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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대지진

last modified: 2015-02-16 13:23:53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1.1. 경과
1.2. 피해
1.3. 복구
1.4.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1.4.1. 사회주의자 학살
1.4.2. 학살의 규모
1.5. 매체에 반영된 관동대지진
1.6. 기타



1. 개요

간토대지진(일본어: 関東大震災) 또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은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에 사가미 만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큰 지진이다. 1855년에도 대지진이 있었으나 보통 간토 대지진은 이때를 말한다.

1.1. 경과

간토 지진은 5분 간격으로 발생한 3차례의 지진이다. 최초에 발생한 M 7.81의 진원은 거의 동시에 11시 58분에 오다와라와 미우라 반도의 지하에서 약 15초 간 일어났다. 계속하여 M 7.3의 첫 번째 여진이 12시 1분에 일어나고, 2번째 M 7.2의 여진이 12시 3분에 발생하였다. 이 3개의 지진은 모두 약 5분 이상 계속되었다. 지진 후 간토 지역은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다. 정부 조직이 마비되었으며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은 오전 11시 58분은 점심시간이 임박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날 도쿄를 비롯한 지진피해지역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였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요식업소에서 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 목재 건물인 피해지역 건물들을 불태우며 널리 퍼져나간 것이다.

1.2. 피해

리히터 규모 7.9에서 8.4 사이로 추정되며 4 ~ 10분 정도 지속되었다. 도쿄 지역과 요코하마 지역, 치바 현, 가나가와 현, 시즈오카 현 등에서 10만 명에서 14만 2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7천 명이 실종되었다. 10만 9천여 채의 건물이 전부 파괴되고 10만 2천여 채는 반파했다.

그리고 요코스카 등 관동지역에 있던 군항에 있던 일부함들이 피해를 입었다. 대표적으로 항공모함으로 개장하던 아마기[1]가 대파, 미카사가 부두에 부딪혀 침수.

1.3. 복구

지진 이후 수도를 이전하자는 주장이 잠시 대두되었다. 히메지경성, 용인이 거론되기도 하였고 하는데 사실은 떡밥이다. 다만, 용인 천도설 같은 경우 정황으로 봤을 때는 가능성이 있긴 있었다. 현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가 천도지로 꼽혔으며 이에 대한 토지 실측 등 준비도 해 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용인 천도 계획에 고쿄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고. 사실 일본이 워낙 지진에 넌더리가 난 것도 있고 특히 수도권을 초토화시킨 이 지진이 위기위식(?)을 더욱 부추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복구하면서 현재의 도쿄의 기틀을 구성하는 도로철도 그리고 공원 등이 계획되어 더욱 근대적 모습으로 도시가 재건되었다. 특히 공원은 이후 있을지 모르는 대지진의 피난처 구실을 하게끔 만들어졌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다시 파괴되고 만다.

간토 대지진은 일본이 안전한 땅이 아니라는 인식을 일본인에게 영원히 심어 주었고 이러한 불안은 경제불안으로 가시화돼서[2] 적극적으로 중국을 침략 지배하겠다는 일본 제국주의를 키운 한 원인이 되었다.[3] 그리고, 이 사건은 일본의 안전불감증의 심각함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 되었다.

본래 히로히토 황태자는 1923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대지진의 참상을 본 그는 결혼식을 미루었다. 히로히토 황태자의 약혼녀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은 대지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와카를 지었으며, 사다코 황후도 이재민들을 위로하는 활동을 펼쳤다.

1.4.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오래된 일도 아닌데
깡그리 잊어버린
일이있다.
먼곳의 일도 아닌데
아득히 제쳐 놓은
일이있다.
남의 일도 아닌데
누구도 생각않는
일이있다.
그러나 언제인가 그런일은
새록새록 숨어서 숨을 쉬는 법이다.
때만되면 억세게 튕겨져나와
만갈래 비사를 외치게 한다.
의리가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머리가 나빠서 까먹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이 좋아서 없는 걸로
해두었던것은 아니다.
새록 새록 그것은 우리속에서
숨쉬고 있었다.
잊고 싶어도, 까먹고 싶어도
아예 없었던 걸로 해두고 싶어도
그것은 이제 너무도 억세어서
고스란히 잠재울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
[4]


1923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 신문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선인들이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글로 전면을 다루고 있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관제 언론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사를 쓸 수 밖에 없었다.

1923년 도쿄 일원의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인하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민심과 사회질서가 대단히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회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방화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내용에 의해 더욱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신문에 다시 실리면서 "사회주의자들의 교시를 받은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헛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조선인들이 일본에 지진 일어나게 해달라고 일본에 저주를 퍼부었다"라는 유언비어라고 하기엔 유언비어한테 모독인 수준의 헛소리까지 나돌았다.사실 일본이 조선에 한 짓을 생각하면 이런 저주를 하는 사람이 있가도 해도 별로 이상할게 없다.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의 특징 때문에 일본인들은 화재를 굉장히 두려워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진위여부를 떠나 일본 민간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였다. 이에 곳곳에서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불시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하였으며,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한국어에 없는 어두유성음 및 종종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등으로 이루어진) 「十五円五十銭(십오원오십전) (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이나「大根」(だいこん)등의 단어를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이 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였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 내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경찰은 학살에 동참하였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 하에 자경단의 난행을 수수방관한 것도 모자라 적극적으로 학살을 주도해갔다.

오히려 조선인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야쿠자 등 비공권력 범죄 집단의 일부가 조선인을 숨겨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물론 요코하마 쓰루미 경찰서의 오카와 쓰네키치(大川常吉) 서장처럼 일본 경찰이 조선인을 보호한 사례도 없지는 않으며, 계엄 출동 중인 일본군이 자경단을 직접 공격, 해산시키고 조선인을 구출한 사례도 없지는 않다. 심지어 소위 말하는 황도파를 비롯한 군벌이나, 제국주의적인 군인들이 조선인 학살에 부정적이었으며, 이 난리통에 조선인들을 보호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아키야마 요시후루같은 경우는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유언비어에 휘둘리는건 정신력이 나약해서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훈시했으며, 변치않은 일본식 정신력 드립 극우파이자 일본 국가사회주의의 거두였던 타 잇키같은 경우는 무정부주의자이자 훗날 일왕 폭사기도사건의 주역인 박열에게 피신처를 알선하였다. 도쿄에서 조선인 학살이 벌어지자 다급한 박열은 기타 잇키를 찾아갔고, 기타 잇키가 피신처를 알선해준 것. 뭔가 이상하지만 여튼 결과적으론...

그러나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어 체제 전반의 혼란 가능성까지 엿보이게 되면서 뒤늦게 경찰과 군부가 학살 저지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후였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 강과 아라카와 강은 시체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축소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 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방면되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기구는 전혀 없었다. 단 한 사람, 일본 국적의 변호사 후세 다츠지는 전후 한국 언론에 사과하였고 그는 이 밖에도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2004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불안속에 외부인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이 유언비어에 의해 발화되어 사회적으로 용인되어버리는 살인, 학살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근세의 마녀사냥과 현대까지 이어지는 집시 핍박이 같은부류에 들며 특히 작은 사회에서 더 빈번하고 끔찍하게 일어난다. 조선에서 찾아보자면 비슷한 사례로 만보산 사건이 종종 언급된다. 여기선 가해자가 조선인들이고 피해자가 중국 화교들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최소 200, 최대 6천여 명의 한국인이 일본에서 관동 대지진 직후의 조선인 학살극에 휘말려 피살당한 것으로 집계되는 상황이다.

1.4.1. 사회주의자 학살

일본 군부 및 경찰의 학살 직접 참여의 경우 대부분 조선인 학살을 틈타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 및 헌병대에 요주의 대상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의 암살을 노린 것이었다. "소나기가 온 김에 대청소"[5]였던 셈.

  • 그렇다고 조선인 학살과 동일선상으로 올릴 수 없는게, 사회주의자들이 당국으로부터 검거된 시점은 9월 3일과 4일 이후부터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라사와 게이시치마기시 사네지, 즈키 나오가즈, 와사키 진이치, 시무라 고지, 와이 요시토라 등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발적으로 자경단에 가입해 조선인을 경계하는 업무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지진 당시, 반전 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성향의 기독교인 인사인 치무라 간조조차 자경단과 함께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고는 몽둥이를 들고 집 주변에서 경계를 섰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면서 그를 믿고 따랐던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이 실망하거나 분노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유명한 사회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도 9월 16일 헌병대위인 아마카스 마사히코에게 체포되어 도쿄헌병대 구내에서 살해당하기 전까지는 자경단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여동생의 집에 놀러갈 만큼 자유롭게 지냈다. 게다가 일본 민중들은 사회주의자가 범죄를 일으킨다는 일본 정부가 퍼뜨린 유언비어를 믿지 않고, 정부를 비판했으며 군인이나 경찰에 검거되거나 피살당한 사회주의자들을 동정하였다. 조선인의 경우와 비교하면 너무나 대조적이다. 아울러 피살되거나 검거된 사회주의자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정부를 상대로 진상 조사와 책임 추궁을 강하게 요구하고 항의했다. 그 결과 오스기를 죽인 아마카스는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죽임을 당한 오스기와 이토 노에, 다치바나 무네카즈 등의 유골은 유족들에게 모두 인도되었다. 출처: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저/김동수,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이중 무정부주의자로 유명한 인사였던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는 헌병대에 의해서 일가가 참살되고 우물에 던져졌다(아마카스 사건). 이 사건의 책임자는 헌병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이며, 이 사건으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뒤 만주국으로 건너가 여러 정치공작과 선전활동(주로 영화 제작)에 가담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사카모토 류이치가 열연한 인물이 바로 이 사람.

또한 이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알아주는 병크 중 하나인 덴노의 통수권 문제가 두드러지면서 법리적인 근거를 얻게 된다. 바로 덴노의 대리인으로서 임무에 나선 군인의 책임을 묻는 것은 덴노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같다는 논리로 변론한 것. 이전에도 이미 군 통수권 행사에서 군의 독주는 어느 정도 확장되고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이제 일개 대위조차도 덴노의 권위를 등에 업고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긴 셈이었다.[6]

일본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 국가인지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작가 나카지마 아쓰시는 간토대지진이 있은지 얼마 안돼서 《순사가 있는 풍경》 이나 《호랑이 사냥》 과 같은 작품을 쓰기도 했는데, 일본인들이 느낀 정체불명의 공포감과 당시 조선인들의 삶이 어떻게 어우러져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1.4.2. 학살의 규모

초기부터 수천 명 단위 학살 소문이 돌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자의 자세한 보고서를 통해 6,661명 희생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희생자 중 상당수가 지진으로 인한 희생자의 착오라고 주장하고, 실 희생자는 조선인 약 300명 미만이라고 사태 수습 이후 사법성 명의로 공식 발표했다. 그동안 이의 신빙성은 매우 낮다고 평가되었는데, 적어도 일본 정부가 사실을 인정하고 벌인 각종 재판에서 확인된 희생자 숫자만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를 가볍게 뛰어넘기(약 900명) 때문이었다. 일본 학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2,711여명의 희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7] 그런데 2013년 6월, 53년도에 한국정부가 피해 청구 목적으로 조사하여 작성한 희생자 명단이 발굴되었었는데, 이 명단에는 당초 일본 정부가 주장한 300명 미만에 근접한 318명의 피해자 명단이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이 인원은 남한의 일부 사람을 대상으로 6.25 전쟁중 짧은 기간동안 조사한 것이라서 실제보다 적은 숫자일 것이다.

이전까지의 정설보다 더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는 독일 외무성 자료가 발굴되었으나, ."관동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 2만3천58명이었다" - 연합뉴스 2013년 8월 21일 문서 마지막 부분에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한 한국인이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언급을 봐서는 객관성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2013년 11월 24일, 명부에 실린 관동대지진 피살자 290명, 3·1운동 때 피살자 명부에 일부 포함된 52명 등 342명 중 실제 피살자는 198명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나머지는 3·1 운동 관계자나 독립운동 참가자, 강제동원된 사람들의 오기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살해된 사람들이 '쇠갈퀴'나 '곡괭이'로 살해되었으며, 일본 헌병이 개입한 경우까지 드러나기도 했다. #

2014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91주년을 맞은 일본은 일본의 가해 역사 기록자료가 모인 '피스 오사카' 전시관의 개편 공사로 관동대학살과 난징대학살 등의 자료는 전시관에서 사라질 예정 이라고 한다.# 역사를 입맛대로 수정하는 열도국.

1.5. 매체에 반영된 관동대지진

  • 소설 《토지》에서는 학살과 동시에 조선인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닌 오가다 지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 데빌 서머너 쿠즈노하 라이도우 대 아바돈왕》에서는 간토 대지진이 없어 다이쇼 20년이라는 가상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 아리랑》에선 한국인 학생들이 일하고 있는 공장 사장이 "우리 가족을 건드리느냐!"라며 폭도들의 난입을 막는다.
  • 영친왕이방자의 일대기를 다룬 일본 드라마인 《지개를 이은 왕비》에서는, 조선인 학살 소식을 듣고 영친왕이 뛰쳐 나가려다 아랫사람들에게 제지를 당한 뒤 통곡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인 학살 사건을 조금이나마 다룬 몇 안되는 일본 작품이라서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물론 영친왕의 행동은 픽션이다).
  • 재일교포 소설가 가네시로 가즈키가 쓴 《연애소설》의 단편 〈꽃〉에서는 등장인물 도리고에 씨의 조부가 대지진 직후 이웃에 사는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학살당하고 있다는 소리에 의분을 참지 못하고 말리러 나갔다가, 사회주의자로 몰려 고문을 당한 끝에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후손인 도리고에 씨는 '납득할 수 없는 것'과 싸우기 위한 직업을 경찰에서 변호사로 바꾸었다.
  • 피타텐에서도 배경 스토리에 이 이야기들이 나온다
  • 아버지와 나의 사건수첩라는 추리만화에서는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다룬 에피소드에서 관동 대지진과 학살이 나온다. 조선인 여인이 우물에 빠져죽은 사건이 있었고 아직 소년이었던 할아버지는 범인을 추리, 사건을 해결한다. 근데 조선인이 우물에 빠져죽어 우물을 못쓰게 되었다는 할아버지의 발언이 왜곡되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뿌렸다는 소문이 퍼지고 학살이 시작된다. 어린 할아버지는 이를 말리고 싶었지만 무기력했고, 소문의 원형이 되는 발언이 자기 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이를 밝히지 못하고 지켜만 봐야했던 죄책감을 가슴에 안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었다. 이를 들은 주인공은 할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 상주전신관학원 팔명진에서는 일본 최대 최악의 흉령 나키리 쿠보가 관동 대지진을 일으킨 원흉으로 등장한다.

1.6. 기타

간토 대지진이 난 직후 미국에서는 일본을 돕자는 모금운동이 일어났다.
관동대지진.jpg
[JPG image (Unknown)]



당시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에는, 일본이 반출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 지진으로 인해 모두 소실되고 대출본 47권만 살아남았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당시에 해당 문서에도 적혀있지만 모 참의원이 "사건 이후 일어난 화재가 재일 한국인의 방화일 수도 있다"라는 식의 헛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2011년 초 관동 대지진에 맞먹는 규모의 대지진이 도호쿠에서 일어났는데, 몇몇 혐한초딩들이 또 재일 조선인과 지나인(중국인)이 우물 물에 독을 타고 혼잡한 틈을 타서 부녀자강간하기 쉽습니다. 조심하세요.라는 식의 웃기지도 않은 개드립을 쳐서 어그로를 끌었다. 요새 우물쓰는 집이 어딨다고 그래
또한 2014년 기록적인 폭우로 인한 로시마 산사태와 관련하여 빈집털이가 발생했는데 '재해현장 털기는 한국인의 특기다', '3년 전 동일본대지진 때도 한국인이 빈집을 털었다', '한국인들의 비열한 범죄를 용서하지 마라'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지고 있다. 당연하게도 경찰조사 결과 그런 일은 없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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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아마기 항목의 경항모가 아니라 아마기급 순양전함 1번함.
  • [2] 사실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말년의 공황 분위기가 미증유의 국난으로 촉발된 게 정확하지만
  • [3] 한국은 이미 침략해 식민지를 만들었으므로 여기서 기술하지 않는다.
  • [4]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을 다룬 한국유일의 희곡『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3-4페이지의 코러스 중 발췌 (작가 김의경)
  • [5]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역사편의 표현.
  • [6] 재판 자체에서는 당장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으나, 이후 종범들을 대상으로 열린 별도 재판에서 이 논리가 제기되면서 병사들은 완전 무죄 방면되었고 장교들의 지휘책임 역시 묵살되었다. 이후 이 상황을 신병 정신교육 시간에 강조하면서, 병사는 무조건 덴노의 대리인 장교의 명령에 천황의 명을 받들듯 따라야 한다는 식으로 교육하게 되었다. 이는 훗날 2.26 사건 등의 군사반란 상황에서조차 장교의 명령에는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로 비화되었다.
  • [7]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행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PDF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