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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제국

last modified: 2015-06-25 21:24:12 Contributors

갈리아 제국(Imperium Galliarum). 서기 260년에서 274년에 걸쳐서 로마 제국 서부에 나타났던 독립 정권.

Contents

1. 배경
2. 역사
2.1. 포스투무스
2.2. 빅토리우스
2.3. 테트리쿠스
3. 여담

1. 배경

갈리아 제국의 성립 배경은 로마 제국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패배,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샤푸르 1세에게 붙잡힌 것에서 시작된다. 이로서 군인 황제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실 이 시기는 제국의 패배와 혼란으로 각지에서 적의 침공이 시작되었고, 각지의 군단 병사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사령관을 황제(임페라토르)로 추대하여 황제가 난립했다.

갈리아 제국의 황제가 된 전직 게르마니아 총독 포스투무스(Postumus) 역시 이러한 군인 황제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다만 이 난립한 군인 황제들이 고작 1년에서 몇개월 이내에 몰락한 것과는 달리, 포스투무스의 갈리아 제국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버텼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정치 체계를 구성했기 때문에 단순한 군인 황제가 아니라 '독립 정권'으로 인정되고 있다.

다만 갈리아 제국이란 후대에 붙인 통칭으로, 갈리아 제국의 지배자들 자신은 '로마 황제'를 자칭했다. 후대에 다소 갈리아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윤색이 되기도 한다.

이 시기에 동부는 팔미라, 중부는 로마 본토, 서부는 갈리아 제국으로 분할되어 로마는 삼국시대(…)가 되었다.

2. 역사

2.1. 포스투무스

259년에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되자, 그 아들 갈리에누스는 단독으로 황제에 취임했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의 패배가 영향을 줘서 로마 제국은 그야말로 혼돈. 이 틈을 타서 판노니아 총독 레갈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갈리에누스가 이를 진압하려고 친정을 하여 게르마니아 총독 포스투무스는 라인 강 지역의 통치를 위임받았다.

그런데 이 때, 갈리에누스는 아들이자 공동황제인 코르넬리우스를 콜로니아 아그리피나(현재의 퀼른)에 남겨두었다. 아무래도 포스투무스가 그다지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던 모양. 그리고 그 예상대로, 포스투무스가 반역을 일으키자 코르넬리우스가 진압에 나섯으나 패배하고, 콜로니아 아그리피나는 함락되었으며 코르넬리우스는 처형되었다.

포스투무스는 260년(혹은 259년)에 독립을 하고, 로마 황제를 자칭했다. 이로서 갈리아 제국이 성립되었다. 포스투무스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나를 수도로 정하고, 스스로 원로원을 구성하고 집정관을 선출하도록 했으며, 프라이토리아니까지 뽑아서 '로마 제국'을 모방한 독립 국가 체계를 갖추었다. 포스투무스는 갈리아를 지키는 것이 황제의 역할이라고 선언하면서 주변의 다른 지역까지 자신의 지배하에 끌어들였다. 이리하여 포스투무스의 지배영역은 갈리아 만이 아니라 히스파니아(스페인), 게르마니아, 브라타니아(영국)에 달했다. 지금의 서유럽 전체(…)나름 대단하다.

261년, 포스투무스는 랑크 족르마니 족의 연합군을 물리쳤으며, 라인강의 안전을 확보하였다.263년에 갈리에누스는 포스투무스를 토벌하려 했으며 몇번 승리를 거뒀지만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히지는 못헀고 다른 문제가 많아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268년에는 포스투무스 자신에 대한 반역에 일어났는데, 포스투무스는 이를 제압하는데는 성공했으나 도시에 대한 을 허용하지 않았고, 이에 불만이 쌓인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포스투무스 사후, 대장장이로 일하다가 군대에서 지위를 높혀갔다고 알려져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리우스(Marcus Aurelius Marius)가 일시적으로 갈리아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전승에 따르면 즉위 한 지 2,3일 만에 자신이 만든 칼로 살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가 발행한 동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2,3개월 정도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그거나 그거나.

2.2. 빅토리우스

짧게 통치하고 존재감도 없었던 마르쿠스 마리우스 황제의 사후, 막대한 부자로서, 포스투무스 시절 갈리아 제국에서 포스투무스와 공동 집정관을 맡기도 했던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우스(Marcus Piav(v)onius Victorinus)가 268년 혹은 269년에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빅토리우스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서만 인정을 받았고, 히스파니아의 군단은 빅토리우스를 인정하지 않아 제국에서 이탈했다. 연달아 빅토리우스는 로마 황제 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공격을 받았고, 빅토리우스는 일단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갈리아 제국은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남부, 아퀴타니아(현재의 프랑스 서남부)를 로마 제국에 도로 빼앗겻다. 빅토리우스의 권위는 갈리아 북부와 브라티나이에만 미치고 있었다.

270년 혹은 271년에 빅토리우스는 살해되었다. 그를 죽인 자는 빅토리우스의 부하였던 티티아누스 였는데, 빅토리우스가 티티아누스의 아내를 빼앗았기 때문에 죽였다고 전해진다. 빅토리우스의 아들 역시 빅토리우스가 살해된 직후 군대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한편, 빅토리우스의 어머니 빅토리아는 군단 병사들에게 거액의 돈을 줘서 환심을 사고 있었기 때문에, 빅토리우스 사후에 그를 신격화시체팔이 하여 권위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는 나름대로 유력한 인사였던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Gaius Pius Esuvius Tetricus)를 황제로 옹립했다.

271년에 도미티아누스라는 자가 황제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 해에 진압되었다.

2.3. 테트리쿠스

갈리아 제국의 사실상 3대 황제인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Gaius Pius Esuvius Tetricus)는 갈리아 인 혈통 출신의 부유한 원로원 가문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태어난 해나 전반생은 불명확 하다. 270년에는 갈리아 아퀴타니아 속주 총독을 역임하고 있었고, 빅토리우스가 살해된 271년에 아직 아퀴티나아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근데 이때 아퀴타니아는 이미 로마에 도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냥 명목상의 지위인듯.

테트리쿠스는 명망이 높았던 빅토리우스의 어머니 빅토리아에게 추천을 받는 한편, 군대에서도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차기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테트리쿠스는 나름대로 황제 노릇을 잘 했는데 게르만 민족을 물리치는 한편, 갈리아 남부와 아퀴타니아를 재탈환 했다. 테트리쿠스는 아우그사트 트리벨리움(Augusta Treverorum, 현재의 트리어)로 수도를 이전했고, 273년에는 아들을 공동 황제 테트리쿠스 2세로 삼았다.

그러나, 테트리쿠스가 나름대로 유능한 역량을 보이기는 했지만, 로마 제국을 통일할 만한 능력은 없었다. 이 때 로마 제국에는 이 혼란기를 종식할 놀라운 군사적 천재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나타났기 때문.

273년,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제노비아 여왕팔미라정복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274년에는 로마 제국을 완전히 통일하고자 갈리아 제국을 침공했다.

테토리쿠스는 아우렐리아누스에게 패배하였고, 갈리아 제국은 완전히 로마에 재병합 되었다. 이 때, 갈리아 제국은 전란이 계속 되어 국력이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테트리쿠스는 이미 싸우기 전에도 이미 포기를 하고 있었고, 아우렐리아누스와 협상하여 자신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에 갈리아 제국을 넘겼다고도 전해진다.

테토리쿠스는 포로가 되어,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와 함께 아우렐리아누스의 개선식에 끌려갔다. 하지만 개선식에서 좀 쪽이 팔린 이외에는(…)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고, 오히려 이후 정계에 들어가 이탈리아 본토에 있는 루카니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됐다. 그 아들인 테트리쿠스 2세도 원로원 의원의 지위를 얻었다.

포기하면 편해의 좋은 사례

3. 여담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 제국은 갈리아 제국을 '없었던 일'로 처리했다고 하며, 이것이 실용적이고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언급한다.

사실 독립한 것은 반역에 가깝기는 하지만 애초에 그 원인이 황제가 페르시아에 포로가 되고 망조든 거고(…) 이 시기에 워낙 군인황제들이 난립하다보니 거기에 참가한 놈들을 일일이 꼬투리 잡아서 죽이다가는 제국 전역이 피바다가 될 판이라 결국 갈리아 제국도 없었던 일로 하고 넘어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