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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last modified: 2019-08-09 22:45:20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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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토기. 문물을 전파받은 일본의 스에키 토기가 이와 흡사하다.[1]

gaya_gold.jpg
[JPG image (Unknown)]

가야의 금 장식.



공식명칭伽倻, 任那
위치경상남도 일대와 전라남도 일대
인구
수도연맹국별로 존재.[2]
정치체제군주정
국가원수王, 旱岐[3]
언어마한어
종족족, 족, 한족, 토착민 등
종교불교
존속기간? ~ 562년[4]
성립 이전변한
멸망 이후백제, 신라

Contents

1. 개요
2. 제국설과 연맹설의 차이
3. 가야는 무슨 뜻인가?
4. 역사와 특징
4.1. 주거
5. 임나일본부설
6. 가야연맹 구성국
6.1. 금관국(구야국, 금관가야)
6.2. 반파국
6.3. 고령가야
6.4. 다라국(多羅國)
6.5. 초팔국(草八國)
6.6. 비자벌(比自火)
6.7. 성산가야(星山加耶)
6.8. 안라국(安羅國)
6.9. 탁순국(卓淳國)
7. 관련 항목


1. 개요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弁韓)에서 기원한 한반도 남부의 여러 국가의 총칭. <삼국유사>에는 6개의 나라가, <일본서기>에는 10개의 나라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24개 나라가 거론된다. 2세기경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3세기에 무역으로 많은 부를 누렸지만, 멸망할 때까지 하나의 통일된 정치단위를 이룬 적이 없었으며, 5세기 후반 이후에는 강대해진 백제와 신라 두 나라의 사이에 끼어 허덕이다가 하나하나 신라에 항복 또는 흡수되었다.

2. 제국설과 연맹설의 차이


연맹설에 근거하여 제작된 가야의 지도.

가야 제국이지만, 帝國이 아니라 諸國이다. 주로 가야연맹이라고 더 잘 알려져 있다. 위치상으로는 현재의 경상남도 서부 일대가 이에 해당된다.[5]

지금까지 가야의 정치 체제로 '연맹 왕국설'이 정설이었으나[6] 2007년 이후에는 '가야 제국(諸國)설' 쪽으로 정설이 변경되고 있는데, 이 학설에 따르면 가야 국가들은 연맹 형태로 연결된 국가가 아니라 국명만 유사한 독립된 별개 국가로 따로 나뉜다. 장기간의 연맹 체계는 불가능하다는 점과 연맹 관계를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이유로 등장한 학설. 심지어 포상팔국의 난의 경우엔 저멀리 마한의 일부인 서해안의 보라국까지 참여해 있으니... 90년대 이후 고고학적 발견의 진전으로 서서히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는 학설이다.

다들 금관가야, 대가야, 안라가야 등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XX가야로 불린건 태조 왕건이 가야지역 일대 호족들에게 XX 가야라는 명칭을 부여하면서 옛 가야시대 이름인양 와전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참조해보면,

5.가야
가락기 찬에 이르기를

"한줄기 붉은 끈이 드리워지며/둥근 달 여섯 개가 떨어졌네./다섯은 각기 제 고을로 돌아가고/하나가 이 성에 머물렀네"

라고 했다. 그 하나가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으니, 금관국이 이 다섯 가운데 들어가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본조의 사략에는 금관까지 아울러 그 수에 넣고 왕명을 기록했으니 잘못 된 것이다.

아라가야와 고령가야와 대가야와 성산가야와 소가야이다. 또 본조 사략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태조 천복 5년 경자(940)에 다섯 가야의 이름을 고쳐 1은 금관, 2는 고령, 3은 비화로,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으로 했다.

실제로는 XX국이라는 명칭을 썻으며 그 이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일본서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의 중국 역사서들에 각각 다르게 등장한다.

3. 가야는 무슨 뜻인가?

가야(加耶) 혹은 가라(加羅)의 뜻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말이 나오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 시점에서는 이게 원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왕건이 호족들의 영토에 '가야'라는 칭호를 내렸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면 신라 말-고려 초에는 '종족'이나 '자치부' 정도의 뜻으로 쓰였을 가능성은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사례라면 '가야'는 국(國) 아래에 있는 가(家)에 가까운 의미가 되며, 더 이상 독자적인 '나라(國)'가 아닌 고려에 복속된 '종족(가야)'이라는 뜻으로 붙인 의미로 볼 수 있다.

  • ‘가야(加耶·伽耶·伽倻)’ 외에 ‘구야(狗邪·拘邪)’, ‘가라(加羅·加良·伽羅·迦羅·呵奇)’, ‘가락(駕洛·伽落)’, 하라(賀羅)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명칭들은 모두 ‘가야’·‘가라’를 음차 표기한 것으로, 그 뜻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즉 ‘갈래〔分派〕’라는 견해와 ‘강(江)’이라는 견해, 그리고 ‘겨레〔同族〕’라는 견해 등 여러 가지가 있다.[7]
  • 신채호 : 지금의 경상남도 등지에 변진의 12 자치부가 설립되었음은 제 3 편 제4 장에 말하였거니와 , 위의 각 자치부를 대개 `가라'라 일컬었다 . `가 라' 란 큰 소〔大沼〕의 뜻이니 , 각 부가 각각 제방을 쌓아서 냇불을 막아 큰 소를 만들고 , 그 부근에 자치부를 설치하여 그 부의 이름을 `가라'라 일컬은 것이었다 . `가라'를 이두문으로 `가라 ( 加羅 ) ' , `가락 ( 駕洛 ) ' , `가야 ( 加耶 ) ' , `구야 ( 狗邪) ' , `가야 ( 伽倻 ) ' 등으로 썼으니 , 야 ( 耶 ) · 야 (邪) · 야 ( 倻 ) 등은 옛 음을 다 `라'로 읽은 것이고 , `가라'를 혹 `관국 ( 官國 ) '이라 썼으니 , `관 ( 官 ) '은 그 음의 초성 · 중성을 떼어 `가'로 읽고 , `국 ( 國 ) '은 그 뜻의 초성 · 중성을 떼어 `라'로 읽은 것이다. - 조선상고사 4편 4장

4. 역사와 특징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전에 처음 등장하며, 신라 등의 주변국에서는 이들 나라를 통틀어 가야(加耶) 혹은 가라(加羅)라고 불렀던 듯 하나, 가야는 본래 가락국(駕洛國)[8], 즉 금관국(金官國: 지금의 김해)의 이름임이 확인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 지역을 통틀어 미마나(任那, 임나)라 부르기도 했다.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임나란 말도 금기시 되는 것 같지만, 임나 자체는 단순한 지역명으로 추정된다. (관련되어, 임나가 대마도 등이었다는 설도 있다.)

가야의 유적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제공정이 이루어졌던 유적이 있는데, 이것은 동북아에서 가장 오래된 모든 제철과정이 포함된 유적이다. 또한 화폐가 철로 사용되고 중국, 일본 등지에서마저 철을 사러 오는 등 현재의 듣보잡기믹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천년 전 가야의 세력권이었던 김해 평야는 당시 바다와 많은 섬으로 된 다도해였다고 한다. 산지에서 나는 철과 바다와 인접한 지역적 특성 탓에 가야인들은 손쉽게 철을 해외로 수출할 수 있었다.

풍습으로는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 편두항목 참조.
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남녀가 문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삼국지).

고분이 제법 많이 발견되는데, 모 고분[9]에서 발견된 순장된 시녀로 추측되는 여자의 경우엔 152cm에 21인치 허리의 팔등신 미녀[10] 가야 연맹이 몰락기에 접어들었을 때 여전사들이 전쟁에 나선 흔적이 있다. 흠좀무.[11] 아아... 팔등신 미녀군단의 꿈이여...

김해 대성동, 함안 말이산, 경북 지산동 고분군을 통합한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 추진대상으로 선정되었다.

4.1. 주거

드라마 김수로의 삐까뻔적한 궁궐과 백성들의 초가집은 가볍게 무시해주자. 김수로왕당시에는 수로왕도 초가로 집을 지었다. 사실 삼국시대 초기에는 기와라는 것은 새로운 물건이었다. 가야에서 기와집이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가야 말기부터다.

왕도 초가집에서 산 만큼 평민들의 주거 역시 그리 발달하지는 않았었는데, 땅을 파고 들어가 벽 없이 지붕만 덮고 사는 수혈가옥[12]과 집이 기둥으로 들어올려진 고상가옥을 같이 만들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서(晉書)>의 <동이전(東夷傳)변진(弁辰)조>에 "여름에는 소거하고 겨울에는 혈처한다(夏則巢居冬則穴處)"라는 글이 있어 소거라는 말이 고상주거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짐작되며, 실제로 가야지방에서는 고상식 창고 건물 모양의 집모양 토기(가형토기)가 발굴되었다.

5. 임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이 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광복 이전에는 임나일본부의 입증을 위해서만 연구되었고 광복 이후 80년대까지는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는 안습의 시기를 거쳐왔다. 그 과정에서 학계를 지배했던 것은 초기의 김해의 금관국 중심의 연맹체가 금관국 멸망 이후 후기의 대가야 중심으로 이동하였다는 학설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자신감을 다소 회복한 학계에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 결과, 이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발굴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굵직굵직한 발굴 몇개가 마감될 때마다 학설이 생겼다가 뒤집어지는 양상도 보이고 있다.[13] 때문에 아래 각 지역에 대한 소개에도 이전의 학설과 현재 학설이 뒤엉겨 있는데, 어느쪽이 옳다고 확실하게 단언하기 곤란한 관계로 약간의 추가는 하지만 삭제는 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최근에는 금관국가 고구려의 침략으로 5세기 초에 멸망했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되는 유물까지 나왔다. 금관국 유적인데, 5세기 후반부의 것이라고.

다만 어느쪽이든 일본의 왜국이 가야를 지배했을 가능성은 낮다. 일반적으로는 백제가 가야를 오랫동안 자신들의 세력권에 넣었고, 같은 백제 세력권이었던 왜가 그 기록을 차용해서 관계를 뒤집어 일본서기를 꾸몄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일본서기에는 4세기 근초고왕의 시기에 백제의 장군으로 가야를 정벌한 목라근자라는 장군이 나온다. 이 때 가야가 백제의 세력권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목라근자 기록에서 보이는 남가라는 금관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변진 지역에서 독보적인 국가였던 금관국이 가라라는 이름을 대가야에 넘겨주고 남가라로 통칭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후대의 관념이 부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중국은 이에 대해서 백제를 중심으로 가까운 고령을 가라로, 먼 김해를 남가라로 생각하는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후대의 관점이 반영되었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다. (노중국 (2006), 4세기 가야제국과 백제의 관계) (왜국이 이것을 자신들의 기록으로 왜곡하여 진구 황후의 기록 등으로 바꿨을 수가 있다. 진구황후는 3세기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어 시기가 차이나는 것은 고질적인 이주갑인상 문제다.)

게다가 일본서기에서 보여지는 성왕의 가야에 대한 재건 의지를 보면 4세기 이후 가야는 친백제계 지역이었고, 고구려에게 박살난 가야를 수습하여 신라에 연합하여 대항하려던 정황이 엿보인다. 그러나 결국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는 가야에 대한 주도권을 잃고, 신라가 가야를 흡수하게 된다.

왜국이 가야와 친밀했던 점은 사실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봐도 가야에서 건너간 유물이 많이 나오며, 인적 교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부라는 정체 불명의 기관은 같은 백제 세력권이었던 가야와 왜국이 연락하기 위한 외교창구 정도에 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는 긴메이 덴노기에서 성왕과 왜국의 관계를 거꾸로 기술하여 왜곡했다는 의심을 많이 받는데, 당시 정황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백제왕이 가야와 왜국 모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타당하기에 왜가 가야를 지배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6. 가야연맹 구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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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진도 12개국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은 번예(樊濊)가 있고, 그 다음은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 <이저국>·<불사국>·<변진미리미동국>·<변진접도국>·<근기국>·<난미리미동국>·<변진고자미동국>·<변진고순시국>·<염해국>·<변진반로국>·<변진악노국>·<군미국(변군미국)>·<변진미오사마국>·<여담국>·<변진감로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변진구사국>·<변진주조마국>·<변진안사국(마연국)>·<변진독로국>·<사로국>·<우유국>이니 '번', '진한'을 합쳐 이십사개국이다. 이 중에 큰 나라는 4~5천호나 되고, 작은 나라는 6~7백호가 되어 총 호수가 45만호가 된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

위의 기록에 따르면 변진지역에는 24개 국가가 있었던 듯 보이나, 개중에 '사로국'(신라)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때 진한의 국가들까지 한꺼번에 센 듯 하다. 일반적으로 앞에 변진이 붙은 12개 국이 초기의 가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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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현재 지명 알려진 이름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東國) 경상남도 밀양시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경상남도 함안군 철원면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東國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소가야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변진락노국(弁辰樂奴國) ?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 경상남도 창원시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변진구야국(弁辰拘邪國) 경상남도 김해시 금관가야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안라가야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부산광역시 동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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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명칭 현재 지명 알려진 이름
가라국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안라국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안라가야
가이기국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다라국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졸마국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고차국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자타국 경상남도 진주시
산반하국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걸손국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임례국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탁순국 경상남도 창원시
탁기탄국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 밀양?)
남가라국 경상남도 김해시 금관가야

6.1. 금관국(구야국, 금관가야)

항목 참고. 최근 안야국의 재발견으로 위상이 다소 축소되는 감이 있으나, 가야 후기에 반파국이 주도권을 잡은 뒤에도 이진아시 신화나 '가라'(반파국) - '남가라'(금관국) 등의 이름으로 보아 금관국과의 연결고리는 꾸준히 강조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한동안 가야 국가들 중에서는 무언가 주변에 어필하는 '권위'나 '권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대개 2 ~ 4세기 낙동강 하구의 매매를 통한 부 축적으로 얻은 권위로 추정되고, 이것이 금관국의 왕을 '신성화'하는 수로왕 신화나 이진아시 신화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 ~ 3세기에는 구야국으로, 4 ~ 5세기에는 가라, 임나, 수내라, 소내라 등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사기에서 금관국이라고 하였다. 금관국은 4세기 이후 멸망 이전의 이름으로 보이며, 반파국에게 '가라'의 이름을 뺏긴 이후에는 '남가라'라고 칭해진 것으로도 보인다.

6.2. 반파국

항목 참고. 흔히 대가야로 알려진 국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변진반로국'을 이은 국가로 생각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5세기 이후 '가라'의 이름을 금관국에서 탈취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이 때문에 금관국은 일본서기 등에서 '남가라'로 나타난다).

5세기 들어 성장하기 시작하여 5세기 후반 백제가 쇠진한 틈을 타 섬진강 일대로 진출하고 가야 일대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보이나, 다시 백제가 국세를 회복하여 섬진강 일대로 압박을 가해오고 6세기 후반 백제와 신라의 힘싸움 사이에 끼여 있다가 결국 신라에게 562년 멸망한다. 이 나라가 신라에 정복되는 서기 562년을 일반적으로 가야가 완전히 소멸한 해로 파악한다.

6.3. 고령가야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혹은 진주시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 연맹의 하나. 사실 고령이라는 이름은 가야인들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신라 병합 이후에 사용한 것. 유물이나 유적이 거의 없어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에 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기록을 바탕으로 위치만 추정될 뿐이다.

사실 고령가야는 실제 가야 소국과는 무관할 뿐더러 고령가야가 있었다는 옛 함창군 지역도 원래의 신라 영역이었던 진한의 사벌국 지역에 속한다. 신라 말기에 신라의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고령지역의 호족세력이 그 명분으로 가야를 참칭되기도 하고 940년 고려 태조23년에 5가야의 명칭을 변경하면서 '고령가야'라는 이름이 부여되어 옛 가야소국 중에 하나인 양 와전된 가능성이 아주 높다. 단 함창 일대의 호족세력들이 가야인의 후예이거나 삼국통일 이후 가야인들이 이주해 와 거주했는지도 모르겠다.

6.4. 다라국(多羅國)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에 있던 나라. 합천군 다라리가 다라국의 이름을 이은 것으로 비정된다. 옆의 성산리에 있는 옥전고분군이 다라국의 수장급 묘지로 생각된다. 초기에는 창녕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후기에는 대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대가야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옥전고분군에서 대가야 토기와 위세품 뿐만 아니라 백제 관모나 신라 마구와 이식등의 위세품도 출현하고 있어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이들과 균형적인 외교를 펼친 것으로 보인다[17]. 이러한 현상은 합천지역이 가야, 신라, 백제 이들 세력의 전략적 요충지[18] 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대규모의 철생산 유적 또한 존재하고 있어 의 경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 인 것으로 생각된다.

6.5. 초팔국(草八國)

지금의 합천군 초계면에 있던 나라. 역시 다라국과 비슷한 시기에 대가야의 영향권으로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본기에는 파사이사금때에 다벌국, 비지국과 함께 정복되었다고 쓰고 있으나, 이후에 나오는 가야의 신라 공격 기사때 다시 잃은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에서 보기힘든 분지지형으로 가히 미나스 티리스를 연상시킨다.

6.6. 비자벌(比自火)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불사국(不斯國)[19] 이며, 《삼국사기》에는 비사벌(比斯伐), 《삼국유사》에는 비화(非火), 《일본서기》신공기에는 "比自鉢(hisiho)"이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이며, 나라 자체는 듣보잡이긴 한데... 문헌기록에 별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문헌기록과 다르게 고고학 자료로 본다면 듣보잡 수준이 아니다. 창녕지역에는 지역군 별로 봉분직경 10m 이상의 고총고분[20] 산재하고 있으며, 금동관 관모, 금제이식 ,환두대도등의 위세품과 토기류등도 수백점에서 수천점이상이 매납되었다. 현재의 고고학적 연구성과로는 신라가 가야를 정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써 역활을 수행하기 위해 창녕지역에 많은 지원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정복한 뒤 창녕비를 세워 유명하다.

6.7. 성산가야(星山加耶)

지금의 경북 성주에 위치하였던 국가로 비정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가야에 속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김세기 (2014), 고분자료로 본 삼국시대 성주지역의 정치적 성격) 《삼국사기》에 "본피(本彼)"라 나오나, 여기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특히나 신라 6부 중 하나인 진지부의 이름이 본피부라 6부의 기원을 진한 소국으로 보는 연구자들은 이 지역을 본피부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6.8. 안라국(安羅國)[21]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이며, 《호태왕비문》과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로서 등장한다.(호태왕비의 안라인수병 구절을 안라국으로 파악한다면)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선 《가락국기》를 인용해서 아시량국(阿尸良國)이라 기록했다.

위치는 현재의 함안을 중심으로 하는 함양지역이다. 김해의 금관국이 쇠퇴 이후 고령의 대가야, 고성과 산청의 소가야 연맹과 함께 가야연맹의 주축을 이루었다. 이후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주도하였으나, 결국은 신라에 정복당했고 그 자리에 바로 성산산성이 축조되었다. [22]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금관국과 함께 독자적인 호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라고 적고 있지만 고고학적으로는 그 시기 함안에 아무런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안그래도 힘든 가야사 복원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후기 가야 제국(諸國)에서도 대가야와 더불어 높은 위세를 보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영역은 함안을 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여 안라국이 어떻게 가야 지방에서 주요 국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도 해명해야할 과제. 안라국이 초기에는 마산 진동에 있다가 점차 함안으로 중심지가 이동했다고 보아 고고학과 문헌 기록 사이의 불일치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김세기 (2012), 아라가야의 성립기반과 영역의 변천)

포상팔국의 난 해석과 관련해서도 초기엔 안라국이 이들 배후에서 금관국을 공격했다는 설이 다수였으나, 2000년대에는 역으로 금관국과 함께 가야 초기를 주도하던 안라국이 포상팔국의 공격대상이었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 4세기 초반의 화염투창고배의 대유행을 이와 연결시켜 포상팔국의 난이 4세기 초에 발생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습하여 세력을 확장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함안에 거대 수혈식 봉분이 조성되는 건 5세기는 되어서이고 최대 영역은 함안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광개토대왕 남정 이후 함안 말산리 말이산 고분이 축조되면서 크게 발전하고, 나중 반파국(대가야)에 대항[23]하는 가야 남부 일대 국가들의 주축이 되기도 했다. 《일본서기》의 기록이라 완전히 신뢰할수는 없지만 안라회의도 안라국이 주도하에 개최한 국제회의할 만큼 후기 가야 연맹에서 강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특이하게 명칭 논란이 많은 곳으로, 아라가야, 안야국, 안라국 등이 대립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아나가야', 삼국유사 오가야조에는 아라가야, 일본서기에는 안라와 아라가 같이 사용되고 있다.[24]


6.9. 탁순국(卓淳國)

<양직공도> 백제국사 전의 '탁국(卓國)'과 <일본서기>의 '탁순국(卓淳國)'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녹순(㖨淳)이라고도 하는데, 녹과 탁이 통하는 것을 놓고 신공황후 신라정벌 기사의 녹국과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탁순 = 녹순 - 녹국 - 탁기탄 = 녹기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1970년대까지는 '달구벌'의 음차라는 설이 주류를 차지하여 대구설이 득세하였으나, 최근에는 창원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고, 일각에서는 의령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시조와 왕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리사등이 마지막 왕으로 추정되는데, 숭신천황기의 '도노아아리사등'과의 관계 문제 등으로 인해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 관직명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 4세기의 금한기(末錦旱岐)를 군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가야의 군주명으로 '한기'가 쓰인 데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말금'을 '마립간' = '매금'과 통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가야의 군주를 일컫던 '한기'를 포함해 일반 군주 칭호만 두 개 이어지는 괴이한 칭호가 된다.

일본서기 신공기 46년(366)기사에선 백제가 왜와 교류하기 위해 탁순국이 도와줬으면 한다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고, 탁순국의 말금한기는 백제 사신에게 왜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백제 사신의 말을 왜 사신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탁순사람 과고를 보내어 왜국 사신의 시종을 백제에게 안내하기도 했다는 기사도 있고 심지어 신공기 49년(369)년 기사에서 탁순국이 왜군의 집결지 역할을 했다는 기사도 존재한다.

이런 것들로 보아 일본과 백제에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지만, 백제와 신라가 강성해지자 백제와는 여러가지로 안좋은 관계가 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안라회의가 일어나게된 사건을 보게 되면 아리사등이 신라의 스파이들을 모두 내치는 것에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후기 가야연맹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창원 반계동 고분군이 탁순국과 관련[25] 되어 있는데 23호분에서는 고령 양식의 유개대부 장경호, 단추형 꼭지 뚜껑 단각고배 등이 출토되어 대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수 있고 25호분에서 쇠망치, 쇠집계등의 철기들이 출토되어 금관국과 더불어 철기 생산의 요충지 였음을 알수 있다.

7.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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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도질토기가 일본에 전파돼서 스에키 토기가 되기 때문에 당연하다. 조금 재밌는 사실은 와질토기와 고식 도질토기까지는 가야와 신라의 토기가 거의 차이가 없고, 신식 도질토기에 와서야 둘이 확실히 나눠진다. 그래서 혹자는 사실 신라도 원래는 여러 가야 중 하나가 아니었냐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추가로 와질토기와 도질토기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많은데, 아직 대체할 용어가 딱히 없어서 이 용어가 고고학계에서 계속 쓰인다.
  • [2] ex 금관가야는 김해일대, 대가야는 고령일대 등
  • [3] 가야 소국의 왕들을 칭하는 말이다. 《일본서기》에만 등장하는 기록.
  • [4] 반로국 도설지왕대 멸망한 직후, 대부분의 가야 소국들도 같이 신라, 혹은 백제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 [5]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최대 영역은 전라도 일부(대략 소백산맥까지)까지로 추정된다. 7차 교육과정의 일부 고교 국사교과서에도 반영되어 낙동강 서부의 경상도 수준으로 나타난 지도보다 많이 확장되었다. 전북 남원에서도 가야의 유적이 나왔다.. 이는 후대의 대가야가 백제가 혼란한 틈을타 차지한 것
  • [6] 이병도 교수가 처음 주장했다.
  • [7] 가야加耶사 개관 (민족) 김태식/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
  • [8] 참고로 일본어에는 조선이나 한국등의 한반도 국가를 의미하는 한자인 韓을 から로 부르는 독법이 있다. 한자의 뜻을 떠나 발음으로만 따진다면, 이를 통해 고대 일본인들이 가야와 韓을 동일시 했거나 적어도 연관이 깊은 것으로 간주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 [9] 창녕 송현동 고분군
  • [10] 수장고에 고이 모셔놓은 실물을 본 위키러로써 미인이기 보다는 그냥 복원에 충실한거 같다... 신체비율이 8등신으로 보이지 않고 그냥 키작은 여성 딱 그 사이즈로 복원되었다.(정말 정직하게 복원했다...)
  • [11] 곽재식의 소설 역적전에 서는 이에 대한 반론을 의식해서인지, 직접 가야 여전사들이 등장하지는 않고 그냥 가야에는 여자들이 배우는 검술이 생겼다더라... 하는 식으로 가능성만을 언급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 [12] 평면형태가 타원형을 띄고 있으며 이 형태는 가야지역에서만 보이고 있어 가야지역 고유의 주거형태로 보고 있다.
  • [13] 대표적으로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일본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발굴되는 일본계 유물인 파형동기(참고로 경남 FC의 엠블럼으로 쓰이고 있다.)가 발굴된 일이다. 심지어는 일본의 파형동기들보다도 훨씬 크다(…) 그래서인지 2011년 현재까지 고대 일본과 가야의 관계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다.
  • [14] 김해 금관국 중심이었던 4세기 이전의 가야들.
  • [15] 해당 지도의 참고자료 -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김태식 저서, 푸른역사, 2002. 위의 자료도 똑같다.
  • [16] 반파국 중심이었던 5세기의 가야연맹
  • [17] 어느 세력에도 치우치지 않고 독자적세력을 유지하면서 이권을 챙긴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스위스 같은 포지션...
  • [18] 대가야로써는 합천지역이 넘어가면 적이 코 앞에 들이 닥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흥망을 좌지우지 되기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신라의 경우 가야를 넘어 전라도 동남부지역의 백제지역으로 진출 할 수 있는 전진기지로 이용 할 수 있다. 백제는 가야를 정복함과 동시에 신라의 서진을 막을 수 있다.
  • [19] 원삼국 시대에는 후에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진한 소속이었으며, 신라, 가야 분화기에 가야로 넘어와 비화가야로 불리다가 6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신라로 편입된다
  • [20] 창녕박물관 뒤에 있는 교동고분군만 가도 그 위세를 짐작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정도 급의 고분이 계성고분군, 송현동고분군, 영산고분군등 구역별로 존재하고 있다.
  • [21] 흔히 아라가야(阿那加耶)로 알려졌다.
  • [22] 앞서 아라가야 멸망 후 아시촌소경이 되었다고 작성되어 있었으나, 아시촌소경이 설치된 것은 514년의 일로 아라가야가 망하기 전의 일이니 그 위치가 함안이 될 수 없다. 현재는 상주지역에 있던 아시혜현을 아시촌소경이 있던 자리로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 [23] 고고자료로 볼때 아라가야 유물과 반파국의 유물은 서로 공존하지 않는다. 역으로 소가야 토기와 창녕양식 토기등은 아라가야 토기와 공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 [24] 최근에는 원삼국시대 명칭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 된 변진안라국에서 따와 안라국으로 삼국시대는 아라가야로 나눠 그 구분하는 경향도 있다.
  • [25] 탁순의 중심고분군으로 비정하기에는 유구의 크기나 유물의 부장량이 적다. 반계동 고분군 보다는 규모와 유물 부장면에서 탁월한 창원 가음정동 고분군이 탁순의 중심고분군으로 설정 되는것이 옳다고 본다.