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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국

last modified: 2015-02-15 19:45:39 Contributors

Contents

1. 소개
2. 국가명
3. 역사
4. 후대의 전래
5. 관련 항목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이안(利眼)이 비로소 밝았네.
비록 인륜(人倫)은 생겼지만,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지 않았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동국(東國)은 서울이 갈렸네.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駕洛國)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사람 없으면, 누가 백성을 보살피랴.
드디어 상제(上帝)께서, 저 창생(蒼生)을 돌봐 주었네.
여기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내셨네.
산 속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네.
속은 오히려 아득하고, 겉도 역시 컴컴했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듯 하나 들으니 여기 소리가 나네.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치네.
7일이 지난 후에, 한때 안정되었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이 텅 비었네.
여섯 개 둥근 알이 내려오니, 한 오리 자줏빛 끈이 드리웠네.
낯선 이상한 땅에, 집과 집이 연이었네.
구경하는 사람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 우글거리네.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네.
같은 때 같은 자취는, 아우와 같고 형과 같았네.
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네.
왕위(王位)에 처음 오르니, 온 세상은 맑아지려 했네.
궁전 구조는 옛법을 따랐고, 토계(土階)는 오히려 평평했네.
만기(萬機)를 비로소 힘쓰고, 모든 정치를 시행했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하나이고 오직 정밀했네.
길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했네.
사방은 모두 안정해지고, 만백성은 태평을 맞이했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大椿)의 나이를 보전하지 못했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했네.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일세.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사당의 제사가 오직 향기로웠네.
세월을 비록 흘러갔지만, 규범(規範)은 기울어지지 않았네.
-《삼국유사》 가락국기

1. 소개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일원에 위치했던, 일명 금관가야[1]로 알려져 있던 가야연맹의 일원이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가락국기에 의하면 개국군주는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구형왕대에 이르기까지 490년동안 유지되었으며 10대[2]의 왕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10대 구형왕까지를 왕조로 보나, 해김씨 족보에는 11대 말왕이 마지막 왕으로 기재되어 있다.

4세기 중반까지 가야연맹의 맹주국이었으나 이시품왕 대에 이르러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에는 광개토대왕의 남방 정벌 이후인 5세기 초반까지 국가의 위세가 기울지 않았다는 수정론도 있다.

금관가야와 관련된 주요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다

2. 국가명

일반적으로 금관가야라고 불리우고 있으나, XX가야란 이름은 태조 왕건이 통일이후 행정 제도를 개편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이후 XX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했기에 그 당시 불리우던 정식 국명이 아니다. 이는 구야국 뿐아니라 여타 가야의 5개국들도 마찬가지.

사서에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한 조) · 구야한국(狗邪韓國, 왜인조)이란 이름으로써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국(金官國), 일본서기와 일본서기에서 인용한 백제기에서는 수나라(須那羅), 남가라(南伽羅) 등으로 등장한다.

특히 일본서기에는 가라(加羅)· 남가라(南加羅, arihisikaranokuni - 앞가라?)[3]· 남만(南蠻) · 수내라(須奈羅) · 소내라(素奈羅) 등의 여러가지 이칭으로 등장하는데, 이 중 수내라(須奈羅) · 소내라(素奈羅)와 같은 이름은 금관(金官)이란 국명과도 연관이 있는데, 즉 '쇠나라'라는 뜻이며, 이것은 구야국이 당시 철의 주산지였음에 기인한다.

한편으로 임나(任那)라고 불렸을 가능성도 큰데, 삼국사기 강수전에서는 '임나가량(任那加良)'이라고 했고, 진경대사탑비(924)에 '임나왕족(任那王族)'이 있다.[4] 400년 태왕비에서도 임나가라(任那加羅)가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 임나는 가야 지방을 통칭하는 표현이며, 임나일본부설으로 인해 이 표현에 대해서는 현대의 거부감이 심해졌다. 혐한초딩들도 안믿을 임나일본부설로 인해 영원히 고통받는 임나

책자마다 다르지만 전기 가야시대의 국명은 가락국으로, 후기 가야시대에는 금관국으로 통일해서 표기하는 책도 있다. #

현재 학계에서 '구야국'은 보통 초기 금관국을 지칭하는데 그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일본서기의 기록은 일관적이지 않고 또 '남가라', '남만' 등의 표현은 스스로 자칭했을 가능성이 낮다. '임나'는 현재로서는 임나일본부설 문제로 인해 껄끄러운 표현이며, '가라' 등의 표현도 일대의 통칭인 '가야'와 통하므로 특별히 김해 가야를 가리키는 표현이 되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현재 한국 고대 사학계의 주요 논거인 삼국사기의 '금관국'으로 항목 이름을 사용한다.

3. 역사

2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여 4세기까지는 변한에서 독보적인 지역이었다. 그 전까지 교역을 담당하면서 위세를 떨쳤던 사천 늑도와 창원 다호리가 쇠퇴하는 가운데 초기에는 김해 양동리, 3세기부터는 김해 대성동을 중심으로 일국을 이루었다. 4세기에는 낙동강을 건너 부산을 아우르면서 낙동강 하구 유역을 장악해 막대한 교역 이익을 바탕으로 급성장했다. 실제로 4세기 무렵까지 이지역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의 질과 양은 장난이 아니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도 마한에서 '구야진지염(狗邪秦支廉)'이라고 부르며 특별 대우를 한 것으로 보인다. 변한에서 났다는 철을 한 군현과 왜에 팔기에도 용이한 지역이고(낙동강 하구), 굳이 왜인조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왜와도 교역한 것으로 보이므로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가야연맹설의 논리대로 연맹체 같은걸 형성하지는 않은것으로 보인다. 부산의 독로국과는 그런 관계인듯 보이지만 그걸로 끝. 타 소국에 중국제 사치품이나 철을 팔아치운 흔적은 보이긴 한다.

삼국사기 상으로 3세기 초 포상팔국의 난에 의해 다굴을 맞고 신라에 헬프를 치는 상황에 몰리게 되고, 이후 주도적인 위치를 상실하고 이리저리 국제외교적으로 끌려다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 子于老與伊伐湌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14년(209) 가을 7월에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가라(加羅)를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十七年 春三月 加耶送 王子爲質
17년(212) 봄 3월에 가야(加耶)에서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게 하였다. - 《삼국사기》신라본기, 내해이사금

하지만 최근 대성동 고분군에서 모용선비가 세운 삼연(전연, 후연, 북연)계통의 유물이 대거 발굴되면서 삼연 - 금관국 - 왜를 잇는 해상루트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보여서 그렇게 끌려다니는 위치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유물들이 출토된 대성동 88, 91호의 시기는 4세기 중반이며, 대성동의 주부곽식 대형 목곽묘인 1호가 최후로 축조된 5세기 초까지 금관가야는 가야 연맹체 중 가장 규모가 컸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고고학적 사료는 위의 삼국사기 기사와 배치되는 면이 있어 주의를 요한다.

또한 최근 들어 삼국사기 물계자전의 기록을 분석하면서 '아라(阿羅)'가 '가라'의 오기가 아닌 안라국이었을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어, 금관국이 공격을 받았는지조차 의문점이 찍히는 상황에 돌입하고 있다.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 請救 尼師今使王孫捺音 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 … (중략) … 後三年 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그 때(209?)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아라국(阿羅國)을 치기로 함께 꾀하자 아라국에서 사신을 보내와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날음(捺音)으로 하여금 이웃의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게 하여 드디어 8국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 (중략) … 그 후 3년이 지나(212?) 골포(骨浦), 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의 세 나라 사람이 갈화성(竭火城)을 공격하여오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여 세 나라의 군사를 대패시켰다. - 《삼국사기》, 물계자전

일본서기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사지비궤의 가라 공격 사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금관국의 왕실을 흔들어 놓은 사건으로 보는 의견도 많다. 이에 따르면 일본서기 상 262년(이주갑인상으로 382년으로 본다면) 사지비궤가 신라미인계에 넘어가 뜬금없이 금관국 왕실을 몰아내 백제의 목라근자가 복권시켜주는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목라근자의 아들 목협만치가 개로왕시기의 인물이기 때문에 목라근자의 활동시기를 382년이 아니라 442년으로 보게 된다면 이 시기의 일로 볼 수 없다.(이근우 (2012), 고대의 낙동강 하구와 왜)

399년에는 신라가 국경에 왜가 들어차 있다고 하여 광개토대왕의 원군을 불러 왔는데, 이 때 왜군이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이르렀다'고 하여 400년 광개토대왕이 이를 쓸어버리면서 금관국이 휘청거리게 되었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남정에 대해서도 직접 김해를 공격했다, 안 했다, 아니 오지도 않았다, 등 다양한 설들이 대립 중이다. 특히 5세기 이후에도 대성동 고분군의 위세가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929170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고, 고구려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는 신라와 달리 고구려계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학설이 흔들리는 경향이 있다.

5세기 초반 이후 주도권은 반파국에게로 넘어갔고, 결국 신라에게 밀려 532년 11대 구형왕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고 멸망하였다. 다른 가야 국가들은 백제가 살려 보려고 애쓴 것과 달리 금관국은 백제가 그럴 틈도 없이 멸망했는데, 5세기 이후 이미 낙동강 서안에 신라의 교두보가 존재해 온 (백제 입장의) 원격지인 데다가 천도 등으로 인해 백제가 정신이 없었던 탓이 큰 듯. 그러나 금관국의 멸망은 백제에 지리산 ~ 낙동강 동안 일대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4. 후대의 전래

다른 가야 여러나라들에 비해 구형왕은 항복한 뒤 신라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어, 그의 증손자인 김유신에 이르면 삼국통일에 지대한 업적을 남겨 죽은 후 유례없는 왕으로의 추증(興武大王)을 받게 된다. 또한 신라 문무왕모계 쪽으로 금관국 왕실의 혈통을 잇고 있기 때문에 신라 중대왕실과도 연관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문무왕 본인도 김수로왕의 능역과 제사 관리에 꽤 신경을 쓰기도 했다.

알려져 있는 역사서는 가락국기가 유일하다. 하지만 이 또한 현재까지 전해져 있지 않으며 삼국유사에 일부가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가야에는 왕명조차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이정도로 남아있는게 다행일 정도.

금관국의 김수로 왕과 왕후 허황옥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바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이다. 덤으로 김해 허씨에서 사성으로 인해 갈라진 인천 이씨 같은 뿌리이다. 그러므로 세 집안은 한 집안과 같으므로 동성동본과 같은 정도의 관습인 이성동본으로 처리하여 혼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법적으로는 이성 동본 혼인은 2000년대 후반 법이 위헌 판결로 개정되며 동성동본도 혼인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완고한 집안에서는 여전히 어렵다고 한다. 김해 김씨야 김유신 버프로 족보매매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지만, 허씨의 경우에는 능지처참 당한 허균이 있었기 때문에 이쪽 족보를 살리가 없고,인천 이씨의 경우에는 워낙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고려의 실권자였다가 반역자가 된 이자겸과 조선의 명장임과 동시에 반란의 수괴였던 이징옥이 있었기 때문에 이쪽 족보를 살리가 없다. 물론 그런거 안따지고 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액을 들여 사는 족보 속 조상이 반란 수괴가 껴있는 족보를 사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즉 김해 김씨는 어떨지 몰라도 김해 허씨와 인천 이씨의 경우에는 나름 그 순수성 피의 순수성 따위 어차피 외가쪽이 계속 섞이니 의미는 없지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완고한 집안으로서의 발언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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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금관이라는 것은 신라가 532년에 가락국을 점령하고 후대에 생겨진 것임
  • [2] 혹은 11대
  • [3] 가라는 한자 "韓"를 말하는 거다.
  • [4]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稟氣鰈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