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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last modified: 2015-04-13 20:19:09 Contributors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태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금언이다. 나치당의 만행에 적극 동조하진 않았어도 무관심으로 방조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을 비판하는 말이다. 정확한 제목은 <처음 그들이 왔을 때(First they came)>.
일반적으로 예시된 산문이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이와 같은 취지의 발언을 여러 차례 하였으며 다양한 종류의 인용문이 알려진다. 상황에 따라서 많은 인용문은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단순한 인용구로 쓰이기도 하고, 시(詩)의 형태로 운율을 맞추어 개작하기도 한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독일 루터교의 목사이자 신학자였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잠수함 유보트 함장으로 복무했으며, 1차대전 직후에는 애국주의를 추종했고 한때는 나치당을 지지하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나치당이 교회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자 점차 반나치주의자로 돌아섰으며, 결국 반나치운동을 벌이다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생존한다.

정치적 무관심을 경고하는 목적으로도 사용된다. 매카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미국에서는 유태인이 첫 구절에 언급되며, 널리 알려진 버전 외에도 '불치병 환자', '장애인'(T-4 프로그램), '피점령국의 민간인'을 언급하기도 한다. 현대에도 패러디로 쓰이거나 문구가 추가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전후의 니묄러 자신 역시 이중잣대와 진영논리[1]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말년의 니묄러 목사는 독일평화협회(DFG)의 회장을 맡았고(1954년), 프라하헬싱키에 본부를 둔 세계평화협의회 명예회장직도 맡았다(1967년). 문제는 이 단체 자체가 (범 동구권인 프라하와 헬싱키의 위치에서 보듯) 소련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것. 이 단체는 동독의 일당독재당인 인민민주당(SED)은 물론 서독의 독일 공산당(DKP)과도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이는 동독 인민당 중앙위원회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1974년에 독일 공산당(DKP)과 기타 공산주의 단체들이 공동으로 창설한 '평화 군축 및 상호협력위원회(KFAZ)'와 1980년 니묄러 자신이 위원회 위원이자 지도 간부로 있었던 '크레펠트 평화호소회'에 역시 소련과 동독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다. 독일평화연맹(DFU)을 비롯해서 독일평화협회(DFG), 병역거부자연맹(VK), 평화 군축 및 상호협력위원회(KFAZ), 나치박해자연맹(VVN), 반파쇼동맹(Bda) 등이 그에 속한다[2]. 독일 공산당(DKP) 간부회의 위원이었던 페터 슈트는 1994년에 밝히기를 슈타지는 개인적으로 니묄러의 수발노릇을 할 전문연구원까지 붙여 주었다고 폭로했다.

니묄러가 이 같은 행보를 보인 것은 소련에서 오래 포로 생활하며 세뇌를 받은 아들의 영향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가장 나쁜 악은 공산주의가 아닌 돈이다. 왜냐하면 돈은 인간을 완전히 소유하려 하지만 공산주의는 인간에게 그래도 얼마만큼의 자유는 남겨두기 때문." 물론 신앙적으로는 돈이나 공산주의나 비교할 것 없이 다 나쁘다

"독일인들은 분단된 상태로 살 것이냐, 소련식 독재의 재통일이냐는 대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아마도 공산주의의 위험을 감수할 것."

니묄러의 인명은 슈타지 인사기록부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다. 혹자는 공산 정권이 무너진 직후에 슈타지 중앙본부에서 인사기록 카드를 폐기시키면서 이때 니묄러의 카드도 함께 없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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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동독 정부가 민주화 인사들을 잡아갔을 때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 [2] 나치박해자연맹과 반파쇼동맹의 사무국장인 쿠르트 에얼레바르는 독일 공산당(DKP) 간부회의의 위원이기도 했다. 슈타지와 동독 정부는 이런 서독과 유럽의 평화단체들을 간첩 침투 양성소로 활용하면서 들통나지 않기 위해 사회주의 색체적인 단어나 이론 사용도 금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