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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몰락

last modified: 2015-04-09 00:52:33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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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러시아 원정 나폴레옹의 몰락 백일천하

Contents

1. 정의
2. 위대한 군대의 몰락
3. 1813년 초기전역
3.1. 졸전의 원인
4. 휴전
5. 1813년 후반기 독일 전역
6. 1814년 전역 (프랑스 침공)
7. 몰락
8. 속편 - 보스의 귀환

1. 정의

나폴레옹 전쟁의 아홉번째 국면. 흔히 제 6차 대프랑스 동맹 이라고 하기도 하고 독일에선 해방전쟁이라 한다.

2. 위대한 군대의 몰락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고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나폴레옹은 1812년 12월 부랴부랴 프랑스로 돌아왔다. 나폴레옹이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전력 복구였다. 20만의 신병을 징병해 전력을 어느 정도 복구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에서의 대패, 일단 모스크바 공략용 본대 병력 35만 병력중에서 절반 이상인 외국인들은 안 아깝다 쳐도 근위대를 80%나 데려가서 4만이나 털어먹고 포병대와 기병은 사실상 전멸이라 신병들 머릿수만 채워선 어떻게 복구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거기다 러시아 원정의 패배는 대불동맹에겐 그동안에 유럽의 깡패에게 당한 설욕의 기회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군을 궤멸시키고 추격하던 러시아군은 일단 국경에서 추격을 멈추고 프로이센과 1812년 12월 30일 프랑스군 10군단 마크도날에게서 이탈한 프로이센 병력을 포섭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사후추인을 전제로 하여 강화를 맺고 반 프랑스 전선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었다. 이와중에 미하일 쿠투조프와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확전에 대한 의견차이로 불화가 심했는데 쿠투조프의 의견에 따르면 국경 밖에서 싸우는 것은 확률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지쳤으니 우선 쉬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비친 것. 젊은 황제에겐 쓸모없는 늙은이의 헛소리로 들렸고 곧 경질될 예정이었으나 쿠투조프가 알아서(?) 건강이 악화되어 진짜 은퇴했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을 임명한다.

1813년 2월27일 프로이센 국왕은 신하들의 등쌀에 못이겨 비준했고, 4일후 러시아군은 비트겐슈타인이 베를린에 입성했으며 3월 16일 프로이센은 정식으로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며 1806년 이전의 영토를 보장 수복하고[1] 유럽의 평화를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

3. 1813년 초기전역

독일 전역에서 패전 원인을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60만 혹은 70만을 꼴아박아서 병력이 부족해 동맹국의 인해전술(?) 때문에 졌다는 속설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초기 전역에는 프랑스군이 동맹군을 병력으로 압도했다.

러시아 원정에서 큰 손해를 본건 맞는데 61만 중 국경을 넘은 건 42~5만명으로 모스크바 공략용 나폴레옹 주력은 35만 이었으며 이중에도 절반은 프랑스 군대가 아니었다.[2] 미덥지 못한 동맹국 프로이센에 주요 요새와 항구에 프랑스군이 5년 이상 점령하고 있었다.

러시아 원정에서 러시아 또한 25만의 손실을 봤고, 프로이센은 1807년 틸지트 조약 이후 군사력 제한으로 상비군 숫자가 4만2천을 넘지못하는 제약때문에[3] 인해 동원능력이 크게 부족했었다. 전역 초기 러시아가 투입할 수 있었던 병력은 12만이었고, 그중 선발대 투입은 5만에 불과했다. 프로이센은 예비군을 통해 8만, 란트베어(지역방위군)을 포함[4]하면 14만을 동원시켰으나, 무장이 가능했던 인원은 극히일부였기 때문에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중 투입가능 인원은 11만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전역 초기에는 독일-폴란드에 9만여명이 주둔하고 본국에서 12만을 투입시키고 있었던 프랑스가 더 유리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인력은 보충이 가능해도 은 쉽게 보충할 수가 없었다.

첫 전투는 4월 2일 함부르크 동남쪽 50킬로 부근인 뤼네부르크에서 벌어졌다. 나폴레옹군이 엘베강 넘어 도망간 후 첫 전투에서 소규모지만 첫 승리를 거두었고 전략상으론 별거 없는 전투지만 독일 전체에 소문이 났고 나폴레옹의 불패는 독일에서도 깨졌다는 식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처음으로 큰 전투는 4월 5일 작센의 뫼케른에서 벌어졌다. 러시아 (비트겐슈타인군)과 프로이센 (요르크 폰 바르텐베르크)군은 합류하여 나폴레옹의 양아들이자 이탈리아 부왕 외젠 드 보아르네와 전투를 벌였는데 동맹군 2만 3천명 대포 130문 병력으로 프랑스군 5만300명 대포 122문의 병력을 격파했다. 외젠 드 보아르네는 베를린 침공을 포기하고 엘베강 넘어 철수 한다.

5월 2일, 비트겐슈타인의 러시아군과 프로이센군은 '뤼첸(괴로스괴르센)'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연합군 전력은 러시아(비트겐슈타인) 프로이센(블뤼허)군 합쳐서 8만 8천 5백이 프랑스군 14만 4천과 대적하여 엑스맨 알렉산드르 1세 관전하에 프랑스군에 패배한다. 나폴레옹이 때마침 새로운 예비대를 투입하자 혼비백산하여 연합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패배의 원인은 나폴레옹이 먼치킨이라서가 아니라 병력도 적은데다가 통합 작전도 없이 따로 놀아서였다. 러시아에서 막료로 활약하던 샤른호르스트가 슬개골에 입은 총상으로 나중에 세상을 뜬다. 전투피해는 프랑스군이 더 많아서 동맹군 11,500명 프랑스군은 22,000명으로 두배에 달했고 미셸 네 장군의 군단에서만 15,000명이나 전사할 정도.

나폴레옹은 뫼케른에서 패배하고 나서 정치적으로 승리가 필요한 차원에 때마침 뤼첸에서 승리를 얻었으나 신병들의 한심한 전투력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상자 수에서 보듯이 전투력이 기존 군대와 비교해서 한심했고 동맹군 섬멸이라는 전략적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동맹군은 일주일 후 10만 병력과 대포 639문으로 프랑스군을 재공격했고 이번엔 프랑스는 두배에 달하는 19만 4천의 대군에 포병은 다소 초라한 563문으로 맞섰다. 바우첸 전투에서 프랑스는 또 승리했으나 2만 5천을 잃었고 패자인 동맹군은 1만 850명정도.

전투 후에 전장에서 이탈했느냐 거점을 정복했느냐에 기준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분명 두 차례나 승리했으나 이런 허섭한 승리로는 필요한 목적을 전혀 달성할 수 없었다. 때마침 괴질이 퍼져서 수천명이 사망하고 후방 교란으로 보급이 부실해지자 동맹군의 휴전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3.1. 졸전의 원인

나폴레옹은 1813년 초기 승리에도 불과하고 러시아에서 입은 피해로 저하된 프랑스군의 질은 나폴레옹을 실망시켰다. 정찰부대의 무능으로 나폴레옹은 연합군이 자신보다 병력이 월등하게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조심스럽게 정공법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프랑스군의 막대한 피해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다음날 나폴레옹은 이들을 격퇴하는데에 성공하였으나 러시아의 추위로 반쯤 정신이 나간 미셸 네 원수가 명령을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이들의 퇴로를 끊는데에 실패하였으며 연합군은 완패를 면했다. 나폴레옹의 입장에서 보면 참 곡할 노릇….

그러나 이것은 원인은 본인이 자초한 것 이었다.

나폴레옹 빠들은 온갖 if 떡밥으로 나폴레옹 실패와 불운(?)을 아쉬워 하지만 1808년부터 1814년까지 이베리아에서 25만, 1812년 러시아에서 40~50만씩 꼴아박았는데도 다시 병력을 보충할 여력이 있는 유럽 나라는 프랑스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당시 러시아를 제외하면 유럽에서 가장 풍부한 인구(약 2700만)[5]과 경제력을 지닌 프랑스를 쥐어짜서 유럽을 정복했고, 정복하고 나서는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역시 수십만씩 징집하며 병력을 펑펑 쓰고 다닌 것.

그리고 병사들의 수준 문제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고 1809년 바그람 전투부터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에 비해 병력 수준이 떨어진다 하여 실망했었고 1813년에는 황후의 이름을 따서 마리 루이즈 군단이라 해서 16~17세 청소년들까지 징집해서 머릿수를 맞춘 것이라 당연히 급속행군으로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신체 저항력이 떨어저 전염병도 쉽게 번졌다.[6] 무엇보다 1810년까진 탈영률이 3% 이하로 매우 적었는데 이후에는 병력수의 고갈로 마구잡이로 징집하는 바람에[7] 행군시 탈락과 탈영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러시아 전역에선 탈영으로 군기가 개판된 것이 패인 중 하나로 꼽힌다.

기병의 경우 오히려 1806년 이후 수준이 상승했다는 평을 받는데 1806~1809년 사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점령지의 군마들을 포획하고 징발하여 양질의 전력을 갖추었지만 러시아 전역에서 말들을 20만 마리를 잃는 바람에 이후 병력수로 동맹군과 비슷하거나 많은 경우에도 정찰과 추격섬멸에선 기병 활용이 어려워서 승리를 놓치는 경우가 계속 나왔다.

포병의 경우도 러시아에서 1000여문의 대포를 꼴아박았는데 본국에서 대포를 찍어내는 건 아쉬운대로 보충할 수 있었지만 기병과 포병 모두 숙련도가 중요하고 경험 많은 병사와 부사관을 거의 잃었으며, 두 병과 모두 보병보다 교육훈련 기간이 길어서 나폴레옹이 동맹국 제의한 여러 번의 강화를 스스로 걷어차고 발끈해서 전투를 벌일 여건이 전혀 아니었다는 결론이 대세다.

4. 휴전

나폴레옹은 훗날 세인트 헬레나에서 1813년 일시 휴전을 받아들인것을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매우 후회하는데 이베리아, 러시아 원정이 아니라? 자신의 군대를 교육훈련하고 보충 재편성 할 동안 동맹국의 군대는 더 강화 되었다는 것.

1813년 5월 24일 나폴레옹의 동맹국(?)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양측을 중재하여 한달 여의 휴전을 제의하는데 앞서의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은 6월 4일 휴전을 받아들이고 중간에 한 번 더 연장되어 7월 20일 만기의 휴전은 8월 10일까지 연장 되었다.

메테르니히의 의도는 당연히 오스트리아가 동맹에 참여할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었고 나폴레옹도 진지하게 장인어른을 믿은 건 아니었다. 휴전 기간동안의 동맹국의 가장 큰 고질 문제였던 지휘체계와 군비부담이 가장 큰 현실적인 문제였고 대국적으론 스웨덴, 영국, 오스트리아가 참여하여 기존의 프로이센-러시아 동맹을 확대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한편 이베리아 전역에선 웰링턴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포르투갈-스페인 연합군이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 군이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되었을 뿐더러, 조만간 영국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프랑스 내로 진격하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이 오스트리아에 전해진 것은 7월 6일인데, 소식을 전해들은 메테르니히가 침실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역시 나폴레옹의 최대적수이자 돈줄인 영국이[8] 산타클로스 역할을 맡아서 프로이센에는 8만 병력을 무장할 지원금과 별도의 차관 500만 파운드를 제공하고, 러시아는 16만 병력을 무장할 지원금을 대면서 동맹국의 우려는 해소되었다.[9] 영국은 지상전 대신 자금 지원과 해상지원등 간접적인 참가만 했는데 이베리아에서 웰링턴이 스페인 포르투갈 연합군과 10만 병력으로 프랑스 남부로 진격하고 있었기 때문.

대불동맹군은 6월 27일 새로운 합의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트라헨베르크 계획(Trachenberg Plan)이다.나폴레옹의 원쑤와 오스트리아의 라데츠키 장군(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의 주인공)에 의해 계획되었으며 슐레지엔의 트라헨베르크 성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알렉산드르 1세, 베르나도트가 모여서 채택되었다.

몇몇 블로그에서 트라헨베르크 작전이라서 나폴레옹 졸개 때려잡는 것을 논했다는데 그것이 계획에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이 잘 싸우니 졸개 패는 건 이미 그전부터 상식이었고 두 달 반 동안이나 5개국 연합국 수뇌부들이 고작 나폴레옹 졸개나 패자고 그거 하나 논의하냐 앞서 뤼첸과 바우첸의 병력 열세에도 불과하고 동맹군들은 프랑스군 신병들의 졸전으로 나폴레옹이라도 할만 하다는게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트라헨베르크 성에서 합의의 핵심은 동맹군의 지휘체계를 세워 담당 권역을 배분하고, 협동작전 즉 1개군이 공격받을 경우 아군의 측면을 보호하며 나폴레옹의 측후면을 공격한다는 합의를 한 것.[10] 구체적으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최소한 15만, 프로이센은 8만 이상의 병력을 유지할 것과 구체적으로 3개 군(Army)를 두어

  • 1군 '뵈멘(보헤미아)군/ 남군(南軍)': 25만명
    주력군으로 카를 필립 추 슈바르첸베르크 오스트리아 원수가 지휘하며 라데츠키가 참모장. 주력군 정상 시어머니 3인방(알렉산드르 1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프란츠 2세)가 참가하며[11] 나폴레옹의 주력을 상대하고 상대적으로 병력이 적은 슐레지엔 방면 3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 2군 '북군' :12만 7천명
    스웨덴 왕세자 베르나도트 지휘. 뷜로 장군과 타우엔친의 프로이센의 2개 군단도 참가하며, 러시아에서 1개 군단을 지원한다.
  • 3군 '슐레지엔군' : 10만 4천
    게브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가 지휘하며 참모장은 나이제나우. 러시아군 3개 군단과 프로이센 1개 군단이 참가했다.

전체군 총사령관은 주력 1군을 맡은 슈바르첸베르크 원수가 맡았고 러시아군은 비트겐슈타인의 삽질에 열받은 알렉산드르 1세가 또 개입하여 경질하고 러시아 전역때 대신 욕처먹고 경질당한 바클라이 드 톨리를 기용했다. 각 군이 서로 잘났다고 먼저 적을 공격하거나 하며 간격이 벌어지는 걸 금지했다. 물론 적 주력군 상대는 자제하고, 공격받을 경우 상호 협조로 적의 측면과 후면을 노리고 적군이 퇴각시 퇴로를 열어주는 것도 합의했다. 나폴레옹을 상대로 숫적 우위를 유지하며 각개격파를 노리는 나폴레옹 입장에선 환장할 만한 작전.

한편 연합국에서는 평화 조건으로 바르샤바 공국 해체, 뤼벡, 함부르크, 브레멘 등 한자동맹 도시의 연합 재개, 엘베강 동쪽에서 프로이센 영토 회복 등의 관대한 조건으로 나폴레옹군의 철수를 촉구했지만 근성쟁이 나폴레옹은 거부했다.

5. 1813년 후반기 독일 전역

북쪽에서는 원쑤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8월 23일 그로스베일렌에서 베를린 방면으로 향하던 우디노의 군대를 격파했고(그로스베일렌 전투), 9월 10일에는 우디노와 교체된 네의 군단도 격파해 버렸다(데네비트 전투). 동쪽에선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8월 26일 카트바흐에서 크도날의 군단을 격파했다(카트바흐 전투).

남쪽에서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작센으로 진군해 드레스덴을 지키던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나폴레옹이 이 소식을 듣고 드레스덴을 구원하러 달려와 8월 26-27일 드레스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드레스덴 전투). 이 전투에서도 동맹군은 프랑스군보다 먼저 드레스덴에 도착하여 프랑스군은 고립된 구비옹 생시르 장군의 3개 사단 밖에 없었고 슈바르첸베르크 원수의 본대 8만 명이 프랑스군 집결이전에 공격태세를 갖춰서 승리가 유력했으나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 1세의 참관을 위해 공격을 하루 늦춰달라는 요청 때문에 지곤조기 나폴레옹이 다음날 대승. 13만 5천 가지고 21만 4천을 프랑스군은 2만 5천의 피해로 동맹군에 3만명의 피해를 입히며 2만의 포로를 더 잡았다. 여전히 나폴레옹은 굇수다는 것을 입증했고 나폴레옹 집권 초기 경쟁자였던 모로 장군이 여기서 전사했다. 드레스덴에서 작살난 12만의 동맹군은 에르츠 산맥(현 체코-독일 국경)을 넘어 후퇴했고, 험한 산맥을 넘기엔 철수가 어려워서 후위에 러시아군 오스터만 장군이 몸빵으로 막아 14700명중 6000명의 희생자를 감수하며 대군의 철수를 돕는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지시도 받지 않고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무리하게 추격하던 반담의 3만 병력이 되려 역습을 당해 반담을 포함한 7천여 병력이 포로로 사로잡혀서 나폴레옹이 전략적으로 드레스덴의 우세를 이용할 여지는 없어졌다.

일주일 후 차나에서 벌어진 전투는 프로이센이 선전했으나 우디노 원수와 미셸 네의 선전으로 승전하며 다시 베를린 공격을 노렸고 동맹군 북군(2군)의 타우엔친 장군이 비텐베르크에서 프랑스 군단을 차단하며 덴네비츠에서 뷜로의 군단과 베르나도트의 본대와 합류 프랑스군의 베르트랑, 레니에, 우디노의 전력을 격파하기 이른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2만2천명 전사에 포로 1만3천명이 잡히고 동맹군 손실은 1만명 남짓.(덴네비츠 전투) 이 전투의 승리로 뷜로 장군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로 부터 폰 덴네비츠 백작 작위가 수여 되었다.

한편 9월 9일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외상, 프로이센 카를 아우구수트 폰 하르덴베르크 수상, 러시아의 카를 로베르트 폰네슬로데 외상,이 3국 합의를 통해 프랑스와의 평화조약은 공동합의에서만 가능하다 확인하며 상호군사지원 용도로 최소 15만 병력을 유지할 의무를 공유했다. 3차 대프랑스 동맹전쟁 이전 (1805년)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국경 회복과 하노버 포루투갈 스페인 시칠라의 왕조 회복을 보장할것 까지 합의 했고 추가로 한달 후 영국도 참여하여 100만 파운드를 전비로 동맹국에 지원하고 다른 국가들의 참가의 여지까지 열어 두었다. 바이에른 왕국이 처음으로 동맹국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며 뒷통수 포문을 열었고[12]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프랑스의 기존 동맹국 20여개 국가들이 이탈한다.

해방전쟁의 진행방향을 획기적으로 바꾼 것은 10월 3일 바르텐부르크 전투 였다. 3개 군중 슐레지엔 방면군 블뤼허가 처음으로 엘베강을 도하하여 진격한것. 작전의 특성상 피해는 많았지만 작센지방을 벗어나지 못한 나폴레옹의 군대에겐 전략상으로 매우 위중한 궁지에 몰린것... 나폴레옹은 포위를 풀어보려 9월말부터 여러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고 전군을 엘베강 서쪽으로 철수하게 이른다. 병력은 이미 고갈되어 총 병력이 25만 수준으로 떨어졌다. 10월 부터 전군을 엘베강 좌안 작센지방에 집결시켰다.

라이프치히 전투는 1차대전이전 최대의 전투였다는 러시아 전역의 보르디노 전투의 기록을 13개월만에 깨버린 대규모 전투로 동맹군과 나폴레옹간의 건곤일척 승부.
조아생 뮈라와 슈바르첸베르크군의 기병 전초전으로 시작하여 동맹국들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나폴레옹이 가운데서 버티는 구조로 진행 되었다. 이미 프랑스군의 사기는 떨어질대로 떨어졌음에도 나폴레옹은 과감하게 역습을 시도했는데 4만 3천 병력을 뮈라에게 주며 남쪽 측면을 보호하고 자신은 드레스덴방향으로 진군한것. 이 시기에 동맹군은 1군의 슈바르첸베르크의 병력만 나폴레옹 전군에 필적하는 24만에 달할정도로 유지 보충 되어 있었고 13일 비트겐슈타인의 러시아군과 조우 하자 불리함을 깨닫고 서쪽으로 후퇴하여 주력군을 라이프치히로 집결시켰다. 연합군이 이에 맞서 라이프치히로 진격해 10월 16~19일에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 전쟁 사상 가장 거대하고 치열했던 라이프치히 전투가 벌어졌다. 19만의 나폴레옹군을 36만의 연합군이 포위한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더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다. 결정적으로 10월 18일에는 동맹국 뷔르템베르크와 작센군 포대가 프랑스군에 포격을 시작하고 뷔르템베르크군 기병대가 편을 바꿔 프랑스군을 공격하며 급속도로 무너졌다. 10월 19일 결국 철수를 결정하지만 철수중에 엘스터강 교각을 수비하던 병력이 프로이센군이 나타난것만으로 겁을먹어 일찍 폭파하는바람에 3개군단 3만 7천병력이 다리가 끊겨 고립되어 모든 야포 부상병 2만 장군급 장교 30명이 잡히거나 전사했고 포니아토프스키는 사했으며 마크도날은 간신히 도주에 성공한다.라이프치히 전투에서 5만이 생포당하고 5만5천 사상자와 300문의 대포 손실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군은 사실상 전군이 붕괴되었고 동맹군 피해는 5만4천으로 나폴레옹은 만하임 프랑크프르트 방면으로 철수한다. 철수중에 충성심을 인정받으려는 바이에른군의 습격이 있었으나 가볍게 격파하긴 하고 무사히 후퇴에 성공하지만 프랑스군의 전력 손실은 복구가능한 수준은 진작에 넘어섰고 천하의 나폴레옹이라도 초라한 군세로 동맹군에 대적할 기적을 만들진 못했다. 더군다나 엘베강 하류의 다부의 10만 병력은 완전히 고립되어 2~3주간의 저항끝에 대부분 소탕되거나 항복한다.

이후 나머지 프랑스군은 라인강 넘어까지 도망쳤고, 11월엔 프랑스군 보급기지창이었던 프랑크푸르트에서 동맹국이 모여 휴식을 할지경. 여기서 동맹국은 라인강을 경계로 강화를 제안한다. 나폴레옹은 대등한 조건의 국제회의를 제안하더니 슬거머니 승락한다. 그러나 일부 참전국의 반발로 라인강 국경선은 1792년 국경선으로 후퇴하여 조건이 변경되었고 나폴레옹은 거부. 결국 12월 프랑스 동부를 3개 방면으로 연합국의 공격이 시작된다.
1813년 12월 2일에는 암스테르담이 함락되었다. 12월 하순에는 스위스에 무혈입성했고 21일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 본토로 진격했다.

6. 1814년 전역 (프랑스 침공)

새해 첫날부터 슈바르첸베르크의 20만 병력이 이탈리아 방면 동맹군과 합류하기 위해 라인강 상류 지방으로 진격했고 베르나도트의 2군은 다부가 이끈 10만명의 잔당 소탕과 함부르크 방면과 네덜란드 탈환을 위해 북쪽으로 진군해서 프랑스에선 멀어졌지만 블뤼허의 3군은 베르됭과 낭시 방향에서 10만 병력으로 역시 진군중이라 나폴레옹은 7만 남짓 남은 병력으론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어졌다.

1814년 1월 19일에는 슈바르첸베르크의 동맹군 1군에 부르고뉴의 디종이 함락되었다. 남쪽에서는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포르투갈-스페인 연합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로 진격하고 있었다.

2월 1일에는 블뤼허와 바클라이 드톨리의 11만 2천병력을 5만 4천병력으로 요격하려다가 대패했고, 때마침 눈보라가 아니었으면 나폴레옹의 전군이 붕괴하며 프랑스 전역은 그날 끝날뻔했다. 날씨덕에 도망치긴 했지만 이미 사기와 햇병아리 신병들 전투지원과 보급등은 나폴레옹이 몸이 열개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그래도 나폴레옹도 경험이 부족한 젊은 신병들을 이끌고 국지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2월 10-14일에 벌어진 6일 전역은은 나폴레옹이 부족한 전력으로 거둔 나폴레옹 사상 최고의 작전이라고 평가받는데, 나폴레옹은 겨우 2~3만 밖에 안되는 신병들로 행군 중에 분리된 러시아군의 병력 5천을 상대적 우위를 이용해 덮쳐 전멸시키고 3차례나 3~4만의 프로이센군을 일시적으로 격파했다. 그러나 이런 국지적인 대승리로는 전략적 열세를 만회하기 힘들었다. 동맹국은 겨우 2만을 잃었을 뿐이었기 때문. 4배에 달하는 숫적 우위는 무너질 기미가 없었다.


연합국 수뇌부는 또 내부적인 문제에 시달렸는데 러시아군은 1812년부터 전역에 참전하여 매우 지친 상황에다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 까지 라인강을 넘으면서 보급문제와 사기문제로 매우 지쳤기 때문에 전투 열의가 매우 떨어진것... 프랑스에서의 낯선 지형과 민심 그리고 나폴레옹의 격렬한 저항에 강화를 고려하기에 이른다 나폴레옹도 이번엔 뒷북치며 1792년 국경선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동맹국의 알렉산드르 1세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7. 몰락

연합군 수뇌부가 나폴레옹에게 무조건 퇴위를 결정하게 한 결정적인 원인은 다름아닌 바로 마르몽 원수가 이끄는 파리 수비군의 항복이었다. 모든 병사들이 나폴레옹을 지지하고 따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마르몽 원수의 건으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이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걸 확인하게 된 연합군은 이제 나폴레옹에게 무조건적인 퇴위를 요청할 수 있게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결국 뒤집어진 전세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던 탓에 패전을 거듭하며 후퇴하게 된다.

이후 그의 원수들마저 그에게 등을 돌리고 퇴위를 강요하는 한편 파리에선 탈레랑의 주도로 결성된 프랑스 임시정부가 전쟁의 종식을 위해 나폴레옹 퇴위를 결의한다. 그리고 4월 11일 나폴레옹은 자신의 아들 나폴레옹 2세를 황제로 세우고 그의 황후 마리 루이즈가 섭정이 된다는 조건하에 자신의 퇴위문서에 서명을 하게되고 퐁텐블로에서 종전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끝나게 된다.

5월 14일, 나폴레옹은 엘바 섬의 영주로 강등되어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원쑤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프랑스 황제가 되려고 했지만 다른 나라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프랑스 상원은 부르봉 왕조의 복원을 결의하여 루이 18세가 귀국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8. 속편 - 보스의 귀환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테르니히의 주도로 빈 회의가 열려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처리를 논의했다. 지지부진하던 이 회의는 그러나 어떤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방에 정리가 되는데…. 그 소식의 내용은 빈 회의 항목을 참조.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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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대신 라인강 좌안 대토보상으로 영국 동군연합 하노버를 프랑스서 받은 건 포기하고 러시아에게 바르샤바 등 폴란드를 양보한다는 조건. 이 때문에 빈 회의에서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지지했다.
  • [2] 나폴레옹은 메테르니히에게 보낸 편지에서 ' 독일 사람이 더 많이 죽었거든? 이런식으로 건재함을 과시했고, 메테르니히는 "오! 폐하! 그런 말을 지금 독일 사람한테 하시는겁니까?" 하고 비꼬았다. 훗날 세인트 헬레나에서 회고록에서도 자신은 러시아에서 15만을 잃었으나 그중 4만명만 프랑스인이었다며 정신승리 했다. 현재 추산으론 러시아에서 잃은 병력은 15만보단 일단 훨씬 많고 총병력 손실은 35~40만 정도로 추산한다.
  • [3] 훈련시키놓고 일찍 제대하여 예비군을 편성하는 편법으로 실질적으론 8만을 보유했다한다.
  • [4] 이후에도 현역에서 제대하면 4년간의 예비군 5년간의 란트베어로 편성한다.
  • [5] 물론 러시아는 그 당시도 현재의 중국 취급받는 물량으로 인정받았지만 유럽에서 인구빨, 영토빨 논의할 때 항상 러시아는 제외하는 게 보통이고 최대 적국 영국의 인구는 1100만에 불과했다.
  • [6] 현재 추산하기론 1806년 프랑스 군의 징집 평균 연령은 21세였으나 1813년에는 18세에 불과했다. 이 시기 1~2년 차이의 성장과 체력차이는 무시하기 어렵다.
  • [7] 이 시기엔 농가에서 아들을 숨기느라 헛간에서 먹고자는거나 가짜 결혼으로 기혼자 특혜로 징집을 피하는게 대유행(?)했고 막장 테크탄 1814년엔 왕당파 지지가 강한 시골지역에선 모병관들이 얻어맏고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 징집할 정도였다. 결국은 기혼자 혜택도 박탈하고 연령 상한선까지 올려버리면서 40만을 또 징집한다. 이 때 프랑스의 민심은 안봐도 비디오(?)
  • [8] 18세기 중반부터 영국은 식민지 패권과 산업혁명으로 경제력에서 매우 앞서나갔다.
  • [9] 그러나 러시아의 경우 잘 쳐줘봐야 초기엔 현실적으로 12만 정도만 참가했다. 러시아 원정에서도 러시아군의 피해(20만~25만)가 매우 컸기 때문.
  • [10] 이게 왜 어렵냐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영국 모두 꿍꿍이와 잇속이 다른데다가, 특히 러시아 장군들은 독일,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 하도 작살나서 독일인을 '겁쟁이 소시지들'이라 경멸한데다가 전근대 왕조시절 군은 오직 자국 군주에게만 충성하고 다른 명령권을 두는것이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
  • [11] 슈바르첸베르크 원수는 프란츠 2세에게 편지에서 엑스맨 알렉산드르 1세는 사령부에서 할 일없이 놀고먹는 러시안 똥별들의 중상모략과 지휘간섭을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항의했다.
  • [12] 실은 메테르니히가 1813년 3월부터 구워 삶았다가 이제서야 효과를 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