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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last modified: 2016-05-29 23:50:42 Contributors



아니 이영표형 거기서 뭐해요

1902.10.17 ~ 1937.8.9
일제강점기 한국영화배우/영화감독.

함경북도 회령 출생으로 조선왕조의 군관이었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이다. 학교 졸업 후인 1920년에는 홍범도가 이끌던 독립군에 들어간 적도 있다고 한다. 그후 1924년 일본 자금으로 돌아가던 영화사인 '조선 키네마 프로덕션'에 들어가 배우로 출연하는데, 처음에는 엑스트라 배우나 맡다가[1] '농중조[2]'에서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해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외모적인 특징으로는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음흉한강렬한 시선이다. 딱봐도 포스가 느껴진다. 이 때문인지 교과서에 나운규 사진이 실려있다면 100% 이 사진이다[3] 참고로 나운규 눈밑에 검댕을 칠한것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영향을 받은것이다(...) 학생들에 따라서는 나운규 하면 그냥 음흉한 시선눈빛 정도로만 기억하기도 한다. 실제로 등장하는 영화에서도 보면 딴사람들은 다 멀쩡한데 혼자서만 시대를 초월한 헤어스타일[4]을 하고 있는 등 뭔가 시대초월적인게 느껴진다.

이 눈빛에 관한 에피소드로 심지어 같은 영화사 소속의 선배 배우마저도 "너는 악역이나 범죄자 같은 배역이 어울린다" 라고 했을 정도라고 하고(...) 실제로 '벙어리 삼룡이'에서 주인공 삼룡이[5] 역을 맡기도 했으니 사진에는 한치의 과장도 없을 것이다[6].

근데 의외로 평소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윗사진처럼 음흉강렬하지는 않은 편이다.

1926년에는 직접 메가폰을 잡고 영화 아리랑을 제작하면서 스타급 감독으로도 떠올랐고 조선 영화의 황금기를 불러왔다는 평을 받는다.[7]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절제한 여자관계로 인해 비난도 받았다.[8] 이후로도 작품활동을 꾸준히 하고, 자기 작품에 배우로 등장하기도 하면서 꾸준히 배우생활도 했다.

1930년대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했다[9]. <들쥐[10]> 등을 냈으나 <옥녀>의 실패로[11] 나운규 프로덕션은 망한다.

이에 지독한 슬럼프를 겪던 도중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12]'의 성공으로 다시 재기하나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로써는 난치병이던 결핵으로 인해 영화 <황무지>를 찍던 도중[13] 36세의 나이로 1937년에 죽고 말았다.

작품마다 실려있는 반일코드와 해방코드가 특징. 이때문에 독립투사로 인정받기도 하고[14], 1993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실제로 나운규는 친구 윤봉춘과 함께 3.1운동 당시 선전물을 돌렸다가 훗날 일제 당국에 검거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15].

나운규를 기리기 위해 90년부터 한국영화감독협회 주관으로 '춘사영화상,이 제정됐으며 물론 한국영화,영화인대상으로 수상한다.http://ko.m.wikipedia.org/wiki/춘사영화상
특이한 점은 그 해에 줄사람이 없다고 판단되는 상은 수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14년에 감독상 수상자가 없다.

나운규의 둘째 아들 나봉한[16]도 196-70년대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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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첫 역할은 영화 <운영전>의 가마꾼 역이었다. 너무도 연기를 하고 싶어 당시 프로덕션에서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과의 인맥으로 테스트를 받는데 함경도 사투리가 너무나 억세고 카메라 앞에서 너무 긴장해 탈락할 위기에 놓였다 그 높은 분이 봐 주어서 가마꾼 역을 맡을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 영화는 너무도 망해(...) 이 높으신 분은 자신 소속 인원을 모두 이끌고 프로덕션에서 탈퇴했는데 대다수 인원이 탈퇴해 이후 프로덕션이 큰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 [2] '농(우리) 안에 든 새'라는 뜻으로 동명의 일본 영화를 베낀 것이다(...)
  • [3] 학교대사전 에서도 나운규는 왜인지 교과서에선 이 사진만 나온다고 쓰여있다
  • [4] 이상하게 혼자서만 거의 90년대에 근접한다
  • [5] 원작에서는 사회불만(?)이 상당히 많은 캐릭터다. 쌓이고 쌓인게 결국 폭발해서 주인집을 다 태우고 사람도 죽인다
  • [6] 이 때 방화 장면에서 실제 불을 내기 위해 연구를 하던 중(물론 당시 CG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두꺼운 솜옷을 입고 위에 석유를 뿌려 조금씩 태우기로 했는데 막상 그렇게 시도하니 몸에 불이 순식간에 퍼져 여주인공과 함께 엄청난 화상을 입는다. 전치 3주 진단을 받자 영화사에서는 시간 문제로 다른 배우를 구하는데 그가 심훈이다. 일제시대의 작가 맞다.
  • [7] 얼마나 인기를 끌었던지 훗날 3편까지 나온다. 여담으로 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영화판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다는 평가를 듣고 이후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된 조희문이라는 천하의 개쌍놈은 '아리랑은 나운규가 만든 작품이 아니라 일본인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라고 혼자 주장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다.
  • [8] 가정이 있었음에도 오향선이라는 기생과 동거하였으며 심지어 기생과 놀이를 하기 위해 촬영 장비들을 팔았다는 루머도 있을 정도였다. 오향선은 유신방이라는 이름으로 배우 활동을 하였다.
  • [9] 당시 나운규가 일하던 곳에서 일본인 감독 쓰메에리가 친구 윤봉춘에게 온갖 잡심부름을 시켜 상당한 마찰을 빚었는데, 나운규가 일본인 감독과 대판 싸우고 나온 것이라고 한다.
  • [10] 한자 제목인 '야서(野鼠)'로 개봉. 부패한 부자들을 통쾌하게 처단하는 의적 '들쥐'의 이야기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는데 내용을 보고 찔리는 게 있던 일제 당국이 검열을 해 1/7을 잘라냈다. 결국 영화는 '사랑을 찾아서'로 제목도 바뀌고 이야기도 서로 어귀가 맞지 않아 예상보다는 인기를 덜 끌었다.
  • [11] 시골의 한 처녀와 그녀를 둘러싼 형제의 삼각관계가 주 내용인데 당시 보수적인 관객들의 눈에는 너무 패륜적이라서요즘 막장 드라마를 보다보면 상전벽해가 뭔지 절로 실감이 나게 한다 제대로 망했다. 이게 결정타였다.
  • [12] 주인공인 노사공을 맡았으며 이 역을 위해 머리까지 삭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줄거리는 아내를 잃고 딸만 보는 노사공, 순진한 딸, 딸을 노리는 철도 측량기사, 그리고 철도 건설로 노사공의 유일한 밥줄인 나룻터의 폐쇄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노인은 도끼를 들고 달리는 열차로 뛰어들어 최후를 맞으며 주인 인 잃은 나룻배만이 쓸쓸히 떠다닌다.
  • [13] 나운규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을 맡았다. 결국 찍던 도중 쓰러졌다.
  • [14] 실제, 나운규는 1920년에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 항일전을 전개하여 활동하는등 홍범도 장군 밑에서 독립운동 하기도 했었다.
  • [15] 친구 윤봉춘은 나운규보다 먼저 체포되어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나운규의 형이 더 높은 이유는 뒤늦게 체포되어 괘씸죄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 [16] 나운규는 2남2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