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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last modified: 2015-09-18 18:48:59 Contributors

독일어 : Ostfront (동부 전선), Deutsch-Sowjetischer Krieg
러시아어 :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대조국전쟁)[1]
영어 : Toxic WarEastern Front(동부 전선)



Contents

1. 개요
2. 전쟁의 배경
2.1. 히틀러의 의중은?
2.2. 스탈린은 정말 몰랐을까?
3. 참전국
3.1. 연합국
3.2. 추축국
4. 경과
4.1. 1941년 몰려드는 먹구름
4.2. 1942년 전세의 전환점
4.3. 1943년 거짓 새벽
4.4. 1944년 붉은 해일
4.5. 1945년 하켄크로이츠의 추락
5. 전쟁이 남긴 것
5.1. 전쟁범죄
6. 연표
6.1. 1939 ~ 1940년
6.2. 1941년
6.3. 1942년
6.4. 1943년
6.5. 1944년
6.6. 1945년
7. 여담
8. 의의
9. IF 시나리오
10. 독소전쟁 연구의 변화
10.1. 냉전 이전까지의 소련 측 연구
10.2. 냉전 이전까지의 서방측 연구
10.3. 냉전 이후
11. 독소전을 다룬 대중문화
11.1. 영화
11.2. 게임
11.3. 그 외

1. 개요

내가 유일하게 배우지 못한 말 그것은 바로 항복이라는 말이다,
우리 도이칠란트 역사에 항복이라는 단어가 적히지 않을 것을 온 세계에 선언하노라.
- 아돌프 히틀러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이오시프 스탈린


보헤미아의 상병을 위해 죽을 수는 없지.
-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인류 역사상 최대, 최악의 전쟁.[2]


youtube(p7xIUME1TIQ)
2차 세계대전 재조명 - 4편 히틀러 소비에트 연방을 치다

독소전쟁의 진행과정을 보여주는 사이트 여러 전투와 관련된 실제 사진과 영상들이 존재한다. 파랑이 추축 군, 초록색이 연합군, 빨간색이 소련군.


제2차 세계대전에 속한 하나의 전쟁이자 당시 나치 독일소비에트 연방 사이에서 일어난 4년간의 전쟁. 그러나 그 규모는 모항목인 제2차 세계대전을 제외한 모든 전쟁보다 크다. 1941년 6월 22일, 독일 제3제국소련대규모로 침공하면서 발발했으며, 1945년 5월 8일까지 약 4년 간 지속되었다. 전쟁 초중반까지는 평화협상을 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후반이 되면서 그 기회를 죄다 날려버린 전쟁.

현재까지 인류가 치른 무수한 수의 전쟁 중 가장 거대한 규모로 치러졌으며, 최악의 피해를 남긴 전쟁이다.[3] 민간인과 군인을 합한 소련 측 사망자는 2700만이 넘고, 전사자는 천만에 육박한다. 독일군도 350만의 전사자를 기록했다(전상이 아니라 전사 및 실종자만 이 정도이다). 리처드 오버리의《독재자들》에 따르면, 소련은 2900만 명을 동원했고, 독일은 1800만 +α(동맹국 + 점령지의 수백만 인구)를 동원했다. 게다가 독일의 동원인력 중 대부분이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절대 숫자 단위가 잘못된게 아니다!

그 직전까지 치러진 전쟁에서는 중일전쟁이 그나마 가장 넓은 판도에서 치러진 전쟁이지만 민간인 희생자[4]만 엄청나게 많았지 대규모 교전도 별로 없었고 일본 제국이 일방적으로 쳐들어간 뒤에는 판도 유지에 급급해 소강상태가 몇 년이나 이어졌지만, 독소전쟁은 1941년 6월 개전 후 1945년 5월 끝날 때까지 도로사정이 안 좋은 봄-가을의 환절기를 제외하면 계속 대규모 전투가 치러졌고 쌍방 모두 엄청난 병력이 동원되었다. 한개 전투에 쌍방이 백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한 사례도 꽤 되는데, 가령 저 유명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양측 합쳐 무려 2백만명이며 이중 상당수는 군인이다. 즉 두 나라간의 전쟁에서 발생할 법한 수치의 사상자를[5] 일개 전투에서 소모할 만큼 매우 규모가 크고 참혹했던 총력전 대 총력전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면 안 되는 이유를 보여준 전쟁

그 규모가 워낙 큰 탓에 핵무기가 개발된 이상 더 이상 이런 전쟁은 어렵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일단 핵으로 무장한 강대국 간의 총력전은 결국 전면 핵전쟁으로 모두의 공멸을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Pobediteli에서 상세한 자료와 해설, 그리고 한눈에 보이는 지도로 독소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관심이 있다면 참조.

2. 전쟁의 배경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게르만-아리안 인종의 '동방생존권'인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 유대-볼셰비즘을 제거하고 '열등인종'인 슬라브족을 쓸어버림으로서 최종적인 '천년제국'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소련을 격파하여 굴복시킴으로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영국을 굴복시킨다.'라는 히틀러 특유의 전략적 사고방식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히틀러의 의중에서 어느 쪽이 더 비중이 컸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자료가 밝혀질수록 논란만 가중되고 있다.

히틀러는 집권 전부터 공공연히 공산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의 원인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으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 대해서 대단히 적대적이었다.[6] 집권 후에는 이것이 국가 정책이 되었으며, 위협을 느낀 소련은 다자안보체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소련의 심 리트비노프는 이를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소련은 겨우 체코슬로바키아와 군사협정을 체결하였으나, 체코슬로바키아는 1938년 나치에 의해 합병되었다. 1939년 봄까지 소련은 다시 서방측과 군사협정을 맺으려 했으나, 독일과 소련의 중간에 낀 폴란드(당시 영-프와 동맹관계)가 만약 독일에 침공을 당하더라도 소련군이 이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함으로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소련은 독일의 침략에 홀로 맞설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몰리게 되었다. 이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유대인인 리트비노프를 해임하고 직속 부하인 몰로토프를 외무장관으로 앉혀 독일에게 친화적인 제스처를 보냈다.

한편으로 히틀러도 침략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계획의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소련이 개입하면 초장부터 만사를 그르칠 수 있으므로 소련에게 추파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1939년 8월 소련에게 전보를 보내 불가침 조약을 타진하였고, 폴란드 침공 직전에 독일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과 경제협정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에 의해 소련은 폴란드를 독일과 나눠먹고, 독일과 소련은 상대방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것을 묵인했으며, 독일은 소련에 기계류를, 소련은 독일에 자원을 공급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때 독일이 준 프레스 기계가 소련에서 T-34를 만들었다

소련은 1939~41년 사이에 독일의 전쟁에 대체로 협조적이었고 같은 슬라브계인 유고슬라비아가 공중분해 되거나 자국의 영향권이라고 인식한 핀란드불가리아에 독일이 손을 뻗어도 침묵하는 등 우호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물론 스탈린도 히틀러가 쳐들어 올 것에 대비를 하긴 했는지, 폴란드 점령 후 스탈린 라인을 뜯어다 앞에 짓기도 했다. 근데 1937년 쯤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장군들 모가지가 전부 날아가 버린 데다 제대로 된 장교는 거의 있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개판이 난 붉은 군대가 제대로 싸웠을 리가 없다.

이런 상황은 1941년 전반기 독일의 소련 침략 징후가 급속히 불거진 후에도 지속되어 스탈린은 서방 세계와 추축국에서 전해지는 막대한 첩보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심지어 자국 영공을 침범하는 독일 항공기에 대해서도 발포하지 않고 대응하지 말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이것은 독소전쟁 초기 소련 공군이 독일 공군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 원인이 되었다.

소련은 독일이 서부에서 전쟁을 치르는 내내 독일에게 물자를 제공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하루 전에도 물자를 가득 실은 열차가 독일 국경을 넘었다.

2.1. 히틀러의 의중은?

히틀러가 영국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소련 침략을 개시해 양면전쟁 구도로 만든 것은 전략적으로 완전한 병크였다.[7][8] 그러나 히틀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나름의 이유는 가지고 있었다. 위에 이유로 든 경제적, 이념적 이유 외에도 군사적인 이유도 나름대로 있었다. 그리고 소련 반대편에는 동맹국 일본이 있었다.

전해에 독일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했는데, 영국의 정복을 위해서는 보다 훨씬 강력한 해군이나 공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틀러는 수십 개 사단을 해체하고, 그 돈으로 해군과 공군을 증강할 계획을 세웠지만, 400만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유사시 천만 이상 동원할 수 있는 소련을 앞에 두고 육군을 줄이기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당시 독일과 소련의 인구 비는 1:2이었으므로 유사시 동원능력도 차이가 났다.[9]

게다가 무엇보다도 히틀러가 가장 부담스러워 했던 것은 미국의 참전 여부였다. 당시 미국은 국내의 고립주의자들의 반대 때문에 직접 참전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영국 지지를 공식적으로 천명했고, 루즈벨트의 민주주의 병기창 정책으로 합국에 엄청난 물자 지원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빠른 미래에 이루어질지도 모를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은 독일에 매우 큰 위협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미국이 변심해 이 전쟁에 개입하기 전까지 소련이라는 눈앞에 놓인 시한폭탄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전 세계가 놀랐던 이유가 절대 손을 잡을 것 같지 않았던 두 나라가 손을 잡은 데 있었을 만큼, 독일과 소련은 결코 서로 간에 믿을 만한 국가가 아니었고 언젠가는 서로를 침공할 것이라는 예측을 이미 상호간에 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해두지 못한다면 영미를 막느라 상당히 약화된 상태에서 소련의 침공을 받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봉착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이는 어느 정도는 필연적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폭탄을 제거함과 동시에 독일의 고질적 문제였던 자원과 레벤스라움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으니 히틀러 입장에서는 참기 어려운 유혹, 아니 도박이었을 것이다.

대(大)육군 국이었던 폴란드와 프랑스를 기갑부대를 이용한 최소한의 희생으로 한달 정도의 단 시일 안에 정복했듯이, 한창 물이 오를 대로 올라있는 육군을 동원하여 기습공격을 한다면 소련을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다. 당시 독일군 육군 참모본부도 소련은 10주의 작전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작전 안을 내놨는데, 이는 히틀러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물론 만슈타인, 할더, 구데리안, 룬트슈테트 등 독일군의 주요 상급지휘관 및 참모들은 1차 대전의 악몽이 재현될까봐 대부분 소련 공격을 반대했다.

히틀러는 일단 쳐들어가기만 하면 공산통치에 염증을 느낀 소련 국민들이 독일군을 환영하여 소련체제는 공격 즉시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10] 실제로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등은 처음에는 독일군을 스탈린의 학살, 숙청, 공포 정치에서 해방시켜준 군대라고 환영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독일군의 보답은 혼돈, 파괴, 망가학살, 파괴, 약탈.[11]

그러다보니 독일군의 잠재적 협력자가 될 만했던 우크라이나인이나 발트3국인도 모두 독일군에 등을 돌렸고 후방에서 빨치산을 하든지 소련군에 앞장서 입대했다. 애초에 소련 인을 박멸하려고 생각하지 않은 이상 그런 침략을 하지도 않았겠지만. 히틀러는 이 침공 작전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었는데, 일단 소련 인을 열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12], 절대로 무적의 독일군이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련은 대 육군을 보유하고 있지만 서방에서 최강 대 육군을 보유하고 있다던 프랑스도 수도인 파리가 함락 당하자 바로 무너지지 않았던가. 소련 체제가 막장이기 때문에 범위만 컸지 군사작전의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히틀러는 소련을 매우 과소평가하고 있었고, 소련 정복은 쉬울 것이라고 예상했으나[13], 초반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무너지지 않았다. 게다가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은 미국에도 선전포고를 해버렸는데 독일의 3국동맹이 있었다지만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기 때문에 독일이 굳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안 해도 무방했다.[14]

사실 이 선전포고에는 일본이 중국 그만 때리고 소련으로 발 돌리길 요구하는 의미도 섞여 있긴 했지만 일본은 뭐... 덕분에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해상보급에 연명하는 영국이 독일의 유일한 상대였으나, 이제는 물량이 승패를 결정하는 현대전에서 세계 1, 2위의 공업국을 상대로 자진해서 전쟁을 벌이는 자살적인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물량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2.2. 스탈린은 정말 몰랐을까?

  • 긍정론
    후대의 많은 연구자들은 스탈린은 '진심으로'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영국 공군이 소련의 바쿠 유전에 대해 폭격을 검토할 정도로 소련은 독일에게 많은 전쟁자원을 공급했다. 아마도 스탈린은 소련이 독일에 전쟁 물자를 계속 공급하는 한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독일 점령하의 유럽과 일본에 산재한 소련 간첩들은 독일의 공격징후를 1년 전부터 계속 보고했지만, 스탈린은 이런 정보가 오히려 독일의 역 공작이 아닐까하고 의심했다.

    히틀러는 소련 공격 준비명령을 내려놓고도 소련 측을 안심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낚시를 내걸었다. 전쟁 1년 전 소련 외무장관 로토프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히틀러는 몰로토프에게 "대영제국은 이미 망했소, 소련이 독이일 3국 동맹에 가입하면 인도를 나눠 주겠소."라고 제안한다. 이때 이미 히틀러는 소련 공격준비 명령을 내려놓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는 단순한 낚시라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노회한 몰로토프는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독일의 동유럽 위성국[15] 확장에 대해서 항의했다. 또한 하필이면 그날 영국 공군이 베를린을 폭격하여 몰로토프는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함께 방공호로 대피했다. 그때 몰로토프가 한 말이 걸작이다. "대영제국이 패배 직전이라면, 이 방공호에 떨어지는 폭탄은 누구 것이오?"[16]

    스탈린의 문제는 히틀러를 너무나 '정상'으로 생각한 것이다. 스탈린은 독일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굉장히 고심했고, 그리하여 전쟁 1달 전부터는 독일의 침공 징후가 확실했는데도 소련군에 경계경보를 내리는 것을 주저했다. 주코프 회고록을 보면 당시 국방장관인 티모셴코 원수와 총참모장인 자신은 계속 경계령 발동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그게 오히려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하루 전인 6월 21일에야 경계령을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독일군 특공대들이 소련군 제1선 부대들의 통신망을 절단하여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스탈린은 히틀러가 정상적이라는 기본 전제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는 명분이나 우발충돌만 억제하면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월경해서 정찰활동을 하는 독일의 정찰기나 정찰부대에 대한 대응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들며 소련군 상황을 정찰할 수 있었고, 이는 소련군의 초반 참패를 초래했다.

    물론 스탈린처럼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벌이는 캐 삽질에 도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정상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면 전선을 막 넓히는, 그것도 양면에서 적과 2:1로 싸우는 미친 행위를 하겠는가? 그것도 영국이란 강대한 적을 놔두고 말이다.

    실제로 독일은 1차 대전 때 동서 양쪽에서 전선을 형성하여 싸운 끝에 망했다. 비록 2차 대전 초반에 프랑스를 항복시키면서 적어도 육군은 소련 쪽으로 집중할 수 있을 듯이 보였지만 이탈리아 덕분에 북아프리카 전선이 개막했고 이탈리아군 보조하면서 대충 시간이나 끌라고 보낸 롬멜은 오히려 공세에 나서면서 지원 더 보내달라고 난리였으니(...).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히틀러는 10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희대의 돌아이였고 스탈린만 그걸 모르고(혹은 믿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사실 스탈린뿐만 아니라 영국의 체임벌린 내각이나 프랑스의 달라디에 내각도 앞서 오스트리아 합병이나 뮌헨 회담의 주데텐란트 강탈 등에서 히틀러가 희대의 돌아이라는 걸 모르고 상식인의 선에서 판단했다가 매우 큰 엿을 먹었다.


  • 부정론
    스탈린도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르다 못해 대숙청까지 저지른 인간인 만큼, 히틀러에 대한 대비를 하긴 했다. 위에서 말한 '스탈린 라인'이 바로 그것.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그 이후도 잠시 동안이나마) 독일의 강력한 육군의 적수는 없었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했다고 해도 영국이 딱히 상륙할 것도 아닌 이상 독일의 패권을 위협하기에는 약했다. 즉, 독소전이 개시되어도 딱히 양면전쟁이라고 말하기에도 뭐하다. 게다가 소련과 겨울전쟁으로 맞붙은 다음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는 핀란드가 추축국으로 붙었으니 장기적으로 뭔 생각인지 아주 뻔히 보이는 상황. 유럽의 최강국이자 패권국가가 된 독일을 앞에 두고, 또한 보여준 전쟁 실력을 보고, 거기에 핀란드 등의 움직임을 보고 전쟁에 대한 준비를 안 하는 것이 이상하다. 그래서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을 직접 딴 스탈린 라인을 독일의 앞에 지으려 한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 라인'은 독소전 최대의 오산 중 하나로 꼽힌다. 일단 폴란드 함락 이후에 만들어졌으니 만들 시간이 부족해서 미완성이었다. 또한 원래 폴란드 국경에 짓고 있는 방어선을 포기하고 만들게 됨으로서, 새로운 방어 작전을 대숙청 이후의 빈약한 장교 진으로 짜야 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주둔하게 된 소련군들은 그동안 훈련하던 지역이 아니라 새로운 지형으로 오게 되었으니 당연히 역량이 감소되었다.

    만약 스탈린 라인이 계획대로 완성되었다면 독일이 맞닥뜨릴 소련은 대숙청 이후로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복구된 군대와 스탈린 자신의 이름을 딴 강력한 방어선과 그곳에 있는 패권국가인 독일에 대응할만한 (나름 정예) 병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원래 짓던 폴란드의 방어선까지 탄탄하게 2중으로 갖추었을 수도 있다. 스탈린 또한 전쟁을 싫어하는 인물도 아니며, 독소 불가침 조약은 누구나 있을 수 없는 조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부 학자는 독소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준비된 소련의 선제공격'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최소한 미국에게 털리는 중에 뒤치기는 했을 듯하다. 이 경우에는 서부 전선에서 미국과 영국에게 털리는 와중에 양면전쟁이 개시된다.

    당연히 소련 입장에선 대 독일전쟁 계획이 없다고 하면 당연히 약체화된 군과 없다시피 한 방어벽으로 떠오르는 태양인 독일 제3제국과의 전쟁은 극구 피해야 할 것이다. 대 독일전쟁 계획이 있다면 이쪽도 당연히 시간을 끌어야 한다. 많은 시간도 아니다. 3~5년 정도만 있으면 대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스탈린이 독일에 선제공격 가능성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전쟁을 피한 것은 이러한 까닭일 것이다. 전쟁을 피하고 어떻게든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가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별 수 있나. 뭐, 이런 상황 자체가 대숙청 벌여서 어쩔 수 없던 거지만.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독일의 선제공격은 비교적 탁월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탈린의 내숭과 앞날을 내다본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스타크래프트로 치면 상대가 스스로 고급유닛을 자폭시키고 짓던 방어선 취소하고 새로운 방어선은 아직 미완성이고(스탈린 라인) 정찰 또한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상대 유닛 위치 다 아는(스탈린의 대응) 최고의 상황을 적이 마련해 준 것이다. 언젠가 한판 붙어야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 선제타격은 말 그대로 필연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대숙청이라는 희대의 실수로 자산을 잔뜩 날려먹긴 했지만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스탈린은 언젠가 한판 붙을 것을 예상은 하고 있었고 나름 대응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전쟁이 터지지 않거나 몇 년 늦게 터졌다면, 스탈린의 시간 끌기는 현명한 도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터져버렸고, 독일은 소련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이 이론에는 한 가지 큰 허점이 있는데, 히틀러가 전략적인 이유로 소련을 침공했다는 가정이다

전쟁 초에 소련의 도박은 실패했고, 독일의 도박은 성공하는 걸로 보였다.

3. 참전국

3.1. 연합국

3.2. 추축국

4. 경과

4.1. 1941년 몰려드는 먹구름


독일육군 최고사령부(OKH)의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도.

침공 당시 소련 육군은 많은 면에서 열악했으며 특히 군대의 사기, 전술체계, 명령체계, 지휘통신체계, 보급, 장비 등 모든 면에서 독일군에 비해 열세였다. 게다가 개전 직전 상황은 그 이전의 소련에 비해서도 막장이었는데 이는 대숙청 이전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종심 작전 이론을 창안한 투하체프스키와 신진 장성들을 지원했으며 발전된 기계화 부대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는 영국의 리델 하트, 퓰러, 프랑스의 드골이 기갑부대의 집중 운용을 주장해도 번번히 무시당하고 히틀러도 전차를 대외과시용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던 때라 붉은 군대가 큰 발전을 이룩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숙청 때 투하쳅스키가 처형되면서 소련군의 발달하던 작전 교리라든가 기계화되던 부대 구조 등이 말 그대로 전부 원상 복귀되어 버렸다. 특히 전쟁 직전까지 스탈린이 독일군의 침입 내지 도발에 반응하지 말라고 강력히 지시했기 때문에, 굴라그에 끌려가고 싶지 않았던 많은 소련군 병사와 장교들이 극 초반 독일의 침공에 매우 수동적으로 반응했고 그 결과 손 써볼 틈도 없이 괴멸당해야 했다. 물론 이 명령은 개전 수 시간 만에 철회되었다. 애시 당초 소련군의 패배 원인이 현지 사수 및 축차소모 등의 비현실적인 전략이었던 만큼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사정은 공군도 마찬가지였다. 대숙청 기간에 유능한 장교들이 피해를 입어 마치 척수가 뽑혀나간 상황이나 진배없었던 것이다. 공군 사령관 야코프 블라디미로비치 스무쉬께비치 중장을 위시한 스페인 내전의 베테랑들 상당수가 투옥되거나 사형당한 것이 시작이었다. 스무쉬께비치의 후임자인 파벨 바실례비치 뤼차고프 중장은 신기술 도입과 선진 교리 숙달에 적극적이었고 개전 시 선제 권 획득을 위한 상시 준비태세 수립을 주장했으나, 결국 대숙청의 희생양이 되어 독립 항공전대장으로 소령 계급이던 아내와 함께 재판 없이 처형당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 자원한 에이스이며 창의적인 관리자로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공군 사령관에 발탁되었으나, 결함이 많은 기종에 대해 "우리 조종사들은 관을 타고 비행하고 있다!"고 일갈할 만큼 깐깐하며 지도층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 외에도 젊고 실력 있는 장성들과 실전 경험이 풍부한 조종 장교들 상당수가 개전을 전후하여 처형되었다. 설계국도 예외는 아니라서 뛰어난 기술자들도 사소한 결함이나 사고로 문책을 당해 처형되거나 감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18] 게다가 공군은 조종사나 기술자 등 인적 자원의 의존도가 육군보다 오히려 높으면 높았지 낮지 않았고, 이러한 대숙청은 공군 전력에는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그 결과 소련 공군은 육군과 다름없는 상황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해군의 경우엔 육-공군에 비해 타격이 크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이를 두고 "공산 혁명 당시 해군 수병들이 혁명에 적극 가담해서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해군도 인적 자원 면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단지 소련 해군의 전력은 예조프시나를 겪기 이전부터 듣보잡 수준이었고, 독소전쟁 때 소련 해군의 존재감이 매우 미약하다 보니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그 참상이 돋보이지 않은 것뿐이다. [19] 이때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 대장과 같이 부하들의 공훈을 확인하고 신원 보증을 서 주며 대숙청에 용감히 저항한 지휘관들도 있지만, 이들의 힘만으로 해군 장교단의 약체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6월 22일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독일 공군은 미리 다 파악해둔 소련 공군 기지를 공습해 항공기들을 대파했고 불과 며칠 만에 1,200여 기의 항공기를 파괴해 제공권을 장악해버렸다. 더구나 전격전의 논리에 따라 시작된 300만 명이 넘는 독일 육군 3개 집단군의 대대적인 공격은 수동적 대응에 익숙했던 소련 육군에게 파멸적 선고였다. 소련군은 선진 이론과 추진력을 겸비한 뛰어난 지휘관들에 의해 양성될 기회를 놓친 채, 그렇게 독일군의 파상 공세에 직면했다.

처음 몇 주간 소련군은 괴멸적인 피해만 입었으며 수십 개의 사단을 잃었다. 독일군은 제공권을 순조롭게 수중에 넣고 폭발적인 속도로 진군하여 불과 몇 주 뒤에는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 발트 3국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9월까지 2백만 명 이상의 소련군이 전사하였다. 이 시기 소련과 독일의 병력 손실 비는 20:1에 달했다. 소련은 중요한 곡창지대와 산업 중심지들을 상실했다.

이 시점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자명해 보였으며 작전 당시에 OKW가 목표하였던 A-A선의 확보는 현실로 다가온 듯하였다. 영국과 미국의 지도자들도 소련이 몇 달 못가 붕괴할거라고 예측했으며 독일의 히틀러도 그렇게 예상했다. 히틀러는 겨울이 오기 전까지 우랄 산맥까지 제패할 수 있을 거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소련은 수백만의 예비 병력을 끌어 모아 괴멸당한 사단과 군단들을 대체했다. 원래 개전 초 독일은 소련이 약 180여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보고 있었고 개전 초 이 사단들 대부분이 전멸 상태가 되자 진격을 막을 병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련의 군 동원 능력과 물자 생산 능력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있어서 180여개의 사단을 뚫어내니 이번에는 360여개의 사단이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20][21] 그만큼 독소전에서 서로가 끝장이 날 때까지 모든 인구와 자원을 쏟아 부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더해서 모든 산업을 후방으로 옮기는 엄청난 사업을 단행했다. 이는 특히 무기와 탄약과 장비를 생산하는 중공업 시설이 대부분 이동이 불가능한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것이다. 당장 용광로 같은 것은 평시에도 이동이 불가능해서 용광로 건물을 지을 때 함께 현지에 건설된다. 게다가 소련의 교통시설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나마 루프트바페의 공습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련 공장과 제철소들, 노동자들은 독일군이 지척까지 닥쳐와서도 무기를 생산하거나 공장 기재를 분해해 이송하는 작업에 열중했으며 몇몇은 너무 늦어서 독일군이 들이닥쳐서도 그 일을 계속했다. 말이 쉽지 몇 마디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정말 황당하고 엄청난 일이다. 울산과 포항을 불과 몇 주 만에 통째로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몽땅 뜯어서 옮긴다고 생각해보라. 소련은 서부의 공업도시 수십 군데의 모든 설비와 수백만 노동자를 모두 열차에 싣고 수천km 떨어진 우랄산맥 근처의 황무지로 이전했다.(심지어 그 가족들까지) 아무런 인프라가 없는 황무지 한복판에 내팽개쳐진 이들은 오로지 열차를 통해 공급되는 얼마 안 되는 식량에만 의지한 채[22] 공장을 다시 조립하고, 아무런 장비도 없이 스스로 도시를 건설했다.

다른 문제점도 있었다. 전쟁 초기 히틀러는 모스크바는 별 가치가 없다고 보고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길 원했는데 이 조치로 모스크바는 최소한의 방어력을 강화할 시간을 벌었다. 각지의 소련군은 괴멸당하면서도 대부분 격렬히 저항했고 열악한 소련의 도로 상황도 독일군의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프랑스와는 비교도 안 되게 광대한 소련의 국토와 빈약한 교통망은 1940년 5월의 전격전을 고려하고 있던 독일 군부를 난감하게 만들었다.[23]

1941년 남부집단군과 구데리안이 기갑부대는 키예프의 소련군에 타격을 입히고 구데리안의 부대는 스몰렌스크의 중앙 집단군에 합류하여 모스크바로 진격 하였다. 그러나 10월부터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남부집단군에 대한 지원으로 인하여 소련에게 방어를 강구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특히 폭우로 인하여 전선부터 보급선이 모두 뻘로 변하여 기갑부대와 기동력이 저하 되는 등 독일군은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을 계속 격파하며 모스크바 교외까지 다다랐지만 소련 정부는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졌다. 이즈음 독일의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는 포위가 시작되었다. 모스크바의 상황도 암담했지만 스탈린은 도시를 포기하지 않았고 수백만의 시민을 동원해 방어설비를 축조하고 병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게다가 그 당시 독일이나 서방에서는 거의 무명이었던 할힌골 전투의 영웅, 주코프 대장[24]이 급히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전임해 와서 방위 전을 지휘했다.

결정적으로 그 해 겨울이 조금 일찍 찾아오자 방한장비가 별로 없던 독일군은 치명타를 맞았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소련군에 의해 모스크바 공격이 좌절되고, 물자가 얼어붙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모스크바 공략을 포기했다. 그러는 동안 소련은 엄청나게 많은 예비 병력을 소집해 훈련하고 배치했으며 공장과 산업설비들의 후방배치가 끝나면서 곧바로 소련이 전쟁 중 내내 드러내었던 막대한 물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시설 이동과 재배치는 막대한 혼란을 일으켰고 정부의 강제에 엄청난 반발과 저항이 있었지만 소련 정부는 '조국 어머니 러시아'를 지키기 위한 논리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모스크바 공방전 때 소련군의 반격으로 밀리면서 독일군의 전선이 붕괴위기에 쳐하자 독일군 수뇌부는 화학무기 사용을 진지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화학 무기가 사용되면 적도 당연히 보복으로 쓸 것이고, 기동전을 장기로 하는 독일군의 주요 수송수단인 말을 보호할 수 없어서 화학무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독일군 하면 기계화 부대가 연상되지만, 실제로 기갑부대나 장갑척탄병을 제외한 보병이나 포병의 수송력은 말에 의존했다.

1941년 6월 소련이 처음 침공 당했을 때 크렘린의 억압에 짓눌려 있던 많은 국가와 사람들이 독일군을 환영했다. 당장 1년 전까지 엄연하게 독립국이었던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최소 300만 명이 굶어죽은 우크라이나 주민들, 스탈린이 자치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린 체첸은 크렘린에 대항해 침략자들을 도울 것이라는 견해가 팽배했다. 실제로 소련 당국도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예상했다. 그리고 실제로 독일군이 침공하자마자 이 지역들은 반소 게릴라 운동이 일어나면서 독일군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다만 체첸은 독일군이 진입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게릴라 활동으로 소련을 애먹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전쟁 전에 열등 인종인 슬라브족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 필요가 없으며 승자가 정의이며 진실이라는 논리에 충실하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외치는 슬라브족은 러시아인 뿐 아니라 소련 치하의 민족들을 모두 싸잡은 개념이라는 것. 이런 상황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적대자에게 증오를 품고 이를 폭력적으로 해소하려고 들기 쉬운 병사들을 통제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당장 총통이 공언했는데 어느 장교가 쉽게 말릴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부분적으로는 역시 나치의 이념에 빠진 간부들이 이런 상황을 조장하고 방치하기도 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주인공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반 나치주의자로 전향한 계기 또한 독소전쟁에서 저지른 독일군의 학살을 목격한 것이었다.

게다가 독일군을 뒤따라 들어온 나치 친위대와 인종청소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이 자행한 인종 학살과 약탈, 강간, 학살, 촌락 파괴와 같은 각종 만행은 침략자들을 환영하던 피억압 민족들의 마음에 도리어 적개심만 품어주며 '좋은 계모보다 나쁜 생모가 낫다' 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나치 독일이 좋은 계모인지는 따지지 말자

1941년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과 설비 이동, 독일군의 방치와 학살로 또다시 무수한 우크라이나인들이 떼죽음을 당했으며 발트 3국이나 벨로루시라고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이 지역에서는 독일군의 대량파괴와 학살, 인종청소로 제3제국의 이데올로기가 만든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어쨌거나 그 결과 1941년 하반기가 되면 대부분의 점령지 주민들이 독일군에 비협조적으로 변했고 독일군의 학살은 점령지 주민이 독일군을 증오하도록 만들었고 많은 주민들을 파르티잔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전히 독일에 협조하려는, 혹은 둘 다 싫다며 양쪽과 적대한 세력도 있었으나 그들이 대세가 될 순 없었다. 우크라이나 독립주의자들의 게릴라는 1950년대까지 살아남아서 소련군이 이들의 소탕전을 했다고 한다. 1944년 소련군에서 가장 창조성 있는 지휘관의 하나인 니콜라이 바투틴도 독일군이 아니라 이들의 습격에 의해 전사했다.

결국 독일군은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나머지 이념적으로는 '청소'를 통해 성공했을지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대실패의 기반을 닦았던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한 1941년 12월이 지나면서 대사건이 잇따라 일어나 소련의 기세를 올려주었다.

하나는 일본제국이 진주만을 공격, 태평양 전쟁이 터진 것이었고, 하나는 독일이 미국에 먼저 선전포고하여 아-태 지역과 유럽-아프리카의 전쟁이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소련도 이제 공공연히 미국의 물자 지원을 요청하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4.2. 1942년 전세의 전환점

1942년이 되자 소련은 곧바로 미국에 대량의 원조와 지원을 요구했으며 미국은 처음에는 난색을 보였지만 산업생산력이 풀가동되기 시작하자 이내 엄청난 물자를 소련에 보내주기 시작했다. 미국은 소련에 스팸 통조림부터 전차, 항공기, 트럭, 철도 차량같은 군수 물자와 유무선 통신 시설 일체, 심지어 핵무기의 원료인 우라늄까지 원조해 주었다. 소련은 체재 붕괴 때까지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기 대여 법은 소련 산업과 전시 경제가 붕괴하는 것을 막아내는데 기여를 하여 결과적으로 소련이 승리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상실한 소련이 파멸적 기아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았고 전차, 항공기 등의 중공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는 스탈린 및 주코프 같은 소련 고위층들도 인정하였는데, 스탈린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측근에게 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소련 공업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상황이니 1대 1로 독일과 싸웠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했고, 주코프는 63년도의 한 대화에서 무기 대여 법 없이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25]

무기대여법이 1943년 초반 소련군이 독일의 진격을 막는 데 성공한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을 거론하며 없어도 방어에 성공했을 거라는 의견도 있으나 이 시점에선 소련군도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운이 좋아야 전선을 현상 유지하는 데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941년부터 들어온 무기 대여 법 물량이 적긴 했지만 초반에 급속도로 밀린 탓에 전력 부족에 시달린 소련군에게는 정말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특히 마틸다, 발렌타인같은 전차들이 대환영을 받는데 그 유명한 T-34도 전쟁 초반부에 무대뽀 운용으로 물량이 거의 소모되고 생산 공장은 우랄산맥 너머로 급히 이동을 한 덕분에 제대로 생산할 여건이 안 되었으니 수량이 부족했고 결국 42년도까지 BT,T-60같은 경전차들이 주력이었는데 문제는 이 전차들은 별반 차이 없는 깡통전차였으니(...) 거기다 매월 수백 대의 전차가 건너오면서 소련은 무기 대여 법 전차만으로도 독일에 대한 수적 균형, 혹은 우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원조 무기들은 양과 질에서 소련군에게 단비 같은 존재였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찬밥신세였던 P-39 에어라코브라는 180도 인생역전에 성공했고 발렌타인전차는 가벼우면서도 경전차답지 않은 장갑[26] 및 화력으로 인기를 끌어 영국이 단종 시키려 한 것을 소련의 요청으로 추가 생산했고, 후반기 등장한 76mm포 버전의 셔먼은 T-34와 동등하거나 앞선 화력[27] 및 우수한 거주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혹한 환경에서도 잘 굴러가는 기계적 신뢰성으로 인해 '무 고장 전차'로 불리며 위사단에 돌려질 정도로 평이 좋았다. 게다가 소련이 그렇게 혹평했던 영/미제 무기들의 구성 품들(주포안정장치나 엔진 등)은 이후 냉전기 소련 무기 개발에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28] 이러한 무기들이 대량으로 지원됐기 때문에 아무리 찍어대도 전선에서 그만큼 많이 파괴되었던 소련군 무기를 보충해 주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어쨌거나 미국의 막대한 물자 원조, 산업 설비 재배치와 엄청난 인력의 동원을 통한 전시체제로의 이행, 수백만의 예비군 소집으로 인한 양적 우위의 확보를 통해 1942년 소련은 반격의 채비를 갖췄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병크를 터트린 것은 소련 최고사령부인 스타프카, 그것의 정점인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동계 공세를 통해 확보된 영역을 더 넓히고자 1942년 전반기 내내 독일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한 중부 전선에 물량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소련은 엄청난 피해만 내고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공세의 실패는 소련군과 소련 당국자들에게 소련군의 한계와, 독일군이 아직은 건재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소련이 1942년 전반기를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으로 끝내는 동안, 독일군은 새로운 전략 목표를 찾아냈다. 그것은 캅카스의 석유자원이었다.

1942년 하반기,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를 지나 카프카스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방비가 상대적으로 허술했기에 독일군은 손쉽게 소련군을 격파하고 돈 강을 건너 카프카스 지대로 들어갔으며 이에 호응해 체첸의 무슬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독일군은 조공의 목적으로 볼가 강의 공업도시 스탈린그라드를 목표로 삼았는데, 이 도시가 지닌 엄청난 상징성 때문에 이 도시는 곧 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는 글자 그대로 소련의 통치자인 스탈린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공업도시로서 독일군의 청색 작전에 있어서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의 병목 지역을 닫을 수 있는 마개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즉, 이 지역을 제압하거나 견제하지 않는다면 소련군이 바쿠를 향해 진격한 독일군의 뒤를 완전히 차단해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 따라서 스탈린그라드는 청색 작전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여기에 소련의 최고통치자의 이름을 딴 도시라는 상징적인 이유가 겹치면서 양측은 이 도시를 둘러싸고 1942년 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돌입했다.

초기 단계에서는 이번에도 독일군이 유리했다. 독일군은 재빨리 도시의 소련군을 몰아내었으며 곧 소련군을 볼가 강으로 밀어붙여서 소련군을 곧바로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즉시 대규모 지원군을 보내기 시작했다. 엄청난 물자와 병력이 스탈린그라드를 지키기 위해 투입되었으며 이내 도시 전체가 포격과 폭격으로 대파된 상황에서 거리 단위, 심지어 빌딩 단위로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화력과 전술에서는 독일군이 크게 우세했지만 겨울이 다가오고 소련군이 몇 배나 되는 병력으로 밑어 붙이자 점차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은 히틀러의 전략적 사고였다. 히틀러는 독일군 지휘관들에게 후퇴할 권리를 박탈하고 일단 차지한 점령지는 끝까지 지킬 것을 원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은 히틀러의 이런 강력한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스탈린그라드에 남았으며 소련군은 엄청난 병력으로 도시를 역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군은 지리 한 공방전을 끝내기 위해 반격을 개시했다. 1942년 11월 여전히 고립 상태인 상황에서 소련군은 대규모 반격으로 독일군의 구원을 가로막았고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완전히 가두었다. 겨울폭풍 작전을 통해 독일군은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6군 구출을 시도했지만 소련군의 격렬한 반격으로 독일군은 결국 스탈린그라드의 아군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우크라이나로 철수했다. 고립된 독일군은 강추위와 식량부족으로 커다란 고통을 겪다가 지휘관 파울루스 장군과 함께 1943년 1월 말 항복했으며 살아남은 포로는 최초의 30만에서 10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는 곧 반파쇼 연합군의 승리로 인식되어 소련은 물론 서방세계에도 엄청난 선전효과를 가져왔다. 반면 이미 아프리카에서도 주도권을 잃은 독일은 점차 밀려나게 1945년 4월 30일-히틀러의 자살일-로 이어지는 기나긴 패전의 나날을 밟게 되었다.

4.3. 1943년 거짓 새벽

1943년 초,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의 승리에 힘입어 대규모 반격을 꾀하며 중부에서 별 작전을, 남부 일대에서 '갈로프 작전'을 시행하는 대공세를 펼치며 독일군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본 무리한 공세의 한계점과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독일군의 뛰어난 대처로 인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대패하여 더 이상의 공세 지속 능력을 상실했다. 이 때 소련군의 실패한 공세로 인해 돌출지역으로 쿠르스크 전역(戰域)이 남았는데 그 돌출부는 1943년 독일-소련 지휘부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독일은 쿠르스크의 돌출부를 제거하고 전선을 교착시켜 태세를 정비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반면 소련은 쿠르스크를 지켜내어 독일군을 소모시키고 대규모 반격으로 실지(失地)를 만회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상태에서 소련은 쿠르스크에 참호벙커를 비롯한 엄청난 방어 설비를 구축했고 스탈린그라드 못잖은 대규모의 병력을 집결했다. 엄청난 포병부대의 배치는 1943~45년 독일-소련 전역의 특징이 되었다.

독일군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예정된 작전 개시 일을 자꾸 늦춘 끝에 1943년 7월 쿠르스크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남북에서 돌출부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으나 소련군의 강력한 방어설비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군의 쿠르스크 점령 실패는 그 자체로 1943년 전략의 무효화를 의미했다. 소련군은 이내 태세를 정비했다.

소련군은 계획된 대로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에서 쿠투조프 작전을, 남쪽에서 류먄체프 작전을 실시하여 독일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돌출부를 없앴다. 이후 중부에서 펼쳐진 수보로프 작전은 실패했지만 남부인 우크라이나에서의 공세는 효과가 있었다. 소련군은 독일 남부집단군과 혈투를 벌이며 미우스 강을 넘어서 제4차 하르코프 공방전 끝에 하르코프를 탈환하고 우크라이나로 쏟아졌다. 치열한 전투 끝에 소련군은 드네프르 강 좌안으로 독일군을 몰아내고 키예프를 탈환했다.

1943년 이후 소련군과 독일군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전쟁이 계속되며 게오르기 주코프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를 비롯한 붉은 군대의 수뇌들은 비록 대놓고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붉은 군대가 초기의 '종심 작전'으로 회귀하도록 힘을 써서 소련군이 현대전에 걸맞는 기동과 화력을 갖추도록 했다. 그 결과 소련군의 돌파력은 증대되고 대규모 포격은 훨씬 정밀해졌으며 특히 기만술 측면에서는 독일군의 허를 찌를 정도로 크게 발전했다. 여기에 더불어 서방의 랜드리스로 비전투 분야의 생산은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자 남은 역량이 죄다 무기로 집중되어 소련은 경이적일 정도의 무기 생산을 기록했다.

반면 독일군은 소련군에 비해 대량생산 체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데다가 서방 연합군의 끊임없는 폭격에 시달려 소련군을 압도할 만할 무장을 갖추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또한 소련에 비해 인구가 적은 편인 독일은 병력이 소실될 때마다 신병들을 불러오고 그 경험 없는 신병들이 제일 먼저 전사해 또 신병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상황이 소련군보다 컸으며 더욱이 이민족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인해 이들을 전장에서 쓸 수 없는 건 물론 오히려 독일인 병력을 이민족 억압에 배정하여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을 더 낭비하게 되었다.

또 흥미로운 부분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태도 변화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스탈린은 완벽히 휘하 장군들을 신뢰하게 됐으며 스탈린 자신은 그저 최고 결정권자 이상으로 붉은 군대의 작전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고 정치장교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는 등 2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개념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 결과 재량권을 확보한 소련군은 스탈린과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작전을 진행시킬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 시기에 스탈린이 직속 기관으로 만든 방첩기관 스메르쉬의 존재를 고려하면, 그가 군에 대한 당의 권한을 축소시켰을 뿐, 실제로 군에 대한 감시와 간섭을 푼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독소전의 본좌 데이빗 글란츠 예비역 대령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러한 견해조차 오류였다고 한다. 스탈린은 전쟁 끝까지 통제권을 놓은 적이 없었으며, 1942년 초 모스크바 전투 후에는 스탈린과 주코프 모두 견해가 다르지 않았다고. 현재로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스탈린이 현대전에 대한 개념을 새로 공부하여 이해할 능력을 늦게나마 갖추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통제력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전에 걸 맞는 군대를 운용할 능력을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전쟁 좀 하다 보니 만렙

반면 히틀러는 해가 갈수록 장군들을 믿지 못하고 작전 입안과 수행에 사사건건 간섭하여 지휘관들의 재량권을 크게 떨어트렸다. 히틀러는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기동 방어를 위한 후퇴조차 허용하지 않는 현지 사수 명령을 남발하여 지휘관들의 손발을 묶어 버리는 꼴을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현대전에 걸 맞는 능력을 갖출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아 전쟁 기간 내내 바보 같은 지시가 계속 내려지고 그 결과 독일의 패망은 더 빨라지게 되었다.

한편 스탈린은 집요하게 제2전선의 구축을 요구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그 때까지 유럽지역의 주요 전선은 동부전선밖에 없었고, 본질적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은 규모가 작은데다가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영 연합군은 1943년 7~9월 이탈리아에 제2전선을 구축했다. 이것이 이탈리아 전선. 이탈리아의 전쟁탈락을 가져왔을 뿐, 정작 독일을 공격하려면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하므로 독일에게 그렇게 엄청난 위협이 안되었으며 곧바로 교착되어 버려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결국 영-미는 1944년 프랑스에 제2전선을 다시 구축하기로 했고 이것이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프랑스 진공으로 이어지게 된다.

4.4. 1944년 붉은 해일

1944년 겨울에 소련군은 다시 대공세를 펼쳤다. 독소 양군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북부 전선에서의 공세로 소련군은 마침내 레닌그라드를 포위 900여 일만에 해방시켰다. 레닌그라드는 이 엄청난 포위를 감당한 대가로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았지만 300만 시민 중 100만 명 이상이 기아와 폭격, 전투로 사망했다.

남부에서도 공세가 이어졌다. 소련군은 재빠른 기동을 통해 1월에 체르카시와 코르순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면서 독일 남부집단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독일군의 기민한 대처로 코르순-체르카시 포위망은 기대했던 것보다 성과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지만 독일군이 기동 전력을 포위망 분쇄에 투입하느라 다른 전선에 투입하는 것을 막음으로서 소련군의 이어진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2월 중순에 소련군은 카메네츠-포돌츠크 지역에 대한 포위를 통해 독일 제1기갑 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역시 독일군의 기민한 대처로 완전한 포위섬멸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독일군 전력에 큰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29]

결국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전체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크림 반도를 탈환했다. 이 결과로 루마니아는 추축국 탈퇴를 고려하며 서방 연합군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이는 등 전략적인 효과를 낳았다.

한편 독일군의 관심사가 우크라이나에 집중된 사이 소련군은 벨라루스의 중부집단군을 한 방에 날려버릴 또 다른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치밀하고 철저한 준비 끝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제2전선이 실현된 지 얼마 안 되어 벨라루스를 비롯한 전쟁 이전 소련의 영토를 죄다 되찾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실행시켜 독일 중부집단군을 문자 그대로 믹서기로 갈아버리고 뒤따른 3번의 공세를 성공시켜 독일군을 폴란드까지 밀어내고 핀란드를 추축군 대열에서 이탈시켰다. 이로서 사실상 나치독일은 끝났다

1944년 초까지 엄청난 공세로 독일군을 밀어내고 본토를 탈환한 뒤 소련군은 서방 국가들이 제2전선을 구축한 결과 조금이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소련이 한숨을 돌린다는 것은 다시 대규모 공세가 시작됨을 의미했다.

독일이 서부전선의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동부전선에서 군대를 빼내자,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독일군이 막기는 더 어려워졌다. 이후 소련군은 차례차례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중앙 유럽과 발칸 국가들에 진격하면서 그 지역 파르티잔과 합류하거나 몇몇 나라에는 새 정권을 세웠다. 이러는 동안 소련군은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계속 서진하여 1945년에 이르렀으며, 1945년 2월 미-영 지도자들과 스탈린이 얄타 회담을 개최했을 때 소련군은 순조롭게 진격하여 동프로이센까지 진격했다.

4.5. 1945년 하켄크로이츠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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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독일군은 각지에서 부분적인 저항을 계속했으나 소련군의 공세 앞에 역부족이었다. 1945년 4월이 되자 소련군은 베를린 지척에 다다랐으며 서방 연합군도 아르덴 대공세를 막아낸 후 지크프리트 선을 돌파하고 라인 강을 건너 순조롭게 중부 독일까지 밀고 들어왔다. 물론 아르덴에서의 전투는 연합군에게 수만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강요했지만 붉은 군대의 어마어마한 피해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베를린을 점령하기를 원했다. 그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라도, 그리고 소련이 입은 막대한 피해에 대한 정치적 보상의 하나로서 베를린 공략을 소련에게 넘겨주길 원했고 영-미도 이에 수긍했다. 1945년 4월 중순 소련군은 베를린을 포위하고 이내 대규모 소탕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소련군은 베를린으로 진주하여 마지막 베를린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의 이 문서에서도 언급되어 있었고 또한 대부분 이 전투가 그저 모든 힘이 빠진 독일군을 소탕한 소탕전으로만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소련군은 적어도 1,900,000명의 병력과 4,100문의 포, 6,200대의 전차를 투입했으며 이 중에 사망자만 304,887명이었다. 이는 소련군이 개전초기에 포위전에서 섬멸 당한 것을 제외하면 독소전쟁 내내 이어진 모든 전투 중 가장 큰 인명손실이었다.[30] 독일군의 허리를 꺾어버린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독일군의 인명손실이 183,000명, 소련군의 손실이 70,000명에 불과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31] 단순히 성격이 소탕전이라도 독일군이 무력하게 무릎 꿇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독일군이 아무리 발악하여도 대세는 이미 결정되었다. 독일군은 무너졌고 결국 마지막 2주일 동안 소련군은 베를린 시내를 헤집고 다니며 도시의 저항군을 섬멸했다. 히틀러가 세상에 자랑한 소위 '천년제국'의 수도는 폐허와 포연을 넘어 진격해온 붉은 군대에 정복되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고 일주일 뒤 모든 저항 여력이 거의 고갈된 독일 정부는 소련을 포함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이 날이 5월 7일이며, 소련 정부는 독일의 항복을 5월 9일에 공식 추인했기 때문에 소련(그리고 그 후계자인 러시아)은 5월 9일을 기해서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마침내 끝났다.

5. 전쟁이 남긴 것

거의 60년 동안 전 세계에 참사들이 더 쌓인 뒤에도 여전히 소련 인들이 겪었던 고통을 그저 듣기만 해도 상상력이 마비되어 보잘것없게 된다. -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385

이 전쟁에서 독일이 입은 피해도 그렇지만 소련이 입은 피해는 심대하다. 소련은 전쟁 중 무려 2,900여만 명이 사망했으며,[32][33] 이는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2차 세계대전 사망자 5,000만 명의 60%(!!!)에 달하는 수치다. 민간인 약 2천만 명, 군인 약 9백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 수치라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41년 6월 22일부터 베를린이 함락되어 사실상 독일이 끝난 45년 4월 30일까지 하루 평균 민간인 약 1만 4천명, 군인 6500명이 죽었다. 하루 평균 2만 명이 넘는 수치다. 이틀마다 작은 도시(한국의 군정도)하나만큼의 사람이 죽은 것이다. 참고로 그 참혹하다고 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오마하 해변의 미군 전사자가 불과 4,649명이다.[34] 또한 전쟁으로 인해 여초 현상이 대단히 심각하게 발생했는데 종전 후 소비에트 연방 내의 인구 중 10대 후반 ~ 40대 남녀 성비가 4:7이었다고 하며,[35] 다음 세대의 남녀 성비는 1:1로 원상 복귀되었지만 21세기인 현재, 전체 인구 대비 비중은 여전히 여초현상을 유지하는 중이다. 다만 이것이 러시아에 미치는 영향은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닌 듯하다.[36][37]

게다가 소련은 전쟁으로 모스크바 서쪽의 거의 모든 기간 설비와 공업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농지와 마을, 인프라의 파괴도 심각했다. 이 엄청난 물질적 피해와, 전쟁으로 소련 인민들이 입어야 했던 정신적 피해를 고려하면 독일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옛 소련 지역 주민들에게 엄청난 도덕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상대적인 주장이지만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슬라브인이나 그에 속하는 인종 3,000만 명을 살해한 것이, 그 20%인 600만여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보다 더 대단찮은 일처럼 기억 속에서 잊혀 져 있는지는 의문스러운 일이다. 이 3,000만 명의 희생자의 50% 이상이 민간인이며 소련이 입은 물질적 피해로 인한 소련 인민들의 유무형의 고통은 결코 통계나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웬만한 나라는 수십 번은 멸망할 피해를 보고도 전쟁에서 승리한 게 기적에 가까워 보인다. 거기다 이런 피해를 입고도 전후 45년 동안 미국과 패권을 겨뤘다.

전쟁으로 소련은 초 열강이 되었다. 우선 세계의 주요 강대국인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는 계기가 되었으며, 소위 냉전의 결과물이지만 세계를 반분한 초강대국의 위상을 인정받았다. 또 전쟁의 결과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수복하고 독일에게서 일부 영토를 할양받아 병합했다. 그리고 승전국의 위치로 인해 국제연합에서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승전을 이용해 자신을 완벽히 신격화하는데 성공했다. 스탈린의 공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갈린다. 스탈린 격하운동을 주도한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승리했다"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역할을 매우 축소했다. 스탈린의 독재체제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말할 때가 많다. 그러나 대체로 러시아인들은 초반에 여러 병크를 저지르기는 했으나 스탈린이 소련의 승리에 기여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주코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탈린의 고집으로 인한 여러 병크들인 대독 경계령 발동 금지, 키에프 후퇴 불허, 모스크바 공세 이후 무리한 반격작전으로 전력 낭비를 나열하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볼 때 스탈린이 독소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것은 틀림없다고 밝혔다. 특히 전후 처리에서 영미와 유리하게 흥정을 하여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스탈린의 공이 틀림없다. 물론 실제로 전쟁에 참전한 장군과 원수들에게 돌아가야 할 공들을 스탈린이 가로챈 것은 사실이며, 정치적 야심을 의심받은 주코프는 한직을 맴돌았다.[38] 전쟁 전부터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스탈린은 전쟁 후에는 여기에 군사적 커리어까지 더한 완벽한 위대한 영도자로 숭배 받게 됐으며 그의 이름은 소련에서 신과 다름없게 되었다.

독일에게는 이 전쟁은 말 그대로 파멸로의 행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전사자의 80% 이상이 소련과의 전쟁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이 수치는 나치가 과연 독소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빨리 파멸했을까 하는 의심마저 품게 만든다. 그리고 이 전쟁의 결과 독일은 과거 1차 대전 패전 후에도 유지했던 동프로이센과 동부의 몇몇 주를 영구적으로 상실했다. 당장 소련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과 분할하여 차지한 폴란드의 동쪽 영토를 그대로 차지하고 오데르 강 동쪽의 독일 영토와 동프로이센을 폴란드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동프로이센의 중심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소련칼리닌그라드가 되었고, 독일의 재통일시 구영토를 영원히 포기하기로 결정하여 영구상실하였다. 결정적으로 양대 강국에 의해 나라가 분단되어 서독동독이 일시적으로나마 대립하는 초유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또한 외교 이미지 상으로도 독일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현재 유로 존 문제와 관련 독일의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국가들에 대한 긴축 및 경제구조 개선 요구는 돈을 빌려주고 도와주는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PIGS 국가들은 독일의 이러한 요구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개선하는 게 아니라 독일의 과거사를 계속 거론하면서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으며 여기에 동의하는 어리석은 인간들도 나오고 있는 것. 그나마 PIGS의 막장성이 워낙 짙어서 말 그대로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린데다가[39] 독일이 평소 나치 청산을 아주 철저하게 하여 국제 사회의 신용을 회복한 덕택에 문제가 커지지는 않고 있다.

6. 연표

6.1. 1939 ~ 1940년

6.2. 1941년

6.4. 1943년

6.6. 1945년

7. 여담

이후 소련과 소련에서 분리된 러시아, 우크라이나CIS 국가들은 매년 대 조국 수호전쟁 승리 기념 퍼레이드(День Победы: 젠 빠볘디)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이날을 기념하며 수십만 명의 군사들과 신형 무기들을 공개하고 국력을 과시하는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사실 유럽 최강의 적군을 상대로 수천만 명의 피를 뿌려가며 얻은 승리니 충분한 자격이다. 그것도 처음에 참패하다가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으니 얼마나 감격스럽겠는가.

소련시절 붉은 광장을 지나는 군사 퍼레이드는 10월 혁명 기념일(11월 7일)과 승리의 날(5월 9일) 매년 두 차례 실시되었다. 소련시절 연방을 이루었으나 독립한 공화국들도 (독소전쟁 직전 소련에 병합된 발트 3국을 제외하면) 모두 5월 9일은 공휴일로 정하고 비슷한 군사퍼레이드를 실시한다. 소련 시절 한 나라였으니 러시아뿐만 아니라 자기네들도 승리의 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 소련 해체이후 10월 혁명 기념일은 없어지고 5월 9일에만 군사퍼레이드를 실시한다. 다만 모스크바에서는 10월 혁명 기념일이 아니라 1941년의 모스크바 전투 기념일로 기념행진을 하는 경우는 있다.


(한 군중이 들고 있는 스탈린 초상에 주목.)

과거 소련시절에는 미군의 정찰기 U-2가 소련을 정찰하다가 박살난 잔해를 전시하는 등 반서방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현재는 미군은 물론이고 영국군, 프랑스군 등 과거 추축군과 맞서 싸운 연합군중국 등 승전국이 함께 모이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 날에 대한 자세한 것은 승리의 날 문서 참조.

8. 의의

국가의 모든 기능을 투입한 총력전이라는 단어를 현실화시킨 전쟁. 또는 동부유럽에서 고대부터 계속 반복되었던 게르만족과 슬라브족간의 종족전쟁의 궁극적 버전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독일군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점령지에서 슬라브인을 노예화하거나 말살하려 했으며, 소련군은 정부의 공식적인 명령으로는 잔혹행위가 금지되었으나 실제로는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사실상 복수를 묵인했기 때문에 소련군은 독일인들에게 복수 겸 약탈을 병행하며[40] 서진하였다. 결국 소련 정부가 전쟁이 끝나고 이런 사적 복수와 학살에 대한 통제에 들어간 뒤에야 학살이 멈췄다.

태평양 전쟁과 함께 2차 세계대전 전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전쟁이기도 하다. 참고로 독일군의 병력 80% 이상이 동부전선에서 사그라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는 동부전선에서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1][42] 게다가 한동안 유럽 본토에서는 서부전선은 섬에서 버티는 영국과 스위스 등의 중립국을 제외하고는 추축군이 다 장악해버렸고, 사실상 동부전선만 유일한 주요 전장으로 남아있었다. 이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보듯 미국은 제2전선에 협조적인 편이었으나 영국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트라우마도 있었고 자국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이리저리 미적대다 1944년에 들어서야 처칠이 스탈린의 분노를 맛보고는 그제 서야 서부전선을 개전한다. 소련 입장에선 1943년도 이전부터 제2전선 개시 요구를 했는데 이리 미적대면 혹시 [독소 불가침조약|"우리와 독일이 공멸하기 바라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고 "구교도는 무엇인가? 제2전선이 생길 거라 믿는 사람이다."란 농담이 돌 정도였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일개 야전군 수준의 수만 명이 맞붙었던 서방측의 엘 알라메인 전투 승리나 동부전선의 승패가 거의 결정된 후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제2차 대전의 전환점이었다는 서방 연합국 측 주장에 대해 코웃음을 치고 있다. 당장 주코프 회고록에서도 전후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연합국 지도자간 만남에서 몽고메리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엘 알라메인 전투가 전쟁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하자 자기는 화가 나서 그것을 반박했다고 나와 있다.

냉전 때문에 이 전쟁의 세부적인 면이나 의의는 일부 밀덕후들을 제외한다면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현재에도 서방연합국들의 전투에 비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한국에는 독빠 밀덕후들이 많기 때문에 은근히 소련군에 대해 무식하게 양으로만 밀어붙이는 군대라고 기술하거나, 독일군이 이길 수 있었는데 석패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도 많다. 1980년대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전쟁사를 연구하는 거의 유일한 기관인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에서도 소련군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기 위한 서술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소련군의 승리는 추운 겨울이나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 때문에 어부지리로 얻어졌다는 식이다.[43] 자고로 나이가 드신 선생님들도 이렇게 알고 계시는 경우가 많다. 다만 무조건 그렇지만도 않은 게 소련군의 손실 부분은 오히려 현대 사가들이 주장하는 1천만 명 전사보다 좀 더 낮춰서 잡았고, 1944년 이후로는 소련군에 대해 칭찬 일색이다(실제로는 소련이 자주 승리를 얻어낸 대전 후반부에도 소련의 손실은 연패를 거듭한 독일에 비해도 결코 적지 않았다.). 다만 독소전쟁 초반부에는 아무래도 소련군을 폄하하는 서술이 많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의 연합국 승리에 대한 소련이나 소련군의 결정적 기여는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하기 어렵다. 아니 그냥 단순히 생각을 해봐도 2차 대전 동안 사망한 전체 독일군의 80% 이상이 소모된 곳이 동부전선이었는데 어찌 결정적인 기여가 아닐 수가 있겠는가?

9. IF 시나리오

한편 일부에서는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한 시점에서 소련 공략을 포기하고 강화 조약을 맺었다면 좀 더 생명이 연장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데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독소전쟁 중 독일과 소련의 강화 가능성은 모스크바 전투가 끝날 때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전투 이전에는 스탈린은 불가리아의 중재로 일단 나치 독일과 강화를 맺으려고 했다. 당장 불가리아는 추축국이지만, 같은 슬라브족-정교회를 매개로 러시아와 매우 가까웠으며, 특히 제정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불가리아를 독립시켜줬기 때문에 소련을 상대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추축국인데도 독소전쟁에서는 병력을 보내지 않고 사실상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이는 선례도 있어서 더 유리하다. 블라디미르 레닌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거대한 영토를 떼어주고 1차 대전에서 빠진 후 한숨 돌렸다가 나중에 독일이 패한 다음에 많은 영토를 수복했다. 스탈린은 이를 따라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1944년에는 오히려 위기에 몰린 독일이 스탈린과 협상하여 단독강화를 맺으려고 하며,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서방측보다 이쪽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치에게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소련이 다 잡은 맹수를 살려줄 리가 없지 않은가.

애당초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개 털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원래 양면전쟁은 어떤 국가나 피하려고 하는데다가 독일에는 전선을 두개로 만들지 말라는 격언까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확대한 점은, 아니 애시 당초 승리를 확신하지도 않으면서 2차 대전[44] 을 일으킨 점은 두고두고 까일 일이다.

10. 독소전쟁 연구의 변화

냉전 체제의 특수성으로 인해 독소전쟁에 대해 진실에 근접한 연구는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전쟁 당사자인 소련은 대외적인 독소전쟁 자료와 연구를 선전에 알맞거나 검열을 통과한 것만 공개했고 주요한 1차 사료들은 문서 보관소에 꼭꼭 숨겨 놓았다. 심지어 후일 신빙성 있는 사료로 밝혀진 자료들마저도 공산주의적 강박증이 큰 서술 방식 때문에 믿기 힘든 자료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10.1. 냉전 이전까지의 소련 측 연구

1945~58년 사이 소수의 소련 자료들만이 작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자료들마저 너무 정치색을 강하게 띄었고 독자나 학자의 관심을 끌만한 작전 적으로 자세한 자료가 아니었다.

1958년까지의 소련 군사 저작들은 너무 정치적이었고 모든 부분에서 스탈린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부합하여 작전술 적, 전술적 자세함은 없었다. 1958년 이후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며 군사 저작들에는 작전술 적, 전술적 정보가 자세히 실렸다.

1958년이 시작되며 소련에서도 정확하고 유용한 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자료들을 받아들이며 소련군 군사 사 저널에서는 모든 수준의 전투 경험을 다룬 뛰어난 연구 자료들을 방출했다. 군사 사 저널은 1958년 직후부터 전쟁의, 최초시기에 대한 괄목할 만할 연구들을 내놓았고 이전의 정치성이 강한 연구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군사 사 저널은 이론적 상황에서의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소련의 군사 문제를 보는 경향이 구체성을 띄게 했과 각가의 화제를 역사적 문맥에서 보게 했다.

1958년, 소련 최초의 2차세계대전사 통사인 플라토노프의 <제2차 세계대전사>가 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최초로 소련의 전쟁 초기 실패를 언급했으며 전쟁 초기를 전체적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소련군이 실패한 1942년의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을 다루고 있는데 이 전투는 지금도 소련 내에서 논하기에는 너무 쓰라린 주제로 남아 있다. 플라토노프는 2차 하리코프 공방전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패배한 전투를 솔직하게 말하는 최초의 소련측 자료가 되었다. 같은 시기 소련 역사학자들은 전후 사례를 가르치는 전쟁 기 경향으로 복귀했다. 콜가노프의 <대 조국 전쟁기의 전술 발전>은 1958년에 나왔고 전투 사례를 통한 전쟁 기 전술을 다뤘다. 이 교훈적인 저작은 장교들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졌고 성공한 사례와 실패한 사례를 동등한 비중으로 담았다. 콜가노프의 자료들은 다소 단편적이지만 실패 사례와 성공 사례를 동등하게 다루고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확, 마르크스주의적 표현으로는 '과학적으로' 대처하는 교육 사례로서 최대한 자세해야 했다.

1958년 이후 회고록, 부대사, 그리고 작전 자료들이 전보다 지속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소련 학계는 당시 군사 지휘관들과 참모들의 기록들을 대거 끌어 모았다. 이 기록들은 스타브카 수준의 인물들(주코프, 바실렙스키, 시테멘코), 전선군 사령관 수준의 인물들(로코솝스키, 코네프, 메레츠코프, 예레멘코, 바그라먄), 야전군 사령관 수준의 인물들(모스칼렌코, 추이코프, 크릴로프, 바토프, 갈리츠키, 그레치코, 카투코프, 렐류셴코, 로트미스트로프), 군단장 수준의 인물들과 그 이하 지휘관들의 회고록들이 출간되었다. 소련 군사사가들은 제병 협동 군, 전차군, 군단, 사단, 그리고 여단이나 연대 수준까지의 부대 사를 저술했다. 회고록은 지원 부대 지휘관들의 책까지 포함했다.

이후 뛰어난 작전 연구들이 주요 작전(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벨라루스)이나 조금 덜 중요한 작전(노보고로드-루가, 동포메리아, 돈바스), 그리고 기타 수행했던 작전들을 다룬 연구서들이 나왔다. 대학의 역사학자(삼소노프)나 군사학자(질린, 갈리츠키, 시도렌코) 등이 대규모 사료를 동원하고 자세한 서술을 사용해 1등급 연구 자료들을 내놓았다. 회고록, 부대사, 작전 연구는 총체적인 전훈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 연구들은 전쟁사 전체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작전술 발달사를 연구하는 인물들(세메노프, 스트로코프, 바그라먄, 크럽첸코)과 전투 사례를 전술적, 작전술 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라지옙스키, 쿠로치킨), 기갑 부대와 기계화 부대를 다루는 인물들(로트미스트로프, 바다자냔, 라지옙스키, 로시크), 작전술과 전술을 연구하는 인물들(시도렌코, 사브킨, 레즈니첸코), 그리고 막대한 전투 지원을 주제로 하는 연구들을 포함한다.

대조국 전쟁사와 제2차 세계 대전사를 총체적으로 다룬 저작들이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났다. 6권의 <동부 전선사>는 이전의 학자들이 다루기 꺼려한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들을 솔직하게 다뤘으며 작전 적 자세함도 증가했다. 하지만 분량의 한계 때문의 작은 규모의 작전이나 전투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11권짜리 <제2차 세계대전사>는 정치적으로는 덜 솔직하지만 작전술 적, 전략적 수준의 분석에서 더 자세했다.

그리하여 동부 전선의 작전들에 대해 소련이 막대한 양의 자료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게다가 에릭슨이 설명했듯이 이러한 자료들의 종합은 동부 전선 작전의 인상적인 그림이다. 하지만 이 자료들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독일 측 사료와 똑같은 문제로 독일 측의 편견과 같은 소련 측의 편견이다. 첫째로 소련 저작들은 너무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이다. 요점은 소련 저작들은 전투 사레를 가르치고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전쟁은 정치적, 이념적 맥락 내에서도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정치적 편향성도 이해받을 수 있으며 비판적인 독자들은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고 무엇이 비정치적인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을 가져야 한다. 독자들은 읽기 편하고 대중적인 책일수록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소련 내에서 만든 작전술 적, 전술적 사실은 개인이나 부대의 희생과 영웅주의를 장려하는 용도가 되었다.

군사 저작이 정치적 맥락에 휘둘리던 이래로 군사 저작 발행 환경은 독자(=공산당)의 입맛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문맥이 간략하고 세련됨이 부족한 저작은 정치성이 강한 것이었다. 제일 중요한 작전과 전술은 계획 수립과 수행에서 당의 역할을 강조하느라 비교적 제한된 연구 소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소련 군사 저술가들은 성공적인 작전에 강세를 두고 자세히 쓰며 실패한 작전은 자세하게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최근까지 전쟁 극 초반인 1941년 6~7월의 전투나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 케르치 반도 상륙작전,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 기타 성공적인 작전들에서도 위험했던 국면들은 잘 나오지 않았다. 비슷하게, 1943~45년 사이에도 중요하지 않은 작전에 참가한 부대의 역사도 얼마 나오지 않았다.

60년대 초의 소련군은 실패한 작전들을 논하기 시작했는데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을 예로 들 수 있다. 2차 하리코프 공방전에 대한 당의 기술은 정확했지만 실패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시간이 흐르고 더 많은 자료가 나타나자 이 패배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어 하리코프의 재앙에 대해 더 자세한 연구가 나올 수 있었다.(예를 들면 모스칼렌코의 <남서부 축선>의 한 장이 있다.)

비슷한 경향이 소련 공수 부대를 다룬 문건에서도 나타난다. 당시의 소련 공수 작전들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1964년 전에는 소련 공수 부대를 다룬 자료가 거의 없었다. 1976년까지도 공수 부대 활동에 대한 자료들은 자세하지 않았고 낭만적인 문장들로 포장되었다.

매우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작전 해석은 독일의 해석과 매우 달랐다. 사실 소련 학자들의 작전 해석 시기에 따라 해석이 달라졌다. 장군들의 회고록이 작전 경과에 대해 합리적이지 못하게 적었다면, 학자들은 이에 대한 토론을 통해 공식 역사를 시정했다.

소련 자료와 독일 자료가 가장 상충되는 부분은 서로 대적한 병력의 숫자였다. 양측 자료를 평가하면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소련 자료는 소련군의 병력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독일 정보부 자료와도 일치한다. 대조적으로 소련 자료는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한다. 게다가 소련 자료는 독일군의 포병과 기갑 전력을 인력보다 더 과장한다. 부분적으로 이는 소련군이 독일 동맹국 병력과 경찰 병력, 그리고 민병대(국민돌격대) 병력도 합쳐 추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준을 사용한다 해도 소련군은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 기록과 대조해 봤을 때 너무 높은 적 전투력 측정을 했다. 독일군 또한 상대하는 소련군의 전력을 과장했다. 독일 측은 전력 차를 8:1에서 17:1까지 과장했고 소련군은 전력 차를 3:1에서 2:1로 낮췄다. 예를 들어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이 1,500대의 전차를 보유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1,500대의 전차 대부분은 전차라고 부르기 힘든 것들이었다.

소련 사료들은 전쟁의 사상자 문제 때문에 신뢰성을 스스로 떨어트렸다. 초기의 소련군 저작들은 아군 사상자에 대한 기술을 완전히 무시했고 그 이후에도 사상자 도표도 나타나지 않아 현대 소련군 저술가들의 민감한 문제로 남아있다. 거대 작전에서의 손실 도표나 사단 사에 수록된 중대들의 전투 전후 전력 비교 도표 정도가 간간히 남아 있는 정도였다. 아마 소련 저자들이 숨기고 있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10.2. 냉전 이전까지의 서방측 연구

소련 사료에의 접근성 부족과 냉전의 영향으로 영미 권 학자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일 측 사료들 위주로 독소전쟁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독소전 연구의 편향성을 가져왔다.[45]

주요한 사료로 쓰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나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계화부대장>, 리드리히 폰 멜렌틴의 <기갑 전투>는 회고록의 특성상 자신의 실수나 병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안하고 공적만 늘어놓은지라 신중한 교차검증이 필요했으나, 소련측 자료가 거의 입수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를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에다가 미 육군에서 독소전쟁에 관해 편찬 책임자를 맡은 전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46]는 오로지 독일 측의 시각으로 독소전쟁을 기술하였다. 그리하여 전술적, 작전 적으로 항상 우위에 있던 독일 국방군이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과 무한한 인력과 자원으로 몰아붙이기만 할 줄 아는 소련군에게 패배한 것인 양 서술함으로서 소련군의 승리의 원인을 거의 "운 빨"로 돌리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50년대 독일군에 의해 만들어진 저작들은 소련군의 작전 자료 부재라는 결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독일 집단군 , 야전군, 군단, 사단 소속의 독일군들은 수요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수적 우위와 끝없는 포격 하에 행해지는 인해전술,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무수한 소련군 기갑 부대와 대적했다고 주장했다. 소련군 규모에 대한 부정확한 서술에는 적 부대 각각의 작전술 적 역할에 대한 고려가 전무하여 독일 저작들이 소련군에 대해 공통적으로 말하는, 상상력 없이 단순한 정면공격밖에 모르지만 막대한 물량을 가진 소련군이 뛰어난 능력과 기교 넘치는 기동을 구사하는 독일군을 이겼다는 주장을 깔아 놓았다. 소련군의 '스팀롤러'는 동유럽에 그들의 시체와 부상자를 끝없이 쌓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독일 자료들이 전해 준 소련군에 대한 심리적 인상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더 나아가 작전들에 대한 이러한 개관은 소련군의 규모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해 독자들에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독일군이 항상 압도적인 수의 소련군과 대치했다고 믿게 했다. 이런 회고록들과 팜플렛들은 독일의 원 사료들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 소련군에 대한 작전 자료의 부재를 보여준다.

1960년대 나온 앨런 클락의 동부 전선에 대한 자료인 <바르바로사(Barbarossa)>는 작전술적으로 소련 자료를 부족하게 담고 있었다. 게다가 클락은 다른 학자들이 쉽게 받아들인 수법인 전쟁 첫 2년을 자세히 쓰고 마지막 2년은 간단히 쓰는 서술 방법을 사용했다. 사실 총 506쪽의 책 중 400쪽 이상이 전쟁 초기에 할애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은 독일 저작들에도 잘 나타나는데 그들의 패배를 히틀러의 오판으로만 몰아세움으로서 그 때의 작전들에 대해 자세히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 육군 군사 사 연구소는 이 불균형을 어느 정도 해결할 얼 짐케의 두 저작인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그라드까지(Moscow to Stalingrad)>와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Stalingrad to Berlin)>을 내놓았다. 이 저작은 유효한 자료로 학술적인 것이다. 짐케는 1942년 11월부터의 전쟁을 조명하고 전략과 고차원적인 작전 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독일 사료에 많이 의존하고 있지만 짐케는 독일 기록 자료를 연구했고 그곳에서 소련군의 작전 자료들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짐케는 동부 전선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을 넓혀 주었으며 기존 자료들의 문제점들을 교정했다.

짐케와 그를 따르는 저자들은 동부 전선을 서술하며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에 가속화된 소련 역사학자들의 대전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새로운 소련의 연구들은 나중에 더 말하겠지만 질이 천차만별이었음에도 전쟁사 연구에 새롭고 핵심적인 차원을 열었다. 대부분의 뛰어난 학자들은 소련군 연구를 흡수했다. 1970년대까지 소련 측 저작들은 동부 전선사를 보는 시각에 균형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케 또한 독일 자료에 상당히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초, 독일 저자인 폴 카렐(=파울 칼 슈미트)은 동부전선에 대한 2개의 책인 <히틀러, 동쪽으로 움직이다(Hitler Moves to East)>와 <조각난 대지(Scored Earth)>를 썼다. 이 책들은 기사 형식의 매력으로 독일군의 작전술 적 작전을 자세히 조명했고 참전 장교들에 대한 막대한 인터뷰를 실었다. 카렐의 저작은 독일 관점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소련군 사료에 대한 참고 비중은 짐케의 저작보다 많다. 카렐의 책은 그 생생함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지금 보면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을 통해 독일이 승리할 수 있었다는 걸 진지하게 주장하는 등 문제가 많다.

카렐 식의 서술에서 더 학문적인 저작으로는 알버트 시튼의 2권의 책인 <러시아-독일 전쟁(Russo-German Conflict)>와 <모스크바 전투(Battle of Moscow)>로 짐케의 연구를 전술적 수준으로 분석한 것이다. 독일 사단들의 공식 기록을 통해 시튼은 전술적 수준에서의 전쟁사 서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카렐처럼 시튼은 소련 자료의 부족 때문에 독일측 관점에서 전쟁을 보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서방권의 저술에는 나치의 인종주의적인 기술도 많이 눈에 띤다. 가령 러시아인들은 "중세부터 억압과 순종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희대의 독재자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독일과의 전쟁에서도 맹목적인 희생을 바쳐 승리할 수 있었다."[47]는 식의 기술이다. 이런 기술은 러시아인을 자기 목숨도 전제자에 바치는 노예 정도로 묘사하는 것이고, 나치 침략자들이 바라본 러시아 관과 똑같다. 그러나 만약에 전쟁에 패하면 자신이나 자기의 가족이 학살될 텐데 싸우지 않을 병사가 어디 있겠는가.

실제로 독일군이 대승을 할 때(바르바로사 작전~블라우 작전)는 개별 전장에 투입된 인원은 독일군이 더 많았다. 이것은 병법의 기본이며, 바르바로사 작전의 참패는 소련군의 졸렬한 지휘도 한몫했지만, 애당초 투입된 독일군 병력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48][49] 그러나 소련군이 우세한 시기가가 되면 소련군은 대체로 1.4~2배정도의 전체병력을 투입했으며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방어의 취약점을 찾아 집중공격 했다. 이 때문에 공세의 중심에 서있는 독일군 지휘관이 느끼는 적의 병력 수는 수십 배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세를 펼 때 적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는 점은 독일군이든 소련군이든 마찬가지다.

이러한 독일 편향적인 냉전기 서방의 연구 저작에서 존 에릭슨의 저작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에릭슨의 연구는 1960년대 이후부터 그가 작고한 2001년까지 독소전쟁 연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에릭슨의 책들은 기존의 독일 관점 동부 전선 서술을 극복하고 소련측 관점을 대거 차용해 동부전선 사를 서술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소련군 최고 사령부(Soviet High Command)>는 1941년 여름의 상황을 최초로 조명했다. 그의 뒤따른 두 책인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The Road to Stalingrad)>와 <베를린으로 가는 길(The Road to Berlin)>은 전쟁 전체를 자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들의 원칙적인 가치는 수백 개의 소련 자료에서 가치 있는 자료를 뽑아 동부 전선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에릭슨 같은 저자도 있고 베트남전이후 대두된 미군의 개혁 바람에서 소련군의 기동전과 작전술을 연구하는 경향이 생겨나긴 했지만 사실 대부분 학술적인 것이라 대중이 접하기 힘들었고, 특히 에릭슨의 저작들은 영미 권에서도 어렵기로 소문나 있던 지라 대중의 인식을 바꿔놓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서구권의 작물 및 가볍게 볼 수 있는 서적들이 독소전쟁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이 문제는 지금도 해결이 안 되고 있다.

10.3. 냉전 이후

다행이도 냉전이 해빙기를 맞이하고 소련의 자료 공개가 가속화되면서 독소전 연구는 더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존 에릭슨을 비롯한 서방 학자들은 동서독 역사학자들의 교류 중에서 유출된 소련의 내부 연구 자료들과 1, 2차 사료들을 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존 에릭슨은 기념비적인 독소전쟁 3부작인 <소련군 최고사령부(Soviet High Command)>,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The Road to Stalingrad)>, <베를린으로 가는 길(The Road to Berlin)>을 출판할 수 있었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고 문서 보관서 들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독소전쟁 연구는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존 에릭슨은 물론이고 데이비드 글랜츠를 비롯한 새로운 연구자들이 개방된 소련측 자료들을 대거 연구에 수용함에 따라 독소전쟁 연구는 크게 활기를 띄었다. 글랜츠는 이 시기 조너선 하우스와의 공저를 통해 체계적인 독소전쟁 개괄서인 <거인들이 충돌했을 때(When Titans Clashed-국내 번역명 '독소전쟁사')>를 출판했다.

<When Titans Clashed> 이후 글랜츠와 니입 부자(父子), 스웨덴의 군사사학자 니콜라스 채터링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독소전 연구에 뛰어들어 명저들을 출판했고 공산주의 체제의 강박증에서 풀려난 러시아 학자들 또한 갈수록 가치 있는 연구 성과들과 출판물들을 내고 있다.

그리하여 여러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는데, 데이비드 글란츠가 발굴한 "르줴프 공세"가 대표적이다. 이 공세는 글란츠의 저서 Zhukov's greatest defeat page(1999)가 나오면서 알려졌다. 요약하면 1942년 11월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천왕성 작전은 사실 주공세가 아니었고, 실제 주 공세는 주코프가 그 북쪽인 르줴프에서 맡았던 "화성 작전"이었는데, 여기서 주코프가 대패를 당했다는 것이다. 현재 영미 권에서 화성 작전으로 대표되는 르줴프 전역과, 그 동안 남부집단군에 비해 주목도가 낮았던 중부집단군의 전투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러시아 군사학자들은 화성 작전으로 독일 중부집단군의 발이 묶여서 스탈린그라드의 위기를 지원할 수 없게 했다는 주코프의 일기 등을 기반으로 하여 이 작전이 글란츠의 말대로 꼭 실패라고 볼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글란츠는 7년여 만에 발매된 러시아어 저서에서 부록으로 당시 소련군 군사문서를 다량 수록하여 재반론하고 있다.

또 한가지 사례는 니콜라스 채터링이 발굴한 "프로호프로카 전투"의 손실 분석이다. 이 사람의 책《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Frank Cass》(2000)에서는 소련 제5전차군이 SS기갑사단과 격돌해서 대등하게 싸웠다고 선전되었던 프로호프로카 전투에서 사실 소련군이 전술적으로는 대패했다는 것을 독일군 작전일지를 분석하여 밝혔다.(독소의 손실비는 약 1:6) 그러나 이런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 참가한 독일 기갑부대는 그 전투에서 입은 손실 또는 지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격을 중단, 소련군의 돌출부를 잘라버리는데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이 전투가 전략적으로 소련의 승리라는 점은 부인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치타델 작전의 북부 방면을 담당한 독일 중부집단군과 오룔 탈환 전투인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에서의 손실 또한 1:7에 가까웠다는 연구가 제기되고 있다.

11. 독소전을 다룬 대중문화

11.1. 영화

  • 를린 함락 - 1949년, 소련. 물론 시대에 걸 맞는 스탈린 숭배 영화다. 베를린 전투만을 다루진 않고, 독소전의 시작과 끝까지 다루었다. 그래도 소련군의 복식이나 무기들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제대로 고증되어 있다. 잘 관찰하면 대전기간 중의 소련군 제복의 변천사를 볼 수 있다. 거기다가 수백 대의 T-34 전차, SU-76, SU-152 자주포, 카츄샤 로켓포를 실은 트럭들이 소련군 병사와 함께 행진하는 CG없이 찍은 실사 판 장관을 볼 수 있다.

  • 인간의 운명 - 1959년 소련.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고아 등 피해자들의 고통, 그리고 가족애와 인간애를 다룬 영화. 미하일 숄로호프의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 숄로호프는 인간의 운명으로 레닌 상을 받았고, 여러 소설들을 저술해 196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 철십자 훈장 - 1977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독소전을 다루었다. 이미 전황이 기울어진 1944년 산전수전을 다 겪고 철십자 훈장을 탄 독일군 고참 부사관 슈타이너 중사가 훈장을 위한 공명심에 들뜬 귀족 장교 슈트란스키 대위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전쟁의 허무함을 나타낸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현지에서 로케를 해서 T-34 수백 대와 함께 몰려나오는 우라 돌격이 이 영화의 백미. 슈타이너가 실전에서 허둥대는 상관을 보고 미친 듯이 웃어대는 모습 또한 명장면이다.

  • 벙커 - 1981년, 프랑스. 2부작 TV영화로, 훗날의 몰락과 마찬가지로 벙커에 갇힌 히틀러와 주변 인물들을 다뤘다. 히틀러 역할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명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 컴 앤 씨 - 1985년, 소련. 어린 소년을 화자로 독일군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영화다.

  • 모스크바 전투 - 1986년, 소련. 제목 그대로 모스크바 전투를 다루었다.

  • 스탈린그라드 - 1993년, 독일, 스웨덴. 제목 그대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루었다. 전쟁의 참상을 깨달아가며 절망하는 소위 역은 독일군 장교로 자주 등장하는 토마스 크레치만이 맡았다.

  • 묵의 사선 - 1999년 핀란드. 계속전쟁을 다루었다.

  • 에너미 엣 더 게이트 - 2001년, 독일, 미국, 아일랜드, 영국. 감독은 프랑스인이다. 배경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 즈베즈다 - 2002년, 러시아. 1944년 독일군 후방으로 침투한 소련군 정찰대 이야기. 즈베즈다는 영화에 등장하는 소련군 정예 정찰부대 명이자 암호명이다.

  • 피아니스트 - 2003년, 프랑스, 영국, 독일, 폴란드. 독소전쟁 자체보다는 독일군 점령하의 바르샤바가 배경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소련군과 패배한 독일군이 나오기는 한다.

  • 몰락 - 2004년,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배경은 베를린 전투. 리히 마테스의 괴벨스 연기와 루노 간츠의 히틀러 연기가 일품이다. 괴벨스의 대사는 짤방 화되어 진지하게 쓰이고, 히틀러의 연기는 유머용 합성 요소로 쓰인다.

  • 리-이한탈라 1944 - 2007년 핀란드. 1944년 6월 25일~7월 9일까지 벌어진 핀란드와 소련의 탈리-이한탈라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전투 자체는 핀란드 군이 소련군의 공세를 막고 격퇴하는데 성공했고 최종 사상자수 차이도 2.5배 가까이 차이 났지만, 전체 전력 차 때문에 핀란드는 GG 치고 정전협정을 체결한다. 그리고 핀란드는 소련과 함께 독일을 공격한다.

  • 를린의 여인 - 2008년, 독일, 폴란드 합작. 베를린 전투가 배경. 점령군으로서의 소련군과 독일인의 복잡한 감정을 다루었다. 이 영화에서 초반부에 소련군의 범죄(약탈, 강간)같은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련군 병사들의 인간적 모습이 잘 나타난다. 다큐멘터리나 전쟁물 같지만 실제로는 점령군 장교와 피점령국 여인사이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그린 멜로물이다.

  • 디파이언스 - 독일군 점령하의 벨라루시에서 지역 농부들이였던 비엘스키 형제들이 이끈 유대인 게릴라가 주 소재. 이들은 천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보호했고, 소련군 유격대와 협력해 독일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소련군 유격대 사령관도 이들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아서 많이 도와줬다.

  • 레닌그라드 - 2009년, 러시아, 영국 합작.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배경이다. KGB에 의해 스파이로 오인 받아 붙잡힌 영국인 기자(미라 소르비노)가 여자 민병대원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독일군에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추위, 굶주림 속에서 생존의 투쟁을 하는 내용.

  • 레스트 요새 - 2010년, 러시아. 1941년 6월 22일~29일 브레스트 요새 전투가 배경이다. 처절한 우라돌격씬으로 유명하다. 불시에 기습당해 무기조차 들지 못한 상태에서 창틀, 의자, 도끼 등등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독일군에게 돌격한다. 실제 브레스트 요새 전투에서 독일 45사단은 후퇴를 명령 받았다.천전투?아이러니 하게도 이 요새는 구데리안이 폴란드에게 뺏어서 소련에 넘겨준 것 이었다. 한국에선 개봉도 제대로 안되고 다운로드 서비스만 하는 영화지만 의외로 한국 영화 채널에서 자주 틀어주었다.

  • 마이웨이 - 2011년, 한국. 독소전이 주 배경은 아니지만 주연 둘이 포로로 잡혔다가 독소전에 투입된다.

  •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Unsere Mütter, Unsere Väter - 2013년, 독일. 1941년 6월부터 1945년 5월까지를 5명의 시점에서 다룬다. BoB와는 다르게 '승리의 영광'이 아닌 '처절한 패배'를 다루는 것이 특징. 초반에는 "모스크바까지 OOkm"이었지만 독일이 밀리기 시작하는 중반부부터는 "베를린까지 OOkm"로 바뀐다. 전쟁을 지속하며 결국 인간성이 마비되어 가는 인물들, 전쟁에 광기에 휩쓸린 사람들과 처절하게 죽어가는 병사들을 주로 보여준다(...)

11.2. 게임


11.3. 그 외

  • 락그룹 새버턴 - Panzer kamft, Attero dominatus 등 독소전쟁을 포함해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노래들을 불렀다.
  • 일본의 만화가 모토후미 고바야시의 작품들
  • 러-일 합작 애니메이션 'First squeard'[50]
  • 버프소녀 오오라 - 88화에서 '인류역사상 ㅄ같은 결정을 하면 항상 나타나 우는 새' 븟새가 등장하는데, 그때 나온 컷이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 한다라고 말하자 창가에서 븟새가 울었다.(...)
  • 잊혀진 병사 (Le soldat oublié) - 프랑스-독일 혼혈로서 동부전선에 참전했던 독일군 병사 기 사예르(나중엔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으로 재편성)의 수필이다. 당시 동부전선의 처절함이 최악중의 최악의 상황을 묘사하며 나타낸다. 번역이 약간 매끄럽지 못하니 조금 흠이다.
  • 문피아에서 제피소라는 작가가 만든 히틀러로 살아남기에서 독소전쟁을 추축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었어도 소련은 추축국 일행을 강력하게 막아냈다. 역시 소련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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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조국전쟁은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치른 전쟁이다. 거기에 大를 붙여서 대조국전쟁.
  • [2] 전투 목록 뿐 아니라 독립적으로 분류 가능한 '전투'들의 규모 순위를 매기면 상위 5개가 전부 독소전쟁에서 일어난 전투들이다.
  • [3] 또한 대부분의 전투가 평야지대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이후 현대 기동전 교리의 창안과 검증에 큰 영향을 끼쳤다.
  • [4] 참고로 중국의 희생은 대부분이 민간인이었고, 군 병력의 손실은 그래도 군인인지라 일본군의 두 배가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 [5] 사실 세계 전쟁역사를 살펴보아도 수백만 명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할 만큼 큰 전쟁은 별로 없다.
  • [6] 그 전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독일과 소련의 밀월관계가 있었다.
  • [7] 그러나 단순히 이렇게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육군 강국인 프랑스가 안 망하고 버티고 있어서 서부 전선을 형성해줄 수 있었던 제1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프랑스가 무너져 버린 상황에서 영국 단독으로는 도저히 서부에 전선을 형성할 역량이 안 되었다. 원래부터 육군 전력이 별 볼일 없는 동네인데다가 그나마 보유하고 있던 장비의 상당수를 프랑스 침공 때 날려먹고 그 이후 영국 본토 항공전이 벌어지면서 가지고 있던 자원을 대부분 공군 전력 강화에 투자해야 했던지라 영국 혼자서는 유럽 대륙에 상륙해 독일 육군을 상대할 능력이 전혀 안되었던 것. 양면전쟁이 이루어진 건 어디까지나 일본삽질로 인해 미국이 연합군으로 참전한 이후이다. 정확히 말해서 진짜 양면전쟁이 벌어진 건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인 44년부터다. 이걸 양면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 [8] 그러나 육지에 전선이 형성되어야만 양면전쟁이라 보는 시각에도 문제가 있다. 영국이 건재했기에 독일은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을 분산시켜야 했으며, 미국에서 소련으로 보내는 항로에 대한 견제가 어려워졌다. 반대로 독일이 영국을 확실히 제압해놓았더라면 미국이 유럽에 전선을 전개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영국을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후방에서의 생산과 보급이 전세를 결정짓는 현대전에서 상대방의 보급력을 두 배 이상 향상시키고, 아군의 후방 생산기지를 상대의 항공세력 위협 권에 남겨둔 것만으로도 양면전쟁으로 인한 전력약화를 야기했다고 봐야 한다.
  • [9] 독소전쟁 발발 후 독일군과 소련군의 병력 손실 차이는 1:5였다. 하지만 소련군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물량 뿐 만아니라 전략과 전술의 성공과 같은 많은 측면에서 독일군을 뛰어 넘으면서 1:1.4까지 병력 손실차를 줄여버린다.
  • [10] 당장 히틀러가 소련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기만 하면, 저 엉터리 건물은 스스로 무너진다."그런데 들어갔는데 건물이 무너지면 깔려 죽는거 아냐?
  • [11] 물론 모든 독일군이 그러한 짓을 했다는 건 아니다. 굳이 핑계를 대면 이 행위들은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취한 행동이며 소련군의 복수 행위 묵인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미친 짓이며 독일군의 문제는 전쟁이 장기화되고 본토 방어전으로 밀리기 전까지 이런 행위를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 [12] 마지막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는 오히려 독일인이 소련인보다 약해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독일인은 모두 멸종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했었다.
  • [13] 후방에 배치된 공업과 소련병력이 집결하기 전까지는 그러하긴 했다. 후방병력 견제는 미국과 전쟁 중인 일본이 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일본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미국은 공격했다. 공격하라는 소련은 공격하지 않고!
  • [14] 물론 선전포고를 안하고 무시했다고 쳐도 아마 미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때리고 전쟁에 착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에게 있어 일본은 전쟁을 시작한 명분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 [15] 특히 얼마 전 겨울전쟁으로 소련에 영토를 빼앗긴 핀란드와 몰도바를 빼앗긴 루마니아가 독일 측에 붙었다.
  • [16] 존 키건,《2차세계대전사》
  • [17] 1945년 독일 항복 후 8월의 폭풍 작전
  • [18] 유명한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투폴레프가 투옥된 것은 1937년이다. 그는 10년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44년 석방되었다.
  • [19] 참고로 소련 해군, 특히 수상 함대의 전력 및 존재감이 미국 해군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팽창한 것은 독소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뒤인 1960년대 이후이다.
  • [20] "우리가 적 12개 사단을 소멸시키면 적은 그냥 12개 사단을 새로 편성한다." - 프란츠 할더
  • [21] "우리 정보국은 나에게 소련에는 160개 사단과 300대의 전차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400개 사단과 2만대의 전차를 파괴했으며, 이제 우리 앞에는 500개의 사단과 3만대의 전차가 있다." - 아돌프 히틀러, 정말로 소련은 2만대의 전차가 파괴되자 그냥 2만 5천대를 새로 출고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전멸을 시켰는데 왜 병력이 늘어나니!
  • [22] 심지어는 아예 식량조차 주어지지 않아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텃밭을 가꾸어 식량을 얻어야 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전선의 장병들에 대한 식량 공급에도 허덕이는 판에 후방의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식량 공급이 되기는 글러먹었으니.
  • [23] 또 다른 문제로 제시 되는 것은 광활한 동유럽의 대지, 그리고 소련을 상대로 집단군을 3개로 편성하여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눈 것이었다. 게다가 히틀러의 오판으로 중부 집단군의 경우 스몰렌스크에서 전진하지 않고 키예프에서 고전하던 남부집단군을 구데리안의 기갑부대로 지원을 명령했다. 이것은 모스크바에 다시 2달의 시간을 주었다.
  • [24] 당시 계급은 'генерал армии'인데, 이것은 상급대장의 위, 소련 원수 아래의 계급. 스탈린그라드 전투 끝난 후 원수로 승진.
  • [25] 출처 리처드 오버리 저, 지식의 풍경사 출판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268.
  • [26] 전면 장갑이 65mm이었는데 이는 M4셔먼전차의 전면장갑보다도 더 두껍다.
  • [27] T35/85의 85mm주포는 구경치수는 더 크나 소련의 금속가공기술 미비로 위력이 75mm와 비슷했고 무엇보다도 원거리 명중률이 안 높았다.
  • [28] 단적으로 T-64전차의 엔진이 바로 미국이 지원해 준 기관차의 엔진을 베끼다시피 만든 것이다.
  • [29]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20만에 달하는 기갑군은 몸만 빠져나왔지 기갑장비와 차량은 죄다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 [30]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 류한수 역(청어람미디어, 2007), p.795
  • [31]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류한수역(지식의 풍경, 2003), p.289
  • [32] 이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 45년 종전 당시에는 2,000만이라고 주장하였고 현재 역사가들은 종전 이후 인구 성장률과 남녀비율을 살펴 볼때 최대 4,000만의 인명손실을 주장하기도 한다. 주요 전장이었던 벨라루스우크라이나에서는 아직도 시체로만 이루어진 지층이 존재한다. 라루스 초토화 작전 참조바람.
  • [33] 이런 까닭에 전후 독일처리 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어그로한 태도로 나왔었다. 아예 독일 자체를 갈아버리려고 했을 정도니까.
  • [34]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 류한수역(청어람미디어, 2007), P.583
  • [35] 단순하게 따져보면 이 나이 대 남자 중 절반 가까이가 죽었다는 얘기다.
  • [36] 사실 권력자들 입장에서는 여초현상이 더 유리하다. 남초 현상은 결혼도 못하고 폭력성이 누적된 남자들을 대거 만들어냄으로써 이들이 잠재적인 사회 불만 세력으로 성장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지만 반대로 여초현상은 어차피 결혼에 큰 관심 없는데다 온건한 여자들 위주로 사회가 만들어지면서 기득권층의 통제에 저항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 [37] 반론도 있다. 러시아는 위의 여러 원인으로 인해 여초 현상이 두드러짐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취직할 수 있는 자리가 매우 적다.(힘 좋은 남성들도 취직을 못해 먹고살려고 군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을 정도니 여성은 더하다) 때문에 자리 잡지 못하고 남아도는 러시아 여성들이 국제결혼을 통해 팔려나가다시피 타국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로 국제결혼시장에서 2010년도까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 러시아와 동구권 여성들이었다.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러시아는 여성인권 관련해서 국격도 매우 떨어져있는 상태이고 지속적인 여성인구 유출이 인구감소세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다, 어디까지나 남성들처럼 대놓고 시위 등을 하지 못할 뿐이지 여성 또한 주체성을 가진 인간이므로 이런 개차반 같은 대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특유의 낮은 여성인권인식 때문에 여성들의 국가에 대한 불만 수준도 매우 높다. 애초에 남초든 여초든 어느 한쪽 성비가 불균형하게 이루어져 있으면 국가수준에서 문제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데 권력자들이라고 좋아할 리가...
  • [38] 이점에 있어선 미국의 맥아더와 비슷하다. 주코프와 마찬가지로 맥아더도 성격이 매우 오만했으며, 정치적 야심을 의심받았기 때문에, 정치계에서 견제가 심했다.
  • [39] 그나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로 존 자체의 한계가 미친 여파가 그들 스스로의 잘못보다 커서 동정의 여지라도 있지만 이탈리아와 그리스. 특히 상류층 및 사회지도층은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다.
  • [40] 사실 원한 때문에 약탈과 강간을 한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닌 게 상당수의 전쟁 범죄 행위자는 별다른 원한이 없어도 보충병으로 구성. 자질이 엉망진창이고 장교의 통제도 제대로 되지 않아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
  • [41] 역사상 가장 매서운 나치 독일의 총공세를 받아낸 것만으로도 이미 수훈갑이다. 종전 후 소련의 목소리가 컸던 게 당연하다.
  • [42] 더욱이 소련은 무려 2천만 명이나 되는 전사자를 기록했는데 이것은 2차 세계대전 총 전사자의 절반을 넘는다. 소련이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 [43] 사실 둘 다 맞는 말이다. 추운 겨울 날씨에 의한 장비 오작동, 병사들의 전투력 약화나 히틀러의 삽질은 독소전에 아주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 문제는 소련군의 기량 상승이나 2천만에 달하는 희생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
  • [44] 애시 당초 독일 스스로도 이 전쟁에서 패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초기 전선이 잘 돌아가면서 잠시 착각을 했을 뿐 결국 예상대로 되었다고 볼 수 있을 듯.전투는 이기지만 전쟁을 이기지 못하는 독일의 종특
  • [45] 이 때문에 소련군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냉전 당시 서방세계의 독소전 연구를 패자의 손으로 쓴 역사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 [46] 이 공적으로 할더는 미국 훈장까지 받았다!
  • [47]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가 이런 기술을 하고 있다. 아마도 본이 되었을만한 영문 자료에서 따온 듯.
  • [48]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군이 300만인데 만해 소련군은 400만이 있었지만, 그것이 모두 분산되어 있었고, 특히 최전선에 배치된 290만은 독일군에 수적으로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방어 진지에 대대 단위로 분산되어 있어서 각개격파 당했다.
  • [49] 아주 예외적으로 독일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소련군을 격파한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 있지만, 이것이 일반화될 수 없다.
  • [50] '러시아를 침공하다가 격퇴로 전사했던 유령 기사단'을 부활시켜 써먹으려는 SS 친위대의 음모와, 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소련군 비밀기관의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트레일러 영상을 보면 독일군의 이족 보행병기도 나오는 등 여러 편을 기획한 모양인데, 1편의 흥행 성적이 나빠서인지 유령 기사단을 다룬 1편이 나온 지 3년이 지난 2014년 현재까지 후속 작 소식은 없다. 사실 스토리나 작화 등은 괜찮은데, 다큐멘터리처럼 실사 인터뷰 내용 등을 집어넣는 등 연출이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