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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

last modified: 2018-03-29 05:24:28 Contributors

Contents

1. 대한민국의 축구인
1.1. 소개
1.2. 선수시절
1.3. 은퇴 이후
1.4. 여담
2.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2.1. 고등학교에서 대학 시절
2.2. 프로 생활
2.3. 특징
2.4. 논란거리
2.4.1. 과도한 리액션과 비매너 플레이
2.4.2. 기록조작
2.5. 트리비아

1. 대한민국의 축구인


젊었을때 사자머리 휘날리던 시절. 오오! 사자머리! 오오!

이름 김주성 (金鑄城 / Kim Joo-Sung)
생년월일 1966년 1월 17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강원도 양양군
포지션 윙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센터백, 스위퍼
신장 175cm
유스팀 조선대학교 (1983~1986)
소속팀 대우 로얄즈(1987~1992)
VfL 보훔(1992~1994)
부산 대우 로얄즈(1994~1999)
국가대표 76경기 14골
스태프 부산 아이콘스(2000 / 코치)

부산 아이파크 영구결번
No.16 김주성

1987년 K리그 신인상
현기(현대 호랑이) 김주성(대우 로얄즈) 황보관(유공 코끼리)

1997년 K리그 MVP
김현석(울산 현대 호랑이) 김주성(부산 대우 로얄즈) 고종수(수원 삼성 블루윙즈)

1989~1991년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
흐메드 라드히( 라시드) 김주성(대우 로얄즈) 미우라 카즈요시(베르디 가와사키)

1987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상국
FW
해원
FW
김주성
MF
김삼수
MF
수진
MF
이흥실
DF
상범
DF
기봉
DF
용환
DF
박경훈
GK
풍주
1991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기근
FW
고정운
MF
김현석
MF
이영진
MF
김주성
MF
최강희
MF
이상윤
DF
용환
DF
현용
DF
테드
GK
풍주
1996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라데
FW
세르게이
MF
신태용
MF
데아
MF
홍명보
MF
하석주
MF
김현석
DF
윤성효
DF
김주성
DF
기태
GK
김병지
1997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니치
FW
카첸코
MF
김현석
MF
진원
MF
인완
MF
진행
MF
재권
DF
김주성
DF
시엘
DF
안익수
GK
범철
1999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안정환
FW
샤샤
MF
서정원
MF
고종수
MF
데니스
MF
고정운
DF
강철
DF
김주성
DF
시엘
DF
홍기
GK
이운재

1.1. 소개

중앙고-조선대학교 출신. 삼손, 야생마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키는 작았지만 폭발적인 스피드와 현란한 개인기가 돋보인 선수였으며 오른발잡이였지만 왼발을 능숙하게 쓸 수 있었다.

1.2. 선수시절

선수시절엔 3회 연속으로 아시아 올해의 선수에 선정될 만큼 대단한 실력의 선수였다. 워낙 출중했기 때문에 명문대를 갈 수 있었으나, 다른 축구부 동료 4명을 같이 받아주는 조건으로 조선대를 선택한 의리파.[1]

부산 대우 로얄스의 레전드이자 K리그 최초로 구단 영구결번(16번)이 지정된 선수였다. 1986년 월드컵에 출전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별명이 아시아의 삼손. 야생마 다만 이런 별명은 주로 아시아팀과의 활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에는 태국인도네시아 같은, 한국에서는 C급으로 치는 팀과 한국 국대가 막상막하의 경기를 펼칠 정도로 한국축구의 실력이 안습이었으니.

사실 동남아시아 축구가 본격 막장화된건 2000년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이 시기의 차이는 좀 있지만 한때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이나 바레인같이 아시아 내 8강에는 들 정도의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봤자 전통 최강 자리는 이란,(아시아에서 쫒겨나기 이전의) 이스라엘과 한국이 경쟁했지만. 그 바로 밑에서 후세인 정권 하에서 막장되기 이전까지 이라크가 최강 다크호스로 평가받고 있었고, 일본사우디아라비아가 8~90년대 치고 올라오기 이전까지 그 밑 자리는 그야말로 동남아시아와 중동간의 카오스였다. 그게 90년대 후반부터 정치, 경제적 문제로 차차 중동이 앞서고 동남아가 차차 나락으로...

그러나 많은 기대를 모았던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해서, 망했어요. 이래서 국내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이후 도하의 기적도 겪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도 출전했다. 개인적으로 86-90-94 세번째 월드컵 출전. 팬들은 전성기 머리를 휘날리며 필드를 달리던 '야생마' 김주성을 기대했지만 전성기 때 공격적인 롤이 아닌 수비적인 롤의 미드필더로 주로 뛰었다. 참고로 이때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머리도 잘랐다. 이시기에 즉,1992년-1994년의 초반에는, 독일 VfL 보훔에서 뛰기도 했다. 차범근-허정무 이래로 거의 없었던 유럽진출이었으나, 위에서 보듯이 당시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수위권이었으나 세계 축구레벨에서는 한참 못미쳤었기 때문에, 김주성이 아무리 한국에서 난다고 해도 유럽에서는 .. 그래서 보훔에서 그다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34경기 출전 4골)

이후 돌아와 다시 친정팀인 부산(당시 대우 로얄즈)에서 뛰었다. 공격수였던 그가 복귀해서는 스위퍼로 뛰었는데 국가대표로 다시 뽑힐 정도로[2][3] 완벽하게 포지션 변화에 성공하며 역시 김주성이란 소리를 들었다. K리그 역사상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위치에서 베스트 일레븐을 수상한 선수는 그와 유상철 단 둘뿐이다.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후에 열린 중국과의 평가전(3:0 승)이다. 하지만 이 경기는 K리그 대표 선발국대 주축이 많이 빠진 것이 자랑과 C리그 대표 선발그래도 사실상 중국 국대라는 건 안 자랑의 경기였기 때문에 정식 A매치는 아니고 기록에도 남지 않았다.

또한, 아시아 올해의 선수를 3연속 수상한 유일한 선수.(89' 90' 91' http://en.wikipedia.org/wiki/Asian_Footballer_of_the_Year IFFHS 선정 ) [4]

선수로는 이회택-차범근-최순호를 잇는 한국축구의 에이스이자 전설적인 선수.

1.3. 은퇴 이후

2001년 초부터 MBC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해설가로서의 인지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MBC에서 해설을 하기 시작한 차범근에게 묻혔기 때문. 그래서 2002년 월드컵에서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은 경기를 중계했었고 차범근이 수원 삼성 감독으로 부임한 200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메인 해설위원으로 활약했다. 단, 처음부터 해설 자체는 매우 좋았는데 스타 플레이어 출신답게 경기의 맥을 상당히 잘 짚었고 상황분석이 뛰어났다.[5] 해설위원 시절의 어록은 "A에 대한 B"라는 특유의 말버릇 정도.(이를테면 슈팅에 대한 세기, 패스에 대한 정확성, 수비수에 대한 몸싸움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연결사를 에 대한으로 대체하는 버릇이 있었다.)

2005년대한축구협회의 국제부장을 맡게 되면서 해설 활동은 2006년 월드컵부터 중단된 상태.

2012년 올림픽 때에는 사무총장을 맡은 상태였는데 일본과의 준결승전 당시 발생한 독도 세리모니 문제 때 일본에 굴욕적인 사과 문서를 보낸 당사자로 지목 받았다. 국회에서 조중연 회장까지 책임이 올라가지 않기 위해서인지 먼저 보내고 후에 보고했다는 식으로 증언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 병크라 축협과 함께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었다. 독도 세레머니 사과 문제를 조금 설명하자면 물론 우리나라 정서상 사과문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건 맞다. 독도는 당연히 한국의 땅이고 그걸 수십년씩 망언과 도발을 해대는 일본에게 세레머니 한것을 사과했다는게 국민들이 분노할만도 하다. 그러나 좀더 현실적인 안목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것이 국제간의 문제가 어디 우리나라 하나의 정서만으로 해결될 일인가. 수많은 스포츠 협회를 보면 전혀 관련 없는 분들이, 대신 돈줄을 두둑한 양반들이 회장이나 부회장 혹은 다른 중임을 맡고 있는 것을 흔히 볼수있다. 이는 스포츠 자체가 많은 이익을 창출할수 있는 가치가 있는 금맥이므로, 그러한 재력가, 권력가들이 앞다투어 자리싸움을 하고 암흑속의 힘겨루기와 비리 등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도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더구나 그전에 IOC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김운용 위원장도 위원장 자리를 상실하여 IOC내에 파워게임에서 거의 힘이 없다시피한 한국이 눈치를 보며 다소 맥아리를 못추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더 보태자면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는 대한빙상협회가 오심으로 뺏긴 김연아의 금메달을 되찾으려는 의욕조차 없었던 것은, 물론 욕먹어 마땅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이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당시 오노의 헐리우드 액션으로 분노한 한국선수단이 올림픽을 보이콧하려 한것도 다 든든한 빽이 있어서 가능했던것.

1.4. 여담


현역시절엔 긴 머리 때문에 아시아의 삼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행정가가 된 지금은 당연히 두머리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약간의 탈모증세(...) 그래도 나름대로 오오 미중년 오오.


세이부 컵 축구[6]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김주성은 여기 얼굴 사용을 허락하는 대가로 많지는 않지만 계약금을 받았다고 한다.

현역 시절 말년에 중앙수비수로 보직변경하고 나서 뛰던 시절에 데니스에게 축구화로 머리를 밟힌 적이 있기도 하다. 하필이면 그 머리를 밟는 장면이 KBS로 전국 중계가 되고 있었기에 데니스는 빼도박도 못하고 중징계 크리 당첨. 자세한 내용은 이성남 항목 참조.

90년대부터 축구를 봐왔던 사람들에겐 2의 김주성보다 1의 김주성이 보다 친숙할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김주성 부장님은 지금까지 열성팬(이라 쓰고 지금은 애가 딸린 아줌마가 된 사람들)에게 팬레터를 받고 있다고 한다. 흠좀무.

여담으로 안정환과 연관이 많은 선수이다. 안정환의 어릴적 우상이었던 선수로 안정환이 머리를 기른 이유도 김주성 때문이었고 김주성의 플레이를 보고 축구생활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안정환이 같은 대우에 입단을 해서 몇 시즌동안 같이 뛰었다. 안정환이 술회하길, 자신이 대우의 에이스가 된 시절 지금의 아내와 서울에서 연애한다고 구단연습을 빠지고 다음날 복귀했는데 누구보다도 김주성이 크게 혼을 냈다고 한다. 아마 자신의 모습까지 따라할 정도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달려온 기특한 후배에게 더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여담으로 CF에 출연하여 '스피드가 기술입니다'라는 광고카피를 유행시키기도 하였다.

2.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이것이 동부 프랜차이저의 위엄! 어쩌면 항목 1의 김주성처럼 영구결번이 걸리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뭐 이런 류의 짤방도 경기당 자기 블록슛 수치만큼 만들어낸다.황정민?(...) 야거장?


원주 동부 프로미 No.32
김주성(金周成)
생년월일 1979년 11월 9일
국적 한국
출신지 부산광역시
출신학교 동아고 - 중앙대학교
포지션 파워포워드/센터
신체 사이즈 203cm[7], 92Kg
프로입단 2002년 드래프트 전체 1번(원주 TG삼보 엑서스)
소속팀 원주 TG삼보 엑서스/원주 동부 프로미(2002~ )

2000.1 2000.10 농구대잔치 MVP
조우현(중앙대학교) 김주성(중앙대학교) 현주엽(상 무)

2003~2004 한국프로농구 MVP
김병철(대구 동양 오리온스) 김주성(원주 TG삼보 엑서스) 신기성(원주 TG삼보 엑서스)

2007~2008 한국프로농구 MVP
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 김주성(원주 동부 프로미) 주희정(안양 KT&G 카이츠)

2002~2003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신인
김승현(대구 동양 오리온스) 김주성(원주 TG삼보 엑서스) 이현호(서울 삼성 썬더스)

2003~2004 한국프로농구 최우수수비상
박규현(창원 LG 세이커스) 김주성(원주 TG삼보 엑서스) 추승균(전주 KCC 이지스)

2011~2012 한국프로농구 최우수수비상
추승균(전주 KCC 이지스)[8] 김주성(원주 동부 프로미) 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

2004~2005 한국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이상민(전주 KCC 이지스) 김주성(원주 TG삼보 엑서스) 강혁(서울 삼성 썬더스)

2007~2008 한국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양동근(울산 모비스 피버스) 김주성(원주 동부 프로미) 추승균(전주 KCC 이지스)

2007~2008 한국프로농구 올스타전 MVP
조상현(창원 LG 세이커스) 김주성(원주 동부 프로미) 이동준(대구 오리온스)

원주 동부 프로미 소속의 농구 선수. 포지션은 파워 포워드-센터.

키에 비해 좀 마른 체격이기 때문에 디시 농갤 등에서는 멸치라고도 불린다. 본인 말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체중이 안 불어난다고 한다.

2.1. 고등학교에서 대학 시절

3급 지체 장애인인 부모님 슬하에서 힘든 성장 과정을 겪었다.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잠재력은 있지만 외려 동시대 센터인 김태완보다 낮은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지금도 말랐지만 그때는 제대로 못 먹어서 더 마른 몸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앙대 농구부의 대부 정봉섭이 김주성을 스카웃하고 적극 지원을 했고, 고등학교 대학교 선배인 조우현이 도움을 주고 하면서 차츰 실력을 키워갔다.

중앙대 입학 후 잠재력이 폭발. 임재현, 조우현, 송영진, 황진원과 함께 중앙대 무적 시대를 다시금 열었다. 2미터 5센티라는 키가 믿겨지지 않는 스피드와 점프력으로 가볍게 덩크를 꽂고 날아다니며 블록을 하면서 상대 팀들의 인사이드를 송영진과 함께 초토화시켜 버렸다.

2.2. 프로 생활

당연히 드래프트 1번 지명으로 프로에 입단. 당시 1번을 잡은 것은 원주 삼보였는데, 그곳에서 마지막 선수생활을 하고 있었던 허재는 김주성의 입단이 결정되는 순간 만세를 부르고 다음날 새벽까지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셨다고 한다.

KBL에서 외국인선수들과 부딪치면 과연 얼마만큼 해줄 수 있는가 의구심을 가지는 시선도 있었으나, 코트 내외를 넘는 허재의 전폭적인 지원과 갈굼(?) 속에 파워포워드 자리를 소화하면서 어느 정도의 득점 능력과 존재감 있는 블록슛을 앞세워 가볍게 신인왕을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데뷔 첫 해에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위엄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한국 농구팀이 금메달을 따는데 일등공신이 되기도 했다.

그 후로도 KBL의 간판선수로 계속해서 활약하였다. 포워드 자리에서 르커스 힉스테 존스 같은 외국인선수와 매치업되며 굴욕 아닌 굴욕을 겪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지속적인 성장을 했으며, 그 때문에 시즌 MVP 2회, 베스트 5 6회 등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보통 외국인이 독차지하는 블록슛 타이틀도 두 번이나 차지한 적이 있다.

김주성이 있는 한 동부는 만년우승후보란 말을 들을 만큼 KBL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2009/2010 시즌 기록은 16.3 득점, 6.6 리바운드, 3.9 어시스트, 1.1 스틸, 1.5 블록슛.

2012/2013 시즌, 1월 28일 연습 도중 발목부상로 전치 4주의 진단이 나왔다. 이 부상으로 말미암아 동부는 DTD 테크를 탔다.

2013/2014 시즌에는 여러부상으로 인해 결장하는 경기가 많아졌고, 부상여파와 나이등의 영향으로 인해 예전만 못한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쑥대밭이 되어버린 동부에서는 김주성 만한 선수도 없었다(...). 김주성에게 걸리는 견제를 나눠줄거라던 용병은 태업논란에 부상으로 아웃되고 나머지 용병들은 막말로 김주성만도 못한 영향력을 보여주며 동부의 용병흉작을 한탄하게 만들었다. 어쨌건 나이가 있어도 농구월드컵과 아시안게임에 차출되며 김주성만한 빅맨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 동시에 김주성 이후 그동안 쓸만한 국내파 빅맨이 많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014/2015 시즌을 앞두고 진행된 신인드래프트에서 허재의 아들인 허웅이 5순위로 동부행이 결정되며 프로에서 부자 농구선수[9] 와 함께 뛴 유일한 선수가 될 예정이다.

2.3. 특징

kimju.jpg
[JPG image (Unknown)]


뭐니뭐니해도 탁월한 운동능력을 이용한 수비가 김주성의 최고 무기. 인사이드 플레이어지만 속공 가담에도 매우 뛰어나고, KBL 데뷔 초기엔 중거리슛을 쏠 수는 있어도 뛰어나다 할 수는 없었지만 가면 갈수록 중거리슛에도 능한 면을 보여주게 되었다. 인사이더치고는 마른 몸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보다 힘이 좋은 선수를 상대로는 스피드를 앞세운 페이스업 공격을 하고, 자신보다 작은 국내 선수와 매치업되면 높이를 앞세운 포스트업을 써먹으며 상대를 공략한다. 거기다 패스 플레이로 팀내 볼 흐름을 도우며, 보면 같은 팀 포인트가드보다도 인사이드에 공 배급은 더 잘해주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직접 잡는 리바운드는 많지 않지만 성실한 박스 아웃으로 팀 동료가 리바운드를 잡게 하고, 스크린 플레이도 열심히 가담한다. 리바운드 후 패스도 일품. 사실상 KBL판 케빈 가넷이라고 보면 된다. 수비 포메이션에 대한 뛰어난 이해도와 긴 리치를 이용한 블록슛, 동 포지션 타 선수들 대비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가로수비 그리고 무엇보다 인사이드에서의 기민한 헬프디펜스로는 팀 전체의 수비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다는 점에서 케빈 가넷의 그것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공격에서의 사기더웨이도... 다만 나이가 들고 국가대표와 소속팀에서 거의 전 경기를 뛰는 혹사를 겪으면서 체력과 스피드가 줄어 급격히 노쇠화를 겪으며 장점보다는 단점이 부각되고 있다.[10]

어쨌든 기록 이상의 가치를 가진 선수. 현행 샐러리캡 제도에서는 엄청난 연봉(2010년 기준 6억 9천만원)을 받지만 연봉만큼의 가치를 하고 있다. 심지어 모기업 CF를 찍어도 그러려니 한다

2.4. 논란거리

2.4.1. 과도한 리액션과 비매너 플레이

일반인들에게는 성실함과 부지런함 등등 좋은 프로 선수의 덕목을 고루 가진 걸로 평가받는 김주성이지만 농구매니아들은 매너가 나쁜 선수로 평가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지나치게 성깔을 폭발시킬 때가 있으며[11],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로 사고를 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일은 경기 도중 서장훈의 목덜미를 배구 스파이크하듯 내려쳤던 사건. 이 건으로 인해 김주성은 두고 두고 농구팬들에게 주성타로 불리며 욕을 먹었고 김주성을 안 좋은 의미로 다시 봤다는 사람도 많다. 서장훈은 이에 대해 몇 년 후 바스켓카운트에 나와서 '웃는 척하는 쓰레기가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신경전과 몸싸움이 가장 치열한 골밑에서 활동하는 선수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그런데 감안해 줄 몸싸움이 언제 뒤통수치기가 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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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F image (Unknown)]

가면 갈수록 늘어가는 헐리우드 액션도 문제. 파울 유도라는 게 잘 하면 좋은 거라지만 눈에 띄게 과도한 액션이 많으며 이로 인한 비판도 많이 받는다. 2011년 3월 25일 벌어진 동부와 엘지간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제대로 헐리우드 액션을 보이면서 비판이 더욱 늘고 있다.

14~15시즌 전자랜드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리카르도 포웰에게 공과 상관없는 상황에서 강력한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다. 문제는 그러고도 더블파울로 포웰도 파울을 함께 받았고, 포웰을 파울 트러블로 몰아넣었다. 농구 관련 사이트에선 오심을 저지른 당사자인 김도명 심판은 제쳐두고황순팔과 함께 쌍으로 다굴당하는 중.[12]


2.4.2. 기록조작


2004년 3월 7일. 인천 전자랜드와 TG삼보의 경기가 펼쳐졌다. 시즌 순위는 결정된 상태에서 우지원과 문경은이 시즌 3점슛 부문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고 김주성 역시 블록 순위에서 1위를 다투고 있는 상황. 순위와는 관계 없지만 과연 문경은이나 김주성이 어떤 활약을 활지 농구팬들은 관심을 가지고 경기를 보았다.

그리고 농구팬들은 경기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희대의 상부상조 개그를 보고 만다. 전자랜드 선수들은 김주성이 블록 찍기 좋게 슛 시도를 갖다 바치고 TG 선수들은 문경은이 슛 쏘기 좋게 알아서 노마크로 자리를 비워주는 상황이 경기 내내 이어지는 어이없는 꼴이 펼쳐진 것이다. 형님 좋고 아우 좋고인지 뭔지 하여간 이들이 벌인 짜고치는 고스톱 덕에 김주성은 그 경기에서 11블록을 달성하고 트리블더블도 덤으로 하며 시즌 블록 1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당연히 어이가 가출하는 상황을 본 농구팬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KBL은 결국 그 시즌의 3점슛 1위와 블록 1위를 해당자 없음으로 수상 처리하며 어물쩡 넘어갔다. 더 어이없는것은 문경은과 우지원은 이 사건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으며 특히 우지원은 각종 예능출연시 이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자신의 과오로 인해 후배들이 피해를 봤다고 사과를 거듭했다. 하지만 김주성은 나는 원래 8블락을 기록한적이 있고 한경기로 인해 한시즌이 폄하된다는것에 굉장히 불쾌하다며 인정조차 하지않았다. 어떻게 보면 졸렬하기까지한 태도가 아닐수 없다

그리고 2010년 KBL 홈페이지의 김주성 항목을 보면, 김주성의 한 경기 최다 블록 기록으로 저 2004년 3월 7일 짜고친 고스톱같은 날의 기록이 버젓이 올라가 있다. 이뭐병. 김주성은 과연 2004년 3월 7일 자신이 만든 기록을 어떻게 생각할까.

2.5. 트리비아

김주성의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다. 여자배구흥국생명에서 뛰었던 김향란으로, 여동생도 오빠처럼 키가 커(186cm) 포지션도 센터(미들블로커)로 활약했다. 오빠보다 일찍 성인무대에 일찍 뛰어들었지만 배구선수 특성상 롱런하지 못하고 일찍 은퇴했다. 그래도 엄청난 족적은 남기고 은퇴를 했는데 배구 프로화 이전 슈퍼리그 시절에 한 경기 최다 블로킹 8개를 기록하기도 했다. 김주성이 김향란의 플레이를 보고 쿠사리 먹인 많이 조언을 했다는 과거 신문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키가 큰 김주성 김향란 남매와 달리 척추 장애를 가지고 있는 김주성 어머니 신장은 160cm 정도고 김주성 아버지는 170cm 정도로 알려져 있다.

KBL의 빡빡한 샐러리캡(연봉총액제한) 때문에 한 선수가 한 팀에서 오래 뛰다 명예롭게 은퇴하기가 참 까다로운게 현실인데, 김주성은 그 높은 연봉에도 불구하고 입단 때부터 10년동안 한 팀에서 뛰었다. 일단 동부구단 내에서는 성골이라 할수 있는 중대출신에다가 한 팀 근속년수도 높으니 그가 은퇴 때까지 한 팀에서 뛰고 은퇴한다면 먼 훗날 차기 동부 감독은 김주성이 될 가능성이 높다. 김주성 본인도 동부에 대한 충성심도 높고, 팀의 샐러리캡이 부담된다면 자기연봉을 낮춰서라도 남을 것이 분명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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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시 조선대 학생들 사이에서 김주성은 교내에 있는 돌계단을 공을 차면서 하루에 수십번씩 오르락내리락하던 미친놈(…)으로 유명했다. 축구부 학생인건 알았지만 누군지는 몰랐던 무명시절의 이야기. 결국 김주성이 스타 플레이어가 되고 나서야 학생들은 그제서야 그 때 그 학생인걸 알았다고.
  • [2] 다만 이시기에 이란에게 2:6 대패 참사를 겪었던건 안자랑... 막상 이 경기는 미드필더로 뛰었지만...그리고 전반전만 뛰고 교체되었는데 2:1로 이기고 있었다. 김주성이 나간 후반전에 5골을 쳐먹은 것(...) 물론 김주성 한 명이 빠졌다고 저런 대패를 한 것은 아니지만 소위 식스투 참패에서 김주성의 지분이 큰 것은 분명히 아니다.
  • [3] 당시 소속팀인 포항에서 박성화 감독에 의해 중앙미드필더로 활약하던 홍명보와 대우에서 스위퍼로 포지션체인지에 성공한 김주성이 둘 다 아까웠던 박종환은 리그에서처럼 홍명보를 미드필더로 올리고 김주성을 스위퍼로 썼다. 하지만 예선에서의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고 결국 박종환은 이란과의 8강전에서 홍명보를 스위퍼로 김주성을 미드필더로 원상복귀 시켰다. 그리고 김주성의 어시스트로 신태용이 두번째 골을 넣는 등 전반에만 2:1로 앞서나가며 성공하는 듯 했지만 결국 결과는... 사실 팀전체의 컨디션이 하향세였고 공격의 핵인 황선홍마저 바로 전 경기인 쿠웨이트전에서 상대의 악랄한 반칙으로 인한 부상으로 결장해서 대책이 없긴 했다.
  • [4] 단, 이때 수상은 AFC 올해의 선수로 바뀌기 직전의 일이다.
  • [5] 일례로 2002 월드컵 16강전 일본-터키전에서는 터키의 결승골이 거의 전광석화급으로 터졌는데 이걸 정확하게 캐치해냈다.
  • [6] 8,90년대 동네마다 있던 오락실 대부분의 게임제목으로 김주성과 붉은악마라는 타이틀이 쓰였다. 나이지긋하신 형님,삼촌들에게 물어보라. 이 게임에서 김주성이 나온 것은 한국-일본 버전이고, 다른 국제 버전에서는 한국과 일본 대신 프랑스네덜란드가 들어간다. 역시 국내용?
  • [7] 착화신장은 205cm.
  • [8] 최우수수비상은 2004-05 시즌을 끝으로 7년간 폐지된 상이다. 추승균은 2004-05 시즌 수상자
  • [9] 허재, 허웅 부자
  • [10] 실제로 데뷔 10년차 시즌인 2012년 11월 14일, 안양 KGC인삼공사를 상대로 한 경기 리바운드 0개라는 처참한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강동희 당시 감독에게 니가 갱기를 망치고 이써급의 개갈굼을 당했고 너는 안 망치고 있냐 이것이 방송으로 전파되면서 많은 농구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김주성이 농구를 못 한다고 갈굼을 먹은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했다. 그도 역시 노쇠화에서 예외는 아닌 듯하다. 프로농구 최초 주성타 갈굼영상 너야 너! 너라고! 네가 리바운드를 다 내주고 있다고 임마!
  • [11] 신인시절부터 심판에게 간혹 가다 강하게 항의하는 등 그런 성향이 보이긴 했다.
  • [12] 황현우(황순팔에서 개명함) 심판은 주심으로 있었고, 오심으로 인지도가 높아서 많은 사람들이 으레 황순팔이 그랬거니 생각하고 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