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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

last modified: 2018-08-18 23:46:55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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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에 입성하는 인민해방군

국공내전
날짜 1차 : 1927년 ~ 1936년
2차 : 1946년 ~ 1949년
장소 중국 대륙 전역 및 부속도서
교전 세력 중국 국민당
(국민혁명군)
중국 공산당
(중국공농홍군)
지휘관 장제스
천청
옌시산
허잉친
바이충시
리쭝런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리리싼
린뱌오
주더
허룽
예젠잉
쉬하이둥
병력 430만 명(1946년)
365만 명(1948년)
149만 명(1949년)
120만 명(1946년)
280만 명(1948년)
400만 명(1949년)
피해규모 불명 불명
결과 중국 공산당, 중국 전역 장악.
기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중국 국민당의 국부천대.

Contents

1. 개요
2. 전개
2.1. 제1차 국공내전
2.2. 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합작
2.3. 제2차 국공내전 발발: 내전 재개
2.4. 공산당 반격과 최후 승리
3. 후일담 : 70년대까지 지속된 체제경쟁
4. 여담
4.1. 장제스의 국보 유물 사랑
4.2. 조선인민군 참전 떡밥
4.3. 의외로 활약을 한 일본군 치하 전차
5. 대중문화에서 다뤄지는 국공내전
5.1. 대체역사소설 속의 국공내전 - 중화민국의 승리?
5.2. 한국 전쟁처럼 무승부로 끝났다면?
5.2.1. 남북분단이 될 경우
5.3. 기타 대체역사
6. 장제스 정권의 한계와 공산당의 승리 원인
7. 의의
7.1. 아시아 공산블록의 대확대
7.2. 구 체제의 청산과 근대적 국민국가의 완성
7.3. 공산권 세력 판도의 변화


1. 개요

国共内战. 1927년 4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중국의 패권을 두고 벌인 내전. 이른바 현대판 초한지. 실제로 여러 인물이 너무나 비슷하게 대칭되는데, 마오쩌둥은 한 고조처럼 초반 약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천하를 손에 넣었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도 패한 항우처럼 장제스는 500만대군을 보유하고서도 결국 패해서 대만으로 쫓겨나고 만다. 한나라 초반에 한신이나 팽월, 영포 같은 일등 공신에 대한 숙청이 벌어진 것처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최고의 공신이었던 펑더화이린뱌오는 숙청되었으며, 고조가 늙은 후 왕비인 여후가 실권을 장악한 것처럼 마오가 병석에 눕자 마오의 부인인 장칭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국공내전 초한지
마오쩌둥 유방 초반 약세, 후반 역전, 말기 공신숙청
장제스 항우 강력한 군사력과 자원, 그러나 민심상실로 패퇴
펑더화이 한신 군사적 천재, 후에 숙청
이충시 범증 천재군사, 그러나 항우(장제스)의 의심을 사서 한직
린뱌오 영포[1] 군사적 천재, 후에 반역을 도모했으나 실패하여 사망
주더 조참 군사적 천재, 숙청에서 생존[2]
저우언라이 소하 또는 장량 후방에서 활약, 2인자, 숙청에서 생존
덩샤오핑 진평 공신,수차 실각, 재기, 4인방(여씨일가) 축출, 권력장악
리쭝런 계포 항우(장제스)쪽의 인물이었으나, 전쟁이후 유방(마오쩌둥)쪽으로 귀화 후 요직을 차지.

해설하면 진나라가 존재하는 동안은 유방과 항우는 형식적으로나마 협력 관계에 있었는데, 이는 국민당과 공산당 역시 일본의 패망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는 동맹 관계에 있었다는 점과 유사하다. 그리고, 진나라 멸망으로부터 유방이 항우를 제압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4년인데(B.C. 206-202), 이는 일제 패망 후 공산당이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을 몰아내는데 걸린 시간과 같다(1946-1950). 초한지에서 항우가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을 포함한 노른자위 땅을 확보한 상태에서 유방이 깡촌인 촉한의 산악지대를 근거로 세력을 키워 나갔었는데, 국공내전시 공산당 역시 대도시 대신 농촌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는 점에서 큰 유사성이 있다.

일부에서는 모택동을 조조에, 저우언라이를 순욱(때때로는 현대판 제갈량)에, 장제스를 원소에, 바이충시를 저수전풍에 비견하기도 한다. 이는 조조를 극찬한 마오쩌둥 자신에 따른 것.

2. 전개

2.1. 제1차 국공내전

1911년 쑨원등이 주동이 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졌으나, 초대 대총통인 위안스카이는 중앙정부를 장악하여 독재정치를 폈고, 다른 군벌세력들은 중원을 할거하면서 오히려 청나라보다 더 심각한 악정을 펼치게 되었다. 쑨원은 혁명이 타락했음을 한탄하고, 이런 군벌세력들을 정리하여 진정한 공화국을 세우려고 하였다.

원래 쑨원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영국과 미국과 같은 서방국가들이 제국주의적인 입장에서 중국의 이권을 강탈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갓 건국한 소련에 점점 기울어졌다.

소련은 갓 건국했지만, 당시 서방 국가들에 의해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어 고립을 벗어나고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을 구축하려고 했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창당되었으나, 소련에 있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국민당에 협력하는 방침을 채택했고, 공산당원들은 당적을 가진채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식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작하게 되었다. 이것을 제1차 국공합작이라고 한다. 국민당은 광동성을 세력기반으로 하고 있었지만, 당시 중국에는 군웅할거 상태였다.

국민당은 소련의 원조로 군대를 양성하여 북벌에 나섰고, 공산당은 이에 협력하여 중국은 국민당의 주도하에 통일되는듯 했다. 그런데 쑨원 사후 장제스는 반공적인 입장이었고, 1927년 국부군(민정부군)이 상하이를 함락하자 공산당원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상하이 내부에서 호응하여 국민당군의 상하이 함락을 도왔기 때문에, 공산당으로서는 갑자기 우군이 적으로 돌변한 상황이었다. 이 때 공산당은 5분의 4가 숙청당하는 사태를 맞게 되고 지하조직화 되어 내전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 공산당은 리리싼과 같은 교조주의자들이 소련의 예를 따라 도시를 장악하려는 반격작전을 펼쳤으나 모두 실패했고, 오직 마오쩌둥이 이끄는 부대만 장시성의 징강산으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해방구를 열고 게릴라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 부대는 4번에 걸친 국민당군의 토벌전을 모두 분쇄하고 총병력 60만에 이르는 대부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5번째 100만 대군을 동원한 국민당의 마지막 대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근거지 장시성에서 산시성에 이르는 대장정을 감행(중국 동남부에서 서북쪽으로 시계방향 돌듯 이동하는 미칠듯한 대이동)하고, 이윽고 중국 북서부의 산시성 옌안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다시 게릴라전을 펴쳐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홍군이 이렇게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엄격한 군율때문이었다. 군벌 소속 군대는 물론, 국민당군은 군기가 엉망이어서 도적떼로 간주되어 농민의 지지를 얻기 힘들었지만, 홍군은 민폐를 끼치는 것을 금했고 이에 대한 처벌이 엄격했기 때문에 농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2.2. 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합작

홍군(공산당군)이 괴멸되지 않고 서북부에서 세력을 확정하기 시작하자, 장제스는 만주사변 이후 본거지를 잃고 산시성에 주둔중인 장쉐량군에게 토벌을 명한다. 장쉐량은 용감히 홍군에게 도전했지만 참패했고, 도리어 중국인끼리 싸우기보다는 일본과 싸우자는 공산당측의 선전에 설득되어 장쉐량군과 홍군은 동맹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본 장제스는 자신이 직접 토벌전을 지휘하기 위해 산시성으로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쉐량은 토벌전을 지휘하기 위해 산시성에 온 장제스를 구금하고 2차 국공합작을 설득하는 이른바 '서안 사건'을 일으켰다.

장쉐량이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는 장쉐량의 부친 장쭤린은 본래 남만주와 요동에 대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동북지역 최대의 군벌이었으며 부분적으로 일본과 협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본은 군벌과의 협력 대신 만주의 이권을 독점하는 쪽을 택했고[3], 장쭤린은 결국 전용열차로 이동중 일본군이 설치한 폭탄으로 폭사, 장쉐량은 휘하 병력과 함께 장제스에게 투항하게 된 것. 그런데 장제스는 이들을 동북군이란 이름으로 재편성, 홍군 토벌에 전념할 것을 지시하였으니 일본과 만주국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친 장쉐량과 이들 만주 출신 지휘관들이 불만이 가득할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4] 거기에 다른 군벌출신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장제스는 장쉐량의 충성심을 끊임없이 의심해왔고, 동북군의 주요 지휘관을 자신의 직속 부하들로 갈아치우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게 되었다. 당시 혈기왕성한 30대였던 장쉐량이 이를 보고만 있었을리는 만무. 결국 견디다 못한 장쉐량은 끊임없는 구애를 펼치던 홍군과의 연합을 선택, 홍군 토벌 독려차 시안을 방문한 장제스를 무력으로 연금하는 데 이르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기와 비슷한 신세였던 양호성과 눈이 맞아 함께 일을 치르게 된다.

결국 그 설득에 응한 국민당은 다시금 일본에 맞서는 공동전선을 펼치게 된다. 기실 장제스의 구금 및 동북군과 홍군의 연합이 처음 알려졌을 때, 국민당 내 강경파들은 오히려 "총통 개인의 목숨보다는 초공(공산당 토벌)의 대의가 더 중하다"라고 주장하며 강경대응을 시도하기도. 이는 다분히 장제스가 잡혀죽으면 내가 국민당에서는 짱먹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국민당 내의 갈등이 상당히 심각했음을 반증한다. 그러나 장제스의 아내이며, 국민당 내부와 서양 열강의 지도부에까지 폭넓은 영향력을 갖고 있던 송미령(쑹미링)이 장제스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한 결과, 결국 2차 국공합작(과 더불어 장개석도)은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여튼 2차 국공합작으로 공산당은 크게 세력을 넓히게 되었다. 물론 이후 장제스 정부가 항일에 몰두할 동안 공산당이 뒤치기를 했다는 견해 역시 상존하기도 한다.

중일전쟁 초반(1937년)에 장제스 직계의 중앙군이 적극적으로 일본군과 싸운것은 사실이지만 (난징전투 이후의 난징대학살이 바로 이런 국민당군의 저항에 분노한 일본군의 대학살로 이뤄졌다.) 그 전투에서도 국민당군은 매우 졸렬하게 지휘하여, 국민당군은 수적우세와 무기체계[5] 유리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게 참패하고 수도인 난징을 내주었다. 이 전투에서 장제스 직속의 중앙군이 거의 소멸하자 장제스는 싸우고 싶어도 싸우기 힘들어졌고, 기껏해야 군벌휘하의 부대에 일본군과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군벌들은 자기부대가 막강한 일본군과 싸워 소멸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난징함락 이후 국민당측(중앙군이나 군벌군이나) 적극적으로 싸운 전투는 거의 없다. 공산당은 처음부터 게릴라전으로 나왔고, 국민당군이 벌인 난징전투와 대단위 회전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반공위키러들이 공산당측이 하라는 항일전쟁은 안하고 국민당군의 뒤치기에 몰두했다고 주장하지만, 일본군이 자신들의 지배지역에서 삼광 작전이야말로 마오쩌둥측의 게릴라전이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본군의 보급선은 공산군의 게릴라전으로 항상 위협을 받고 있었고, 일본군이 장제스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진출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일본군의 후방에서 펼친 공산군의 게릴라전 때문이었다.

또한 이곳에도 국민당이 500만대군을 보유하고도 참패했다고 나와있는데, 국민당군의 태반은 능력도 없고 중일전쟁때 패퇴만을 일삼던 군벌세력의 군대였다. 요심-화북 전역에서 실책을 저지르고 정신차린 장개석은 장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는데, 이 군벌군이 공산당에 투항함으로서 급격히 무너졌다. 일단 공산군은 기본전략이 정면대결이 아니라 게릴라 전이기에 국민당과 같은 대규모 회전을 벌인바는 없었지만 하남성 서부에서는 게릴라 전이 꽤 많았다.[6] 아무튼 장제스군이 충칭으로 쫓겨난 이후, 화북의 공백지에서 공산당의 세력은 점점 늘어났다. 물론 국민당의 피를 먹고 자라난 것 일본군은 이런 게릴라 전에 대응해 신멸작전이란 민간인 거주지 초토화 전술을 펼쳤으나 그럴수록 일본에 대한 적개심만 높아갔다.

국민당 정부도 장강(양쯔강) 전투에서 참패하여 중앙군이 무너진 이후 중경으로 옮겨간 이후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였으며 꿀땅이 날아가고 산악지대만 남은 상황에 공격을 어떻게 하지?, 일본군은 충칭으로 옮긴뒤 우주방어를 펼친 국민당군의 방어선을 뚫는 것도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미영의 지원에 힘입어 버마전선부터 남중국에서 전투를 수행하기도 했다.) 물론 이 사이에도 공산군은 한다는 항일은 안하고 국민당의 유격대를 박살낸 적도 많았고, 국민당 역시 각지에서 공산군의 부대를 공격하는데 치중하기도 했다.

애초에 국민당군과 공산군의 전략은 판이하게 달랐다. 중일전쟁에서 국민당군이 전선에서 일본군과 직접 부딪치는 정규전을 맡았다면, 공산당 측의 항일전략은 원래 일본군이 점령못한 농촌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도시를 점령한 일본군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2.3. 제2차 국공내전 발발: 내전 재개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간의 회담이 열리는데, 1945년 8월 화평교섭회담(和平交涉會談)이 개최되고 같은 해 10월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발표, 정치의 민주화와 함께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부강한 중국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뜻을 같이하고 의견을 도출해내었다. 참고로 쌍십협정이란 十월(10월) 十일(10일)에 협정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쌍십협정이다.

하지만 1946년 장제스의 중화민국군은 이 조약을 어기고 같은 해 6월 공산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장제스군은 50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일본군에게 노획한 무기와 태평양 전쟁 이후의 미군의 잉여무기를 넘겨받아 장비면에서는 공산군보다 훨씬 유리했다. 더구나 국민당군은 공산당이 전혀 없는 공군이라는 요술방망이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미군 군사고문단이 도운데다가, 심지어는 포로가 된 일본군 장교들까지 국민당군의 군사고문 역을 했다. 그래서 전쟁이 시작되자 파죽지세로 공산당측의 본거지인 산시성 옌안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공산당은 전술상 원래 강한 적의 주력과는 대결을 피하였기 때문에 이런 적과 직접 싸우지 않고 적이 분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민당군은 이런 도시를 점령하기는 했는데, 중국은 국토가 넓어서 500만 대군으로도 도시나 도로밖에 점령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다가 결국 병력을 분산시키는 우를 범한다. 게다가 도시 밖의 농촌지역에는 공산당군이 마음대로 휘젓고 다녔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민심도 국민당편은 아니었다. 공산당은 농촌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이때문에 농민들은 공산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결국 국민당군은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마오쩌둥이 말한 "인민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형편이었다.

2.4. 공산당 반격과 최후 승리

제2차 국공내전.

반대로 마오쩌둥은 대장정과 국공합작 기간 동안 쌓아놓은 이미지가 장제스보다 훨씬 좋았고, 특히 그의 사상에서 농업을 중시했는데[7] 사실 사상이야 어쨌든 결국 60년대에 '누가누가 사회주의 국가 짱이냐?' 자존심 배틀로 번지지만 그건 소련과의 문제에 불과할 뿐이고 중국 내부에서는 농촌을 비롯한 민중 계층의 지지가 높았으며 군의 충성도와 결집력도 훨씬 나았다.

그는 국민당군의 몇십 분의 1 밖에 안 되는 주력인 팔로군, 즉 항일 전쟁시에 형식상 국민당에 소속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이라고 불렸으나, 국공합작이 결렬된 후 "인민해방군"이라고 개칭한 군대로 전투를 철저하게 게릴라전으로 몰고 가 장제스를 괴롭혔다. 주요 전법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과의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배후지역을 장악해 도시에 거점을 둔 국민당군의 보급로를 끊어 고립시켜 각개격파하거나 항복을 받아내는 식이었다. 물론 도시로 직접 들어가는 짓은 하지 않았는데, 전차나 기관총, 대포가 친절하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 그래봤자 밥의 힘보다는 못했다. 아사할 지경인데 기관총등 중화기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거기에 군벌이 따로 놀고 장제스에 대한 충성도도 개판이었기 때문에 더욱 수월하게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홍군, 즉 공산당군이 보여준 놀라운 기동력은 상대가 허접국민당군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 공산군 부대들의 전투력이 결코 허당이 아니었다는 것은 1년후 벌어진 한국전쟁에서 세계 최강 미군과 일진일퇴를 벌인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의 주력이 미군의 화력앞에 꼼짝못하던 일본군보다도 약하다고 판단했으나, 이런 과소평가는 큰 댓가를 치룬다.

8로군은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여 여러 부대로 나뉘어서 각지에서 국민당군을 괴롭혔는데 주요부대는 다음과 같다.

  • 서북 야전군 (제1야전군)- 펑더화이 사령관, 시중쉰[8] 정치장교
    섬서성, 감숙성 방면
  • 중원 야전군 (제2야전군)- 류보청 사령관, 덩샤오핑 정치장교
    산둥성, 허난성 방면
  • 화동 야전군(제3야전군) - 천이 사령관 (정치장교 겸직)
    장강 이남 방면
  • 동북 야전군(제4야전군) - 린뱌오 사령관, 뤄룽환 정치장교
    만주 방면
  • 화북 야전군 - 녜룽전 사령관, 보이보[9] 정치장교
    산서성, 하북성 방면

참고로 각 야전군 사령관들은 1955년 계급이 도입되었을 때 모두 원수에 오른다.

1948년 가을, 만주지역에서 국민당군에게 쫓기는 척 하면서 국민당군을 분산시키던 린뱌오군은 돌연 공세로 전환했고, 병력이 분산된 만주지역 국민당군은 포위섬멸되었다. (심 전역) 이를 기점으로 린뱌오군은 계속 남진했고, 전 공산군은 공세로 전환하게 된다. 결국 국민당군은 불과 3개월만에 중국 전역에서 70개 사단이 궤멸당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항복 내지는 도주로 공중분해당한 사단들. 그리고 그 사단들의 장비는 다 홍군에게 흡수되어 이젠 물량 및 장비면에서도 홍군이 압도적인 상황으로 바뀌게 된다. (해 전역)

압도적인 병력으로 베이징을 포위한 린뱌오군은 국민당군 수비사령관 푸줘이(부작의)를 설득시켜 무혈입성했다. (진 전역) 장제스는 푸쭤이에게 독전편지를 보내는 등, 푸쭤이에게 사수할 것을 권했으나, 푸줘이는 공산당 당원이었던 딸의 설득으로 시를 공산당에 무혈로 넘겼다. 다만 무혈로 넘기는 항복조건으로 공산당은 북경을 수비하던 국민당군이 철수할 수 있도록 포위망을 열어주었다. 이 덕분에 베이징 시내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여담으로 항복 회담장에서 푸줘이가 한 말은 한마디,我有罪(나에겐 죄가 있습니다)였다고... 항복을 결정한 뒤 참으로 복잡한 심경에서 나온 말인듯. 중국 공산당 정부도 이를 봐 주어서인지 이후 푸줘이는 중국의 수리부(水利部) 장관을 20년간 역임하는 등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여하튼 베이징의 함락으로 홍군은 화북 일대를 확실하게 장악하게 된다. 어차피 푸쭤이가 북경에서 농성을 했던들, 보급이 단절되고 완전히 포위된 국민당수비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으며, 북경의 여러 문화재만 작살내고 홍군의 진격을 몇주 늦췄을 뿐,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후 홍군은 계속 남진하여 장강(양쯔강)에 이르게 되었다. 장강은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에 국민당군은 이를 경계로 중국을 남북으로 갈라 지배하려고 했다. 이종인(리쭝런)을 협상자로 내세워 공산당과 협상을 벌이지만, 공산당이 이기고 있는데 이를 받아들일 리 없지(...) 공산당은 먼저 전범(장제스)를 처벌한 후에야 협상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건 국민당측이 받아들일수 없는 조건이었다. 즉 공산당도 협상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10]

공산당군의 도하작전이 시작되자 국민당군 일부가 공산당에 넘어가 아군에게 총을 돌리는 상황이 일어났고, 결국 장강 방어선이 뚫리자 4월 23일 국민당군 정부가 있던 난징이 함락되었고, 장제스가 집무하던 난징의 총통부에는 홍기가 내걸렸다. (장강 도하 작전)


천이페이(陈逸飞), 웨이징산(魏景山)의 《총통부 점령(占领总统府)》 유화. 1977년작. 찢겨나간(…) 청천백일만지홍기에 주목.

이후 공산군은 상하이로 진격했고, 장제스는 중국 경제의 중심지이자 최대 연안도시인 상하이를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역시 간단히 함락되었다. 난징에서 패주한 국민정부는 광저우로 퇴각했다가, 10월 14일 광저우마저 함락되자 중일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충칭으로 다시 퇴각하기에 이르렀고, 11월 말 경 공산당군이 충칭까지 진격해 오자 재차 청두로 후퇴했다.

결국 1949년 12월, 장제스와 국민당은 모든 것을 잃고 대만으로 도피해 버리고 만다. 그나마 공군 전력은 남아있었고, 공산군 측에 해군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도망이 가능했다.

한국사에도 국공내전의 의의는 크다. 공산당의 승리가 없었다면 이로 인해 자신감을 얻은 김일성한국전쟁을 일으킬 확률도 낮아졌을 것이다. 설령 국민당이 망하지 않았더라도 한국전쟁 쯤 국민당 정부와 중국 본토에서 대치했을 공산당이 팔로군을 비롯한 정예군을 한반도로 파견보내진 않았을 것이다.[11]

3. 후일담 : 70년대까지 지속된 체제경쟁

국제연합 창설 당시부터 아시아에서 일본의 지위를 날려버리고[12] 5개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였던 중화민국의 국제적 위상은 당분간 유지되었다. 한국전쟁으로 미국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기 때문. 진먼 포격전(금문도 포격전)이 이때의 일이다. 중공 정부는 1971년 국제연합에서 대만 정부가 표결로 추방될 때까지 미승인국으로 정통정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미중 수교, 일중 수교와 대만 단교가 이뤄지면서 데탕트가 이루어졌다.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가 달성된 1955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전쟁의 최대 피해국이자 승전국인 중국과 식민지배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한국은 초청받지 못했다. 두 나라 모두 내전의 재발발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서 UN의 정통 정부와 공산 정부가 따로 존립하고 있어 대표성에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미국은 당연히 상임이사국인 중화민국을 초청하자고 주장했으나, 중공에게 홍콩이 위협을 받던 영국이 이를 반대하면서 결국 초청은 무산되었다. 이로서 일본은 중국, 한국과 따로 국교회복과 협상을 진행해야했다.

중화민국은 헌법 제1조로 내세우는 국시가 삼민주의이며 삼민주의에는 민주주의가 명시되어 있어, 중화민국 체계에서 민주주의는 지극히 합당한 명분을 가지고 있고, 그 구체적인 시행방법 까지도 삼민주의에서 제안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대만에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도 대단히 점진적인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다. 민주화 운동을 거친 한국이나 기타 국가들와 다른 점이다. 여기에는 장제스 일가가 2대 만에 사실상 단절(혼혈) 된데도 영향이 적지 않으며, 중공과의 대립 구도에서 일종의 체제 우월성을 근거로 주어진 측면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대만의 계엄령은 199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민주진보당의 정권 교체와 뒤이은 국민당의 정권 탈환으로 제도상으로는 완전한 민주국가이다. 물론 운용상으로 보면 한국과 같이 소모적 정쟁이 그치지 않으며, 고위층 부패나 정치보복, 권력남용도 상당히 일어나고 있는데, 제도는 정착되었지만, 민주적 마인드는 아직도 충분치 않은듯 하다. 여기에 비하면 중국은 원래부터 전체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서구식 민주주의의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여기서도 조금씩 민주화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으며, 언론자유도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이다.

참고로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체제경쟁에서 중화민국이 확실히 우세한 것으로 보였으나, 현재는 1980년대부터 규모를 이용한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룬 중화인민공화국이 체제경쟁에서 딱히 열등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참고로 양쪽의 상호방문인원은 현재 각각 수백만명에 달하며 대만인이 대륙에 가는 것은 1980년대말부터 별 문제가 없었고, 대륙인들의 대만 방문이나 관광도 2000년대부터 별 문제 없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한국인이 평양에 가는게 베이징이나 도쿄 가는 것과 별 차이가 없고, 북한인도 자유롭게 서울을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아니, 방문이나 관광을 넘어 체류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13] 대륙은 자유가 제한된 일당독재국가이고, 대만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륙인이 딱히 자유를 찾아 대만으로 망명할만한 메리트도 없어졌으며, 대만에서도 대륙인의 망명은 받지 않으려고 하는 추세다. [14]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 와선 파워 밸런스가 완전히 역전되어, 다른것은 몰라도 군사력에선 이제 대만은 중국의 상대도 되지 않는 상황이다. 20세기때처럼 대륙회복은 꿈도 못 꾸고 방어에만 전념해도 모자란 상황. 뭐 현대 중국이 국방비를 쇼미더머니 수준으로 써대니 상대가 될리가 있나...

4. 여담

4.1. 장제스의 국보 유물 사랑

여담이지만 대만으로 도망갈때 장개석은 미국에게 수송선을 지원받아 그 중 5척에 북경 고궁박물원의 유물들을 톡 털어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당시의 북경 고궁박물원에는 몇 가지 유물을 제외하고는 텅텅 비고 말았다. 이때 빼돌린 보물들은 대만에서 다른 나라 박물관에 '대여'해주고 있었다. 이때 가져간 유물이 얼마나 방대하고 다양했는지, 60년동안 계속 유물을 바꿔가며 전시했음에도 단 한번도 중복된 것이 없었다 한다.

그 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병크를 터뜨리면서 홍위병이 중국 전역의 문화재를 열심히 부수고 다닐동안, 다행히 중화민국에 가 있었던 문화재만큼은 그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국립고궁박물원은 졸지에 중국 본토보다도 더 많은 중국 전통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명소가 되어버렸다(...)

4.2. 조선인민군 참전 떡밥

근래에 비전공 모 블로거가 당시 북한 인민군이 국공내전에 대거 참전하였다는 주장을 불확실한 근거들을 들어 강변하다가 '진짜' 전쟁사 전공자에게 처발린 일이 있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연구자들마저 현혹시키는 감이 있는데, 북한 전문가인 이종석이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반박한 바 있다. [15]

  • 조선인민군 병력이 만주에 대거 파견되었다고 하는 1946~7년은 소군정기였는데, 당시 소련은 중국공산당 지원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 대규모의 병력 지원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를 놓고 국민당/미국 측과 북한/소련 간의 갈등 양상이 빚어졌을 텐데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국공내전에 관한 중국 내의 어떠한 저작물이나 증언에도 북한군의 대거 참전을 암시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 북한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 바 없다. (이종석, 《북한-중국 관계: 1945~2000》(중심, 2000), 69~74쪽.)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는데 그토록 흔적이 남지 않는다거나 북한, 중국 측에서 꼭꼭 숨겨야할 이유가 없으니, 그저 이러한 설은 떡밥 정도로 생각하고 넘기는 것이 현명하다.

북한측이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원한 것으로 밝혀진 것은 병력제공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간부의 가족들을 피난시켜준 것과, 만주지역에서 국민당군에 쫓기던 홍군이 북한지역을 통과하여 안전히 이동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국공내전의 전세 역전이 만주전역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중국공산당 측으로서는 북한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런 고마움은 후에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물론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 의하면 실제로 해방직후 북한에 들어오려던 8로군소속 조선의용군(원래는 수백명 단위였으나, 만주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가담하여 수가 사단급으로 늘어났다.)이 소련군에 의해 설득되어 국공내전에 참전한 예는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 시점에서는 절대 조선인민군이 아니었으며 당시 남한 지역에서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나온 것과 같이 마치 중국계 군사력을 소련계가 막은 공산당 주도권 다툼으로 선전되었으나, 실제로는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측이 이들을 설득시켜 참전토록 한 것이다. 이들은 인민해방군 내에서도 정예부대였으며, 어려운 임무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었다. 역시 우리 민족은 전쟁을 잘한다.

이렇게 소련의 설득으로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인으로 구성된 인민해방군의 사단이 한국전쟁 전에 북한군으로 전환된 일이 있다. 당시 그 사단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들에 증언에 의하면 상부에서 별말 설명 없이 부대가 이동한다고 해서 기차에 탔고, 자다가 깨어 도착한 곳을 보니 북한땅이었고. 그리고 내리자마자 바로 인민군 군복으로 갈아입으라는 명령을 들어서 그제서야 인민군에 편입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에서 북한군 정예사단으로 남침의 선봉이었던 4사단과 6사단이 바로 그런 식으로 전환된 사단이다. 이 일은 1949년 말에서 1950년 한국전쟁 전까지 발생한 일이다. 그 외의 사단에도 일정수의 전직 홍군이 있었다. 이들은 풍부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6.25 초기에 맹활약을 했다. 대전에서 미군 24사단을 패퇴시키고 딘 소장을 포로로 잡은 부대가 바로 이들 부대다. 제4사단장 이권무와 제6사단장 방호산은 모두 인민해방군 출신.

간단히 말하면 중국인민해방군 -> 인민군 테크를 탄 것이지 인민군 -> 중국군 테크가 아니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위의 모 블로거가 한 주장은 앞뒤를 착각한 주장이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 즉 '한나라에는 국적과 민족 불문하고 한개의 공산당만을 인정한다'는 원칙에 따라 1930년대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던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중국공산당에 입당해서 일본군과 싸웠다. 비록 소속은 중국공산당이지만 항일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한 것.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후 중국과 북한 수뇌부의 합의에 따라 1945년 해방이후 북으로 귀국해서 인민군의 주축이 된다. 2군단장 김무정을 위시한 이들 홍군 출신들은 풍부한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전에서 맹활약한다. 하지만 전후 김무정을 위시한 이권무, 방호산 등의 중국 홍군 출신 장교들은 김일성에 의해 대부분 숙청당하고, 이상조 같은 일부는 소련으로 망명한다. 익숙한 중국이 아니라 소련으로 망명한 이유는 당시 중국-북한은 혈맹관계였기 때문에 중국으로 망명하면 북에 송환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16]

4.3. 의외로 활약을 한 일본군 치하 전차


97식 전차 치하가 전차로서 제대로 대접받은 전쟁이기도 하다. 중일전쟁이 종결된 후 상당수의 일본군 전차가 중국군에게 노획된 상태에서 셔먼은 고사하고 스튜어트 경전차조차 지나가지 못하는 도로를 치하는 잘만 이용하여 기동전을 수행했다. 그 당시 중국의 개판같은 도로망 때문에 벌어진 일. 이 때문에 권총탄에 장갑이 뚫리는 94식 경장갑차 같이 장갑차에 넣기도 힘들 정도의 경장갑차량이 활약할 정도다. 덕분에 희한하게도 일부 중국밀덕들은 치하에 대해서 "국공내전 한정이라는 전제하에서 치하 전차는 의외로 쓸만했다"고 평가한다.

원래 일본군 전차라는 것이 제1차대전의 전차와 같이 보병지원용의 컨셉으로 제작된 것이라서 국공내전과 같이 화력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드럼통으로 만들어낸 조잡한 박격포비뢰포정도였던 보병전쟁에서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셈이었다. 물론 국민당에겐 미국에게서 받은 셔먼과 스튜어트가 있었지만, 그것을 상대로 이겼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무기는 성능보다는 누가 쓰느냐가 중요하다는걸 여실 없이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국민당도 치하를 꽤나 사용했다 한다. 근데 공산당은 50년대까지 이걸 굴렸다는게 함정 훈련 안해서 씨뻘건 승무원 숙련도 VS 그나마 익숙한 전차

5. 대중문화에서 다뤄지는 국공내전

한국에 알려진 영화로는 '집결호'가 있다. 중국 공산당의 창업과정이기 때문에 중국대륙에서는 굉장히 많은 영화가 제작되었다. 중국판 용비어천가, 1990년에 만들어진 대결전(大決戰)이라는 3부작 영화가 있는데, 이것은 위에 제4기를 다루고 있다. 또 2009년 개봉한 '건국대업(建國大業)'이 있다. 이 작품은 1945-1949년의 국공내전을 묘사하고 있는데 보다보면 중국영화와 드라마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수도 없이 나온다. 건국 60주년을 기념해서 중국 정부가 그야말로 연예계스타들을 총동원해서 만든 자뻑 선전 영화.

5.1. 대체역사소설 속의 국공내전 - 중화민국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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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중화민국의 장제스(장개석)가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을 통일을 한 상태를 가정한 안문 광장 합성사진. 구호 간판 부분이 중화민국만세(中華民國萬勢)와 삼민주의만세(三民主義萬勢) 또는 세계화평만세(世界和平萬勢)로 되어있으며 초상화 속 인물이 마오쩌둥이 아닌 쑨원으로 되어있다.[17] 중화인민공화국의 간체자가 아닌, 중화민국의 정체자 한자로 쓰여 있다는 점도 차이라면 차이. 첫째 합성 사진에는 고증이 빈약하여 간체자가 남아있고, 중화인민공화국 공안이 서 있지만, 둘째 사진에는 푸른 옷과 은색 철모의 중화민국 위병을 적절히 합성해 둔 것도 포인트다.

천안문에 게양된 국기도 오성홍기가 아닌 청천백일만지홍기로 되어 있다. 구글에서 "中華民國 天安門"이라고 검색후 사진을 보면 그런 사진을 볼수 있다.

대체역사 가정 에세이집 약에(what if?) 1권의 마지막 챕터는 미국의 요청대로 장제스가 만주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1947년 국공내전 휴전에 동의했을 때를 가정한다. 즉 실제 역사의 남북한처럼 마오쩌둥대약진운동 - 문화대혁명이란 잃어버린 10년(어쩌면 20년)의 대 삽질 없이, 즉 덩샤오핑의 개방이 필요없이 중국(중화민국)은 빠른 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뤘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당장 문화대혁명과 같은 개삽질이 벌어지지 않는 것만 해도 중국사, 아니 인류사에 있어서 얼마나 큰 쾌거(?)인가? 참고로 한일양국은 반공의 전진기지로서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을 가능성이 없어지면서 경제발전을 아마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는데 역사가 달리 진행된 이상 확인할 수 없는 가설이다.

제1차 국공내전에서 일본한테 망하든 말든 장제스가 공산군의 씨를 말려버렸다면 공산군은 아예 사라졌거나, 재건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가정을 적용한 경우가 복거일비명을 찾아서이다. 여기서는 1935년 옌안에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를 포함한 마지막 공산군 부대가 모두 국민당군에게 사살됨에 따라 제1차 국공내전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공산군은 국민당의 실정과 굴욕 외교 덕택에 유리한 재기 조건을 갖춘 뒤, 류사오치펑더화이1950년 11월 신장에서 '신장 소비에트'를 결성하여 감숙성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1953년 4월에 제2차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국민당은 개털려서 베이징과 톈진을 잃었고, 1956년 2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산동성의 교주만과 관동주, 만주국을 영유하고 있던 일본 제국이 "황하 남쪽에서도 전쟁하면 우리도 참전함!"이라고 위협(소위 '도조 선언')하자 결국 공산군이 협상에 응하면서 마침내 그해 7월 6일 하남성(허난성) 정주(정저우)에서 황하를 경계로 한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그리하여 소설의 배경인 1987년 현재 중국 대륙은 황하 남쪽의 중화민국, 황하 북쪽의 중화인민공화국, 요하 동쪽의 만주국, 이렇게 3국으로 분단되어 있으며, 중공의 통일 정책 및 만주국과 중화민국에서 전개되는 학생 운동권의 통일운동이 지속되면서 대륙 통일을 향한 열망이 뜨거워지고 있다.

그 외의 대체역사물은 스탈린의 편지 정도이다. 그렇게 메이저한 소재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중화민국/역사장제스 항목 등에서 보듯 관련 역덕들에게는 영원한 떡밥거리가 되고 있다. 이는 국민당 옹호 측에서는 홍군의 "건국신화"가 서방의 우호적인 진보적 역사가들에 의해 멋대로 대중에 유포되어버렸다는 시각을, 공산당 옹호 측에서는 무능한 장제스를 이념적으로 복구하려는 소수의 무리수라는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쟁거리는 과거 베트남 전쟁68운동 이후 문화대혁명대약진운동까지 옹호했던 진보 역사가들의 전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덤으로 역시 이념전쟁을 치렀고 분단상태인 남북한의 체제경쟁 문제까지 고려하면 그야말로 헬게이트를 볼 수 있다.

결국 중국의 공산화 저지 자체가 세계사에 미쳤을 영향, 특히 바로 옆의 한국사에 미쳤을 영향도 어마어마했겠지만 그 파급력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중국의 승리와 공산권의 축소 자체로도 세계사 전반이 새로 쓰여지기 때문에 섣불리 어떻게 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자체가 떡밥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1947년 당시 장제스는 휴전을 절대 거부했다. 베이핑의 코앞에, 또 다른 공산 정권이 버티고 서 있는 꼴을 용인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중국내 정치 지도자들이 공유하는 이념은 중국대륙에는 오직 하나의 나라만이 필요하다는 통일국가론이었다. 이 이념은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되어 내려온 것이어서 사실상 유전자 레벨로 굳어진 상태라 한족들은 좌우의 이념차이를 막론하고 평균적으로 유럽인들처럼 대륙의 분열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조차 사갈시한다.)

그리고 장제스의 무리한 만주침공을 시작으로, 국공내전은 분수령을 맞았다.

5.2. 한국 전쟁처럼 무승부로 끝났다면?

국공내전이 무승부로 끝난다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펼쳐질 것이다.

5.2.1. 남북분단이 될 경우

  • 국제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은 "북중"(North China), 중화민국은 "남중"(South China)로 불릴 것이다.
  • 북중에서 문화대혁명 시기에 대량 탈북이 일어난다. 결국 문혁으로 인해 남중이 국력을 역전한다.
  • 남중이 일제시대때 일본 제국타이완에 남겨둔 기술을 활용하여 경제 발전 가능성이 있다.
  • 다만 소수 민족 탄압은 북남이 똑같이 벌일 것이다.
  • 하나의 중국 개념이 시기가 지날수록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 한국 전쟁 보다는 "중화 전쟁"이 일어나고 거대한 중국의 특성상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 남중, 남한, 일본, 미국 VS 북중, 북한, 소련으로 치열한 대립관계가 될 수도 있다.
  • 북중은 단일국가, 남중은 연방국가가 된다.

5.3. 기타 대체역사

그 외의 떡밥 소재로 김일성한국전쟁 개시를 1~2년 연기하거나 개전 1~2개월 내에 손쉽게 적화통일을 달성하여앙대!!! 중국 인민해방군이 한반도에 투입되지 않고 예정대로 대만 상륙을 개시했다면?, 혹은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구상대로 중국 본토에 전면 공격을 개시하고 대만의 국부군을 중국 동남 해안에 상륙시켜 제2전선을 구축했다면? 등이 있다.

풀 메탈 패닉에서는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양분한 상태로 묘사된다.

6. 장제스 정권의 한계와 공산당의 승리 원인


이런 군대가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미OSS보고서-[18]

주로 친 중공적인 시각에서 자주 인용되는 소스로 대만 자료로 중국을 연구한 일리노이대 교수 로이드 이스트먼(Lloyd Eastman)의 "파괴의 씨앗들: 국민당 시기 중국의 전쟁과 혁명" Seeds of Destruction: Nationalist China in War and Revolution"[19]은 이 문서에서 대표적인 떡밥거리가 되고 있다. 실증적이라는 옹호론과 달리 6~70년대 좌파 수정주의 바람을 타고 지나치게 친중공적인 서술이 많은 책이라는 비판적인 견해도 분분하다. 어찌되었든, 로이드 이스트먼의 이 책은 역덕들이나 물고 뜯거나 옹호하지 현재 학계의 성과를 반영한다고 하기에는 오래된 책이며, 책 자체도 마오쩌둥이 잘해서가 아니라 국민당이 워낙 막장이고 장제스가 워낙 병신이라서 패했다고 결론을 내린바 있다.

어쨌든, 패자인 장제스의 비교 열위를 알아보자. 내전 당시의 장제스는 기본적으로 군벌연합체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대륙에 무슨 정책을 실시할 만한 위치도 아니었다. 각 성은 자체 통화를 발행하여 경제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이점은 1935년에 어느정도 해결했다), 각 군벌들은 마치 춘추전국시대처럼 계속 내전(반장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장개석 정권이 시종일관 갖고 있던 대표적 문제점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앞서 설명된 것과 같이 중일전쟁때부터 누적된 문제들이 크다.

  • 봉건잔재 청산 실패: 향존에는 명나라때부터 내려오던 갑제, 이갑제가 남아 있었으며, 지주들이 농민을 억압하고 있었다. 이 지주계급은 공산당 집권 후에야 제거된다.

  • 심각한 경제파탄: 장제스는 1930년대 초까지 각양각색의 은행들이 남발하는 화폐를 법정화폐로 통일하고, 본위제를 폐지했으며, 상해 중심의 빠른 경제 성장이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중일전쟁 기간 중 무려 1936년 발행량의 100배에 달하는 화폐를 남발하는 바람에 화폐 가치가 종이보다 못할 수준을 만들었다. 덕분에 은본위제 폐지 후 귀금속(주로 은이었다)을 화폐로 바꾼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이것을 교정하려고 하였던 1940년대 후반의 금본위제 개혁조차 실패함으로써 국민당은 사실상 경제적인 지지기반마저 무너진 셈이었다. 여기에 부정부패는 더 심해졌으니 화폐개혁은 이들의 호주머니만을 체워주었다.

  • 아스트랄한 부정부패: 국민당 정권의 부정부패는 위아래부터 아주 심각했는데 그 중 윗물을 예를 들면, 미국에서 국가 예산으로 일본과 공산당 막으라고 국민당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런데 지원금을 장제스의 가문(장씨)과 장제스의 선배 가문(진씨), 장제스의 부인 가문(송씨), 장제스의 동서의 가문(공씨)라는 4대가족이라 불리며 보이는 것처럼 장제스의 측근들로 구성된 이들은 국민당의 실세들이 착복해서 전쟁시에 지원 자금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다. 나중에 미국으로 도피한 일부 4대가족에게 국가 예산 지원하고도 착복한 사실을 알게된 미국 정부는 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중국 영화인 건국대업을 보면 이들 4대가족의 횡포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잘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는 상하이에서 어떻게든 부정부패를 해결해 보려던 장징궈에게, 상하이의 암흑가 보스 두월생(杜月笙)이 직접 찾아와서는 "중국의 경제 상황을 해결하고 싶으시면 나같은 놈들 잡을게 아니라 4대 가족 놈들이나 족치는게 더 빠를 겁니다."란 말까지 했으니...
    애초에 국민당군은 가혹행위나 부정부패가 심해서 징집된 신병 1/10이 비전투적 요인으로 사망할 정도로 막장군대였다. 뿐만 아니라 국민당은 청방이나 삼합회와 손을 잡고 이들의 범죄를 비호하면서 이들의 정치깡패짓으로 반대파를 탄압하거나 막대한 뒷돈을 공급받고 있었다.

    그가 지휘하던 국민당과 관련해 이런 일화가 있다.[20]

때는 2차 국공내전. 국민당 장군으로 두율명(杜聿明)[21]이라는 자가 있었다.

어느 날, 두율명이 장개석을 찾았다.

"총통 각하, 아무개 장군은 공산당 첩자인듯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다른 장군들과 달리 청렴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장개석은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화를 벌컥 냈다.

하지만 두율명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외에도 미군이 국공내전에서 밀리는 국민당군에게 약간이나마 무기를지원해 주었는데 국민당군 장군들이 이것을 적군인 공산군에게 팔아먹을 정도로 였으면 이미 승부는 결정된것이다.
더구나 국민당의 극심한 부패로 월급은 커녕 식량도 배급받지 못한 국민당군 병사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곳곳에 약탈을 할 정도였고 부상병에게 줄 치료제도 색소를 탄 가짜라 많은 병사들이 가벼운부상에도 치료를 받지못해 죽어 전력유지에 큰 차질을 주었다.
  • 장제스의 독재 정치: 중국 국민당은 일종의 터키 등과 같은 비서구 주변국처럼 "국가 정당", "국민 정당"으로 일당독재를 고수했다. (물론 이런 '국가 정당'의 형태는 나치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장제스 치하의 일당독재-자유제한-반대파 탄압이 없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국민당판 게슈타포라고 할만한 남의사, CC단 같은 비밀경찰 조직도 있었다. 여기에 아예 청방이나 삼합회 같은 진짜깡패들이 비판적 지식인에 대한 테러를 일삼고 있었다. 장제스는 중일 전쟁을 거치면서 여러 정적(왕징웨이)들을 몰아내고 높은 지지와 독재권을 확보했으나, 이후로도 국민당내 쓴소리를 하는 소수 파벌들을 공산당으로 몰며 끊임없이 탄압, "황제적" 총통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는 장제스 개인은 물론 중화민국 전체에도 치명적인 해가 되었으니, 소수 파벌들이 정말로 장제스를 버리고 공산당을 지지하기도 했던 것.[22] 그런데 역설적으로,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몰리게 되면서 장제스에 반대하는 파벌은 자연스럽게 중화인민공화국에 흡수[23]되었으며 장제스의 권위는 더욱 견고해졌다.

    마오쩌둥 역시 처음에는 당에서 지도적인 위치가 아니었고, 당내에는 그의 경쟁자가 여럿 있었다. (이립삼, 왕명, 장국도, 주은래.. 등등..) 그러나 그는 직접 대장정을 이끌고 장제스를 대만으로 쫓아낸 홍군의 지도자라는 막강한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자신의 정치적 감각도 뛰어나 오랜 권력투쟁 끝에 결국 정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건국 이후에 비록 대약진 운동,제사해 운동,문화대혁명등 굵직굵직한 병크를 연달아 터트리긴 했으나, 국민당-일본과의 투쟁에서 보여준 전략적 안목이나 당을 확고하게 장악하는 카리스마는 다른 경쟁자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참고로 그의 잠재적 경쟁자들은 소련식 전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리리싼, 왕밍), 혹은 전략적 안목이 딸려(장궈타오)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고 버로우했고, 마오쩌둥은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바탕으로 당론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건국 영웅인 그의 존재는 중국 인민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으므로 그는 일생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건국의 아버지로서 추앙받고 있다.뭐 어쨌든 둘다 막장

    포로가 된 국민당군 장성급 장교들은 의외로 탄압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독일로부터 군사교육을 받은 그들이 앞으로 꼭 필요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 우리나라가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어 친일파일본군 출신을 중용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들은 신정권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바로 풀려나거나 혹은 수용소에서 있다가 10여년후 풀려나기도 했지만, 푸이와 마찬가지로 처형된이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복역기간을 마친후에 전인대나 전국정협 같은 위원을 했다. 문화대혁명때 홍위병에 의해 박해당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요요상을 제외하면 국민당 장성들인 위립황, 두율명[24] 범한걸 등등은 현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중공정권에서도 일정 대우를 받고 살았다.
  • 미국이 공산당에게 준 귀중한 시간: 조지 마셜의 중재.
    중일전쟁이 끝난후 다시 벌어진 내전에서 국민국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으나 미국의 조지마셜 의 중재간섭으로 봄, 여름에 2차례에 걸쳐 휴전이 선포됐다. 이 휴전은 패배하던 공산군에게 최후의 기회가 됐다. 소련은 공산군에게 일본군이 만주에 두고간 엄청난 물자들을 그대로 넘겨주면서(소총70만 정, 기관포 1만4000정 , 탱크700대) 공산당은 열세를 극복하게 되었다. 물론 국민당군은 미국으로부터 훨씬 더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태평양 전쟁이 끝난후 남겨진 미군의 잉여무기들은 대부분이 국민당군에 지원되었다. 국민당 장성들 조차도 무기의 부족이 국공내전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다. (로이드 이스트만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다만 장제스가 미국의 휴전요청을 따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국민당의 장비나 운용비, 특히 유류가 모두 미국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 만약 국민당이 미국의 중재안을 거부하고 닥공했다고 해도 미국의 지원이 끊겨버려 전황호전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군벌의 발호와 군 지위체계의 문란: 각 지역에서 군벌의 억압이나 착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25] 농민들이 아내나 딸을 사창가에 팔아 입에 풀칠을 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을 정도. 지산 군벌은 심지어 장제스 정부를 제쳐두고 일본과 직접 휴전을 할 정도였다. 급속한 남진으로 인민해방군은 여러 군벌의 항복을 받아야 했다. 국공내전 승리 이후의 공산당은 국민당과는 달리 중앙에서 각 군구를 확실히 통제했다. 그리고 국민당군이 기껏해서 구축한 방어선에서 항복해 장개석을 끝까지 괴롭혔다.

  • 전반적인 행정의 무능: 한국에서는 공산 정부 하에서 1959년대약진운동에서 2천만이 굶어죽은 것만 알려져 있지만, 장제스 시기는 매년 기근이 들어서 누적으로만 따져도 대약진시기보다도 훨씬 더 많이 굶어죽었다는 견해도 있다. 오히려 대약진에서 참극을 빚은 것은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10여년간 기근을 근절하여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에 1959년에 대약진이 더욱 참혹해진 것이다. 1945년 부터 1947년 까지 중국을 덮친 기근은 장제스가 대륙을 잃는데 크게 작용했다. 공산당의 대약진운동은 식량증산을 위한 잘못된 정책의 실패로 벌어진 일이었지만, 장제스 정권에서는 아예 정책 자체가 전무했고, 기근에도 속수무책이었다. (로이드 이스트만 <장제스는 왜 패하였는가>)

    대륙 시절 장제스 정권은 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경제계는 매판자본이라고 불리는 독점수입상들이 수입품의 가격을 주무르며 떼돈을 벌었고, 농촌에서는 지주들의 횡포와 기근이 상시로 발생했다. 물론 중일전쟁 때는 "법폐"를 발행하면서 물가를 안정화 시켰고, 내전 이후에는 경제를 대거 발전시켰다. 중공 역시 대약진운동의 처참한 망신 속에서도 무기산업은 꾸준히 발달해서 제트전투기, 인공위성, 핵무기, 미사일, 컴퓨터까지 독자개발할 수 있을 만큼의 기술력은 보유하게 되었다. 이런 기술력과 양성된 인재들은 후에 개혁개방 정책후에는 산업기술로 이전되어 중국이 선진국의 하이테크를 따라갈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규모의 경제

  •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과 1945년 8월 만주 작전 이후의 소련군 등 외국 군대가 남아있었다. 국공내전 당시에도 만주에는 소련군이 주둔중이었으며, 소련은 이미 1947년부터 북한에게 평양 협정 등으로 간도를 할양 하려 하는 등, 실질적으로 이 지역에 통제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장제스는 당시에는 미국과 갈등하며 소련에 우호적이었으나, 청나라에서 물려받은 몽골과 만주의 영유권(넓게는 연해주 까지)을 부정하지 않았다.[26] 중소 국경분쟁이 불가피했던 것.

    중일전쟁 당시 중국에 파견되어 동남아 버마 전선을 주재하는 미군 사령관 셉 스틸웰은 장개석과 반목했고, 장개석 역시 외교적 경로로 미국에 계속 스틸웰을 모함하였다. 중국에 파견된 소련군 군사고문들도 장개석 정권의 능력을 혹평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여러 문제점을 장제스가 극복할 수도 있었다. 1947년까지는 미, 소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소전쟁에서 소련의 멸망을 예측했듯이) 장제스의 승리를 높게 점치고 있었다. 장제스는 이미 중일전쟁을 교착시켜 결과적 승전으로 이끈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국민당은 자멸하고 말았다.

7. 의의

7.1. 아시아 공산블록의 대확대

국공내전의 승리로 중국 공산당이 주변국의 공산 세력을 지원하면서 아시아의 공산 블럭은 대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이것이 대표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례가 한국전쟁베트남 전쟁이다. 한국전쟁의 사례를 살펴보자.

2차 국공내전 재개 전 부터 한반도는 분할 되어 38선이 그어진 상태였고 김일성은 그때부터 이미 무력통일을 꿈꾸고 있었고, 그 배후에 있어서 중공보다 소련이 더욱 큰 영향력 행사를 했다. 스탈린에게 김일성은 매번 남침을 주장했으나 스탈린은 국공내전이 끝날 때까지 그 주장을 묵살했다. 한편 북한은 소련이 기획했던 대로 중공을 통제하기 위해 간도와 동만주~남만주 일대를 흡수하려 했다. 이 역시 북한에게는 체제 대립에서 정통성을 과시하고 무력 통일을 기도할 명분이 되었다.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이런 균형은 무너진다. 북한의 건국 주역들은 보천보 전투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 공산당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으며,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국공내전 기간 중 대놓고 중국 공산당을 지원한 바 있다. 그래서 국공내전을 통해 조선인민군의 전투 경험은 풍부해졌고, 국공내전이 종식 된 후 중공군 출신의 164~166 3개 사단이 입북하면서 1949년 5만에 불과했던 북한군의 숫자는 급격히 늘어난다. 결국 국공내전의 승리는 애치슨 라인 뒷편에 있는 남한을 침공하는데 두려울 게 없는 상황으로 김일성을 "나도 할 수 있다!"라며 오판하게 했다. 또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한 것 역시 문제가 심각해질 경우 꿩먹고 알먹고 격으로 한반도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재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7.2. 구 체제의 청산과 근대적 국민국가의 완성

한중 양국 모두 전쟁 이후로 구 체제가 청산되고, 근대적 국민국가를 완성하게 된다. 전쟁 초반 내전의 성격을 어느 정도 가미하고 있었던 한국 전쟁이 최후에는 "조선인"들을 두 국가의 국민으로 확실하게 구분지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전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한국인"이 아니라 "(남북한을 포괄한) 조선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분단과 국민 국가를 완성시켰다. 아시아에서 2차 대전 종전 이후 1950년대 부터를 현대로 취급하는 이유이다.[27][28] 장개석 치하의 중국은 제대로 된 근대국가가 아니었다는 견해다.[29]

또한 전쟁 이후 중소 국경과 중국과 조선(북한)의 국경이 "조중변계조약" 등으로 확립되면서 당시의 국경선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은 한때 소련의 지지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부의 영유권을 더이상 주장할 수 없었다. 한편 백두산을 둘러싼 국경 문제는 중국이 주장한 석을수가 아닌 과거 대한제국의 토문감계사 이중하가 주장했던 홍토수를 따르게 되면서 기존의 국경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7.3. 공산권 세력 판도의 변화

중국의 공산화는 결과적으로 공산권의 세력 판도 변화를 몰고 오게 된다. 공산화 초기의 중국은 일단 소련을 사회주의 혁명의 선배로서 존중을 해 주긴 했지만, 50년대 말에 들면 점차 중, 소 양국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사실 국력만 놓고 봐도 중국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아 있기에 너무 큰 나라였는데, 일단 국토 면적으로 따지면 소련이 다른 공산 국가들의 국토를 합친 것보다 훨씬 컸지만, 인구로 따지면 중국은 다른 공산 국가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더욱이 2차 대전 이후 탄생된 공산 정권 대부분이 소련에 의해 세워진 데 반해 중국은 비록 소련의 지원이 없진 않았지만 시종일관 중국 공산당 주도로 혁명을 이루었기 때문에 크렘린의 노선을 일방적으로 추진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할 수 있었다. 결국 공산 중국이 탄생하고 이후 중, 소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공산권의 세력 판도는 소련 1극 체제에서 중, 소 양강 체제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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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어떤 혹자는 한신하고 비교하기도 하는데 사실 한신은 린뱌오보다는 펑더화이 쪽이 더 가깝다.
  • [2] 주더도 문화대혁명때 잠깐 숙청당하긴 했다. 마오쩌둥에게 미움을 사 처참한 최후를 맞은 펑더화이와 달리 잠깐 권좌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고 나중에 다시 복귀했다.
  • [3] 이는 장쭤린이 일본과 협력 관계는 유지하면서도 일본과 손잡는 것에 대해 내심 불안한 마음을 품고서 각종 견제 조치를 취한 것도 원인이 된다.(가령 일본 제국주의 첨병이었던 만철의 라이벌 회사를 출범시킨다던가.) 결국 장쭤린의 (사실은 마땅히 해야할 일이지만) 행보는 관동군 강경파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 [4] 그렇지만 일본이 만주를 휩쓸 때 장쉐량은 자기 주력병력 대부분은 화북에 온존시켜 놓아 그다지 큰 대응을 하지 못했으며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운 건 마점산 같은 장쭤린의 방계군벌들이나 양세봉, 지청천 등의 독립군 세력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성과가 있긴 했지만 이들의 힘만으로 일본군과 만주군과 싸워 이기기는 힘들었다. 장제스 입장에서는 의심할만도 했다.
  • [5] 장제스 직속군은 일제 무기보다 훨씬 뛰어난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 [6] 게릴라전은 어디까지나 적의 진격을 방해하는 전술이지 막는 전술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일본군의 기록을 살펴보면 일본군에게 가장 큰 손실을 입힌 것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이었다.
  • [7] 사실 마오쩌둥의 농업 중심 노선 문제는 꽤 복잡한데... 마르크스주의는 기본적으로 공업화-도시화 된 국가에서 도시 노동자를 주축으로 하는 정치 투쟁에 의한 혁명을 지향한다.(농민은 소부르주아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신뢰하지 않는다.) 국공내전 초기에 리리싼등의 중국 공산당 초기 지도자들이 굳이 도시를 장악하려는 노선을 취한 것 역시 이런 노선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물이다. 문제는 당시 중국의 도시 노동자(특히 대규모 공장노동자)계급은 전체 인구에 비해 그 비중아 아주 작았고, 혁명의 주축이 되기에는 세력이 모자랐다는 것. 이 때문에 마오쩌둥이 주창한 노선이 농민을 주축으로 한 게릴라전에 의한 혁명 노선이다. 즉, 마오쩌둥의 노선은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정치 노선과는 상당히 달랐다는 것. 참고로, 소련(러시아)의 경우 중국보다는 도시화와 공업화가 진행된 상태였지만 서유럽 공업국가들에 비하면 미숙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소련 혁명 초기에 이로 인한 문제가 많이 나타나기도 했었다.
  • [8] 시진핑 현 중국 주석의 아버지이다
  • [9] 유명한 보시라이의 아버지이다
  • [10] 애초에 1920년대부터 일어난 연성자치운동(각 성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주자는 운동)을 국민당이 탄압한 것도, 모택동이 이 운동을 내세워서 체력이 약하던 공산당을 일으켜 세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함께 중앙집권의 통일국가를 내세우며 용도폐기하고 주장자들을 반동으로 몰아간 것도 중국에는 하나의 통일국가만이 필요하다는 이념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 두 세력이 각기 분할을 제의한 것은 코너에 몰렸을때 위급해서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두 세력이 중국대륙에서 양립할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 [11] 국민당이 본토에서 완전히 철수한 건 1949년 12월 10일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 [12] 국제연맹(LN) 당시에는 일본제국이 상임이사국이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 [13] 2013년 기준으로 대만에 체류하는 중국 대륙(홍콩, 마카오 제외) 출신의 일시거주자는 241,455명, 영구거주자는 128,744명이다. 출처
  • [14] 대만은 한국에서 탈북자에 주는 포상금 같은 것을 1980년대 말에 모두 없애버렸다.
  • [15] 관련 블로거가 강변한 이유는 좌파인 이종석의 주장이 맞지 않다는걸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종석은 국내에서는 최초로 북한을 진지하게 연구한 학자며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장관을 역임했다. 특히 논쟁 중에 이종석의 의견을 들고 온 유저들에 대해서 인신공격을 좀 심하게 했다.
  • [16]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감동한 장제스가 적극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장제스는 한반도 독립후 거기에 친중괴뢰정부를 두어 한반도를 자신의 세력하에 두려던것이 본 목적이었고 실제로는 임시정부가 광복군 창설하자 미국이 지원해줄 전까지 임시정부가 군장비 구입, 한국청년모집,첩보활동 같은 항일 무력투쟁에 지속적인 패널티를 걸었다.
  • [17] 실제로 천안문에는 장개석의 사진이 중일전쟁 직후에 오늘날의 마오쩌둥보다 더 크게 걸려있었다.
  • [18] 미국 공화당과 자유주의자들이 자비로 셔먼탱크를 4대를 구입 국민당을 지원해 주었는데 인수받은 다음날 그 셔먼탱크는 공산군이 몰고있었다. 그 이유는 국민당장군들이 지원받은 탱크를 받자마자 공산군에게 팔아먹은 것. 이 보고서를 받은 트루먼은 국민당에 대한 모든 지원을 취소하였다.
  • [19] 한국에서는 서울대 故민두기 동양 사학과 교수의 "장제스는 왜 패하였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민두기 교수는 일관되게 반공적인 입장에서 국민당의 몰락을 "안타까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주의적인 로이드의 저서를 높이 평가하고, 이를 번역했다.
  • [20] 제임스 이스트만의 '장제스는 왜 패했는가'에서 나오는 유명한 대목이다.
  • [21] 중국군 최초의 기갑사단을 이끌면서 중부 전선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의 병력교환비율은 중국과 일본이 2대1수준이었다. 얼마 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시 타 지역의 교환비가 5(최대 10) ;1이라는걸 생각하면 그가 정예군대를 이끈다고 쳐도 꽤나 괜찮은 인물이다. 이후에 버마 전선에서도 참여했으나 영국의 비협조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가 무능한 인물이라고 평가절하 받는건 미국 고문이 악의적으로 중국 국민당을 폄하했기 때문이다.
  • [22] 그러나 이것은 더 멍청한 짓이었다. 장제스의 비판 세력이었으며 뛰어난 언론이었던 안핑은 “공산당은 민주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반민주적인 정당이다. 공산당과 국민당은 별 차이가 없다. 공산당의 주장은 당주(黨主)이지 민주(民主)가 아니다. 국민당 통치하에서의 자유는 많고 적고(多少)의 문제이지만 공산당이 집권한다면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有無)의 문제로 변할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추안핑 역시 반동분자로 몰렸으며, 결국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행방불명 되었다. # # #
  • [23] 대표적으로 쑹칭링 등이 있다.
  • [24] 이 양반은 중국의 버마원정군 부사령관이였는데 어느날 틸웰 중장이 전투에 중포 사용을 요청 하였는데 이를 거부하였다. 근데 이를 거부한 이유가 이 중포는 우리 군에서 가장 강력하니 사용할수 없다(...)이다.
  • [25] (용운)이나 위샹(풍옥상)과 같이 어느정도 개명한 군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군벌은 민중의 고혈을 짜내고 있었다.
  • [26] 이는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는 여전히 몽골을 미승인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 [27] 일부 철학, 미학 사조에서 그런 견해가 강하다. 유럽으로 따지면 68운동, 미국을 따지면 베트남 전쟁과 반전운동이 "포스트 모던"의 기점인 셈인데, 중국은 적어도 "모던"까지는 왔다는 것. 반면 한국의 경우는 "포스트 모던"을 논하기에 부적절하다라는 견해가 컸는데, 90년대 말 포스트 모던 논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28] 소련, 중국, 한국 등의 비 서구 주변국이 "근대"의 단계를 거치고 온 것은 사실이나, 진정한 의미의 근대였는지, 또 "근대적 인간상"을 이뤄냈는지에 대해서는 하도 논란이 많다. 문화대혁명이나 천안문 6.4 항쟁을 생각해보자. 당장 한국만 해도 80년대까지는 북한은 식민잔재를 몰아내고 근대국가를 완성했으나 남한은 근대국가가 아닌 "식민지 반봉건" 아니면 "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식의 이념적 논쟁이 횡횡했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을 지나고나서야 "식민지 남한"의 논리가 패배하면서 어느정도 종결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남한이 아직 준식민지 상황이란 이론을 비약하여 소설소재로 활용한 경우 역시 <비명을 찾아서>이다(...)
  • [29] 국민당군 장교를 하다가 (패망이전) 미국으로 유학해 하버드대의 중국사 교수를 한 황런위(레이 황, 1918~2000)의 "허드슨강에서 중국역사를 말하다"에서도 그런 견해가 나온다는 말도 있다. 그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의 경우는 장제스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