5 0 - -
1986/87 ACF 피오렌티나 이탈리아 세리에 A 5 1 2 4 2 1 0
1987/88 ACF 피오렌티나 이탈리아 세리에 A 27 6 1 7 3 - -
1988/89 ACF 피오렌티나 이탈리아 세리에 A 31 15 4 10 9 - -
1989/90 ACF 피오렌티나 이탈리아 세리에 A 32 17 6 2 1 12 1
1990/91 유벤투스 FC 이탈리아 세리에 A 33 14 12 5 3 8 9
1991/92 유벤투스 FC 이탈리아 세리에 A 32 18 8 8 4 - -
1992/93 유벤투스 FC 이탈리아 세리에 A 27 21 6 7 3 9 6
1993/94 유벤투스 FC 이탈리아 세리에 A 32 17 8 2 2 7 3
1994/95 유벤투스 FC 이탈리아 세리에 A 17 8 8 4 2 8 4
1995/96 AC 밀란 이탈리아 세리에 A 28 7 10 1 0 5 3
1996/97 AC 밀란 이탈리아 세리에 A 23 5 2 5 3 5 1
1997/98 볼로냐 FC 이탈리아 세리에 A 30 22 6 3 1 - -
1998/99 인터 밀란 이탈리아 세리에 A 23 5 10 6 1 6 4
1999/00 인터 밀란 이탈리아 세리에 A 19 6 3 5 1 - -
2000/01 브레시아 이탈리아 세리에 A 25 10 10 3 0 - -
2001/02 브레시아 이탈리아 세리에 A 12 11 3 1 0 2 1
2002/03 브레시아 이탈리아 세리에 A 32 12 9 0 0 - -
2003/04 브레시아 이탈리아 세리에 A 26 12 11 0 0 - -

6.3. 개인 수상


  • 1990년 브라보상
  • 1990-91 UEFA 컵 위너스컵 득점왕
  • 1993년 발롱도르
  • 1993년 FIFA 올해의 선수
  • 1993년 올해의 축구 선수
  • 1993년 옹즈도르
  • 1994년 FIFA 월드컵 실버볼
  • 1994년 FIFA 월드컵 실버슈
  • 1994년 FIFA 월드컵 올스타 팀
  • 1994년 발롱도르 2위
  • 1994년 FIFA 올해의 선수 3위
  • 1994년 옹즈드브론즈
  • 1995년 옹즈다르장
  • 1999년 20세기 최고의 선수 100인
  • 2003년 골든풋
  • 2004년 FIFA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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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중 바조가 득점한 22경기에선 18승 4무. 골을 넣은 경기에선 불패인 셈이다.
  • [2] 1995년부터 유럽이 아닌 전세계 선수를 대상으로 수상
  • [3] 세리에 A 역사상 다섯명
  • [4] 때문에 82/83 시즌 데뷔로 표기할 수도 있다
  • [5] 이 부상은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히게 된다.
  • [6] 당시 1900만 달러 정도. 2009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1억 3천만 달러 가량.
  • [7] 여담으로 이 무렵 피오렌티나는 10년전 석연찮은 판정으로 리그 우승을 유벤투스에 뺏긴 앙금이 남아 있는 숙명의 라이벌이었는데, 하필 이틀전 UEFA컵 결승에서 유벤투스에 패해 적대감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현질로 에이스를 빼간다고 염장질을 해대니, 팬들의 난동으로 5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진압을 위해 경찰까지 출동하게 된다.
  • [8] 당시 UEFA컵 결승전은 홈&어웨이 2차전이었다.
  • [9]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그리고 現 돈저우광저우 헝다 감독
  • [10]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 [11] 세간의 기대만큼 오래오래 같이 못 뛰었을 뿐 제법 뛰었다. 이 점에선 또 세간의 기대-아마도 요즘-를 배신하는 부분이 있는데, 둘이 같이 뛰는 모습을 보면 어떤 때는 바조가 호돈보다 훨씬 나은 선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창의력과 패스를 이용한 공간침투가 호돈보다 우월했다. 반대로 호돈이 바조보다 훨씬 나아보일 때도 있고 뭐....
  • [12] 바조에게는 불행이겠지만, 리피, 카펠로, 사키 모두 손꼽히는 명장들이다보니 빅 클럽이 안풀릴 때마다 불려오는 일이 잦았다. 월드컵 우승 리피, 우승 청부사 카펠로, 밀란 골든제네레이션을 이끈 사키.
  • [13] 이때 바조의 반응도 걸작인게, 자기가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고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일체의 인터뷰도 끊은 채 두문불출했다. 물론 한창 회춘모드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바조에게 군소리를 하지 못했다. 이 아저씨가...
  • [14] 이때 아주리에서 첫번째 키커로 나와 실축한게 바로 말디니 이전에 아주리와 밀란의 위대한 주장인 프랑코 바레시이다. 그러니까 공수의 중심이자 주장, 정신적 지주가 모두 실축했다는 것. 우리나라로 치면 2002년 월드컵에서 PK에서 홍명보황선홍이 실축한 것과 다름없다.
  • [15] 사실 선수에게 이렇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게 맞다. 예를 들어 2002 월드컵 16강전 대한민국의 경우, 안정환은 PK를 실축하며 팀의 위기를 불렀으나 결국 골든골 성공으로 한을 풀었다. 만약 그 경기에서 대한민국이 졌다면 안정환은 바조처럼 은퇴하고 나서도 그 악몽에 시달렸을 것이다. 바조의 경우는 무대의 급이 달라 한을 제대로 풀지는 못한 모양이지만...
  • [16] 참고로 이 상은 우리나라의 故 김대중 前 대통령이 수상한 노벨평화상의 레벨은 절대 아니며,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모임인 '노벨평화상 수상자 협의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 정도의 의미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