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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쿠즈네초프

last modified: 2015-04-08 18:12:14 Contributors



고향인 아르한겔스크에 세워진 쿠즈네초프의 동상.

Николай Герасимович Кузнецов
Nikolay Gerasimovich Kuznetsov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
(1904.7.24-1974.12.6)

소련군 해군의 사령관이다. 소련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해군 원수 및 해군 장관을 역임하였다.

Contents

1. 출생과 성장
2. 독소전쟁
3. 전후
4. 평가
5. 관련 항목


1. 출생과 성장

북극해 연안인 아르한겔스크에서 세르비아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 직후에는 너무 어려서 징집 대상에서는 제외되었는데도 나이를 속여서 붉은 군대에 입대했고, 1919년에 북방 드비나 분함대에서 근무하였다. 당시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군은 완전히 해체 상태였고, 새로 창립된 붉은 군대의 해군은 제대로 된 함정이 거의 없었다. 이후 페트로그라드 해군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쿠즈네초프는 1926년 고급해군학교를 졸업한 이후, 순양함 체르노바 우크라이나에서 근무하였다. 1932년에는 다시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순양함 크라스니 캅카스("붉은 캅카스"라는 뜻)에 근무하였다. 1934년에는 최초로 근무했던 체르노바 우크라이나에 함장으로 돌아와 근무하였다. 이러는 동안 그는 탁월한 지휘를 보여 군에서 주목받았으며,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에 공화국측 군사 고문으로 파견되었는데, 이 때 파시즘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2. 독소전쟁

1938년에 귀국한 뒤에는 34세의 나이로 소련 태평양함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때 소련 해군도 육군과 마찬가지로 대숙청의 여파가 덮쳐서 많은 장교들이 니콜라이 예조프의 NKVD에 끌려갔다. 쿠즈네초프는 용감하게 이에 대해 크게 항의하였고[1], 많은 장교들의 신원보증을 서줘 석방시키기도 했다.

능력이나 인품이 탁월했기 때문에 1939년 34살의 나이에 해군장관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이자리를 맡으면서 소련 해군을 지휘하였다. 쿠즈네초프는 해군 장관 시절 소련 해군이 서방이나 독일에 맞서기에 너무 빈약하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대양함대 육성 계획을 발표했다. 해군력 양성에 관심이 있던 스탈린은 쿠즈네초프의 함대 육성 계획을 지지했고 이에 대한 재원 마련에 들어갔지만, 독소전쟁이 발발하며 그 예산은 모두 지상군으로 전용되었다.

독소전쟁 발발 직전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군에 경계령을 내리는 것을 금했으나, 이를 순순히 받아들인 육군과는 달리 쿠즈네초프가 지휘하는 해군의 모든 함정은 경계령에 들어가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에 당한 피해가 매우 적었다. 스탈린은 쿠즈네초프가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해 무척 화를 냈지만 소련 해군의 피해상황을 보고받자 화를 풀고 쿠즈네초프를 칭찬했다.

쿠즈네초프는 해군 장관으로서 총사령관 스탈린, 총사령관 대리 게오르기 주코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공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등과 함께 스타프카(최고지휘부)의 멤버였다. 무르만스크로 들어오는 연합국 수송선단을 보호하는 작전을 감독하기도 하고, 특히 흑해 방면 작전에 힘을 기울였다. 독일 해군은 강력한 소련 흑해 함대가 지키는 흑해에 감히 범접할 수가 없었고[2], 쿠즈네초프는 이런 제해권을 이용하여 상륙전 교리를 개발하고 직접 실행시키기도 했다. 이런 업적으로 해군 원수[3]소비에트연방영웅에 올랐다.

3. 전후

전쟁후에도 1947년까지 해군총사령관 및 국방부차관을 역임하고 있었으나, 1947년에 스탈린의 명령으로 근무불성실 혐의로 다른 제독들과 함께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에서 쿠즈네초프는 상장으로 2계급 강등 조치로 경미하게 처벌받았지만, 같이 체포된 제독들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51년 스탈린은 다시 변덕을 부려 쿠즈네초프를 해군장관으로 임명했지만 계급을 복귀시켜주지는 않았고, 1955년 스탈린 사후에야 계급이 복귀되었다. 그러나 쿠즈네초프는 육군을 중시하는 당시 상관인 국방장관 주코프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았고,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1955년 8월 전함 노보로시스크[4]가 폭발사고를 일으키자, 주코프는 이의 책임을 물어 쿠즈네초프를 해임하고 다시 중장으로 강등시켜 예편시켰다.

쿠즈네초프는 예편된 후 해군에 관한 저술에 힘쓰고 전쟁 당시의 회고록을 저술하였으나 출판이 금지되었다. 왜냐하면 스탈린을 이런 저술에서 직접적으로 비난하고, 해군에 간섭하던 공산당을 디스했기 때문이다. 그는 저술 중에 "국가는 법률로 다스려져야한다"고 서술, 공산당의 이런저런 불법적인 간섭을 비난하였다. 그래서 이런 저술들은 쿠즈네초프의 사후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

1957년 그를 해임했던 주코프도 니키타 흐루쇼프의 미움을 사서 해임되었다. 1964년 해군 제독들은 쿠즈네초프를 복귀시켜달라고 청원을 냈고, 명예직이었던 국방부 감독관에 임명되었으나 그와 사이가 무척 안좋았던 후임이자 소련 해군의 어머니로 평가받는 세르게이 고르시코프의 반대로 인해 생전에 원수로 복귀하지 못했다. 본격 부부싸움 세상을 떠난 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던 1988년에야 소련 해군 원수로 사후 복귀되었다.

4. 평가

탁월한 지휘관으로서, 그리고 능숙한 행정가로서 쿠즈네초프가 소련-러시아 해군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소련 붕괴 후의 러시아 해군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해전이 미사일 위주의 시대로 간다는 것에는 깊은 이해가 없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이름을 붙인 항공모함 함급인 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이 2척 건조되었다. 1번함인 어드미럴 쿠즈네초프는 아직도 러시아 해군에서 현역으로 달리고 있고, 제2번함인 바랴그는 미완성 상태로 준공비용도 없고 완공하더라도 운용비가 나올 구멍이 없어서 중국에 고철로 팔려갔다가 다시 중국 해군이 개조하여 랴오닝급이라는 함명으로 취역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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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는 자칫하면 반동으로 몰릴 수 있는 행위였고, 자신이 숙청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였다.
  • [2] 물론 지중해에서 강력한 영국해군에 가로막힌 탓도 있다
  • [3] 소련 해군 원수는 이반 이사코프, 세르게이 고르시코프와 쿠즈네초프로 딱 3명에 불과했다. 그만큼 쿠즈네초프가 소련 해군에 끼친 영향과 업적이 컸다는것을 반증한다.
  • [4] 원래는 2차 대전 종전후 3대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로부터 전쟁배상조로 받아낸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이었다. 당시 소련은 신형이었던 비토리오 베네토급을 원했지만 당연히 영/미의 반대로 구형전함(1차대전형 전함으로 1930년대말 이탈리아가 대대적으로 마개조하기는 했다. 당시 마개조한 이유도 프랑스 해군이 독일의 장갑함(그라프 쉬페급)건조에 대응해 덩케르크급을 건조하자 이탈리아 해군도 덩케르크급에 대항할 신형함이 급히 필요한데 신형함 건조에는 시간이 모자라다고 판단, 기존의 구형전함들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친 것이었다.)을 받았는데 항구에 정박중 2차대전중 독일이 흑해에 뿌린 부유기뢰가 흘러들어와 함체와 접촉하여 폭발, 함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는데 전복위험이 없다고 본 함장 때문에 승조원들의 대피가 없었고 이때문에 함이 갑자기 전복되는 바람에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해임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