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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송금 사건

last modified: 2016-04-08 15:49:52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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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시작은 2002년 국정감사였다. 의혹이 불거지자 김대중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지만 수사 요구는 거세지기만 했고 이에 '검찰수사유보'라는 강경책을 내놓아 수사를 막았지만 의혹은 날로 커지기만 했다.

결국 참여정부 수립 이후인 2004년, 국회 다수당이던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주도로 특검이 발의되어 노무현 대통령의 수용을 통해 특별검사팀이 구성되고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거부 내지는 내용상의 절충 정도로 끝날 것이라 여겨지던 것과는 달리 노무현 대통령의 전격적 승인은 한나라당에서도 의외로 받아들여졌고, 민주당 내에서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반발을 부르기도 했다.[1]

이렇게 해서 구성된 특검팀은 곧 현대그룹이 대북 7대 사업권 구입 명목으로 4억 5천만 달러를 북한 정부에 몰래 불법송금한 사실을 밝혀내었고, 그 중 1억 달러는 정부의 정책지원금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결국 비공식적 송금을 한 것이 밝혀졌다.[2]

이 사건과 관련하여 현대에도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되었고 추가적으로 현대의 비자금 150억이 드러나는 등 현대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자 당시 현대 회장이자 사건 핵심 인물인 정몽헌 회장이 현대 계동 사옥에서 투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이 사건 관계자들이 줄줄히 징역을 선고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박지원 전 비서실장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그 외에도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이 수감되었다. 대신 이들은 몇년 후 참여정부의 결정으로 특별사면되었다.[3]

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의 정부 시절 이루어진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서 돈 주고 산 노벨상이라는 비판이 한나라당과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등장했고, 전반적으로 햇볕정책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는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북한 철도 연결 사업도 이때 중단된 뒤 재개되지 못하였고, 노무현 정부 역시 부시 행정부의 입장에 대체적으로 순응했으며, 부시가 대북 온건책으로 돌아선 임기 말에 들어서야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노무현 정권 말기에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분위기가 유화적으로 바뀌었으나, 그때는 이미 노무현 퇴임 직전이었던데다 후임 이명박 정권이 강경책을 구사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게 된다. 여기에 이후 북한의 핵개발 진척 및[4] 잦은 핵실험 강행은 이명박 정권의 대북강경책이 옹호받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5]

이 사건에 대해 옹호측에서는 당시 닫혀있던 북한의 빗장을 열기 위해 어쩔 수 없던 필요악이라는 주장을 하며 정치적인 행동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6], 헌법재판소는 이 사건이 통치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그 결과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어서 법원의 재판에 의하여 결국 불법임이 확정되었다.

이러한 불법 송금 내용은 당시 국회의원 총선거 시기와 연관된 정치적 목적이 결부되었다고 여겨질 수 있는 타이밍인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4일 전인 4월 10일 발표되었다. 이는 김대중 정부 이후 수십년간의 집권 프리미엄을 상실하여 그로 인한 이해관계의 문제나 박탈감에 시달리던[7] 영남권에서 역풍을 초래하여 결국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이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영남권에서 참패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풍현상에 대해 한국 유권자들, 특히 중년층 이상 유권자들이 그동안의 선거기간동안 북풍을 비롯한 여러 사건들을 겪으면서 저런 일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과, 지역개발예산과 인사등의 이해관계[8]에 얽힌 뿌리깊은 지역감정 문제를 간과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여기에 YS의 몰락으로 인해 5년간 지연적 특혜를 누리던 부산경남계열에서는 김대중의 친 대구경북 정책(대구 밀라노 프로젝트 등의 자금지원 및 금융보증, 김중권 등 TK인사 중용)과, 그에 대비되는 삼성자동차의 몰락으로 인해 불만이 쌓였었던 것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금융실명제, 상계엄령등과 더불어서 7/9급 공무원 시험 행정법총론 부문에서 통치행위 관련 문제로서 시험 문제로 자주 출제되었다. 주로 국가직 시험에서 자주 출제되었다고 하며, 교재 역시 '통치행위' 판례 항목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부분으로, 법원은 정상회담 개최 자체는 통치행위에 속하기 때문에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지만 이러한 대북불법송금 활동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된다고 판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독일유학파이고 그쪽 통일사례를 많이 참고했으니 옛 동서독 비공개거래 사례를 참고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이 사건을 이후로 친노와 친DJ가 갈리게 되는 결정적 단초가 제공되었으며, 그로인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사태에 일부 친DJ계가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추측도 나온다. 특히 탄핵에 가담한 친DJ였던 김영환 의원은 당시 대북송금특검에 대해서 열렬히 반대했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들어서 이 문제로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 선거에서도 이 이야기가 문재인과 박지원 의원 측에서도 나와 진실공방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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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특검안이 거부되지 않은 이유로 대통령과 그 친위세력이 여당내 동교동 계열을 몰아내고 PK세력을 중심으로 권력을 재편하기 위해서였다는 시각이 있다. 대선 과정에서 쌓인 불화와 앙금, 여기에 정치적 노선과 지향 차이가 더해진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후의 열린우리당 창당과도 연관되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그밖에도 이런 수용이 훗날의 대연정 제안과 비슷한 맥락에서 당시의 경색된 정국을 풀어보기 위해 선택했다 여기는 시각도 있다.
  • [2] 2009년 7월 이명박 행정부의 통일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 중 일부를 근거로, 위에서 언급된 대북송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현대의 포괄사업권과 대북사업의 독점권을 획득하기 위해 현대가 보낸 돈이었고 정부는 송금의 편의만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다.언론기사. 그리고 북한이 운용할 수 있는 1년 예산이 100억달러가 안 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적어도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셈인데, 여기서는 사실 중국이 북한에 석유와 자금지원 등으로 제공하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 [3] 당시 지지율이 악화되었던 참여정부가 동교동계에 화해의 제스처를 내밀고자 결정했다는 시각도 있다.
  • [4] 물론 핵개발 자체는 김일성 생전부터 이루어졌다.
  • [5] 물론 이명박 정권의 강경책이 단순히 이전 정책의 반발인 것만은 아니고, 일본-미국과의 군사동맹 강화와 중국-북한에 대한 온건책 지양을 주장하는 보수정책(대표적으로 김태효)이 정권내 온건정책파(대표적으로 류우익)를 누르면서 이행된 것이었다.
  • [6] 박지원 현 민주당 의원의 경우 이 사건을 본인의 정치적 커리어로 내세우고 있다. 의원회관 호실도 6.15 남북공동선언을 기념하는 615실.(이상득 전 의원이 4.19 혁명 참가를 내세워 419호실을 쓰는 등 몇몇 의원들의 특정 호실 선호가 존재한다고 한다)
  • [7] 심지어 영남 기업이 호남으로 이전했다거나, 광주만 호황이라거나 하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영남 지자체 의회에서 직접 호남을 방문하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유언비어는 사라지지 않았고, 위와 같은 확인 등은 지역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 [8] 군사정권 시절에는 특정 지역 출신 고위직의 임명은 그에 따른 중하위직 공무원은 물론 심지어 공장 직원 채용이나 매점 운영권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즉 자지역 출신 고위직이 나와야 그에 따른 지연적 특혜를 누릴 수 있는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