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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식

last modified: 2015-03-20 17:08:21 Contributors

Contents

1. 프로농구 서울 삼성 썬더스의 코치 김상식
1.1. 개요
1.2. 선수 생활
1.3. 지도자 생활
2. 전 축구선수 김상식
2.1. 개요
2.2. 플레이 성향
2.3. 프로팀 경력
2.3.1. 성남 시절
2.3.2. 전북 시절
2.4. 대표팀 경력
2.5. 기타

1. 프로농구 서울 삼성 썬더스의 코치 김상식


서울 삼성 썬더스
김상식(金商植)
생년월일 1968년 3월 14일
국적 한국
출신지 서울특별시
출신학교 양정고 - 고려대학교
포지션 포워드
신체 사이즈 182Cm, 78Kg
실업입단 1990년 기업은행 농구단 입단
소속팀 기업은행/광주 나산 플라망스(1990~1998)
안양 SBS 스타스(1998~2003)
감독대행 안양 KT&G 카이츠(2006)
대구 오리온스(2007~2008)
서울 삼성 썬더스(2014.1.27~2014.4.13)
감독 대구 오리온스(2008~2009)

1.1. 개요

한국농구 선수이자 지도자. 농구인 2세로 기업은행의 간판 슈터였고, 프로 출범 후, 나산, SBS에서 활약했으며 이동 미사일이란 닉네임으로 유명했다. 은퇴 이후, KT&G의 감독 대행과 오리온스의 감독을 역임했고 2014년 현재 서울 삼성 썬더스의 코치.

1.2. 선수 생활

부친은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 농구를 책임졌던 명 선수이자, 한국프로농구의 출범에 크게 기여하고, KBL 2대 총재를 역임한 김영기. 아버지의 뒤를 따라 농구 선수가 되었고, 고려대 시절에 외곽슛을 주무기로 비록 한 시대를 풍미한 아버지의 명성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실력 있는 선수였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고려대의 주포로서 활약했다.

졸업과 함께 일찌감치 기업은행으로 진로를 정하고 입단하는데, 이유는 역시 부친인 김영기의 영향. 그래서 기업은행의 주포로서 농구대잔치 무대에서 꾸준한 득점력을 선보였다. 군복무 시절인 1993-94 농구대잔치에서는 정재근, 성식과 함께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지만, 당시 엄청난 돌풍을 일으킨 연세대학교에게 패하면서 농구대잔치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기업은행이 금융팀인지라 다른 팀과의 스카우트 경쟁에서 밀리면서 실업농구 시절의 김상식은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약팀에서 고군분투하는 고독한 에이스로 각인되었다.

프로 출범 후에는 기업은행을 인수해서 출발한 광주 나산 플라망스 소속으로 원년에 평균 20득점을 넘기면서 용병 에릭 이버츠와 함께 팀을 6강 PO로 이끌었다. 이듬 해인 1997-98 시즌에도 괜찮은 모습을 보이면서 팀의 주포로서 활약했지만 당시 나라를 뒤흔든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 속에 모기업이던 나산그룹이 부도가 났고, 재정빈곤 등으로 농구단 운영에 차질을 빚으면서 결국 팀의 간판이던 김상식은 현금 2억원에 팔리며 안양 SBS 스타즈로 이적하게 되었다.

안양에서의 성과는 다소 미흡했다. 이적 당시 김상식은 이미 30줄에 접어들었고, 과거와 같은 폭발적인 득점력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적은 출장시간에도 불구하고 장기인 3점슛과 외곽슛을 무기로 가드진을 이끌며 알토란 같은 활약을 했고 결과적으로 이 때의 활약을 통해 SBS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 스타가 될 수 있었다. 2003년을 끝으로 은퇴한 후, SBS가 코치 연수를 보내준 것이 대표적인 근거라고 할 수 있겠다.

1.3. 지도자 생활

코치 연수 후에는 SBS의 코치로 부임해서 팀의 KT&G로 넘어간 후에도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2006-07 시즌 도중 김동광 감독이 해임되자 감독 대행을 맡아 잠시 팀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신임 감독으로 유도훈 감독이 임명되면서 코치로 남은 시즌을 치룬 후, 결국 팀을 떠났다. 그리고 대학 선배인 이충희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07-08 시즌부터 대구 오리온스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오리온스에서 이충희 감독이 4승 22패로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자진 사퇴하자 그 자리를 물려받아 감독 대행으로 남은 시즌을 치룬 후, 정식 감독이 되어 2008-09 시즌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 농구 역사상 처음으로 농구인 2세 감독이 탄생한 것. 하지만 이 당시 오리온스는 프런트가 개판을 치고, 김승현은 골골대고, 나머지 선수는 없는 한 마디로 막장 중의 막장. 여기에 혼혈 드래프트에서 1순위냐, 꽝이냐를 뽑는 확률 1/2의 상황에서 꽝을 뽑으면서 혼혈 드래프트 1순위도 놓치는 불운까지 겹쳤다. 이 때 김상식 감독이 1순위를 놓치고, 1순위를 가져간 사람은 끝 번호로라서 뽑기 자체를 안 한 뽑기의 끝판왕허재 전주 KCC 이지스 감독이다. 이 때 박장대소하는 허재와 머리를 감싸쥐고 좌절하는 김상식이 찍힌 사진이 꽤 유명하다.(...) 허재 감독 항목에도 있는


바로 이거...

결국 김상식 감독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진 사퇴하면서 감독 생활을 끝냈다.

그 후,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선수와 코치로 같이 활동했던 김동광 감독이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이 되자 2012년부터 서울 삼성 썬더스의 코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김동광 감독이 2014년 1월 27일부로 자진 사퇴하자 감독 대행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감독대행만 세번째

시즌 이후 이상민이 감독을 맡게 되면서 감독대행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2. 전 축구선수 김상식


전북 현대 모터스 코치
김상식 (金相植 / Kim Sang-sik)
생년월일 1976년 12월 17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전라남도 해남군
포지션 수비수/수비형 미드필더
신장 184cm
등번호 4번[1]
프로입단 1999년 천안 일화
소속팀 성남 일화 (1999~2002), 95경기 5골
광주 상무 (2003~2004), 62경기 3골
성남 일화 (2005~2008), 100경기 6골
전북 현대 모터스 (2009~2013)
스태프 전북 현대 모터스 코치 (2013~ )
국가대표 2000~2012, 60경기 / 2골[2]

2009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이동국
FW
닐손
MF
최태욱
MF
기성용
MF
김정우
MF
에닝요
DF
김상식
DF
김형일
DF
황재원
DF
최효진
GK
신화용

2.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생은 전남 해남이지만 초등학교때부터 부산에서 자라와 대학교는 대구대학교를 나왔다. 별명은 젊은 시절부터 별명인 독사와 본인이 장난스럽게 붙인 식사마가 있다.

2.2. 플레이 성향

주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지만 팀 사정에 따라 센터백으로 뛰기도 한다.[3] 한창 젊은 시절에는 경이로운 활동량과 거친 수비로 상대를 아예 지워버리는 플레이가 특기였다. 이때 생긴 별명이 독사. 나이가 들고나선 뛰어난 축구지능으로 상대방의 패스 줄기를 끊어버리는 스타일로 탈바꿈했다. 여기에 탁월한 위치선정과 준수한 공중볼 장악능력도 겸비하고 있었다. 공격가담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우수한 롱패스 능력을 갖고 있어 전북 최강희 감독이 추구한 닥공 축구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최강희 감독은 루이스, 에닝요 등을 활용한 패싱 게임이 상대팀의 적극적인 압박에 저지당할 경우 차선으로 정성훈이나 로브렉같은 장신 공격수를 투입해 미들을 생략하고 한방에 찔러주는 전술을 사용했기에 그의 롱패스는 귀중한 공격 자산이었다.[4]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한 김남일에 비해 뒤지지만 K리그 커리어는 김상식이 더 우위에 있다.[5]

2.3. 프로팀 경력

2.3.1. 성남 시절

1999년 드래프트에서 일화로부터 지명받아 입단을 하고 입단 첫해부터 주전을 꿰차며 2003년 입대 전까지 단 한번도 주전을 놓치지 않으며 2001, 2002년 2년 연속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6]

2003년 군복무를 위해 당시 상무에 입대해 거기에서도 주전으로 뛰었으며 군복무 2년차인 2004년에 기록한 통합 8위는 2012년 현재까지도 상무의 역대 최고 성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대 후 성남으로 복귀하여 2006 시즌 우승의 주역이 되었으며 2007년에도 AFC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K리그 준우승을 이끌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성남팬들은 김상식이 성남의 레전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2008년부터 김학범 감독의 무리한 베스트 일레븐 운영으로 부상자의 속출과 김상식, 김영철 등 노장 선수들의 체력 고갈로 인한 노쇠화가 겹치며 팀의 성적 부진으로 김학범 감독이 사임하고 신태용 감독이 부임하면서 노장 선수와 고액 연봉자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동국, 김영철 등과 함께 방출 통보를 받는다.

2.3.2. 전북 시절

성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은 뒤 팀의 수비라인과 구심점을 잡아줄 노장 선수가 필요했던 전북의 최강희 감독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당시 전북의 유망주였던 문대성, 홍진섭과 2:2 트레이드되어 전북에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이동국과 성남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면서 동계 훈련에 착실히 열중한 후 재기에 성공, 2008년까지만 해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던 전북의 수비라인을 완벽하게 조율하며 정규리그 1위로 시즌을 마쳤고 챔피언결정전에서 자신을 내쳤던 친정팀 성남을 상대로 승리하며 전북에게 창단 첫 우승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이후 2011년에도 팀의 두번째 우승의 주역이 되었으며 2012년 팀의 감독이던 최강희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해간 뒤에는 2007년 이후로 5년만에 국가대표팀에 재승선하는 경사까지 맞게 되었다.

2013 시즌부터 플레잉코치를 겸임한다. 은퇴 이후 코치 합류를 대비해서라고.

2013년 11월 26일, 구단측에서 은퇴를 발표했다.


2.4. 대표팀 경력

2002년 이후 김남일이을용이 대표팀 허리의 중추로 자리잡고 이후에도 김정우, 기성용같은 쟁쟁한 후배들이 올라왔기에 명성에 비해 국제대회 출전이 그리 많진 않다. 2006년 독일 월드컵과 2007년 아시안컵 출전이 주목할 만한 경력이다. 헌데 본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임에도 한번씩 센터백으로 기용될 때가 있었다. 핌 베어벡은 세계축구의 주류였던 센터백의 공격가담과 빌드업을 대표팀에도 적용시키려 했는데 당시 대표팀에는 적당한 자원이 없었다. 그래서 수비적인 롤을 맞은 선수중 공격전개능력과 축구 아이큐가 높다고 판단한 김상식이나 김동진을 센터백으로 기용했는데 이때마다 좋지않은 모습을 보여 안먹어도 될 욕을 꽤 먹었다.

단, 2006년 독일 월드컵과 2007년 아시안컵에선 아니다. 독일 월드컵에선 토고전과 프랑스전에 후반 교체멤버로(각각 후반 83분, 69분) 투입되었다. 그와 교체되어 나간 선수는 토고전은 조재진, 프랑스전은 이호였다. 토고전은 후반 굳히기 역할이었고 프랑스전은 동 포지션인 이호 자리에서 뛰었다. 최진철, 김영철이 주전이었고 둘 중 한명이 빠지면 김진규가 들어갔기에[7] 김상식이 센터백 알바를 할 일은 없었다. 베어벡 취임이후 펼쳐진 아시안컵 예선때는 역시 전문 센터백이 아닌 김동진과 함께 호흡을 맞춰 대만, 시리아, 이란과 묶인 조별 예선에 나섰으나 이란과의 홈경기에서 후반 90분 클리어링 미스로 바히드 하셰미안에게 동점골을 내주는 등 불안한 모습만 보이고 베어벡 감독에 대한 비판이 커져 본선에선 김진규, 강민수가 주전 센터백으로 출장하고 김치곤이 이들과 경쟁했다. 김상식은 성남 동료 김두현, 손대호와 함께 미드필더로 뛰었다.

2006~7년이 대표팀에서 가장 중용된 시기인데 1승 1무 1패로 아쉽게 탈락한 독일월드컵때는 백업 멤버였기에 별다른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고 아시안컵때는 예선에선 센터백 알바 시키는 바람에 부진하고 제 포지션을 찾은 본선때는 대표팀이 역대급 수면제 축구를 한데다 본인이 음주파문까지 일으켜 이미지 쇄신을 못했다.

음주로 인한 징계 이후 대표팀과 인연이 멀어졌다가 2012년 최강희 감독이 대표팀을 맡으면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예선에 김상식을 소집했다. 당연히 K리그팬들은 이 결정을 환영했다. 그리고 본경기에서 나머지 미드필더들이 밀고 올라가서 휑하니 빈 중원을 김상식 혼자 청소하는 활약을 선보였다. 대표팀은 무난히 쿠웨이트를 꺾고 최종예선 진출권을 획득했고 김상식은 뒤늦게나마 자신의 진가를 온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구겨진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2.5. 기타

2007년 아시안컵 때 대회 중에 동료인 이운재, 우성용, 이동국과 함께 술을 먹은 사실이 나중에 알려져 술타스틱 4라는 오명과 함께 대한축구협회로부터 국가대표 1년간 정지, 대한축구협회 주관 대회 2년간 출전 정지의 중징계를 받았었다.

리그에서도 손에 꼽힐만한 노장이고 공격지향 컬러를 가진 두 팀-성남, 전북-에서 수비형 미드필더 중책을 맡은만큼 대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의외로 개그 캐릭터 이미지가 있다.[8]성격 자체가 낙천적이고 사교적이라 어디를 가더라도 분위기 메이커로 활약한다. 2006년 독일 월드컵과 2007 아시안컵 당시 싸이월드에 올려놓은 재치있는 글과 댓글들로 식사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동국과는 친형제처럼 무척 가까운 사이로. 이동국이 감독하면 자신은 코치를 맡겠다고 할 정도로 무척 친하다.

현역시절에는 축구게임인 위닝일레븐과 인연이 많다. 위닝일레븐 제작진 중에 김상식의 팬이 있는지 박지성과 같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주로 키누상칙(キヌ・サンチク, CINU SANTIKU)이라는 가명으로 WE UNITED라는 가상의 클럽팀에 소속으로 등장한다. 실명으로 국대로 등장할때가 있는데 실명 김상식은 그대로 나두고 가명 김상식을 다른 선수로 수정하는 유저도 있었다. 위닝일레븐 2013에서는 삭제되었다가, 위닝일레븐 2014에서는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전북 현대에 실명으로 등록되어 있다. 은퇴한 이후에 등장한 위닝일레븐 2015에는 당연히 안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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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009년 전북 이적 후. 성남에서는 14번이었다.
  • [2] 2012년 2월 29일 기준
  • [3] 12시즌 전북의 주전 센터백인 조성환, 임유환, 심우연 등이 돌아가며 부상당하는 바람에 김정우와 함께 센터백 알바를 뛰었다.
  • [4] 팀 후배로 같은 포지션에 터프한 수비로 유명한 정훈과 교체 횟수를 비교해보면 차이가 꽤 많이난다.
  • [5] 사실 김남일에 대해선 2002 월드컵 이전까진 도대체 왜 뽑았냐는 여론이 절대다수였다. 심지어 전남 서포터들까지도. 물론 월드컵 끝나고나선 데꿀멍하고 사죄문을 올렸다.
  • [6] 성남은 김상식이 입대한 2003년에도 우승하며 전무후무한 두번의 3년 연속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 [7] 토고전은 김진규, 김영철, 최진철을 한꺼번에 기용해 쓰리백을 썼다가 전반에 선제골 허용하고 후반에 김진규를 빼고 포백으로 전환했다. 프랑스전은 김영철과 최진철이 나섰고 스위스전은 김진규와 최진철이 나섰다.
  • [8] 전북 홈페이지 프로필이 등록된 '축구를 하게 된 동기'가 '배드민턴 부에 있었는데, 라켓을 안줘서.^^'이다(...)# 다만 라켓을 지급하지 않은 것은 라켓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라켓을 잡기 전에 기본기부터 다지라는 구포초등학교 배드민턴 부의 내부 방침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