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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형

last modified: 2015-04-07 10:56:45 Contributors

Contents

1.쌍방울 레이더스 소속 투수, 現 SK 와이번스 투수코치
1.1. 개요
1.2. 선수 생활
1.2.1.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1.2.2. SK 와이번스 시절
1.3. 지도자 시절
1.4. 박경완과의 관계
1.5. 특징
1.6. 연도별 주요 성적
2.스타크래프트2 프로게이머


1. 쌍방울 레이더스 소속 투수, 現 SK 와이번스 투수코치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의 사진.중학생 아닙니다, 현역 야구선수 맞습니다.[1][2]


SK 와이번스 시절의 사진. 저 얼굴이 불혹의 얼굴이다(...)



SK 와이번스 No.70
김원형(金圓衡)
생년월일 1972년 7월 5일
출신지 전라북도 전주시
학력 전주중앙초-전주동중-전주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1년 고졸우선지명
소속팀 쌍방울 레이더스(1991~1999)
SK 와이번스(2000~2011)
별명 어린왕자

2003년 한국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MVP
최동수(LG 트윈스) 김원형(SK 와이번스) 홍성흔(두산 베어스)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48번
팀 창단 김원형(1991~1995) 김종국(1996)[3]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16번
이상대(1991~1994) 김원형(1995~1999) 팀 해체

SK 와이번스 등번호 16번
팀 창단 김원형(2000~2011) 이재영

SK 와이번스 역대 주장
김재현 김원형(2007~08)[4] 박경완

1.1. 개요

영원한 어린왕자

돌격대의 최초이자 최후의 에이스

쌍방울 레이더스,SK 와이번스 소속이었던 프랜차이즈 우완투수이자 레전드. 등번호는 데뷔 이래 줄곧 16번. 쌍방울 레이더스가 1군에서 뛰기 시작한 첫해부터 선발로 활약하였고,[5] SK 와이번스의 창단멤버였으며 2007년의 SK 사상 첫 우승이자 역대 최장기록인 17년[6]만의 개인 첫 우승을 주장으로서 맞았다.

별명은 곱상한 외모와 덤으로 나이를 거꾸로 먹는듯한 동안으로 인해 '어린왕자'. 지금은 마흔왕자. 현재 나이 사십이 넘었건만, 지금도 수염만 깎으면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동안 외모를 지니고 있다.

1.2. 선수 생활

1.2.1.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전주시 출신의 전주의 순혈 프랜차이즈 선수로서, 전주고를 나와 연고팀인 쌍방울 레이더스에 지명되었다. 쌍방울이 고려대학교와의 치열한 스카우트 싸움을 벌인 끝에 입단시켰을 정도로 기대가 컸던 선수였다. 신인 시절부터 엄청나게 관리할 정도로 에이스로 일찍부터 점찍었던 선수.[7]

창단 첫 해 선수층, 특히 선발 투수진이 얇다 못해 없다시피 한 쌍방울 레이더스의 사정상 2군에서 담금질이고 뭐고 없이 데뷔년도인 1991년부터 바로 1군에서 선발로 등판하게 되었다. 그렇게 데뷔 첫해 방어율 4.69에 7승 11패, 4완투(1완봉)이란 성적을 거두며 가능성을 보여 준다. 시즌 초반에 부진하자 당시 감독이였던 김인식에게 스스로 2군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항상 거절당하던 중, 오기가 생겼는지 큰 일을 저지르고 만다.

1991년 8월 14일 광주 해태전에서 선동열을 상대로 만 19세 1개월 10일에 완봉승(1:0)을 거둔 것. 이와 동시에 당시 최연소 완봉승이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8]

1992년 8승 7패 3.22로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원만한 시즌을 보내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1993년 4월 30일 전주 OB전에서 20살 9개월 25일로 최연소 노히트 노런 기록(1사사구)을 작성하였다. 이 기록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안 깨지고 있는 불멸의 기록. 또한 전주야구장에서 나온 최초이자 최후의 노히트 노런이기도 하다. 1993년 11승 9패 2.93으로 박성기와 함께 팀 내 최다승을 거두면서 기대대로 쌍방울의 에이스로 떠오른다.

1994년 어깨 부상으로 인해 5승 11패 5.39으로 부진한 이후, 1995년부터 다시 팀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1996년 4.12 5승 8패로 조금 부진하였지만, 이 때의 쌍방울은 24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ERA 2.37로 그 시즌 공동 3위라는 기록을 남긴 성영재에게 10승 5패라는 10승에 겨우 걸친 성적을 안겨줄만큼 좋지만은 못했다. 그럼에도 김성근 감독의 지도 아래 3위라는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1996년과 1997년 쌍방울의 기적의 돌풍 속에서 생애 처음으로 가을 야구라는 것을 경험하기도. 그런데 1996년 현대 유니콘스와 맞붙었던 플레이오프에서는 김인호가 김원형의 공을 헤딩해 버리는.... 김인호의 헤딩 이후 다음 타자였던 윤덕규가 김원형의 초구를 받아치며 싹쓸이 3루타를 쳤다.

그리고 1998년, 51경기(11선발출장)에 등판해 150이닝을 먹으며 선발 구원 안 가리고 마구 등판하며[9] 12승 7패 13세이브로 그해 ERA 5위를 차지하며 쌍방울 시절의 커리어 하이를 찍는다. 그리고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 멤버로 참여하여 금메달을 따고 병역면제 혜택을 받았다. 다만 아시안 게임에서의 활약은 썩 좋지 못했다. 4강전 중국과의 경기에 나왔지만 인상적인 투구는 보이지 못했다.

IMF로 인해모기업이 어려워진 쌍방울의 주축선수들이 줄줄히 팔려나가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쌍방울에서 뛰었으나, 1999년 7월 10일 대전 한화전에서 장종훈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에 얼굴을 맞아 코뼈와 광대뼈가 함몰될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10] 이 때 장종훈은 1루를 밟고선 김원형에게 갈 수도 있었음에도 1루를 밟지 않고 그대로 마운드로 달려가 김원형의 상태부터 살폈고, 결국 아웃되었다.[11] 이후 김원형은 장종훈이 타석에 설 때마다 모자를 벗어 인사하며 예우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부상으로 인해 32이닝(전년도의 1/5) 평균자책점 4.86, 3승 2패 3세이브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7Qx6|13|20080828094505 # 당시의 사진.

사실 쌍방울이 팀 내 연봉 상위권인 김원형을 끝까지 지켰다기보다 부상으로 인해 트레이드할 시기를 못 잡고 놓쳤다는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쌍방울은 1999년에 현대 피닉스 소속 필선의 지명권과 2차 1순위 지명권[12]을 현대에 팔았을 정도의 재정난을 겪고 있었으니까... 결국 쌍방울이 1999년을 마지막으로 해체 수순을 밟으면서 선수단을 인계한 SK 와이번스에 입단하게 되었고, 그는 고향인 전주에서 더 이상 등판할 수 없게 되었다.

여담으로 저 때 선동열과 맞장떠서 승리를 거둔 이후 쌍방울은 해태 타이거즈에게 광주에서 13연패를 당한다. 1991.8.15~1993.4.17까지 해태를 상대로 광주에서 한판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연패를 끊은것도 바로 김원형이었다!

1.2.2. SK 와이번스 시절


전매특허인 커브를 던지는 모습

리즈시절 쌍방울보다도 훨씬 약체였던 초창기 SK에서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팀 사정이 워낙 안 좋아서 선발과 중간을 가리지 않으며 나오면서, 2000년 ERA 5.81, 2승 13패 5세이브로 커리어 로우를 찍고, 한화 이글스의 한용덕과 함께 다패왕을 먹고 만다.[13] 심지어 같이 다패왕 먹은 한용덕의 자책점은 4점대인 4.68. 이 때의 처참한 성적이 결국 그의 통산 성적에 작용하고 마는데, 그의 통산 승률은 5할 미만이다. 134승 144패. 야구에 만약이 없다고 하지만, 2승 13패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5할은 넘겼을 것이다. 물론 김원형의 이런 부진에는 얼굴에 공을 맞은 후유증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02년까지 고령화로 인한 구속저하와 어깨부상으로 성적이 하락하였으나, 정교한 제구력으로 맞춰잡는 기교파로 투구스타일을 변경하며 다시 성적이 나아졌다. 2003년에는 생애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마운드를 밟을 수 있었고, 2005년에는 171.2이닝을 던지며 14승 8패를 거두며 평균자책점 6위를 차지했고, 팀의 에이스가 되며 팀의 3위에 공헌한다.

2007년에 투수로서 주장을 맡았으나, 부진으로 인해 선발에서 밀려 중간계투로 주로 나와 5승 4패 4홀드 73 2/3이닝을 기록하며 생애 첫 우승을 맛보았다. 다만 마운드에는 오르지 못했는데, 시리즈 자체가 워낙 접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여담으로 김성근 감독은 6차전 9회에 점수차가 5점차 이상이었다면 김원형에게 마지막 카운트를 잡는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6차전은 접전 양상으로 흘러 5:1로 끝났으니...

우승 직후 쌍방울 출신 중 SK에서도 뛰었지만 결국 우승경험을 하지 못한 김기태조원우가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8시즌에는 42출장(4번 선발) 74.1이닝을 먹고, 주로 중간계투로 나와 12승(다승 공동 4위) 6패 2세이브 2홀드로 롱 릴리프로써 핵심 불펜역할을 해주었으며, 규정이닝 미달 선수중 최다승[14]을 기록하였다. 특히 끝장 승부가 벌어지던 2008년의 특성상 김원형이 연장에 나와 길게 막으면 SK가 점수를 내서 이기는 패턴으로 승리를 가져갈 수 있었다.

2000년대 후반 회춘하면서 우승도 경험하고 했지만, 아쉽게도 2009시즌 후에 왼쪽 팔꿈치 수술을 받고 전력에서 이탈했다가 2010년 8월이 돼서야 복귀했다. 결국 10시즌은 3경기밖에 나오지 못했다. 은퇴하지 않고 2011년에도 뛰었다. 연봉은 2억 5천에서 1억 5천이 깎인 1억원. 절친인 박경완이 40임에도 불구하고 2년간 총 14억에 FA대박을 터트린 것과 비교하면 후새드, 그래도 김성근 감독이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결국 세월의 흐름은 이기지 못했다.

2011년에는 내내 플레잉코치 역할을 하고 1군과 동행하다가 결국 2011년 9월 은퇴를 선언하면서 한 시대를 성실하게 던진 선수는 이렇게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다. 2011년 준PO 1차전 시구자로 나섰고, 2012년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가지고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은퇴 전 시즌 성적이 나름 괜찮아 기대를 모았음에도 은퇴하여 의아해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은퇴식 전 기사에서 직구는 아직도 던질 수 있으나, 이번 부상 이후 전매특허였던 커브 자체를 아예 던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 은퇴 이유라고 밝혔다.

은퇴 후 통산 다승 5위에 해당되는 성적과, 항상 같은 등번호로(16번) 쌍방울-SK시절동안 한번도 팀을 떠난적이 없는 순혈 프랜차이즈 스타로써의 상징성 등을 감안하여 SK 와이번스 최초의 영구결번자가 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안타깝게도 영구결번되지는 않았다.[15]솩런트들은 어린왕자에게 은퇴후 영구결번 안시키고 이죄영에게 물려주고도 성적이 시원치 않으니, 이러니까 솩런트들은 가루가 되도록 까이지!!!

1.3. 지도자 시절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후 원래는 해외 연수를 생각했으나 팀에 남았고, 루키팀[17]의 투수 코치를 맡게 되었다. 원래 등번호였던 16번은 이재영에게 넘기고 새 등번호로 70번을 받았다.

본인이 잘 던졌던 커브를 잘 전수하는 편이며, 임정우문승원의 커브가 그의 작품. 특히 문승원은 아직도 그가 직접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어깨만 싱싱할 뿐 사이버 투수에 지나지 않았던 서진용[18]을 일부러 집으로 데려가서 밥도 같이 먹는 등 1:1로 집중 코칭해서 상무에 입단시켰고, 서진용은 상무에서 중간계투로 등판해 2013년 6월 27일까지 방어율 0.57를 기록하였다. SK 팬들은 김상진, 김경기 말고도 믿을 수 있는 코치가 생겼다며 감탄하였다.

그리고 보면 위의 셋 전부 2군 내지 3군 코치들이다. 1군 코치들보다 2군과 3군 코치들이 더 괜찮은 불편한 진실

2013 시즌부터 조웅천과 함께 1군 투수코치를 맡게 됐다.

그런데 조웅천 코치와 더불어 불펜진 혹사 덕분에 까이고있다.
다만 이만수 감독이 투수를 직접 교체하는지라 이만수, 조웅천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까이고 있다.

1.4. 박경완과의 관계


영원한 친구 박경완과 함께 마지막을 장식하는 김원형

김원형을 언급하든, 박경완을 언급하든 간에 둘은 꼭 서로의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이 나오는 존재다.

박경완과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함께 지낸 영혼의 빠떼리배터리이자 30년지기 절친인데, 같은 전주 출신을 시작으로 전주 중앙초-전주동중-전주고를 함께 나와서, 전주 연고팀인 쌍방울에 같이 입단했다. 1991년 김원형 덕에 박경완이 입단할 수 있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 대학 진학을 모색하다가 무산되면서 졸지에 붕 떠버린 박경완이 쌍방울로 갈 수 있었던 것은 팀 내 최고 유망주의 친구라서 볼 받아주고, 말동무 해달라는 팀의 뜻이 컸다고 한다. 박경완은 고등학교 때는 생각보다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고, 기량 저하까지 겹치면서 프로 진출마저 불투명했으나, 그해 1차 지명선수였던 김원형의 도움으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신고선수로 입단하였고, 성공 신화를 같이 쓸 수 있었다.

1997년 시즌 후 어려운 모기업 사정으로 인하여 박경완이 현대로 당시 사상 최고인 9억이란 거금에 트레이드되었다. 그렇게 둘은 떨어져서 다른 팀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박경완이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 되어 잠시 떨어져 있었던 때, 박경완이 타석에 들어서자 벤치에서 빈볼 사인이 났음에도 차마 빈볼을 던질 수 없어 위협구만 연거푸 던지다 퇴장 당한 사건은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을 보여준다. [19]

그리고 박경완이 FA 자격을 얻어 2003년 SK에 돌아오면서 1998년부터 2002년까지의 5년을 제외하고는 항상 같은 팀에서 함께 지내며 21년차 역대 최장수 배터리로 활약하게 되었다. 둘 다 은퇴한 2013년에도 김원형은 투수코치, 박경완은 2군 감독으로써 코치로써도 또 같은 팀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며, 2014시즌에도 김원형이 1군 투수코치, 박경완이 그대로 2군 감독을 맡게 되면서 같은 팀에 있는 햇수가 24년으로 늘어났으며, 2015년에도 박경완이 육성총괄, 김원형이 1군 투수코치로 선임되며 결국 같은 팀에 있는 햇수 25년을 달성했다. 당신은 나의 동반자 내생애 최고의 선물

쌍방울 시절 박경완과의 에피소드(?) # 밑의 5시 방향 조그만 기사도 둘의 기사다.

2011년 은퇴를 선언한 김원형이 준 PO 1차전 시구에 나섰을 때, 자신과 호흡을 맞췄던 박경완[20]이 자기 공을 받지 못한다고 하니까 아쉽다고... 아... 영혼의 배터리...

결국 2014년 4월 5일, 박경완의 영구결번식 겸 은퇴식 날에 박경완이 시포, 김원형이 시구를 함으로써,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할 21년차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장수 배터리는 서로에게 마지막이 된 한 개의 공을 던지고 받으며 둘의 프로생활 20여년의 대장정의 끝을 맺고, 성대한 마무리를 맞이하였다. 시구와 시포 후, 두 영혼의 배터리의 마운드에서의 마지막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박경완:"원형아!"
김원형:"이게 마지막 공이다"

박경완:"그래,고맙다"
김원형:"수고했다"

박경완:"어...고맙다!"


1.5. 특징

134승으로 다승 전체 5위[21]를 기록하고 있다. 전성기 시절이였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팀 전력이 그리 좋지 않았던[22] 관계로 144패로 송진우에 이어 다패 2위를 기록했다. 투구이닝 전체 4위(2171 이닝). [23]

177cm 75kg의 투수로써 그리 좋지 않은 체격이지만, 전성기 때는 그 체격에서 140대 후반의 직구를 구사하였다. 후기에는 최고구속 140대 초반,평균구속 130대 후반. 대신 수준급의 제구력을 갖춰 맞춰잡는 스타일의 피칭을 선보인다.

주로 느린 체인지업으로 완급조절을 하며, 포크볼도 던진다. 기교파 변신 이후, 땅볼 유도할 때 간간히 싱커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의 최고의 주무기는 빠르고 "횡"이 아닌 "종"으로 떨어지면서도 스트라이크인데도 타자가 머리로 공이 날아오는 줄 알고 움찔할 정도로 큰 각을 지닌 12-6성 파워커브로, 희대의 마구 중 하나였다.

삼성의 당대 최강의 파워커브볼러인 삼성 암흑기의 에이스 "만딩고" 김상엽과 비견되기도 하였다.[24] 커브 구속은 김상엽보다 조금 느리지만 각도 하나는 당대 제일이였다고. "헬리콥터 커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25]

1.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1 쌍방울 레이더스 29 136⅓ 7 11 0 - 4.69 131 78 75
1992 22 138⅓ 8 7 1 - 3.32 125 60 104
1993 26 135⅓ 11 9 0 - 2.93 115 70 87
1994 25 132 5 11 1 - 5.39 143 63 75
1995 25 143⅔ 9 8 0 - 3.95 145 71 69
1996 26 126⅔ 5 8 0 - 4.12 133 56 69
1997 29 157 9 9 0 - 2.75
(5위)
139 50 80
1998 51 150 12 7 13 - 2.52
(5위)
130 48 109
1999 17 37 2 3 2 - 4.86 30 16 38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0 SK 와이번스 29 93 2 13 5 0 5.81 112 36 52
2001 26 154⅓ 9 9 0 0 4.37 152 63 100
2002 13 58⅓ 4 5 0 0 5.25 67 19 37
2003 30 79⅓ 7 7 1 4 3.74 87 24 44
2004 30 135 8 6 1 1 4.20 147 51 78
2005 30 171⅔
(5위)
14
(4위)
8 0 0 3.41 172 45 94
2006 24 139⅓ 5 9 0 0 4.07 152 54 52
2007 43 73⅔ 5 4 0 4 4.15 87 30 25
2008 42 74⅓ 12
(4위)
6 2 2 3.15 73 28 41
2009 25 33⅓ 0 4 0 1 4.59 36 19 17
2010 3 2⅓ 0 0 0 0 0.00 0 0 0
통산 545 2171
(4위)
134
(5위)
144 26 12 3.92 2179 881 1246
(9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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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데뷔 당시의 나이가 19세라 실제로 어리긴 했다. 문제는 그 얼굴이 마흔이 다되도록 유지되고 있다는거(…)
  • [2] 저 사진은 20대 중반(1996년)에 찍힌 사진이다.
  • [3] 당연하지만 기아의 내야수 김종국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 [4] 원래 2008년 주장에는 이호준이 선임되었으나 시즌 초반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사실상 김원형이 주장직을 연임하게 되었다.
  • [5] 말이 좋아 선발이지 96~99년은 가끔씩 마무리로도 나와서 던지고 스윙맨의 역할도 하는 등 전천후 투수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상대팀 선발들이 승리를 챙기고 싶어 쌍방울전에 등판시켜달라고 감독에게 떼를 쓸 정도로 최약체급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쌍방울을 어떻게든 지지 않게 하려는 김성근 당시 쌍방울 감독의 원조 벌떼야구가 낳은 산물이었다.
  • [6] 그래도 콩라인 탄 숱한 선수들에 비해서야 우승을 그것도 그 이후 2번이나 몰아서 차지했으니. 다행인 편.
  • [7] 이 시절의 일화로 김원형이 꽤 곱상하게 생긴 편이라 당시 김기태는 누구 빽으로 입단한 선순 줄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거기에다 고교시절 기량이 미숙했던 포수 친구까지 달고 왔으니 편견은 더 컸다. 그러나 김원형의 불펜 피칭을 보게 된 후 편견이 사라졌는지, 그 후에는 김원형이 등판할 때마다 우리 원형이 우리 원형이하면서 경기에 임했다고. 선동열을 상대로 거둔 데뷔 첫 완봉승도 김기태의 솔로 홈런으로 승리한 것이다.
  • [8] 1년 후인 1992년, 이 기록에 염종석이 이틀이 모자라 경신에 실패하였다. 그러다 1994년, 주형광이 ''만 18세''' 1개월 18일로 이 기록을 돌파했으며, 야구계에서 앞으로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꼽히는 불멸의 기록이다.
  • [9] 그해 그보다 많이 출장한 선수 중 그보다 이닝을 더 많이 먹은 선수는 61경기 158.1이닝의 두산 진필중밖에 없었다!
  • [10] 심지어 장종훈 특유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는 친 타구가 점프한 유격수 글러브 윗부분을 살짝 스쳐 지나갔는데 그 타구가 그대로 펜스 중단에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직격으로 꽂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위력을 지닌 것으로 유명했다. 포물선을 그리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홈런 타구도 그의 전매 특허. 그러니 은퇴 직전도 아니고 27홈런을 쳤을 시절의 장종훈의 타구에 맞은 김원형은...
  • [11] 흔히 장종훈의 이 타석으로 인해 장종훈의 타격 1위의 성적이 3위로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와전된 것으로 성적과는 별 관계가 없는 평범한 타석이었다. 참고로 장종훈의 1999년 최종 타율은 0.284였으며, 그해의 타격왕은 그보다 타율이 1할 가까이 높았던(0.372) 롯데의 마해영이였다.
  • [12] 현대는 당시 쌍방울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은 대전고 투수 마일영의 지명권을 받아 입단시킨다.
  • [13] 00년 SK의 팀 전력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투수진이 완전히 망가져, 에이스는 그해 1차 지명한 신인 이승호로, 워낙 팀에 구멍이 많았던지라 이승호가 돌려막기 요원으로 선발 구원 안가리고 무차별 등판해 139이닝 4.51 10승 12패 9세이브를 거뒀다. 팀내 ERA 1위는 44이닝 던진 불펜투수 박상근. 그마저 평균자책점은 4.30이였다. 2위는 불펜투수 박주언이나, 고작 20이닝 던진지라 제외. 결국 2000년 SK 선발요원 중 평균자책 1위는 이승호였다. 그해가 타고투저 시즌이란 점도 있다만 답없는 투수진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SK 창단 초반 3년 간의 혹사는 이승호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와,그를 기나긴 재활의 길로 불러들인다. 그렇다고 타격이 좋았나 하면 그건 또 아니올시다여서,3할3푼을 치며 타격3위를 차지하며 성공한 유격수 용병 틸슨 브리또를 제외하곤 타격 30위 안에 드는 선수는 0.262로 30위를 차지한 2루수, '철인' 최태원 이외엔 없었다. 투타 모두 개판이였던 상황. 그리고 승률 3할 3푼 8리으로 꼴찌를 차지한다.
  • [14] 당시 2위는 두산의 이재우. 11승이었다.
  • [15] 18년 동안 한 번도 팀을 떠나지 않은 무이적 선수로 언론에 많이 노출된 이숭용과는 달리, 이쪽은 무려 20년 넘게 이적을 하지 않았음에도 별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어쩌면 이숭용보다도 더한 고난의 세월을 견디면서 대쪽 같이 팀을 지킨 사실상 원팀 플레이어임에도 불구하고, 쌍방울과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하는 팀 정책의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히 안습이라 하겠다
  • [16] 선수 육성은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지만 막장 투수운영 때문에 엄청나게 까이고있다.
  • [17] 3군 혹은 재활군이라고도 하며 1군이나 2군에서 뛰던 선수의 재활을 돕거나 신인들의 기본기 습득을 위해 신설되었다. 박경완이만수의 탄압 때문에 1군에서 이 곳으로 내려갔었다.
  • [18] 멍청한 SK 스카우트진이 이현호를 거르고 뽑은 2011년 전체 1픽이지만 신고선수로 전환되었으며, 그나마 김원형이 다잡아 줘서 상무에 입대할 수 있었다. 항목 참조.
  • [19] 1998년 7월 26일 경기. #
  • [20] 당시 재활 중
  • [21] 1위 송진우, 2위 정민철, 3위 이강철, 4위 선동렬.
  • [22] 특히 투수부문에서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급 좌완 마무리 전주특급 조규제, 김현욱-조규제로 이어지는 쌍방울의 고정 승리조의 일원이자 97년 중간,구원투수로 20승을 기록한 언더투수 김현욱, 선발 중계 구원 안가리고 나오며 같이 포맨팀 해먹던 좌타자킬러 언더투수 김기덕, 90년대 말 반짝한 언더 포크볼러 성영재 빼곤 믿을만한 투수가 거의 없었다. 구원진은 김현욱-조규제라인으로 먹고 살았으나, 선발은 진짜 답이 없었다. 박성기, 오봉옥, 정환 등의 선수들이 1년씩 터져주었으나 롱런한 선수들은 아니다.
  • [23] 1위 송진우, 2위 정민철, 3위 이강철. "현역" 1위는 400이닝 차이나는 배영수(...) 배영수가 지금의 페이스로 3년만 더 뛴다면 갱신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후, 5위에는 조금 오래 머물러있을 듯 하다...
  • [24] 덕분에 매니지먼트 게임인 프로야구매니저에선 김원형의 레전드 카드를 입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1성구 카드로 95년도 올스타 김상엽이 나왔다.
  • [25] 같은 시기를 불태운 라이벌 정민철과 거의 비슷한 유형의 커브볼러였다. 그러나 정민철은 직구와 커브볼 속도의 간극을 이용한 커브라면 김원형의 직구와 커브는 속도차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궤적도 거의 똑같은 볼이라 기다리는 타자 입장에선 이게 직구인지 커브인지 영겁과도 같은 고민을 하다가 배트를 휘둘러야했고 그러면 대부분 삼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