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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last modified: 2015-03-28 17:33:56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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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난쟁이의 전쟁(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 Le Petit Parisien, 1904. 4. 3)

사실은 저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저 난쟁이의 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배은망덕을 당했다

당시 세계열강들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무대에 끼어들지 못해서 뒤에 매달려있는 구경꾼으로 전락해버린 중국(청나라)의 모습이 인상적이다.[1] 무대의 바닥에는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지도가 그려져 있다. 일본 선수는 한발을 조선에 두었고, 러시아 선수는 거만하게 일본을 쳐다보고 있다.

'일본의 탈아입구를 완성하고 세계 열강으로 도약하는 전쟁'이고 조선의 중립화 정책이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로서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의 최강자로 인정받고 조선을 식민지화 할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의 동아시아인들은 최초로 극동아시아 국가가 서구 열강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으로 보기도 했다.

1904년 2월 8일에서 1905년 9월 5일까지 벌어진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의 전쟁이다.

서구 열강 누구나 러시아가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러시아는 모두의 기대를 제대로 배신하고 말았다. 심지어 당시 영국에서는 사교클럽을 중심으로 전쟁의 양상에 내기를 건 사람들도 많았는데, 누가 이기느냐에 돈을 건 게 아니고 일본이 언제 패배하고 러시아가 언제 승리하느냐에 돈을 걸었다. 결국, 최종 승자는 일본이었기에 아무도 내기에 이기지 못하고 무효가 됐다.

Contents

1. 배경
2. 경과
3. 전후
4. 러일전쟁의 이면
4.1. 일본의 속사정
4.2. 아시아에 미친 영향
5. 관련항목
5.1. 주요 전투
5.2. 기타 관련 항목

1. 배경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청나라는 일본에게 막대한 전비와 영토할양을 했어야 했는데 그 중에 랴오둥 반도의 할양을 러시아가 반대하였다. 러시아가 욕심내던 이 곳, 특히 반도 끝자락의 천혜의 군항인 뤼순을 일본이 차지하게 되자, 러시아는 일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했다. 이에 일본의 세력확대를 탐탁치않게 여기던 독일프랑스를 끌어들여서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굴복시키고 이후 두 국가는 반목하게 된다.

그 이후 러시아는 우월한 위치를 이용해서 일본을 꾸준히 압박해 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1896년 5월의 베베르-고무라 각서,[2] 1896년 6월의 러청 비밀협정[3], 그리고 3일 뒤인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4]을 연이어서 체결하면서 다소 러시아가 우위에 있으면서도 양국간의 관계가 균형을 이루었는데 이는 러시아나 일본이나 온건파가 일단 양국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조선(대한제국)에게는 희대의 기회로 고종황제는 이 기회를 빌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태국처럼 중립국의 길로 나가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문제는 1897년 11월 독일이 중국의 청도 주변을 점령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러시아는 청과의 비밀협정을 파기하고 만주 중에서도 요충지인 뤼순과 다롄을 점령하게 된다.

또한 의화단 운동으로 '자국의 국민들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군이 만주로 진출하자, 서양 열강들은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만주에서 쏠쏠한 이익을 보고 있던 미국은 러시아의 만주 진출에 매우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5] 게다가 러시아가 태평양 지역에 가진 부동항이 사실상 동해의 내항이라고 볼 수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뿐이라 추가적인 부동항을 가지기 위해 대한제국과 청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이로 인해 두 나라는 만주를 놓고 대립을 벌였다. 조선에서 갖고 있는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러시아가 인정하면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철도 경영을 인정한다고 제안했지만 러시아는 당연히 반대했다. 한반도랑 만주 철도랑 급도 다를 뿐더러 일본이 내건 조항에 "나중에 우리도 만주진출함^^ 그때 아무말 없기다?"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는거야? 뭐야!? 식의 조항도 들어있었다. 처음부터 일본은 만주에 진출할 야욕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러시아는 한반도 39도선 이북을 중립지대로 설정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동안 들인 공이 있던 일본은 당연히 반대. 그 와중의 타협점이 1898년 4월에 일본에서 맺어진 로젠-니시 협정이다. 이 협정에서 양국은 조선의 자주성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내에서 이룩한 기여도를 인정한다고 하는 것으로 대한제국 내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고 대신 만주 지역의 러시아 입지를 인정받으려는 것이었다.[6]

이렇게 상황은 점차 파국으로 치달았고, 일본영국, 미국과 밀약으로 동맹을 맺고 한반도에 군대를 상륙시켜서 조선을 굴복시키고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면서 전쟁을 준비했다. 영국도 역시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를 위해 일본에 막대한 차관을 저리로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렇게 대립이 심화되면서도 정작 러시아는 충분한 전쟁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일례로 뤼순 요새도 선전만 난공불락이었지 실제로는 청일전쟁 당시 구축한 중국제 요새를 수복하고 약간 강화한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게다가 상당 부분이 미완성이라 무늬만 요새에 가까웠다. 여기에 더해서 유사시 유럽에 주둔한 병력과 물자, 장비를 보낼 시베리아 철도는 대부분이 단선인데다가 아직 미완성이라 여러 곳에서 끊어진 상태였으며 수송능력도 매우 낮았다. 결정적으로 바이칼호 근방 노선의 경우 호수 자체의 거대한 크기와 근방 지역의 절벽을 포함한 험준한 지형 덕분에 수십 킬로미터의 공백이 발생한 상태라 사실상 유사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철도였다. 덕분에 나중에 가면 겨울의 추위 때문에 얼어붙은 호수 위에 철도를 임시로 부설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물자 문제도 심각해서 석탄, 식량, 탄환, 무기, 옷 등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제정 러시아는 군대를 팽창시키긴 했으나 러일전쟁의 주요 무대인 극동 지역은 모든게 부족한 상태였다. 항구의 경우 전함의 수리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전쟁 직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극동총독 알렉세예프에게 내린 훈령을 보면 '일본이 백두산 천지까지 점령하더라도 허용할 것.'으로 되어있다. 사실상 러시아 입장에선 한반도를 포기하더라도 만주는 자신들의 손아귀에 두고 싶었으나 일본이 그걸 내버려둘 만큼 착할리가 없었다. 결국 협상 테이블에서 양보에 양보를 거듭한 결과로 러시아가 만주를,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하는 형태가 되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미 전쟁을 할 마음을 굳히고 있었고 내부에서는 군비확충과 국민들의 이념무장, 만주지역에 대한 대 러시아 첩보망을 갖춰놓은 상태였다. 모든 게 러시아에게 불리했다.[7]

2. 경과

일본은 러시아의 전력을 세밀히 관찰해서, 유럽에서 극동까지 동원되는 러시아군이 약 10만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당시 시베리아 철도는 미완성에다 단선이라 1개 대대를 뤼순으로 보내는 데도 40여 일이나 걸렸다.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고작 10만 정도였는데 반해 일본군은 약 25만을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비록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일본보다 훨씬 강하지만 7천 킬로미터가 넘는 극동까지 군대를 보내 전쟁을 벌일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작전에 나서기 전에 극동의 교두보를 강습해 제압한 다음 협상을 제안하면 승산이 있다고 본 일본은 선전포고없는 기습 공격을 함으로써 러일 전쟁이 발발한다.

이후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기 이틀 전에 뤼순을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에 러시아도 선전포고를 개시하여 전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제정 말기인지라 무기도 노후한데다 워낙에 거리가 멀어서 지원도 어려웠고 병력도 분산되어 있는 어려운 처지였다.[8] 한 예로 연발총용 탄환이 2800만발이 부족했다. 결코 28만, 280만이 아니다! 거기다 유럽의 러시아에서 보낸 방한복, 털모자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전장에 도착했다.

러시아군 사령관 크로파토킨은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40일이 지난 뒤에야 현지에 나타난다. 그 자신의 판단으로도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대규모 회전을 치르기에 미비한 상태였으므로 객관적인 전력상의 우세를 점한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부 러시아에서 지원이 오려면 무려 40일이 넘게 걸렸기 때문에 일본군을 내륙 깊숙이 유인해서 섬멸하자는 전략을 택한다. 하지만 일본 역시 인적, 물적 자원의 소모가 극심한 근대식 대규모 회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어 몇 차례의 전투 후 본인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간 벌인 전쟁들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 규모에다가 객관적인 국력의 현저한 열세로 인해 어떻게든 한 방 제대로 먹여 러시아군을 괴멸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크로파토킨이 의도한 장기전에 따라 러시아군은 매 전투마다 조금 불리해진다 싶으면 주저없이 철수해버렸고 추격할 여력이 없던 일본군은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 듯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는 동안 슬슬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고 여기에 일본군 특유의 고질병인 무능한 지휘력이 발생했다.[9] 앞선 청일전쟁이나 이 전쟁이야 상대가 상대였으니만큼 그럭저럭 먹혔고, 이후의 중화민국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러시아와 미국은…. 덕분에 전쟁은 러시아에게 아주 불리하게 돌아가진 않았다.

가장 유능했던 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제독이 부임하여 몇차례의 해전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후려잡고 무능한 지휘관들을 쳐내고 유능한 지휘관으로 교체하는 등 강직하고 훌륭한 지휘관의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미처 러시아 해군이 집결하기 전에 기뢰가 터져 기함과 함께 전사하는 바람에 해상을 일본이 장악하게 됐다. 일본 역시 기뢰로 구축함 하츠세, 야시마에 순양함 요시노, 수뢰정 아카츠키, 포함 오시마호를 잃었으나 마카로프 제독의 끔살을 본 러시아 해군 장교들은 소극적인 행동을 벌였다. 그 동안 일본은 한반도 전역을 점령했고 만주로 진군해 러시아군을 압박했다. 그리고 결국 1905년 뤼순까지 점령하였으나 이때 역시 일본의 막장 작전수행능력 덕에 일본군 병력 손실이 심해 만주에서 러시아를 몰아낼 만큼의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특히 203고지의 뻘짓이 그 절정.

결국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끌고 온 발틱 함대는 이 해전에서 우월한 성능의 전함과 숙련도 높은 승조원들, 그리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키야마 사네유키라는 명장을 보유한 일본 연합함대에게 궤멸되었고, 결국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내게 된다.

3. 전후

포츠머스 협정은 미국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중재했다. 이 사건 덕분에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러시아와 일본 모두 전쟁을 계속했다간 재정이 파탄나게 생겨서 반 강제적으로 전쟁을 끝나게 된다. 그러나 그 '평화' 덕분에 동방의 어떤 국가멸망으로 치닫게 된다.[10]

이후 러시아 제국의 무능한 제정을 비난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까지 벌어지자 견디지 못한 러시아 국민들의 분노로 제정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게 된다. 또한 일본은 이 때 서양의 열강인 러시아에게 승리하면서 다른 열강들로부터 그들과 동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이후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를 인정받았다.

문제는 일본측인데 일본은 이 전쟁에서 막대한 군비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배상금도 없고 그것을 대신하는 영토할양도 당시로서는 큰 가치가 없는 곳이라 당연히 일본 국민들은 분노가 폭발했고 일본 전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가까스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그것을 진압하였지만 이후 일본 국민들의 불만이 급증해 1910년대 말부터 시작되는 민주주의 운동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이 이 전쟁에서 얻어낸 가장 큰 성과는 열강으로의 인정이었고 이후 일본은 강대국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최강자이자 조정자이라고 불릴 정도의 위신을 얻게 된다. 중국과 조선(대한제국)을 굴복시켰으니...

그리고 대한제국은 러일전쟁 이후 그나마 마지막 희망인 외교적 균형까지 깨졌다. 당장 조선의 입장에서는 둘이 계속 대립하다가 그 과정에서 완충지대로서 중립국으로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11] 결국 러일전쟁 종전후 을사조약을 맺으면서 보호국으로 전락하며 일본령 식민지 병합이 진행되었다. 청일전쟁과 함께 한반도,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몇몇 사람들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으면 우리나라가 러시아에게 흡수되어 소련의 공화국으로 전락하여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었을 때 해방되었을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조선의 완전한 식민지화를 원하던 일본과 달리 조선 영토 자체에 대한 합병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두는 것을 더 선호하였다. 만일,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조선을 친러시아 성향의 국가로 만들어서 내정간섭을 펼쳤을 확률이 더 높다. 그리고 조선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9세기 발발한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에 의해 독립이 되어 이후 친러시아 동맹국가가 된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등 동유럽 발칸반도 신생 국가들의 전철을 밟았을 확률도 없진 않다.

그러나 러시아가 러일전쟁 승전 이후 일본이 조선을 병합했던 것처럼 조선을 자국 영토로 합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러일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차지하기 위한 의지는 굉장히 강했으며, 심지어 1903년에 러시아가 한국을 분할통치하자고 일본에 제안한 적도 있었고 1902년 9월 12일 주일 러시아 공사였던 로젠 남작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올린 보고서에서 조선에 대한 합병을 주장하기도 했다.[12] 러시아의 특성이나 당시 정치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쪽도 시궁창인 것은 마찬가지였을 듯 하다.]

어찌되었건 전쟁을 이겼다면 그 이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그렇게 사회주의를 싫어했던 일본이 레닌스탈린을 살렸다.

4. 러일전쟁의 이면

4.1. 일본의 속사정

포츠머스 협정에서 일본 측은 자신들이 승리했으므로 러시아로부터 배상을 받아야겠다고 주장했다. 반면 러시아측 대표였던 비테는 지금 국내사정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려는 것 뿐이지, 자신들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며 한푼도 낼 수 없다고 맞섰다. 이를 보면 우습게 보던 상대에게 참패하고 체면이 바닥까지 떨어진 러시아가 억지로 자존심을 세우려는 초라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테의 말이 진실에 가까웠으며, 원래대로라면 일본은 절대로 러시아에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 뤼순 요새의 함락으로 러시아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사실 일본군의 타격도 그에 못지 않았다. 이 요새를 공략하면서 일본군은 무려 6만명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개전 당시 일본이 확보한 군대는 20만에 불과했는데 그 중 1/3에 가까운 전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는 점점 확대되었고, 일본군은 상당수를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신병으로 채워야 했다. 러시아군도 많은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상비군 100만을 유지하고 예비군 동원에도 여유가 있는 러시아 제국은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만주에서의 전쟁은 겉으로 보면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승승장구한 것으로 보이지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기보다 단지 격전 끝에 러시아군이 물러나는 양상에 불과했으며 일본군 역시 지속적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아직 완전히 완성되지 않은 시베리아 철도를 최대한 활용해서 유럽에 주둔 중인 주력 병력을 수송하고 만주 일대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던 병력은 이를 위한 시간을 번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애초에 땅이 워낙 넓다보니 철도타고 여유롭게 뒤로 빠지면 이를 추격할 여건이 전혀 안 되는 일본군은 무작정 따라가다가 자멸하거나 후퇴해서 뒤를 도모해야 하는, 전혀 우선권이 없는 행동 밖에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러시아군의 전술의 기본이 빠른 후퇴 후 따라오면서 힘이 빠진 적을 친다는 전략이니 대륙전을 해본 적 없는 일본군이 그걸 따라갈 수가 없었다.[13]

그 후 러시아군이 집결하자 일본군이 이를 공격한 봉천 전투에서 결국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승리하기는 했다. 그러나 전면 수세방어로 참호를 파고 버티는 러시아군에 대한 포위계획은 결국 러시아군의 신속한 퇴각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31만 러시아군과 25만 일본군이 맞붙었던 봉천전투는 러시아군 9만에(개중 5만은 미처 퇴각하지 못한 포로) 일본군 7만5천이라는 사상자 숫자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었으며, 일본군으로서도 더 이상 러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다. 최종적으로 러시아군은 전사자 4~7만, 전체 사상자 20여만이었던 것에 비해 일본군은 전사자 8~12만, 사상자 40여만으로 오히려 일본군의 손실이 러시아의 2배 이상이었다.

몇몇 일본의 극우들은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고 발트 함대를 전멸시킴으로써 승리를 주장했지만 인명 피해는 일본 측이 훨씬 더 컸던 것이었다.

러시아군은 비록 스스로 봉천 전투에서 물러난 것을 전투의 패배로 인식하긴 했으나, 기본적인 국력차를 고려할 때 전쟁에서 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지속적인 병력 수송으로 최대 40만까지 북만주로 이동시켜 추후 공세를 노리나, 이전의 몇차례의 육전 패배와 사령부의 무기력함 때문에 강력한 공세로 나서지는 못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실로 일본군답지 않게 신속한 철도개설과 여러 갈래의 보급선 확보 등 보급에 최선을 다했지만, 기본적인 국력 부족으로 인해 보급이 한계에 달했으며, 그 결과 식량 공급도 부족했고 방한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서 일본군은 만주의 추위에 떨며 주먹밥으로 연명하느라 각기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의 재정도 이미 파탄상태였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거액의 국채를 발행했지만 그 액수가 너무 늘어나자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이나 우호국이었던 미국도 더 이상의 매입을 거부하게 되어 사실상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당시 일본의 1년 세입이 2억엔에 못 미쳤는데 러일전쟁 총전비는 이미 19억 8400만엔에 육박하고 있었다. 여기서 12억엔을 영국과 미국이 지원하긴 했지만 만약 1~2개월만 전쟁이 지속되거나 러시아가 일본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강경론으로 나간다면 일본은 국가파산에 처할 위기였다.

이 때문에 포츠머스에서 일본은 반드시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러시아 전권대사 비테는 배상금 지불을 강력히 거부했다. 일본 전권대사 고무라 주타로는 어떤 식으로든 배상금을 받아내려 했으나 협상하기 싫으냐는 러시아측의 압박에 결국 본국에 상의하게 되었고, 일본 정부는 모든 상황을 재점검한 후 도저히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배상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협정을 진행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협정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당시 러시아가 전쟁 수행 의지를 잃어버리고 휴전협정에 나선 것은 영·미의 간접 개입에 대한 부담감이 가장 컸고, 여기에 일본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게다가 봉천 전투와 뤼순 함락으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 탓도 있었고, 보급이나 병력의 보충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전쟁 중에 터진 피의 일요일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피의 일요일 사건도 러일전쟁 초기 전투의 패배가 상당한 이유가 되었다. 만약 초기 전투에서 승리했으면 그 여파로 불만을 상당 부분을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러시아 황실 붕괴→사회주의 혁명 테크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러일전쟁의 영향력은 그 규모가 달라진다. 이후 러시아에서는 본격적으로 혁명의 열기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러시아 제국은 국내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더 이상 외국과의 전쟁에 신경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엄청난 행운이었던 셈.

또하나는 러시아에 있던 일본 외교관들은 비밀리에 러시아의 혁명가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3년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사건, 상세히 설명하면 한 어린 소녀가 살해된 사건을 단지 소문으로 유대인이 저질렀다는 게 퍼지면서 유대교 회당을 비롯하여 유대인이라는 게 드러나면 사람들이 그냥 죽였다. 그런데 그 사건이 소녀의 친척이 저지른 걸로 드러났음에도 학살은 멈추지 않았고 이 와중에 수천에서 수만으로 추정되는 유대인이 학살 및 약탈, 강간을 당했고 결국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갔고, 이를 갈던 미국 및 유럽의 유대인 부호들이 일본을 지지한 점도 있었다.

어쨌든 러시아나 일본이나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으므로 휴전협정에 비교적 만족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상황은 일본 정부와 군부에서만 파악하고 있었을 뿐, 국민들에게는 일본군의 승리만이 선전되었으므로 일본인들은 포츠머스 협약 내용에 격렬한 분노를 표시했으며, 반정부 폭동까지 일어났다. 당시 일본측 대표는 일본 정부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국민들에게는 공공의 적으로 몰리기도 했다. 또한 휴전협정을 주선한 미국에 대한 비난도 이어져 강렬한 반미여론이 일어났으며, 이에 대해서 미국 언론에서도 일본측의 배은망덕한 행동을 비난하고 나섬으로써 양국 국민간의 감정이 상당히 악화되었다. 이건 말 그대로 전쟁에 이겼다고 해도 남는게 거의 없는 상황.

또한 사실상 전혀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어 한 번 모험삼아 걸어본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대승리를 거두게 됨으로써 "일본은 하늘이 지켜주는 나라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 보여도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뛰어들면 어떻게든 된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후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발호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 러시아, 조선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친 셈.

일본은 나중에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얼씨구나 아예 사할린을 넘어 러시아의 넓은 땅을 더 많이 먹자며 시베리아로 침공했으나 겨울 속에 많은 장병만 개죽음당하고 철수해야 했으며, 아무리 내전으로 인해 흔들거리던 러시아라하더라도 시베리아까지 손을 놓고 버릴 정도로 무너지던 상황은 아니었기에 손쉽게 일본군을 몰아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러 할힌골 전투8월의 폭풍 작전에서 둘은 다시 맞붙었고, 당시 맞붙었던 러시아 제국이 정신이 없었던 반면 이번엔 정신줄 바짝 차린 소련에게 예정된대로 압승 대승 완승을 안겨주며 끝났다.

일본이 이 전쟁에 너무 많은 비용을 쏟아부어 위에서 말했듯이 국가 파탄 직전까지 빚을 지게 되었는데 이 빚을 다 갚은 것은 1986년이 되어서였다(...).

4.2. 아시아에 미친 영향

한국에서는 물론 을사조약을 맺게 된 직접적인 계기라는 점에서 러일전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긴 하지만, 한국과 일본 외의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러일전쟁은 상당히 큰 여파를 남겼다. 황인종이 백인에게 승리한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당시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것.[14]

중국에서는 이미 청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에 대해 재평가하는 시각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러일전쟁은 뒤이어 그 영향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때 대표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이 바로 쑨원이다. 물론 당시만 해도 량치차오처럼 벌써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에 대해 회의하고 돌아선 인물이 있기는 했지만...

베트남에서도 일본에 대한 시각이 매우 좋아졌다. 일례로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축이 된 인물 중 한 명인 판쩌우찐은 러일전쟁을 위해 베트남 근해를 지나가는 발틱 함대의 위용을 지켜보았고, 그 발틱 함대가 일본군에게 무너졌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후 베트남 민족 운동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자는 동유 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의 게이오 유숙을 본딴 통킹 의숙이 세워지는 등 한동안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일본의 승전은 이처럼 일본이 홍보하던 '대아시아주의'를 널리 퍼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다소 어이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조선에서도 러일전쟁의 승전에 잠시나마 기뻐했다. 그럴 수 밖에없는게, 상기한대로 일본 국민들조차 자세한 내막을 몰랐던 만큼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당연히 내막을 알 리 없는 상황이였고 이는 조선도 예외가 아닌지라, 어째되었건 조선인 입장에서는 그래도 '좋은 싫든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동네 총각 vs 어느날 불현듯 들어온 백인 코쟁이'의 싸움 정도로만 알았기 때문. 물론 일본의 진짜 의도를 깨닫고는 바로 항일투쟁을 시작하지만.

한일 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등의 조약은 기본적으로 러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체결되었던 조약이었고, 경부선경의선의 건설도 매우 수탈적으로 이루어졌다. 명백히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이었음에도 을사조약과 같은 반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수호해주겠다는 일본의 주장을 철썩같이 믿었던 조선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독립협회 등의 활동처럼, 조선 내에는 러시아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일본은 그 점을 이용했던 것이다.[15]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야멸차게 조선을 배신했다.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 일야방성대곡

당시 조선 내에 한중일이 연합해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 열강에 대응해야 한다는 이론이 널리 퍼진 상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한중일의 연합 이론은 국제 정세에 무지했던 탓에 벌어진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혜안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

5.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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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의 패배로 인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열강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이다.
  • [2]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와 주조선 공사 고무라 주타로 사이에서 체결. 일명 경성의정서 혹은 고무라를 한자로 읽어서 베베르 소촌 각서. 이를 통해서 고종의 환궁과 자주권을 보장하고 조선에 주둔하는 러시아와 일본의 병사를 800명으로 제약했다.
  • [3] -로바노프 협정. 러시아, 청, 조선 가운데 하나라도 공격을 받으면 서로 협력하여 요격한다는 협정. 이를 위해서 청은 길림성과 흑룡강성을 통과하는 철도 부설권을 러시아에 넘겨줬다.
  • [4] 조선의 군경 양성을 허용하고, 양국은 균형적으로 지원한다. 비밀 조항으로 만일 양국이 출병하게 되면 같이 출병하며 양국 사이에 군사중립거점을 둔다. 일명 모스크바 의정서 혹은 이마가타를 한자식으로 읽은 로바노프 산현 의정서.
  • [5] 그래서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의 극동아시아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을 키워야 한다'는 일본에 우호적인 시각과 여론을 견지하게 되는데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시각이 1920년대 워싱턴 회의 체제까지 지속되었다.
  • [6] 이 과정이 조선에 영향을 준 사건이 바로 1897년 12월 창설 예정이었던 한러은행이 무산된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이를 독립협회와 관련하여 만민공동회에서 투쟁으로 막아낸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한반도 내에서의 러시아의 위치가 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온건파였던 웨베르가 강경파 스페이에르로 바뀐 것과 함께 고종의 행보를 더더욱 급하게 만들었다.
  • [7] 물론 러시아측도 바보는 아니었고 이에 대한 문제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철도만 완성되면 유럽 러시아의 주력군과 물자를 러시아 철도를 통해 만주까지 보내면 그 정도 문제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문제는 전쟁 끝날때까지 철도가 제 역할을 못했다는거지만....
  • [8] 여기에는 영국이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을 2선에서 지원한 것도 한 몫했다. 유럽의 러시아에서 극동아시아 지역으로 해운을 통한 물자수송을 하려면 수에즈 운하를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한다. 문제는, 당시 러시아 함대 중 일부가 수에즈 운하를 넘기에 너무 폭이 컸다. 따라서 그들은 희망봉(...)을 돌아 물자를 수송해야 했고 인도양에서 합류했다. 더군다나 영국은 이 당시 헤게모니 국가였기 때문에, 세계 곳곳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 해군과 물자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일본에 속속들이 알려주었다.
  • [9] 이 고질병을 정확히 말하자면 보급이나 장비 등에 제한이 가해질 수 밖에 없는 국력상의 문제를 일선 장병들과 중하급 지휘관들의 정신력으로 때워보려는 시도가 거의 처음 나타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 [10] 종전협정이 열렸던 포츠머스에서는 매년 포츠머스 조약체결일에 축제를 연다. 자기네들이 중재하여 전쟁을 멈추고 세계평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본다면, 지극히 강대국적인 마인드가 아닐 수 없다.
  • [11] 타이가 이 케이스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완충지대로서 독립을 유지했다.
  • [12] 이러한 로젠 남작의 견해에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만주에서의 철군을 철회, 1903년에 용암포를 무단으로 점령하고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비록 미국과 영국, 일본 3국이 압박하여 물러나게 되나 이 용암포 사건은 일본에게 러시아에 대한 위기감을 고조시켜 러일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 [13] 만약에 전장이 주요 도시와 가까운 러시아 서부였다면 혹시 모를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당시의 일본군보다 몇배는 막강했던 나치군이 2차 대전 때 여기를 못 넘고 궤멸당한 걸 생각하면 전력에 한계가 있는 일본군이 넓디넓은 시베리아를 육로로 돌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 [14] 다만 영국, 미국 이 두 나라가 일본을 도와주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이라...
  • [15] 이것 역시 영국의 방해공작이 일정 부분 작용했는데,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이 세계 동네방네 러시아에 대한 근거없는 음해루머를 퍼트리고 다녔다.
  • [16]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이 시마네 현 고시를 통해 '점거'하고 해상 망루를 설치마개조한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 게다가 점거와 동시에 원래는 울릉도를 가리키던 다케시마라는 이름까지 여기에 갖다 비벼놓았다. 사실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가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