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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

last modified: 2017-01-19 07:26:20 Contributors

로마의 역대 황제
플라비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네르바

이름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
(Titus Flavius Domitianus)
출생지
생몰년도 51년 10월 24일 ~ 96년 9월 18일
재위기간 81년 9월 14일 ~ 96년 9월 18일

Contents

1. 소개
2. 치세
3. 죽음
4. 평가


1. 소개

당대에는 폭군으로 여겨졌으나 현대의 연구에서는 재평가되고 있는 황제. 원로원과의 사이가 나쁘고 정치 조율 능력은 떨어졌으나 행정 능력은 뛰어났다는 것을 보면 티베리우스와 비슷할 수도 있다. 다만 취급은 도미티아누스가 더 안습하다.

2. 치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둘째 아들이자 티투스 황제의 친형제.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나 형인 티투스와는 달리 어릴때부터 제왕교육을 받은 탓에 서민적 풍모인 아버지나 형과는 달리 귀족적인 풍모를 지니게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이미 티투스의 후계자로 선언된 상태였기 때문에 티투스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예정대로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나 형과는 달리 제국 통치에 필요한 실무 경험이나 군사의 경험이 없는 채로 즉위하게 되어 이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치세에 그늘을 드리우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즉위 초 도미티아누스 경기장, 네르바 포룸[1]의 공사를 시작하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시작한 콜로세움을 준공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이후 100년 만에 로마병사들의 급여를 인상하였다. 또한 라인강과 도나우강 사이 군사상 취약지점인 슈바르츠발트를 로마 영토에 편입하고 그곳에 처음으로 게르마니아 방벽을 세워 국경선의 방어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러나 점점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가면서 통치에 그늘을 드리우게 되는데 이는 원로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기사계급을 더 중용한 탓이었다.

아그리콜라 원정 칼레도니아의 육상 해상의 진출로를 표하고있다. 마찬가지로 진출로와 요새를 말하고있다.

도미티아누스의 치세에 명장 아그리콜라는 브리타니아에 파견되어 히베르니아(아일랜드)까지 탐험과 토벌전을 나가 이름을 남기고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를 합병하기위해 전쟁을 벌였으나 때마침 멀리떨어진 본국에 도나우강 지역에서 여러 군단과 군사를 잃어 85년 로마로의 귀환을 명받아 합병을 앞두고 정벌도중 그간 수년간의 고생길을 무색하게 빈손으로 아쉬운채 돌아와야만 했다.

85년, 도나우강 북쪽의 다키아족이 로마로 쳐들어오자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족과 전쟁을 벌여 우여곡절 끝에 88년 다키아족을 무찌르는데 성공했다. 이듬해에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이로 인해 후의 황제가 되는 트라야누스가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 반란의 경우 사투르니누스가 죽기 전 증거를 소각하는 바람에 입증되지는 못했으나, 밀고자를 대거 고용하고 재무관직을 종신 취임하면서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하던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불만을 품은 원로원 반대파들이 뒤에서 사주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원로원과 도미티아누스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대부분의 로마인들이 다키아를 완전 섬멸할 것으로 기대한 것과는 달리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와 강화를 체결하여 로마인들을 실망시켰다. 특히 로마인들은 포로가 된 병사들을 돈을 내고 구해낸 것에 분통을 터트렸다. 물론 도미티아누스에게도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키아와 싸우는 사이에 도나우강 유역에 거주하던 야만족들이 로마로 쳐들어올 조짐을 보였기 때문에 다키아와 다른 야만족들과 동시에 전쟁을 치루기는 무리라고 판단한 도미티아누스는 일단 다키아와 강화를 맺기로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다키아와의 강화는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결정적으로 민심이 떠나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거기에 도미티아누스가 원로원 의원들의 비리를 감시하는 델라토르 제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원로원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된 가운데, 85년에는 도미티아누스 자신이 종신 재무관직에 취임하면서 결정적으로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 재무관은 국세조사를 담당하는 직책이었지만 또한 원로원 의원을 추방할 권한도 있었기 때문에 도미티아누스의 종신 재무관 취임은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3. 죽음

96년 9월 18일, 이런 상황 속에서 도미티아누스가 갑자기 암살되어버렸다. 이 암살극의 이면에는 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관리, 아내 도미티아 롱기나가 있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제위를 이은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그가 갑자기 암살된 이유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같은 플라비우스 씨족에게도 냉혹했던 도미티아누스의 성격과 조카와 불륜에 빠진 도미티아누스를 질투한 황후 도미티아의 공포가 결합된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2] 도미티아누스가 죽자,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도미티아누스에게 "기록말살형"을 선고했으나,[3] 군대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에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4] 어쨌든 원로원은 네르바를 황제로 추대했고 플라비우스 왕조는 27년만에 붕괴되었다.

4. 평가

도미티아누스는 일반적인 로마 역사상의 폭군과는 달리 로마 제국을 안정시키고 발전시키려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로마 제국 자유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거나 가시적인 성과를 달성하는데 실패했으며 원로원과 지나친 갈등을 빚었다. 국방면에서 보면 아우구스투스 시절 게르만 지역을 완전히 상실한 이후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방어선으로 삼은 기존 로마의 영토정책의 개혁을 추구하여 많은 호응을 받았으며 아그리콜라같은 명장도 휘하에 두었으나 다키아 전쟁 등 여러 군사적 사안에 대한 대처가 미흡하여 국경 확장에는 실패했다. 이런 실패들이 겹쳐 결국 치세가 비극적인 파멸로 치달은 셈이다.

국방정책이나 국정개혁에 나름 힘썼으나 로마 자유시민의 호응을 크게 이끌어내지 못하고 내부 권력집단과 대립각을 세우다 역습을 당해 몰락하는 점에서 광해군과 비슷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적어도 도미티아누스는 미친듯이 궁궐공사를 한답시고 재정을 파탄내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행정과 국내안정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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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물론 당연히 건설 당시에는 이 이름이 아니었다
  • [2] 도미티아누스가 죽고 네르바가 즉위할 때까지의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던 걸 보면 단순한 공포와 질투로 인한 우발적인 암살이 아니라 누군가 제대로 각본을 만든 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3] 로마 상류층에게 있어서 가장 불명예스런 형벌로, 고인이 생전에 이룩한 모든 업적에 대한 기록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 벌은 원로원의 화풀이에 가까운 것으로, 네로도 이 벌을 받았으며 말년에 원로원과 사이가 나빠진 하드리아누스도 사후 다음 황제였던 안토니오스 피우스가 눈물을 흘리며 원로원을 설득하지 않았으면 이 벌을 받을 뻔했다. 의외로 칼리굴라는 이 벌을 받지 않았는데, 사실 이 벌을 받지 않은 건 벌을 받을만큼 업적 자체를 남긴 게 없어서(...)였다. 다만 도미티아누스가 완성한 플라비우스 경기장의 경기장을 만든 사람이 도미티아누스라고 쓰여진 석판 만큼은 경기장을 지은 걸 감사히 생각한 시민들이 결사적으로 막아서 지우지 못했다.
  • [4] 도미티아누스는 군대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이유는 그가 카이사르 이후 처음 군인들의 급여를 올려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