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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브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last modified: 2015-02-07 20:40:19 Contributors

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1742.12.16~1819.9.12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원수, 발슈타트 공작. 일명 "전진원수(Marschall Vorwärts)".
웰링턴과 함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끝장냈다.

1742년 스웨덴령 로스토크에서 태어났으며, 14살때 아버지, 형제들과 함께 스웨덴군에 입대해 1760년부터 포메라니아 전쟁에 종군했다가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어, 그대로 프로이센군에 입대해 버렸다. 그 후 7년 전쟁에 기병대 장교로써 용감무쌍한 모습을 보이며 대위로 진급한다.

그러나 종전 후 거친 성격 탓에 군 상부, 프로이센 귀족 등과 마찰을 빚고, 1773년 승진이 물거품되자 당시 프로이센 왕인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무례하고 짧은 사표"를 쓰고 군을 떠나 15년간 농사일이나 하며 지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사후 다시 프로이센군에 복귀, 소령으로 진급하고 기병 연대장이 되며, 1789년에는 프로이센군 최고의 훈장인 프루 러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는다.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자 블뤼허는 기병대 지휘관으로 참전, 공적을 세우며 1794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고 같은 해에 준장으로 진급, 1801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며 프로이센군의 주요지휘관의 자리에 올라선다.

그러나, 1806년 나 전투에서 사단장으로 출전한 불뤼허는 다른 프로이센군과 함께 대패, 샤른호르스트의 부대와 규합하여 뤼벡 근교에서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항복, 생에 두 번째 포로신세가 된다.
이때 그는 프랑스군의 최고 사령관인 나폴레옹과 자신의 부대를 포위 섬멸한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에게 원한을 품어, 프로이센으로 복귀 후 프랑스군과 싸울 때마다 "나폴레옹을 반드시 교수형에 처하겠다"라고 하거나 나중에 스웨덴 황태자가 되어 나폴레옹을 배신한 베르나도트와 반목하게 된다.

프랑스에게 연패한 프로이센은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영토의 절반을 잃는 굴욕적인 강화를 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에게 복수하려는 국민감정이 들끓게 되었으며, 나폴레옹에게 극도의 반감을 가진 블뤼허는 프로이센 애국파의 리더격으로 부상, 포메른군 사령관에 임명되고 1809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한다.

1812년 나폴레옹러시아 원정을 시작하자 블뤼허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프랑스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지만, 당시 프로이센의 힘으로는 프랑스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에 국왕 빌헬름 3세는 블뤼허를 포메른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한다.
그러나, 1813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처절한 피해를 입고 물러나자 빌헬름3세는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블뤼허를 군에 복귀시켜 프로이센 총 사령관에 임명한다. 블뤼허는 샤른호르스트를 참모장으로 삼아 뤼첸과 바우첸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하지만, 오히려 참모장 샤른호르스트가 전사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고, 별 수 없이 휴전을 맺는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유럽 각국과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은 다시 재기하여 동맹군과 함께 프랑스군에 대한 총공세를 실시하며, 블뤼허는 신임 참모장 나이제나우와 함께 8월에는 카츠바흐 전투에서 프랑스의 티엔 자크 조제프 알렉산드르 마크도날 원수의 부대를 완파하고, 10월에는 몽시게른 전투에서 마르몽 원수군을 격파, 프랑스군을 심대한 위기에 빠트리는데 성공한다.
이 공로로 원수로 진급한 블뤼허는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 드디어 전독일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다. 그리고 그 공로로 대십자 훈장을 받는데, 이는 독일 역사상 블뤼허 원수와 제1차 세계대전의 힌덴부르크 원수만이 받은 훈장이다.

1814년 프로이센군을 이끌고 프랑스로 침공한 블뤼허는 몇차례 부분적인 패배를 겪기도 하지만, 3월 13일 파리에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결국 4월 4일 나폴레옹은 퇴위 후 엘바섬으로 유배되고, 블뤼허는 "나폴레옹은 총살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해 6월 3일 발슈타트 공작위를 받은 블뤼허는 군에서 은퇴하여 영국 등을 방문한 뒤 실레지아의 영지에 정착한다.

그러나, 1815년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다시 프랑스의 황제가 되자, 빌헬름 3세는 블뤼허를 다시 프로이센군의 사령관에 복귀시키고 벨기에에서 영국군과 연합하여 프랑스군을 격파할 것을 명한다.

블뤼허는 나이제나우를 다시 참모장으로 임명하고 벨기에로 향했지만, 리니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맹공을 받아 군대는 박살이 나고 자신은 타고 있던 말에 깔려 부상을 입는다. 참패를 당한 프로이센군은 블뤼허를 찾지 못하여 그나이제나우의 지휘하에 들어 갔으며, 그나우제나우는 군대가 참패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데다가 본인이 영국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대로 프로이센으로 내빼려 했다.

그러나, 부하들에 의해 근처 농가에서 발견된 블뤼허는 그나이제나우의 후퇴명령을 취소하고 와부르에 흩어진 프로이센군이 집결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어느정도 부대가 재편되자 와부르에 미끼 부대를 놔두고 워털루로 진격, 추격하던 워털루에서 위기에 빠져있던 영국군을 구출하여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포위, 격파해내는데 성공한다.

워털루 패배로 나폴레옹은 다시 실각하고 남대서양의 오지인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당했고, 블뤼허는 잠시 파리에 머물렀다가 귀국, 노령을 이유로 사령관에서 물러나 실레지아에서 은퇴생활을 즐길.... 겨를도 없이 1819년 7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어린 시절에는 프로이센에 대항해서 싸우기도 했던 블뤼허는 거칠고 단순하고 성격에 교양도 부족한 인물이었고, 전략적 식견이 부족하고하고 심지어 지도를 볼 줄도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부하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와 같은 인망이 넘치는 사람이었으며, 샤른호르스트나 그나이제나우와 같은 유능한 참모들의 의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우수한 군인이었다.
프로이센군에서 가장 용맹한 지휘관이었으나, 종종 필요이상으로 저돌성을 발휘하다가 나폴레옹이라는 희대의 명장에게 말려 패배를 여러번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패배를 당해도 언제나 불굴의 의지로 프로이센군을 이끌었으며, 결국 프로이센군의 워털루의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영미쪽에서는 워털루 전투의 승리를 "웰링턴의 지도력과 영국군 병사들의 불굴의 의지" 덕으로 보는 반면, 독일쪽은 영국군 따위는 알바 없고[1]., "오직 블뤼허와 용맹한 프로이센 병사들" 덕에 이겼다고 한다.[2] 하지만 잘 따져보자면 웰링턴과 블뤼허, 그리고 영국 병사들과 프로이센 병사들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워털루의 승자는 나폴레옹이었을 것이다. 즉, 영국과 프로이센, 웰링턴과 블뤼허는 그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역할(웰링턴은 방어, 블뤼허는 저돌적인 공격)을 맡아서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결과가 워털루전투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전통적인 남성구두 형태 중 중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모양도 있다. 자기 부하들에게 신기려고 설계했다카더라. 어찌 생겼나 보고 싶은 분은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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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어디까지나 일부의 시각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대부분 워털루 전투라면 웰링턴을 떠올리며 웬만큼 세계사나 전쟁사에 관심 있지 않고서야 블뤼허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애초에 워털루 전투라는 명칭부터가 싸움을 한 전쟁터가 아닌 영국군 작전본부가 있던 곳의 지명을 따온 것이다.
  • [2] 확실히 블뤼허가 도착할 쯔음엔 웰링턴과 영국군이 발리고 있었다지만(...) 근데 까놓고 말해 영국군이었으니까 그때까지 버틴 것이기도 하다. 블뤼허는 이틀 전에 리니에서 나폴레옹에게 완전히 박살났었으니까. 블뤼허는 워털루와 라이프치히 외에는 나폴레옹에게 전패했다. 심지어는 나폴레옹이 최악의 상황이었던 1814년에조차도 나폴레옹과 싸워서 박살났다. - 뭐 나폴레옹과 직접 싸워서 이긴 지휘관이 진짜 몇명 안되긴 하다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