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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last modified: 2018-08-19 03:12:12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1.1. 혁명 이전
1.2. 3월(2월) 혁명
1.3. 2월 혁명 이후
1.4. 11월(10월) 혁명
1.5. 파장의 확산


1. 개요

러시아 제국에서 1917년에 일어난 혁명. 이 혁명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참고로, 2월/3월 혁명 이렇게 달이 정신없게 나눠지는 이유는 그 당시 러시아가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어서 날짜 시스템이 그레고리력을 쓰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2월 혁명인데 다른 나라에서 보면 3월 혁명이다. 그리고 두 표현 모두 혼용된다. 괄호로 친 날짜가 러시아 달력(구력)을 기준으로 한 것.


1.1. 혁명 이전

러시아 제국은 서유럽과는 달리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도 수백년동안 유지되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던 여러 봉건적 악습을 실질적으로 타파하지 못했다. 비록 1890년대 중반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표면적으로는 급속히 부상하고 있는 듯 하였으나, 국가적 부와는 별개로 농민들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산업혁명으로 노동자들이 급증하면서 서구의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어 1898년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나 급진주의자들의 당인 통합사회주의혁명당 등의 좌파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열악한 처지에 있던 노동자들을 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다.

1905년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봉건적 제정을 타파하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고, 농민과 노동자들은 열악한 경제 상황을 개선시켜줄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에 돌아온 것은 황제의 총칼뿐이었다.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는 더 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1905년 10월 선언을 발표하여 정치 구조를 개혁할 것과 시민들에게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보장을 약속하고, 1906년 헌법을 제정하여 지방의회인 두마 등을 설립하나 실상 이것은 보여주기용이었을 뿐이다. 두마의 권력은 황제에 의해 여러가지로 제한되어 있었다.[1]

그러던 와중,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1차 세계대전이 러시아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전쟁으로 인해 수백만의 젊은이들이 징집당했고, 러시아 정부는 전비의 충당을 위해 막대한 양의 루블을 찍어내게 되었다. 물가가 올라갈 것은 불보듯 뻔했고, 특히 을 비롯한 생필품의 물가는 엄청나게 치솟았다.

농민들은 그들이 힘들여 키운 작물을 지주의 농간으로 헐값에 팔았고, 그 돈으로는 비싼 식량을 살 수 없었다. 노동자들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19세기 초반의 영국이 그랬듯이 기본적인 노동권조차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열악한 위생 상태 속에서 일했으며 쉬는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죽거나 다치는 자들이 속출해도 이들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다.

민생에는 관심없고 전쟁에 빠져있는 차르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감이 높아졌다.[2] 이에 맞추어 자유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 급진적 공산주의자들까지 모두 개혁을 부르짖었고 수많은 정치단체와 노조들이 결성되었다. 1차대전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1.2. 3월(2월) 혁명

제1차 세계대전의 장기화는 러시아 제국의 경제를 더 이상 끝도 보이지 않는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배급제를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고 러시아 국민들은 이 상황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3]못 살겠다 갈아엎어보자

1917년 2월 23일,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이대로는 더 못 견디겠다며 파업을 실시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 파업을 진압하고자 군사력을 동원했으나 오히려 군대가 이 대열에 합류하면서 진압은 커녕 시위와 파업의 불길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한편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에서도 이런 물자 부족은 극심했고 3월 8일 즈음해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물자도 바닥나 더 이상 제대로 된 배급을 하기도 어려워졌다. 이에 먹을 것을 구하러 나온 부녀자들이 분노해 빵과 우유를 달라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규모가 커져 혁명이 되었고 다급해진 니콜라이 2세는 차르에서 퇴위하였다. 황태자 알렉세이가 어렸기 때문에 동생 하일 대공이 즉위해야 했지만, 미하일 대공은 혁명으로 구성된 제헌의회의 동의 없이는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사실상 제정 폐지에 동의하였다. 결국 혁명 임시정부에 의해 제정이 폐지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렸다.

3월 12일, 사회주의자들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결성하고 3월 16일 러시아 임시정부가 결성되었다. 당시 임시정부에는 자유주의자인 게오르기 르보프가 정부수반이 되었으며 후에 카데츠라고 불리는 입헌민주당[4]이 세력을 잡고 있었다. 멘셰비키가 장악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대중의 지지를 얻어가고는 있으나 정부의 요직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강경파였던 볼셰비키가 새로운 혁명을 요구하는 불씨가 되었다.

1.3. 2월 혁명 이후

4월 3일 스위스에서 귀국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여 임시정부를 비난하였다.[5] 당시 레닌은 임시정부를 부르주아들의 집합체로 규정하고 차르 시대의 악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입헌민주당이 주도하는 연립 내각 체제로 10월당[6], 소비에트를 장악한 두 정당인 사회혁명당[7]과 멘셰비키파 사회민주당의 연합이었으나, 경제를 갉아먹는 주 요인인 전쟁을 지속했으며 민중들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소비에트의 지지를 받아 입각한 온건파 사회주의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7월 16일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가 직접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볼셰비키와 연관이 깊었던) '군사 조직'이 봉기를 주도했다. 이때 임시정부는 군대를 보내서 발포하여 봉기를 진압하고 사회운동가들을 체포했으며, 볼셰비키는 사회적으로 독일 첩자 집단으로 낙인찍혀 대대적인 역풍을 받게 된다.

7월 봉기 실패 이후, 르보프 공과 주요 입헌민주당 장관들은 사임했고, 대신 입헌민주당은 봉기 당시 국방장관으로서 실질적으로 국가의 통수권자였던 사회혁명당 당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를 임시정부 수반으로 추대한다. 케렌스키는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8] 내각을 조각하고 여러 사회적 개혁을 단행하여 정부를 잘 꾸려보려고 노력했으나, 전쟁은 계속 한다는 희대의 병크를 저질러 사회혁명당은 즉각적인 전쟁중지와 사회개혁에 중점을 두는 사회혁명당 좌파와 기존 지도부인 사회혁명당 우파로 쪼개지고[9] 케렌스키 역시 지지도를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케렌스키 내각을 실질적으로 붕괴시킨 것은 브르 코르닐로프의 궐기였다.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의 뒤를 이어 러시아의 참모총장이 된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와 공모하여 소비에트를 탄압하고 입헌민주당과 같은 보수파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종의 독재정을 설립하여 혼란에 빠진 국정을 지도하려 했으나, 독재정 통치가 실현되면 자신의 신변조차 위험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케렌스키가 코르닐로프를 해임해버렸다. 이에 코르닐로프는 페트로그라드에 휘하 기병 군단을 파견하고 혁명 직후 군대와 대도시에 결성되기 시작한 여러 군사 사조직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회혁명당, 멘셰비키파, 볼셰비키파가 대동단결하여 노동자들을 무장시켰으며, 소비에트는 노동조합들을 통제하여 각종 사보타주를 지휘하고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던 코르닐로프의 기병대를 선동하여 스스로 무장해제시켰다.

1.4. 11월(10월) 혁명

소비에트의 권위가 확실해지는 가운데,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에게 무력이 쥐어지면서 이들에게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공산주의 볼셰비키 세력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힐 좋은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때 입헌민주당은 이미 코르닐로프에게 동조했다는 혐의로 반혁명 정당으로 완전히 몰린 상황이었는데, 소비에트 안에서 이제 입헌민주당과 손을 끊고 사회주의자들로만 정권을 세우자는 목소리가 커졌으나 케렌스키는 이를 거부했다. 정신 못차린 케렌스키가 계속해서 우파와의 연정을 시도하자 진작부터 "자본주의가 망해야 전쟁이 끝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등 임시 정부 타도운동에 나섰던 볼셰비키가 병사들과 도시 노동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10]

혼란 와중에 병사들이 공산 혁명 정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은 케렌스키에게는 손톱에 박힌 가시와 같은 것이었다. 마침 독일군이 리가를 점령해버렸고 페트로그라드로 접근해오자 케렌스키는 페트로그라드를 수비하고 있던 병력을 전장에 있던 병력과 교대할 필요가 있다며 공산주의에 오염된 병력을 페트로그라드 밖으로 내보내고 어느 정도 숨통을 트려 했는데, 소비에트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케렌스키의 명령을 거부해버렸다. 명령 거부 사태 직후 볼셰비키는 몇몇 좌파 사회혁명당 인사들과 함께 이른바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자신들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공포해버렸다.

수도의 군사력을 대부분 집어삼킨 볼셰비키가 11월 7일에 예정되었던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를 기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소비에트와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할 것이라는 우려가 퍼지자, 케렌스키는 마지막 발악으로 11월 6일 볼셰비키의 신문 인쇄소를 봉쇄했고 이를 기점으로 레온 트로츠키가 혁명을 일으킬 것을 지시, 임시 정부가 위치한 울 궁전을 제외한 모든 정부시설이 볼셰비키의 손에 들어갔고 7일 새벽에는 겨울 궁전도 볼셰비키가 점령하면서 러시아는 물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이 당시를 묘사한 소련 영화에서는 임시정부의 군대와 볼셰비키군 사이에 엄청난 유혈 충돌이 벌어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혁명의 선전을 위한 허구이다. 실제로는 11월 6~7일 당시의 페트로그라드는 조용했으며, 겨울 궁전 등의 정부 시설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극소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뿐 혁명 자체는 비교적 평화롭게 끝났다.

볼셰비키의 통치 하에 11월 선거를 거쳐 제헌의회가 열렸으나 사회혁명당이 주도하는 제헌의회가 의회민주주의, 사민주의적 방향으로 흘러가자 곧장 강제로 해산되었다. 케렌스키를 비롯한 임시 정부 인사들은 외국으로 망명하였는데, 이중 케렌스키는 외국 대사의 부인으로 여장을 한 채 도주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미국을 거쳐 1970년까지 89살 장수를 누렸다. 물론 조국 러시아에 죽어서도 돌아가지 못했지만.[11]

1.5. 파장의 확산

혁명 이후 레닌은 독일에게 유리한 협정을 맺으며 사실상의 항복을 한다.[12] 독일은 레닌을 지원하며 노린 것을 이뤘다. 그러나 이 시점에 독일의 전세도 이미 호전시키지 못 할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이미 독일은 전쟁의 장기화로 물자 부족이 심각했고, 영국의 끈질긴 노력 끝에 미국이 참전하면서 더 못 견딜 낭떠러지로 밀려났다. 1918년 독일 해군의 반란으로 독일 11월 혁명이 일어나 독일 제국은 항복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뒤 러시아 내부에서 반볼셰비키 세력이 다시 규합해 적백내전이 일어났고 연합군도 반 볼셰비키 세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미 전쟁에 질렸고 러시아 민중들이 공산정권을 지지했기에, 끝내 볼셰비키가 승리하여 소련을 건국한다. 한편 내전기 때 백군의 구출 계획을 듣자 볼셰비키는, 퇴위 뒤에도 살아남았던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을 총살시켰다.

러시아의 공산혁명은 반자본·반제국을 외쳤고 지배세력을 타도했다는 이미지 때문에 서유럽 내 사회주의 세력들에게는 물론 당시 열강의 침략에 신음하던 나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소련도 제국주의 침략에 신음하는 국가들이 공산주의가 퍼지기 좋은 환경임을 알았다. 따라서 이들 국가에 반제국주의·반침략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는 명목으로 공산주의를 알려, 전세계에 공산주의가 퍼져나갔다. 실제 여러 방법으로 지원했는데 민족주의 운동에도 상당한 지원을 뒷받침했다. 당장 우리나라에 왜 1920년대를 전후로 사회주의가 퍼졌나 생각하면 쉽다. 우드로 윌슨족 자결주의 실체가 3.1 운동의 실패로 명백히 드러난 뒤라 열강에게 실망감이 늘었다. 이 때 소련이 직접적으로 반제국주의 운동을 지지할 뿐더러 직접 지원까지 한다는데, 당연히 지지하는 사람이 나온다. 당장 쑨원만 해도 국공합작을 지지했으니... 이런 분위기는 해방 직후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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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의회라고 하면서 이들은 내각을 임명할 수 없었고, 황제가 임명하는 내각의 사퇴도 요구할 수 없었다. 전체 예산 중 40%를 차지하는 국방예산을 황제가 좌지우지할 수 있었고, 입법을 거부할 권리도 있었다. 거기다 사실상 상원의 역활을 하는 국무협의회는 두마와 거의 동등한 지휘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니콜라이 2세는 공식적으로 전제군주 직함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뿐인 입헌군주제였던 것이다.
  • [2] 하지만 국민들은 차르를 여전히 존경하여 1차대전 초기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쟁을 지지했다. 이 전쟁을 반대한 자들은 레닌을 비롯한 약간의 공산주의자들뿐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레닌의 예측은 점점 맞기 시작한다.
  • [3] 그러나 한쪽에서는 연극 표가 매진되고 유명 레스토랑의 개점에 페트로그라드 전체가 들썩이고 사치 풍조가 만연하는 등 양극화가 극심했다.
  • [4] 차르의 복위를 주장하는 왕정복고파, 입헌민주주의파, 자유주의 공화파, 그리고 서구적 헌정을 추구하는 지식인 계층의 연합이었다. 2월 혁명 이전 차르가 통치할 때는 개혁파 야당으로, 혁명 이후 임시정부가 성립되면서는 보수파 여당의 위치를 담당했으며 반볼셰비키파의 핵심이 된다.
  • [5] 레닌은 4월 테제에서 인민을 억압하는 군대와 경찰을 폐지할 것을 요구했고 사유재산을 없앨 것을 강력히 주문하였는데, 사실 너무 급진적인 의견이라 당시 볼셰비키 사이에서도 지지받지 못했다.
  • [6] 입헌민주당보다 약간 더 보수적인 정당으로, 입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입헌군주정 구축을 추구했으며 당내 좌파는 당적만 다를뿐 실질적으로 입헌민주당원이었다. 주로 거대 자본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 [7] 19세기 후반 나로드니키 운동에서 촉발된 사회주의 사상으로 설립된 당으로, 불법화되어 지하당 생활을 하다가 2월 혁명 이후 합법화되어 농민들의 큰 지지를 얻고 급성장하였다. 2월 혁명 이후에는 사회혁명당이 좌파 내에서 가장 컸으며 이 당시에는 좌파=사회혁명당 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니었다.
  • [8]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자는 레닌을 필두로 한 볼셰비키가 아니라, 말 그대로 범사회주의자들을 의미한다. 7월 봉기 시점에서 이미 병사들과 공장 노동자들은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보수주의적인 농민들은 농지 개혁을 외치는 사회혁명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농민 계급이 볼셰비키로 돌아서는 건 10월 혁명 막바지나 되어야 했다.
  • [9] 사회혁명당 지도부는 10월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반대했으나 사회혁명당 좌파는 볼셰비키를 지지했다.
  • [10] 다만 이 구호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구호로 도리어 쿠데타 직전엔 아예 포기했다. 힘으로 먹으면 되거든
  • [11] 케렌스키는 이케다 리요코 만화 오르페우스의 창에선 권력을 탐하는 이로 좀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 [12] 그 당시 러시아 영토였던 동유럽 지역을 몽땅 빼앗겼다. 핀란드,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