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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용

last modified: 2015-04-14 22:46:21 Contributors



2013년 3월 30일 프로야구 개막전에서의 위풍당당한 모습.


그리고 몇 시간 뒤(...) 코리아 힙합 레전드 MC Wingdragon 많은 사람들이 우연히 찍힌 것인 줄 아는데 의도 된 것이었다.


2014년 5월 21일 넥센전 오심으로 인한 항의 당시.[1]

" 그럼 이긴 자기는 가 되느냐
김성근, 김응용의 "신" 발언 직후 한 인터뷰[2]

"내 은퇴식 때 김응용, 김성근 두 거장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양준혁[3]

이름 김응용(金應龍)
생년월일 1941년 9월 15일[4]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평안남도 평원군
학력 성지초-개성중-부산상고-우석대학교[5]
포지션 1루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남선전기 (1960~1961)
크라운맥주 (1964~1965)
한일은행 (1966~1973)
지도자 한일은행 감독 (1973~1981)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1977~1980)
해태 타이거즈 감독 (1982~2000[6])
삼성 라이온즈 감독 (2000[7]~2004)
한화 이글스 감독 (2012~2014)
프런트 삼성 라이온즈 사장 (2004~2010)

역대 감독 전적
년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83 해태 타이거즈 100 55 44 1 1위 우승
1984 100 43 54 3 5위 -
1985 110 57 52 1 3위 -
1986 108 67 37 4 2위/2위[8] 우승
1987 108 55 48 5 -위/2위 우승
1988 108 68 38 2 1위/1위 우승
1989 120 65 51 4 2위 우승
1990 120 68 49 3 2위 3위
1991 126 79 42 5 1위 우승
1992 126 71 54 1 2위 3위
1993 126 81 42 3 1위 우승
1994 126 65 59 2 3위[9] 4위
1995 126 64 58 4 4위 -
1996 126 73 51 2 1위 우승
1997 126 75 50 1 1위 우승
1998 126 61 64 1 5위 -
1999 132 60 69 3 4위[10]/7위[11] -
2000 133 57 72 4 4위[12]/6위[13] -
통산 2147 1164 934 51 ­
년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1 삼성 라이온즈 133 81 52 0 1위 준우승
2002 133 82 47 4 1위 우승
2003 133 76 53 4 4위 -
2004 126 74 48 4 2위 준우승
통산 532 312 204 16 ­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2013 한화 이글스 128 42 85 1 9위 -
2014 128 49 77 2 9위 -
통산 256 91 162 3 ­
총계 2935 1567 1300 70 ­

한국의 前 야구선수.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커리어를 보유한 감독.

해태-KIA팬들에겐 V9를 달성한[14] 명장.
삼성팬들에겐 자신들의 우승을 막던 악마같던 감독이지만, 아군이 되자 오랜 소원이었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15]케 해주고 레전드를 예우해준[16][17] 명장.
그러나 한화팬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투수 운용으로 불펜진을 개발살낸 킬끼리이자 FA시장에서 템퍼링을 일삼아 시장질서를 어지럽힌[18] 주범, 그리고 9위 꼴찌를 독식해버린 암흑군주. 그리고 14시즌 프로야구의 수준을 떨어뜨린 감독 중 1명.[19][20]

감독 통산 최다승 1위이자 최다 우승감독(해태 9+삼성 1 =10회)의 대기록을 보유한 지도자다. 삼성 사장 시절까지 합치면 12회! 거기에 고문 시절까지 합치면 13회! KBO 3분의 1을 혼자 잡수신 대식가. 등번호는 39번(해태 1983~1996), 70번(해태→삼성→한화 1996~2013 현재)


해태/KIA 타이거즈 역대 감독
김동엽[21](1982) 김응용(1982.11.03~2000.10.30) 김성한(2001~2004)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김용희(1999.11.11~2000.12.01) 김응용(2000.10.30~2004.11.09) 선동열(2004.11.09~2010.12.30)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한대화(2009.09.30~2012.08.27)
한용덕 감독대행 (2012.08.28~2012.10.07)
김응용(2012.10.08~2014.10.17) 김성근(2014.10.25~)

보통 "김응룡"으로도 많이 불리는데, 유니폼이나 현수막 등에 쓰이는 공식 명칭은 김응이며, 본인의 호적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한다. 발음상 '룡'이 맞지만 집안에서 '용'으로 쓰기로 했다고... 용이라고 쓰고 룡이라 읽는다 한글 맞춤법 규정에 따르면 단어의 첫머리 이외의 경우는 본음대로 적되, 모음이나 ㄴ받침 뒤에 이어지는 '렬,률'만 '열,율'로 적는다. 따라서 김응'룡'이 맞지만, 고유명사니까 아무래도 좋다는 듯. 본인은 "그런 것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는다"며 "기분 내키는 대로 써도 좋다"고 말했다. 실제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보면 김응용보다 김응룡으로서 검색어 결과가 훨씬 많다. 선동렬과 같은 케이스. 하여 응용과 응룡 혼용

Contents

1. 현역 시절
2. 감독 1기 : 해태 타이거즈 감독
2.1. 논란 1 : 폭군? 아버지?
2.1.1. 부정적 의견 : 폭력배지 뭐!
2.1.2. 긍정적 의견 : 쓸 상황이라 쓴거야!!
2.2. 논란 2 : 폭력문제
2.3. 논란 3 : 선수단 장악 + 차도남 감독님
2.4. 총평
3. 감독 2기 : 삼성 라이온즈 감독
3.1. 외전 : 삼성 라이온즈 사장
4. 야구원로 시절
5. 감독 3기: 한화 이글스
5.1. 2013 시즌 전
5.1.1. 류현진 논란
5.1.2. 김주찬 논란
5.1.3. 트레이드 논란
5.2. 2013 시즌
5.3. 2014 시즌
5.4. 총평
6. 인물
6.1. 야구 내적
6.1.1. 야구 지도 스타일
6.1.2. 애호 선수층
6.1.3. 노력하는 유망주, 무명 선수들을 향한 애정
6.2. 야구 외적
6.2.1. 세력싸움 균형의 조율사
6.2.2. 감독을 키우는 감독?
7. 김응룡 VS 김성근
7.1. 강압적으로 선수들을 다루는 후진야구?
7.2. 선수빨로 경력을 쌓은 무능력한 감독?
7.3. 김성근은 아웃사이더고 김응용은 성골?
7.4. 야신의 라이벌?
8. 기타

1. 현역 시절

1939년 음력 3월 1일생으로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이다. 초등학교 3학년때 한국전쟁 발발로 아버지 손에 끌려 1.4후퇴 때 월남하였다. 이북에 있었을때는 축구를 했었다고 한다. 1954년에 부산 개성중학교에서도 축구를 했었으나 야구부 주장이 와서 넌 이제 야구선수다라고 하는 바람에 야구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부산상고 졸업 후 당대 최고팀이었던 농업은행[22]입단이 좌절되었다. 덩치가 너무 커서 제대로 뛰지도 못할 것이란 이유로 입단이 거부되었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뒤늦게 농업은행에서 불러서는, 입행하라면서 입행서류를 내밀었지만, 방에서 나오면서 서류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하여 한국운수 야구단의 연습생으로 들어가 각고의 노력끝에 실업리그 최고의 강타자로 등극. 장종훈이나 김현수, 서건창으로 대표되는 연습생(신고선수) 신화는 바로 김응용이 원조다. 실업리그 홈런왕으로 장기 독재를 했는데, 이걸 막아낸 선수가 OB 선수였던 김우열. 참고로 이후 '10년은 갈 것이다'라는 평이 나왔던 김우열의 홈런왕 독식체제는 5년여 만에 김응용의 해태에서 만년을 보낸 김봉연이 무너뜨렸다. 프로야구 출범 전 한국의 홈런왕 계보는 박현식-김응용-김우열-김봉연으로 이어진다. 한편, 김우열은 실업리그 통산 100홈런을 넘긴 선수 중 한 명이다.

YoungElephant.png
[PNG image (Unknown)]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김응용이다.

당시 체중은 120kg에 신장이 무려 190cm에 달했다.[23] 1950년대 한국남자의 평균 신장이 160cm 조금 넘었을 때다...지금으로 환산하면 2미터도 넘을 듯. 나이를 먹은 탓에 키가 줄긴 했지만 지금도 굉장히 큰 체구다. 승승장구에 나왔을 때 키 180cm의 MC 김승우보다 더 컸으니...위너 때문에 선수 시절 1루 수비를 볼 때 동료 야수들이 던지는 공을 받아내는 모습이 마치 코끼리가 비스킷을 받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코끼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다리도 코끼리 다리 사장까지 올라가면서 '코사장'으로 승격하기도 했다. 냉장고에 넣어보면 어떨까 물론 이런 큰 덩치에 맞게 싸움실력도 출중하다. 거구로 유명했던 해태 포수 장채근이 전지훈련중 술에 만취해서 대들었다가 50이 다 된 김응용에게 넙치가 되도록 얻어맞았다는 카더라통신도 있다. 당시 장채근이 갓 입단한 신인이었을 때 시합중에 장채근 타석이 될 때마다 대타를 돌려 타석에 나가지를 못하게 한 것에 대해 열이 단단이 받은 장채근은 맥주 수십병을 비우고 한 손에는 맥주병, 다른 한 손엔 돌을 들고 다짜고짜 김응용이 묵고 있는 방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결과는 장채근의 KO패...[24]


1965년 크라운맥주 시절 김응용의 타격자세.

1963년 제 5회 아시아 선수권 야구 대회에서 결승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3-0으로 사상 첫 국제전 우승과 사상 첫 일본전 승리를 거둘때 1회 선취타점, 8회 투런 홈런 등 전 타점을 혼자 기록하면서 국민적 스타가 되었고, 우승 당일 밤 너도나도 건네는 축하주에 꼼짝없이 대취하여 쓰러졌다는 일화가 있다. 1960년대 후반 창단한 중앙정보부 야구단[25]에 입대하여 병역에 임했지만, 얼마 안가 중정 야구단이 해체되는 바람에 남은 복무기간은 육군 야구단에서 보낸 경력이 있다(...).

이후 한국운수가 매각으로 팀명이 크라운맥주-한일은행 야구단[26]으로 바뀌는 와중에도 끝까지 4번타자 자리를 고수하던 김응용은 1966~1972 시즌에 한일은행 선수 겸 코치로 뛰다가 73년에 32세의 나이로 한일은행 감독에 취임해 기나긴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미 우승 청부사로 불리고 있었으며 77년에는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맡아 한국을 세계대회 첫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2. 감독 1기 : 해태 타이거즈 감독


무섭다. 이 당시엔 직접 방망이들고 직접 갈궜다.


타이완 전지훈련 때 식사하던 사진. 이 때 42세였다. 그야말로 왕성한 활동력에 팔팔할 때 나이. 가만히 보면 식사 중에 기자가 사진을 찍는데 감독 옆에 있는 한 분 빼고 전부 고개를 푹 숙인채 시선을 피하고 있다.


항의 이외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던 전설의 시대 1. 그리고 13년 뒤...

만일 제도가 바뀐다면 우리는 또한 그 바뀐 제도에 따라 우승할 것이다.[27]

1981년 대한야구협회에서 추진한 야구인 해외 연수 프로그램의 첫 번째 수혜자로 선정되어 임신근에게 한일은행 감독직을 넘긴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해외 연수 프로그램은 대한야구협회에서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이었으나 한국프로야구의 창설 이후 무게가 프로 쪽으로 쏠리면서 대한야구협회의 처지는 어려워졌고 결국 프로그램은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프로야구 출범 당시 각 팀에서 아무도 러브 콜을 하지지 않아 자존심이 상해 야구 연수를 간다는 이유로 1년동안 도미했다'는 식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조용히 귀국해서 개막전을 봤던 것은 사실이지만. 1983년에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1982년 시즌 초반 해임당한 김동엽 초대 감독의 뒤를 이어 원년 시즌 후 해태 타이거즈의 2대 감독으로 부임한다.

취임 기자 회견에서 올시즌 목표를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표야 물론 우승이지요". 당시 1983년 해태의 전력으로 보면 이는 허세로만 들렸다. 1982년보다 강화된 전력이라 해봤자 전해 부상으로 거의 개점 휴업이었던 이상윤이 회복되었다는 점과, 닛폰햄-한신 2군에 있던 재일교포 투수 주동식의 영입 정도 뿐, 그것만 가지고는 우승은 커녕 상위권조차 장담하기 힘들었다. 다만 14명으로 시즌을 치렀던 원년에도 해태 타이거즈는 팀홈런 1위를 기록하고 홈런왕/도루왕을 모두 보유했던 팀이었다. 가능성은 있는 팀이었던 셈.

그러나 해태는 장명부를 앞세운 삼미를 제치고 전기우승을 확정짓고,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MBC를 격파하고 창단 최초 우승을 한다. 이 때 해태가 못 했다는 건 아니지만, 보너스 문제로 구단과 선수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던 MBC가 자멸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다.

이후 2000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의 감독을 지내며, 해태의 한국시리즈 9회 우승을 이끌었다.

2.1. 논란 1 : 폭군? 아버지?

2.1.1. 부정적 의견 : 폭력배지 뭐!

군대와 비견되던 예전 해태의 강압적인 이미지를 만든 데에 일조했으며 그 정점에 있었던 김응용은 해태의 독재자였다.

어느 감독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를 중용하고 싫어하는 선수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지만 김응용의 경우는 특히 심해서 어떤 선수라도 경기에서 실책을 저지르거나 본헤드 플레이를 보이면 그 자리에서 얼차려를 시키거나 발로 걷어차는 등 프로팀이라기 보단 군대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으며 한창 잘 하는 선수라도 한 번 눈밖에 나면 무조건 썩혀두거나 트레이드 해버리곤 했다. 이는 아래의 긍정적 의견에 언급된 실력제일주의와 모순되는 행보다. 즉, 실력도 있고 그 실력이 꾸준히 유지되는 선수만 우대한 것. 공중파 방송중계 도중 팀의 주축선수를 발로 걷어차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을 탄 적도 있다. 해당 선수는 도저히 감독님 밑에서 못뛰겠다면서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이듬해 바로 트레이드 되어 그 팀의 우승을 이끌게 되는데 그 선수가 바로 한대화. 그리고 바꿔 온 선수는 2년만에 은퇴. 망했어요 2012년 KBS 스포츠에서 기획한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10 한대화편에서 김응룡은 '그 올스타전이 애들 장난인데 내가 뭐하려 걔한테 그랬겠느냐' 그러면서 둘러대는데 실제 영상보면 제대로 엉덩이에 조인트.(...)[28][29]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도 이 선수에게 경기 중에 엎드려 뻗쳐를 시키는게 사진에 찍히기도 했다.


요즘 이러면 바로 사회문제로 대두된다. 바로 10년전만 해도 이랬다는 걸 보면 하루하루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하다.

2.1.2. 긍정적 의견 : 쓸 상황이라 쓴거야!!

다만, 김응용의 철권통치에는 확고한 실력 제일주의 원칙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김응용 감독은 정말 실력이 있는 선수라면 술을 마시든 여자와 떡을 치든 무엇을 하든 간에 자기 앞가림만 제대로 한다면 간섭은 커녕 적당히 못본체 해주었다. 선동열이나 한대화, 임창용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선동열훈련에 늦지만 않는다면 밤새 술을 퍼마셔도 간섭하지 않았고 OB 베어스에서 뛰던 한대화해태 타이거즈 이적 얘기가 나오자 기겁하고 차라리 은퇴하겠다는 말까지 꺼냈지만, 정작 해태 타이거즈로 온 한대화에게 김응용 감독은 오히려 훈련 시간에 늦게 나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간염 환자인 한대화가 늦잠을 자고 몸을 추스리도록 한 배려였다. OB 베어스 시절과 훗날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의 한대화김성근과 겪었던 불화와 대조되는 부분. 강훈련을 강조했던 김성근OB 베어스 시절부터 한대화를 태만한 선수로 생각했고, 이는 한대화가 은퇴식도 치르지 못하고 선수를 그만두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그저 그런 선수가 을 저지른다면 그야말로 헬 오브 지옥을 맛보여줬다(...). 현재 야구계에서 종사하는 사람 중에서 이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으로 대표적인 게 수감되신 양승호 전 롯데감독. 이 양반이 해태 시절 일화가 좀 쩌는데 매번 일찍 나와서 광주구장 한 켠 시원한 바람부는 명당(?)에서 낮잠 자다가 김응용 감독한테 걸려서 혼나고 술 마시는것도 항상 이 양반이 중점적으로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병훈 해설. 이 때문인지 이병훈 해설은 김응용 감독이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자 사사구에서 굉장히 부정적인 의견을 날렸다.(...) 근데 이 뒤로 이병훈은 해태를 떠나 삼성으로 트레이드되고, 시즌 전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시즌아웃되는 병크를 치고 은퇴를 해서...그런데 이게 단순히 감정문제가 아니었다!

이처럼 어디까지나 실력에 따라 당근과 채찍을 가했으므로 별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지금도 수많은 지도자들이 학연, 지연이나 연공서열에 따라 선수를 기용한다는 점에서 김응용의 실력 제일주의는 지금까지도 야구계에 많은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김응용은 은퇴후 인터뷰에서 '난 이북 출신에 부산상고에서 야구를 배웠고, 타이거즈 감독을 오래 했으니 전라도 사람이고, 삼성에서 우승했으니 대구 사람이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지역드립같은 건 이미 초월하신 분. 참고로 선수시절에는 크라운맥주, 한일은행 소속으로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2.2. 논란 2 : 폭력문제

김응용의 폭력은 아주 유명했는데, 방수원은 강판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덕아웃으로 끌려와서 주먹으로 맞은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 TV에 찍혀나와 한동안 구설수가 되었다. 그리고 김응용 밑에서 감독술을 배운 김성한이 후에 이를 어설프게 따라한 김지영 포수 구타사건을 일으키다가 결국 망했어요.

박충식의 증언에 의하면 해태 타이거즈에서는 자신이 트레이드 된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구타문화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2군에서는 제대로 못한 선수를 코치가 따귀를 때리는 게 다반사였다고.

폭력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보면 심할지도 모르지만, 김응용이 체계적인 지도자 수업을 받지 못한 세대이고 프로야구 초창기에 감독직을 시작했다는걸 감안하면 어느 정도 감안을 해야 한다. 김응용의 이러한 성향 외에도 창단때부터 해태는 군기로 유명한 군산상고 출신이 많았다. 원년멤버이자 초반 해태 우승의 견인차였던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 김일권, 김용남 등등 모두 군산상고 출신. 고교 선후배로 얽힌 분위기에서 자연스레 구타문화가 정착된 것 같다.

해태 선수들이 대체로 개성이 강했기 때문에, 유약한 성격으로는 제대로 이끌 수가 없다는 점에서 이런 폭력을 곁들인 카리스마는 어쨌든 해태 왕조를 여는데 도움이 되었다. 프로 초창기에 선수들은 아마때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자율적으로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켜야만 움직였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당시 프로역할을 하던 실업야구는 선수간 연봉차도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선수생활 은퇴 후에는 정식으로 입사시켜줘서 미래를 보장해줬기 때문에, 선수들은 잘하나 못하나 똑같은 월급을 받으니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게을리하는 것 같으면 아무말 없이 야구방망이로 땅을 툭툭 두들겼다던데, 그 무시무시한 침묵의 카리스마에 열심히 하는척이라도 안하면 못배길 지경이었다고 한다.

2.3. 논란 3 : 선수단 장악 + 차도남 감독님

한화에서 70대 노장을 삼고초려한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김응용은 기본적으로 선수단에 파벌이 생기는 것을 싫어하여 파벌을 만드는 선수들을 족족 트레이드시키고, 선수단의 단합을 해칠까봐 특정선수에 대한 공개적인 총애마저 삼가는 등 이런 면에서는 굉장히 철저하다. 전 해태 투수였던 이상윤과 관련된 일화에서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술친구였던 한국 최초의 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씨가 투수 이상윤의 장인이 되자, 이후 김기수씨와 만나는 걸 삼갈 정도. 참고로 김기수씨는 호남지역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김응룡 감독이 해태 타이거즈 감독으로 부임했을때 광주에서 유일한 지인이였다. 당시 광주에서 김응룡 감독의 유일한 낙이 경기가 없을때 김기수씨 만나서 술한잔 하는거였다고...

심지어 선수들과 개인적으로 친해지는 것도 극히 피했다고 한다. 차가운 야구팀 감독, 하지만 덩치 큰 왼손잡이에겐 따뜻했다(...) 해태에 몸담았던 어떤 선수는 트레이드로 다른 팀으로 갈 때 작별인사를 한 게 김응용 감독과 가진 유일한 일대일 면담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해태신화가 설립되기 전 해태가 두번째 우승을 한 1986년의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저라고 왜 선수들과 술한잔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 선수들은 그런 술자리를 꼭 그라운드까지 연장시키려고 하니...(그런자리를 피합니다.)". 김성근 감독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선수와 감독이 농담을 할 정도라면 보기는 좋을지 몰라도 이미 그 팀은 끝장난 거라고. 물론 김인식이나 류중일같이 인화력으로 선수단을 이끌면서 좋은 성적을 내는 감독들도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선수들의 프로 의식이 어느 정도 발전한 만큼 감독 스타일의 대세도 변하고 있는 셈.

북일고 인맥과 프랜차이즈 출신 코치들의 폐해가 심각한 한화의 악습을 깨기 위해서는 적임자가 온 듯하다. 근데 성적은 왜 그 모양인지...

이러한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이순철 숙청사건이다. 이순철은 해태의 군기반장이었으며, 실제로 90년대 초중반 해태 선수단은 이순철이 통솔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종범이 팀의 리더로 부상하고 이순철의 실력이 내리막을 타자 그의 이용가치도 사라져버렸다. 이순철의 특권은 조금씩 박탈되었고, 결국 오랜 시간 해태의 리더였던 이순철은 항명사건과 함께 그야말로 한칼에 방출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건 또 김일권 숙청의 후속편이었다. 원년 멤버이자 도루왕이었던 김일권 역시 풍운아로 유명했으며 불고기 화형식 등 일화가 많은 선수였는데, 일단 실력이 되었기 때문에 넘어가다가 나이가 들고 대안이 될 선수가 등장하면서 칼을 뽑고 태평양 돌핀스로 축출해버렸다. 그 대안이 되었던 신인선수가 바로 이순철이라는 것.[30] 이렇게 지속적인 물갈이(?)를 통해 김응용 감독은 세대 교체와 선수단 내 파벌 축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2.4. 총평

야구 외적인 팀 관리나 조직면에서는 무척이나 유능한 사람이다. 9번의 우승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엄할 땐 엄하지만 2군급 선수들에게 사비를 털어서 월세방을 구해주는 등[31] 적절한 당근을 써먹어가며 딱 불만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만 선수단을 통제하는 능력은 매우 뛰어났으며, 깨끗한 사생활 관리나 적절한 쇼맨쉽, 무엇보다도 넘사벽급의 뛰어난 성적은 주변의 비난들을 잠재우기엔 충분했다.

3. 감독 2기 : 삼성 라이온즈 감독


항의 이외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던 전설의 시대 2. 연식이 쌓여서 간지가 넘쳐 흐른다. 그리고 9년 뒤...그나저나 안지만의 힙합전사 모자쓰기는 김응룡 감독에게서 영감을 받은건가?

언제나 우승 후보였고, 정규 시즌에서의 압도적인 성적에도 불구하고 꼭 한국시리즈에서 발목을 잡혀 무관의 제왕이라는 결코 좋지만은 않은 별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삼성 라이온즈는, 우승에 대한 염원으로 2000년 시즌을 마치고 김응용을 모시다시피해서 데려오게 된다. 여기에는 IMF 사태로 인해 해태 타이거즈의 모기업인 해태가 부도난 것과 해태 구단 수뇌부와 김응용 간의 마찰이 있었던 것도 김응용의 삼성 라이온즈행에 한몫했다.

V9 이후 이종범마저 팔리자 빡친 김응용 감독은 아예 팀에 손을 떼다시피 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사실로는 해태 쪽에서 먼저 김응용 감독의 삼성행을 제의했다고 한다. 이종범이 팔려 나간 뒤에 해태와 삼성 프런트 사이에서 이야기가 끝나 김응용 감독만 승낙하면 곧바로 삼성행이 보장된 상태...였으나 선수까지 팔다, 이젠 감독도 다른 팀에 팔아 버리냐는 무등 아재들의 분노에 어쩔 수 없이 1년 더 맡았던 것. 해태 말년에 괜히 손을 뗀게 아니다.

라이벌 팀의 수장 김응용의 삼성행은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으며 특히 일부 삼성 팬들은 '삼성을 가장 많이 무릎 꿇렸던 주적 김응용을 데리고 오는 걸 보니 팀에 정나미가 떨어진다'며 삼성 팬을 관두는 사람도 있었고, 또한 해태 출신이 상당수 코치진에 포진되어 있었기에 당시만 하더라도 김응용 감독에게 불만을 품은 팬들이 많았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삼성을 비꼬던 말인 해삼 라이거라는 이름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축구를 개발살낸 네덜란드거스 히딩크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를 세계 4위로 바꿔 놓기도 한 사례를 본다면

하지만, 오히려 김응용이 오기 전에 삼성 라이온즈이만수로 대표되는 프랜차이즈 스타에게 홀대한 데 비해, 김응용은 쫓겨나다시피하며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하여 그와 잠시 함께했던 양준혁을 2002년에 다시 삼성으로 데리고 왔고, 팀의 숙원이었던 한국시리즈의 한을 풀어 주었으며, 감독 은퇴 후에도 구단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지역 유소년 및 아마 야구계를 위해 활동하고,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2002년 우승 이후로는 김응용 감독에 대한 팬들의 불만이나 비난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특히나 기존시스템을 다 때려부수고 자기만의 확고한 야구철학으로 팀을 인솔하는 방식으로 인해 삼성 프론트 및 선수단과 갈등을 빚고 해임된 김성근감독과는 달리 유연한 자세로 삼성의 팀컬러와 전통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야구철학을 접목시킨 것으로 인해서 그후로도 크게 비판을 받은일도 없으며 오히려 해가 갈 수록 점점 더 좋은 평가를 들었다.

2001년 부임 첫해 삼성 라이온즈 선수단의 인식을 크게 바꾸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이승엽 오렌지 사건이다. 2001년 스프링캠프 당시 이승엽이 오렌지를 까먹다가 오렌지칼에 손바닥 자상을 입고 하루 휴식하게 됐다. 이런 황당한 부상을 입자 노발대발한 김응용은 즉시 선수단을 모집, 자신에 옆에 오렌지를 수북히 쌓아두고 선수단 앞에서 오렌지를 그 큰손으로 거칠게 까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가면서 선수단에게 "오렌지는 이렇게 까먹는거야. 알았어?!!!!". 이후 선수단 분위기는 안봐도 비디오. 도련님 야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던 삼성 선수단의 의식변화에 계기가 된 일이라 한다.

다만, 이해에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패하여, 김응용이라도 삼성의 한국시리즈 저주는 풀 수 없다는 말이 나왔으나, 2002년에 김성근LG 트윈스에게 백투백 끝내기 홈런으로 승리를 거두며 삼성 라이온즈의 숙원이었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2002년 한국시리즈 참조. 이로 인해 김응용은 대한민국 최초이자 유일한 한국시리즈 10회 우승달성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시상식때. 이 수상 소감 자리에서 LG 트윈스김성근 감독 최고의 별명 야신이 만들어 졌다. 당시 모든 면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전력이 비교가 안되던 LG 트윈스가 계속 삼성을 물고 늘어지자 김응용은 우승후에도 "야구의 신과 대결하는 것 같았다."고 밝힌 소감에서 비롯된 말. 근데 그 말뜻에는 "나는 신보다 더 위대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이건 본인도 인정했다. 상대도 부족한 전력에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싸웠으니 상대를 추켜 주면서도 티 안나게 내 자랑을 하는 법이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 신이라고 해주자. 생각했다고. 김성근 감독도 이 말을 듣고는 대번에 진의를 파악하고 피식 웃으며 "그럼 날 이긴 자기는 뭐가 되느냐"고 응수했다고 한다.

2004년 김재박의 현대와의 한국시리즈 패배를 끝으로 길고 길었던 감독 생활을 마감했다. 복기해 보면 이 시기부터 시대와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2001년 누가 봐도 앞서는 전력이었음에도 김인식 감독에게 일방적으로 당했고 2002년 역시 전력이 월등히 떨어지는 LG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갈뻔 했으며[32] 2003년에는 전년도에 삼성의 배터리코치로 일했던 초보 감독 조범현에게 셧아웃당했고[33] 2004년에는 몇년 째 모기업 지원이 끊긴 현대에게 무너졌다. 9연패를 찍은 것도 이 시기의 일. 여름에 강해지는 삼성의 종특 때문에 후반에 치고 올라와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3.1. 외전 : 삼성 라이온즈 사장


야구계 인물로는 최초로 2004년 12월 1일 삼성 라이온즈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2010년 12월에 삼성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이재용을 확실한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한때 실세중의 실세로 불렸던 이학수 전 부회장과 그 인맥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같이 갈려나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응용은 이학수와 부산상고 동문으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이학수의 권유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같이 경질된 김재하 부사장은 애초부터 이학수 인맥으로 유명했고,[34][35] 재계약 1년차에 뜬금포로 경질된 선동열 감독도 그 유탄을 맞은 거라는 설이다.[36] 삼성내부에서는 선감독 해임사유로 유력하게 퍼진 2010년 한국시리즈의 졸전보다는 이걸 더 정설로 치고 있다. 후임은 삼성 SDS 사장으로 활동했던 김인.

사실 사장을 시킨것은 김응룡이 야구인으로서 맡을 수 있는 최고직을 맡겨 다른 팀으로 자신의 계급을 낮추고 감독으로 이전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4. 야구원로 시절


삼성 라이온즈 사장직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제주도에 본인의 의견을 조율하여 조성한 "야구인의 마을"에 거주하면서 삼성 라이온즈 구단 고문으로 재직중인 것 외에는 조용히 일상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2012년 9월 13일 현장 복귀를 암시하는 듯한 기사가 올라왔다. 재미난 사실은 희망없는 모 팀이 9월 말 감독을 정하겠단 기사가 나온 후 몇 시간 뒤에 나온 기사란 것. 설레발이 아니길 일각에서는 희망없는 모 팀이나 답이 없는 모 팀 또는 만년 하위권인 모 팀 감독으로 나서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9월 17일 넥센 히어로즈의 김시진 경질로 인해 감독시장은 혼돈의 카오스가... 이장석 : "뭐? 무보수로 일한다는 감독이 있다고?"


그리고 올라온 합성짤. 적절하다.

9월 24일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나를 원하는 팀이 있다면 2~3년 안에 우승시키고 싶다."라신다. 야구팬들의 반응은 최강 커리어의 명장 컴백이 기대된다는 의견, 최고의 명장이었던 것은 맞지만 너무 오랫동안 현장을 떠나있었기 때문에 실전감각이 떨어져서 안될 것 같다는 의견, 삼성 맡았을때부터 슬슬 거품 빠지는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현장복귀해봤자 재박량 꼴밖에 더 나겠냐는 비아냥, 후진 양성 차원으로 2번째 독립야구단이라도 창단해서 서로 비슷한 전력의 팀으로 김성근 감독하고 붙어보면 재미있지 않겠냐는 의견 등 실로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김응용 감독 재임기간의 삼성 성적은 2-1-4-2로 결코 나쁜 성적은 아니지만, 팀의 전력과 감독의 명성에 비하면 영 초라한 성적이고 때문에 김응용 감독의 까들이 그를 거품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아니 20년 동안 코시 우승 못 하고 있던 콩라인 팀 우승시킨 게 영 초라한 성적이라니 이게 무슨 배가 부른 소리요

한화 이글스팬들이 다음 시즌 가장 원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공식 홈페이지 독수리요새와 분점인 독수리요새카페, 칰갤 등 대부분의 팬덤에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근데 거긴 올드 빙그레 팬도 있을텐데 한때 철천지 원수를 그렇게 원한다는게 아이러니. 원수가 중요해? 가을야구가 중요하지!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연령대의, 독수리요새나 칰갤따위는 전혀 모르는 충청도 연고 빙저씨들이나 야갤 상주 칰키워들 같이 거의 원리주의자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골수 이글스 팬들도 대부분 김응용 부임에 대해서 최소한 나쁘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감독 스타일이 지금의 한화에게 제일 필요한 요소. 작년처럼 경기 분위기 망치면? 즉시 교체다. 잘 돼서 성적 오르면 그 동안의 악행에 대한 속죄 당연히 좋은 것이고, 설령 망하더라도 과거의 철천지원수를 확실하게 잘근잘근 씹어줄 수 있으니까 왠지 선거를 전후한 유권자들의 주요 패턴이 생각나지만 넘어가자 어차피 팀 상태도 개막장이겠다 어찌 되든 손해볼 건 없는 셈. 게다가 현재 언급되는 후보군 중 류현진의 팀 잔류에 연연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인물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5. 감독 3기: 한화 이글스

10월 8일, 한화 이글스차기 감독으로 확정되었음이 알려졌다. 임기 2년에 계약금, 연봉 각 3억원으로 총 9억원에 계약을 맺었다. 당연히 한화 이글스 갤러리를 포함한 모든 야구 관련 갤러리들은 대폭발. 요시 한밭예수 거르고 칰끼리 거기다가 이종범이 주루코치로 합류하고, 방망이가 주 무기인 김성한은 수석코치로, 또다른 감독 후보군이었던 이정훈까지 2군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박찬호김태균을 맞이하게 된 작년 못지않게 뜨거운 비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1군과 2군 모두 한 성질 한다는 지도자들로 채워졌으니 이제 농땡이피우던 선수들의 도망갈 길이 전부 막혔다는 평. 거기다 최종보스로 청계산 회장님이 계신다. 이때 김승연 회장은 배임-횡령사건으로 2012년 8월에 징역 4년을 선고받고 김응용 감독 선임시 옥중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한화 프런트는 후임 감독으로 김재박을 선임했으나, 옥중에 계신 회장님의 최종 결재 단계에서 반려되었고, 김승연 회장의 장남이 부친의 의중에 따라 김응용 감독측과 접촉하여 영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얼마나 한화 야구가 답답하셨으면 취임사는 못하면 죽는다.가장 못한 감독 당사자는?

5.1. 2013 시즌 전

시즌 전부터 논란을 만들면서 건재함을 과시(...)하셨다.

5.1.1. 류현진 논란

10월 24일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의사표명은 며칠전 류현진이 했던 인터뷰에 대한 대응으로 보인다. 사실 팀 잔류를 원한다는 의사표명 자체는 문제가 될 게 없다. 팀에서 에이스급 투수가 나가는데 좋아할 감독이 누가 있는가? 문제는 야인시절에는 한시라도 빨리 가야 된다던 사람이 감독되고나서 말이 달라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한입으로 두말한다고 욕먹는 것을 일단 피할 수 없고 기사내용중에 류현진을 깎아내리는 내용이 있다는 것. 특히 반동분자들한테나 쓰는 단어인 해당행위(害黨行爲)해당(該當)행위가 아님라는 매우 부적절한 단어선택과 20승 투수 언급이 반감을 크게 모았고, 게다가 류현진과 김응룡이라는 두 인물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에[37] 한화팬들의 여론은 매우 안좋아진 상태. 게다가 한화팬이 아니지만 류현진을 응원하는 야구팬들도 꽤 많고 이들은 당연히 류현진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을 가진 만큼 이미지에 꽤 큰 타격을 받을 듯 하다.

근데 원래 김응룡 감독의 단어선택이 적절치 못했다.박한이에게 정신병자 발언과 장성호한테는 또라이라고 말했던 것만 봐도... 일단 올해(2012년)까지 류현진문제는 계속 경신될 것으로 보이며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끝낼지가 주목된다. 근데 그전까지 메이저리그 포스팅 문제로 류현진과 대면 해본적 없다는 칰런트 이야기는 왜 묻히나? 그리고 당시 한화 이글스의 상황을 나타낸 짤. 과연 대명작 슬램덩크.

일단 10월 29일 류현진의 포스팅 추진이 결정되었고 김응룡감독은 아쉽지만 가서 잘 활약하길바란다며 입장을 내 보였다. 해당행위니, 9승투수라 가치가 없다니 하면서 류현진을 까내리며서까지 붙잡겠단 지난 기사하고는 정 반대의 입장인셈. 게다가 9승밖에 못한 투수소리를 들으며 기분이 상했을것 같은 류현진도 진심으로 감사한다며, 이번 포스팅으로 성공 못하면 국가와 팀에 기여하고 다시 가치를 인정받겠다는 뒤끝없는 인터뷰로 화답했다. 불과 3일 지났는데 당사자들끼리는 별 감정이 없는게 어쩌면 이거...김응용이 일부러 여론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어그로를 유발했다는 견해도 있다.[38] 어쨌든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 가는건 성사되었으니...참고로 김응용이 해태시절 하던 주특기중 하나가 일부러 심판에게 어그로를 끌어서 본인은 희생번트 퇴장된 뒤 그 사이에 교체투수에게 몸풀기를 시키는 일이였다. 기사를 읽어보고 판단은 알아서 하도록 하자.
적어도 한화 감독 맡기전에는 분명 해외진출을 지지했지만 2013년 시즌 들어서 성적이 부진하자 인터뷰들에서 류현진이 남아있을 줄 알고 류현진만 보고 왔는데 훌쩍 떠났다., 딱 1년만 남기를 원했다.라는 발언들을 하면서 한화 감독을 맡은 후에는 류현진의 해외진출을 진심으로 원치 않았음을 증명하였다. 감독 입장에선 팀의 에이스가 빠져나갔으니 더더욱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5.1.2. 김주찬 논란

FA 우선협상기간 마지막날인 11월 16일 "김주찬은 50억 가치가 있는 선수"란 인터뷰를 했다. 타팀의 FA와 접촉이 금지되는 우선협상 기간중에 협상 카드를 제시한 편법이라는 의견을 가진 야구팬들과 이택근의 50억 원 계약 이후 FA선수들에게 너무 거품이 낀게 아니냐는 불만을 가지고 김주찬의 협상을 지켜보던 야구팬들 양쪽에게 폭풍같은 까임을 받았는데, KIA 타이거즈가 김주찬에게 진짜 50억 원을 줘버렸다.
졸지에 롯데는 타선 누수가 심각해졌고, KIA는 2013년 FA(이용규, 윤석민)가 있는데 50억 원이란 엄청난 거금을 써서, 자금 운용에 지장이 생길테고, 뜬금없이 중견수는 강동우가 나이도 많은데 가장 잘치는 거 같다며, 강동우를 기용할 것을 내비쳤다. '애초에 김주찬을 영입할 생각이 있긴 했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러나 2013 시즌 돌입하고 김주찬은 50억 가치를 하는 듯했다. 후에 김응용은 인터뷰에서 김주찬을 영입하고 싶었다는 언급을 하였지만 궁색한 변명처럼 여겨졌다.

다른 부분들은 김주찬 항목 참고.

5.1.3. 트레이드 논란

장성호를 롯데와 트레이드 하면서 받아온 선수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라 한화팬들의 멘탈을 붕괴시키는 중. 물론, 장성호가 한화에서 좀 성적이 안 좋아서 팀 정리겸 트레이드를 시킬수야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장성호 정도급의 선수를 내주면서 받아온 선수라는게 꼴랑 3라운드픽 신인 1명... 그렇다고 송창현이 아마에서 성적이 좋았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개밥신보다 더 기대가 안 될 정도라 한화팬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송창현이 2013년에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고 후반기에는 실질적인 한화 에이스 역할을 하면서 이 트레이드는 운영은 개판일지언정 선수보는 눈은 죽지 않은 김응룡감독의 한수로 평가받고 있다.

5.2. 2013 시즌

한화 팬들은 과거 명장이었으나 오랜만에 복귀이후 커리어 다 까먹는 흑역사 감독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우려했지만, 결국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그래도 V10을 이룩한 명장이기에 시즌 전까지만 해도 기대가 컸다. 김응용 특유의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장악하여 프로근성이 없는 선수들의 마인드를 재무장시키고 선수를 재발굴해내어 착실한 리빌딩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였으나...

개막 후 13연패로 한국프로야구 개막 최다연패 기록인 2003 롯데의 12연패를 깨면서 야구 인생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한화 이글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침체되어 왔던 팀이지만 작년의 나쁜 성적보다도 더 밑으로 내려간 초반 성적을 냈기에 옹호여론이 거의 사라지는 추세, 거기에 작년 후반기 한용덕 감독대행의 팀 성적과 비교되고 비판받는 상황. 사실 김응용 감독이 부임하고 팀을 4강으로 이끌겠다고 했지만 침체된 팀 상황을 구할 마땅한 대안을 남기지 못했다. 심지어 13연패째를 기록한 LG와의 삼연전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투수 선발기용과 교체로 빈축을 샀다.

그래도 첫 13연패 기간 동안은 나름의 옹호가 있었다. 한화는 작년에도 꼴지였고 팀의 주축이던 류현진메이저리그로 떠난 이상 전력이 약화된 것이 자명하니 아무리 훌륭한 감독이라도 한계가 있다는 것. 문제는 13연패를 끊어낸 이후에도 상황이 좋아지기는 커녕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것은 투수운용으로 선발로 나왔던 투수가 다음날 불펜으로 나오고 전날 불펜으로 출격했던 투수가 다음날 선발로 나오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쌍팔년도 야구가 계속되고 있다. 연패 막바지부터 시작된 이러한 투수운용에 비판에 목소리가 나왔으나 김응용 본인이 연패만 끊고나서 정상적인 운용으로 돌리겠다고 발언했기에 일단은 지켜보는 분위기. 하지만 연패가 끊기고도 운영이 정상화 되기는 커녕 더 심각해져서 유창식의 경우 4월 26일부터 5월 3일까지 8일간 선발 1회, 구원 4회로 무려 5회를 등판했고 그 다음날인 5월 4일은 선발로 등판할 예정이다. 또한 송창식의 경우 혹사를 당하고 있는 와중에 6점차 리드상황에 등판하는 등. 상식이 있는 야구팬이라면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투수운용과 혹사를 반복하고 있다. 거기다 야수진도 김태균, 최진행, 이대수 등을 빼면 노답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한승택이나 하주석같은 신진급 선수들도 성장세가 더딘 편.

리빌딩하라고 불러온 감독이 유망주 팔을 갈아넣고, 겨우 재활을 마치고 기적적으로 복귀한 투수를 굴려대고 있으니 한화팬은 환장할 지경. 투수를 갈아넣어서 4강 싸움이라도 해보는 상황이라면 옹호의 여지라도 있겠으나그래도 옹호는 안 되지 이러한 투수혹사 하에서도 한화의 성적은 5월 3일 현재 9위. NC와 함께 치열한 꼴찌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NC는 발전하는 모습이 지속적으로 보이는 팀이지만 한화는 끝없이 떨어지고 있다.

시즌 초반에는 대체로 '아무리 명장이라지만 이미 10여년전에 한 번 감독을 은퇴했던 사람이고 그 때문에 현대 야구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과 '현재의 한화 이글스는 몇 년간 체계적으로 리빌딩을 했어야 했다는 점에서 서로 궁합이 맞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5월로 접어든 현재는 그딴 거 필요없고 폭발 직전. 한화팬이 상주한 커뮤니티는 분노와 자학, 쌍욕으로 도배가 되고 있고 야구계의 큰어른이라 쉬쉬하던 언론도 슬금슬금 비판기사를 내놓고 있다.

한화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킬인식을 뛰어넘어 감히 넘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의 이름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39]

그나마 우호적이었던 타팀 팬들 역시 5월에 접어들며 김응용 성토에 동참하는 분위기. 되려 '우리 팀이었으면 벌써 버스를 뒤집든 불을 지르든 청문회를 열든 했을텐데 대체 왜 아직도 보고만 있냐'고 답답해 하는 분위기다. 그나마 최후의 옹호세력이었던 KIA팬들마저 실드 치기는 커녕 동참해서 열심히 까고 있다. 호의적이던 언론조차 슬금슬금 비판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과거 업적마저 다 소멸할 지경.

초반에는 감을 잃었다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대세였으나 되려 이 기회로 과거 김응용의 운용이 기록지에서 되살아나는 현상이 발생. 김응용은 과거에도 그랬다거나 예전 임창용 갈아넣던거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라는 등의 발언이 나오며 감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이 것이 김응용의 원래 스타일이 아니냐는 의심이라고 적고 확신이라고 읽는이 팽배하고 있다.

로테이션 파괴, 송창식 등 필승조를 집중적으로 조져 5월부터 퍼지게 만드는 혹사, 위장선발 등 쌍팔년도 투수운영, 성공률이 극단적으로 낮은 얼척없는 작전 구사, 공개적인 선수 디스에 이어 그날 경기를 복기해도 모자른 시간에 자팀 경기가 부끄러워서 드라마나 본다는 인터뷰로 백골퍼를 뛰어넘는 크보 최악의 막장 감독 인증을 했다. 본인 스스로 이미 구단 안에서 잔혹사를 찍는 중. 한화잔혹사-팬과의 전쟁

그나마 후반기에는 나아졌다지만...과연 리빌딩의 초석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두고 봐야 알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김응용/2013년 항목 참조.

5.3. 2014 시즌

결국 올해도 최하위.
순위 급상승은 아니어도 발전의 기미라도 보였으면 했다.
2년간의 운영을 모두 본 입장에서 쉴드 칠 구석은

단 한 군데도 없음.


시즌 전 두 명의 국가대표선수 정근우이용규를 FA 영입했지만, 정근우만이 고군분투했을 뿐 이용규는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응용의 강권으로 출전을 이어가다 부상이 더욱 심화되어 이듬해를 기약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불펜 운영은 작년 송창식이 3명으로 늘어난 수준. 안영명, 박정진, 윤규진이 노예 역할을 전담하게 되었다.

이렇듯 최악의 운영, 선수 혹사, 연속 꼴찌,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오욕 속에 떠나게 되었다. 지난 2년간 한화야구가 창피해서 리뷰를 안보고 그 시간에 등산을 하거나 드라마를 본다는 발언을 하는 등 숱한 구설수로 야구팬들의 분노를 샀던 그는 한화를 떠나며 마지막까지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고, 이는 노장에 대한 예우로 좋게 작별하려던 일부 한화팬들의 마지막 남은 존중심까지 잃게했다. 김재박은 그래도 기본적으로 팀에 대한 애정이라도 있었지

김응용/2014년 항목으로.

5.4. 총평

한화도 망하고 김응룡도 망했다.

2012년 당시 김응용이 한화 감독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째 한대화의 한화 감독 총평과 서두가 비슷하다 당시 상황과 언론 보도를 통해 추정해볼때, 김응용이 한화 감독에 부임한 것은 매우 즉흥적인 결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성근을 영입하려 했으나 한화 프런트가 통수를 쳐서 물거품이 되었고, 급하게 회장님 지시로 김응용을 영입한 것. 김성근은 결국 2년 뒤에 오게 되는데...

그 당시 김응용은 삼성 라이온즈의 사장직에서 물러났는데 모 TV 프로그램승승장구에 출연하여 "아직도 감독으로 현장에서 뛰고 싶다" 라는 의사를 밝혔던 상태. 설마하니 TV 프로 한번 보고 감독시켜 줄 정도로 막장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만(...) 어쨌든 김응용의 현직 복귀 의사를 접한 구단주가 "이왕이면 이름값이 높은 김응용에게 맡기자!"라고 결정했다는 것.

그러나 21세기에 이런 식의 주먹구구는 먹히지 않았다.

부임 초창기부터 김응용과 한화 이글스의 궁합이 잘 맞을 것이라 본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한화 프런트의 실무진 역시 구단주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불안했던 것인지, 김응용의 기본 계약 기간을 비교적 짧은 2년으로 묶는 데 성공. 덕분에 김응용의 레임덕이 매우 빠르게 찾아왔다.

한화에서도 김응룡의 팀운용 방식은 이전 해태나 삼성에서 보여준 그것과 거의 똑같았다. 선수들에게 간섭하지 않되 김응룡 본인의 권위와 카리스마로 팀을 통제하기, 전력 구성상 불필요한 선수는 가차없이 내치기, 구장 크기를 조정하여 팀 타격 성적에 빠르게 변화를 주기, 선발을 빨리 내리고 핵심 불펜에 의지하는 마운드 운용 등등.

문제는 한화구단은 선수들이 워낙 똥같아서 그런식의 처방이 먹힐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 기존의 해태나 삼성은 선수들 개개인이 우수했기 때문에 김응룡의 운영 방식이 최상의 효과를 낼 수 있었지만 한화는 그렇지 못했다. 아니, 김응룡의 팀 운영은 거의 모두 팀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구장 크기를 늘인 결과, 한화의 타자들은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장타력이 줄었다. 그렇다고 투수들이 홈런을 덜 맞았냐면 그것도 아니다(..).

불펜 운용의 경우, 특정 불펜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투수진 전체에 연쇄작용을 불러 일으켜 결국 2014년에 대참사가 일어났다. KBO 역대 최악의 팀 방어율을 기록해버린 것.

그렇다고 타선은 잘 돌아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선술했듯이 팀 장타율이 완전히 시망했으며, 김태완의 활용을 두고 매년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또한 최진행이나 이용규 등은 부상인 상황에서 무리하게 출장시켜 본인 성적도 말아먹고 팀내 보직이 꼬여 짐전체를 말아먹게 만드는 막장의 시너지를 불러오게 만들었다. 그것도 2년 연속으로(!)

외부 코치가 영입되어서 구단 내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희망 또한 그야말로 산산조각. 김응용 이전 한화 코치진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팀의 레전드 출신들이 특별한 경쟁을 거치지 않고 등용되어 경험과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는데, 김응용이 데려온 코치라고 해봤자 이종범, 이대진, 김성한 등으로 기존 한화 코치들보다 딱히 실력이나 경험 면에서 나은 자원들이 아니었다. 김성한의 경우 감독 경험이 있긴하지만 공백기가 워낙 길었고, 정작 감독 시절에도 그렇게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다. 게다가 한화 레전드 출신들은 그나마 팀의 내부 사정에 익숙하기라도 했지만, 이들은 그런 메리트조차 없었다. 덧붙여서 부임한 첫해부터 김응용이 팀의 실제 운영 권한을 코치들에게 위임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는데, 특히 실제로 팀을 지휘했던 것은 수석코치인 김성한으로 알려져 있다. 결과론이지만, 21세기 탈권위의 시대에 이런식으로 팀을 계층적으로 운영했으니 선수들이 감독 김응용을 어떤식으로 생각했을지는...

또한 장기적인 플랜 없이 팀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안승민의 경우, 2013년 초반에 뜬금없이 마무리로 기용하다가 몇 경기 거하게 말아먹자 쿨하게 군대로 보내버린다던가(..) 2013년 꼴찌가 거의 확실한데도 송창식을 무리하게 굴려서 가시적인 성적을 내야할 계약 마지막 해인 2014년에는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던가.. 라는 식.

하지만 무엇보다도 팬들이 가장 꼴보기 싫어한 것 불만을 가진 부분은 김응용의 태도였다. 7회나 8회 무렵 팀의 패배가 확실시 되면 늘 인상을 쓰며 경기 운영에서 손을 놔버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아예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뜬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당연히 경기 종료 시 감독 인터뷰도 몹시 무성의했으며, 인터뷰 불참도 밥 먹듯이 했다. 사실 김응용의 인터뷰를 따서 생성된 기사의 수가 제법 되는 것으로 볼 때 언론과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중요한 것은 팬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영 좋지 않았다는 것. 인터뷰 내용조차 팬들을 실망시키는 내용들뿐이었다.[40] 쌍팔년도도 아닌 21세기에, 이런 식의 권위주의적이고 신경질적인 모습은 팬들을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

결국 한화와 김응용은 함께 멸망했다. 한화 구단은 2년이라는 세월을 허공에 날려 버린 것도 모자라 역대 최초 2년 연속 9위(..)를 기록했으며, 김응용은 나중에 한국야구에 그런게 생긴다면 명예의 전당행이 확실한 명성높은 대감독이 말년 커리어에 자기 손으로 거하게 똥칠을 해버렸다. 덧붙여서 김응용의 후임은 라이벌이었던 김성근이 되었는데, 대대적인 환영 속에 감독 직에 부임하면서 김응용의 퇴장을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만약 현장에 복귀를 안하고 그대로 야구계의 원로로 남았으면 KS 우승 10회의 빛나는 명장으로 길이 남았겠지만

6. 인물

6.1. 야구 내적

6.1.1. 야구 지도 스타일

모든 것은 자율, 네 목숨도 자율

기본 훈련 2~3시간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알아서 훈련하라고 선수들을 풀어놓고는 농땡이치는 놈이 있나 뒤에서 감시만 했다. 도루 사인 등도 일절 내지 않고 전적으로 이종범, 김일권 등 발빠른 선수들에게 그린라이트를 줘서 맘대로 뛰게 했으며, 번트와 강공의 선택 역시 선수한테 일임했다. 다만 도루나 번트 따위를 실패하거나 실책 등을 하면 그야말로 헬 오브 지옥이 벌어졌다. 난 맘대로 하라고 했지 맘대로 망치라고 한 적은 없다 포수 사인 역시 내지 않고 전적으로 포수한테 공 배합을 시켰으나, 포수의 볼배합이 조금이라도 엉성하다 싶으면 이닝 끝난 뒤 포수 타석에 말없이 대타를 내거나, 곧바로 포수에게 원산폭격을 시켰다. 해태 시절엔 장채근의 초년시절 리드를 제대로 못한다 싶으면 곧바로 장채근 타석때 대타를 써서 빼버리고, 삼성 시절 현재윤의 머리박아 사건은 위에 있다.

선수 입장에서는 미칠 것 같은 게 '알아서 해라'라고 감독이 손 놓고 보고만 있다가 잘 안된다 싶으면 곧바로 무지막지한 갈굼과 동시에 자기 앞에서 시계를 집어던지고, 쓰레기통 걷어차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위협공세를 하니 살아남으려면 죽기살기로 알아서 해야하는 상황.

선수 조련에 있어서도 2군은 2군감독이 전담, 타격은 타격코치, 투수는 투수코치에게 전부 일임하고, 작전에 대한 전권은 수석코치에게 주었다. 해태 초기엔 김인식, 후기엔 유남호, 삼성시절엔 김종모가 작전을 냈다는 것. 직접적인 선수 지도는 하지 않고 부상 선수 관리나 1, 2군 콜업 등만 신경쓰는 매니저형 감독이다. 팀 닥터고 뭐고 없었던 80년대 초 프로야구에서는 직접 뼈가 빠진 선수들 뼈를 끼워 맞춰주고 쥐가 난 선수 다리를 풀어줬으며 찢어지거나 벌어진 상처가 난 선수들에게도 직접 약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고 했다고 승승장구에서 밝혔다.

6.1.2. 애호 선수층

스스로가 현역 시절에 장타형 내야수였기 때문인지 젊고 체격 좋고 힘 좋은 타자를 굉장히 선호한다. 몸을 키우라고 선수들에게 육식을 권장했을 정도.

또한 좌완 덕후 애호가로도 유명하다. 덩치 큰 왼손잡이라면 타자건 투수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하며, 그 덕분에 장신의 좌완투수 강영식은 아예 직접 거둬서 밥을 해먹일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로 해태 원년에는 좌타자가 한 명도 없었으며, 83년에는 송일섭, 김일환 딱 두 명이었으니... 김응용이 해태에 있을 적에 제대로 활약한 왼손 투수 역시 김정수신동수 정도 뿐이다. 한화에 온 계기도 류현진이 한화에 있어서라고 스스로 말했을 정도. 정작 류현진은 포스팅으로 메이저리그로 건너가버리자 와서도 가장 먼저 한 일이 장성호를 보내고 송창현을 데려왔고,둘 다 왼손잡인데? 직접 미국에 가서 좌완 다나 이브랜드를 데려왔다.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자 은퇴를 불사하겠다며 해태행을 거부한 양준혁을 팀으로 데려오기 위해 애지중지 달래며 1년 후에는 다른 팀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를 지켰다. 이후 삼성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강영식을 삼성으로 데리고 왔으며, 구단 프런트를 설득해 양준혁을 도로 삼성에 돌아오게 했다. 전성기의 해태에서 왼손잡이 선수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었기 때문에 더 왼손에 민감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해태 시절에도 기회만 되면 왼손 선수들을 데려왔으나 정작 제대로 활약한 선수가 적다. 또 좌타 거포 김기태를 데려오기 위해서 생전 전화를 안하던 당시 쌍방울 김성근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엄청난 제안'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결국 성사되지 못했기에 제안의 내용은 불명. 그러면서 정작 김기태가 삼성에 있었을 땐 쓰지도 않고 SK로 쫒아냈다. 김기태는 그 복수로 12년 뒤 김응용에게 개막전 13연패를 안겨준다.

결국 해태 말기에 임창용이 팔려갈 때 양준혁을 얻어내며 한을 풀었다. 그 덕에 양준혁, 장성호, 용병이였던 트레이시 샌더스를 포함해서 라인업의 반 이상이 좌타자로 도배가 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한편 출루율보다 타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타율이 낮고 출루율이 높은 타자에 대해선 평가가 짜다. 대표적인 타자가 정신병자 박한이또라이 장성호. [41]

6.1.3. 노력하는 유망주, 무명 선수들을 향한 애정

김응용 감독을 거친 선수들이 하나같이 고마워 하는 부분. 해태감독시절부터 노력하는 무명선수들에게 아낌없는 후원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한화감독시절 팬들이 엄청난 욕을 하면서도 상당수의 팬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자, 일부 빠삭한 팬들에게만 알려져있는 사실인데 이태양을 비롯해 돈없는 신인선수, 2군선수들이 비활동기간 제주도에 가서 개인훈련을 할 수 있게 재정적 후원을 해 준 것이 바로 김응용감독이다.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던 2년간 비활동시즌 훈련비용을 사비로 투자한 것만도 거의 1억에 육박한다고.

사실 한화에서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삼성시절에도 채태인, 조동찬 등에게 용돈을 주며 사비를 들여 키웠다.물론 말 안들으면 복날에 X잡듯 패긴 했다만 또한 해태시절에도 강영식 등 유망주, 무명선수들에게 고기를 사주며 영양을 보충시켜주는 등 노력하는 선수에게는 아낌없이 투자했고 이는 이종범의 무릎팍도사편에서 잘 나타나있다.물론 먹기만 하고 훈련안하고 놀면 가차없이 빠따질

또한 용인에 사비를 털어 리틀야구장을 건립, 유소년 야구를 지원하는 것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김응용 감독의 업적 중 하나다.

6.2. 야구 외적

6.2.1. 세력싸움 균형의 조율사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프런트와 굉장히 잘 지내는 감독으로 꼽힌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부임하는 팀마다 뒤끝이 안좋은 김성근이나 백인천과는 정 반대. 어떤 야구팬들은 이를 김응용의 가장 큰 강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프런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프런트와 원수지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방향대로 팀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분명히 대단한 능력이다. 많은 감독들이 프런트와의 불화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팀을 말아먹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룹의 지원이 너무 없어서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었던 해태 프런트와도 말년을 제외하면 사이가 매우 좋았다. 김응용 본인도 의리를 지켜 해태가 막장화되기 이전인 90년대 중반, 자신을 거액으로 스카웃하려고 했던 다른 팀의 파격적 오퍼를 거절하여 사실상 손해를 보면서도 해태에 남았다. 저 '다른 팀'이 LG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파워블로거 박동희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롯데였다고 한다. 해태의 구단주였던 박건배 그룹회장과도 사이가 좋아서 박회장이 매번 해외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김응용에게 기념품을 사다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삼성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역대 감독을 쥐고 흔들기로 악명높았던 삼성 프런트조차 '김감독 같은분이 오시면 프런트가 정말 편하죠.'라고 김응용의 프런트 친화성을 호평했다. 이후 삼성 사장으로 선임되는데도 이런 높으신 분들과 친화적인 인품이 큰 작용을 했다. 해태 못지 않은 막장인 한화 프런트도 이런 점을 고려해서 김응용을 낙점한 것 같다.

6.2.2. 감독을 키우는 감독?

선수 육성뿐만이 아니라 지도자 육성에도 넘사벽급의 스킬을 보여주는 면이 있었다.

우선 해태 타이거즈 원년부터 활약해왔던 김성한은 1995년 은퇴 이후 해태에서 계속 김응룡 감독을 옆에서 보좌하면서 자연스럽게 김응룡의 후임자로 성장. 해태 말년 김응룡이 삼성으로 이적한 후 감독직을 이어받았고, KIA 타이거즈로 간판이 바뀐 후 뛰어난 성적을 냈다. 우승을 못 했을 뿐이지 초보 감독이 승률 6할을 2년 연속으로 찍은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그 김응룡도 2년 연속 6할 승률은 달성하지 못했다. 또한 김종모는 감독만 못 했을 뿐이지 해태와 삼성과 KIA를 오가며 수석코치 역할로 우승 2번(2002년 삼성, 2009년 KIA), 일반 코치로 우승 3번(1993년, 1996년, 1997년 해태)을 했다.

선동열의 경우 은퇴 이후엔 경기감독관 등의 명예직을 전전하다 2004년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 합류 이후 단 1년만에 김응용 감독의 후임으로 감독이 되어 삼성의 2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으며, 선동열의 후임 류중일 감독 역시 2000년 은퇴 이후 김응룡 감독이 삼성에 오자마자 코치를 시작해 우승을 맛보고 2011년 감독으로 부임한 후 정규 시즌, 한국시리즈, 아시아 시리즈 3관왕을 일궈냈으며, 양일환 투수코치 역시 2001년 김응용 감독 부임이후 삼성에 합류하자마자[42] 코치로써 우승을 맛봤다.

재미있는 사실은 선수시절 김응룡 감독 밑에 있다가 말년에 쫓겨나듯 타 팀으로 이적해서 코감독 밑에서 코치 수업을 받지 못한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폭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순철이라든가 한대화라든가 조계현이라든가...

성공사례의 공통점을 본다면 은퇴하고 갓 합류하거나 연수만 막 끝낸 풋내기 코치들이 첫 감독으로 김응룡을 모시게 되면 지도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그 팀에서 떠나도 후계자들을 통해 강팀의 면모를 최소한 2~3년은 계속 이어가게 한다는 점은 구단에게도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2012년 한화 이글스에서도 이제 막 은퇴하자마자 김응룡의 부름을 받고 한화로 온 풋내기 코치들로 이종범, 이대진이 합류했다. 과연... 하지만 이종범과 이대진은 2년동안 과연 한화에서 하는게 뭐냐는 비판을 받으며 팀 성적이 망해서 2014 시즌 후 김응용의 퇴진과 함께 모두 코치 자리를 떠났다. 미래의 감독감인 김종모,김성한 역시 스승인 김응용과 같이 커리어에 먹칠을 해서 현장복귀가 힘들어 보인다. 거기에 2013년과 2014년에는 자신의 수제자KIA 타이거즈말아먹고도 재계약을 얻어냈으나 친정팀 팬들의 분노로 자진퇴진을 하면서 이런 평가도 금이 갔다.

7. 김응룡 VS 김성근


마...으린팬들한텐 내가더 인기있지않나 시프요....VS 웃기지 말어! 1992년 6월 21일 올스타전.


깝 ㄴㄴ VS 마.....이번엔 엘지가 이기지않나 시프요.....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이기는 팀 우리팀. 2010년.퍼거슨?

2004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서 치른 현대 유니콘스와의 한국시리즈 이후로 일선에서 물러나며 감독직을 수행하지 않아서인지 2000년 후반 들어 불어난 신규 야구팬층에게는 왕년에 잘한 명감독 수준으로 인식되며 야신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감이 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포스트시즌에서 김응용 감독과 3번 붙어서 이겨본 적이 한 번도 없다.[43] 애초에 김성근 감독은 2002년 전까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해본 적도 없었다. 다만 이것이 김응용 감독이 김성근 감독보다 뛰어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김응용 감독이 당대의 강팀을 맡아 우승을 거머쥐었다면 김성근 감독은 언제나 약팀을 맡아 추스려서 포스트시즌에 올라갔다. 과장 보태서 기관총을 든 사람과 새총을 든 사람이 싸워서 새총을 든 사람이 졌다고 기관총을 든 사람이 더 뛰어난 사격 실력을 가졌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한편 2013년 한화 이글스를 맡아 보여준 운영은 많은 사람들에게 팀을 갉아먹는 쌍팔년도식 후진 운영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2004년 이후 현장에 물러나 있었던 것이 가장 크다. 김성근 감독의 야구 스타일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려도 현대야구에 적응하고 자신을 바꾸어 가며 재임기간 동안 한국 야구의 트렌드를 이끈것과는 대조적이다.

무엇보다 김성근 감독과 다르게 김응용 감독이 여태껏 약한 팀을 맡아 리빌딩해본 경험이 적다. 부임 전 6팀 중 4위 찍던 해태를 바로 1위로 끌어올리긴 했으나 이는 30년이나 된 일이라 현 한화 이글스에 바로 적용하긴 어려우며, 현장경험도 9년동안 없었던 것을 빼더라도 리빌딩이 필요한 한화랑 맞지 않단 의견도 좀 있었다.

팬들에 의해 자주 비교 당하는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의 사이는 꽤 좋은 듯하며 김성근도 자서전이나 인터뷰 등에서 김응용을 인정한다는 류의 발언을 자주 했다. 직언을 잘하는 김성근의 성격을 생각할때 지어내는 말은 아닌듯. 거기에 2013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 동안 특별 편성 된 김성근의 돌직구에서 한화에 대한 비평이 나왔을때 김응용 감독에 대해선 일체의 언급이 없었다는 점만 봐도 확실히 김응용 감독을 존경하거나 혹은 높게 평가하거나 둘 중 하나 인 듯. 혹은 본인도 혹사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해서 그런걸지도..[44][45]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둘이 한솥밥을 먹은적도 있다. 1993년에는 김성근 감독이 해태 타이거즈의 2군 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 이때 김성근은 김응용의 지도술을 한수 배우기 위해 직접 자청해 갔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어쨌든간에 1990년대만 해도 해도 김성근의 커리어는 김응용에 비해 보잘것 없었다. 물론 2000년대 들어서는 김응용이 은퇴하고 김성근이 대성하면서 이 평가는 미묘하게 바뀐다. 아무래도 해태의 포스를 기억하는 올드팬들은 김응용의 손을 들어주지만, 2000년대 후반에 유입된 프로야구 신규팬들은 SK의 포스가 워낙 강렬한지라...

7.1. 강압적으로 선수들을 다루는 후진야구?

김성근 감독은 일본에서 선진야구를 배워 세밀한 투수운용, 기민한 작전 지시 등으로 당시 체계적인 지도자 수업을 받지 못한 다른 감독들보다 한 수 위의 야구를 선보인 반면 김응용 감독은 수틀리면 선수 패고 군대처럼 강압적으로 선수들을 굴리는 악바리 야구...라는 말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김응용 감독은 그전까지 실업야구 감독을 하다가 1981년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갔다. 대한야구협회에서 보내준 일종의 지도자 해외연수로 거기서 자율 야구를 도입해서 김영덕, 김성근 등의 재일야구 지도자들의 대척점에 섰다. 김성근이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으로 와있을 때에는 난 2시간이 지나면 무슨 연습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스프링캠프에서 매일 수비위주로 오전 팀훈련만 시키고 김성근 감독의 추가훈련을 막았다고 한다. 당시 해태는 전지훈련은 물론 평소에도 훈련시간이 타팀의 절반수준이라 트레이드돼서 온 선수들은 벌써 끝나요?? 하면서 놀라기도 했단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를 전성기 해태가 소수의 인원으로도 운용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훈련으로 인한 체력소모가 적었기에 그만큼 경기에 집중할 수 있다고 본 것.

거기다가 경기에선 희생번트나 작전 지시를 거의 내리지 않았고 작전을 내도 선두타자가 나갔을 경우 치고 달리기 정도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어쩌다가 한 번 나오는 수준이었다. 기습번트나 도루 등은 대부분 선수 개개인의 판단에 맡겼다. 초지일관 강공에 1년 내내 타순도 고정이었다. 어찌 보면 1994년 이광환 감독보다 훨씬 더 이전에 자율야구를 시작한 감독이다.

다만 투수 운영은 전형적인 옛날 야구로 감독 초기에는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는 혹사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상윤은 1983년 혹사를 당하고 그 해 우승한 뒤 2년간 개점휴업 상태였다가 1986년에나 부활하게 된다. 그렇지만 프로야구 초창기 대부분의 에이스급 투수들이 혹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장명부의 혹사는 너무나 유명하고, 최동원, 박철순, 김시진 등의 초에이스들도 혹사로 20대 후반에 맛이 간 경우가 많았다. 최근 투수 수명이 30대 후반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수명이 10년은 단축된 셈.

이후 해태의 투수층이 두터워지자 김응용의 투수운용법이 진화하게 된다. 최고의 투수를 마무리로 돌리면서 셋업맨들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해태에선 선동렬임창용을 특급 마무리로 뒀고 한때는 이대진도 마무리를 했다. 삼성에선 노장진중무리로 무지막지하게 굴렸다. 강력한 마무리를 박아두고 방수원이나 송유석을 앞서 등판시키는 등 현대 야구의 셋업맨이라 할 수 있는 투수 기용을 일찍부터 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투수 자원이 많았던 80년대 해태 시절에 김대현, 동철, 이광우 등의 두터운 중간계투진이 끝판왕 선동열에게 경기를 넘겨주는 역할을 했다. 홀드 기록이 뒤늦게 시작되어 당시 해태 중간계투진의 활약이 기록상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쉬운 부분. [46]

한편 임창용의 경우 애니콜이 비인간적 혹사를 당한 시기는 97~99년인데 97년과 98년은 김응용 감독 밑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시기다. 그런데 사실 임창용의 최고 혹사기는 서정환 시절로, 김응용 때보다 훨씬 심했다. 김응용이 삼성에 부임한 이후인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임창용을 선발로 기용했고 2004시즌 마무리로 복귀시킨 다음엔 61경기 67이닝으로 철저히 1이닝 마무리로 기용했다.

구타 문제는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주축 선수들이 대부분 군산상고나 광주제일고 등 학벌로 연결되어 있었던 까닭에 학교 야구부에 있던 악습이 그대로 프로구단으로 옮겨온 것이 한 원인이다. 해태에서 이 악습을 제일 마지막으로 이어받은게 바로 이호성. 이호성이 은퇴하고 이종범이 최고참이 되면서 최소한 선수들끼리의 구타는 사라졌다. 물론 김응용 본인도 종종 폭력을 통해 선수들을 휘어잡기도 했으나, 실력만 확실하다면 사생활 간섭을 하지 않았고 일부 사정이 어려운 선수들을 도와주는 등 무조건 채찍질만으로 선수를 짓누른 건 아니다. 또한 시대적인 문제로 체계적인 지도자 교육을 받지 못한 이유도 존재한다.

사실 제대로 구타 문제를 파고 들어간다면 여기에서 자유로운 80년대 감독은 정말 몇 명 없다. 김성근감독도 폭력 문제라면 전과가 꽤 많다. 자기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했다고 싸대기를 날리거나, 인사 안했다고 따로 불러서 때렸다거나, 어떤 투수를 조련할때 투수 옆에서서제구가 안될때마다 한 방씩 갈겼다거나, 밤에 후배한테 술 사오라고 한 죄로 불러내서 싸대기를 20대 때렸다던지. 훗날 잘 되라는 의미에서 죄의식 없이 때렸고 결과는 좋게 나왔지만, 요즘 이런 식으로 선수 훈련시키면 경질 이전에 폭행죄로 감옥 들어간다. 설마 요새도 그런 지도자는 없겠지 김성한21세기에 그랬다가 한동안 프로야구계에서 활동을 못했다. 특히 이진영의 경우 KBS 베이스볼 야!에서 직접 증언했다. "당시 선수들이 훈련중에 김성근 감독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계시길래 그냥 지나쳤는데 나중에 불러서 그 때 왜 인사 안 했냐고 때리셨다."

이외에도 술 취해서 선수하고 코치 팬 김동엽이나, 자기가 싫어하는 별명을 말했다고 타팀 선수 귀싸대기를 날린 김영덕[47]의 사례나, 투수가 지시한 공을 안 던졌다고 때리고 쓰러진 백인천 등등 따지고 보면 한도 끝도 없다. 김응용이 이들보다 더한 '폭력감독'으로 찍힌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잘렸다 복귀했다를 반복하는 동안 너무나 오래 재직했고, 해태라는 팀이 원래 주목을 받는 팀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즌 경기중에도 판정 문제로 심판에게 다가가 니미 시X 하면서 멱살을 잡고 수십 차례 퇴장을 당해 역대 감독 퇴장 1위를 기록...이런 기록을 좋다고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이래서 강경한 인상이 두드러졌기 때문일 뿐이다. 오죽하면 '나도 김성근이 같이 조곤조곤 약올리면서 말해야 하는데, 욕부터 나와서 퇴장당한다'고 하소연을 다 하셨을까...

그리고 손찌검없는 '맘좋은 아저씨' 같은 감독들이 팀을 맡고 말아먹은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유백만이나 정동진, 그리고 우용득, 김용희 같은 감독들은 손찌검 안 하는 인격자로 유명했지만, 팀 성적은 시망이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상당히 시간 지난 후에도 프로의식이 정착되질 않아서 선수들이 무책임하게 움직이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선발등판 전날 술 퍼마신 일을 선동열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하지만, 요즘 그랬다가는 당장 2군행이다. 이렇게 프로의식이 없었던 그 당시에 손찌검은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한마디로 2000년대가 아니라 그 1980년대니까 그랬다는 말.

7.2. 선수빨로 경력을 쌓은 무능력한 감독?

일단 덕을 많이 보긴 했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는 선수층이랄 게 없었다. 장명부를 앞세워 2위까지 치고 올라간 삼미 슈퍼스타즈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약팀도 특급 선수 한둘만 있으면 성적을 낼수 있었다. 또한 80년대 중반까지는 무제한 1차 지명이 가능했고 고졸 선수들은 자유계약으로 무제한 영입이 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첫 해 6팀중 4위이긴 했지만 팀 홈런, 도루에서 1위를 차지한 잠재력있는 팀이었고,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던 전라도 팜을 끼고 있었다.[48] 삼성 시절이야 말할것도 없고. 적어도 김응용은 2012년까지 한화 이글스같은 약팀은 맡아본 적이 없었다.

다만 아무리 82년 해태가 잠재력이 있었으며 팜이 괜찮았다 한들, 6팀중 4위 찍던 팀을 1위로 만든건 엄연한 사실이며, 이런 이유로 "XX는 우승할 팀"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우승 못할 팀이 없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능력있는 선수들을 관리하는 것도 감독 능력이고 1996, 1997년 우승 당시의 해태 전력은 선동열, 김성한, 한대화 등의 주력선수들이 해외로 이적하거나 은퇴, 트레이드 등으로 빠지면서 시즌 전까지 중하위권 전력으로 평가받던 상황이었기에 무조건 선수빨이라고 폄하할 근거는 마땅히 없다. 진짜 무능하다면 좋은 팀에 있어도 시원찮을 테니까.

하지만 20년간의 장기집권은 계속되는 선수단 교체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해태타이거즈의 3루수는 김종모->이순철->한대화->홍현우로 전환되는데 이 전환시기가 딱딱 맞아 떨어졌다는 것. 20년간의 장기집권이 있을 수 있던 이유도 바로 이와 같다.

본인이 재능을 알아보고 데려온 선수도 꽤 있는 편. 한대화의 경우 OB베어스에서 김성근 감독에게 버려지다시피 한 것을 김응용 감독이 거둬[49] 골든글러브 3루수로 만들어냈고, 이순철의 경우 김응용 감독이 직접 숙소에서 훈련장까지 차를 태워서 바래다줬을 정도로 애정을 쏟아 키웠고 1986년 한대화가 들어오자 이순철의 포지션을 외아수로 변경해 자연스럽게 김일권을 대체했다.[50] 또한 신고선수로 들어와 배팅볼 투수를 하고 있던 송유석을 미들맨으로 써서 대성했다.[51]

그러나 한화 이글스에서는 아무런 성과가 없어서 팜을 육성하고 약팀을 키울 수 있는 감독인지는 의문이다. 이는 똑같이 옛날 감독 소리를 듣지만 삼성, 현대에게 약탈당해 처참한 지경이었던 쌍방울 레이더스를 인수하여 창단한 SK 와이번스를 이끌고 리빌딩을 훌룡하게 수행한 강병철과 비교된다.[52]

다만, 김응룡 감독이 취임하고서 한화 이글스는 2군 구장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모기업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김응룡 감독 취임 이후 구단 사장 경력을 통한 구단 프런트의 지원을 이끌어 내기 시작했고, 김인식, 한대화시절에 빛을 보지 못했던 선수들이 등용되기 시작했다.
2010년에 입단해 2012년까지 1군기록이라고는 1경기 방어율 13.50[53]인 이태양이 터질꺼라고 공언하고 13년부터 올려다 썼고, 14년부터 터지는 기미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송창현의 경우 아마추어 시절에도 폭투와 제구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음에도 13년 후반기에 엄청난 성적을 보여주었고, 현재에도 어느정도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유창식이 13년까지 기량미달의 우주방어율을 찍고 있었으며 트레이드 논의까지 됬었으나 14년시즌에도 선발로 사용, 작년에 비해 상당부분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54]
개막전 포수로 언급되었던 한승택은 결국 군입대, 이후 이용규의 보상선수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게 되었으나 경찰청에서 2014년 5월 현재 .360의 고타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2차드래프트로 영입한 최윤석이 경찰청에서 .327을 치고 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55]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 2011년에 존재만으로 한화의 암흑기라 보았던 김회성을 14시즌 주력선수로 꼽았을때 많은 한화팬들이 충격과 공포에 떨었으나 입대전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보면 선수 운용면은 미심쩍으나 선수를 보는 눈은 여전한것으로 보인다.

김응룡 재임 후 14년 선수단을 보면 투수진이나 야수진이 12년 한화에 비해 상당부분 교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평균연령을 보아도 신생팀인 NC 다이노스와 비교해보아도 상당히 젊다. 투수진의 경우 노장이라곤 박정진하나에 불과하며 야수진의 경우 최선참이 30대 중반, 대부분 군필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한화 이글스의 리빌딩 여부는 임기 만료후 3년정도 뒤에 확실히 판단 할 수 있는 부분이라 현재 언급하기엔 시기상조인 부분이 있으나, 선수구성 부분에서 상당부분 달라졌다는 것을 부정하긴 힘들다.

7.3. 김성근은 아웃사이더고 김응용은 성골?

김성근은 당시 재일동포란 이유로 갖은 모욕을 겪은 아웃사이더라고 하지만, 당시 야구계에 재일교포가 김성근 혼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김영덕, 송재박, 김일융, 장명부 모두가 재일교포 출신으로 한국야구 무대에서 뛰었지만 실력이 있는 한 그다지 차별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실력이 떨어지는 재일교포들이 선진야구를 습득했다는 이유로 주전을 꿰차는 경우도 있었으니, 우대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56][57]

김일융 같은 경우는 일본에 돌아가서 '한국에서 타국인 취급을 받아 서운했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그가 한국어를 못했던 탓이 크다. 그는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마칠 때까지 한국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오히려 팀의 많은 배려를 받아 시즌 중에도 일본을 오갈 수 있었다. 정작 김일융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할 당시 5천 5백만엔(당시 한화 2억원 정도)를 받았으며 차량+숙소등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재일교포 선수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김영덕 감독은 지금은 없어진 스포츠 2.0이라는 잡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재일교포로서 소외감을 느낀 경우는 있었다고 말했지만, 그 자신이 야구선수나 지도자로서 차별받은 정황은 없다.

예로부터 인맥과 지연을 중시한 한국에서도 야구계는 비교적 실력 위주로 인물을 평가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지역색이나 학벌의 폐해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김성근도 차별받은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별로 없다. 실업야구 시절 김성근이 기업은행 실업팀 창단 멤버로 들어갔던 데 반해 김응용은 농협 입단이 좌절되고 한국운수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겨우 야구를 시작했다. 또한 김성근은 실업야구선수 시절 국가대표로 발탁되었으며, 1970년대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 코치로 우승을 이뤄 체육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당시 김응용은 김영덕, 김성근 등에 밀려 1977년도까지 한 번도 국가대표 감독이나 코치를 해 본 적이 없었고, 1977년 나카라과 야구 월드컵 때 감독을 해본 게 처음이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처음 출범했을 때도 김영덕, 김성근OB 베어스의 감독과 투수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했지만, 당시 미국에서 연수중이었던 김응용은 언제든 불러만 주면 갈 생각으로 짐을 쌌으나 어떤 팀에서도 연락이 없어서 자존심이 매우 상했다고 한다. 프로야구 출범식을 할 당시 몰래 귀국해서 보고 갔을 정도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고 한다.[58] 나, 나도! 나도 감독 할꺼야!!!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83년 해태가 불미스런 일로 김동엽 감독을 해임하기 전까지는 불러주는 팀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김응용은 실향민이다. 출신지를 가지고 성골이네 진골이네 언급할 게 없다. 게다가 위에서 보이듯이 연습생 출신으로, 지도자로나 선수로서나 그렇게 차별 많이 받았다는 재일교포 출신들보다 경력이 뒤쳐졌었다.

다만, 김응룡에 비해 김성근 감독이 아웃사이더 기질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김성근 감독이 SK에서 왕조를 구축할 무렵 언론에서 김성근의 스몰볼을 비판하는 기사를 쏟아내었다. 1121을 이룬 팀의 방식을 스몰볼이란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비판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정작 저 4년중 2년은 팀홈런 1위를 찍었다 지금의 김성근 감독은 감독으로서 존중받는 위치라 할 수 있으나 SK에서 짤리기 이전 김성근 감독은 원로로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기보다는 공공의 적에 가까웠다.[59]

반대로 김응룡 감독의 경우 한화 이글스에서 이해할 수 없는 운영을 보여줬지만 제대로 된 비판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만약 김성근 감독이 지금 한화에서 이와같은 운영과 성적을 보여주었다면 언론이 지금처럼 침묵하고 있을까? 1121을 이루었던 시절에도 프로야구 흥행을 망치는 스몰볼을 지양해야 한다는 식으로 비판이 들끓었던 김성근 감독이니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허나, 2015년 한화이글스에 복귀하고 김성근의 불펜진이 투구이닝 1위에 로테이션 붕괴라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는데 김응룡은 혹사고 김성근은 총력전이라는 특정 팬덤의 쉴드가 계속되고 있다.

7.4. 야신의 라이벌?

국내 통산 승수 1위 감독 김응용과 통산 승수 2위의 김성근을 두고 언론에서는 둘에 대해 라이벌 기믹을 붙여 잘 이용했었다. 하지만 두 감독은 서로를 라이벌로 보는 것에 대해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라이벌은 무슨. 라이벌 뜻이 뭐야? 뭐냐구? 서로 이기고 지는 사이 아냐? 나는 김성근 감독한테 한 번도 지지 않았어. 내가 현역으로 있을 때 김성근 감독이 우승한 적 있어? 그런데 무슨 라이벌이야. 지난번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나가서 그 얘기를 했더니 편집해서 내보내지 않지 뭐야.


실제 스포츠 한국에서 김응용이 직접 한 말이었다. 실제로 김성근은 포스트시즌에서 김응용을 만나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87년 플레이오프에서 OB 베어스를 맡았던 김성근에게 3:2로 이겼고, 89년 태평양 돌핀스를 맡은 김성근을 역시 플레이오프에서 3:0으로 잡았다. 그리고 대망의 2002 한국시리즈에서도 4:2로 승리했다.

김성근 역시 김응용의 라이벌이란 말을 탐탁찮게 여긴다. 오히려 해태 시절 김응용에게 열등감과 질투가 가득했으며, 라이벌 관계에 대한 질문에 '맨날 지기만 했는데 무슨 라이벌이냐'며 인하대 강연에서 밝힌 바 있다. 각각 원년과 이듬해에 프로야구판에 뛰어들어 통산 1위와 2위의 경력을 올린 명장들이지만 서로에 대한 관계에 대해 라이벌이니 뭐니 하는것은 당사자가 아닌 기자와 야구팬들만의 생각인 듯하다.

2000년대 중반 야구 열기가 뜨거워진 시기(올림픽 이후)와 맞물려 SK 왕조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야신의 이미지를 얻은 김성근 감독의 평가가 높긴 하나 경력상으로는 V10을 이룬 김응용 감독과 라이벌로 놓기에 조금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제반 환경의 차이나 쌍방울의 기적 등을 고려하면 김성근 감독과 비견할 만한 감독은 김영덕 감독이지 우승횟수에서 세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김응용 감독이 아니다. 김영덕 감독은 김성근 감독보다 우승횟수가 하나 모자라지만 프리미엄으로 칠 만한 원년 우승을 이뤘으며 소속을 바꿔가며 팀을 우승시킨 유이한 감독, 팀승률 7할을 두 번 달성한 유일한 감독이다. 또한 쌍방울 못지 않게 최하위권에서 놀던 빙그레 이글스를 굴지의 강팀으로 환골탈태시킨 업적이 있다. 쌍방울이 2년간 반짝했다가 모기업 쌍방울의 부도 여파로 인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주축 선수들을 팔아치운 끝에 순식간에 하위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해체를 하고 만 것과는 달리 김영덕 감독이 강팀으로 탈바꿈시킨 빙그레는 수 년간 최상위권의 전력을 유지하며 한국시리즈에 네 번 진출했고, 이러한 성과가 축적되어 99년의 우승으로 이어졌다.

논란을 길게 끌 것 없이 위의 인터뷰에서 김응용 감독은 김성근 감독이 자신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고 있으며, 김성근 감독 또한 김응용에게 열등감을 항상 느껴왔다고 자인하고 있다. 기록에서 큰 차이가 있고 당사자들도 인정하는 바를 굳이 삼자가 해석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 가치판단을 끼워넣어 우열을 가리려 할 필요는 없을 것.

사실 김응용 하면 대개 해태 V9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고, 김성근 하면 쌍방울의 기적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애초에 대다수의 야구팬들이 이들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 자체가 다른 장르의 것이다. 그러면 왕조 건설 VS 기적의 승부사 중에 뭐가 대단한가 우열을 가리자...는 것이 다시 논쟁의 떡밥이 되지만 김성근 감독은 그와는 또 다른 상황에서 성공을 거둔 적이 있었다. 바로 07-08-10 3회 우승에 빛나는 SK 왕조의 건설. 이제 한화로 김응룡 감독이 한국시리즈 우승시키면 김성근 감독은 또 질 수 있다! 한편 널리 알려져 있는 '선수 17명 1.2군 코치 3명으로 우승시킨 83해태의 기적'은 사실이 아니다. 박동희와 김응용 감독의 인터뷰에서 이 말이 나오고 와전되었나, 사실 1982년 해태의 선수단은 21명이었고 김응용이 부임한 1983년 해태의 선수단은 총 27명이었다. 타팀의 선수단 역시 22~23명 수준이었다.

그래도 주요 커뮤니티에서도 김성근 감독을 현 시대에 가장 앞서나가는 명장 중 하나로 꼽는데는 주저함이 없었으나 김응용에 비한다면 손색이 있다는 것이 대다수의 평이었다. 역시나 우승 10회의 커리어에 범접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대세였으나...

2013년 4월이 되자 모든 것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김응용이 지휘봉을 맡은 한화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투수 운용과 전년도에 비해 더 하락한 수비기량, 그리고 경기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조급증을 드러내 연패를 기록하자 김응용에 대한 평가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야구 팬덤에서는 얼마 전까지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았던 김응용과 김성근의 비교가 시작되었고 주요한 떡밥으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한화 재임기에 대해서는 실드를 치지 않던 칠 꺼리가 있어야 뭐... 김응용 감독의 팬덤도 누가 더 명장인가에 관한 비교에서는 물러설 용의가 없고, 현재의 김응용 감독을 지켜보는 김성근 감독의 팬덤들 역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체로 김응용 감독의 우위라고 결정나 있던 평가가 이토록 순식간에 진흙탕 싸움이 되어버린 것은 현재의 김응용 감독이 무능한 모습을 보여준 것도 있지만, 야구를 지켜보던 팬들이 전력이 약한 팀을 끌어모으고 추스려서 우승권에 올려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해버린 것도 크다. 김성근 감독이 그동안 보여줬던 약체팀을 끌어올리는 기적은 감독의 엄청난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김응용은 이 상황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것. V10은 결코 실력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말이 이제는 V10은 결코 실력만으로 이룰 수 없다로 변질되고 있다.전 세계에서 김응룡 감독보다 우승을 많이 한 감독은 뉴욕 양키즈의 조 토레 감독 뿐이다. 뉴욕 양키즈와 해태 타이거즈의 공통점은? 실력뿐만 아니라 운빨과 선수빨이 겸비돼야 가능한 기록...[60]

이에 양측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설전을 벌이고 있는데, 김응용 감독측이 "우승 10회 깝ㄴㄴ"를 들고 나오면 김성근 감독측은 '그럼 우리나라 명장 넘버2는 김재박 ㅋ', '백골퍼도 개막 13연패는 안했음 ㅋ'을 들고나와 우승 = 명장론을 부정하고, 김응용 감독측이 '2팀에서 모두 우승 깝ㄴㄴ'를 들고 나오면 김성근 감독측은 '호남팜 해태나 100억 지른 삼성이면 내가 가도 우승 ㅋ'을 들고 나오며 댓글양상을 격화시키고 있는 중.

이렇듯 한화를 제외한 현역 시절의 김응용 감독과 김성근 감독에 대한 평가는 실로 진흙탕 싸움이라 할 만한 키배가 한창 진행중이며 아직 대세라고 할 만한 의견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와 별개로 2013년 현재의 시점에서 두 감독의 능력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과거에는 몰라도 지금은 김성근이 김응용보다 훨씬 훌륭한 감독이다'는 평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위에서 설명했듯 김성근은 현대 야구에 맞추어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어 갔지만 김응용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게 크다.[61] 그 결과적으로 김성근 감독은 커녕 현역 9구단 감독 중에서는 김응용이 최악 뒤에서 2위라는 평이 대세다. 2위인 이유는... 타어강 타어강 신나는 노래. 자세한 내용은 김응용/2013년 참고.

한편 진흙탕이 될 수 밖에 없는 까닭으로 일단 김응용에게 호의적인 대표적 팬덤이 KIA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62], 김성근에게 호의적인 대표적 팬덤이 SK 와이번스LG 트윈스다. 이 넷이 얽힌 것만 해도 이미 레알 헬게이트인데 여기에 더해 빙그레한화 이글스라든가 롯데 자이언츠의 팬들도 두 감독들과 이런저런 인연 내지 악연으로 얽혀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구단의 팬들이 다들 한 가지 분야쯤에서는 시대를 풍미했던 전력이 있는 팬덤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다. 김응룡: 안되겠어 LG 감독으로도 한 번 가야지.

반대로 전통적인 한화팬 층에게는 매우 적대적인 감독이다. 과거 해태왕조의 가장 큰 희생자가 바로 빙그레였기 때문에 그시절부터 이글스를 응원하던 사람들에게 김응룡은 언급하기도 싫어지는 이름. 그리고 그런 감독이 말년에 한화에 와서 자꾸 어딘가 삐끗삐끗 하는데 이것만큼 까기 좋은 포인트도 있을까.

더구나 2013,2014년 모두 9위를 함으로서 사실상 실패한 감독인 김응룡 바로 후임으로 김성근 감독이 한화의 10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김성근 감독이 만약 한화를 부흥시키면 두 감독은 서로 하기 싫어도 비교가 안될 수 없는 상황이다.

8. 기타

김응용 감독 참외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임창정, 고소영 주연의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 까메오로 나온 적이 있다. 극중 경기는 대부분 LG 트윈스해태 타이거즈의 경기이다 보니 특별출연한 듯. 영화 DVD의 특전영상에 김응용의 NG씬도 2컷이나 들어가있다?!

역대 야구감독 중에서 가장 높은 인지도를 얻었다 할 만하며 선동열이종범이 모두 일본에 진출하게 되자 인터뷰에서 나온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라는 명언(?)은 그 당시 최고의 유행어로 등극하며 수많은 연예인들이 김응용의 성대모사를 하기도 했다. 덕분에 철옹성같은 카리스마의 대명사였던 김응용 감독의 이미지가 "푸근한 옆집 아저씨"로 개선되기도 했다.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서 처음으로 프로야구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동메달을 획득했다. 야구 종목에서 딴 첫 메달이자 역대 국가대표팀 가운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대표팀의 금메달 다음가는 성적.

2004년 8월 5일 문학구장. 12-5로 삼성이 앞서 있던 8회 초 삼성 진갑용이 타석에 들어서려고 할 즈음, SK 덕아웃에서 느닷없이 김기태가 뛰쳐나와 백스톱 쪽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쏜살같이 삼성 덕아웃으로 달려갔다.(싸우러 간게 아니라, 삼성덕아웃 뒤치기 보려던 용병 말리러)
SK 선수들이 그 뒤를 따라 삼성 진영으로 짓쳐 들어갔다. SK 외국인 선수 세 카브레라가 김응룡 감독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이 포착됐으나. 김응룡 감독이 카브레라의 목을 휘감고 제압했다 당시 64세.노익장(...).
다음날 김응룡 감독에게 헤드록을 당한 카브레라는 구토와 어지럼증을 느껴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고, 삼성 포수 진갑용에게 역시 헤드록을 당했던 SK 포수 박경완 역시 목 부상을 입었다.

2009년 WBC 감독 선발 문제가 뜨자 선동열 삼성 감독이 김응용 삼성 사장을 대표팀 감독으로 추천하며 자기가 불펜에서 대기하겠다는 농담을 했다.

2009년 WBC 결승에서 임창용스즈키 이치로에게 통한의 결승타를 내 준 것과 관련하여 '임창용이 자기 고집으로 벤치의 사인을 무시하고 정면승부한 것'이라고 말하여 많은 논란을 낳기도 하였다. 예전에도 메이저리그의 박찬호가 부진한 이유를 총각이라 밤에 놀기 때문, 삼성 감독 재임중 본헤드 플레이를 한 박한이를 두고 '정신병자'라고 인터뷰해 구설수에 올랐었다.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게스트로 출연했을 당시 몰래 온 손님이 이종범양준혁이었다. 두 선수 모두 김응용이 감독으로 있던 팀의 대표적 선수들이라는 것이 이색적이다.

가족으로 아내와 딸 둘이 있다. 아내는 서울대학교 음대를 나왔고, 두 딸도 모두 음악을 전공했다고. 꽤 오랫동안 기러기 아빠 신세였다고 한다. 어차피 야구 감독은 가족이랑 지내기 힘드니 가족이 한국에 있어도 기러기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래서 대부분 홀로 지내다가 해태 말기에는 방세조차 내기 힘든 신인선수들을 자기 집에 불러들여 지내게 했다. 그런데 해태 말년에는 해태가 거지 팀이라 그런지 두 딸의 미국 유학비를 대느라 월급에서 남는 게 거의 없었고 이전에 저축한 돈도 까먹었다 한다. 뭐 그 시기가 1$=1800₩ 수준의 살인적인 고환율을 자랑하던 외환위기 시절이라는 건 감안하자 그래도 삼성 감독과 사장을 지내는 동안 어찌어찌 돈을 모으는 데는 성공한 듯. 신인 투수 조지훈강래에게 한우를 사줬다가 손의 쥔 60만원짜리 계산서를 들고서 '통장 잔고 확인해봐야겠다' 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한화 감독 수락때 2년 계약금 연봉 3억씩 9억 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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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프로야구 통산 6번째 퇴장으로 역대 1위 퇴장 달성 사실 그 전에도 5회로 1위 였다.
  • [2] 흔히 '야구의 신'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당시 인터뷰에서는 "LG 김성근 감독이 워낙 잘했어요 '신이 아닌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라고 말했다. 훗날 김응용 감독이 인터뷰에서 "저는 야신이라고 안 하고 그냥 신이라고 했었는데, 신도 여러 가지 신이 있잖아요."라고 해명했다.
  • [3] 그의 은퇴경기 당일 상대가 SK 와이번스여서 김성근 감독이 자리해 있었고, 삼성 라이온즈의 사장이 김응용 전 감독이었기 때문. 구단은 당시 특별예산을 편성하면서까지 양준혁에 대한 예우를 확실히 해주었다.
  • [4] 실제로는 1940년생이라고 한다.
  • [5] 전북 완주군의 우석대가 아니라 고려대에 합병된 우석대이다. 항목 참조.뭐 대학이 그렇게 중요한가
  • [6] 10월 30일 오전 10시 구단 사무실에 들러 작별
  • [7] 10월 30일 오후 2시 입단 기자회견
  • [8] 전후기 각각 2위
  • [9] 빙그레 이글스와 공동 3위.
  • [10] 드림리그
  • [11] 양대리그 합산
  • [12] 드림리그
  • [13] 양대리그 합산
  • [14] 해태 시절로만 해도 역대 최다 우승타이틀을 보유한 감독.
  • [15] 2002년 전까지 삼성은 1985년 전후기 통합우승 및 정규시즌 우승은 해봤다. 다만 이 해에는 전기리그 우승팀 vs 후기리그 우승팀이 맞붙는 양식이었고, 삼성이 전후기를 모두 우승하는 바람에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 다만 엄연히 이것도 한국시리즈 우승 기록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오히려 삼성팬들과 구단이 이것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조바심을 내었다.
  • [16] 양준혁은 당시 선수협 파동때문에 FA 미아가 될 처지였으나 김응용은 그를 불렀고 그 해 삼성은 우승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도 양신의 은퇴는 막지 못했다]
  • [17] 양준혁 뿐만 아니라 이만수도 예우하였다. 당시 삼성은 한국시리즈를 우승하지 못한 컴플렉스로 프랜차이즈를 대우하조 못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만수의 영구결번을 추진했던 것도 김응용이다. 뿐만 아니라 삼성이 연고지를 수원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을 때, 팬들을 버려서는 명문구단이 되지 못한다 하여 연고지 이전을 강하게 반대하여 지금의 대구삼성라이온즈를 이어올 수 있었다.
  • [18] 제자 선동열과 함께 KBO에서 주의 및 경고를 받았다. 선동열은 강민호 때문. 김응용은 우선협상 기간에 롯데 김주찬에게 한 발언 때문.
  • [19] 기사에 우회적으로 김응룡을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주말경기 우천취소시 월요일 경기를 하는것에 대해 언론을 통해 투덜댄 김응용 감독의 발언을 겨냥한 기사로 보인다. 팬들은 나머지 용의자로 선동열을 지목하고 있다.
  • [20] 다만 위의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평소 수준을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이 기자는 이전에 이런 기사들을 올린 전적이 있다. 판단은 알아서 하자.
  • [21] 코치진과의 의견 충돌로 인해 시즌 도중 하차. 잔여시즌은 조창수 코치의 대행체제로 마감했다다.
  • [22]농협.
  • [23] 체중증가는 크라운 맥주 시절 늘었다고 한다. 위의 사진과 아래의 사진을 보면 확연이 다른데.... 크라운 맥주 당시 영업을 뛰면서 맥주를 많이 마셔서 체중이 늘었다고 한다.
  • [24]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김응용이 오히려 자기에게 대드는 배짱을 높게 평가했다(!) 이 후 김무종이 부진할때마다 김응용은 바로 장채근을 투입시켰고 결국 장채근은 김무종의 뒤를 이어 해태의 주전포수로 활약하게 된다. 어찌보면 대인배스러운 측면. 류중일도 이와 비슷하게 코치시절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김응용에게 당당하게 의견을 제시해 도리어 높게 평가했던 일화도 있다. 류중일 항목 참고.
  • [25] 당시 먼저 창단했던 양지 축구단과 함께 지금으로 치면 야구판 실미도였다...그러나 양지도 창단 3년만에 해체되었다.
  • [26] 한일은행은 당시 실업리그 최강팀이었다. 김응용과 같이 뛰던 멤버로 5년 선배인 투수 김영덕, 후배로 3루수 강병철 등이 있었다.
  • [27] 1987년 한국시리즈를 우승으로 이끈후 인터뷰에서.
  • [28] 참고로 이 레전드 시즌 2도 현재 방영중인데 시즌 1도 그렇고 2도 그렇고 하나의 사건을 두고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꽤나 재미있다.
  • [29] 이것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방송 카메라를 발로 막는 장면이 비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스포츠신문에서 뽑은 제목은 시청자에 왕발킥?.
  • [30] 정확히 말하면 한대화가 트레이드로 입단하고 3루를 보던 이순철을 외야로 이동시키면서 김일권과 같은 유형이나 기량이 더 뛰어난 이순철로 대체했다.
  • [31] 양준혁의 자서전을 보면 갈 곳이 없는 선수들은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해 주었으며 한국에 적응 못할 용병들을 위해 자주 양식집에 데려가 식사를 사주는 등 경기장 밖에서는 따뜻한 모습이 많이 보였다고 언급했다.
  • [32] 극적인 면만 강조해서 잘 안알려지는데 단순 전력이나 체력적인 면은 삼성이 훨씬 유리했다. 그런데도 이런 승부가 나온것은 LG가 분전한 것도 있지만 삼성 쪽도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 [33]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신기록 달성여부 때문에 포스트시즌 때 제대로 된 준비를 못했다고 한다.
  • [34] 이학수는 제일모직 경리과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해서 이 시절 인맥을 구조조정본부와 주요 계열사에 대거 중용했다. 김재하도 그 중에 하나이다. 2010년의 대숙청에서 이 인맥들은 모조리 갈려나갔다.
  • [35] 김재하 부사장은 바로 대구 FC 단장으로 옮겨갔다.
  • [36] 12년만에 포스트시즌 탈락에도 불구하고 재계약에 성공한건 오로지 김응용 사장의 지원때문이었는데, 그 방패막이 사라졌으니 바로 out. 동시에 김응용, 선동렬이 데리고 왔던 해태 출신들은 모조리 퇴출되고 그 자리는 전부 삼성 라이온즈 출신 순혈들이 차지했다.
  • [37] 류현진은 지역 출신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화에서 데뷔하여 7년동안 활약한, 2000년대 한화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의 상징이고, 김응룡은 빙그레 시절의 원수다.
  • [38] 당시에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여론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 [39] 적어도 김인식은 한화 부임 초기 3년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1번의 준우승을 기록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그 이후가 문제지만.
  • [40] 대표적으로 "나는 우리팀 경기 보기가 쪽팔려서 드라마를 본다", "2년 동안 병 안걸린게 다행이다" 등등 본인 스스로도 한화 감독을 맡은 것을 후회하는 말들만 내뱉었다. 물론 후회는 개인의 감정이지만 그리고 충분히 공감이 되지만 한 팀의 감독이라는 사람이 인터뷰에서 저런 말들을 하면 어떤 선수들이, 그리고 어떤 팬들이 좋게 볼까?
  • [41] 간혹 '머니볼도 돈 문제만 없다면 출루율보다 타율을 중요시한다'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그건 출루율이 비슷한 두 선수를 비교할 때의 이야기다. 스탯으로만 본다면 여러가지 의미에서 타율은 출루율보다 나은 점이 없다. 단지 같은 출루율일 때 타율이 높은 선수일 수록 볼넷보다는 가치가 높은 안타를 많이 때리는 선수이니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출루율과 더불어 장타율, OPS 가 비슷한 선수들이라면 타율의 차이는 선수의 생산성에 어떠한 우위도 가져오지 못한다는 통계 결과도 있다. 세이버메트릭스가 발전한 이후 나오는 발전된 2차 스탯, 가공 스탯들은 대부분이 전부 출루율과 장타율 등을 가공해 나오는 스탯들 뿐이다.
  • [42] 사실 양일환 코치는 원래 삼성에서 코치를 했었지만, 서정환이 감독이 되면서 잘렸다.
  • [43] 공교롭게도 김경문 감독도 김성근 감독과 포스트시즌에서 3번 붙어서 3번 모두 졌다.
  • [44]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선 김성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혹사가 맞다 아니다로 의견이 분분하다.
  • [45] 여담으로 이 방송에서 이만수 감독의 용병술도 도마에 올랐는데 김성근 감독은 이만수 감독이 아닌 프론트를 지적하며 이만수 감독의 잘못이 아니라 말하는 대인배적 모습을 보여줬다.
  • [46] 사실 선동열의 마무리기용은 선동열의 건초염 때문에 어쩔수 없었던 측면이 있다. 원래 선발로 뛰던 선동열은 건초염 발병 이후 짧은 이닝만 소화할 수 있었고 1994년에는 다시 선발로 전향시키려 했으나 실패, 다시 마무리로 돌렸다.
  • [47] 이건 당시 OB에서 삼성으로 매끄럽지 않은 이적을 한 김영덕 감독을 비하하려고 OB 코치진이 선수들에게 일부러 시킨 거였지만.
  • [48] 프로야구 출범 당시만 해도 인지도가 있던 전라도 고등학교는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뿐이었을 정도. 호남 야구가 꽃피기 시작된 것은 1970년대이후다. 경북 쪽의 야구 명문고들이 1950년대부터 나온 것을 보면 한참 늦었던 셈.
  • [49]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응용 감독이 한대화의 아버지와 동향 출신이라서 한대화 영입을 요청했다고 한다.
  • [50] 이순철은 이후 자신과 유사한 수비의 달이 김창희의 등장으로 자리를 잃게 된다.
  • [51] 한편 이호준을 타자로 전향시킨 바가 있는데, 일류 장타자로까지 성장시킨 건 강병철 SK 감독의 공이다. 물론 그 가능성을 보고 타자로 전향시킨 것은 김응용이었다.
  • [52] 강병철이진영, 채종범, 이호준을 발굴하며 리빌딩에 성공했다. 비록 이승호오상민, 페르난데스 등의 팔을 바치긴 했다. 이 덕에 조범현이 한국시리즈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고, 정근우, 최정, 정우람, 정대현등의 등용했다. 그리고 김성근이 이를 다듬어 전성기를 맞이했다. 강병철은 06~07 롯데에서도 리빌딩을 충실히 수행했다.
  • [53] 12년 2군 성적은 방어율 5점대
  • [54] 물론 볼넷은 여전하다.
  • [55] 이동걸은 폭망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송창현영입 당시에도 미미했던점을 기억해본다면....
  • [56] 프로야구가 출범하게 될때도 재일교포인 장훈선생님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이루어 졌으며, 일본에서 기회를 받지 못하던 재일동포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그리고 야구단 구축 당시 프런트에 일본통도 많았기에 재일동포라 선수단 내에서 차별당했다는 것은 억측에 가깝다.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이건희사장이 일본통 이었으며, OB 베어스의 경우 박용곤 구단주가 일본통 이었다. 또한 기업인이자 한국야구계 행정에 있어서 큰 족적을 남긴 최인철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코시엔을 밟아본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 [57] 오히려 1956년부터 있었던 재일교포 야구단들이 친선경기 후에는 자신의 장비를 낙후된 장비를 쓰던 한국선수들에게 주고 오던 실정이었다. 야구계 내부에서는 재일동포에 대해 무척 우호적이다.
  • [58] 당시 비행편이 좋지 않아 미국에서 비행기를 3번 갈아타고 프로야구 출범식을 보고 갔다고 한다.
  • [59] 2002년 한국시리즈 후 LG 프런트 내의 고려대 인맥이 고대 출신인 이광환을 선호하여서 김성근을 내쳤다는 설이 있으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성근이 재일출신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LG 프런트가 워낙 막장이었기 때문이라...
  • [60] 하나 더 있다. 프런트와의 관계. 김응용 이전 감독인 김동엽해태 타이거즈의 창단조건이었을 정도로 공들인 인물이지만 1시즌도 못채웠다. 조 토레 이전 뉴욕 양키스 감독은 직전 10년간 3년임기를 채운 감독도 없다. 보스 지 스테인브레너와 이리치이고 저리 치받으면서도 감독자리 유지한 것은 조 토레 뿐이다. 김성근 감독의 전력을 봐도 한 팀에서 가장 오래 버틴 기록이 5년이다(OB 시절과 SK시절).
  • [61] 두 감독이 맞붙었던 2002년 한국시리즈 이후를 기점으로 두 감독의 행보가 엇갈린 탓이 가장 크다. 김성근이 치바 롯데 마린즈 코치시절에 일본에서 선진야구를 접하면서 스타일을 바꾼 것에 비해 김응용은 이후 삼성 라이온즈 사장으로 영전했다가 야구계를 잠시 떠났기 때문에 현대야구에 적응할 수 없었다.
  • [62] 삼성 라이온즈 팬덤의 경우 해태 시절의 김응용이 1980~1990년대 한국시리즈 제패를 막은 장본인이지만 한국시리즈 첫 우승의 숙원도 풀어준 감독이라 김응용의 능력에 매우 호의적이다. KBO 초창기 삼성을 콩라인으로 만든 장본인이라서 싫어하는 팬도 있지만, 그만큼이나 삼성팬들의 뇌리속엔 '김응용=명장' 공식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게다가 그 악마같던 명장이 아군이 되서 자신들을 우승시켰으니 더더욱. 거기다가 김성근은 90년대 556 암흑기의 주범중에 한명이며, 삼성의 올드팬들에게 선동렬만도 못한 놈 취급을 받고 있다. 여기에 SK 와이번스 감독 교체 당시 이만수김성근의 대립까지 엮이면서 김응용을 지지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생각해보면 삼성 라이온즈김성근김응용을 모두 겪은 유일한 구단이다. 그리고 2015년 부터 한 팀이 더 생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