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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데모크라시

last modified: 2015-02-27 16:56:36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진행
4. 입헌 양당정치와 몰락
5. 의의
6. 여담


Taisho Demokras[1]

1. 개요

일본에서 1910년대 부터 20년대 사이에 일어난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사조,운동들을 일컫는 명칭. [2] 대체로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부터 치안유지법이 만들어진 1925년까지를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풍미했던 시절로 본다.

2. 배경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대외 정세가 안정을 찾고,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쑨원을 후원하는 자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편으로 일본이 근대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급속도의 발전 가운데 시민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획득을 주장하는 흐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정세가 혼란해지자 일본 군부에서는 이때를 중국 침략의 호기로 판단하고 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가 내각에 식민통치중이던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하는 안을 건의했다. 그러나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은 러일전쟁 이후의 재정난이나 국제관계 등의 문제를 들어 이를 거절했다. 그러지 우에하라는 군부대신 현역무관제[3][4]를 이용해 사이온지 내각을 실각시키려 했다.

결국 사이온지 내각이 실각하고 육군의 입김이 강한 가츠라 타로[5]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국민들은 좋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중의원 오자키 유키오나 이누카이 츠요시 등이 가츠라 타로 내각 출범을 번의 파벌정치[6]라고 주장하며 가츠라 내각을 비판해 1912년 벌족타파, 헌정옹호를 외치며 호헌운동을 전개했다(제1차 호헌운동).

이에 가츠라 타로 내각은 당시 야당으로 반정우회의 기치를 세우고 있던 입헌국민당 의원들을 회유하여 입헌동지회라는 신당을 발족하는 등 정우회나 반정우회 세력으로부터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애썼으나, 끝내 출범 53일만에 총사퇴하고(다이쇼 정변) 입헌 정우회를 여당으로 하는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출범했다. 야마모토 내각은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폐지하여 군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지만 지멘스사의 해군 뇌물공여 사건(지멘스 사건)이 터지면서 국민의 분노를 샀고 결국 야마모토 내각도 실각하고 만다.

3. 진행

이런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야마모토 내각을 뒤이어 출범한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은 영일동맹에 따라 독일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다. 이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국제협조의 흐름이 강화되면서 민주주의, 자유주의 운동이 더 활발해지게 되었다.

일본 내에서는 민본주의를 주창하는 학자, 널리스트들의 활동이 나타났는데 노베 다츠키치는 국가가 통치의 주체이고 덴노는 하나의 국가 기관에 불과하다는 덴노기관설을 주장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조선 총독으로도 유명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시베리아로 출병(적백내전)하겠다고 선언했고 미곡상들이 을 사재기하면서 쌀가격이 폭등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토야마현에서 쌀도매상과 주민들간에 쌀을 둘러싸고 소동이 벌어지면서(쌀 소동) 쌀도매상을 파괴하거나 불태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데라우치 내각은 강경하게 맞섰지만 전 국민적인 반발로 결국 사퇴하고 일본 국민들 사이에 "평민 총리"로 불리며 신망이 높았던 하라 타카시가 수상에 임명되어 하라 내각이 출범했다.[7]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인 1923년, 바 다이스케가 당시 황태자였던 히로히토, 훗날의 쇼와 덴노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제2차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총사퇴하고 추밀원 의장이던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기요우라 내각은 추밀원의 귀족의원들 중심으로 이뤄진 탓에 국민들에게서는 헌정 요구가 빗발쳤다.(제2차 호헌운동) 이때 입헌정우회 내에서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을 지지하는 세력이 탈당하여 정우본당이라는 신당을 만들었고, 세력이 약화된 입헌정우회는 제1차 호헌운동을 불러일으켰던 가츠라 타로 계열의 입헌동지회의 후신 정당인 헌정회와 입헌국민당의 후신 정당인 혁신클럽으로 구성된 이른바 '호헌3파' 연정을 발족하였고 총선에서 이들이 기요우라 내각 지지당인 정우본당을 누르고 과반수의 의석을 획득하면서 기요우라 내각은 퇴진하고 전전 역사에서 가장 민주적 내각이라는 토 타카아키 내각이 출범했다.

1925년 가토 내각은 사상 최초로 보통선거법을 제정해 25세 이상의 성인남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국내에서는 이것을 일본 정부가 내세운 하나의 '기만책'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당시 선거권의 확대는 전 세계적인 기류였으며 제2차 호헌운동 또한 보통선거권을 무기로 선거에서 승리했던 것을 고려할 때 이것은 맞지가 않다. 선거권 확대를 후속한 치안유지법은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이기는 하였으나 의도적으로 법 조항을 애매모호하게 만든데다가 처벌 또한 후일에 비하면 솜방망이였으므로 이른바 '무산 정당'이 3개나 창당되고 여러 지방에도 지방 무산 정당이 활동하는 등 실제로 이 법이 사회 통제에 얼마나 기여하였는지는 의문이다.[8] 이후 일본 정치가 우경화되면서 치안유지법이 강화되어 최고형을 사형으로 높이게 되면서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만들어졌던 법 조항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국가보안법이 바로 이 치안유지법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법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가토 타카아키가 사망한 1926년 크리스마스에 다이쇼 덴노가 세상을 떠나면서 다이쇼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4. 입헌 양당정치와 몰락

다이쇼 시대 이후로 약 6년 동안 잠시 헌 정우회(보호무역 지지)와 헌 민정당[9](자유무역 지지)의 양당제가 실시될 거라는 희망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1928년 선거에서는 양당의 의석이 고작 2석 차이(총 466석 중 218:216) 나면서 정권이 요동쳤으며, 민정당으로 정권이 넘어온 뒤 마구치 오사치[10]의 죽음과 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의 도각[11]으로 민정당 정권이 무너졌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최후의 보루격으로 정우회의 이누카이 츠요시가 군을 통제하려고 했으나, 그도 역시 암살당해버린다(...)

이런 참극 끝에 일본의 민주주의는 완전히 무너졌고,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는 덴노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언행이라도 했다가는 바로 치안유지법에 적용되어 끌려갔던 광기의 전시 체제기가 열렸다.

5. 의의

일본에서는 전후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고 높이 평가하는 편이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소위 '문화통치'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당시 주요 양당 중 하나인 헌정회가 이른바 '동화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던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딱히 근본적인 변화까지 일어났던건 아니었다. 한편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흐름속에서 여러 일본 지식인들이 식민통치를 받던 조선의 상황을 돕는 등의 일도 있었으나 일본과 식민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6. 여담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해서 번역어인줄 아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실제로 일본에서도 '다이쇼 민주주의' 이런식으로 쓰지 않고, 가타카나를 차용하여 大正(다이쇼) デモクラシー(데모크라시)라고 쓴다. 당시 대일본제국헌법[12]은 전근대적인 발상에 의해 국가의 주권자를 덴노 한 사람으로 명시했기 때문. 덴노만이 주권자인 당시 일제의 헌법에는 국민 모두에게 주권이 있다는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사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응하는 영어의 'democracy'를 그대로 사용하기 위해 가타카나로 차용만 해서 쓴 것.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덴노의 주권 조항을 삭제한 화 헌법으로 넘어온 지금까지도 은연중에 이어져 일본에서 민주주의체제가 잘 작동하지 못하는 장벽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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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원래는 Taisho democracy 이겠지만, 주로 일본발음으로 쓰는경우가 많다. 자세한것은 다이쇼천황 각주참조
  • [2] 다이쇼(大正)는 당시 덴노 요시히토(嘉仁) 재위(1912년 7월 30일 ~ 1926년 12월 25일) 시기의 연호.
  • [3] 육군 대신이나 해군 대신은 현역 군인만이 보임될 수 있도록 규정한 제도. 문관이나 퇴역 군인, 예비역 군인 등도 보임 자격이 없게 된다.
  • [4]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마음에 들지 않는 내각이 있으면 군부가 장관 후보자를 내보내지 않아 수립 단계에서 무산시킬 수 있기 때문. 내각이 사실상 군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기형적인 제도로, 일본 민주주의의 붕괴와 군국주의의 발호로 이어진다.
  • [5] 가츠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 [6] 가츠라 타로는 조슈번 출신이고 육군은 죠슈번 출신들이 장악했기 때문에 죠슈번의 파벌 정치라는 비판이 나왔다.
  • [7] 일반적으로 하라 내각이 일본 역사 최초의 정당 내각으로 인정된다.
  • [8] 이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 공산당이 창당하는 등 지식인과 노동자들 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한 시기였다. 1920년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지식인들 가운데 사회주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치안유지법 또한 당연(?)히 식민지 조선에서도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자들을 때려잡는 법으로 활용되었다.
  • [9] 1차 와카츠키 내각이 무너지고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들어서자 헌정회와 앞서서 제2차 호헌운동 당시 기요우라 내각을 지지했던 정우본당의 합당으로 결성. 창당 당시 의회주의, 인종-빈부격차 해소, 국제적인 평화와 협조주의, 국민 자유의 옹호를 주장했으며, 군축 실현을 주장하기도 했다. 보수적인 여당에 가까웠던 정우회에 비교한다면 리버럴 격.
  • [10] 군축정책을 바탕으로 1930년 선거에서 승리(민정 273 : 정우 174)했으나 런던 해군군축조약 체결로 군부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세계 대공황에 제대로 대처하기 못하여 발생한 경제 위기 도중 우익에게 총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으나 국난 극복을 위해 병상을 나와 의회에 출석하는 등 무리를 하다가 끝내 병환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 [11] 군부의 통제를 위해 정우회와의 대연정을 추진했다가 도리어 민정당 내에서 결사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고, 와카츠키는 연정 포기로 돌아섰으나 이번에는 내각 안에 있던 찬성파 장관이 '파업'을 하는 바람에 내각을 사직해야했다.
  • [12] 2차대전 종전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일본의 화 헌법의 이전 헌법(메이지 유신~2차대전 종전)을 일컫는다. 이지 헌법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