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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당 전쟁

last modified: 2018-08-19 03:39:43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당왕조의 건국과 연개소문의 쿠데타
2.1. 당의 건국
2.2. 영류왕의 유화책과 첩보전
2.3.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고조되는 전운
3. 1차 전쟁
3.1. 당나라의 전쟁 준비
3.2. 파죽지세의 당나라군 - 개모성 함락
3.3. 요동성 함락
3.4. 주필산 전투
3.5. 우주방어 안시성 전투
3.6. 당군의 철군
3.7. 당시 당군의 규모
4. 2차 전쟁
4.1. 고구려 공격
4.2. 사수 전투
4.3. 신라군의 진격과 후퇴
4.4. 결과
5. 3차 전쟁
5.1. 평양성 함락
5.2. 결과


1. 개요

高句麗-唐 戰爭
Goguryeo–Tang War

고구려중국 당나라왕조의 전쟁. 명칭에 관한 문제는 고구려-수 전쟁 항목 참조. 결론만 말하면 흔히 일컬어지는 고당전쟁이라는 표현은 역사적 어원을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명칭이다.

2. 당왕조의 건국과 연개소문의 쿠데타

2.1. 당의 건국

수나라수문제남북조시대에 도탄과 혼란에 빠져있던 중원을 통일시켜 안정시켰으나 아들인 수양제에게 살해당하고 왕위를 빼았겼다. 수양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3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싸웠으나(고구려-수 전쟁) 오히려 참패를 면치 못하였고 그 외에도 지나친 토목공사로 인하여 국고를 탕진하였으며 민심을 잃었다. 결국 수왕조는 내분으로 인하여 멸망하고 당국공 이연이 새롭게 왕조를 건국하였다.

그의 둘째 아들이었던 당태종 역시 맏형 이건성을 비롯한 두 형제를 죽인 후에 부황을 은밀히 압박하여 황위를 찬탈한 인물이었지만 수양제와는 그 그릇이 틀린 인물로, 당나라를 훌륭히 이끌었으며 건국 초부터 큰 위협이었던 돌궐을 무찌르고 고창국와 토욕혼을 격파하여 주변 국가들을 모두 정벌하고 나라를 안정시켜 후세에 관의 치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룩하였다.

2.2. 영류왕의 유화책과 첩보전

이렇듯 당태종이라는 걸물이 몰고 온 파장은 어마어마했고, 고구려영류왕은 이에 대해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힐리가한이 격파된 직후인 629년에 당에 사신을 보내 지도를 헌상하는 등 유화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한 동시에, 당의 팽창을 경계하며 631년 이후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해 7월, 당 조정은 관인을 파견하여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 때 죽은 수군의 유골을 수습하고, 요서 지역에 고구려 만든 경관(京觀, 수나라 군사의 시체로 쌓은 전승기념시설)을 허물라고 영류왕에게 항의했다. 이는 명백하게 고구려에 대한 위협이자 도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전쟁의 폐해를 염려한 영류왕은 당조정의 항의를 받아들여 경관을 허문다.

641년 5월, 당태종은 직방랑중 진대덕(陳大德)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그 전해 영류왕이 태자를 당에 보낸 것에 대한 답례 형식이었는데, 직방랑중은 병부 소속으로 국내외의 주요 군사시설을 포함한 지도 제작을 관장하는 직으로서, 군사정보수집의 실무를 총괄하였다. 진대덕은 자신이 경치 좋은 곳 탐방을 좋아한다면서 평양으로 가는 도중에 고구려의 주요 산천과 성곽 및 교통 요지들을 두루 살폈고 정보를 모았다.

당시 고구려는 매우 심각하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고구려의 최고위직인 대로(大對盧)가 진대덕의 숙소를 세 번이나 찾아가는등 예우를 극진히 하면서 어떻게든 정보를 얻어보려고 하였다. 이해 8월, 진대덕은 귀환하는데 그가 얻은 정보를 당태종에 보고하였다. 당태종은 기뻐하며 노골적으로 고구려 공격에 대한 야욕을 보였고, 기회만 오면 공격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진대덕의 평양성 방문은 고창국 멸망 소식등과 함께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을 촉발하였다. 귀족들은 강경과 온건의 의견차로 대립하였고, 고구려는 안팎으로 중대한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후 영류왕은 고구려 내 권력 균형 문제로 과도하게 힘을 키운 연가를 여타 귀족들과 견제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역으로 막리지 연개소문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시해되고 말았다. 이후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함께 귀족 100여명[1]을 제거하여 그를 견제하던 타 귀족들을 무력화시킨 후 보장왕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대막리지의 칭호를 얻어 고구려의 최고 실권자로 떠오르면서 양국간에는 긴장이 고조된다.

2.3.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고조되는 전운


당에 대해 적극적인 화친 정책을 펼쳐오던 영류왕이 연개소문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당태종은 이에 크게 진노했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고 요청하면서 양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명분을 쌓아올렸다. 전통적인 조공 책봉 관계로 보면, 제후국들이 서로 싸움을 벌이는데 천자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한다면, 천자가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셈이다. 연개소문은 이러한 당나라 사신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의자왕의 경우에는 겉으로는 일단 응하는 듯한 자세를 보였다. 반면 고구려에 대해 당나라가 다시 한번 사신을 파견하여 압박하자 연개소문은 당 사신을 굴에 가두어버렸다.

외교적 압력은 효과가 없었고, 이렇게 되면 무력 행사밖에 남은 길이 없었다. 당태종은 직접 고구려 정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왕을 죽인 불충한 역적 연개소문을 토벌한다는 명분이었다.

"요동은 옛 중국 땅이고 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몸소 가서 이를 경략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어른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가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터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고, 포백과 곡식을 후하게 주었다. 군신들이 모두 황제에게 가지 말기를 권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나는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가며,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으로 감은 셋이 모두 좋지 못하다.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개소문은 임금을 죽이고 또 대신들을 살육하고 즐거워하고 있으므로, 한 나라의 사람들이 목을 내밀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있다."─三國史記 卷第二十一 髙句麗本紀 第九

당나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연개소문은 백금과 관원 50여 명을 바치면서, 이들이 당나라 수도에 머물기를 원한다고 요청했다. 당나라 조정을 달래고 상황을 살피려는 의도로 보이는데, 연개소문이 당 사신을 박대한 것처럼 당태종도 고구려 관원을 구속하고 백금을 거부하여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 당시 당태종의 상황을 살펴보면, 후계자 책봉 문제로 상당히 곤혹스러운 시기를 지났었다. 군집(侯君集) 등의 원로들이 죽었고, 장손무기수량 등이 셋째 이치를 지지하고 나서면서 뜻을 이루고 반대했던 사람들을 처벌하는등 위풍당당한 당태종의 이름치고는 꽤나 골치아픈 상황에 시달렸었다. 심지어 현장 법사에게 환속을 권유하여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을 정도.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 정벌은 자신의 권위를 다시 한번 세울 수 있고, 또 유약해보이는 셋째 이치가 차기 황위계승자가 된 상황에서, 자신이 안정적인 발판을 깔아줄 수 있는 수단도 될 수 있었다. 어찌되었건 모든 상황이 전쟁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3. 1차 전쟁

출정에 앞서 당태종이 총애하던 이었던 위징은 고구려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고 수나라 역시 대병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꺾지 못하였다며 고구려 원정에 반대하였다. 당태종 역시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잠시 원정 계획을 보류하였으나 위징이 사망한 이후에 원정을 말리는 이가 없게 되자 마침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3.1. 당나라의 전쟁 준비

644년 7월, 당태종은 출병에 필요한 군량 징발과 수송에 관한 조처를 취하고, 한편으로 영주도독 장검에게 영주, 유주 도독부의 군대와 거란·해·말갈 등의 기마 군단을 이끌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방어 상태와 형세를 탐색하게 하였다. 장검은 마침 요하가 범람하여 강을 건너지는 못하였지만, 소규모 정찰대를 잠입시켜 요동 각지의 지형과 기후, 수초(水草)의 상태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했다.

그리고 10월, 당태종은 수도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면서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아무래도 전대 왕조인 수나라의 폭정 중에 하나가 고구려 원정이었고, 그때문에 고구려 원정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많았을테니(고작 30년전 일이다.) 이는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조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11월, 형부상서 장량이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었고, 남부 지역에서 징발한 병사 4만, 장안과 낙양에서 모병한 3천, 전함 5백여 척을 동원해 산동반도를 떠나 해로로 평양을 향해 진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기병 6만과 난주·하주의 유목민 항호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645년 2월 12일, 낙양을 출발하여 6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 十九年(645), 命刑部尙書張亮爲平壤道行軍大總管, 領將軍常何等率江·淮·嶺·硤勁卒四萬, 戰船五百艘, 自萊州汎海趨平壤; 又以特進英國公李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 禮部尙書江夏王道宗爲副, 領將軍張士貴等率步騎六萬趨遼東; 兩軍合勢, 太宗親御六軍以會之.

19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장군(將軍) 상하(常何) 등과 江·淮·嶺·硤의 강한 군사 4만 명·전선(戰船) 5백 척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平壤)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 특진(特進)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예부상서 강하왕 도종(禮部尙書 江夏王 道宗)을 부총관(副總管)으로 삼아서 장군(將軍) 장사귀(張士貴) 등과 步兵·騎兵 6만을 이끌고 요동(遼東)으로 나아가게 했다. 兩軍이 합세하도록 한 다음, 태종(太宗)은 친히 6軍을 거느리고 가서 전군을 합류하기로 했다.─舊唐書 卷 199 東夷列傳 第 149

수나라와의 전쟁 당시와 달리, 이 당시 당나라 군의 자세한 전체 숫자는 명기되어 있지 않다. 이를 당태종의 패배를 드러내는 것이라 꺼렸다는 말도 있는데, 반대로 당나라가 수나라의 실패를 두드러져 보이게 하기 위해 여수전쟁 당시의 기록을 일부러 과장되게 했다는 식도 있고[2] 여하간 말하는 사람마다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부분이라 논란이 많다. 가장 무난한 견해로는 10만명 대의 본 병력에, 영주도독부, 거란과 해등의 유목민 부대가 합쳐질것을 고려해서 20만 중반대 혹은 30만 내외라는 추정이다. 일부에서는 50만 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신라에게 파병을 요구했으며, 백제에게도 협조, 혹은 최소한 방해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였다.

3.2. 파죽지세의 당나라군 - 개모성 함락

645년, 마침내 당나라 군의 선봉이 요서의 영주에 다다랐다. 당시 영주에서 요동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세 갈래로, 하나는 연군성(燕郡城), 여라수착(汝羅守捉)을 거쳐 요하 하류를 건너 한(漢) 대의 요대현(遼隊縣)에 이르는 남도이고, 다른 하나는 연군성 ─ 회원진(懷遠鎭)을 거쳐 요동성으로 이르는 중도였다. 북도는 연군성에서 북으로 통정진(通定鎭)을 지나 신성, 현토성 방면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당군은 이 세 길을 따라 진격하였다.

다시 복기해보자. 수나라군의 경우, 전군이 중도를 취해 요동성을 공략한 뒤, 곧바로 천산산맥을 넘어 골성을 공격하고 압록강으로 나아가 평양으로 진격하자는 계획이었지만, 그것이 요동성 공략전부터 실패하자 모든것이 꼬여 버렸다. 그에 비해 당군은 요동 평야에 확실한 교두보를 구축한 뒤 삼군이 동시침공한다는 방침으로, 요하를 건너는 작전부터 세 방향에서 전개, 요동성을 삼면에서 압박하였다.

이세적의 선봉군은 중도를 취하는 듯 하다가, 일순간 갑자기 방향을 틀어 우회하는 노정이지만 가장 평탄한 북도로 움직여 신속히 이동하여 요하를 건넜다. 4월 1일, 당군은 고구려군의 요하 방어선을 기습적으로 돌파하여, 이세적은 현도성(玄菟城)을, 부총관인 강하왕 도종은 병력 수천으로 신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군은 매우 놀랐으나 성문을 틀어박고 수비를 하였는데, 공략이 여의치 않자 당군의 일부로 신성 방면의 고구려군을 묶어둔 뒤 주력을 남으로 돌려 개모성(盖牟城)을 함락시켰다. 이때 연개소문이 가시성(加尸城)의 700여 명을 보내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에게 사로잡히고 당나라 군대에 종군하길 원하자, 나중에 당태종은 그 병사들의 집이 가시성에 있는데, 만일 지금 내 부대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 처자들이 모두 살해당할테니 그럴 수는 없다고 하여 모두 풀어주었다. 당태종으로서는 인덕을 과시함과 동시에, 아무래도 첩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병력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세적의 당군은 이곳을 근거로 삼아 일부 당군을 주둔시켜 신성 방면의 고구려군과 교전하면서 그 동향을 견제하게 한 뒤, 5월 들어 주력은 남쪽의 요동성으로 진군시켰다. 한편으로 영주도독 장검은 남도를 취해 도하한 뒤, 이민족 부대를 거느리고 건안성(建安城)을 타격하였고, 국내성에서 출발해 안성안시성방면을 거쳐 요동성으로 진격하는 고구려 지원군 4만을 기병 4천으로 저지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남쪽에서 요동성을 지원하는 것은 장검이 이끈 당군이 이미 건안성 등에 선제공격을 취하는 바람에 이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라도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로서 신성과 국내성을 통해 남북으로 협격하여 요동성을 지원하려던 고구려의 방책은 저지되었다. 당군은 전쟁에서의 선택권을 처음부터 자신들이 쥐고, 고구려는 여기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

이 무렵 당태종의 본군은 중도를 취해 요택(遼澤)을 건너 요동성으로 몰려들었다. 요택은 진흙이 200리여서 사람과 말이 모두 건너갈 수가 없음으로,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넓게 깔아 다리를 만들어 군대가 지체하지 않고 요택 동쪽으로 건넜다. 당태종은 늪지대 등을 통과하면서 사용한 다리를 모두 치워버려 배수진격으로 군대의 마음을 굳게 하였다.

3.3. 요동성 함락

요동성 앞에 주둔해 있는 이세적의 군대 안에서는 두가지 의견이 나왔는데, 바로 싸우자는 측과 당태종의 주력이 도착한 후 싸우자는 주장으로, 후자가 우세했으나 강하왕 도종은 속전을 주장했다. 교전이 벌어지자 당나라의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가 달아나는 바람에 당군이 패배하였는데, 도종과 이세적이 역습을 하는 바람에 고구려군이 천 명 사망하였다.

이후 당태종의 주력이 도착함에 따라 요동성의 상황은 급속도로 암울해졌다. 당태종은 속전을 한 강하왕 도종을 칭찬하고 도망친 장군예를 처형했으며, 용감하게 싸웠던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는 중랑장으로 임명했다. 또 태종은 직접 기병을 이끌고 성 가까이 와서, 흙을 지고 나름으로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과장이 있을 것은 감안해야 하겠지만, 기록상 당나라군이 수백겹으로 요동성을 포위하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고함을 치자 그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 지경이었다.

경총요(武经总要)의 당차(撞车) 그림

이 당시 고구려군은 상황이 몹시 좋지 않자 미녀를 단장하고 무당이 굿까지 했고, 그러는 상황에서 당나라 군대의 이세적은 포거(抛車)를 쏘아 큰 돌을 3백보까지 멀리 날려 성 안에 타격을 가했다. 남풍이 불자 당군의 정예병력이 달려들어 성 내에 까지 번졌고, 고함소리, 불꽃, 포격, 굿 등 그야말로 난장판 속에 마침내 당군이 성내로 진입하였다. 고구려군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으나 적이 워낙 막강하였다. 마침내 요동성이 무너지고, 이 전투에서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또한 체포된 병사가 만여 명, 남녀가 4만 명이고, 양곡이 50만 석이었다.

수양제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왔음에도 그렇게 견고하게 버티던 요동성이, 이토록 허망하게 열흘만에 무너져내린 것이다.

이 직후 당군은 기세를 살려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이 오골성의 군대를 내보내서 백암성을 포위한 당군을 치라는 명을 내렸으며 승리하여 당나라 장군 글필하력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백암성 성주인 손대음(孫代音)이 당나라의 군세가 크고 거대함을 알고는 두려워 하다가 결국 항복하면서 백암성은 함락당하였다.

동시에 당나라 수군을 이끄는 장량 역시, 요동반도 남단에 있는 사성을 함락시켰다. 이 부대가 당나라 본진과 합류하는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더 큰 위협은 해로를 통해 군수물자 등을 보급하는데 있었다. 이로서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에서 백암성이 이르는 넒은 지역을 장악,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하면서도 보급을 완비하며 장기주둔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3.4. 주필산 전투

이렇듯 전역의 초기, 당나라 군대는 압도적인 군사적 역량을 과시하며 고구려를 사정없이 몰아쳤다. 고구려는 이에 쩔절 매었으며, 마침내 주필산 전투라는 비극이 닥쳐오게 되었다.

당군의 주력 병종인 기병, 궁병 등의 이미지

이렇게 당군은 승승장구 하였으나 이후 안시성을 공격하기 전에 안시성이 잘 방어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당태종은 안시성 대신 두 성중에 어느 성을 먼저 공격할지 물었는데 이때 이적이 두 성 모두 당군에게 큰 위협이긴 하지만 안시성을 미리 쳐서 함락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보급이 어려워지고 후에 배후 기습을 당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곧 여러 신하들이 안시성을 칠 것을 건의하니 당태종은 이에 따르기로 하였다.

당나라 군대가 요동에 침입하여 이미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는 급보를 전해 들은 연개소문은 곧 북부욕살(褥薩)이었던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으로 하여금 당군을 치도록 하였다. 명을 받은 고연수와 고혜진은 말갈에 까지 병력을 얻어와 15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루었다.

이때 이들과 함께 전세를 살피던 백전노장 고정의는 당태종의 지략이 뛰어나니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권하였다.

"진왕(秦王 = 이세민)은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한 시대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나라 안의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병력을 멈추고 싸우지 않고 세월을 허송하며 오래 버티어 견디며 기습 병력을 나누어 보내어 그 식량을 보급하는 길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양식이 이윽고 떨어지면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 수 있다." ─ 三國史記 卷第二十一 髙句麗本紀 第九

고정의가 주장한 지구전은 실제로 당태종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이기도 했다. 당태종은 신하들에게 고구려군의 고연수가 취할 계책은 세가지인데 가장 상책으로 바로 고정의가 주장한 바와 똑같은 말을 하였다. 중책은 안시성의 병력과 함께 달아나는것이고 하책은 일단 싸우자는 식인데, 당태종은 고연수가 소위 그 하책을 선택할 것이라 예상했다.

과연 두 사람은 이 충고를 묵살하고 곧바로 당군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고구려군의 운명은 정해졌다. 당서와 삼국사기에는 당태종이 고연수가 하책을 택할지 어떻게 알았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특히 상책은 고구려-수 전쟁 때 이미 고구려가 써먹어 엄청난 효과를 본 전략인데도 그렇다. 하지만 고연수로서는 안시성이 연개소문에게 적대했던 적이 있으므로 안시성과의 연계가 필수적인 상책과 중책을 택하기 껄끄러웠을 것이다. 여기에 15만이나 되는 대군이 오랫동안 발이 묶여 있다면 연개소문 반대파가 쿠데타를 시도하거나, 최소한 정치적으로 압박을 넣을 수 있다. 특히 연개소문의 집권 과정에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었으니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은 고구려-수 전쟁때보다 훨씬 높았다. 즉 고정의가 제의한 지구전은 고구려로서도 껄끄러운 전략이었다.

당태종은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尒)의 돌궐 기병 1천여 명으로 일부러 짐짓 패하는 장면을 연출하여 고연수를 방심하게 했고, 고연수는 "상대하기 쉽구나."라는 드립을 치면서 자신감을 얻어 계속 당군에 접근하였다. 마침내 고구려군은 안시성 동남쪽 8리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안시성 내의 고구려 군과 협력한 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3][4]

이때 당태종은 일부러 15만 군사의 위용에 겁을 먹은척하여 두 욕살에게 선뜻 사신을 보낸다. 당태종은 고연수에게 연락을 취해, 자신은 연개소문을 문죄하러 왔을뿐, 교전은 바라지 않고 다만 신하의 예만 취해준다면 철수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보였다. 뻔히 보이는 기만책이지만, 고연수는 이에 속아넘었던지, 혹은 은연중에 경계를 늦추고 자만했던지 진군을 멈추고 방비를 게을리 하는 실수를 보였다.

한편 당태종은 이 기간동안 병력을 밀집시켜 포진을 완료하고 고구려군을 기다린다. 고구려군이 안시성과 연계할 것을 우려하여 고구려군을 당 태종 본대가 포진한 지역으로 끌어들인 후 장손무기로 하여금 고구려군 배후로 돌아 공격하게끔 한 것이었다.

다음 날, 고연수는 1만 5천여 병력을 이끌고 서쪽 고개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이세적의 군대를 보고, 그 숫자가 적다고 여겨 공격을 가하였다. 고구려군이 당군에 집중하여 돌격한 사이 장손무기가 이끄는 부대가 고구려군을 기습적으로 강타하였고, 전면의 이세적은 1만 장창병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서 고구려 기병의 돌진을 저지했다. 고구려군은 앞으로 돌진하자니 이세적의 부대에 막히고, 뒤로는 장손무기의 병력에 막혀 크게 당황하였다.(퇴로는 이미 장손무기가 다리를 끊어 봉쇄된 상황.) 즉, 고구려군이 너무 성급한 나머지 유인 - 반전 - 포위 전술에 말려버린 것. 삼국사기에선 여기에 덧붙여 천둥번개가 치는데다, 전면에서 용문 출신의 용병 설인귀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를 치며 돌진하며 고구려 군의 전열을 흩어지게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고구려군은 큰 피해를 입어 3만(삼국사기) 명이 전사하였다.

고연수 등을 비롯한 고구려군 3만 7천여 명은 자그마한 구릉에 올라가 방어책을 강구하려 하였지만, 당군이 이를 포위하자 결국 항복하였다. 항복한 고구려 장교만 3천 5백여 명이었고, 말갈 병사 3천 3백여 명은 모두 땅에 파묻어버렸다.[5] 또 이 전투에서 당군이 거둔 말만 5만여 필이나 되었으며, 항복한 고연수는 홍려경(鴻臚卿)으로, 고혜진을 사농경(司農卿)으로 봉해졌다.

왕군악의 전사를 거론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에 대한 신당서 태종실기의 기록은 '六月丁酉,克白岩城。已未,大敗高麗于安市城東南山,左武衛將軍王君愕死之'이다. 당서는 사건의 순서를 나열한 것이지 날짜에 따라 기록한 사서가 아니며, 따라서 주필산 전투의 결과를 이야기하면서 그 전투에서 있었던 일(왕군악 전사)를 기록한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3.5. 우주방어 안시성 전투


고구려 개마무사의 이미지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 군과 싸워 승리한 당태종은 곧 계획대로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다. 당시에 당태종은 안시성이 다른 성들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 성주 또한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당시에 이에 호응하지 않았던 점을 미루어 보아 항복을 권유하면 순순히 응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안시성주는 항복을 거절하고 오히려 굳세게 방어하였으며 당태종은 크게 진노하여 군사를 몰아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안시성에서 예상치 못하게 고전을 하게 되자 당태종은 안시성 공략을 GG포기할 것도 생각하였으나 안시성을 포기한다면 곧 그들이 배후에서 공격을 감행하거나 보급로를 끊어 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시성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안시성은 낮에 철저히 방비를 하는 한편 밤에는 정예병들로 하여금 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게 하여 야습을 일삼았다. 화가 난 당태종은 "성을 함락시키면 성안의 모든 사내를 죽여버리겠다."라는 극딜불필요한 말을 하여 오히려 안시성의 저항의지만 돋구어 버렸다. 이러한 일이 당군의 전황에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6]

이때 당태종과 함께 출전했던 이도종의 건의에 따라 안시성의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토산을 쌓을 것을 명하여 수개월에 걸쳐 흙을 쌓아 토산을 만들었다. 한때 토산 위에서 나무와 돌을 날려 안시성의 성벽 일부를 허물었으나 폭우로 인하여 토산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때 안시성의 성벽 위에 있던 고구려 병사들이 허물어진 토산으로 진격하여 이를 빼앗아 버렸다.

최후의 희망이었던 토산 마저 잃어버리자 당태종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었고 결국 철군하였다. 이때 토산의 책임자였던 이도종이 토산을 허술히 관리하여 고구려군에게 빼앗겼다고 하여 그 책임을 묻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당태종은 이도종이 요동에서 싸울때 개모성과 요동성을 함락시킨 공로가 있으므로 그럴 수 없다며 이도종을 용서해 주었다.

당시 당군과 안시성 성주 간의 전투는 무척 치열하여 당태종이 이 전투에서 한쪽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한편 안시성주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그의 이름이 남아있지 않음을 슬프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다만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당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양만춘이라 하고 몇몇 기록에 양만춘이라고 언급되긴 하나 야사에서 그렇다고 언급하고 있기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3.6. 당군의 철군

안시성에서 지나치게 시간을 끈 결과 당태종이 염려하던 대로 겨울이 닥쳐왔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 당군은 점차 싸울 힘을 잃어갔다. 결국 당태종은 고구려에서 철군할 것을 결심하였다. 요하 하류 도강을 선택한 당군은 진흙길을 고생하며 건너 돌아가야 했고 이때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당나라 병사들이 행군 중에 상당히 많이 죽거나 병들었다고 한다.

당태종은 일찍이 이런 참혹한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나를 말렸을 터인데 그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애석한 일이다."라며 한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고구려가 입은 피해도 상당히 컸지만[7] 결국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에서 발이 묶여 고전하다가 돌아갔으므로 결국은 패전하였다. 결과적으로 많은 고구려 군과의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음에도 결국 전쟁에서는 패배한 꼴이 된 것이었다. 신당서에서는 졸렬하게 야전에서 사상을 당한 병력만 계산하여 육군 5천, 수군 1천으로 되어 있으나 구당서에 따르면 풍토병, 보급 문제 등으로 수만 군사를 잃은 것으로 기록했다.
나폴레옹식 정신승리 : 난 러시아에게 진 것이 아니라 자연에게 진 것이다! 아! 내가 자연인이다!

한편 주필산 전투 후에 당나라에 투항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곧 당나라가 고구려을 멸망시킬 것으로 믿었으나 오히려 당군이 패퇴하고 달아나자 고국을 버리고 투항했던 일을 크게 후회하였다. 결국 고연수는 이 일로 상심하다가 홧병으로 죽었고 고혜진은 결국 살아서 당태종을 따라 당나라 장안에 도착하였다.

3.7. 당시 당군의 규모

당군은 약 10만의 정예 병력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다만 안시성 전투 시 연인원 50만을 동원했다는 기록이나 정예 10만이외에도 상당수의 병력있었을 것을 암시하는 기록들로 보아 10만으로만 침공했다 단정짓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10만의 숫자는 정예 병력의 숫자이고 여러 보급이나 수송에 참여한 인원을 고려할 시에는 더 많은 수의 인원이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길이가 40m가 넘는 요동성을 몇백겹으로 포위했다는 좀 과장된 기록, 주필산 전투에서 이적과 장손무기의 총관이 40명이 넘는다는 것등 참고로 총관은 1만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다. 그외에도 10만명뿐이라면 이해가 가지 않을 고구려군의 수성적 방어 태세등 분명히 고구려 전군인 30만명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일단 행군총관이 이끄는 1군의 병력이 당의 시대에 따라 대단히 유동적이라 1만이라고 한정하기 힘들다. 이 설을 주장한 김용만 선생은 고대 춘추전국시대(제나라)의 예에서 군의 수를 1만으로 추정하지만 바로 직전인 수나라의 군제만 봐도 1개 행군이 6천여였던 적도 있고, 2만에 달하던 때도 있다. 거기다 <이위공전서>에서 당의 군제는 1개 군이 2만인데 <당육전>에서는 5천 넘으면 총관 1명이 배치, 즉 5천 선부터 1개 군으로 셀 수 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군을 5천으로 잡으면 당측이 고구려군을 부담스럽게 여긴 것이 지극히 타당하게 보여진다.

요동성 포위기록은 고대 기록 특유의 과장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고, 당군이 요동성을 공략하기 전에 신성과 국내성의 지원군과 전투를 치룰 때 도종은 4천의 기병을 이끌었지만 이 안에 행군총관 장문예가 있었다.(자총관일 수도 있다. 당은 총관을 복층제로 임명했고 상급 총관은 총관이라고 적고 말지만, 하급총관은 '자총관'이라고 할 때도 있고 그냥 총관이라고 적을 때도 있다.)

여기에 더해 당이 그때까지 벌인 대외원정에서도 10만 이상의 원정군을 편성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도 정황상 근거가 된다. 거기다 고창국으로 원정군을 보냈을 당시 당은 병력부족으로 이제 막 건국한 토번의 공격에도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당이 갑자기 병력을 30만씩 편성해 보낸다는 것은 당의 국력이 받처준다고 보기 힘들다.
물론 항복한 고구려 병사들 숫자를 고려하면 15만 정도는 가능

안시성 전투의 토산을 쌓은 인원이 50만이라 하지만 이는 60일간의 연인원이며 하루 동원 인력은 1만이 채 되지 않는다. 여기에 고구려군이 마냥 수성적으로만 대처하지도 않았고, 위의 요동성 전초전이나 주필산 전투, 그리고 오골성의 글필하력 요격전등 다수의 야전도 치뤘다. 애초에 10만 정예병이라고 몇개 성에서 공격적으로 대처할 병력은 절대 아니고, 각 성에서 보급선을 끊고 적군을 소모시킨 후 주력병력을 진출시키는 것이 고구려의 전략이라 그다지 기존 전략에 비해 수세적인 전략을 펼치지도 않았다. 전부 져서 문제지.[8] 설령 수세적이었더라도 신성이 고작 수십기의 기병에게 봉쇄되는 등, 숫적 열세보다는 당군의 기동전략에 각 성이 고립된 면이 더욱 크다. 당태종이 요택으로 철수한 것은 보급 부족도 있었지만 설연타가 당에 대한 공격 의사를 드러냈기 때문에[9] 급박한 철수 작전이 필요하던 시점이었던 점이 더욱 크다. 30만~50만설은 지나치게 많게 잡은 것으로 추측한다.

4. 2차 전쟁

당나라는 1차 전쟁에서 패배하였으나 수나라와는 달리 여러 성을 함락시키기도 하고 야전군에도 큰 타격을 입히는 등 상당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당태종은 이러한 성과를 계속 확대시키고자 수만[10]의 병력을 지속적으로 원정군으로 편성,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소모전의 목적은 요동 일대의 고구려 세력을 계속 약화시키고 대응하여 출격하는 야전군 또한 격파하여 방위력을 소진시키는 데 있다 할 수 있다.

당태종은 이후 재차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사망한다. 아무래도 아들의 군사적 역량을 신뢰할 수 없었는지 유언으로 고구려를 치지 말라[11]는 말을 남겼다.

그 뒤를 이은 당고종 치세에도 당은 주필산 전투에서 활약해던 맹장 설인귀에게 군사를 내주어서 655년과 659년에 고구려에 원정군을 파견하나 별 성과를 보이진 못했고, 고구려를 치고자 강한 의지를 보이던 당 태종이 사망한 탓인지 이러한 요동에서의 소모전도 횟수가 감소하게 된다.[12]
그 후에 659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신라와 힘을 합쳐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신라와 당나라가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각각 남과 북으로 공격해 왔다.

고구려는 동맹국인 백제가 멸망해 이제는 신라, 당나라, 양쪽에서 압박을 받으며 고립상태가 되었다. 당 태종이 절대로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지만 애초에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인 당 태종이 고구려군에 패퇴되고 그 전쟁에서 병을 얻어 사망했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해 강한 증오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먼저 처들어간놈이 누군데?

655년에 고구려는 백제, 말갈이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여 33개 성을 빼앗아 신라의 수도인 금성까지 위협하자 김춘추가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고구려의 뒤통수를 치기위해 국경지역인 요하에 도착해 선제공격을 했지만 패퇴하였으며 또 다시 659년에 공격했지만 성과없이 퇴각한다.

그러다 660년, 당은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의 동맹국인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고구려를 고립시킨다.
그러자 정벌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한 고종은 661년 정월에 4만 4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하지역에 도착해 공격하고자 했지만 이때 백제부흥군이 나,당 연합군 진영에 선제공격을 가하여 혼란에 빠지자 공격 시기를 늦추게 된다.

4.1. 고구려 공격

백제 부흥운동이 기세를 더하던 시기이긴 하지만, 660년 겨울 당고종은 고구려 원정을 발표하고 병모를 모집하기 시작한다. 최종적으로 동원한 규모는 대략 35개 군. 위에서도 언급했듯 1개 군이 규모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정확한 규모는 미상. 이를 6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다. 각각의 진격로는 미상이나 대체적으로 소사업과 글필하력이 이끄는 부대는 육로, 소정방 부대는 해로로 전진한 것이 확실해 보이며, 그외에 임야상, 방효태가 지휘하는 부대도 해로 쪽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있다.

아울러 당에 숙위하던 김인문을 귀국시켜 막 즉위한 문무왕에게 고구려 공격 사실을 알리고 출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신라측은 문무왕이 직접 남천주로 나아가 옹산성과 우술성 일대의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 웅진성에 주둔하던 당측 장수인 유인원과 연결선을 다시 이은 후 주력군을 차출해 북벌군을 편성하면서 고구려 일대의 전황을 살피기 시작한다. 북벌군의 지휘는 신라 최고의 권력자, 김유신이 직접 맡기로 하였다.

그해 8월 고종은 군을 내보낸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의 기록이 약간씩 다른데. 세가지 기록을 정리해 보면 대략 글필하력 : 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 : 평양도행군도총관, 임아상 : 패강도행군대총관, 소사업 : 부여도행군대총관, 정명진 : 누방도행군총관, 방효태 : 옥저도행군총관 정도가 아닐가 여겨진다.

병력 규모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개 군 = 최소 5천이라는 당육전의 기록을 생각하면 35개 군의 최소 병력은 약 17만 5천, 특수 임무를 맡은 군의 경우 규모가 확대된다는 점을 생각하면(당육전에는 최대 1만 이상의 부대로 증편될때까지 고려하여 장교 배치를 달리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20만 내외에 종속된 기미주의 이민족 병력이 +a 일 것으로 보인다. 정명진과 방효태는 대총관이 아니라 총관에 불과한데도 대총관과 같이 기술되었는데, 이는 이들 부대가 여타 군에 비해 증강된 특수부대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에게, 고작 20만?' 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중국이 아무리 인구가 썩어넘친다 해도 수십만씩 원정군을 보내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당나라 290여 년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원정군이 20만이 넘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며, 이정도를 보내는 것도 국력을 상당히 집중시켜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30만을 넘기는 건? 당나라 전체의 역사를 탈탈 털어도 한두번 있을까 말까 한 정도의 일이다. 중국 통일왕조가 수십만씩 원정군을 편성해 원정보내는 것은 국력이 최절정기에 도달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인 것이다.

가장 먼저 고구려 영내에 진입한 것은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이였다. 661년 8월, 소정방은 바다를 통해 패수로 진입, 저지하는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 근처인 마읍산을 점령하고 군영을 세운 후 평양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평양성은 함락이 쉽지않았다. 평양성은 외곽, 외성, 내성 등 3중 구조로 되어 있고 오랜 공성전을 경험한 유서깊은 성이며, 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요새였기에 소정방군 단독으로 이를 공략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이로인해 장기전으로 이어진다.

거기다 서북지역에서 철륵(위구르)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남하하던 글필하력군, 소사업군이 귀환하자 당의 작전은 매우 꼬여버렸다. 거기다 고구려군이 후방을 차단시켜 보급로가 끊기게된다. 완전히 고립되어 식량부족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당고종이 급히 보낸 사신으로부터 10월 말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라군은 쌀 4천석, 조 2만 2천석을 준비, 북벌군을 북상시키기 시작한다.

한편 소정방군은 식량부족을 호소하면서도 겨울이 다가오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총공세를 시도하나 고구려군의 반격에 의해 오히려 괴멸당할 위기에 몰리게 된다. 결국엔 퇴각로까지 차단될 위기까지 온다. 때마침 도착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의 군량미로 밥을 지어먹고 황급히 퇴각한다.

고려(고구려)인이 말하기를 '12월에 고려국에서는 추위가 매우 심해 패수가 얼어붙었다. 그러므로 당군이 북과 징을 요란하게 치며 운거와 충팽을 동원해 공격해왔다. 고려의 사졸들이 용감하고 씩씩하였으므로 다시 당의 진지 2개를 빼앗았다. 단지 2개의 요새만이 남았으므로 다시 밤에 빼앗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당의 군사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곡을 하였다.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힘이 다하여 빼앗을 수가 없었으니,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라 하였다. - 일본서기
주어가 자꾸 바뀌고 생략된 부분이 있어 뭔가 앞뒤가 안맞아 보이지만, 이를 해석하자면 '겨울에 패수(대동강)가 얼어붙자 당군이 공성무기를 동원해 공격을 해왔지만, 이를 물리치고 오히려 당군의 진지를 2개 빼앗았다. 남은 요새 2개를 뺏기 위해 밤에 공격하였고, 이 공격에 당군의 사기가 매우 저하되었으나, 고구려군의 힘이 부족해 요새를 점령하는데는 결국 실패했다. 빼앗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안타깝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후 소정방은 신라군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방어에 전념을 다했고, 2월 6일 신라군과 합류하면서 날라온 식량과 의료품을 받은 후 해얀으로 철수, 당으로 귀국하였다.

4.2. 사수 전투

이 당시 지속적인 소모전에 의해 요동 방어선은 무력화 되었고, 한달여의 시간을 들인 끝에 글필하력이 지휘하는 요동도행군은 압록강에 육박해 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아들 연남생에게 군대를 주어 이들을 맞서게 하였고 글필하력과 압록강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나 겨울이 되어 압록강이 얼어붙자 이를 도하, 고구려군 3만여를 사살 또는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중국 서북지역에서 철륵(위구르)이 반란을 일으키고, 설인귀와 정명진의 지휘 아래 이를 진압하던 당군은 설인귀가 무리한 추격전을 벌이다 심각한 피해[13]를 입기도 하는 등 상황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결국 육상으로 전진하던 당군을 철수시키는 결정을 내리고 만다. 구당서 글필하력전에 따르면 글필하력의 철수는 확실히 이 때문이며,[14] 소사업의 철수도 이것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의 위기는 계속되었다. 소정방은 비록 육상으로의 엄호는 끊겼지만 아직 해상에서의 지원군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신라군도 지원올 것이라 믿고 계속 평양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소정방과 합류하기 위해 압록강 인근에 상륙, 남하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효태가 이끌던 옥저도행군이 사수까지 전진해 왔다가 연개소문이 직접 지휘하는 고구려군과 교전, 대패하고 그 자신도 전사해 버린다.

이때 사수전투의 전개과정에 대해 삼국사절요를 보면 방효태 부대는 초전에 패해 포위망에 갖혀 버리고(탈출을 권하는 부하에게 "내가 데리고 온 향리의 자제 5천여 명이 이제 모두 죽었는데 어찌 내 한 몸만 살아남기를 구하겠는가?" 하며 물리치는 모습이 나온다. 이때 방효태는 영남도 백주자사였으며, 영남도에는 6개 부가 있었으니(소속 부병 최대 7천 2백, 최소 4천 8백) 이지역 부병들을 동원해 종군시켰다가 초전에 전멸한 듯 하다.) 이후 필사적으로 돌격한 당군을 섬멸하는 두단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방효태의 13명의 아들들도 모두 전사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 소정방군은 평양성 인근에서 고립무원의 처지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후 겨울에 이루어진 대공세로도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

4.3. 신라군의 진격과 후퇴

신라는 당고종의 요구에 따라 고구려 정벌을 위한 북벌군을 준비하였고, 당시 신라 최고의 권력자이자 최고의 지휘관인 김유신이 직접 지휘하기로 결정하는 등 나름 성의를 보였으나, 정작 작전이 벌어졌을 때는 상황을 살피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사실 신라 입장에선 한참 기세등등한 백제 부흥군과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군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10월 말엽, 소정방군이 평양 인근에서 고립되자 당고종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소정방군의 구원을 독촉하였고, 특히 식량을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신라군은 결국 평양으로의 북진을 시작한다.

때는 한겨울인 662년 1월, 신라군은 임진강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한다. 출발할 때는 수레 2천여 대를 동원하였지만 패수도 얼어붙는 혹독한 추위 속에 결국 수레를 버리고 소와 말에 모든 식량을 실어야 했다. 신라군의 북진을 막기 위한 고구려군의 저지를 뚫고 2월 초, 평양 근처까지 도달한 신라군은 당군에 사람을 보내 신라군의 도착을 알렸으며, 이후 당군과 신라군의 협공으로 마지막 저지선을 뚫는데 성공, 소정방군에 식량와 각종 의료물품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소정방군은 철수했고, 이 소식을 들은 신라군도 귀환하기 시작한다. 고구려군은 신라군 섬멸을 위해 추격해 왔지만 오히려 신라군의 역습에 의해 1만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고 상당한 숫자의 병기류를 잃는 참패를 당했고, 이후 신라군은 본국으로 무사 귀환한다.

4.4. 결과

이 전쟁에서 고구려와 당나라 양측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고구려는 이 전쟁 기간동안 막대한 전력 손실이 있었고 국가의 중심지인 수도 평양이 오랫동안 당군에 의해 포위공격을 받는등 국력 소모가 끔찍할 지경이였다. 특히 요동성을 비롯한 방어라인이 붕괴되어 요하를 바탕으로 한 고구려의 대 중국 방어라인이 무너졌고 이는 주요전선이 요동에서 평안도, 황해도 쪽으로 옮겨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문제는 이 지역이 고구려의 주요 곡창지대와 철 생산지라는 점으로서 식량과 무기를 생산해야 하는 곳이 전쟁터가 되면서 심각한 국력 상실이 뒤따르게 된 것이다.

당 또한 마찬가지로 상당한 수준의 전력 손실이 있었고 원정과 연관된 반란까지 진압하느라 국력 소모가 상당했다. 또한 이러한 원정 실패의 여파로 당 건국 이후 오랫동안 정국을 지배하던 관롱군사집단은 정치적 지배권을 상당수 상실했고 중소지주층과 손을 잡은 측천무후와의 정치투쟁에서 패배하며 실권을 상실하게 된다.[15] 이러한 당 내의 정치투쟁이 진행되면서 아직 방어할 힘이 넉넉히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고구려를 재침공할 엄두가 안나게 된 당은 한동안 고구려에 대한 소모전까지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5. 3차 전쟁

2차 전쟁 이후에 대막리지로써 고구려의 실권자 행세를 하던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그를 뒤를 이어 장남인 연남생이 대막리지의 지위를 이어 받았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수차례 승리하긴 하였으나 수십년간 고구려 조정을 움켜쥐면서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은 가차없이 숙청하였기 때문에 평소에 그에 대한 신료들의 불만은 대단하였다. 그때문에 연개소문의 뒤를 이은 연남생이 아버지만큼 유능한 면모를 보이지 못하자 고구려의 신료들은 연남생의 통솔권 밖으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게다가 이런 와중에 연남생의 두 동생이 형의 지위를 탐하여 서로 간에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급기야는 무력 행사로 사태가 확대되면서 조정은 무척 어수선해 졌으며 백성들의 민심 역시 고구려 조정에 등을 돌리는 지경에 이르었다.

연개소문의 장남인 대막리지 연남생은 자신의 지위를 탐내던 두 아우 연남건, 연남산을 상대로 국내성을 근거지로 삼아 대항하다가 힘이 부치자 급기야 당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당고종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적과 글필하력, 설인귀 등에게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침략해왔다.[16] 이때 남생의 배신으로 고구려 내부의 정보와 기밀이 당으로 세어 나가면서 전황은 당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후, 666년. 이세적을 총지휘관으로 한 당의 주력부대가 고구려로 진격한다. 고구려는 이듬해인 667년 가을까지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10월 신성이 함락되고 부근의 16성이 함께 당에 항복했다. 연남건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금산에서 일시적으로 고간의 군단을 격퇴했으나 당군을 추격하는 와중 설인귀의 기습 공격으로 5만의 병사가 전사했고 남소 목저 창암의 3개 성이 당군에 항복했고 당군은 연남생의 병력과 합류한다.

요동 방어선이 붕괴된 상황에서 연남건은 압록강 방어선에서 당군을 저지했고 안시성군 3만은 학처준의 군단을 기습했으나 모두가 놀라는 와중에서도 학처준은 호상에 걸터앉아 밥을 먹다가 정예병력을 뽑아 고구려군을 요격해서 격퇴했다.

668년 2월 이세적과 설인귀가 부여성을 함락시켰고 부여주가 모두 당에 항복했다. 연남건은 부여성 탈환을 위해 5만 병력을 보내 이세적과 설하수에서 교전했으나 3만 이상의 병력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다. 그리고, 압록강 방어선마저 돌파한 당군은 마침내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포위했다.

5.1. 평양성 함락

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을 무너뜨렸다. 글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아래 이르고, 이적의 군대가 그 뒤를 이어서 평양을 포위한 것이 한 달 남짓이었다. 보장왕연남산을 보내어 수령 98인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이적이 예로써 맞이하였다.

9월 21일에 대군과 더불어 합쳐서 평양을 에워쌌다. 본득은 사천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고, 김상경은 사천 싸움에서 죽었는데 공이 제일이었다. 구율은 사천의 싸움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나아가서 적과 더불어 싸워 크게 이겼지만, 군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기에 비록 공이 제일이었으나 포상되지 않았다.[17]

구기는 평양 남쪽 다리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다. 선극은 평양성 대문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고, 북거는 평양성 북문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다. 박경한은 평양성 안에서 술탈을 죽여 공이 제일이었고, 김둔산은 평양 군영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고, 세활은 평양 소성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다.

연남건은 여전히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남건은 군대의 일을 승려 신성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 오사·요묘 등과 함께 은밀히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서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5일 뒤,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군사를 풀어서 성에 올라 북치고 소리지르고 성을 불태웠다. 천(연)남건은 자해하였으나 죽지 않았으니, 왕과 더불어 남건 등을 잡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신라본기 부분 요약 정리

한달 남짓 포위가 이어지자 보장왕은 연남산을 보내 당군에 항복했지만, 연남건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갔다. 결국 이적과 내통한 연남건의 심복 신성이 성문을 열었고, 당군은 평양성을 완전히 함락시켰다. 이적은 10월에 보장왕과 연남건·연남산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5.2. 결과

이 전쟁에서 당나라는 신라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오랜 세월 동안 숙적으로 지내던 고구려를 멸망케 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나 애초 조약과는 달리 신라에게 주기로 약속하였던 백제의 영토는 물론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 하였고 결국 나당전쟁이 일어났으나 7년간의 전쟁 끝에 패퇴하여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대조영이 고구려의 고토에서 군사를 일으켜 다시 발해를 세우며 발해가 곧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밝혔다. 이에 몇몇 사학자들은 발해의 건국으로 인하여 고구려의 부활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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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일본서기에는 180여명
  • [2] 비슷한 예로 비수대전도 과장을 했다는 설이 있다. 당태종 시기에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의 역사서들이 작성되었는데, 신하들이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을 반대하기 위해 일부러 황제가 원정나갔다가 시망한 일을 부풀렸다는 식(;;)
  • [3] 공권(柳公權)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군의 많은 숫자의 위용을 보고 당태종이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고 한다. 당나라 군대의 규모를 이십만으로 여긴다면, 이 중 장량의 수군은 요동반도 방면에 있고, 개모성이나 요동성 등지에 일부 당군이 주둔하면서 방어에 주력했을 것을 생각한다면 10만이나 그 이하까지로 예상해볼 수 있다. 이런상황에서 15만에 육박하는 고구려군은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 [4] 이에 강하왕 도종은 고구려의 대군이 이곳에 집중한 틈을 타, 평양을 기습적으로 타격한 제안을 제시하였다. 이때 도종이 요구한 병력은 5천.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 도종의 주장이었는데,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고구려 군대의 숫자나 위용이 당나라 지휘관들에게도 압박을 주는 규모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태종은 이런 모험책을 듣지 않았다.
  • [5] 고구려 포로들에 대한 후한 대우와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이 이유에 대해 자치통감은 이 전투에서 말갈병이 당나라 황제의 진을 침범했기 때문이라 했다. 하지만 정작 구당서, 신당서에선 이유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다.
  • [6] 일설에 의하면 이는 안시성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하여 했다는 얘기도 있다.
  • [7] 천리장성을 포함한 요동 방어선이 완벽하게 뚫렸고, 주필산에서 수만의 군사가 포로가 되었다.
  • [8] 안시성 전투 이전까지 당군이 거의 연전연승했다. 이전 문서의 장 량 건안성 패배도 정사에서는 확실하지 않고(삼국사기 같은 정사에서 비사성은 함락 시키는데 건안성을 공격한 적은...) 중국의 기록을 볼 것도 없고 장검도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에서 뛰어난 장군으로 밀린 적이 없다. 기록상 고구려가 야전에서 그나마 당군에게 우세했다고 볼 여지가 있는 전투는 고돌발과 글필하력의 전투 정도이고 그것도 역시 정사에서는 확실하지 않다.
  • [9] 이 점에 대해서는 연개소문의 의도대로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10] 2~4만 사이 정도로 추정된다.
  • [11] 야사에서 요하를 넘지 마라.라고 했다고 한다.
  • [12] 당 태종 시기에는 1년에 2~3번까지도 원정군을 보냈지만 당 고종 치세에는 차츰 기간간격이 늘어져 2~4년 단위의 공격이 있었다.
  • [13] 중국통사에 따르면 1만 4천여명으로 추격부대를 편성했다가 8백여 명이 생환했다고 한다.
  • [14] 글필하력은 귀환한 직후 바로 서쪽으로 파견된다.
  • [15] 장손무기, 저수량 등 태종대의 중신들이 이때 제거된다.
  • [16] 이들은 당 태종과 함께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한 명장들이였고 고구려와 오랜 전쟁을 겪어 경험이 풍부한 장수들이었다. 또한 측천무후와의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공신들이기도 하다.
  • [17] 분하게 생각하고 목 매어 죽고자 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이 구하여 그러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