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구정 공세

last modified: 2015-04-14 11:52:01 Contributors

Tết Offensive

Contents

1. 개요
2. 과정
3. 결과
3.1. 전술적 실패
3.2. 전략적 성공
3.3. 매스컴

1. 개요

1968년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투. 뗏(Tết)은 베트남어로 음력 1월 1일을 가리키는 말로, 우리말로 음차해서 뗏 공세 혹은 테트 공세라고도 부른다.

2. 과정

구정(설날)은 음력을 쓰는 나라라면 명절로 다루는 중요한 날이다. 베트남도 설날을 지냈기 때문에 이때에는 남·북 베트남 모두 휴전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다.

이 기간에는 미군도 예외없이 연휴를 즐기기 위해 한껏 풀어져 있었고, 게다가 설날에는 인파와 차량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기 때문에 검문도 어려웠다. 베트콩은 이를 알고 기습을 계획한다.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와 시설을 모두 공격하는 이 작전에 35개 대대에 달하는 병력이 투입되었다. 이 병력들은 변장을 하고 있었으며 무기는 관 속에 넣어서 들어오는 등 철저하고 치밀하게 계획되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뗏 휴전 시에도 남베트남군만 공격받지 않았을 뿐 외국군은 어김없이 공격받았다. 실제 북베트남군은 휴전 기간에는 미군 비행기가 잘 뜨지 않는다는 걸 노려서 이 기간 호치민 루트를 집중 가동했고[1] 주의 분산을 위해 로켓포 공격 따위로 딴지를 걸었다. 이런 사실은 당시의 그린베레 정찰 보고서 등에도 자주 경고되었으나 MACV(남베트남 지원군 사령부)는 이를 무시하여 피해를 키우고 말았다.

물론 미군이라고 아예 손놓고 있지는 않았다. 68년 테트 공세를 준비하기 위한 사전 공세는 67년 말부터 캄보디아 국경 인근 서부지대와 북부 비무장지대 인근에서 있었다. 상당한 규모의 북베트남군 공세로 인해 미군 전투 대대들이 다수 이 지역으로 파견된 상태였다. 구정공세를 앞둔 시기, 주월미군 사령부 내부에서도 너무 많은 부대들이 외곽에 나가있어 테트 연휴를 앞두고 대도시들의 치안부재가 걱정된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미군들도 전방에서 대대들을 빼서 재배치시켰다. 그나마 미군보다 휴전에 대해 의구심이 강했던 한국군 지휘부 정도가 훨씬 더 철저한 방어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이 관리하고 소수의 미 군사고문단(미 해병대)이 주둔했던 후에시는 삽시간에 함락되어 민간인 수천명이 학살당하고 지옥의 전장이 되어버렸다. 결국 충분치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때 재배치한 대대들이 테트 공세 초기에 베트콩-북베트남군의 공세를 막아낸 주력부대가 되었다.
잔인한 장면이 있으므로 재생시 주의할 것.

당시의 미국 CBS 뉴스. 사이공을 둘러싼 험악한 공기가 여실히 드러난다. 도중 한국군 헌병도 잠시 보인다.[2] 대사관에서 베레타 M12 기관단총을 들고있는 것은 미군이 아닌 CIA 요원.

1월 30일, 새벽의 폭죽놀이를 신호로 베트콩들은 공세를 시작했다. 이들은 사이공뿐만 아니라 남베트남 대부분의 도시(총 41개 지역)에 잠입해 있었기 때문에 남베트남 전역이 전쟁터가 되었다. 또한 미군과 한국군을 제외한 동맹군은 이때 기습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데다 당시 남베트남군 대부분이 설을 쇠러 가서 공백이 생겼기 때문에 크게 당황했고 전투는 매우 혼란스럽게 벌어졌다.

그러나 약속된 북베트남군의 지원이 없었고, 베트콩들은 자신들이 도시에서 전투를 벌이면 남베트남 도시 내부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미군은 프랑스군과 달리 화력지원과 보급도 매우 잘 받는 상태였다. 베트콩의 공세는 2~3일만에 대부분 미군에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수도 사이공은 2주, 중부지방의 주요도시인 후에[3]에서는 한달 가까이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의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이 기간 동안 정부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특히 후에 시내는 상황이 매우 안 좋아서, 원래 외국군대는 간섭군이란 지적을 피하기 위해 도시 방어는 남베트남군이 맡도록 되어 있던 원칙까지 어겨가면서 미 해병대도 투입되어 섬멸전을 벌여야 했다.

그 동안 한국군은 베트콩의 공격을 사전 예측했기 때문에 돌파당한 진지는 한 군데도 없었고, 오히려 이들의 공격을 철저하게 방어해냈다.

3. 결과

3.1. 전술적 실패

본래 작전 내용은 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사건을 벌이면 동시에 북베트남도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베트콩이 먼저 나선 후에도 북베트남군의 행동은 늦어졌고, 결국 대대적으로 준비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인해 남베트남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베트콩의 조직은 거의 괴멸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전과 측면에서는 후에 시를 제외하고서는 대부분의 공격이 실패했고, 후에도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대대적인 탈환작전 끝에 재탈환당하는 등 실질적인 성과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치고 빠지기 식의 비대칭전 전술을 포기하고 야전에서 공세를 감행하는 것은 미군의 장기인 대규모 화력투사 앞에 전력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간부진의 전멸 및 군수물자의 손실 등 남베트남 내 베트콩 조직의 피해는 심각해서, 나중에 공개된 북베트남군 내부 문서에 따르면 향후 수년 간 베트콩은 독립적인 작전 수행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이후 베트콩 조직 내 주도권은 남쪽 출신자가 아니라 북쪽에서 파견된 이들이 가지게 된다.

이 전투는 전술적으로 보았을 때 명백한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패배였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전사자 5,100여 명[4]을 포함해 도합 20,0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베트콩들은 병력의 절반 가량인 45,000명의 전사자를 냈고 특히 전투 경험이 많은 간부급의 피해가 커 조직이 사실상 궤멸되었다. 반면 미군과 남베트남 주둔군에는 큰 피해도 주지 못했고 도시를 장악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3.2. 전략적 성공

그러나 정치적·전략적으로는 완승을 거둔 전투였다. 연휴 기간의 좋은 분위기에서 터진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베트콩이 베트남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인 고도(古都) 후에를 잠시 점령하고, 베트콩 특공대가 사이공의 미 대사관을 습격, 미 해병대의 경비병력을 사살하는 등 전력의 건재함을 과시해 터널 끝의 빛이 보인다던 미 정부의 믿음을 정면으로 깨부숴 버렸다. 또한 이러한 장면이 TV미국에 방송되어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불을 지피게 된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이제 전투가 거의 막바지로 가고 있다고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 전투로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이 공격당해 에 타고 베트남 전 지역이 불바다가 되는 과정이 방송을 통해 미국 국민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일은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 소위 독립궁도 주 공격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남베트남군이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독립궁이 늘 쿠데타에 대비해 철통같이 방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독립궁은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군이 항복하고 나서야 점령되었다.

미 대사관 습격이라는 특종에 밀려 성공적인 방어라는 성과는 미국 매스컴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고, 뒤이어 후에 재탈환 과정에서의 민간인 피해 및 문화재 파손, 도주한 북베트남/베트콩 색출과정에서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미국 국내정치적으로 심각한 파장을 일으켜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국인들에게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지는 혼란스러운 전쟁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공포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정치인들이 공약한 베트남전의 승리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서 베트남전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의문마저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반전 운동으로 이어졌고, 68운동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영향을 끼쳤다. 결국 미국인들은 선거에서 전쟁 지속을 주장하는 민주당에 등을 돌리고, 종결을 주장하는 공화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베트콩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사실상 와해되어 버리지만 북베트남은 승리한 경우라고 봐야 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북베트남의 주도로 통일이 될 경우에 남베트남에서 강한 영향력과 군사력을 보유한 베트콩들은 북베트남 수뇌부의 입장에서 보면 화근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놔둘 수 없었다. 때문에 이들의 제거와 동시에 미국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 구정 공세를 진행했다는 것이 정설이며[5] 이들의 목적대로 무모할 정도로 미군에게 정면공격을 시도한 베트콩들은 지휘부를 비롯한 전투병력 대부분이 사라져 버리지만 미국에게는 승리가 아닌 패전의 인식을 심어주었으며 북베트남 수뇌부는 훗날 통일이 되었을 때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강력한 정치집단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마치 1944년 바르샤바 봉기의 전후 사정과 관련하여 소련군이 들었던 평가와 비슷하다.

이것이 와전되어서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의 베트콩 지휘부를 베트남 정부가 숙청했다는 식의 프로파간다가 퍼진 적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구정 공세 이후 남베트남 지역의 게릴라전 지휘는 북베트남에서 파견한 인물들이 맡아서 계속 진행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숙청되지 않고 각자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6]

3.3. 매스컴


베트남 전쟁의 유명한 사진 중 하나. 사진이 유명하지만 동영상도 남아있다. 1968년 2월 1일, '사이공식 처형'이라는 이름으로 촬영되어 알려진 이 사진은 후에 사진기자 에디 애덤스에게 퓰리처상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얼핏 보는 인상과 같이 무고한 민간인을 처형하는 장면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절반의 진실.

여기서 총을 든 사람은 응우옌 응옥 로안(Nguyễn Ngọc Loan)이라는 이름의 사이공 경찰. 사살당한 남자는 응우옌 반 렘(Nguyễn Văn Lém)이라는 이름의 베트콩이다. 그는 암살과 보복을 담당하는 베트콩 소대의 지휘자로 시가전 중에 학살당한 경찰 가족들의 시체 옆에서 체포됐다. 군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군사작전을 벌인 것도 아니기에, 제네바 협약에 따른 전쟁 포로의 대우를 기대할 수 없는 처지. 게다가 당시는 구정 공세의 긴박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기서 을 쏘고 있는 응우옌 응옥 로안의 절친한 친구들의 가족들도 응우옌 반 렘에게 학살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에서는 광범위하게 이게 사실인 것처럼 퍼져 있는데 실제 여부는 불명. 출처 요망]

다만 교전권이 없다고 해도, 어떤 경우에도 재판도 없이 사형을 시키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며 이것은 학살에 불과하다. 단지 현실에서 홧김에 일선의 병사/장교들이 쏴버렸을 때 쉬쉬하고 넘어가는 것일 뿐... 국제법상으로 포로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과 당연히 현장에서 즉결처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며, 국제법상 적국의 포로가 아니기 때문에 외국인 범죄자로서 체포되어서 자국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 판결을 받는 것이 정상이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남베트남 정권 자체가 상식적인 군정조차 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응우옌 응옥 로안 또한 존경받는 경찰서장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공군 대령 출신으로 사이공 치안 책임자로서 독재 정권 하에서 빨갱이 사냥에 광분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공군 대령 시절 민주화 투쟁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지 않는다고 육군 소장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댄 사람이다. 그에게 무고하게 빨갱이로 몰려서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그의 지인과 본인에 대한 테러 대상으로 구분될 요소는 충분했다. 테러리즘이 용납되지는 않지만 응옥 로안이 무고한 경찰서장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북 공안 사건 전담 검사 혹은 경찰 정도.

결국 보복과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마지막에 애덤스 기자가 사진으로 응옥 로안을 '사회적으로 처형'함으로서 비극이 끝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혼란한 베트남의 당시 상황에서 정말 처형당한 반 렘이 응옥 로안의 지인들을 살해했는지도 모호하다. 당시 빨갱이 사냥에 의해서 의심스러우면 닥치고 처형..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7] 게다가 당시는 구정 공세의 전투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 따르면 응옥 로안은 당시 자신의 지인들을 죽였기 때문에 복수했다고 언급하지 않고, 사복을 입은 베트콩이라서 죽였다고 증언했다. 즉가족과 지인을 살해당한 보복으로 홧김에 죽였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다.

어찌되었건 굳이 걸고 넘어진다면 극도로 분노한 경찰의 대량학살범에 대한 부적절한 즉결처분[8] 정도로 비판받는 데서 끝나야 할 사진이 부패한 남베트남 경찰의 잔인한 사형이란 내용으로 왜곡되어 알려져서 한동안 응우옌 응옥 로안은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데로순수한 피해자인지는 좀 생각해 봐야할 문제지만.. 나중에 에디 애덤스가 직접 미국으로 망명한 응우옌 장군(?)[9]을 찾아가서 사과하기도 하였다.[10] 애덤스는 이 사건을 두고 "사진은 절반의 진실만을 말한다"고 말했다.[11] 여기서 절반의 진실이라고 말한 건 응우옌이 100% 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처분은 어떤 상황이건 정당화될 수는 없고, 그 부분에서 비난받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사진이 거기까지 이르게 된 사정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그냥 민간인을 즉결처분한 학살자로 내보낸 점에서 진실을 왜곡했다고 한 것이다.

심슨에서 미 육군 에피소드에 패러디가 나온다. 또한 영화 풀 메탈 재킷 후반부가 구정 공세 후를 무대로 하고 있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에서 이를 배경으로 한 미션이 있다. 여기서 메이슨이 망명자 레즈노프를 만나게 되고 드라고비치가 노바6로 서방세계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걸 알게 된다.
----
  • [1] 휴전기간 중 수송하는 무기와 탄약이 6개월 분을 넘었다.
  • [2] 3분 51초 경.
  • [3]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도시이다. 가장 최근의 베트남 왕조이므로 한국으로 치면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 정도에 해당하는 도시. 19세기 응우옌 왕조가 건설한 보방식 요새가 베트콩에게 탈취당하면서 전투가 치열해졌다.
  • [4] 미군 1,100명. 남베트남군 4,000명.
  • [5] 앞서 북베트남의 지원이 오지 않았다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이만한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행하는데 날짜를 착각해서 지원을 하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부분.
  • [6] 별도로 숙청은 안했지만 토사구팽 한 것은 맞다.
  • [7] 물론 전쟁에서 승리한 북베트남 정권도 남베트남 부역자들을 재판에 붙여서 수 없이 처형하고 추방했다.
  • [8] 정말로 가족과 지인들이 대량 살해 당했다면, 그나마도 당사자의 정신 상태를 생각해 선처의 소지는 있다.
  • [9] 로안은 이미 퇴역한 상태임에도 어찌되었건 애덤스는 응우옌 장군이라고 했다.
  • [10] 미국에서 피자 가게를 하며 살아가다 1998년 암으로 사망했다.
  • [11] 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988783,00.html 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쏘는 사진으로 1969년 퓰리처 상을 받았다. 그 사진에는 죽은 사람이 두 명 찍혔다. 하나는 총알을 맞은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응우옌 응옥 로안 장군이다. 장군은 베트콩을 죽였고, 나는 장군을 죽였다. 진실로 사진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사람들은 사진에 찍힌 걸 그대로 믿지만, 특별히 조작을 하지 않더라도 사진은 거짓말을 한다. 사진은 절반의 진실만을 말한다. 사진이 말하지 않은 진실은, "만약 당신이 그 더운 날 그 시간 그 장소에 있는 장군이었고, 미군 병사를 하나나 둘, 셋 정도 쏴넘긴 '나쁜 놈'을 잡았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