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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last modified: 2018-04-20 10:26:28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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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오카시 슨푸유메히로바(すんぷ夢ひろ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박물관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상.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모든 상들 가운데 오고쇼(大御所)[1]를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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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제작할 때 참고한 초상화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 세 잎 접시꽃.

에도 막부의 역대 쇼군 & 도쿠가와 씨 종가 역대 당주
에도 막부 시작 01대 도쿠가와 이에야스 0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

Contents

1. 고난의 초년기
2. 미카와 잇코 신도 반란(三河一向一揆)
3. 세력 확장
4. 혼노지의 변 이후
5. 임진왜란
6. 막부의 성립과 오고쇼
7. 오사카의 진과 사망
8. 인물됨과 일화
8.1. 인색한 창업자
8.2. 새해 첫 꿈
8.3. 취미
8.4. 의외의 성급함
8.5. 카게무샤설
8.6. 주술과의 관계
9. 평가
9.1. 근현대의 평가
9.2. 조선과 한국에서의 평가
9.3. 정치가로서의 이에야스
9.4.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이에야스
9.5. 가족
9.6. 총체적 평가
10. 창작물 속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1543.01.31~1616.05.22
(도쿠가와 가문 당주 재임: 1549~1605, 쇼군 재임: 1603~1605)

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

에도 막부(江戶幕府, 혹은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창업자이자 첫번째 쇼군.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정대신 타이틀도 있다. 야마오카 소하치가 지은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한국에는 '대망'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 고난의 초년기

원래는 '마츠다이라(松平)'성을 사용했으며, 기반이 되는 지역은 미카와국 오카자키(지금의 아이치 현 동부의 오카자키 시. 나고야보다 좀 남동쪽에 위치한 중핵시임)이다. 아명은 타케치요(竹千代, 마츠다이라 가문의 종손[2]에게 대대로 주는 아명이라고 함).

관례를 올리면서 받은 이름은 마츠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노부(松平次郎三郎元信).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와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 : 노부나가의 아버지)에서 한글자씩 따 왔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원래 이마가와와 오다 사이에 낀 새우같은 존재였다.

이마가와 가문에서 인질생활을 하는동안 이마가와 쪽 심기를 의식해서인지 노부(信)를 빼고 오다를 상대로 분전한 조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淸康)로부터 야스(康)를 따와 마츠다이라 쿠로도노스케 모토야스(松平藏人佐元康)로 개명한다. 후에 이마가와 가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 모토(元)도 빼고 마츠다이라 쿠란도노스케 이에야스(松平藏人佐家康)로 개명한다. 이에야스(家康)의 이에(家)는 헤이안시대 후기의 무장인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의 이에(家)를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다른 기록에는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나오는 대목인 준민용장 가용평강(俊民用章 家用平康 : 뛰어난 백성이 드러나 집안이 편해질 것이다)의 뒷구절에서 앞글자 家와 끝글자 康을 따서 이토호시(伊東法師)라는 스님이 지어준 것이라고도 한다. 이름의 변천사가 나름 의미심장하다. 특히 이름을 여러 번 바꿨어도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온 야스(康)는 끝내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거나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거나 등의 이유가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타케치요 시절에 동쪽의 이마가와 가문으로 인질로 가던 중에 새 외가인 토다 일족이 일행을 오다가에 팔아넘겨 오다의 인질이 되는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하지만,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이걸 인연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친분이 있게 되었으니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후 이마가와군과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오다 노부히데의 서장자인 노부히로와의 맞교환으로 이마가와의 인질이 되었다. 인질이라는 건 후에 이에야스가 이마가와가를 배신한 것의 구실로 삼은 변명이고 실제로는 이마가와 가문의 가장 유력한 책사인 타이겐 셋사이[3]를 가정교사로 붙이고 자신의 조카인 세나히메를 시집보내는 등 이마가와의 이에야스에 대한 대접은 인질살이의 그것하고는 별차원인 사실상의 영재교육이자 장래를 위한 밀접한 동맹관계 구축에 가까웠다. 소설 등에서 항상 나오는 이마가와 가문의 마츠다이라 가문, 이에야스 학대론은 전혀 근거가 없는 창작에 불과하므로 사실로 듣지 말자. 사실대로 따지자면 이에야스가 후대해준 이마가와 가문을 배반한 것에 가깝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겐 충성을 다했으나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가 워낙 막장인지라...[4]
15세 때 오다의 인질 시절에 암살당한 부친을 대신하여 마츠다이라 가문을 잇게 되었는데, 마츠다이라 계열의 미카와 세력을 흡수하려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이에야스를 조카사위로 맞아들여 거성인 슨푸에 묶어 두고, 마츠다이라 일족의 본거지인 오카자키에는 자기 부하를 성주 대리로 파견하였다.[5]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공격을 위해 대군을 일으키자 오다 노부나가가 이에 맞섰는데, 오와리 국 오케하자마에서 요시모토의 목을 쳤고, 이마가와 군에 종군하였던 이에야스도 오카자키에 입성하여 사실상 이마가와로부터 독립하였다. 이후 후지나미나와테(현 아이치 현 토요하시 시 일대)전투 등을 통해 서 미카와를 흡수하면서 자립, 1562년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음으로 이마가와의 종속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후 노부나가는 미노 국, 이세 국 등을 정복하며 서쪽으로 확장해갔고, 이에야스는 영지 내의 잇코 종도의 반란을 진압해가며 착실히 세력을 키웠다.

2. 미카와 잇코 신도 반란(三河一向一揆)

어린 시절의 인질시절에 이은 제2의 고난으로 이 때는 이에야스의 목숨조차 위험했다.

혼쇼지사를 거점으로 하는 승려 쿠우세이가 격문을 날려서 일향종(一向宗)신도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선 것. 딱히 이에야스가 일향종을 박해해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당시 미카와 서쪽은 일향종, 동쪽은 조동종(曹洞宗)이 번성했는데 이에야스가 미카와를 통일할려고 했기 때문에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추측된다. 즉 최종적인 목적은 이에야스에게서 기득권을 인정받거나 혹은 이에야스를 죽이고 친 일향종 성향의 다이묘를 옹립하는 것이었던 셈. 직접적인 계기는 불명이지만 이 경우에는 원인이 명확하므로 중요하지는 않다.

일향종은 꽤 번성했으므로 마츠다이라가의 가신 중에서도 신도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츠다이라가가 탄생한 이후[6]로 계속 마츠다이라가를 섬겨온 사카이가에서도 배신자가 나올 정도였다. 후에 이에야스의 정치적 상담역이었던 혼다 마사노부도 이에야스를 배신했다.

당시 혼다가나 사카이가등의 유력한 일족들도 둘로 갈라져서 싸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분가이면서 종가를 없애고 그 자리를 빼앗을 궁리만 했던 사쿠라이 마츠다이라도 여기에 참여. 그 밖에도 이마가와가를 버린 이에야스에게 원한이 있던 이마가와가의 잔당도 합세하여 이에야스의 근거지인 오카자키성까지 적병이 몰아닥칠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일족 대부분이 배신을 했음에도 혼자서 개종까지하면서 이에야스의 곁을 지킨 젊은 장수가 있었는데 바로 혼다 타다카츠로 타다카츠는 이 때 무공과 충성심을 높게 평가받아서 고속출세를 하게 된다. 물론 타다카츠말고도 이에야스의 곁에 남기로 한 가신도 많았고 그 중에서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일향종에 투신한 아버지를 등졌으나 결국 후에 이에야스를 버리고 히데요시의 밑으로 갔다.

결국 성에 의지하여 어떻게든 버티고 직접 이에야스가 진두지휘[7]를 취하는등의 수단으로 힘들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

죽거나 아니면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가신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가신들이 용서받았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이에야스가 관대하다고 하지만 사실 집안을 떠받들던 중신들도 반수이상이 잇키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들을 벌했다가는 집안이 그대로 망할 판이었고 또 잇키에 참여하지 않고 이에야스의 곁에 남은 가신들도 같은 핏줄이었으므로 섣불리 벌했다가는 후환을 남길 차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결정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일향종과 화평을 맺으면서 그들도 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일단 화평이 맺어지고 정리가 되자 바로 약속을 깨고 영내에서 일향종을 금지했으며 혼쇼지는 불을 질러서 쿠우세이는 목숨만 건져서 도망쳤다고 한다.[8]

한 편 이 미카와 잇코 잇키에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는데 영내의 반대파를 싹 모아서 숙청하고 또 가신단 내부의 결속을 다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다이묘들은 봉건군주에 가까웠기 때문에 무엇을 할 때도 가신들의 반대가 있으면 그것을 억지로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경우 가신들이 한 번 반역을 했다가 용서받게 되었기 때문에 대놓고 반대의견을 내기 쉽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또 영내를 정리해야 다른 곳도 노려볼 수 있으므로 미카와 영내에서 위세를 누리던 일향종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

3. 세력 확장

그리하여 1566년 미카와 국을 통일하였다. 이 때 조정으로부터 종오위하(従五位下) 미카와노카미(三河守)로 서임받았고, 토쿠가와씨(德川氏)로 개성하면서 그의 이름은 최종적으로 토쿠가와 지로사부로 이에야스(徳川次郎三郎家康)가 되었다. 본래 마츠다이라씨(松平氏)는 떠돌이 중이 미카와 국 마츠다이라 마을에 정착하며 시작되었다고 하는, 좋게 말하면 호족 출신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근본도 없는 놈이라, 미카와 국을 통일한 참에 조정으로부터 간지나는 족보를 인정받았다는 의미라 할 수 있겠다. 이때 세이와겐지(清和源氏)의 일파인 닛타씨(新田氏)의 후손을 자처하였다.

미카와 국을 통일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노려 카이, 시나노의 다케다 신겐과 연합, 이마가와를 멸망시키고 그 영지를 분할하여 토토미(遠江)는 마츠다이라 가, 스루가(駿河)는 다케다 가에 속하게 되었다(1568).[9] 이때 이에야스는 거성을 토토미의 하마마츠로 옮긴다.(1570)
1570년 노부나가가 아사쿠라를 칠 때 종군, 아자이의 배반으로 발생한 카네가사키 전투, 아자이와의 결전이었던 아네가와 전투에도 모두 참여하였다.

오다 가문이 아자이와의 일진 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1572년,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각이었던 다케다 신겐이 오다 공격을 결심하고 동해도(도카이도)로 진격하였다. 이에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이 맞서지만 미카타가하라에서 도쿠가와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겐에 맞서는 길을 택했고, 다케다보다 수가 적으면서(11,000명 대 27.000명)도 다수 대 소수에 유리한 학익진으로 도전했는데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종심 깊은 어린진으로 대응한 타케다 군에 압도적으로 패배(전사자 2,000명 대 200명), 토리이 시로자에몬, 나루세 마사요시등의 유력 가신을 잃고 패주하였다. 이것은 이에야스가 겪은 패배 중 가장 처참한 것이었다. 후에 이에야스는 패주해와서 우거지상이 된 처참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젊은 날의 객기, 혈기에 대한 교훈으로 삼게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에게 발린 직후의 모습. 이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신겐에게 패해 도망치다가 말안장에 똥을 쌌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똥을 식량으로 가져간 볶은 된장이라고 시종들에게 거짓말을 했다.[10] 돌아와서 그는 화공을 불러 지금 이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라며 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와신상담과 비슷한 동기인 듯. 일종의 '패전 인증샷'이라 할 수 있는데, 당시 일본 무사들이 명예를 중히 여겼던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행동. 이 그림의 정식 제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미카타가하라 전역 화상(徳川家康三方ヶ原戦役画像)>이지만, 흔히 '이에야스의 우거지상(しかみ像)'이라고 부른다. 현재 아이치나고야의 도쿠가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근데 이 그림 속 주인공은 이에야스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


근데 저 초상으로 석상까지 만든 걸로 보아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쓸데없이 운치있다!)

다케다 신겐에게 도망친 후에 거성인 하마마츠성에서 농성하며 월동하던 중, 다케다 신겐이 병으로 쓰러짐과 동시에 타케다 군은 철퇴하였으나, 신겐 사후, 타케다 가의 사실상의 당주가 된 타케다 카츠요리(신겐의 4남이자 당주의 친부)가 그 해 가을에 다시 동 미카와로 진출하는 등, 타케다 상대로 고전하였다.

1575년, 타케다 카츠요리는 부친의 사망 시에 도쿠가와에 붙은, 나가시노 성의 오쿠다이라 일족의 재포섭에 실패, 이를 정벌하기 위하여 1만 5천의 대군을 일으켰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를 요격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참전, 이에야스도 이에 호응하였으니, 그 군세는 3만 8천이었다. 양군은 그 해 5월 21일(태양력 6월 29일)에 미카와 국의 시타라가하라에서 회전하였다.(나가시노 전투)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6천 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내면서도 다케다 군을 격퇴하였다. 카츠요리는 이 패전 이후 우에스기 가와 동맹을 맺고 가문 재건에 힘썼으나 오다-도쿠가와 연합의 지속적인 공격에 가신들이 이탈하면서 결국 1582년 멸망한다.

한편 이 시기, 노부나가의 딸인 며느리 도쿠히메와, 이마가와의 조카이자 이에야스의 아내 츠키야마도노간의 고부갈등으로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가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결국 노부나가가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아들 노부야스에게 자결을 명해 이에야스는 이에 따랐고,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자결했다.(1579) 단, 이 건에 대하여는 토쿠가와 가 내의 하마마츠파(이에야스파)와 오카자키파(노부야스파)간의 대립의 산물로 보는 시각 또는 단순한 부자간의 갈등으로 보는 시각 등이 있어서, 진상은 확실하지 않다.

4. 혼노지의 변 이후

1582년 6월 초, 오다 노부나가는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혼노지에서 자결하였다. 노부나가 사망 당시 이에야스 또한 쿄토에 있었는데, 아케치의 모반을 안 직후 미카와로 도망하였고, 미카와 귀환 직후에 미츠히데 토벌을 위한 군세를 편성하여 이미 오와리에 이르러 있었다. 이후 사실상의 공백지가 된 구 타케다의 영지를 흡수하였고, 칸토의 패자인 호죠 가와 사돈의 연을 맺으면서 토카이 지방의 패자로 등극하였다.

한편 혼노지의 변 보름 뒤에 노부나가의 부하인 하시바 히데요시(후일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케치를 격파하였고, 그 달 말에는 오다 가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키요스 성에서 가신들(시바타 카츠이에, 니와 나가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이케다 츠네오키) 간에 다음 당주를 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당시 노부나가의 장성한 아들로는 2남 노부카츠, 3남 노부타카가 있었으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적남 노부타다의 아들 산보시를 옹립시키는데 성공하여 가신 중 약간의 우위를 점했고, 이듬해에는 오다 가 가신의 필두였던 시바타 카츠이에와 전쟁이 발발, 오미 국 시즈가타케에서 하시바 군이 승리함으로써 히데요시가 노부나가 사후 패권에 한발 앞서게 된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이에 노부나가의 삼남(오다 노부타카)과 시바타 카츠이에를 지원하며 히데요시에게 적의를 표했고, 이후에는 차남인 노부카츠와 함께 히데요시에 맞서 싸워 전술 국면에서는 어느 정도의 승리를 얻었다(코마키/나가쿠테 전투). 히데츠구가 이끄는 기습작전을 이에야스는 역기습으로 차단. 도요토미군을 거의 갖고놀다시피 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전술면에서는 패배했지만 계략에 능하다는 평가답게 오다 노부카츠와 화친함으로서 이에야스가 전투를 계속할 명분을 끊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은 적대 관계가 계속되었으나, 결국 이에야스도 간파쿠에 오른 히데요시의 권위에 굴복하고 히데요시의 거성 오사카 성에 입조하였다(1586). 이 때 이에야스는 차남인 오기마루(후일의 유키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의 양자(사실상의 인질)로 보내었고, 히데요시는 이부동생인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의 정실로 보내어 사실상의 종속관계를 구축하였다.

1590년 2월, 히데요시는 토요토미 가를 따르지 않는 호죠를 정벌하였는데, 이 때 이에야스도 종군하였다(단, 호죠의 반 히데요시적 동향은 이에야스의 지원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 해 여름에는 호죠가 항복하였고, 이에야스는 호조의 영지였던 칸토로 전봉되었다. 표면상으론 영지가 100만석 이상 늘어난 영전이었으나, 토쿠가와 가 정도의 거대 가문의 전봉은 전례가 없고, 전국시대의 군사력은 지배층의 철저한 토착화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히데요시의 견제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그러나 도쿠가와가의 옛 영토에 대한 히데요시의 관리 실패 및 이에야스의 역량으로 인해 도요토미 정권 개막 뒤 이에야스는 무사시, 이즈, 사가미, 고즈케, 가즈사, 시모우사 6개국 완전지배 + 시모즈케 및 히타치의 일부를 지배함과 동시에 옛 영토에 대한 영향력도 잃지 않은 거물로 성장한다. 명목상 총석고는 150만 석에서 250만 석으로 증가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

이에야스는 칸토에 들어오면서, 그 거점을 칸토의 고도(古都)인 카마쿠라, 호죠 씨 이후의 중심지인 오다와라(小田原)등에 두지 않고, 오타 도칸이 1457년 에도성(江戶城)을 축성한 뒤 관동 내륙부에서 토네가와, 아라카와를 거쳐 도쿄만에서 가마쿠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가 된 에도(현 토쿄 도 특별구 중심부)에 두어, 이를 철저히 개발하였는데, 이는 히데요시의 오사카 조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토쿄에는 그 시절의 지명이 다수 남아 있다. 토쿄에 다른 지역의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은 에도시대의 참근교대-다이묘들을 격년으로 에도에 머무르게 하여 반란의 위험성을 줄이는 것-를 위해 새 땅을 각 다이묘에게 분여하고, 각 다이묘가 지명이 없던 땅에 자신들 영지의 지명을 붙였기 때문이다.

5.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급속히 불어난 휘하 영주들에게 나눠줄 땅을 확보하고 비대화된 군사력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정벌군을 일으키려 했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요토미 정권 중진들이 반발했지만, 히데요시는 결국 출병을 강행한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관동 일대의 반란 진압 및 관동 경영을 핑계로 관동 다이묘들을 비롯한 자기 세력의 참전 규모를 최소화, 훗날에 대비하게 된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전이 좌절되자 마에다 토시이에 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으로 파견되는 안들이 고려되기도 하였다 하나 결국 무산된다.

임진왜란 시에는 이에야스 또한 군사을 일으켜, 일본군의 전진기지라 할 수 있는 히젠 국 나고야에 주둔하였다. 당시 나고야는 쿄토, 오사카, 후시미 등과 더불어 토요토미 가의 정치적 중심지라 할 수 있었고, 조선으로 건너오지 않은 대다수의 다이묘들도 나고야에 주둔하였다.

이 점은 왜란이 끝난 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회복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왜란으로 끊어진 국교는 서기 1607년(선조 40년)에 회복되었다. 이 때 쇼군은 아들 히데타다였지만 실권자는 이에야스였고 조선에 보낸 공식 외교문서도 이에야스의 이름으로 보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한자명인 덕천가강으로 나오지만 '원가강(源家康: 미나모토노 이에야스)'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에 보낸 외교문서는 이 이름으로 보냈다. 반면 히데요시는 '평수길(平秀吉: 다이라노 히데요시)'라고 기록되기도 했는데, 이들과 관련한 조선의 기록을 보면 마치 일본에서 역성혁명이 일어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원래 성인 마츠다이라는 일본 천왕의 방계 후손으로서 천황의 후손 중 황위계승권을 잃은 후손들에게는 성씨를 부여했는데 그 성씨가 미나모토(源) 였다. 즉 마츠다이라=미나모토노였던 셈. 한마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일본 덴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살아남아 에도막부의 주요 영주들이 된 사람들 대부분이 내세우는 족보의 신뢰도는 아주 낮다. 같은 미나모토씨에서 나왔다고 해도 아시카가(足利), 이마가와(今川), 오가사와라(小笠原), 사다케(佐竹) 등이 도쿠가와보다는 혈통면에서는 미나모토 종가에 훨씬 근접한다는 평가다.그런데 결국 기어이 천황가문의 일원이 되긴 했다. 제 109대 메이쇼 덴노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증손녀다.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아니었다면 도쿠가와 막부 성립은 있을 수 없다.

6. 막부의 성립과 오고쇼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드디어 야심을 드러내듯이 토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토요토미 가 내부의 오와리 국 출신의 다이묘들을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본래 이들 오와리 출신 다이묘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소위 오미파라 불리던, 가문 내에서 비교적 신참 다이묘들과 기타 거대 가문들을 규합, 토요토미가 내부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이러던 중 1600년 6월, 아이즈의 우에스기가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고발을 계기로 이에야스가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오사카에서 출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일본 역사에서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이자 '천하를 둔 전투'라 일컬어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서막이었다. 결국 이에야스는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에서 모략으로 승기를 갖추어놓고 세키가하라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와 결전을 벌인 끝에 군사적 식견의 우위를 점하고 승리, 마침내 천하를 잡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항목 참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에야스는 토요토미의 영지를 오사카 성과 그 일대의 60여만 석(본래는 220여만 석)으로 축소시키고, 나머지 자신을 적대한 가문들도 모두 개역(추방) 또는 감봉, 전봉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를 예전부터 따르던 중신들 및 일족들을 전국의 요지에 배치하였다.

이듬해에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에 취임하고 에도에 바쿠후(幕府)를 열어 사실상 전국을 통일하였다. 1603년에는 쇼군 직을 삼남인 토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그 자신은 '오고쇼(大御所)'[11]라 칭하며 표면상으로는 은퇴하였다. 그리고 슨푸(지금의 시즈오카)에 거처하며 텐카이, 차야 시로지로, 미우라 안진 등 슨푸 가신단과 실권을 논의하였다.

토쿠가와 가가 쇼군직에 취임한 후에도 토요토미 가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히데요시의 외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장성하면서 그 불안은 점점 더 현실화되었다.[12]

1607년 이에야스는 조선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임진왜란일본의 뜻이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시 혼자만의 뜻임을 강조하였으며, 임진왜란에 참전한 다른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출진한 것이라 해명하며 사죄하고, 소 요시토시를 시켜 히데요시가 납치한 조선인들을 되돌려보내도록 했다. 물론 약탈품 중 일부도 반환 조치했다.

7. 오사카의 진과 사망

이후 호코 사(方広寺) 종명 사건이라는 대박이 터졌다. 도요토미 가에서 세운 호코지 대불전의 범종에 세겨진 명문의 글귀 가운데 "國家安康, 君臣豊樂"은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두 글자로 쪼개고 도요토미(豊臣)가의 이름을 거꾸로 넣은 것이므로, 이에야스를 저주하고, 도요토미가의 부흥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음모론적 해석이다. 이런 망발 해석을 한 것이 강항에게서 주자학을 배운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인 하야시 라잔으로, 라잔과 그 후손들은 에도시대 내내 강학소의 최고지위를 차지했지만 라잔은 곡학아세로 출세한 XXX 소리를 듣고 살았다. 지금도 하야시 라잔은 일본내에서 곡학아세의 전형중 하나로 꼽힌다. 다만 종명을 새긴 승려는 이에야스 저주했다는 대목은 부정했으나 도요토미가 부흥을 기원했다는 대목은 인정했다. 이유는 그 승려의 아버지가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 출신으로 사실상 도요토미가에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 그러니까 피휘는 필수

이를 빌미로 1614년 겨울에 오사카 토벌의 군을 일으킨다. 이 때 토요토미 가는 히데요시가 남긴 막대한 재산을 이용하여 10만여의 군을 동원, 이에야스가 직접 이끄는 20만 대군을 상대로 분전하였다.

그러나 겨울이 깊어짐과 함께 토쿠가와 군은 병량 부족과 사기 저하로 전의를 상실하였고, 토요토미 군은 농성으로 인한 화약 부족과 심리적 압박감으로 지쳐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막내동생인 오다 우라쿠사이를 사자로 하여 강화 교섭을 진행하는 한편, 대포를 이용하여 성내의 건물을 직접 포격하여 교섭에서 우위를 점하였다. 1614년 12월 18일부터 재개된 강화 교섭은 19일에 합의에 이르렀고, 20일에 서약서가 교환되면서 종결되었다.

당시 양 군에 부과된 조건은 다음과 같다.

- 본성을 제외한 둘째 성과 셋째 성을 철거하고, 바깥 해자를 메울 것
- 요도도노(淀殿 ; 히데요리의 생모)를 인질로 삼지 않는 대신, 토요토미 가의 중신이 인질을 낼 것
이에 대하여 토쿠가와 가의 의무는
- 히데요리의 신변의 안전과 영지의 보장
- 성중의 누구에게도 죄를 묻지 않을 것

강화의 조건으로 성곽의 철거를 요구하는 조항은 당시 보편적인 것이었고 다분히 의례적인 면이 강한 것이었으나 이에야스는 이를 철저히 시행하였고 영지로 돌아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진척을 확인하였다. 본래 성곽의 철거는 수비측에서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것이었으나 이에야스는 공사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가신들에게 철거를 명령하여 이를 철저히 진행하였다. 안쪽 해자를 메우는 것은 조약 위반이라는 속설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속설일 뿐이고 위의 이야기가 과장되어 전해졌을 뿐이다.

이듬해 4월,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가 병사들을 끌어모아서 쿄토 일대가 혼란해져 이에야스에게 빌미를 제공했는데, 이 때 오사카 측 소란의 원인은 이에야스에 대한 반발 자체보다는 히데요리가 성에 모인 낭인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던 게 제일 컸다. 일례로 도요토미가의 중신 오노 하루나가는 자신의 동생인 오노 하루후사에게 습격 당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콩가루. 이런 상황인데 히데요리가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데 어머니 요도도노의 치마바람에 휘둘리고 있으니... 여간 이런 이유로 이에야스는 병사들의 해고와 영지 이전을 요구하였다. 이를 거부한 토요토미 가에 대해, 이에야스는 쿄토 교외에 휘하 다이묘들을 집결시켜 무력으로 이를 압박하였고, 5월 초에는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토요토미 측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개전으로부터 사흘 만인 5월 7일에는 성이 함락, 토요토미 히데요리는 자결하였다.

이후에는 자기 거처인 슨푸(현 시즈오카 현 시즈오카 시 ;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의 인질 시절을 보낸 곳)으로 돌아가서 국정을 관장하였다. 이 시기에 금중공가제법도(禁中公家諸法度)를 제정하여 텐노 가와 쇼군 가의 군신 관계를 명확히 하였고,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제정하여 쇼군 가와 다이묘 가의 군신 관계를 정하였다.

1616년 1월에는 매사냥 도중에 쓰러졌고, 3월 21일에는 조정으로부터 다죠다이진(太政大臣 ; 신하의 최고위)에 봉해졌다. 4월 17일 오전 10시경에 슨푸 성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75세. 장례는 슨푸 교외의 쿠노 산에서 행해졌고, 1주기에 닛코의 토쇼 사로 이장되었다.

이제까지 그 사인은 비자기름에 튀긴 도미 덴뿌라의 과식(혹은 식중독)으로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 도미 튀김을 먹은 것은 1월 중순이고, 사망은 4월인 것으로 보아, 그 개연성은 낮다 하겠다. 현재는 이에야스는 그 이전부터 위암의 증세를 보였고, 직접 약을 조제하여 그 증상을 억제하려 했다는 기록으로부터, 위암의 악화가 직접적인 사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죽기 전에 남겼다는 사세구로는 두 수가 전해진다.

"기뻐하다가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든다. 덧없는 세상 꿈은 새벽하늘과 같네."
(嬉やと 再び覚めて 一眠り 浮世の夢は 暁の空)
"먼저 떠나든 뒤에 남든 결국 같은 것. 함께 갈 수 없는 것을 이별이라 생각하네."
(先にゆき 跡に残るも 同じ事 つれて行ぬを 別とぞ思ふ)
"천하는 쇼군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다. 천하는 천하의 천하이다."[13]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감과 같다. 서두르지 말라. 부자유[14]를 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부족함이 없다. 마음에 욕망이 일거든 곤궁할 적을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함의 기반이며, 분노는 적이라 여겨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일을 모른다면 몸에 화가 미친다. 자신을 책할지언정 남을 책하지 말라. 부족함이 지나침보다 낫다."
(人の一生は重荷を負て遠き道をゆくがごとし、いそぐべからず。不自由を常とおもへば不足なし、 こころに望おこらば困窮したる時を思ひ出すべし。堪忍は無事長久の基、いかりは敵とおもへ。 勝事ばかり知りて、まくる事をしらざれば、害其身にいたる。おのれを責て人をせむるな。 及ばざるは過たるよりまされり)

뒤의 말은 유훈. 평소에 새겨 두어도 나쁘지 않을 명언이며 이에야스의 일생을 잘 보여주는 글이지만 이는 후세에 창작된 위서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1617년에는 토쇼 다이곤겐(凍照大権現)의 신호(神号)와 신계(神階 ; 신토에서의 신의 위계) 정일위가 추증되었다. 이후 에도 바쿠후의 시조로 신군(神君) 혹은 곤겐 님(権現様)등으로 불리며 숭배되었다.

8. 인물됨과 일화

이에야스에 대해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보물을 자랑하는 모임에서 이에야스는 계속 조용히 있다가 '댁 보물을 보여주시오'라는 소릴 듣자 멋쩍게 웃으며 '부끄럽게도 난 가난하지만, 내게 보물이 있다면 그건 내 가신들이라오'라고 했다고 한다. 어릴적부터 맛있는 것이 생기거나 하면 노복들에게 먼저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교육의 성과에 따른 계산된 행동이라고도 한다. 판단은 각자가. 솔직히 말하는 부하를 좋아했다고 하며, 날을 잡아 부하들을 모아 백분토론 서로 떠들썩하게 논쟁을 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를 헐뜯고 다니면서 추종세력을 모으자 칠본창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암살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데 모든 힘을 쏟아야 할 판에 또 다시 사건을 일으키냐며 오히려 칠본창을 꾸짖고 이시다 미츠나리를 안전하게 미츠나리의 거성인 사와야마성까지 배웅해줬다. 이에야스는 적대 세력의 잔당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면 그냥 살려주는 방식을 즐겨 택했다. 이마가와 우지자네[15]의 예도 그렇고, 다케다의 자손들도 마찬가지.

존경했던 인물은 제환공, 진문공, 한고제, 당태종,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존경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보듯이 어느 한 능력이 특출난 사람보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은 부하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등 적재적소에 인재를 쓰고 부하들의 말을 잘 경청하는 용인술이 뛰어난 지도자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에야스의 행적을 보면 이들을 벤치마킹한 듯한 흔적도 많이 나타난다. 특히 일본인들이 최고의 무사로 손꼽는 인물 중 하나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당태종을 존경했기 때문인지 정관정요를 즐겨 읽었다.

8.1. 인색한 창업자

이에야스는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관리가 매우 철저했다. 한 예로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나오는 데 옆구리에 끼워놓은 종이가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이에 이에야스는 뛰어나가 종이를 주웠고 이 광경을 본 하인들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를 묻자 "나는 이것으로 천하를 쥐었소."라고 대답했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가모 우지사토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 천하를 잡을 인물로 마에다 토시이에를 뽑았는데 그 이유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너무 쪼잔해서 부하들에게 은전을 베풀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 그런데 정작 우지사토는 부하들에게 은전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베풀었다고 토시이에에게 까인 인물이다.

이 외 이에야스의 인색함은 여러 기록에서 발견된다. 망가진 마구간을 수리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게 했는데 그 이유가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커야 말이 더 강하게 자라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고, 뒷간을 좀 장식했더니 성질을 내면서 그것을 부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부하들이 방에서 스모를 하면서 노는 것을 보자 그러고 놀면 다다미가 더러워진다고 다다미를 뒤집고 나서 놀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옷도 새 옷을 장만하지 않고 입던 옷을 계속 빨아가며 사용했기 때문에 시녀가 주군께서 새 옷 좀 사 입으시라고 불평하자 이에야스는 되려 자신은 천하를 위해 절약하는 것이라며 그 시녀를 갈궜다는 기록도 있고, 이외에도 음식이나 물자 관리에 대해서 사소한 것까지 과도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래도 이에야스의 이런 면이 있었기 때문인지 이에야스는 후계자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줄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좋게 말하면 검약함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인색했던 인물인 셈. 특히 부나 화려함을 과시하기 좋아했던 어찌 보면 졸부근성이 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반대되는 부분이다.

8.2. 새해 첫 꿈

일본에서 '새해 첫 꿈'으로 보면 재수가 좋은 것이라는 속설이 있는(아즈망가대왕사카키카스가 아유무의 새해 첫 꿈 에피소드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후지산, 매, 가지의 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좋아했던 것을 열거한 것이라는 이 있다. 후지산은 이에야스가 슨푸성(지금의 시즈오카 현)에서 은거하면서 노년에 즐겼던 경치였고 매는 이에야스가 매사냥 덕후였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며, 가지도 이에야스가 좋아했던 음식이라는 데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고도 한다.

8.3. 취미


닛코시 도쇼 성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상. 노년의 이에야스는 이런 복장으로 사냥에 나섰다 한다.

개인적 취미는 '매사냥'이었다. 이 당시 높으신 분들의 취미로 유명했지만 이에야스는 거의 매사냥 마니아 수준이었다고. 또한 개인적으로는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자기 몸의 병을 자기가 직접 처방하고 약까지 직접 조제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대 기록을 보면 웬만한 의사들 못지 않게 훌륭한 처방을 내렸던 듯. 단지 이에야스가 정식으로 의술을 배웠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과연 처방한 약이 정말로 효과를 거두었는지도 알 수 없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냥 그랬다는 일화가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 참고로 일본 위키페디아에서 이 항목에는 요출전이 달려있다. 이 점을 반영해서 코에이의 <노부나가의 야망 12: 혁신>에서는 이에야스가 습득 가능한 고유 전법이 '치료'로 되어 있고 태합입지전에서도 의술 스탯이 높게 책정되어 있다. 전국시대 무장 치고는 75세라는 장수를 누린 편인데, 그만큼 이에야스 본인이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위키백과 이에야스의 일본어판에는 이에야스를 대놓고 건강 오타쿠라고 적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검술을 배웠고, 말년이 되어서도 검술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물론 검술은 당대 장수의 기본 소양이었고, 본인도 병장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병장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취미로서 검술을 상당히 즐겨, 막부 개창 후에도 종종 검술가들을 초빙하였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이토 잇토사이의 '오노하 일도류' 계열과 야규 무네요시의 '야규 신카게류'가 있으며, 이 두 유파는 다음 세대 쇼군들에게 검술을 교습하였다. 야규 가문은 검술 사범의 역할 뿐만 아니라, 에도 막부의 정치적 결정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성장하였다.

말년에는 젊은 부하들에게 "내가 젊었을 때 말야~"라는 식으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것도 좋아했다고 한다. 이마가와가 인질 시절 이야기나 젊은 시절 최대의 적이었던 다케다 신겐과의 싸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추억이나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 준 기록이 없다.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끝내 동맹관계를 끊지 않았으며, 어린 시절에도 만났던 적이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특이한 부분. 그래서 일설에는 이에야스가 실은 노부나가를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에도 막부가 네덜란드를 제외하고는 장기간 서양과의 교역을 끊었던 것과는 달리 이에야스 본인은 노부나가 못지 않게 남만(서양)의 물품을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시게를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는지 해시계나 서양식 시계, 모래시계를 수집하는 게 취미였다고 하며, 그 중 이에야스가 쓴 서양식 시계가 현존하고 있다. 이외 이에야스의 유품 중에는 나침반이나 연필, 안경도 남아 있다. 또한 일본에 표류한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라는 영국인 선원을 등용했고, 그는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라는 이름으로 죽을 때까지 일본에 살면서 다른 서양인들과의 교섭이나 선박 건조 등의 업무를 맡았다. 한국으로 치면 벨테브레 쯤 되는 인물.

8.4. 의외의 성급함

위의 '기다리다 천하라는 떡을 먹은 자'라는 이야기 외에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인물로도 유명해서 느긋하고 침착한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런 이미지와는 달리 꽤 신경질적이고 조급한 면모도 종종 보여주었다.

젊은 시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도 불리한 상황에서 신겐에게 정면승부를 걸었던 적도 있고 세키가하라 전투 초반에 동군이 불리했을 때 시동이 등에 달고 있던 깃발의 깃대를 베어버린 적도 있었으며, 불안하거나 기분이 나쁘면 왼손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이빨로 물어뜯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는데 이게 너무 심해서 피가 날 정도로 물어뜯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말을 타고 지휘할 때에도 처음에는 지휘채로 지휘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맨손으로 말안장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고함쳐가며 지휘했을 정도. 이런 모습을 보면 노부나가 못지 않게 다혈질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8.5. 카게무샤설

우에스기 겐신이 '여성설' 혹은 '반음양설'이 있는 것처럼 이에야스도 떡밥이 하나 있으니 바로 '이에야스 카게무샤설'이다. 한마디로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본인이 아닌 대역이었다는 설. 카게무샤로 '세라다 지로사부로(모토노부)'란 사람이 언급되곤 하는데 이 떡밥을 소재로 북두의 권 작가인 하라 테츠오가 만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바사라에서는 마지막 스테이지 중간보스(페이크 최종보스)[16]로 등장하기도 했다.

다만 글자 그대로 설이니 '이런 얘기도 있구나'하는 정도로 재미로만 알아두자. 겐신 여성설과 마찬가지로 이 카게무샤설에 대해서도 이에야스가 카게무샤였다면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까.

이에야스의 카게무샤로 확인되는 사람은 나츠메 요시노부(夏目吉信)라는 인물인데, 이 사람은 본래 이에야스가 막 자립한 초년기에 미카와 일향종 농민 반란[17] 때 일향종 편에 섰다가 이에야스에게 패하고 항복했다. 그러다가 이에야스가 신겐에게 대패한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고 다케다 진영으로 돌입해 전사했다. 뒷날 요시노부의 아들이 위의 명령도 없이 자신의 동료를 죽여버리는 일을 저지르고 하야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야스는 아버지의 공을 생각해 이를 용서해 주고 "내가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자네 아버님 덕택이네.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네"라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직속 가신으로 배치해 주었다고 한다.

8.6. 주술과의 관계

미묘하게 주술과도 엮여 있는 인물이다. 에도에 타이라노 마사카도와 관련된 유적이 7개가 있는데 이것을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한 장본인이 바로 이에야스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를 통해 덴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막부의 세력을 강화할수 있었대나. 또한 도쿠가와 가문의 보물을 숨기고 그 장소를 비밀리에 전수하기 위해 핫토리 한조에게 노래를 짓게 했는데 그것이 카고메카고메라는 설도 있다.

또한 이에야스가 에도에 저택을 지으면서 저택 한쪽에 악귀들을 모아놓은 귀문을 만들었는데 그로 인해 나중에 오카다 유키코사카이 노리코를 골로보내버린 선뮤직의 저주가 나타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들은 260년간 지속된 에도막부의 원동력에 대한 추측이 발전한것이거나 이에야스의 비범함에 대한 소문이 이어져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9. 평가

9.1. 근현대의 평가

일본에서는 막부를 세우고 나서 천황을 몰아붙인 탓에 근대까지 평가가 좋지 못하였다. 특히 막부가 무너지고나서 메이지 유신을 거치자 다시금 천황을 중점적으로하는 사고방식이 흥한 탓에 비열함이나 간사함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사실 그것이 거짓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이마가와에 대한 행위는 사실상 하극상이고, 장군이 되어서는 자신을 신으로 모신 신사를 짓는 한 편 히데요시의 신사는 철거했다. 물론 새로운 권력자가 옛권력자의 잔재를 없애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신사의 착공시기가 이에야스의 생전이기 때문. 말하자면 지나치게 자신을 미화했다는 점은 비평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을 거쳐서 그러한 시절의 사고방식에 대해 일본내에서 재고의 흐름이 일어나자 반대로 긍정적인 평가가 늘어나게 된다. 역사적으로는 큰 일을 하지 않은 사카모토 료마사나다 유키무라가 유명한 인물인 것처럼 일본내에서 역사적인 위인의 인식에는 역사소설이 큰 영향을 끼쳤는데 대망에서 평화주의자적인 모습이 나온 것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정작 오다 노부나가와 동시대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와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에야 패권을 쥐었다는 점에서 화제성이 떨어지는 인물이라는 것은 사실. 특히 노부나가와 동맹을 했던 시절에는 주로 싸운 것이 다케다 신겐이었기 때문에 큰 활약상이 없다는 점도 문제이다.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 때 대립한 서군 측 인사들이나 최후에 이에야스의 목숨을 노렸다는 사나다 일족에 비하자면 인기가 쳐지는 것이 사실. 재미있게도 이에야스는 물론 다른 막부 창건자들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아시카가 다카우지도 역사의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라이벌에 비하면 인기가 쳐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요리토모는 기소 요시나카나 동생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에게 밀리고, 다카우지는 쿠스노키 마사시게나 기타바타게 아키이에 같은 라이벌들에게 인기가 밀리는 편. 그나마 이에야스는 세 명의 막부 창건자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편이다. 그 밖에도 이마가와와 도요토미가에 충성을 맹세해놓고 그것을 깬 덕분에 간사한 이미지가 강하다.

9.2. 조선과 한국에서의 평가

한국에서는 히데요시의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임진왜란 때 병력을 조선으로 출병시키지도 않았고, 전쟁에 대해 사과해서 '평화주의자'란 식으로 좋게 보는 사람도 제법 있는데, 실상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우선 이에야스가 조선 정부에 보낸 국서를 보면 형태는 분명히 싹싹 비는 형태지만 사실 이 정도는 고금의 외교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철저히 외교적인 수사로 점철된 편지이다.실록에 기록된 이에야스의 사과문
또한 이렇게 싹싹 빌긴 했어도 정작 조선과 명나라는 도쿠가와의 일본 또한 신뢰하지는 않아서 선조 말엽부터 광해군 때까지도 일본의 정세를 살피는 데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광해군일기를 보면 조선 정부가 일본의 정세를 탐지하여 명나라에 보고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받아 본 명나라 유격의 답신이 이랬다.

자문을 받아보고 왜놈들의 정세를 알았습니다. 적국에 일이 있는 것이 비록 귀국에 다행이기는 하나 덕천가강은 꾀를 써서 강자를 제어하는 일을 잘하니, 뜻을 얻은 뒤에는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광해군일기> 광해군 8년(1616년) 5월 20일

이는 명나라 역시 히데요시가 아닌 이에야스 또한 경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국적', '천하의 개쌍놈' 취급이었던[18] 히데요시보다는 좋은 평가를 받긴 했지만 실록을 보면 이에야스의 이름은 임진왜란 이후 포로 교환이나 전후처리 등을 논할 무렵에 이름이 자주 나오는데 본명인 덕천가강이나 원가강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기록을 살펴보면 평가는 전반적으로 '히데요시보다는 개념 있는 왜인' 정도라서 이렇다할 악평은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우호적인 평가를 내린 기록은 없다.일본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부족했던 임란 당시에는 틀린 정보가 많지만 후대의 통신사의 기록에서는 상당히 제대로 나와 있는 것이 특징.

강항의 간양록을 보면 이에야스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괴팍스런 성품에다 싸움질을 좋아하기 때문에 전국을 통틀어 감히 그와 자웅을 견줄 자가 없었다."
"차분한 성격에 말수도 적고 얼굴이나 몸집도 두툼하게 생겨 덕스러운 편이다."
"수길(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살았을 때에는 많은 인심을 얻었지만 수길의 뒤를 갈음하게 되자 도리어 일반의 신망이 떨어져 갔다."
"하는 짓이 명랑하지 못하고 컴컴하다. 한 번 비위에 거슬리면 그 사람을 죽을 고비에 몰아넣고 만다. 그렇기에 부하들도 코앞에서만 슬슬 기지 한 놈도 믿고 따르는 놈이 없다고 한다."
-<간양록> 중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그리고 효종조선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남용익이라는 사람은 일본의 역대 지배자들을 소개하는 파트에서 이에야스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원뢰조의 지파(支派)로서 대대로 겸창(鎌倉: 가마쿠라)에 살면서 8주(州)를 합치고 받아들였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말이 적으며 상모(狀貌)가 풍만하고 준수하며 날래고 사나워 잘 싸우므로 온 나라가 감히 그와 싸울 사람이 없었다. 평수길이 친히 가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뒤에 원한을 풀고 수길에게 귀순하였으며, 수길이 죽을 적에 아들 수뢰를 그에게 부탁하였다.
경장 8년(1603년) 계묘년에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고 10년(1605년) 을사년에 위를 아들 수충에게 전하여 주고 대상국(大相國)이라 일컬으며 부자가 국가의 정사를 전집하였다. 을묘년(1615년)에 대판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평씨를 멸망시켰으며 다음해 병진년에 죽으니 호는 동조대권현(東照大權現)이며, 정권을 잡은 게 3년간이었다.
-<부상록> 중 문견별록(聞見別錄)의 관백 차서에서

간양록에서나 부상록에서나 상당히 싸움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인물이면서 말수가 적고 침착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공통점. 사실 간양록의 기록은 강항이 직접 일본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것이라서 강항 본인의 생각은 물론 강항이 만나본 일본인들에게 들은 이에야스의 평가도 들어 있지만, 대망 등에서 묘사된 '이에야스는 평화주의자'란 식으로 인식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9.3. 정치가로서의 이에야스

한 가지 기억해 두어야할 점은 에도시대가 도쿠가와의 편을 들었던 다이묘들에게도 결코 살기 좋은 시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상공업의 발달로 무사계급은 상대적으로 빈곤한 생활을 보내야했을 뿐더러 도쿠가와 막부는 다시 전국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다이묘들의 힘을 줄이는 정책을 취해왔는데 이것을 시작한 것도 이에야스다.

대표적으로 말기양자[19]을 금지하거나 사사로운 일로 개역[20]이나 할복을 명하는 등의 정책을 취하였고, 또한 도로를 통제하거나 철저한 호적조사를 바탕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통제하였다. 에도 시대에 대중문화가 발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생활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이마가와의 건만해도 이마가와에서는 당시 이에야스를 잘 대접했고 당시 그 대우를 생각해보면 후에 이마가와 중신으로서 쓸 생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는대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를 내쳤다. 여기에는 제설이 있어서 자살할려던 이에야스를 주지가 말렸다고하는 것이 이에야스의 변이고 실제로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이에야스가 기회를 보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원래부터 마츠다이라(이에야스의 옛성)가문은 작게나마 독립세력이었고 그것이 급몰락하면서 이마가와에 섞인 형태이기 때문에 충성심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될 것이다. 사실 이마가와가에서 받은 대우를 생각해보자면 이건 단순한 독립이 아니라 하극상에 해당하는 행위이다.[21]

또한 형벌을 시행할 때도 책형이나 사람을 땅에 묻은 다음에 목만 밖으로 내밀고 녹이 슨 톱으로 산 채로 목을 치는 등 가혹한 형벌을 거리낌 없이 선택했던 것을 보면 역시 대인배설에도 문제가 있다. 이시다 미츠나리를 구해준 건만해도 이시다나 무단파에게 빚을 만들어두기 위해서 그랬다고 보아야될 것이다.

9.4.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이에야스

전장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당대에서부터 이미 높게 평가받아왔다. 전략/정략측면에서의 이에야스의 능력은 언급할 필요도 없거니와, 야전지휘관으로서의 이에야스의 역량은 그 휘하의 미카와 가신단이 아네가와 전투에서 병력이 우세함에도 졸전을 벌인 오다군(히데요시, 시바타 가츠이에 모두 돌파당함)과 달리 병력이 열세함에도 아사쿠라군을 격파했고,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미카와 가신단 필두인 사카이 다다쓰구의 활약 등으로 용명을 떨친 데서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2개 회전이 오다군의 보조적 역할이라면, 압도적 병력열세에서 야전축성과 기습으로 히데요시군의 이케다 쓰네오키, 모리 나가요시를 전사시킨 고마키 나카쿠테 전투는 이에야스의 야전지휘관으로서의 노련함과 신속한 결단력을 보여주는 사례. 전국시대의 회전사례가 그렇게 까지 많지 않은 가운데,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외에는 이에야스가 참패한 전투 자체가 드물고 말년의 세키가하라 전투나 오사카 전투를 제외하면 이에야스의 전적은 최상위권에 넉넉히 든다.

다만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호조 우지야스, 오다 노부나가 등의 쟁쟁한 다이묘들에 비해 이에야스가 한수 처지는 인상을 주는 것은 대부분의 승전이 이에야스의 이미지와 같이 수수하거나 결과론적인 경향이 강한 역덕들에게는 당연히 이길 전투를 이겼다는 인상을 준데 반해[22], 그의 생애에 있어 몇 안되는 패배인 미카타가하라 전투나 그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의 열세가 상대의 네임밸류까지 합쳐져서 지나치게 화려했기 때문.

영혼까지 털리다 못해 똥까지 쌌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야 병력이나 포진부터 이미 열세였던데다 아직 미숙하던 이에야스가 노련한 신겐에게 당해버린 것이라 쳐도, 오사카 전투에서는 저 유명한 사나다 유키무라의 반격으로 우위를 점하던 전력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몰려버렸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생전에 전장에서 생명의 위협에 빠진 적이 두 번 있는데 그 두 번이 모두 다케다 관계[23]이며 그 때마다 적이 빨간 갑옷을 입은 놈[24]들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그 모습이 어지간히도 인상적이었는지 다케다 멸망 뒤 이에야스는 다케다 유신들을 재정비하여 자신이 아끼던 젊은 무장 이이 나오마사 휘하에 편제, 이이 아카조나에를 운용하게 되는데 말년에는 전투가 없어서 군기빠진 신참들이 붉은 무구를 갖추고 있다고 한탄[25]했다는 걸 보면 역시 다케다 가의 붉은 군대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아무튼 전술/전략/군정적인 측면에서 볼때 이에야스는 당대 1급의 군사지도자가 맞다. 전략의 화려함이 오다에게, 전술의 화려함이 히데요시나 겐신, 군정의 치밀함이 신겐에게 밀린다고 해도, 이에야스는 실패나 굴종을 극복하면서 각 방면의 1인자들에게 버금가는 역량을 축적하는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쟁쟁하던 군웅들을 제치고 천하를 거머쥔 것이다.

9.5. 가족

  • 父 히로타다 : 상당히 냉정한 사람으로 6살난 아들 이에야스를 인질로 보냈으며 오다가에 납치당했을 때에도 "이마가와 가문에 보낸 인질이다."라면서 오다가에 굽히지 않았다. 요절한 편이라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은 편. 그의 죽음에는 여러 설이 있어서 병사, 혹은 신하에게 살해당했다는 둥 분분하다. 아버지나 아들에 비해 뛰어나지 못해서 용렬한 인물로 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 母 오다이 : 미즈노 가 출신으로 히로타다와 정략결혼을 했다. 원래 미즈노 가는 마츠다이라 가보다 힘이 약해서 그녀의 아버지는 히로타다의 아버지 키요야스에게 아내[26]를 빼앗겼는데. 후에 상황이 역전되어 미즈노 가가 마츠다이라 가보다 힘이 강해지면서 오다이가 어머니의 의붓아들인 히로타다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히로타다는 강요당한 결혼이라 그녀를 싫어했으나 그녀의 성품에 이끌려 부부 사이는 좋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미즈노 가가 마츠다이라 가가 섬기는 이마모토 가와 연을 끊게 되자 이에야스가 세살 때 그녀와 이혼하고 미즈노 가로 돌려보냈다. 그 후에 그녀는 히사마츠 토시카츠와 재혼했으나 아들 이에야스와는 연락을 계속 주고 받았으며 아들이 이마모토가의 인질로 인근 지역에서 생활하게 되자 생활물품을 챙겨주면서 보살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영향인지 이에야스는 이부동생들과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난세인 전국시대의 뒤엉킨 정세덕에 이마가와 군으로 참전한 아들이 남편 히사마츠가 지키는 성을 공격하는 난감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공격을 앞둔 어느날, 전쟁중에 죽을지도 모르니 그 전에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한 이에야스가 몰래 적진으로 숨어들어와 그녀와 재회하기도 하는등, 모자간에 애틋한 정이 있었던 듯하다. 후에 히사마츠가 이에야스 측에 협력하게 되면서 아들과 자유롭게 왕래하게 되었으며 이에야스도 이부형제인 히사마츠의 아들들도 마츠다이라 성을 하사하고 신하로 두었고 이에야스의 후견으로 각각 다이묘가 되거나 요직에 오르게 되었다. 특히 오다이의 막내 아들은 이에야스와는 부자지간만큼의 나이차가 있어서 그랬는지 크게 아껴서 도쿠가와 이에미츠 시절까지 막부의 중추로 활약하다 세상을 떠났다. 또한 이에야스는 키가하라에서 승리하여 천하를 장악한 후, 자신의 본거지로 구축한 슨푸 성에 어머니 오다이를 맞아들였으며 당시 전국시대의 관습상, 다른 집안으로 재가한 모친을 다시 자기 집안으로 맞아들이는 것은 상당히 드문 경우였다. 다이묘 집안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녀는 아들을 대신해 교토 조정과 오사카 성을 사절격으로 방문하기도 하면서 권력자인 이에야스의 어머니로 대접받다가 얼마 안되어 숨을 거두었다.

  • 아내 츠키야마도노 :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조카딸로 통칭은 세나히메(瀬名姫). 혹은 츠루히메(鶴姫)라고도 한다. 요시모토의 양녀 자격으로 당시 마츠다이라 모토노부라는 이름을 쓰던 이에야스와 슨푸에서 혼인하였다. 그러나 오케하자마 이후 이에야스가 독립하고 이마가와와 관계를 끊자 이에야스는 그녀를 미카와 오카자키 성 밖의 츠키야마에 사실상 유폐하였다. 이에야스가 다케다 겐신과 연합하여 이마가와를 멸망시킨 후 본거를 하마마츠로 옮기면서 오카자키를 장남 마츠다이라 노부야스에게 내 주고 츠키야마도노도 성으로 들여 같이 살게 하였다(1570). 그러던 중 1579년 마츠다이라 노부야스의 아내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가 노부야스에 모반의 조짐이 있음을 밀고, 노부나가의 명으로 노부야스는 할복, 츠키야마도노는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27]

  • 아내 아사히히메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여동생으로 이에야스의 후처. 1586년 정략 결혼으로 전 남편과 이혼하고 하마마츠에 보내졌으며 1590년 사망.

  • 많은 측실을 거느렸는데 그 중에는 과부가 많아 사실은 인처 모에였다는 농담도 있다. 거기다 말년에 들인 측실들은 소녀들이라 말년에는 로리콤으로 갈아탄 거라는 얘기도. 측실들과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들을 얻었는데 역사적인 사실에서 알 수 있는 부친상은 대인배나 자상한 아버지하고는 거리가 멀다. 차남 유키 히데야스을 계속 홀대한 것 등. 오죽하면 이에야스 미화의 첨병인 야마오카 소하치조차도 이에야스에게 좋은 아버지상은 붙일 수 없었을 정도.

  • 장남인 츠다이라 노부야스에게 오다 노부나가가 할복을 명했을 때 이에야스는 이를 막으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28]. 또한 비슷한 시기에 노부야스의 생모이자 이에야스의 정처인 츠키야마도노도 사망했다. 이 사건은 세력다툼에 의한 것으로 다케다 신겐도 똑같은 이유로 아들을 폐적하고 유폐한 적이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에는 별로 드물은 일도 아닌만큼 사실일 가능성이 더 크고 결정적으로 장남 사후에는 무덤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노년에는 때때로 측근들에게 "장남이 살아있었다면" 하는 탄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 2남인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이름도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를 합쳐 히데야스로 짓고, 후일 대가 끊긴 유키 가문을 이어서 "유키 히데야스"로 이름을 개명했다. 유키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의 양자로써 히데요시 집안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자랐다. 때문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이 아들을 경계했고 히데요시가 죽고난 후에도 평생동안 차남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 결국 이 아들은 후계자 자리에서도 탈락하고 젊은 나이에 매독에 걸려서 코가 썩어 없어지는 등 추한 몰골로 죽었다고 한다.

  • 3남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후에 이에야스의 후계자로 발탁되어 쇼군이 되었다. 그런데 사나다부자에 의하여 지참[29]하여서 한 때 폐적당할 뻔했다. 다행히 히데타다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승기를 잡아 승리하였다. 이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맹렬히 화를 냈다는 것은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다행히 노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이 뜯어말리는 통에 별일없이 넘어갔다지만.

  • 6남인 타다테루는 미워하여서 생애에 걸쳐서 홀대했고 심지어는 임종의 때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며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심지어 타다테루는 후에 장군이 된 형 히데타다에 의하여 개역당하여 쫓겨난다. 또한 타다테루의 아들도 아버지의 죄에 휘말려서 유배지에서 홀대를 받아가 분을 견디지 못하고 분실자살했다. 이러한 홀대의 원인은 불명으로 이에야스 생전의 대우는 부자관계라는 점을 때면 75만석을 줄 정도였으니 나쁘지는 않았다. 당시 많고 많은 다이묘 중에서도 50만석 이상의 다이묘는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 다만 이것도 타다테루와 동복형제인 마츠치요에게 줬다가 마츠치요가 젊어서 죽자 그 때까지 얼출 10만석 정도 밖에 안되던 것에 마츠치요의 자리까지 준 것이다. 동년배의 그의 형제들에 비하면 그의 석고는 반절 밖에 안되었고, 이것조차 이에야스의 애첩이었던 타다테루의 모친이 부탁하여 그리 되었다는 것이 정설. 이런 홀대의 이유는 쌍둥이설 혹은 추남설이 지배적이며 그 밖에도 인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형인 히데타다가 타다테루를 개역시킨 원인은 표면적으로 오오사카 여름의 진때 총대장을 명령받았음에도 전장에 지참하였고, 그의 가신이 히데타다의 하시모토 둘을 참살한 것, 그리고 조정에 갈 때 병을 이유로 불참해놓고 뱃놀이에 나갔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작 그 정도 이유로 이에야스의 핏줄을 개역에 유형까지 보내는 것은 다소 부적절한 처사이다. 실제로 히데타다도 지참하여 폐적될 뻔한 적이 있으며 나머지 두 건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사실상의 원인은 따로 있어서 첫번째가 가톨릭에 심취했다는 것이고 두번째가 그의 장인이 역신감으로 찍힌 다테 마사무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지만, 어느 쪽이나 후세의 추측에 불과할 뿐 근거는 없다. 가톨릭설은 타다테루가 외국문물에 심취했고 그의 아내였던 이로하 히메가 크리스천이었다는 것이 그 근거이지만 이로하 히메는 타다테루하고 관계가 좋지는 않았다. 타다테루가 유배를 가게 된 다음 이로하 히메는 이혼하고 다테로 돌아가는데 아버지인 마사무네의 권고에도 끝끝내 재혼을 하지 않았고 이것은 그녀가 충실한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 만큼 타다테루가 크리스천이었다면 양자의 관계가 안좋았다는 것은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 마사무네의 건의 경우 마사무네를 경계한 것은 다른 막신들이지 정작 이에야스는 마사무네를 무겁게 썼고 임종시에서도 마사무네를 부를 정도로 신뢰했기 때문에 타다테루가 마사무네의 사위였기 때문에 유배를 보냈을 거라는 추측은 전혀 근거가 없다. 다만 타다테루, 마사무네, 오오쿠보 나가야스가 에스파냐와 협력하여 막부를 뒤엎을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으나 다른 두 명은 그건으로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결국 타다테루의 개역은 히데타다가 이런 저런 일로 앙심을 품고 있다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걸림돌인 타다테루를 숙청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좋게도 나쁘게도 범골이었던 히데타다에 비해서 타다테루는 성품이 거칠기는 했지만 글과 그림, 차도에 능했으며 무에도 능통하고 약학의 지식도 있는데다가 인맥도 넓은 팔방미인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75만석이나 가지고 있으니 숙청의 이유는 충분한 셈.

9.6. 총체적 평가

이런 점들 때문에 어쩌다 가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줘도 사실 뱃 속에 속셈을 감추고 있다는 너구리의 이미지가 굳어졌다. 메이지시대에 들어서 천황을 홀대했다는 이유로 별의 별 욕을 다 먹게 되는데 전후가 되면서 그 때까지의 방침에 대한 반발로서 오히려 평가가 급상승하는 대우를 받게 된다. 말하자면 메이지시대에 까였다는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좋게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현재의 대인배스러운 이미지는 그 시절에 많이 굳어진 것이다. 굳이 객관적으로 총평하자면 소인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인배도 아닌 철저한 현실주의자 겸 기회주의자라는 평가가 더 어울린다.

그래도 동상은 뻔질나게 많다.(...) 비록 은혼이나 여타 만화등에서 등장하는 "그 유명한" 삿대질을 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상은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상 가운데 하나.

오다 노부나가에 비하면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역량이 부족해 결국 그가 창업한 막부는 무로마치 막부의 연장선에서 만족해 버리는 결과를 낳았지만 세력 구도를 잘 파악하여 약소세력에서 결국 최후의 승리자가 된 인물이라는 것만 봐도 걸물은 걸물. 서양 학자 George Sansom은 오다 노부나가를 평하면서 그의 군재는 히데요시나 이에야스와 같은 유능한 장군의 도움을 받은 편이었다고 평해 이에야스가 헛물은 아니었다는 평을 내렸고, 노부나가가 확장하면서 이에야스에게 뒤를 맡긴것만 봐도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노부나가에 비해 개척하는 역량이 부족했을 뿐이지.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능력이 상당히 뛰어났으며 전국시대의 재탕을 막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2800만 석이라고 하는[30] 일본 전토의 고쿠다카 중 400만 석은 자신의 직할령으로 만들고[31] 300만 석은 가신단인 하타모토의 영지로 주어 사실상 700만 석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32] 사실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의 논공행상 역시 전국시대의 재탕을 막기 위한 성격이 강한데 전국시대 당시에는 패배한 다이묘는 무조건 할복으로만 조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 고니시 유키나가 이 세사람만 참수 조치하고 나머지 서군 다이묘의 영지는 아예 몰수하거나 생계유지가 가능한 최소한의 수준을 제외하고는 모두 몰수하고 자신의 편이 되어준 동군 다이묘들에게조차 100만석을 임계점으로 하여 그 이상은 고쿠다카를 허락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보상을 했다. 이는 다이묘들이 힘을 길러 전국시대의 도래가 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다.--하지만 그렇게 해서 260년 동안 지배했어도 결국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는 폐지크리...


후손이 아직도 종친회를 갖고 있다. 위의 엉거주춤 동상의 제막식 당시 사진. 가장 키 큰 사람이 현 도쿠가와 종가 18대 당주인 도쿠가와 츠네나리(德川恒孝 1940.02.26~)이다. 도쿠가와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 재직중. 그런데 정작 이 사람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히로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6년 11살 어린 베트남 여자와 결혼해서 도쿠가와 가문 종가엔 베트남인의 피가 흐르게 될지 모른다. 당주가 기업에 재직할 무렵 하필이면 다이묘가인 마에다 가문의 종가 당주가 한 부서에 있었기 때문에 상사가 "마에다와 도쿠가와의 당주를 턱짓으로 부리는 건 타이코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겠지" 하면서 좋아라 했다고(...).

10. 창작물 속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가 반죽하고 하시바(도요토미)가 찐 떡을 기다리다 먹은 자"라는 별명처럼, 능구렁이나 너구리의 이미지로 유명하다. 너구리는 별명이기도 하다. 의외로 인기없는지 전국무쌍에서는 2편부터 출연했다. 코에이의 영걸전 시리즈의 전국시대편인 모리원취전직전신장전 양쪽 다에서 최종보스로 등장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인공인 태합입지전도 있는데 도쿠가와만은 자신만의 게임이 없다. 전국시대 3대 영걸로 꼽히는 인물 치고는 창작물에서의 대접이 비교적 박한 편. 자세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기타 창작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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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쇼군에서 은퇴한 뒤 이에야스의 이름
  • [2] 차기 당주 내정자
  • [3]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교육계였던 인물이다. 요시모토의 부친인 우지치카가 직접 스카웃해온 중신으로 이마가와가에 후계자다툼이 발생하자 원래 승려신분이었던 요시모토를 환속시켜 이마가와가의 다이묘로 만든 것도 셋사이로 그 때문에 이마가와가의 2인자차리를 꿰어찼다. 영내 승려세력을 견제하고 중상정책을 펴서 이마가와가를 번성시켰다. 결국 후에 이에야스의 대에서 미카와가 종파때문에 마츠다이라가가 반쪽이 난 걸 보면 대단한 선견지명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 [4]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2년 동안은 계속 이마가와의 가신으로 있으면서 오다 가문과는 대치하고 있었다.
  • [5] 위에 이에야스가 이마가와를 배신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잘 대해줬다고 해도 이마가와가 이에야스의 영지를 꿀꺽할 욕심을 가졌다고 한다면 그건 좀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영지에 이마가와의 부하가 파견되서 다스렸다면 사실상 이에야스의 학비도 공짜라고 보기 힘들다.
  • [6] 에도시대에 탄생한 족보에 따르면 마츠다이라 노부시가가 아들이 없어서 데릴사위로 치카시게를 들였고 이 치카시게가 이에야스의 직접적인 조상이 된다.
  • [7] 당시에 일본은 이미 집단전체제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다이묘가 진두지휘를 하는 일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꼭 필요하다면 이럴때가 간혹 있었다.
  • [8] 일향종의 사찰은 원래대로 두겠다고 하고 화평을 맺은 다음 불태워버리고, 원래 평지였으니 평지로 돌려보냈다 했다고 한다. 흠좀무...
  • [9] 다케다 가는 이마가와 가, 호조 가와 삼국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이 분할은 동맹을 배반한 것이었다.
  • [10] 일설에는 똥을 쌌다는 지적에 당황한 이에야스가 "이게 된장이지 똥이냐? 한번 맛을 봐라 이놈아!"하면서 부하인 이시카와 카즈마사에게 얼결에 자기 똥을 먹였고(...) 이것이 후일 카즈마사가 도요토미 가문으로 도주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기도...
  • [11] 고쇼(御所)란 쇼군을 달리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즉 오고쇼란 '상왕'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 [12] 히데요시는 쇼군이 아닌 간파쿠에 취임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간파쿠는 조정의 최고직으로 공가에 주어진 문관 직위였다. 무가의 직위인 쇼군과는 약간 다른 계열이었고, 엄밀히 말하면 쇼군보다도 간파쿠가 상위직이였기 때문에, 쇼군 도쿠가와 가문을 통제하는 간파쿠 도요토미 가문의 형태 또한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 [13] 쇼군이 정치를 그르치면 누구라도 쇼군을 끌어내리고 그를 대신해서 정치를 해도 좋다는 유언의 한 구절. 근데 나중에는 결국 그르쳤지만 결국 곱게 내려오지 않아서 전쟁이 났다
  • [14] 여기서 부자유란 신체의 자유가 없음을 의미한 게 아니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서 항상 의식주를 걱정해야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종종 일본어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컸다는 얘기를 아무런 부자유 없이~ 라고 표현한다.
  • [15] 아버지 요시모토의 원수인 노부나가는 가신의 배반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우지자네는 천수를 끝까지 누렸다.
  • [16] 보스 출현시 뜨는 자막은 德川家康으로 동일(단 세라다의 경우는 大將 德川家康라는 자막이 뜨고, 진짜 도쿠가와의 경우에는 總大將 德川家康라는 자막이 뜬다.). 보스를 족쳐야 世良田元信라는 이름이 뜬다. 출현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면 그냥 이놈이 최종보스.
  • [17] 이 때 이에야스의 참모 혼다 마사노부도 가담했었는데 마사노부는 그대로 도쿠가와가를 이탈했다가 혼노지의 변 무렵에 도쿠가와가로 돌아온다.
  • [18] 간양록에서는 히데요시를 대놓고 '적괴'라고 부르고 있다.
  • [19] 다이묘가 죽기전이나 죽은 후에 적통이 없다면 가문이 끊기기 때문에 재빠르게 양자를 들여서 가문을 잇게 하는 것.
  • [20] 봉록을 전부 빼앗고 추방하는 것.
  • [21] 그렇다고 해서 유명한 3대 효웅들처럼 주군을 치고 그 자리를 차지한 극악무도한 배신이라기보단 이마가와에서 오다로 줄을 바꿨다고 보는 편이 더 가깝다. 실제로 3대 효웅 외에도 주가가 몰락할때 쯤엔 다른 가문으로 소속을 바꾸는 신하들은 많았다. 이에야스는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2년 동안은 계속 이마가와의 신하였고 이마가와 가문의 혼란이 계속되자 우지자네와 노부나가 중 노부나가를 선택했을뿐이다. 노부나가 또한 이에야스를 대등한 동맹자라기보단 거의 가신으로 취급했다.
  • [22] 이 또한 당연한 이야기지만 역사를 논하는 호사가들이 흔히 내뱉는 당연히 이길 수밖에 없는 전투는 의외로 전쟁 역사 속에서 얼마 되지 않는다.
  • [23] 첫번째는 다케다 신겐에게 쳐발린 미카타가하라 합전, 두번째는 다케다 세력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사나다 유키무라에게 일시 죽을 뻔했던 오사카 여름의 진.
  • [24] 정확히 말하면 아카조나에라고해서 붉은 무구를 허락받은 정예병들이다. 첫번째는 야마가타 마사카게, 두번째는 사나다 유키무라.
  • [25]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이 나오마사 사후 그 아들이 지휘하게 된 이이 아카조나에가 오사카 전투에서 사나다 유키무라에게 쳐발린 뒤 한 이야기인 듯도.
  • [26] 이 아내가 게요인(華陽院)이다. 오다이의 친어머니이며 미인으로 이름났는데 그 딸인 오다이도 인근 제일의 미녀로 유명했다고.
  • [27] 이것이 통설이나, 노부야스 할복은 이에야스 본인의 의지였다는 주장도 있다.
  • [28]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소 엇갈린다.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지는 않았지만 할복 전까지 장남의 거처를 이전하는 등 이를 지연시키려는 시도는 하였다.
  • [29] 전장에 늦게 도착하는 것. 패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보통은 할복감이다.
  • [30] 실제 석고는 시대 등에 따라 이와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특히, 에도시대 후반 가면 이보다 더 많아진다.
  • [31] 전봉 되기 이전의 영지와 전봉 후 영지가 된 오다와라 지역을 합친 것이다.
  • [32] 도쿠가와 계통이 아닌 다이묘 가문 중에 석고가 많았다고 하는 가문은 보통 시마즈(사쓰마), 모리(초슈), 그리고 에도 막부 초기에는 마에다, 다테 가문이 꼽힌다. 이들은 실제로 농토 개발에 열을 올리거나 원래 그만한 영토를 보유했거나 아니면 광산 등 다른 수입을 통해 대충 100만 석 이상의 석고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